욥기 공부, 20151028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19장 빌닷에 대한 욥의 답변

 

4장부터 같은 주제가 반복되고 있다. 욥의 친구들이 욥을 비판, 비난하고 욥은 응수한다. 친구들이 욥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하나님이 의로운 사람에게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 벌을 주는 존재라는 사실이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1) 1-12

욥은 친구들이 자기를 괴롭히고 파괴한다고 여겼다. 물론 친구들은 욥이 교만하다고 생각했다. 이들 중에서 누가 더 진정성이 있느냐 하는 논란은 무의미하다. 그건 다 전제된다. 다 선의로 그런 주장을 한다. 세상살이에는 진정성이 서로 충돌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요즘 국정교과서 제작 논란도 그렇다. 현재 정부도 진정성이 있을 것이다. 유신헌법을 만든 법조인들도 애국심으로 그렇게 했다. 욥은 친구들이 죄를 물고 늘어지니까 내게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4)라고 말한다. 그 허물은 자기가 당한 대재난의 이유가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욥은 친구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을 다시 한다. ‘하나님이 나를 억울하게 하시고...’(6). 욥의 친구들에게 욥의 이런 말은 망발로 들렸을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로우심과 전능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런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욥이 끝까지 하나님을 붙들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하나님이 자신을 파멸로 이끌었다(7-12)고 주장한다.

 

2) 13-22

4장부터 31장까지 계속된 욥과 친구들의 논쟁은 내용이 비슷하게 전개되고 특별한 반전도 없는 탓에 읽기가 지루하다. 무죄한 이의 고난이라는 주제는 10장 이내로 다 정리될 수 있다. 독자들이 욥기를 계속 읽어낼 수 있는 동기는 죽음이라는 차원에서 욥과 정서적 일치를 느낀다는 데에 있다. 욥의 처지와 고백은 죽음에 직면한 사람의 그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신세한탄으로 떨어져서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을 수 없다. 13-22절은 우리가 곧 겪어야 할 운명이다. 모두 나를 멀리하고 떠난다. 특히 17절에, 아내도 내 숨결을 싫어하고 자식들도 가련하게 여긴다. 죽음 앞에서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을 수 있을까? 잠자듯이 아침에 일어나니 죽어 있다면 행운이겠지만, 그렇지 못한 죽음도 많다. 연명치료만은 거부하는 게 좋을 것이다. 죽음 공부가 필요하다. 모든 것을 손에서 놓는 연습, 자기 소멸을 받아들이는 연습, 하나님과의 일치에 대한 영적인 인식과 경험 등이 필요하다.

 

3) 23-29

욥은 자신의 처지와 생각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했다(23). 26절은 난해구절이다.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를 내세와 부활에 대한 진술로 보기 어렵다. 당시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욥도 내세에 대한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가 하나님에게 희망을 둔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마음(콩팥)이 타들어갈 정도로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한다(27).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은 생명의 비밀을, 또는 생명의 완성을 알고 싶다는 뜻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것을 보고 경험했지만, 아직도 그것의 비밀이 완전하게 드러날 종말을 기다려야 한다. 그런 긴장 가운데서 중간 시기를 살아가는 게 일상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