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공부, 2015527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7장 욥의 대답(2)

 

욥은 6장에서 엘리바스의 충고에 대답한 다음 7장에서, 정확하게는 77절부터 방향을 틀어 하나님께 기도한다. 기도의 내용이 불평(?)에 가깝다. 불평이라기보다는 대재앙 앞에서 자신을 심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다. 이런 태도가 그럴듯하게 자신의 처지를 합리화하는 것보다 더 옳은 기도라 할 수 있다.

 

1-6: 욥은 인간 보편의 삶에 자리한 고통과 자기의 처지를 직접적으로 묘사했다. 1절과 2절에서는 먹고 살기 위한 고통을 말한다. 일용직 노동자는 품삯에 목숨을 건다. 고대인들의 노동 상황은 말할 수 없이 열악했다. 그런 상황은 산업혁명 이후 마르크스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날도 가난한 나라에는 그런 이들이 차고 넘친다. 요즘 우리나라에도 실직으로 인해서 목숨을 끊는 일들이 벌어진다. 노인의 가난 문제가 심각하다고 한다.

이어서 4-6절에서 욥의 처지가 적나라하게 묘사되었다. 불면증에 시달리고, 피부에 구더기가 들끓고, 무의미하게 시간만 지난다. 우리교회 집사 두 분이 호스피스 활동을 한다. 죽음의 집에 머물고 있는 분들이 욥과 같은 처지가 아니겠는가.

 

7-10: 7절부터 욥의 말은 기도로 바뀐다. 자기는 이미 죽은 거나 다를 게 없다는 뜻으로 기도한다. 9절의 스올은 인간이 죽음 이후에 가게 될 미래다. 구약은 전반적으로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부활 사상이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다.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게 최선이었다.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8)에 따르면 하나님은 스올에 계시지 않는다. 듣기에 따라서 욥의 이런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겁박, 또는 투정으로 읽힐 수 있다. 절체절명에 떨어졌으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11-16: 욥은 이제 11절에서 하나님을 향해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겠다고 말한다. 지금의 상황은 체면을 차릴 겨를이 아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배운 신앙의 틀에 갇혀 있을 수도 없다. 요지는 왜 하나님이 자기를 범인을 경찰이 지키듯이 지키냐.’ 하는 것이다.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다는 사실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13-15절에 나오는 잠자리와 꿈과 환상 이야기는 엘리바스가 말한 환상 이야기(4:13 이하)의 패러디다. 엘리바스는 환상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엄을 말한 반면에 욥은 고통으로 인해서 숨이 막히고 죽는 것이 좋겠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결국 욥은 16절에서 생명을 싫어하고 ...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않으니...’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한다. ‘나를 놓으소서.’라는 말은 죽이라는 뜻이다.

 

17-21: ‘사람이 무엇이기에 ... ’라는 17절은 시편 8:4절과 똑같다. 시편은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지만, 욥은 인간 운명에 대한 냉소에 가깝다. 다시 욥은 하나님의 압박감을 토로한다.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시기를...’ 고대한다. 20절에서 자기 논리를 편다. 친구들은 죄로 인해서 재앙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죄가 당신에게 무슨 해가 되냐고 따져 묻는다. ‘내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는 21절도 9절의 스올 이야기와 같다. 무신론자의 항변처럼 들린다. 이런 상황을 뛰어넘어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