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공부(포항 와이, 2008년 1월21일)

개념잡기의 중요성
개념이라는 말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하나님도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개념을 이해한다 것입니다. 개념, 컨셉이죠. 이건 이제 자칫하면 엉뚱한 이야기처럼 비치기 쉬운데요. 그러한 하나님은 실증적인 대상이 아닙니다. 실증적이다 포지티브하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그림 그리듯이 확실하다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이 불확실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기본적으로는 우리 사람들의 인식의 한계, 인식의 한계가 전제되는 거예요. 우리는 어떤 것들을 확증적으로 알 수 없도록 운명 지어져 살고 있습니다. 그 말이 여러분들이 아마 와 닿는 분도 있고 와 닿지 않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뭘 그렇게 이야기하냐? 우리가 얼마나 확실하게 살고 있는데. 도대체 여러분들이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얼마나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가 종이 한 장만 이 앞에 가려도 보이지 않습니다. 안경을 다른 색깔로 끼면 세상이 다른 색깔로 보이기도 하구요. 이런 것만 아니라 이 세상 자체가 굉장히 다층적입니다. 중층적인 겁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알았잖아요. 아는 순간에 그 다음 모르는 부분이 나오게 됩니다. 이게 너무 추상적인 표현 같은데 여기에 덕송선생님, 자연과학 하시는 분이 계신데 자연과학도 사실은 그럴 겁니다. 제가 과학자도 아닌데 그런말하는게 송구스럽습니다만 어떤 자연과학 ,물리가 있잖아요. 어떤 것이 나오면 또 다른 것이 나오고 끝이 없어요. 거기에 인식의 근본적인 한계. 제가 지난 어저께 저녁에 목요일 저녁 동영상 다비아 강의에서 동영상하신 분들에게 한 이야기 비유와 비슷하군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이야기했습니다. 동굴 속에 계속 있던 사람들은 동굴 밖을 이해를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 우연하게 동굴 밖에 나갔다 온 사람이 밖에 나비도 있더라. 색깔이 있더라. 동굴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해도 동굴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예요. 시각장애자들에게 색깔에 대해 설명을 해보십시오. 그냥 설명들어서 그냥 그런가보다 생각을 할지는 모르지만 소리도 마찬가지예요.  이런 모든 것들의 근본적인 인식의 한계를 우리가 갖고 있다는 게 하나님을 실증적으로 말할 수 없는 하나의 조건이구요. 그 애기는 그만 하겠습니다. 본문을 더 들어가야 되니까요.

한마디만 더 붙인다면 하나님은 여러분들은 늘 무소부재하고 전지전능하고 그러한 표현으로 많이 알고 있지 않습니까?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인지 아세요. 하나님은 전적인 사랑이고 정의롭고 하는 하나님에 대한 정의들이 있잖아요. 그러한 것들이 얼마나 확실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한 방식으로 신학자들이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는지에 대해서 아마 여러분들이 조금 더 생각을 하셔야 할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그러한 방식으로 이야기하지만 우리가 다른 언어는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뿐이지 그것이 곧 하나님 자체는 아닙니다. 전지전능하다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냥 낱말 뜻으로만 한다면야 대충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을 보면 하나님은 그렇게 전능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거든요.  불의한 세계, 무지한 자의 고난, 운명, 시련, 그런 것들을 어떻게 하나님의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창조물이라고 과감히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 말은 틀린 것은 아니에요.

제 이야기가 좀 옆으로 갔습니다만. 하나님을, 제가 여러분들에게 갈라디아서 공부를 지도를 하면서 해야 될 일이 갈라디아서에 있는 것 속속들이 정보를 알려 주는 것은 크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거는 여러분들이 집에서 몇 번 읽으면 나오는 것, 조금 더 공부할 사람들은 주석집을 보십시오. 충분합니다. 저는 다만 이 갈라디아서라는 창을 통해서 기독교가 뭐냐는 것에 대한 윤곽들, 개념들을 여러분에게 조금씩 설명하려고 하는 겁니다.

여기에 이러한 물리학하고 연관될 겁니다. 보통 분자 있죠. 탄소 C라고 하는 것 있죠. 하나를 잘 우리가 뚫어 보면 거기에 모든 세계의 원리가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갈라디아서를 차근차근히 잘 공부하면 갈라디아서만 아니라 다 연관되는거예요. 갈라디아서라고 하는 요 문서안에, 그리 길지 않아요. 6장까지 있나요. 짧는 문서안에 초기 기독교 안에 100년도 채 안 되는 55-56년이니까요. 초기 예수님 부활 승천하시고 한 2,30년 동안에 벌어졌던 굉장히 복잡한 사건들, 그것이 기독교의 뿌리인데요. 그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문제는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냥 변죽을 울린다고 할까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에 있습니다.

오늘 11절 부터 24절까지 입니다. 일단 본문을 읽어보도록 할까요? 오늘도 우리는 이렇게 읽겠습니다. 앞 절은 여성분들, 뒷 절은 남성분들 읽겠습니다. 지난주에 보니까 여성분이 딱 세분이었는데, 집사람 빼고 둘이었었는데, 오늘은 저희 집사람이 안왔는데도 들어있네요. 집사람하고 가다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포항이 좀 이상하다. 성경공부하면 보통 아줌마들이 많은데 포항에는 여자들보다 남자들이 많다. 그런데 오늘은 여자분들이 많이 오셨군요. 다행입니다. 균형이 좀 맞을 것 같습니다. 여성분들부터 내용을 생각하면서 11절을 읽으십시오.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18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20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21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2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23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24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갈 1:11-24) 아멘

여러분들은 이러한 말씀을 읽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다 전제하죠. 옳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잘 아시리라고 보는데 바울이 이 편지를 쓰면서 내가 성경을 쓴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주 단순한 마음으로, 아주 일반적인 생각으로 갈라디아 교회에 있는 문제에 대한 조언을 주기 위하여, 그리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자기가 가르친 복음이 왜곡 변질되는 것을 막아보기 위한 하나의 몸부림으로 이 편지를 썼습니다. 신학논쟁 논문과 같습니다. 그는 이것이 차후에 초기 교회안에서 거룩한 문서로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그리고 결국 4세기 후반에 기독교의 경전, 캐논이라고 하죠. 캐논으로 결정되리라고 하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아주 단순한 생각으로 쓴 것이 이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대단히 놀라운 그러한 문서로 고양된다고 할까요?

여러분들이 이러한 말씀을 읽을 때에 일단 바울이 어떤 생각으로 이 문서를 썼는지를 잘, 편안하게 그렇게 보셔야 할 것입니다. 제가 왜 잔소리 같은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일반적으로 많은 신자들이 자꾸 은혜를 받아야 하는 거예요. 성경을 읽으며 은혜를 받으려고 생각이 너무 강하여 문서가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지 못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성경공부입니다. 그걸 어떻게 극복하느냐? 이 문서 자체가 말을 걸거든요. 표현 이해하시겠죠. 문서가, 다른 그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램브란트의 그림들이 청중들에게 독자들에게 감상하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요. 그 말을 꾸준하게 생명의 깊이에서 거는 작품들을 가르쳐서 우리는 고전이라고 합니다. 문헌도 그렇고 시도 그렇고 문학작품도 그렇고 성서도 다 마찬가지인거예요. 말을 거는데 우리도 또 말을 걸을 수 있어야 되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은혜를 받아야 하는 생각이 앞서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보자는 거죠.

오늘 제목이 박해자에서 선포자로 되어 있습니다. 이 제목만 보고도 아 오늘 어떤 이야기가 될 것인가 감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감을 잡지 못하신 분들은 교회 나온지 얼마 안됐다거나 교회를 다녔어도 그냥 왔다갔다 성경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는 분들이라고 할 수 있겠죠. 바울이 처음에 기독교를 박해하다가 회심하고 구체적으로 다마스쿠스로 가는 중에 회심하였다고 하는데 그건 그렇게 확실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거는 우리가 지금 다 따질 수는 없습니다. 사도행전이 이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만 사도행전은 어떤 객관적 사실을 신문보도 하듯이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역사가 지난 다음에 바울을 변호하기 위해서 일종의 변증서로 쓴 것이기 때문에 사도행전에 있는 것들을 근거로 해서 바울의 객관적인 연대기를 저술 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그것은 그렇다구 하구요.

바울이 초기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다가 나중에 오히려 선포하게 된 것으로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 말은 틀리지 않았는데요. 그러나 그 말을 단순히 이해한다면 초기 기독교안에 일어난 일들을 아주 정확하게 아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질문해 보십시오. 제가 그 강의안에도 썼습니다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그 부분입니다. 바울의 변화가 과연 개종이라고 할 수 있을까하는 겁니다. 초기 기독교는 그것이 굉장히 미묘했습니다. 그것을 거친 그림으로 그려놓아서 그 안의 어떤 것을 따라가기가 힘이 듭니다. 그가 과연 유대교로부터 기독교로 개종했을까요? 신학 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바울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굉장히 복잡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마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유대교하고 기독교 사이에 차이가 없었다는 것을 전제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꾸만 기독교가 유대교로 부터 떨어져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기독교도 그렇고 그 당시 유대교로서도 그렇고 그 단계가 있는 것이죠. 나사렛파, 예수를 추종하는 파를 서로가 대적하지 않았다, 그렇게 본다면 바울은 유대기독교적인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회심이라는 것이 유대교로부터 기독교로의 완전한 변화다 개종이라고 라고 말하는 것은 보면 좀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바울은 그러한 과도기적인 그.. 과도기죠. 거기서 점차로 유대-기독교, 두 단어 연결한 것을 꼭 기억해 주십시오. Judaic Christianity 이라고 하죠, 유대-기독교를 같이 안고 있는, 유대교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밖으로 나올 수도 있는, 그러한 그 과도기가 기독교안에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만약에 그때 유대교라고 하는 무게가 조금더 무거웠다면 오늘 역사안에 있는 기독교는 거기서 나오지 못했구요. 그러나 결과적으로 유대교적 기독교에서 기독교가 강해지고, 이것은 바울의 영향입니다만, 기독교의 특성이 더 강해져서 역사안에 유대교와 근본적으로 지평을 달리하는 역사 안에 새로운 종교가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굉장히 과도기적인 그때에 벌여졌던 사도 바울의 어떤 큰 깨우침이 있었던 거예요. 그걸 과연 유대교로부터 기독교로의 개종이라고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할 거리가 많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 이 자리에서 거기에 대한 결정적인 대답을 드릴 위치도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그런 정도로 우리가 정리를 하고 더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인제 이러한 갈라디아서를 읽으면서 한 번 더 정리를 하는 게 필요한 것은 갈라디아서가 바울이 쓴 편지가 자기에게 벌어진 일들을 그 당시로 쓴 것이 아니라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 썼다고 하는 겁니다. 지난 다음에 쓰게 되면 결국은 거기에는 어떤 것은 들어가게 되기도 하고 어떤 것은 빠지게 되기도 하는 겁니다. 만약에 제가 나이가 더 많이 들어서 나의 살아온 이력을 어디에다 글을 쓰는 기회가 있다고 한다면, 이 포항와이엠에서 와서 한 인문학적 성서읽기, 이거를 써야 될까요? 말아야 될까요? 이걸 쓰게 되면 얼마나 자세하게 써야 될까요? 저한테 전화를 걸었던 간사들 이름을 다 써야 될까요? 아니면 누가 왔다 갔다 이렇게 써야 될까요? 그건 내가 글을 쓸 때의 상황에 대해서 달라지는 겁니다. 바울도 그러한 식으로 쓰게 된 겁니다. 회심하게 된 내용을 어느 부분에서는 좀 자세하게 쓰기도 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휙 지나가기도 하고 내용들이 다 그렇습니다. 그런 것을 전제하고 천천히 갈라디아서를 읽어야죠. 그렇기 때문에 네. 갈라디아서만 아니라 다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만은 해석학적 훈련이 필요하다.  

서론적이었구요. 오늘 정작 중요한 것은 다음에 나오는 첫 항목, 사람의 뜻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제가 전기 난로를 좀 끄겠습니다.) 갈라디아서를 바울이 써야 될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지난 두 주간에 걸쳐서 말씀을 드렸었는데 기억하실 것으로 보고, 혹시 처음 나오신 분들을 위해서라도 한마디만 짚으면 이렇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파송한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 부정되고, 또 변질되고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지역에 어떤 교회들이거든요. 한 두 교회가 아닙니다. 이쪽에 와서 제가 이렇게 공부를 하잖아요. 그런데 몇 달 뒤에 다른 분이 와서 정목사가 이야기한 것 잘못 된거야.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러니까 바울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이건 당신들에게 와서 당신들의 마음을 유혹하고 있는 거는 다른 복음이다. 그러한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이 강조하는 핵심은 토라와 할례 두개 였거든요. 이게 지금 보면 별것 아닌 것 갖고 그러네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바울에게는 이것이 아주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다른 복음, 복음의 차이, 그거는 앞으로 우리가 가면서 더 많이 이야기하게 되겠습니다.  그거만 문제가 아니라 그것과 더불어서 따라오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도전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사도급에 속한 사람들,  반 바울파 사람들, 유대 기독교적이긴 한데. 그러니까 크게 보면 세 파입니다. 반 바울파, 거의 유대교에 무게를 두는 사람들, 유대 기독교적 중간층, 바울이 나중에 이방인 기독교가 되니까 이 세 파가 각축을 벌이는 거예요. 힘겨루기를 사실 하는 겁니다. 그 와중에서 아주 초기 단계에서 바울이 자기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의 주장이 복음의 내용을 둘째치고 이렇게 비난하는 겁니다. 바울, 뭐 사도도 아니고 말이지. 예수님 생전에 만나지도 못했고 말이지. 별거 아니다. 우리와 상관없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와도 상관없고 사도적인 권위도 없다. 왜 그 사람의 말을 당신이 들어야 되느냐? 이런 쪽의 이야기를 한 거죠. 사도권의 문제 때문에 그러니까 크게 보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복음의 변질, 토라와 할례를 지키라는 그러한 문제와, 또 하나는 사도권에 대한 호칭에 대한 이 두 문제를 바울이 풀어야 했습니다.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볼 때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사도바울에게는 약점이 많이 있어 보였을 겁니다. 예수님하고도 만나지 못했고 기독교를 박해하기도 했고, 끊어서 이야기한다면 복음을 전파할 자격이 없다. 목사 안수 받지 않았다. 쉽게 예를 들자면, 쉽게 비교하자면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 앞에서 바울은 복음의 내용을 접어두고 시시비비를 먼저가립니다. 일단 사도적 권위가 확보되지 않으면 자기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것이 힘들거든요. 그 부분을 이야기합니다.

예루살렘 지도자들에 대한 별표시(강의 및 첨부된 화일에 있습니다.), 그것은 나중에 여러분들이 집에 가서 읽어 보십시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 종교에 대한 이야기들을 조금 정리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 교회와 바울이 부단하게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도 했구요. 타협도 했구요. 그러나 결국 예루살렘 교회하고는 사이가 좋지 않게 됩니다. 예루살렘 교회에는 여러사람들이 있었어요. 바울은 인정하는 사람도 있었고 바울 하면 이를 가는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종교회의 결과를 보면 바울이 승리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실패한 것처럼 보였던 반바울파가 바울을 뒤 따라다니면서 힘들게 합니다. 결국 예루살렘교회와 바울과는 좁혀지지 않죠. 완전히 다른 쪽으로 가게 되요. 역사적으로는 예루살렘교회가 결국 망하게 되고 바울이 역사적 교회의 선봉주가 되는 겁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은 자기의 복음을 12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이제 이해가 되시겠죠. 그냥 읽으시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뭐냐? 뭔가? 세속적인 거구나. 세속적인 것보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복음이다. 혹시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그건 잘못된겁니다. 여기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예루살렘 지도자를 가르킵니다. 다 같은 복음안에 있었다구요. 그러나 다른 복음이었죠. 자기의 사도적 권위를 무시하는 예루살렘 지도자들, 모두는 아니더라 하더라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로부터, 나는 그들로 부터 복음을 받은 것이 아니다. 이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주장이 어떻게 보면 바울이 배수진을 친 것이 아닌가 느낌이 들기도 해요. 생각해 보십시오. 예루살렘 지도자들(제가 잠간 요렇게 일어나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제가 말하면서 졸려서 그렇습니다.) 네. 바울이 예루살렘교회와 상관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거는 자칫하면 상당히 위험한 거죠. 만약에 바울의 권위가 그렇게 해서 갈라디아교회에게 어필을 한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 당시 모든 종교적 권위가 예루살렘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상관없다고 말하는 것은 '도 아니면 모다'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하지 말고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와 가깝다 서로 토론도 했다 하면 어느 정도 중간은 되지 않겠습니까? 아니다. 그들과 아무 상관없다. 전혀 나는 다른 쪽으로 복음과 계시를 받았다. 일종의 배수진입니다. 그게 통하면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바울은 모든 권위를 상실하게 됩니다. 바울이 왜 이런 말을 했는지? 터무니 없는 말을 하지 않았을 텐데요.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인간 예수가 분명 있지 않겠습니까? 그에게 일어났던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공생애 일어났던 많은 일, 그의 가르침, 치유, 사건 결정적으로 말하면 십자가 더 결정적으로는 부활, 이 전체를 우리는 예수 사건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거는 하나님 나라의 사건. 이것이 예수의 사건이고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사건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하나님 나라와 예수가 동일시 되는거죠.  예수님은 처음 활동할 때부터 그러시고 계속 그러신 것인데 하나님의 나라, 바실레이야. 여기에 전적으로 그것만 선포하셨고 하나님 나라에 근거해서 사람들에게 사죄를 선포하고 그렇게 사셨습니다. 옆으로 이야기 줄이고. 어쨌든 전체적인 맥락에서 예수 사건이라고 이야기하는 겁입니다. 역사적 실존 인물로서 예수도 중요하고 그 예수에게서 일어났던 사건, 하나님 나라의 사건 이거도 같이 중요합니다. 이 두개는 뗄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분은 되나 뗄 수는 없는 어떠한 힘들이 거기에 개입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실증적인 단계,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 거기에 머물러서도 문제고 그런 것없이 역사적 예수에 치우쳐도 문제입니다.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이런 사건이 사도를 통해서 내려 왔구요.  그 다음에 속사도로 이어지고 이렇게 쭈욱 내려왔습니다. 교회의 역사 신앙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핵심적으로 사도들이 아주 중요하거든요. 교회의 본질을 이야기를 할 때 그중 하나가 사도성입니다. 네가지 특성중에 하나가 사도성. 기왕 말이 나왔으니 설명을 하고 지나가죠. 교회의 특성이 사도성, 단일성, 거룩성 마지막 한 가지 혹시 아시는 분이 있어요? 네 번째 보편성입니다. 이 네 가지 교회의 본질과 특성을 설명하려면 또 시간이 많이 필요하니까 다른 것은 접어 두구요. 사도성, 하나만 간추려서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예수님은 사도들을 통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도들에 의해서 고백된 예수를 우리가 알고 따르고 있는 거지 그것을 넘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직접 만난 것은 아니거든요. 사도성, 그런 면에서 사도는 아주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그런 정서하고는 조금은 벗어나는, 조금이 아닌 예루살렘의 사도들과는 그들에게서 배운 것이 하나도 없다. 예외적인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는 거죠.  바울이 말하고 있는 그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사도적 전통으로 부터 관계가 없는 것인가?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앞서 이야기했듯이 사도적인 전승관계에 있어야 하는데 바울이 거기서 벗어난다고 하는 것은 그가 말하는 복음의 근거가 없는 게 아닌 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이런 생각도 가능한 것이죠. 지금 우리가 말하는 사도라고 하는 것은 너무 고정관념이 있어서 그렇,지 열 두 사도 이거만 아니라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사도권의 경쟁관계에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게 사실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강의안을 좀 읽어 보겠습니다. 3쪽의 중간에 있습니다. 계시에 대한 문제, 바울이 사도라고 주장하는 그 계시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중에 환상을 경험했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는 다른 사람이 못 보는 빛을 보았고, 못 들은 소리를 들었다. 빛과 소리를 누가 보고 못 보았는지, 누가 듣고 누가 못 들었는지는 사도행전의 진술에 약간씩 차이가 난다. 사도행전에 몇 번 나오거든요. 나올 때 조금씩 틀려요. 이런 글쓰기의 착오는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도 이런 전승의 내막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 것일 수도 있고, 이런 신비 현상보다는 바울의 신적 경험을 강조한 데 따른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지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계시를 이런 특별한 환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게 하나구요. 다메섹 도상에서의 경험. 하나이구요.

두 번째는 부활입니다. 부활 장으로 일컬어지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부활의 주님에 대한 경험을 일목요연하게 진술한다. 부활의 주님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게 차례대로 나타나셨다. 게바, 열두 제자, 오백여 형제, 야고보, 모든 사도, 마지막으로 바울 자신(고전 15:5-8)이 그 대상이다. 이런 정보, 여기서 말한 정보는 목록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는 목록, 여기만 나오거든요- 이걸 바울이 어디서 얻었는지는 우리가 확인할 길이 없다. 이런 정보가 이미 초기 기독교 안에 잘 알려져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정보가 다른 서신에는 언급되지 않았다고 하는 걸 보면 이것은 바울의 특별한 진술일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지 바울은 자신도 부활의 주님을 경험했다는 사실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마스쿠스 도상의 환상에 대한 사도행전의 진술과 부활 경험에 대한 고린도전서의 진술 그 내용이 동일한 것이라는 말인가? 그리고 그것은 다시 오늘 본문인 갈라디아서 1:12절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말하는 것일까? 세군데 나오는 이런 것들이 다른 것일까요? 같은 것일까요? 좀 다르게 보이기도 하는데 똑 같냐 어떻냐 질문하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이 진술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생각해보자. 계시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뭘까요? 생각해 보세요. 그냥 쉽게 생각해 보세요. 요즘에도 교회에서 계시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던가요? 있나요? 계시, 이것도 조직신학의 한 파트입니다. 이것도 몇 시간 공부해야 할 내용인데요. 도대체 바울의 그 계시 경험이라는 게 뭘까요? 바울이 한 게 뭘까 생각해 보세요. 별로 생각해 보지 않으시죠? 그냥 목사님이 이야기해주면 대충 그렇게 알아듣는데 스스로 생각해야 됩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어떤 특별한 환상을 말하는 것만은 분명하지만, 여기서 좀 조심스럽게 들어가야 합니다. 환상같기도 한데요. 그렇다고 해서 그 경험이 말과 문자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환상을 말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말과 문제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무슨 말일까요? 여러분들을 자꾸만 골치 아프게 만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계시 받았다고 믿으면 되지 뭘 그걸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자꾸 따지는가? 생각할 수도 있는데요. 성서텍스트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영적인 리얼리티는 담고 있습니다. 저는 그 안으로 자꾸 들어가 보자. 정글을 탐험하듯, 숲속을 바깥에서 바라보면 안을 알 수 없잖아요. 들어가 보자는 겁니다.

말과 문자. 전승이예요, 말과 문자는 물론 구약성서와 초기 기독교의 전승을 가리킨다. 바울이 무슨 기회를 통해서든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를 충분히 접했을 겁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살아 계실 때 바울을 만났다고 하는 증거는 없는데 그러한 소문을 들었을수도 있고 그렇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초기 기독교,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지 그 즉시 얼마 되지 않아서 나사렛 신앙공동체에 관한 정보를 접했을 겁니다. 처음에 그는 예수를 추종하는 이들을 유대교와 대립하는 이들로 생각하고 박해했다. 그런 과정에서 어느 순간엔가 그는 예수 사건에 대한 전혀 새로운 인식을, 또는 그런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에게 십자가와 부활이 전혀 새로운 구원의 길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흡사 어거스틴이 어느 날 낮잠을 자다 문득 일어나 보니 “들고 읽어라.”는 바깥에서 아이의 외침을 듣고 성경을 펼쳐서 말씀을 읽은 뒤에 크게 깨우쳤다고 하는 것처럼, 요한 웨슬리가 올더스게이트에서 모라비안 교도들이 루터의 로마서주석 서문을 읽은 걸 어깨너머로 듣다가 크게 회심한 것처럼 바울에게도 그러한 경험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게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는 바울은 자세하게 말하지 않지만 그런 개연성이 없는 건 아니다. 환상을 보았다고 자꾸만 그쪽으로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과 문자의 기독교 전승들, 문서들, 구약성서에 있는 이러한 것들, 초기 기독교안에서 서로 말 되어 지는 것들, 저희가 이해하고 그 안에서 예수그리스도를 새롭게 깨달은 것을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아직 시원하지 않죠.

다시 조금 더 보죠. 만약 바울의 계시 경험을 부활하신 분, 여러분들이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믿습니다만 그렇게 본다면 틀리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하다보면 우리가 논리적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부활의 주님을 경험한 이들의 목록에 따르면 바울은 가장 늦게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 경험이 예수의 승천 이후인가요, 이전인가요? 부활의 주님을 언제 만난 걸까요? 이후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승천했다가 바울을 만나기 위해서 다시 지상으로 내려와야 했으며, 그러지는 않으셨겠지요. 이전이라고 한다면 사도 바울이 초기 기독교를 박해할 이유가 없습니다.

조금 더 근본적으로 이야기하면 오늘도 부활의 주님이 직접적으로 현현하신다는 말이 가능한가? 이런 질문이 어쨌든 가능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이 바울이 그리스도의 계시로 복음을 얻었다는 말의 실체적 진실이 뭐냐 생각해 보자는 뜻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데 묶어서 말씀을 드리는 중입니다. 한마디로 끊어서 말할 수 없는 더 심층적인 세계를 담고 있기 때문이어서 그렇습니다. 고대 문서들은 그런 것들을 상세히 이야기하지 않고 압축적으로 하거나 상징적으로 하거나 문학적 수사를 통해서 하기 때문에 바울의 고유한 신앙적 경험이 무엇인지 딱 집어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내가 무엇을 좀 얻었다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갑자기 부활한 모습을 확 봐서 주님과 대화해서 뭔가를 얻어 들었다 그렇게만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얼마나 이해하겠어요. 바울이 이전에 상당히 많은 공부가 된 사람입니다.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최고의 유대교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구요. 태어나면서부터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석학이니까 로마법에서도 통과 되었구요. 그렇다면 당연히 헬라 신화에 대해, 영지주의에 대해 공부를 많이 했었구요. 그 모든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는데 토양입니다.

여기 횔덜린의 시(詩) 한편이 놓여 있다고 하자. 시를 갖고 오려다가 시간이 없어서 못 찾았습니다. 시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한 고유한 언어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 언어는 그 시인의 고유한 세계를 담아내거든요. 오늘 이 시를 읽는 사람은 횔덜린의 고유한 세계경험을 해석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 시에서 어떤 생물학적이고 사회학적인 사실들을 끌어내려고 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요 대목을 좀 정리해야 되겠습니다. 바울은 지금 예루살렘에서 올라온 반 바울파 지도자들에게서 자신의 전한 복음이 훼손될 위기에 있구요. 또 사도적 권위가 근본적으로 손상당할 위기에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도 못하다는 사실을 강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또 사실이기도 하구요. 그는 누구나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사도권을 배타적으로 확보한 사람은 없었구요. 서로 각축관계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지금 예루살렘에서 올라온 반(反)바울 지도자들에 의해서 자신이 전한 복음이 훼손되는 위기에, 더구나 사도적 권위가 근본적으로 손상당할 위기에 놓여 있다. 그는 자신이 그들보다 못할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기도 하다. 그 당시에는 누구나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사도권을 배타적으로 확보한 이들은 없었다. 신약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사도 개념은 그렇게 확실한 게 아니다. 사도 개념은 두 개의 기원이 있다. 하나는 시리아의 영지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유대교가 그것이다. 말하자면 초기 기독교에서 사도 권위가 각축을 벌였다는 뜻이다. 사도권이 결정되어서 온 것이라니라 누가 더 그리스도의 복음을 복음답게 전하느냐에 따라서 그것마저도 달라질 수 있는 상황에 있었다. 그러한 논란, 논쟁, 격론 그러한 흔적들이 우리가 읽은 갈라디아서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부분들이 바로 그런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자기의 사도적 권위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짚은 다음에 바울은 자기가 어떻게 변화된 가운데 지나온 것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삼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바울의 연대기는 사도행전하고 갈라디아서하고 좀 다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주로 사도행전이거든요. 그래서 다마스쿠스로 가다가 주님을 만나고 들어가서 아나니야로부터 뭐를 듣고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고 도망쳐서 예루살렘으로 갔다 뭐 이러한 이야긴데요. 갈라디아서는 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네. 그 이야기가 재미있는 게요. 자기가 부르심, 소명이지요 일종의. 소명을 받은 다음에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부정법으로 그렇게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  또 먼저 사도된 자를 만나러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다. 앞에서부터 계속 일관된 바울의 주장입니다. 나는 사람의 차원에서 복음을 전하거나 배운 게 아니다. 그러니까 소명을 받은 다음에도 사도들과 의논할 필요도 없고 혈육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일반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그리고 굳이 예루살렘에게 가서 지도자들에게서 도장을 받을, 자격증을 받을 필요도 없어서 안 갔습니다. 요러한 표현들은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사도의 권위는 예루살렘에서 나온다 그렇게 세뇌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잖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그런 예루살렘 사람들에게서 사도적 권위를 인정받으려고 한적이 한번도 없다. 대신 어디로 갑니까? 아라비아로 갔다가 그다음에 다시 다마스쿠스로 들어갑니다. 아라비아에는 그 당시 고도로 발달된 도시들이 몇몇 있었다고 합니다.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학교도 있었구요. 그런데 그렇다고 한다면 아라비아에 복음을 증거라러 갔을까요? 아니면 자신의 소명경험을 좀 성취하기 위해 갔을까요? 사도행전 9장에 따르면 바울은 회심으로 인해 즉시 다마스쿠스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예루살렘에 올라갑니다. 차이가 나는 거구요. 바울은 3년 만에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고 하죠. 다마스쿠스에서 아라비아로 갔다가 3년 있다가, 천천히 일부러 시간을 늦추는 것 같이 천천히 게바를 만나기 위해 갔습니다. 가서 15일 동안 머물러 있으면서 다른 사람을 전혀 만나지 않고 게바를 만났군요. 야고보만 만났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에 사적인 방문이지 공식적으로 예루살렘 지도자들을 만나러 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3년을 아라비아에서 체류한 기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모세의 미디안 광야, 바울의 아라비아 3년, 선지동산에서의 신학교에서의 3년, 요 계산은 오늘 여기 있는 본문에서 보더라도 잘못된거죠. 여기서 3년은 다마스쿠스로 돌아간 뒤의 시간을 말합니다. 참고적으로 바울은 소명이후에 영적훈련을 거칠 필요가 없었어요. 이미 다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미 기독교 신앙을 잘 알고 있었던 입니다. 물론 박해자였던 것은 입장의 차이였지 근본적으로 반 기독교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아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제사장에게 증서를 받아가지고 다마스쿠스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갔다고 하잖아요. 그것은 다른 사실을 말하기위한 누가의 편집이라고 보면 옳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처음부터 준비가 된 사람인 거죠. 그러니까 그렇게 천천히, 굳이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의 인정을 받을 필요도 없이 천천히 천천히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의 마지막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소명 이후 삼년 동안 바울은 어디서 무엇을 했나? 무엇을 했을까요? 이것에 대해서는 갈라디아서는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이 주제는 신학 석사 논문으로 충분합니다.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논의할만한 여유가 없다. 다만 우리의 전체 주제와 연관해서 하나의 관점만 제시하면 충분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이 3년은 자신의 입장과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입장 차이에 대한 암시가 아닐는지.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100% 정확하다는 것은 말씀은 아닙니다. 그렇게 해석해보자는 겁니다. 바울이 그걸 의식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갈라디아서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그런 추론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만약에 바울이 예루살렘 지도자들로부터 권위를 인정받아야 된다고 생각했다면 이렇게 오랜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아라비아 체류까지 포함하면 3년도 훨씬 넘는 기간 동안 예루살렘 방문을 늦춘 것입니다. 이는 예수의 동생이 권위와는 상관없이 곧 예루살렘과 상관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부터 복음을 전달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간접적인, 혹은 암시적인 진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겨우 십오일을 머문 뒤에, 잠시 머문 뒤에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떠납니다.(21절) 요런 지명들 익숙하시나요. 잘 아시나요. 평소에. 수리아, 지금 시리아 지방입니다. 수리아는 안디옥교회의 남쪽 지역입니다, 이스라엘 북쪽에서 시작해서 안디옥까지의 지역이며, 길리기아는 안디옥으로부터 서쪽 지역을 이야기합니다. 그 중간지역에 바울의 고향인 다소가 있습니다. 당시 기독교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점점 바울은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거죠. 15일간 잠시 머물렀다가 사적으로 예수님 동생 만나고 제자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게바를 잠간 만나고 급하게 시리아로 떠납니다. 결국 22절에서 바울이 말하듯이 유대 지역의 교회에는 바울이 알려질 수 있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거리를 두는 거예요. 이 유대 지역의 교회에는 당연히 예루살렘 교회가 포함되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유대는 남유대를 말합니다. 거기를 떠나 북서쪽으로 가버렸으니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과 접촉할 길이 없어졌습니다. 그 교회들의 신학적 특징은 유대-기독교적이면서 동시에 반(反)바울적이었습니다. 이것이 처음부터 칼로 무를 자르듯이 끊어진 것은 아니고 흐름이 있었고 점점 더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더 강화되었습니다.  그것은 대충 여러분듸 머리 속에 그림이 그려지죠? 바울과 예루살렘교회의 관계가 멀어지게 된것입니다. 바울이 원래 유명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더욱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지리적으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련의 진행에서 본다면 바울은 유대 지역의 중심 교회와는 신앙적 왕래가 거의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 교회들이 자신을 ‘얼굴로’ 알지 못한다고 했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배경을 깔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주제를 떼어다가 설교 제목을 ‘얼굴로’ 해놓고 여러 가지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거든요? 가까운 사람과 먼 사람, 예를 들자면 가까운 사람들을 조심해라. 덕담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텍스트를 왜곡하게 되는거죠. 이런 작은 표현에서도 개념을 알고 성서를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겁니다. 시인들이 단어하나 토시하나를 그냥 쓰는 것이 아니잖아요. 어떤 뉘앙스가 있는거구요. 굉장히 세련되고 고급스런 텍스트가 성서입니다.

마지막 패러그래프입니다. 비록 유대-기독교가 바울과 신앙적 친교가 별로 없었다고 하더라도 바울로 인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고 합니다.(24절) 이게 사실인지 아니면 역설적 표현인지 정확하게 제가  알 수는 없습니다. 아마 유대-기독교 지도자들 중에서 일부가,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들이 바울의 이방인 선교를 지지했다고 하는 점에서 이 말은 사실일 수도 있고, 일부가 극단적으로 배척했다고 하는 점에서 역설적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파라고 하더라도 한 색깔을 내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정치적으로도 스펙트럼이 넓잖아요. 한나라당만 하더라도 진보적인 사람도 있고 보수적인 사람도 있고 물론 당에따라 어떤 흐름이 있습니다만, 신앙에서도 마찬가지로 그 안에서도 조금차이가 나는데요. 바울을 인정하는 사람도 있었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것에 따라서 어쨌든 서로 입장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모든 일 합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doxology)는 것, 송영입니다. 독솔로지. 영광을 돌린다는 것 헬라어 독사에서 나왔어요. 독솔로지 라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제가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렇게 크고 작은 차이도 말하고 마음 아픈 것도 많았고 왜 같은 예수를 믿으면서 저러는가 그런 것도 많았지만 서로가 안타까운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우리가 최선으로 산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기구한 역사의 파노라마를 거쳐서 천천히 천천히 자기만의 새로운 자기만의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합니다. 네 고맙습니다. 차 한 잔 드시고 질문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