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 해설 제2강 (080905) - 머리말(2)

판넨베르크 사도행전해설 두 번째 시간입니다. 두번째 시간입니다. 두번째 인데 앞으로 이렇게 숫자를 기억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강의안에다 숫자를 카운트하면서 좀 해보기는 하겠는데 모르겠습니다. 숫자가 열댓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숫자가 나갈것 같아서 숫자를 기억할 수 있을 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처음 강의이기 때문에 제가 몇번째 강의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 같아요.

지난 번에 토요일에는 저녁 6시 되기 전에 한시간 녹화를 했어요. 기억하시겠습니다만 가정예배가기전에 조금했는데 오늘은 다른 일이 조금있어서 낮에요. 하나도 못하고 지금 7시 25분입니다. 30분 가까이 되어가는군요. 그래서 이 서재 바깥에 내다 보이는, 숲은 보이지 않구요. 멀리, 커튼을 옆으로 보면 멀리 하양쪽에 불빛이 주로 아파트 불빛 그런 것들만 보입다. 지금 제가 강의하기 위해서 전화기 꺼놓았구요. 핸드폰이 어디있는지 몰라서 끄지 않았습니다. 바라기는 전화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두번째 시간입니다. 지난번 첫번째 시간에 다른 이런 저런 이야기감가 많아서 머리말 첫 번째 패러그래프만 마치지 못가고 마지막 세 가지 중요한 요소 그런 것만 제시만하고 그 설명을 그 다음시간에 하겠다고 말씀드렸어요. 제가 지금 그 책은 가지고 있지 않구요. 복사, 프린트해서 가져왔습니다. 제 책을 지난번 월요일 안동에 있는 경안 대학원신학교인가요. 하여튼 대학원 제도로 나가는 신학교 강의가 있어서 갔다가 그 학생들이 사도신경 해설책을 갖고 있지 않아서 복사해서 쓰라고 하고 제가 이번 녹화한 것을 깜박한 채 그냥 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책은 가져나오지 못하고 프린트만 해서 가져왔는데 익숙하지 않아서 다른 약간 저는 편하지 않는 것 같네요.

첫번 패러그래프를 다시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이 책 <사도신경 해설>은 1965년부터 마인쯔 대학교와 뮌헨 대학교 신학부에서 여러 번 강의한 내용이다. 이 책의 목적은 오늘도 여전히 많은 기독교인들이 매 주일 예배 시마다 암송하고 있는 사도신경에 대한 현대적 비판과 해석을 우리 기독교 신앙의 전통과 중재시키려는 것이다.
이것을 이런 작업을 위해서는 세가지가 필요한데 그걸 제가 오늘 자세히 설명한다고 했어요.

우선 이 사도신경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의미를 적절하고 실질적인 방식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네. 이게 이제 사도신경이라고 하는 이 텍스트를 해명하려고 하는 이 판넨베르크가 제시한 첫 번째 작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 사도신경 해설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어떤 텍스트를 가지고 하는 모든 작업에 공동으로 요구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설교도 역시 텍스트를 가지고 하는 것이죠. 성경공부도 그렇고 또 교회사 연구 작업도 그렇고요. 인문학은 거의 다 이러한 텍스트를 가지고 하는 작업입니다. 이 텍스트를 해석하기 위해서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작업이 뭐냐? 바로 그거죠. 그게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의미를 적절하고 실질적인 방법으로 살펴보아야 된다고 판넨베르크가 이야기 했습니다.
요거를 사실은 독일어 버전을 가지고 설명하면 좋겠는데 우리는 뭐 시간이 많으니까 고런 것들도 같이 연관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아직까지 제가 녹화하는 게 문자를 쓸수 있는 도구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 교유한분이 은빛직유인가 거 왜 조교로 지난 6개월동안 수고하신 분이 고거를 지금 찾고 있어요. 글도 쓰면서 강의를 하고 하는 것을 고게 잘 정리되면 강의를 좀 편하게 천천히 필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써가며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친구가 하는 작업이 노트북에다가 하여튼 뭐 제가 자세한 것을 잘모르겠습니다만 노트북을 전문적으로 강해하는 방식으로 하여튼 이건 그러한 틀, 도구인가 그런 방식으로 가져와서 해준다고 하더라구요. 지난 주일날 한번 실험해보기는 했는데 조금맞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고기 내가 글을 쓰려고 하려고 커서를 글씨로 해려고 고 순간에는 동작이 멈추는 거예요. 고게 뭔가 한주간 더 연구한다고 했는데 그게 잘 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도신경도 그렇고 제가 노트북하나 들고 가면 강의하는데도 녹화할 수도 있구요. 시시때대로 심심할때 제가 이 서재나 이 아파트 거실 나가서 간단간단한 것도 녹화할 수 있습니다. 편하게 할 수 있어요. 평소에 갑자기 떠오르는 그러한 것들도 신학단상이랄까 그런 방식으로 녹화를 하면 그것을 동영상으로 내보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제가 글을 쓸 수 없어요.
그리고 원서는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글라오벤 믿는다 베켄트니스 고백인데요. 어딘가 있을텐데. 아 옆에 있군요. 잠간만요. 요 책입니다. 보시겠어요? 보이나요? 볼파르트 판넨베르크. 이상하네요. 이렇게 찍으니까 거꾸로 나오네요. 아 아게 지금. 이 캠코더가 보통 찍는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제가 혼자 셀프로 해서 꺼꾸로 나오는 것 같습니다. 하여튼 요 책인데요. 그 단어가 무엇으로 되어 있는지 확인하겠습니다. 이 용어들이 참 중요해요. 그런 것을 하는데 주로 어떻게 하느냐 방법이 첫 번째 였던거죠. 근원적인 의미를 찾는 작업, 실질적인 정보를 제공해주는 거죠. 제가 근원적인 의미가 뭐냐 하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이 독일어책을 보았어요. 이렇게 되어 있네요. 위버텐 워 수퍼레니신 진. 발음이 잘 안되네요. 오랜만에 안하다 하니까 그러네요. 보통 근원적인 의미라고 하는데 독일어에 뉘앙스가 특별하게 있습니다. 이게 번역의 한계인데 잘 전달이 되지 않습니다. 한 것이 있습니다. 의미라고 했잖아요. 근원적인 의미, 여러분이 강의안 그것을 들여다 보시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단어 개념이 정말 중요합니다. 물론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한데 하나 하나의 용어 용어들이 연결해서 만들어내는 어떠한 세계속으로 들어가는게 신학 철학 인문학이니까요. 용어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보통 의미라고 하면 영어로 mean, meaning 이라고 하는데요 meaning하고 똑같은 것은 독일어는 베도이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 판넨페르크가 쓴 의미는 베도이통이 아니라 진이라고 하는데요. 요거는 일반적으로 베도이통 mean이라고 하는 것은 뭐라고 할까요? 그냥 표면적인 의미라고 한다면 진이라고한 하는 것은 아주 실질적인, 아 제가 제가 독문학자가 아니라서 표현하기라 좀 그런데요. 나중에 제가 말씀드리겠어요. 제가 지금 사전에도 여러가지 의미가 있는데 지금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어쨌든 이건 분명합니다. 그냥 베도이통, 이걸 의미라고 할때 우리는 한글로 똑같이 번역할 수 밖에 없어요. 한글로 똑같이 의미입니다. 그런데 뭐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로 사용할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똑같은데요. 이 베도이통은 그냥 표면적인 의미라고 한다면 진은 심층적인 의미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좀 다르죠. 근원적인 의미라 했잖아요. 근원, 원초적인, 원래의 그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독일어를 중심으로 자꾸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이 잘 모르는 거기 때문에 지루하겠죠. 진도를 조금 나가겠습니다.
그거를 정확하게 살펴봐야 되는거겠죠. 우리가 성서를 읽을때나 성서를 공부할때나 설교를 할때도 마찬가지인데 텍스트의 아주 근원적이고 심층적인 의미, 실질, 실질적인 진실, 진하면 그것을 말하는 실질적인 진실 그런 것을 뭐냐는 것을 찾는 것이 우선적인 작업입니다. 한국교회에 그런 작업이 상당히 느슨하고 대신 신자들이 어떻게 그것을 활용할 것이냐만 확대되고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길을 잘못가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판넨베르크가 이 책에서 사도신경 기독교 신학의 뼈대인 사도신경의 아주 그것이 형성되던 당시의 1700년전 그 당시의 실질적인 그 당시의 것을 제공하겠다는 것입니다. 재미있지 않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백 년 전에 있었던 일들만 잘 살핀다고 하더라도 흥미롭잖아요. 지금 백 년 전에 신문 한번 찾아가보십시오. 1907년, 1908년 뭐 건국 60년, 1907년 건국하고는 상관없군요. 1908년, 어떻게 된거예요? 한일합방 2년 전인가요? 역사의 시간 연대기들이 시간들이 자꾸만 힘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신문읽고 하 그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런 것을 찾아가는 것이 재미있을 텐데 1700년 아니면 1800년 그 시대속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흥미롭겠어요. 우리가 놓쳐서 문제지 들어가면 재미있습니다.

설교도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그것도 마찬가지인거예요. 구약성경이라고 한다면 2500년내지 3000년 정도 되었단 말입니다. 신약은 2000년 1900년 정도 되었는데요. 그 오래된 그 당시의 문서들이 채택이 될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는 것이죠. 그런 것들을 타당하게 하나하나 찾아간다면 재미있는 일이지요. 성서 주석학자들이 보통 하는 일이랍니다. 사도신경의 근원적인 의미를 찾아간다. 이걸 여러분들이 잘 생각하셔야 됩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할려고 마음도 먹지 않고 그냥 이미 작성된 사도신경에 문자적으로 매이고 있을 뿐이지요.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고 하는 그 고백이 나오게 된 어떤 성서 신학에서 나온 삶의 자리, 근원적 그러한 세계, 그런 것들을 통찰하는게 정말 중요한데 정말 그런 것들을 다 놓치고 있는거죠.

지금 제 옆에 컴퓨터가 커져있는데 몇 분지나면 화면보호를 위해서 자꾸만 바뀌잖아요. 제 사진 여행이라든지 사지을 슬라이드로 나오게 했는데 자꾸만 다른 사진들이 나오게 하는게 신경이 쓰이네요. 잠깐 컴퓨터를 끄겠습니다. 이게 지장이 있네요.

이게 사도신경만이 아니라 성서공부와 전체 공부의 핵심적인 문제다. 하나였고 일단 그게 문제는 알아야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으니까요.

그 다음에는 두번째는 사도신경에서 거론된 신앙의 내용이 오늘의 성서 비평적 관점에서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확실한 근거를 찾아보아야 하며,
그렇죠 사도신경은 성서는 아닙니다. 주기도문은 성서안에 있는거지만요. 이 사도신경은 분명히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고백론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거는 신학적인 고백인거예요. 이것이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이것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성서적 근거들을 거기에서 찾아내어야 하는 거거든요. 사도신경과 성서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것, 이런 것들을 우리가 찾아봐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작업도 역시 우리 일반적인 성서공부와 설교 이런 것에도 중요한 대목입니다. 우리가 어떤 주제로 설교를 한다거나 성서 텍스트를 한다고 하더라도 고 성서 일부분, 예를 들면 요한복음 3:16절 고 한부분만 갖고 이해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구요. 다른 성서 본문이 뒤받침 해줘야 되는 거거든요. 요런 작업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설교가 성구를 늘 들이밀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건 이렇게 생각하시면 좋아요. 성서 텍스트가 부분분은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 나온 신앙경험에서나온 문자적 진술입니다. 여기서 특수한 상황이라고 하는 것을 꼭 염두에 두셔야 되요. 갈라디아서라고 하는 것은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여러교회에서 발생한 사건과 사도바울의 신앙적 관점과 더불어 그가 처해있었던 초기 교회안에서의 위상, 위태로웠던 위상들, 그리고 조금 이걸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초기 기독교안에서 벌어졌던 교권의 뭐라고 애길 해야되나요? 교권의 행사, 교권 사이에서 불거지는, 아 정확한 단어가 생각 안나서요. 하여튼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교회라고 하는 특별한 상태가 있는 겁니다. 아주 그건 특별한 겁니다. 그리고 바울이 처했던 특별한 상황이 있는거예요. 그런 특별한 상황, 조건하에서 나온 문서라고 하는 그 사실이 왜 중요하냐? 그거는 뭐 여러분들이 눈치채셨을 겁니다. 그걸 왜 중요하다기 보다도 왜 거기에 머무르지 말아야 하는 것은, 두 가지가 연결되는 건데요. 두가지를 다 설명하긴 해야 되겠는데요. 그러한 특별한 상황이 왜 중요하냐 하면 기독교 신앙이 이렇게 막연하게 책상앞에 앉아서 자기 관념과 사유의 방식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삶의 경험에서 나온다고 하는 겁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거든요. 신앙활동이라고 하는 것도 그냥 신학자가 그냥 머리만 돌려서 되는 것이 아니라 신학자의 영적인 경험이 전제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목회를 잘해야 된다거나 그러한 경험이 많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구요. 그렇다고 경험이 없어도 된다는 것도 당연히 안되구요. 그러나 신학자에게 신학적인 이론에 앞서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영적인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칼바르트가 말한 신학은 교회의 진행이다는 말이 옳은거죠. 지금 제가 말씀 드리고 있는 요 핵심은 성서 텍스트가 형성된 데는 고유한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의 삶의 경험이 있다. 삶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거거든요. 뜬금없이 가만히 기도하고 있는데 뚝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경험은 그렇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의 호렙산 경험이라는 것도요. 아주 구체적인 그 사람의 삶이 거기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장인어른 말예요. 미디안 제사장이었거든요. 아내들은 제사장의 딸이었구요 제사장, 미디안 종교입니다. 유대종교가 아니구요. 이방인들이죠. 그가 호렙산에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것은, 호렙산 하나님의 산이라고 해서 미디안 이방종교의 성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거기서 가시나무 떨기에서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그런 것들이 구약성서를 읽는데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성서텍스트는 그 텍스트에 참여한 사람들의 고유한 삶이 들어있다는 것을 놓치면 안된다고 하는 거구요. 그런데 왜 성서 텍스트에만 머무르면 안되냐? 것이 앞서 있는 질문이죠. 그러니까 성서 설교를 할때 고 부분으로 끝나지 말고 다른 것이 보충되어야 된다 그런 겁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려고 했던 것은 복음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에 있었던 교회들과 유대기독교하고의 아주 치열한 투쟁가운데서 그가 그렇게 과격하게 말할 수 밖에 없었던 어떤 상황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것만으로는 기독교신앙을 말하다보면 이게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는거죠. 그러한 것들을 로마서와 다른 빌립보서나 이런 것을 통해서 또 근본적으로 복음서하구요. 이런 전체적인가운데서 풀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능력이 주어진 사람이 설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능력은 그냥 성서를 주석할 수 있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뼈대 전체 기독교 형이상학이라고 할 수 있어요 창세론 부터 종말까지 이르는 전체 틀이 있잖습니까? 틀은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는 통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둑으로 예를 들자면 이것은 정석이죠. 정석. 정석을 잘 알아야만 실전에 들어가서 바둑을 잘못두지 않고 바른 길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석이 옳은 수이기는 하지만 절대적이지 않다고 하는거예요 정석은 수백년동안 고수들이 둔 바둑에서 양쪽의 흑과 백 양쪽의 최선의 수를 찾아야 되는 것도 정석이라고 하는 것인데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변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갑자기 변하는 것은 아니예요. 더 깊은 수를 보는 고수가 나오면 정석이 또 바뀌는 거예요 그게 막 바뀌는 것이 아니지요. 어쨌든 바둑을 잘 두려면 정석을 잘 알아야 되는 것처럼 전체적인 틀을 이해하는 것이 성서를 해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것이 한국교회에서는 상당히 소홀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이건 제가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 같아서 미안합니다. 지금 모든 것들이 포퓰리즘에 떨어져 있어서 그렇습니다. 설교하는 사람,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 교회지도자들이 청중들만을 바라보는 거예요. 청중들이 은혜받는 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이 원하는 것만 전달하려고 그래요. 나는 아니다 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 청중들이 거기에 세뇌당하는 방법을 알고 있을 뿐이예요.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의 영적인 경지에서 자기말을 하는 것 같은데, 권위있는 설교자들입니다만 그렇지만 그거는 숨겨져 있는 겁니다. 교묘하게 청중들이 원하는 것을 절달할 줄 아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대중전달능력이, 그러니까 청중들이 원하는 것에만 영적인 초점, 눈높이를 거기에 맞추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기독교 전체에 대한 이해는 몰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거예요.

네 두번째로요. 성서 비평적 관점. 독일어 원서에는 뭐라고 쓰여 있나 볼까요? 포르투게클츄세비텐사세 오늘날 비평적 성서연구, 성서학.

마지막 세 번째로는 마지막, 어쩌면 이 세번째를 이야기하지 않고 첫번째 패러그래프를 지나지않고 머물렀던 것 같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