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matthewfox.org/sys-tmpl/door/질답시간(080217)

질문을 거의 주지 않으셨더군요. 그것을 중심으로 대답하기로 했는데요.

죽음의 문제, 죽음과 하나님 나라.
두 번째는 종교인의 세금 문제
유럽교회 신앙에 대해서 말해 달라. 이것은 언젠가 기회가 되면 신완식 목사님을 초대해서 직접 한번 듣도록 하겠습니다. 신완식 목사님이 좀 바쁘거든요. 영국 교회 가입하는 문제 때문에 그렇습니다. 미국의 브리즈님을 통해서 그 쪽의 이야기를 들어볼까 생각중입니다.

우리가 시간이 되는대로 세 가지를 이야기하겠는데 오늘은 얼마나 이야기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아주 필연적입니다. 제가 이야기하면서도 질문할 것이 있으면 문자로 띄워 주셔요. 주제하고 연관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되겠어요. 우리가 죽거든요. 필연인데 누구나 다 알고 있구요. 평소에 의식하기도 하고 의식하지 않기도 합니다.  현대 문명이 이런 것을 의식하지 않도록 만들어가는 것 같아요. 죽음을 회피하게 만듭니다. 제가 어렸을때만 하더라도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기회가 적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친가 외가 이웃들 간에도 가까운 사이기 때문에 그 마을에서도 초상이 늘 나거든요.  상여 같은 경험도 되고요. 오늘날에는 죽음과 단절된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집에서 죽지 않고 병원으로 가지요. 손자 손녀들이 할아버지 할머니 죽음을 보기 힘들게 단절되어 있구요. 병원에서 죽기도 하구요 장례식장도 병원에 많이 되어 있기도 하고 전문적인 장례식장은 호텔 비슷하게 되어 있더라고요. 커피숍도 있고 인터넷 할 수 있도록 만들구요. 죽음이 슬픔이냐 기쁨이냐 축제냐 이런 것이 혼란스러울 정도로 죽음이 말하는 실패, 충격 그런 것으로부터 우리가 단절되어 있습니다.

곰곰히 생각해 보세요. 생각하고 있으신 건데요. 오늘 제가 쓸데없이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으로부터의 단절이거든요. 자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들 말입니다. 자기업적, 취미생활, 자기가족, 자기가 소유했던 모든 것들로부터 단절되는 거구요. 심지어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육신이 해체되니까요 단절되는 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그걸 생각하면 무섭다 아니다 그런 차원을 떠나서 굉장히 충격적이거든요. 우리는 삶을 관계로다가 생각 하잖아요. 소유와 관계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경험하잖아요. 내가 목사라고 하는 위치 여러분도 각자 다 있는 그것이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란 말입니다. 누구의 아내나 남편 그러한 관계들 교회 안에서 그런 것이 있겠지요. 우리는 그런것을 강화시키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계속 그렇게 하죠. 아까 제가 현대 문명이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소외시킨다고 했는데요 그 말은 곧 죽음과 반대된 삶을 소유하는 것으로만 그리고 어떤 관계 사람, 물건 주변의 관계에서만 확인하는 쪽으로 우리를 끌어가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습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끊어지는 게 되거든요. 어떻겠어요? 그 상태가 된다면.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고 이야기하기 전에 다른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하겠는데요 언뜻 생각이 나서요. 누구입니까? 원효대사가 중국으로 공부하러 가다가 무덤옆에서 잠을 잤습니다. 자다가 물을 마셨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보니 그 물그릇이 해골바가지였다고 합니다. 야 이게 별게 아니구나. 세상이 생각하는 것에 따라 다르구나. 그릇이 물을 마시는 일반 바가지일수도 있고 해골일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실체는 똑 같은데 어떻게 받아들이는 상황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인도라든지 그런쪽에는 그런 훈련들 요가들이라든지 아니면 명상 훈련이 많이 되어 있어서요. 어떤 데는 이런 훈련까지 한답니다. 훈련갔다온 사람의 글을 읽었었는데요 누군지는 모르겠습니다. 다 잊어버렸습니다. 어떤 일정 시점에 학생을 무덤 옆에서 재우게 한답니다. 해골을 안고 자게 하구요.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훈련을 거치니까 여러분들이 그런 상황이 되면 가능할까요? 아무도 없는 공동묘지에 가서 혼자 자고 내려올 수 있을까요? 가끔 제가  추울때 교회있다 집으로 혼자 가거든요. 아주 춥습니다. 깜깜하구요. 내가 얼마 있지 않으면 나 혼자 땅속에 묻혀서 추운데 있어야 된다. 그거를 인정해야 한다.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 나는 따뜻한 교회에 있다가 잠자리가 있는 집으로 가는데 결국은 내가 돌아가야 할데는  추운 아무도 없는 땅속이다라는 사실을 생각을 자꾸만 하거든요. 나도 한번 무덤근처 공동묘지에 근처에 가서 있어볼까? 삶과 죽음을 관통할 수 있는 영적인 경지가 있을까? 그런데 내가 어떤때는 가능할 가니까요? 죽어있는 무덤 별거 아니라 생각할 수 있고요. 우리  머리속에 많이 각인되어 있지 않습니까? 무덤 공동묘지 귀신 두려울 수도 있다 생각이 됩니다.

어릴때부터 어떻게 교육받고 자랐느냐 죽음과 삶 이런 문제들을 늘 일상으로 죽음을 늘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삶의 자세가 훈련들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들을 키우시는데요. 아이들에게는 그게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이지요. 지금은 다 좋지 않습니까? 특히 살기가 좋아진 상태에서 말이죠. 이게 아이들에게 정말 바람직한 학교 교육인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을 해야 할 것 같아요.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의 밑바닥으로 들어가는 것이거든요. 죽음과 삶의 문제를 늘 붙들고 있어 창조를 이야기한다는 것도 무로부터 창조잖아요. 제가 다시 조직신학을 한 사람이라서 또 신학적으로 나가네요. 무로부터 창조거든요. 창조문제가, 제가 왜 이런 신앙적인 것을 말씀드리냐 하면 그게 결국 우리의 영성이고 우리의 삶이라서 그렇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별로 그거를 일치시키지를 않습니다. 일치시키지를 못해요. 창조 하나님이 창조했지 이러한 정도라만 생각하지 그 성서기자들이 말하는 2천년 기독교 신학자들이 말하는 창조의 행위, 창조의 개념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러다 보니 나의 삶과는 떨어져 있는, 그저 내가 신앙 생활을 잘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남아 있고 내 삶은 다른 방식으로 작동되어요. 그쵸. 삶과 신앙이 나누어져 있다는 말은 늘 듣습니다만 이걸 여러분들은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믿고 반듯하게 잘 살아야 한다. 이 사람은 신앙적인 실존으로만 생각합니다. 그거 맞는 이야기인데요. 이런거예요. 기독교 신앙의 토대가 있는데 들어가려고 하지 않고 그냥 따로 있어요. 내 삶에 적용 시키는데요. 살아있는 신앙이라고 하는데요. 다른 차이가 있습니다. 창조, 제가 차이가 있다고 이야기 하더라도 어떤 분들은 그걸 이야기하는 것 가보다 그렇게 이해하시는 분도 있을거고 그냥 그러한 말을 상투적으로 듣고 지나가는 분도 있을거예요. 이런  쪽으로 생각을 많이 한 사람들에게는 전달이 되겠고 낯선 사람들에게는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겠죠. 창조만 하더라도 기초적으로 무로부터의 창조이거든요. 크리아치오 엑세니힐로. 창조 신앙에 들어간다는 것은 곧 창조는 무언가 만들어진 유의 이야기입니다. 창조는 유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로부터, 무에 대한 깊은 이해, 토대에서 창조라고 하는 신앙, 하나님의 창조행위에 대한 신앙이 나오는 거죠. 우리가 지금 살아있다는 것도 하나의 창조 안에 들어있는 것인데 이걸 우리가 이해한다는 것은 무로 전혀 없었던 상태로 돌아갈줄 알아야만 우리의 삶, 이런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돌아가 보실래요? 생각으로는 가능합니다. 삼십년전으로 돌아가보시죠. 더 돌아가 보시죠 시간 거꾸로 돌아가보십시오. 여러분이 여러분의 어머니의 난자와 아버지의 정자가 결합된 배아 상태인가요? 기억이 나지 않죠. 그 배아로부터 여러분들이 인간이 되었답니다. 더 들어가면 어디까지 갈까요? 아무것도 없는 상태 말이죠.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도대체 아무것도 없는 것도 가능할까? 큰 우주, 120억년 되었다는 이 우주, 팽창된 그 너머에는 뭘까요? 우주안에만 뭐가 있고 그 너머에는 뭘까요?

우리가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로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늘 살아가면서 경험했던 모든 것, 내가 소유 하는것, 내가 만들어 낸것, 나와 관계를 맺은 가족들, 인간관계 이런 것들이 다 끊어지는것,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들이 사라지는 것. 제가 다른 이야기를 하려다 이렇게 나왔군요. 다시한번 돌아가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다 그런 것들하고 다 연관되는 것인데 그런 것들을 놓치고 신앙생활하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의 reality, 그런 것들을 놓치게 되구요. 결국은 기독교 신앙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녀들이나 교인들이나 여러분들 각각 거기서 기독교 신앙이 말할려고 하는 근본으로 치고 들어가는 그러한 훈련들이 꼭 필요합니다. 제가 창조를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그것은 실제적인 무에 대한 경험이죠. 만약에 그 무로 우리의 의식이, 생각이 갈 수 있다면 죽음도 넘어 설 수 있는거죠. 어떤 면에서요. 논리적인지 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대충 윤곽적이 그렇습니다. 칭의라 든지 성만찬이라 든지 죄문제라 든지 이런 모든 것들도 우리 삶의 생명의 밑바닥, 심층적인 세계하고 그 안에 나오는 가치이거든요. 인문학적 성서읽기는 바로 그러한 맥락을 잘 꼼꼼히 살피면서 기독교 신앙이 풀어내려고 하는 그러한 핵심들을 잘 잡아 가야한다고 하는 그러한 공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 우리들에겐 필연적인 건데요. 끔찍한 세계입니다. 사실은. 왜 제가 끔찍하다고 애기하면 우리가 소중하다고 생각한 모든 것들과 다 단절됩니다. 세례가 바로 그거군요. 제가 놓칠 뻔했습니다. 세례, 이게 다 죽음과 연관된 문제, 죽음과 삶, 죽음과 생명 문제. 부활도 근본적인 생명과 연관되어 있는 거죠. 하나님 나라도 그렇구요. 세례라는 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다는 것이 아닙니까? 이게 말로는 우리가 죽는다고 하죠. 실제로 우리가 죽을 수 있느냐? 어떻게 우리가 죽겠습니까? 죽지는 않는데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대속적 죽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이론이 아닙니다. 깊이 있는거예요. 그게 자칫하면 대상 만족설, 이런 쪽으로 가기 때문에 중세기때 말하는 그래서. 오늘 현대인들이에게 조금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이 있습니만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다시 반복해서 강조드립니다. 기독교 교리는 그냥 어떤 사람이 성경보고 그렇게 막 필요한 것을 짜낸 것이 아니라 이 세계 삶에 대한 깊은 통찰안에서 나온 것이거든요. 죽음과 삶과 허무와 좌절과 미래와 현재와 시간, 이런 것을 통전적 총체적 사유의 과정을 통해서 성령과의 교제라고 할 수 있겠죠. 그것을 밑바탕으로 해서 찾아낸 기독교적인 대답들입니다.

세례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죽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서 산다는 실질과 의미를 가지고 있잖아요. 세례는 죽음에 대한 경험이죠. 이거를 실제적인 죽음에까지 우리의 영혼이, 사실 밑바닥까지 가야만 합니다. 자기가 무가 되는 경험말이죠. 완전히. 그런 것이 쉽지 않죠. 안될 겁니다. 그게 단시일에 되는 것이 아니예요. 그냥 듣고서, 누가 말하니까 아 그렇구나 생각할 수는 있지만 실질적으로 그 진실이 말하는 세계안 으로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동양의 어른들이 암자에 들어가서 수십년 동안 용맹정진 구도를 하는 이유가 바로 그와 같습니다. 그거는 그냥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거죠. 頓悟라고 하는 것이죠. 기독교적인 돈오가 꼭 필요합니다.

세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죽고 산다. 그건 어떻게 우리의 실제적인 삶에서 경험하고 그것이. 이 세례는 또 성만찬하고 연관되거든요. 참 이게 중요한 기독교적인 교리입니다. 성만찬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대한다는 것. 세례의 반복이 성만찬입니다. 세례는 유일회적이니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번 받는데 대신 성만찬을 정기적으로 행함으로서 우리가 세례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죽음과 삶에 대한 경험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일종의 기독교의 liturgy이죠. 예전인데요. 이게 오늘 제가 말씀드리는 핵심인 기독교 신앙의 종과 삶의 우주 전체 중심으로부터 시작되는 것, 깊은 사유에서 나왔다는 것, 그런 점에서 세례와 성만찬은 기독교 신앙을 설명해주는 귀중한 예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실제 신앙과 삶에서 세례와 성만찬을 실질적으로 경험하면서 살 아 갈수 있을까요. 이게 영성이죠. 떡덩어리 빵떵어리 하나를 하나님의 몸으로 인식하구요. 그게 나의 몸으로 들어오니까 내가 하나님을 먹는거든요. 창조자이고 영이고 종말에 생명을 완성하실 분이 우리 몸 안에 들어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주와 하나님과 일치가 된다는 것입니다. 죽는다고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하나님나라 간다는 차원에서 볼 때, 이 땅에서 우리가 생각했던 나와의 관계 그런 것으로부터 하나님과 일치가 되는 관계로 가게 되는것이죠. 그게 과연 무얼까요 아무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어떤 사유의 비약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었던 모든 좋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그대로 갖고 가는 것이 아니라 벗어버리고 가야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했던 옷을 갈아 입는 거거든요. 그 옷을 갈아입는 그 귀한 세계에서 우리가 과연 만족할 수 있느냐? 현재와 같은 이러한 방식으로 살아가는한 만족할 수 없습니다.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산다고 하는 것은 다 소유와 관계속에서만 자기의 삶을 확인하는 것이거든요. 내가 계속 중심이거든요.

세례와 성만찬 이런 것들은 내가 없어지는 것이고 하나님과 코이노이아, 영적으로 하나된다는 것입니다. 그런게 우리가 살아있을 동안 충분하게 훈련되어야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도 하나님 나라에 참여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것이구요. 그런 희망들이 우리들에게 확고하게 될 때, 확실하게 될 때, 물론 영성이 깊어지는 것이고. 그때 우리는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어서는, 이런 표현들이 너무 진부한 것같애서 말하기는 힘듭니다만 여전히 저에게도  언어가 부족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뛰어넘는 그런 하나님의 세계. 그렇찮아요. 상투적이고 더 적당한 말을 제가 찾아내지 못하기 때문에요. 그러한 신앙, 신학적인 용어 말고 우리들에게 와 닿는 그러한 언어들이 필요한 것 같은데 조금 부족합니다. 그래도 뭐 그런 방식이 아니면 전달이 힘드니까 그렇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거를 확인하는 작업으로 몰입해야 됩니다. 죽음과 삶의 문제예요. 십자가와 부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사실은 다 몰라도 됩니다. 여기 이게 우리의 삶과 일치가 되어야 되는데요. 그게 바로 설교의 케리그마거든요. 제가 설교 비평할 때 변죽을 울리냐 하는 것이 그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세례와 성만찬과 하나님 나라와 종말 이런 것을 통해서요. 나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통치하시는 것에 관한 관심이 확 우리를 사로잡아야 하는 것이거든요. 그런 것들이 차곡차곡 우리에게 훈련이 되고, 좋은 뜻으로 훈련입니다. 정보를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적 세계가 더 풍요로와진다는 것이죠. 더 심화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다면 늙는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하등의 불안을 느끼지 않게 되고 죽음 앞에서도 개인에 따라서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통과해야 할 문이다 생각하고 과감하게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설령 지금 내가 좋아했던 모든 것을 다 빼앗긴다고,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아쉬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기독교인들이 죽는 연습을 늘 해야 하는 것이죠. 신앙은 사실 어떻게 보면 죽는 연습이죠. 세례 성만찬 이야기했습니다만 신앙은 죽는 연습이죠. 예수님도 다 버리고 따르라고 했죠. 버림이죠. 그런데 오늘날 우리 신앙이 과연 버림이냐? 버림이라고 하는 것은 명색만 그렇지 실제는 계속 뭔가를 성취하려고 한다는 것이죠. 좋은 뜻으로나 어쨌거나요. 그러면서 하나님에게 축복받았다고 이야기하잖습니까? 노골적으로 그런 이야기도 많이 하잖아요. 그러면 기독교 신앙에서 자꾸만 멀어지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오늘 시대정신이 요구하기 때문에 목회마인드가 그쪽으로 가서 신자들에게 그렇게 해야 신자들이 또 뭔가 반응이 있어서 그쪽으로 가기는 가는데 그게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아닌거죠. 그렇게 되면 결국은 영적으로 공허하게 됩니다. 길이 아니기 때문이예요. 시대정신이 요구하는, 여기서 말하는 시대 정신은 사회를 개혁하고 어떡하고 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신자유적인 그러한 것들, 성공해야 되고 출세해야 하고, 자기를 확인하고 그러한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결국은 우리를 계속 자극하는 것이기 때문에 잠시는 우리로 하여금 뭔가 성취감이나 짜릿한 느낌을 갖게는 하겠지만 그것으로 계속될 수 없는 것이거든요.

결국은 자기를 거의 제로에 가까울 정도로 무화시키는 것입니다. 영성은 곧 자기무화의 길입니다. 에카하르트(M. Eckhart)라든지 토마스 아 캠파스 이런 글들을 보십시오. 수많은 영성가들, 자기를 비움, 축소 시키는 것이거든요. 그게 말장난이아니라 실질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러한 영성가들의 가르침이 특별 것이 아니라 다 기독교 가르침 안에 있는 것들입니다. 무와 창조의 관계 창조를 생각하면 창조를 놀라운 은총으로 생각하고요. 그러니까 이렇게 말해야 되겠네요. 설명하다 보니 생각이 났습니다. 하나님은 무와 창조 전체에 해당하는 분이죠. 무와 크리아티오, 창조. 이걸 전체 다니까요. 유안에만 있는 것이 무조건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어느 책인가. 잠간만 기다려 주세요. 갑자기 소개할 책이 생각났습니다. 책이 눈에 보이지 않는데요. Matt Fox '창조 영성' 기억나시는 분 있으세요?
(A New Reformation: Creation Spirituality & the Transformation of Christianity 2006 )

영성은 긍정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네가티다치오, 부정성이 있다. 포지티바만이 아니라 창조는 positive 하지요. 적극적, 실증적인것, 네가티바, 부정적인 것,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실증과 반대되는 차원을 이야기합니다. 양쪽이 다 같이 기독교 영성을 이야기하는 성격이다. 여러분 기독교 영성의 핵심은 무에 대한 경험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다시 무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거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은 아닌거예요. 이거는 우리가 존재하는 것과 다른 방식의 존재방식입니다. 말도 자꾸만 철학적 용어라서 전달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자꾸만 우리는 여기 있는 방식으로만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일단 그거를 접어야 되요. 하나님은 적극적인, 실증적인 우리가 보인다고 생각하는, 확신할 수 있는 이러한 세계만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세계까지를 다 통치하시는 분이거든요. 그분에게 우리를 맡기는 거죠.

조금 그걸 더 잘 여러분의 머리속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그냥 직선적으로 이야기하면 우리가 죽은 다음에 다 해체되고 원소처럼 있을지 모릅니다. 원소덩어리, 그것보다 작을수도 있고요. 꼭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들이 너무 이런 방식의 삶을 확신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부분을 생각하라는 뜻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미래를 열어두셔야 합니다. 두려워 마시고요. 그거는 성서기자들도 빛으로 밖에 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환한 빛이예요. 메타포죠. 더이상 그것을 말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모든 문제들, 제가 말한 것 일부예요. 저도 미숙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제가 말한 부분적이지만, 이런 것을 바탕에 놓고 성서기자와 2천년동안 신학자들이 기독교 신앙을 해명하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죽음, 삶, 이런 삶의 문제를 생각하자면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삶이 전제되는거니까요 도대체 이 방식으로 살고 있는 이 방식은 뭐냐? 결국 해체될 수 밖에 없는 이런 방식이 뭐냐? 이 안에 어떻게 하나님의 통치가 죽음이후까지 포함한, 창조 이전까지 포함한, 무로부터 창조니까 무 이전에 뭐가 있었으니, 무 이전에 뭐가 있었다는 것이 말이 안되는군요. 창조 순간 전까지도 하나님의 통치잖아요. 그러한 나라, 세계가 어떻게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속에 개입해 있느냐 그러한 것도 우리가 생각을 해야 되는데 그러려면 오늘의 삶이 뭐냐 하는 것도 생물학, 물리학적으로 이해를 해야하겠죠. 시간과 공간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 그거참 신기하잖습니까? 제가  죽음의 순간을 자주 생각한다고 그랬죠? 누구나 다 그럴 텐데요. 이렇게 생각이 되더라구요. 우리는 한줄로 계속 서 있습니다. 지구에 60억명입니까? 1초에 수백명씩 죽음으로 가고 태어나고 죽어가고 한줄로 서서 순식간에 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차례가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어요. 금방 금방 가게 됩니다.

숭례문 이야기가 나왔습니다만 그게 세워진지가 6백년이 되었다고 하나요. 그걸 세운 사람들이 살아서 그 문을 얼마나 열심히 세웠겠습니까? 사오백년이 후딱 지나갔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불탔다고 사회적으로 시끄럽고요. 이 소동을 사백년 오백년 후에 인터넷으로 옛날 뉴스를 보는 후손들이 있다면 우리를 갖고 뭐라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 사이에 시간이 다 지나가버리는데요. 그 안에 있던 것들은 과연 다 무엇일까요? 지구 안에 일어났다가 사그러지는 그런 것에 불과할까요? 시간과 공간 참 신기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이 아주 소중한 것인데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 창조전과 종말이후까지 포함한 전체를 다 실증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은폐 방식으로 우리 삶에 개입해 있다 말할 수 있을 뿐이지요. 더이상 말하기가 힘이 듭니다.

한국사회와 기독교 사회의 갈등, 기독교 백년 역사 더듬으면서 하면 좋겠습니다만 우리 앞에 이슈로 다가오고 있는 한국 민중 사회와 연관해서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대통령 선거에 즈음에서 결과와 이상한 현상을 경험했어요. 기독교가 특별히 프로테스탄트가 지난 수년동안 무지하게 욕을 먹었잖습니까? 욕먹을 짓도 했구요. 심지어 안티 기독교 사이트가 생기기도 했구요. 이렇다고 한다면 어딘가 개신교 입장에서 분명한데요. 대통령선거에서는 가장 개신교의 색깔을 가장 강하게 나타내고 있는 이명박씨가 되었단 말이죠.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가 되지 않더라구요. 그렇게 일반대중이 기독교를 비판하면서 그래서 기독교 인구가 많이 줄어들었잖아요. 지난 10년동안요. 앞으로 기독교가 줄어든 현상은 많이 있을거구요. 대형교회는 많아지지만 전체적인 기독교 세력은 약화되고 있는데 그러한 부분도 그렇고 사회의 앙케이트, 설문조사를 하게 되면 기독교 지도자들을 존경한다는 것이 별로 없는데 서울시를 하나님에게 바치겠다고 말한 이명박씨가 대통령이 되었을까? 그렇다면 기독교에게 가능성이 있는가? 말도 되지 않는 생각이겠지만 그런 쪽으로 생각이 되고 도대체 민중이라고 하는 존재가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독교를 바라보고 있는 민중을 말하고 있는 것이예요. 민중 또는 대중이 양면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쪽으로는 합리적이고 정의를 추구하려고 하는 부분들이 있기도 하구요 다른 편으로는 이기적이고 대중심리에 따라 움직이는 그러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가 잘못한 부분들, 대형교회에서 벌어진 세습이라든지 심각한 부도덕한 문제들이라든지 기복주의에 대한 강조라든지, 극에 달하는 교단 분열이라든지 서울 시청앞에서 벌어지는 대형반정부, 반북 기도회, 친미기도회 이러한 것들이 사실은 욕을 먹을 만한 것들인데요. 그런것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바르게 생각하는 것이 민중들에게서 보이기도 한데. 그렇지 않는것에는 순식간에 대중들은 이기주의와 대중심리에 빠질 수 있는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요하지 않고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현상에 대한 나름대로의 작은 분석입니다. 민중에게 있는 양면성이예요. 그러니까 또 우리 교회와 연관시킨다면 대중교회를 따라가고 있는 많은 기독교인, 민중이거든요 한국 민중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대형교회만 아니라 신천지에게 쏠리는 현상도 마찬가지 종교적인 메리트가 있기 때문에 가게 되거든요. 그렇게 선택하는데는 어떤 교회를 꼬집어서 말하기는 그렇습니다만 여의도 순복음 교회 같은데 7,80만 신자들이 확보된다고 하는 것은, 설교 기독교 방송 들을 내용 송구스럽지만 전혀 내용이 없는 똑 같은 내용의 반복인데도 수십만의 사람들이 추종하고 있다고 이거는 대중심리, 종교적인 이기주의등이 연관되어 있지 않는가 싶습니다.

앞으로 한국사회가 기독교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참 궁금하기도 하구요.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을 예측할 수는 없지요. 그렇게 긍정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이 있습니다. 그러니까요. 가장 기독교적인 색갈이 강한 대통령을 뽑은 것은 기독교를 선호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문제죠. 전혀 다른 차원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장로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을 기독교에서 아전인수로 해석해서 기독교가 사회에 어떻게 하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면 잘못된게 아닌가 싶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이명박 장로가 기왕 되었으니까 저는 별로 기대를 걸만한 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이왕 되었으니 정치를 잘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볼 때 명색이 장로니까 속으로는 잘하기를 바라겠습니다. 당연히 그런쪽으로 기도를 해야 하겠구요. 그러나 요즘 인수위와 최근 발언을 볼 때 경박하다 생각이 들기도 하구요. 잘가는 교회가 이벤트나 프로그램을 통해서 교회를 부흥시키려는 생각과 비슷하게 국가를 끌어가는 것이 아닌가 약간 염려스럽기는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그만두죠.

질문있으면 하시죠. 종교인의 세금하려다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마무리를 했는데요. 유럽교회 다음기회에 하기로 하죠. 오늘 TV 어디엔가 뉴스이후. 그 프로그램 보시던가요.

기독교 신앙이 성취가 아니고 버림 무소유로 나간다면 청소년들의 신앙교육을 어떻게 해야 할지요?

어떻게 해야 된다니요? 기독교 신앙을 바르게 가르쳐주면 되는 거죠. Boys! Be ambitious! 예를 들자면 그런 방식의 청소년 프로그램은 무익한 것입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교양강좌에 불과하니까요. 목적이 이끄는 40일.. 기독교 신앙의 근원과는 거리가 멉니다. 청소년들에게 할 수 있다 열심히 하자 그런 것 가르칠 필요없습니다. 사회가 그쪽으로 가고 있으니까요. 오히려 우리는 다른 것을 이야기해야죠. 구체적으로 청소년들이 어떻게 하면 살것인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건 우리가 모르는 거고. 개인 개인이 선택해야 할 문제지요. 십자가 부활 하나님 나라 칭의 아까말한 성만찬, 세례 근본적인 의미들을 잘 살피고 창조안에서 창조질서가 어떻게 유지되어야 하는가 종말론적 상상력 그런 것들을 쭈욱 하시면 아이들이 어떻게 살것인가 스스로 판단합니다. 제발 교회 선생님들 부모님들도 그렇고 아이들의 삶을 프로그램화 하지 말도록 한국교회는 이게 너무 심합니다.

딸에게 소개해준 철학책: 소피의 세계입니다.

이슬람 신학에 대한 공부와 선교
어떤 의견? 광범위한 질문, 당연히 난 필요하다고 생각하죠. 일반 신자들에게 가르칠 필요는 없고요. 그것말고도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 공부할 것이 많고요. 시간이 널널하다면 정말 심심하다면 어떤 사람에게는 필요합니다. 선교사님처럼 인도에 가 계신분은 이슬람 신학공부를 하시고 그들하고 충돌할 필요는 없고요. 쉽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어떤 종교성이 있으니까 그 바탕안에서 기독교를 설명하는 그런 작업이 필요하겠죠. 개척자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바로 제가 이런 말을 했죠.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공부할게 많은데 어떻게 다른 것에 대해서 다 신경을 쓰느냐?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는데요. 옳은쪽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정말 우리는 공부할 것이, 기독교전통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 많습니다. 안티기독교나 예수 세미나나 자유주의적인 소위 말해서 그런쪽에 있는분에게 대해 아쉬움은 열려져 있는 생각은 좋은데 기독교 전통에 대해서 모릅니다. 그것을 소홀하게 다루고 다른 것을 더 많이 아는 것은 무의미한 거든요. 저도 장자나 노자 책이라든지 동양사상이라든지 책도 읽고 공부를 했구요 철학이나 물리학 개론적인 것은 압니다 그러나 그런 공부보다  기독교 전통에 대해 공부를 더 해야 한다는 것이죠. 2천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책을 썼는지 모릅니다. 선배신학자들도 계속하고 있구요

그러니까 일반 신자들에 결국은 선택의 문제예요. 무엇을 어느 정도 가르치느냐 핵심인데. 일반적인 것을 놓고 볼 때 한국 교회는 기독교의 근본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설교도 그렇구요. 그냥 변죽을 울리는 거예요. 제가 그런 표현이 송구스럽기도 하지많요. 그냥 수박겉만 ㅎㅑㅀ는 정도입니다. 그것 맛을 보면 맛이 없잖아요. 수박맛을 봤으니까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지. 내가 이런 쪽으로만 관심을 갖거든요. 프로그램쪽만 관심을 두죠. 그러나 정작 수박을 쪼개서 당도도 실험하고 느끼고 비교하고 들어가기 시작하면 다른데 신경쓸 시간이 없거든요.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좀더 천착하죠. 목사님들부터 시작해서 그런 소리를 계속한거구요. 그 한마디하려고 설교비평 이러쿵 저러쿵 말을 많이 한 것입니다.

예전에 관한 책 제가 언제 이야기를 했나요. 제가 보는 것은 주로 두가지, 세가지 인데요. 시간이 있으면 한국 교회 예전 매주 만들어서 샘터교회가 한거 주보로 올리고 있습니다만 많이 부족합니다.
공동예배서. 2만 5천원짜리 한국 장로교회 출판사
대한 예배서에서 나온 ‘새로운 예배기도’ 기도문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시입니다. 멋대로 하는 기도 만들어서 하지 말고 형식적이다고 하는데 그안에 깊은 생명과 신비의 세계를 담고 있지 않습니까? 기도도 똑 같습니다.
새로운 예배 찬송.

예전을 중요시하는데 목사 가운을 왜 입지 않는가? 이야기하더라구요. 교회가 지금 아파트 거실에서 드리기 때문에 가운을 입기는 좀 그렇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괜찮은 공간을 얻게 되면 가운을 입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목사의 권위를 나타내기보다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서가능하면 예배때 가운을 입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예배시간에 회개의 기도의 여러분에게 선포합니다. 내가 어떻게 용서를 하겠습니까? 내가 맡은 역할을 담당합니다.

하여튼 오늘 결론적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기독교 신앙이 그렇게 우리의 종교적 센티멘탈리즘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훨씬 더 깊은 포괄적인 우주론적인 생명과 죽음, 삶 전체를 담아내고 있다. 우리가 그 신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Incarnation 돈오 실제적인 깨우침이니까요 언어개념이 내 삶과 일치되는 삶, 성육신이죠. 그거를 위해서 우리는 기독교 가르침이 담고 있는 풀어내려고 하는 세계에 용맹정진의 자세로 들어가야 된다. 그러면 다 신학자가 되라는 말이 아니라 전문적인 신학자가 아니라 기본적인 태도만 가지면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여기까지 입니다. 수고하셨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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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님의 mp3 화일을 기초로 작성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