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dabia.net/bbs/view.php?id=mark&no=751시를 한편 읽어 드리겠습니다. 다비아의 어느 칸인가 아마 제 글에 단 댓글에 있었던 것 같은데. 제목은 빛, 꽃망울, 제가 복사를 했습니다. 정현종.

       당신을 통과하여
       나는 참되다, 내 사랑.
       당신을 통과하면
       모든 게 살아나고
       춤추고
       환하고
       웃는다.
       터질 듯한 빛 ―
       당신, 더없는 광원(光源)이
       빛을 증식한다!
       (다시 말하여)
       모든 공간은 꽃핀다!

       당신을 통해서
       모든 게 새로 태어난다, 내 사랑.
       새롭지 않은 게 있느냐
       여명의 자궁이여.
       그 빛 속에서는
       꿈도 심장도 모두 꽃망울
       팽창하는 우주이니
       당신을 통과하여
       나는 참되다, 내 사랑.

어떻습니까? 그냥 듣고는 네. 금방 따라오기가 쉽지 않죠. 네. 이게 전문적인 시인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시 읽기에 훈련이 많이 된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냥 이렇게 낭독하는 것을 듣기만 하더라도 어떤것 것을 전달받겠지요. 이것은 상당히 전문적인 훈련이 있어야 되기 때문에 그렇지 않는 우리같은 사람들은 한번 들어서는 잘 모르고요. 써서 지금 여기 있는 것처럼 제가 이것을 출력했습니다. 요즘 계속 하루에도 시간 날 때마다 읽고 또 눈으로 보고 그렇습니다. 우리처럼 시에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은 여러 번 읽어야 이게 와 닿는 것 같습니다. 이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만 고 단어 자체를 우리가 따라가기가 힘들구요. 또 단어와 단어 사이가 연계되어서 시인이 포착하고 있는 어떤 영감의 세계가 있거든요. 흔히 시적 영감이라고 하는데 그냥 뭉뚱그려서 이야기하는 거죠. 시인만의 창조적인 시각이 있는겁니다. 그걸 언어로 형상화 한거 거든요. 이 정현종이라는 시인이 도대체 빛, 꽃망울이라고 하는 이러한 제목으로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는지 말이죠? 예. 그냥 어렴풋이 제가 와 닿는 것은 있습니다. 첫째 연 마지막 줄에 이렇게 나오네요. 모든 공간은 꽃핀다. 느낌표로 되어있습니다. 공간사이에 빛이 있겠죠. 빛이 있어야 꽃이 내 눈에 들어오겠죠. 그리고 그건 계속 움직임이죠. 꽃 피는 것은 우주가 움직임이기도 하구요. 공간, 빛, 세계, 꽃망울이라고 하는 이러한 어떤 사물의 이름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세계의 신비를 전달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확한지는 아닌지는 모르겠어요. 이러한 시 창조작업이 가능한 것은 이 세계는 어떤 것으로도 결코 완전하게 규명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참 신비로운 건데요. 일단 예술가나 시인들이나 이런 사람들은 그것을 직관적으로 느끼고 있어요. 그게 늘 살아 움직이는 것이죠. 세계가 살아서 자기에게 온다니까요. 이 말이 느껴지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내일이 똑같은 날이 아니라 맨날 똑 같은 나무를 본다고 하더라도 나무가 살아있는 겁니다. 그때에 따라서 다르게 자기에게 전달되구요. 사실 그건 우리들도 시적 영감이 강하지 못한 평범한 우리들도 그런 것을 경험하잖아요. 같은 미류나무지만은 어느날 그것이 더 크게 와닿는 그런 경험이 있잖습니까? 말을 거는 건데요. 뭐 그러한 감수성이기도하고 실제로 세계가 그렇기도 하구요. 제가 뭐 왜 시를 읽어 드렸는가하면요. 일단 제가 요걸 좋은 시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구요.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가 성서를 읽는 것은 이 시를 읽는 것과 똑 같습니다. 시를 사실적으로만 읽는가 그건 미련한 사람아니겠어요. 모든 공간은 꽃핀다 그걸 문자적으로 믿는다면 그건 시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성서도 시입니다. 거기에는 지적인 메타포가 많이 있구요. 그런 전승들, 그게 사실은 살아있지요. 한국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거를 신문보도로 읽기 때문에 성서가 말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통치가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안타까울때가 많이 있는데요. 그걸 억지로 설득시켜서 될 수 있는 것은 안됩니다. 중고등학교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고급시나 철학을 읽어서 이해하라고하면 안되는 것이거든요 중요한 것은 억지로 강요하지 말고 그 학생, 청중이 어떤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기본바탕, 인식론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세계를 인식해나가는 훈련, 그런 것을 시키는 것이 지름길입니다. 다른 것은 없더라구요. 대구성서아카데미도 사실을 그런 일을 하는 것입니다. 평신도 신학운동이죠. 네.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성서를 이해할 수 있는 최소한 인식론적 훈련이거든요. 이런 거 없이 다잡아서 다짜고짜로 동성애가 어떻고 뭐. 예를 들자면요. 예민한 문제들, 그런 것들, 공산주의가 어떻고 이념들이 어떻고 그런 것만 말해봐야 사실은 반감만 생기고 잘 전달이 되지 않습니다. 요즘에도 다비아에 동성애문제로 갑론을박이 좀 있었는데요. 저도 글을 쓰면서 아 써봐야 소귀에 경읽기다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절망하지 않고 꾸준하게 해당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일반 무작위 다비안이라고 할까요? 하여튼 일반 다비안들을 대상으로, 계몽적인 것은 아닙니다. 내가 뭐 가르친다는 차원이라기보다도 인식의 틀을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계기가 되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어서 하여튼 꾸준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정현종시인의 빛, 꽃망울, 다비아 어디엔가 들어 있을테이니 출력을 해서 한번 보세요. 참 좋습니다.

먼저 공지사항 두가지 말씀드리구요. 두가지, 아. 하나는 다음 주는 휴강입니다. 5월1일, 4월 27일은 하고요. 5월 1일은 휴강입니다. 박수안치세요. 노동절이기 때문에 휴강하는 것은 아니구요. 저의 집 가정적인 일이 있어갖고 그냥 제가 부득이하게 이 자리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다음 목요일에 휴강이다. 좀 이해해 주시고요.

두번째는 제가 6월에 남미쪽에 출장 강의를 가기로 했는데 그게 취소되었습니다. 6월에 우리가 하던 공부를 잇달아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하면 5월과 6월, 5월 1일은 빼고요. 각 4주씩해서 여덟 주간 남았습니다. 좀 지루하죠. 여덟 주 남았으니까 그렇게 해서 두 주에 한 과목씩 이렇게 나가면 이렇게 저렇게해서 마지막까지 시간 조정해서 마칠까 생각중입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있어서 기독교의 형태와 본질의 뒷부분을 다루게 되겠습니다. 조금 중요하고 예민한 문제네요. 헌금입니다. 전반적인 내용은 여러분들이 이 강의안을 참고하시길 바라구요. 그냥 핵심적인 것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한국 교회 신자들의 헌금의 열정이라고 하는 것은 무서울 정도입니다. 헌금과 지난 주에 보았던 기도도 그렇구요. 앞에 나온 전반적인 것으로 예배나 이런 것에 대한 열정은 강렬합니다. 아마 이런 정도로 우리처럼 열심히 헌금하는 나라 교회가 없을 것 같습니다. 미국처럼 부자들이 자기 재산을 기부하는 그러한 것 말고는 이렇게 일반신자들이 평소 신앙생활에서 드리는 헌금 행위만 놓고 볼 때 세계교회에서 우리가 가장 앞장선다고 볼 수 있습니다. 헌금종류도 참 많지요. 주일헌금, 구역헌금도 있구요. 구역예배 드리면서 헌금 드리죠. 안 드리는 교회도 있기는 있습니다만 드리는 교회가 많그요. 절기 헌금같은 것도 빠지지 않고 심지어는 생일 맞았을때 건축, 장학, 선교 각종헌금, 이거외에도 부흥회때는 또 부흥회 감사헌금도 드리구요. 또 어떤 부흥회때는 별미헌금도 드리더라구요. 마지막 시간에 야곱이 자기아버지에게 별미를 갖다 바치고 축복을 받았고 하는 이야기죠. 그런 것을 근거로 내세워서 여러가지 종류의 헌금 여기에 빠진 것도 많이 있겠지요.

어쨌든 헌금을 열심히 드린다고 한다는 것은 우리 신자들이 한국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많다 그렇게 읽습니다. 일단은요. 여기에 그걸 무조건 좋게만 보기 힘든 거는요. 헌금이 왜 필요한 가 그거는 뒤에 이야기하고요. 제가 보기에는 그것이 과도한 그냥 헌금행위만 무조건 좋게만 볼 수 없는 이유가 무언가 하는 거죠. 앞에 예배를 다룰 때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그것을 의무 법의 차원, 이거 예배드리지 않으면 주일성수라고 일컬어지는 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것처럼, 그걸 법으로 다루는 것이죠. 율법이지요. 이상하죠. 기독교가 율법과 복음 관계 속에서 철저하게 복음 중심으로 신앙으로 시작되었는데요. 그래서 바울이 율법을 예전 시키려고 하는 예루살렘 유대 기독교와 과감히 단절하면서 이방인 기독교를 세우고 그것이 역사적 모태인데도 불구하고 늘 복음 은총을 이야기하면서도 왜 이러한 주일성수 이런 것들을 법으로 강조, 강제 규정으로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무리 복음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도 틀이나 법이나 규칙이 있어야 되지 않느냐? 십계명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은총과 법 문제는 뒤에 다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어쨌든 예배와 헌금 이런 것이 상당한 부분에서는 법으로 지키지 않으면 큰일 날 것처럼 생각되고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의 복의 수단으로, 두 가지가 겸해 있습니다. 율법적이기도 하고 기복, 아 그렇군요. 복하니까 조금덜 와 닿는데 기복하면 되겠네요. 율법적이면서도 기복적인, 그러한 예배와 헌금 행태를 우리가 보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여기 목사님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오해하지 마십시오. 교회에 왜 헌금이 필요하냐? 그런 문제들은 당위니까 예 그건 우리가 다른 차원에서 이야기할 문제구요. 일반적인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헌금의 문제점들을 좀 집고 있는 겁니다. 그 문제점들을 집기 위해 집는 것이 아니라 그걸 집어야만 헌금의 의미가 바로 살아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의무와 복이라고 강의안에 썼습니다만 말하다보니 더 좋은 단어가 떠올랐네요. 헌금이 교회 안에서 율법적이고 기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거는 예배도 그렇고 그 이외에 다른 많은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종교행위들이 여기에 해당하는 겁니다.

가장 단적인 것은 십일조죠. 보통 헌금의 모든 거라고 할 수 있죠. 십일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위에 다시 올라가서요. 헌금종류가 많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을 해봐야 하는데요. 이게 교회 현실에서 교회를 운영해야 되니까요 일단 돈이 필요하구요. 헌금이 많아야만 전도프로그램을 짜고 신자들을 또 끌어 들일 수 있구요. 같이 맞물려 돌아가는 거거든요. 목사님들도 교회에서 과도하게 헌금으로 신자들을 끌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기는 알거예요.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래도 그런 방식으로라도 신자들을 가르쳐야 오늘과 같은 세속적이 세계에서 그나마 기독교적인 신앙을 지켜나가지 않겠느냐 이해하려고 하는 부분도 있기는 있습니다. 어쨌든 진도를 나가다가 다시 뒤로 돌아온 이유는 생각이 또 다시 들어서 그렇습니다. 너무 많다. 만약에 이런 헌금들을 일일이 다 챙기려면, 이것만이 아니죠. 웬만큼 규모가 된 교회들은 심방왔을때 심방 감사헌금을 드리기도 하더라구요. 그게 교회에 들어가기도 하지만 상당한 경우에는 심방 온 교역자들의 거마비 비슷하게 사용됩니다. 체면이 있는 그러한 교회 중직을 맡은 사람들은 또 다른 사람들이 하는데 자기는 안할 수 없거든요. 차비하십시오. 촌지형식으로 드리는데요. 이런 저런 여러 가지 헌금들을 교회 신앙생활을 규모 있게 잘하기 위해서 신자들이 쏟아 붇는 총액수는 굉장히 많을걸요. 큰 프로테지를 차지할 겁니다. 네. 좋습니다. 인제 그렇게 헌금을 좋은 뜻으로 내었으니까 바르게 쓰느냐하는 문제인데요. 헌금을 얼마나 바르게 사용하는가 하는 문제 사실은 그런 것까지 이야기해야 하는데 할 여유는 없습니다.

어느 교회입니까? 뉴스엔조이에 나온 것을 잠간 보았는데요. 높은뜻 숭의교회, 탈북자들을 위한 공장을 짓기로 했다네요. 상당히 보수적이고 깨어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진보적인 입장에서 볼때는 비판하고 있지만 교회가 상당히 좋은 일들을 많이 합니다. 미안합니다. 좋은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 상당히 진부하기는 합니다만 진보적인 교회보다 오히려 보수적이면서 깨어있는 교회가 이러한 사회개혁적인 그러한데 헌금을 더 많이 투자하고 있다는 이 역설적인 현상을 참 고민해야 됩니다.

네 헌금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십일조만 하더라도요. 이게 어떻게 율법적으로 받아 들여지나하는 거는 여러분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제가 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말라기서라든지 그 외 여러 군데 있거든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다 이런 이야기 말이죠. 근데 이게 어느 정도 상식적으로 어느 정도 준비된 목사님들은 이렇게 까지는 안합니다. 건전하게 끌어나가는 데요. 한국 교회 전통이니까 그냥 잘 하면 좋은 쪽으로 헌금을 쓰면 괜찮으니까 해요. 그런데 이걸 아주 강압적으로 하는 교회들이, 지금은 좀 많이 줄었겠습니다만 그러나 상당히 많을 거라고 봅니다. 네. 그냥 옛날식으로 무식하게 하지 않지만 상당히 고상한 방식으로 십일조를 율법적이고 기복적인 형태로 밀어붙이는 경우는 없지 않아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그 이야기는 길게 하고 싶지 않는데요.

십일조는 세계 전체 교회에서 우리나라만 한다고 하는 것은  분명하구요. 물론 미국에서도 복음주의적인, 그리고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오순절 교회 그런 계통은 하기를 할 겁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하지 않구요. 제가 있었던 독일교회는 물론하지 않습니다. 거기는 자신이 호적 등록할 때인가요. 종교란에 선택을 해야 됩니다. 개신교인가 아니면 가톨릭인가 아니면 무교인가? 종교가 없다고 종교란에 선택을 하지 않으면 종교세를 떼지 않습니다. 액수가 제가 정확하게는 모릅니다만 세금의 10분의 일입니다. 세금의 10분의 일, 우리의 소득의 10분의 일이 아니라 소득의 국세 나가는 것의 10분의 일이니까 우리가 1년에 3백만원 세금을 낸다면 30만원이 종교세로 빠져나가는거거든요. 그리고 교회에 가서는 헌금시간이 있는데 푼돈으로 합니다. 독일 돈으로 제가 옛날에 보니까 1마르크 2마르크는 합니다. 천원 정도 하죠. 그런 것들은 주로 아프리카 자매결연 어느 마을에 트랙터 사주기 모금, 뭐 이런 식으로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필요한 것들은 종교세로 해결하죠.

우리야 뭐 그렇게 원천징수를 할수는 없습니다만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총회 차원에서 노회차원에서 헌금을 관리해서 모든 교회에 골고루 사용되어질 수 있는, 큰 교회에서 내는 헌금이나 작은 교회에서 내는 헌금이나 일괄적으로 관리하는 것은 한쪽에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굳이 목사들이 큰 교회 가려고 머리 디밀고 싸우려고 하지 않거든요. 큰교회 가봐야 골치 아프고 힘만 드는데요. 이건 제가 너무 인간적인 방식으로 말씀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문제는 돈이거든요. 사실은요. 교회 개혁, 교회일치운동, 사실은 모든 것이 돈에 연관되어 있습니다. 헌금을 어떻게 내고 어떻게 쓰느냐 이것이 교회 개혁의 중요한 문제인데 모두가 입다물고 있죠. 독일교회는 헌금방식으로해요. 바람직하다고 생각을 해요.

제가 왜 그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십일조라고 하는 것, 구약성서에 나와 있는 이야기는 말 그대로 유대인의 삶의 자리에서 나온 하나의, 뭐라고 해야 될까요? 종교세이기도 하고 국세이기도 하구요. 그 당시에는 그게 나눠지지 않는 거거든요. 종교와 국가가 일치된 사회였기 때문에 그 방식으로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인제 십일조가 구약에 있는 애기를 어느 정도 해야 되는가 하다가 순간적으로 놓쳐 버린 거예요. 다 하게 되면 복잡하게 되구요. 구약에 나와 있는 십일조 전승도 여러 가지 종류입니다. 레위 사람들 성전을 중심으로 해서 자기 토지를 분배받지 못한 그 지파를 위해서 나머지 지파가 십시일반으로 모아서 내는 십일조 종류가 있구요. 또 어떤 때는 과부들을 구제하기 위한 3년 만에 한번 내던가요. 그러한 것들이 있구요. 기본적으로 국세가 없기 때문에 그 낸 것으로 다 해결되는 것이구요. 유대인들이 십일조 제도를 얼마나 실제적으로 실행했는지는 그렇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것들, 구약에  나와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실행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안식년 희년 이런 것도 문서에만 남아있지 실질적으로 그렇게 행하지는 않았습니다. 7년마다 모든 것을 제 자리로 돌리기만 한다면 상당히 정의로운 복지 시스템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사회질서가 근본적으로 허물어지는지는 거죠. 생각해 보세요. 볼세비키 혁명이나 북한에서 일어난 토지혁명이 농지혁명이 7년마다 계속 반복된다고 해보십시오. 모든 것이 다 뒤죽박죽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정신은 좋은 거죠. 시간이 지나면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일어날 수 밖에 없거든요. 어느 사회든지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사회라고 한다면 여러가지 이유로 해서 그러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일어나고 자본이 축적되게 됩니다. 잉어생산이 거기에 들어가게 되구요. 결국으로 사회가 구조적으로 불의하게 되거든요. 악하게 됩니다. 그거를 제자리로 돌려 놓고자하는 안식년과 희년 안식일 제도부터 나온 것이죠. 그건 정말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굉장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안식일은 정확히 지켜졌습니다만 안식일만 이야기하려고만 하더라도 시간이 많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안식일을 지킨것은 아닙니다. 안식일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다 예배를 드린 것은 아닙니다. 가까운 회당에 들어가서 말씀을 듣고 나오구요.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성전이야 예루살렘에 있으니 거기는 일년에 몇 번만 갑니다. 몇 번도 다 가지 못합니다. 그럴 여유가 있는 사람만 가는 거죠. 안식일은 말 그대로 쉬는 날입니다. 안식일을 성수주일, 성수주일 이렇게 나가게 되면 사실은 왜곡하는 거죠. 오해하지 마십시오. 주일 지키지 않고 매일 놀러 다녀도 좋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놀러 다니는 것이 쉼이 아니죠. 정말 참된 쉼 이것을 찾아야 되는데, 사실은 큰 교회나 어느 정도 규모가 된 교회는 목회자가 주일날이 제일 힘들고 일반신자들도 제일 힘들 거에요. 그건 안식일이 아니고 종교 행위입니다. 예배드리지 않아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을 돌리는 진정한 의미의 휴식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왜곡될 수 있다고 하는거죠.

십일조도 유대인들이 처한 특별한 삶의 형태에서 나온 하나의 종교형식이었다. 그들이 예를 들자면 돼기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그들의 삶의 경험이거든요. 제가 언젠가 다비아에 그런 글을 한번 썼습니다. 돼지고기와 십일조. 그들은 아주 건조한 땅 위생 건강이 나쁠 때 고지방질을 먹으면 전염병에 약하게 되거든요. 취약하거든요. 그래서 돼지고기 먹지 말라고 하는 그런 법을 만들었는데요. 그건 지금 안 지키잖아요. 사람들이요. 그런데 십일조는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 이렇게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취사선택하자는 것인지. 편리한대로 받아들이자는 건지 아전인수인거예요. 네 그러니까 복잡한 사정들이 다 있습니다. 십일조를 하라 하지 말라 저는 그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구요. 속이지 말자. 꼼수 쓰지 말고 정상적으로 하자. 십일조 헌금 안해도 하나님 것 도적질한 것 아니고 그래도 망하지 않고 반대로 십일조 아무리 꼬박 꼬박 바쳐도 창고가 넘치도록 축복받는 일이 없습니다. 그건 말라기서에서 그 당시에 말라기가 그렇게 메시지를 전하지 않으면 안 될 그러한 형편이 있었던 것이죠. 그런 것을 전제하지 않고 그 시대 삶의 형편 그런 것을 충분하게 고려하지 않고 거기서 선포된 것을 그대로 따다가 지금 몇 천년 후입니까? 2천 7,90년전의 이야기를 지금 이 시대 그대로 문자적으로 적용시킨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예요. 그리고 거기에 한국 기독교인들의 매달려 산다는 것이 정말 기독교인의 자유인지요.

저는 어떤 면에서 십일조는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빌미라고 할 수 있는 면죄부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 현재 개신교에서 통용되고 있는 십일조 그 개념, 율법적이고 기복적인 그러한 것들이 오백년전에 마틴루터의 시대에 로마 가톨릭교회가 면죄부를 판매한 것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언제 기회가 있으면 십일조와 면죄부라는 제목으로 글을 한번 써볼까 하는 생각이 지금 문득 드네요. 면죄부라고 말하고자 하면 우리가 좋은게  좋다고 생각하면 다 좋은겁니다. 면죄부 왜 좋은지 아세요? 그들이, 로마 가톨릭의 기본적인 신학의 기본적인 개념이 천국과 지옥만이 아니라  연옥개념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이단이지 그렇게 말하면 또 무식한 소치입니다. 왜 거기에 연옥개념이 들어올 수밖에 없었는지 다 성서적 배경이 있습니다. 죽은 이후의 세계가 얼마나 다층적이고 복잡합니까? 구약이 다르고 신약이 다른데 말이죠. 오늘 우리가 거기에 들어가지 말고요. 연옥 개념이 있기 때문에 거기 들어간 사람들이 완전히 구원받지 못했지만 완전히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 부모, 친구, 조상들을 위해서 면죄부를 사서 헌금하면 헌금이 헌금함에 떨어지는 딸랑하는 소리와 함께 그 영혼이 하늘나라로 간다. 이렇게 제가 선정적으로 그 내용을 전달하자면, 그렇게 했습니다. 좋은쪽으로 본다면 좋은겁니다. 우리 부모가 열심히 신앙생활하지 못했구요. 불안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헌금을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니 그렇게 되면 속된 표현으로 누이좋고 며누리좋고 하지 않겠어요. 마음의 평안도 누려지고 말이죠. 그리고 면죄부 판 돈으로 베드로 성당, 짓고 있고 있었기 때문에 지을수가 있었구요. 예술 작품 남기고요. 그래서 몇백년 후에까지 남아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구심점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방식으로 우리 한국 교회에서도 교회를 많이 짓고 있잖아요. 제가 이런 문제를 너무 오래 잡고 있군요.

이런 것들이 사실이 다른 데에서도 그러한 뉘앙스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이렇게 하나의 문제를 가지고 사실은 기독교 신앙 전체를 연관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게 하나의 문인거예요. 십일조라고 하는 하나의 문을 통해서 들어가면 기독교 전체에 대한 어떤 것들, 이거를 더 잘 여러분들에게 잘 설명하려면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헌금이해도 설명해야 되잖아요. 그러자면 성서개론도 말을 해야 되고요. 또 하나님께  헌금을 드린다고 할 때 하나님이 누군가 알아야 되잖아요. 신론도 들어오게 되겠구요. 여기에만 머물러서 30분이상 보내고 있습니다만 다 필요한 이야기입니다.

한번 연관해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십일조와 면죄부, 그런데요. 역사인데 우리는 딱 면죄부 잘못 되었다. 탁 머리에 들어오죠. 십일조 잘못되었다 머리에 잘 안 들어오죠.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 잘 안보입니다. 안에 들어와 있는 겁니다. 우리는. 그 당시에 사람들도 이거에 대해서 전혀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몇몇 사람들만 문제의식을 느낀 거거든요. 루터같은사람들이요. 교황주의자들, 그런 사람들은 당연히 이 방식을 통해서라도 교황의, 교황을 중심으로한 종교의 토대를 세운다고 하는 얼마나 당연하게 생각을 했겠어요. 여러분들도 아마 교회사나 역사 세계사를 통해서 들었겠습니다만 그 당시 사제직을 팔고 그런 문제도 있었는데 다 가능한 일들입니다. 그 당시 문제로 느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문제로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 들여진 거예요.

우리도 마찬가지 인거예요. 그래도 그렇게 해야 뭐가 되지 않느냐? 밑에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래도 무조건 따라가구요. 위에 교회 지도자급에 있는 사람들, 거기에는 인제 꼭 목사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평신도 장로들이나 오피니언 리더 이런 사람들도 자기가 동의하지 않는다하더라도 저 방식으로 해야 교회가 부흥한다면 동의하게 돕니다. 그러니까 이게 뭘 좀 아는 사람들은 그래도 눈감고 넘어가야 그 교회 안에서 어떤 것을 누릴 수 있구요. 제가 좀 야박하게 이야기하죠. 네 사실은 그런 게 많이 있습니다. 밑에 있는 사람들은 조금 무식한 사람들은 우리교회 의사, 변호사, 검사, 교수들이 저렇게 다 헌금하고 기도하고 그러니 옳은가부다 면죄부 다른 사람이 사면 따라 사듯이 따라서 하는 거죠. 안 그런가요?

네 헌금은 근본적으로 복이 아니라 축복도 아니라. 여러분 헌금 바친다고 하더라도 복하고는 관계없어요. 그걸 알고 하십시오. 잔소리 같죠. 하도 그게 신자들이 머릿속에 무기억속에 덮혀 있어서 제가 알레고리 반응식으로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은총이예요. 은총. 모든 게 하나님 것이죠. 사실은요. 제가 미리 하나님의 것이죠. 독일어로 제가 미리 써두었는데요. 비에르데 게헤르코트???

1985년 제가 독일에 유학하고 있을 때입니다. 뮌스터였어요. 독일에서는 격년제로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교회가 각각 교회의 날이라고 하는 행사를 합니다. 격년제로요. 1985년 그 해가 홀수해인데요. 그해가 개신교, 그때는 통독되기 전이죠. 독일교 신교회 연합회 키르헨탁이라고 합니다. 교회의 날,  우리로 말하면 선교대회가 되죠. 독일의 키르헨탁 설명하려면 10분 15분정도 필요한데 나중에 하고 지금은 지나가겠습니다. 그게 부러워서요. 와 우리는 못하나 평신도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해서 사회적 이슈를 신학화 하고요. 거기에 신학교 교수들사람 많이 오구요. 제3세계 지도자 초청하고 네 정말 멋집니다. 뒤델도르프라고 하는 도시에서 이게 열렸습니다. 그러면 도시 전체가 한 일주일동안 이 심포지움, 이러한 여러가지 퍼포먼스도 열리고 온갖 종류의 그 행사들이 열립니다. 연극, 음악제, 강연, 설교 예배 어쨌든 참 부럽습니다. 도시로 돌아가면서 격년제로 하죠. 그 해의 주제가 바로 이거였어요. 디 에르데 게오르코 “지구는 하나님의 것이다.” 생태 문제들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이 은총론을 신자들에게 잘 가르치면 그리고 교회 공동체라고 하는 어떻게 살아야하는 것을 잘 이해하면 그 안에서 인제 헌금 어떻게 해야 되겠다 답이 나오는 거죠. 그러니까 자발적으로 그때는 하게 되고요. 약간 비자발적으로 하더라도 무리하게는 안하는 거죠. 합리적으로 하는거죠. 자발적 민주주의 이런방식으로 해야 하는 거죠. 돈은 다 경제문제니까 돈, 경제 이건 제도의 문제이거든요. 이런 것들을 가장 좋은 것으로는 은총론에 근거해서 해결해야 되고 그렇게 하지 않을 때는 최소한도 합리적 민주적인 절차로 이런것들을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될게 뭐가 있어요. 이 두개가 서로 다 서로 긴장관계로 연결되었으면 좋겠죠. 은총론에 근거해서 합리적 민주주의적 절차에 의해서 드려지는 헌금의 운영, 그리고 교회제도 그런 것들이 하루빨리 좀 와야겠습니다. 올까요? 개신교에 그런 날이 올까요? 조금 저는 비관적인데요. 하나님이 하시니까 절망하지 말고 그 분이 하실 때를 기다려야겠죠.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조금씩 해나가고 말이죠. 은총이다. 그런 은총론 그런 것들이 막연하게 들릴지 모르겠네요. 더 이상 고거는 안하고 지나가겠습니다.

성찬문제, 지금 교회의 본질과 형태에 대하여 이야기하는데 기도 헌금 예배 그런 것을 주욱 이야기 했구요. 성찬 이게 굉장히 중요한 건데요. 이거는 그냥 지나갈까요? 예. 초기 기독교는 실제로 밥을 같이 먹는 애찬식, 지금 우리 샘터교회에서도 매주 하는데요. 같이 먹는 것, 밥상 공동체, 그게 하나 있었고 또 하나는 간단한 빵으로 의식을 거행하는 성찬식, 두개가 있었습니다. 이거는 모든 신자들이 참석하는 거고 이거는 조금 기독교 신앙에 깊이 들어오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거, 그런 전통이 있었습니다. 이거를 절대적이라고 할 수 없고 성찬식 어쨌든 중요한 문제인데요. 아, 저는 성찬식의 궁극적 의미가 두 가지라고 봅니다. 하나는 구원론적 의식, 리터지, 구원론적 종교의식, 구원론적 삶의 태도, 종교의식은 우리가 다 아니까 접어두고요.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우리가 죄에 대해 죽고 생명에 대해 사는 그러한 구원론적 의미가 있구요. 거기서 떨어나가지 않고 그러한 삶의 태도, 세계와 더불어서 나눔이라고 하는 인간의 삶과 그 생명과 종교 의식이 다 성찬식와 연관되어 있다고 하는거요. 빵의 나눔, 하나의 빵과 하나의 포도주잔, 같이 먹고 이걸 같이 먹고 같이 둘러서 사람들이 둘러서 빵과 잔을 먹고 마심으로 이것은 실제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종교적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물질적인 것과 그것 이전에 모든 이웃들과 연대성 solidarity 을 확보한다는 것, 같이 먹고 마신다고 하는 것, 사회보장 복지는 성만찬의 확대라고 볼 수 있으면 좋습니다. 오늘의 사회복지활동, 김지하가 예수 밥이라는 글도 들어 있습니다. 밥이죠. 제목이.

예 그 성만찬에 대한, 빵과 포도주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이 되냐.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오늘 21세기에도 우리 기독교인에게는 물의 영성화가 필요하다. 사물 물(物)의 영적인 의미, 독일어로 빙이라고 하는데요. 하이데거가 그런 세계를 열어줍니다. 다리, 구두, 사물이라고 보는 그런 것들 거기에 어떻게 영적인 의식이 활동하냐 이게 주술적으로 나가는 것은 아니구요. 그 얘기는 들어가지는 말아야 되겠구요. 필요하기는 한데. 나중에 그거는 미루겠습니다. 말을 할 기회가 오겠지요. 하이데거가 4중자, 네가지 요소가 물, 잔을 이루는데 어떻게 임하냐 그러한 존재론적, 하이데거의 세계 이해를 통해서 이러한 성만찬의 의미를 더 실질적으로 이해하게 되거든요. 물질이 어떻게 삶과 죽음과 영혼과 그런 것들이 같이 회집하는 장소가 되는가? 네. 여기까지 마치고.

그 다음에 교회 행태들 중에 몇가지들요. 목사, 장로 이런 이야기들입니다. 한국교회 목사들이 많죠? 한 10만명 된다고 그러죠? 네. 목사들이 너무 많죠. 그런 문제 또 하기 시작하면 또 한이 없네요. 네 대량 생산되는 있는. 요새는 갈데가 없는데도 꾸역 꾸역 배출되고 있는 이 현상, 이걸 어떻게 이해하고 뚫고 나가야 될까요? 자리가 없어서 택시기사를 하는 목사들이 수천명 이상이 된다고 한다고 하고 그냥 큰 교회 부목사라고 하는 이름을 걸어두고 실제로는 활동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구요. 이름이라도 걸어둬야 작은 교회라도 가는 경력을 얻어지는 거거든요. 그렇게 많이 배출되는데 그게 양질의 목사들만 배출 되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문제들이요. 여러가지로 많이 복잡하게 꼬여져 있어서요. 어떻게 풀어나가야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이야기는 그만두겠습니다.

한국교회에서는 목사에 대한 인식이 극단적으로 두 가지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목사를 신격화하여 주술적인 대상으로 무당처럼 생각하는 것이죠. 목사가 자기 집에 한번 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복이 임하는 것처럼 말이죠. 전도사가 집으로 심방 오는 것 싫어하고 목사가 와야 한다고 생각하죠. 목사 자신의 신격화 목사 스스로도 그것을 조장해 나가고 있구요. 목사의 독특한 카리스마가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카리스마라고 하는 것은 어떤 외적인 권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카리스마는 은사를 이야기하거든요. 성가대원도 카리스마예요. 목사도 그중에 하나로서 카리스마가 있는거죠. 교회법에 의해서 이 카리스마는 높낮이의 차이는 없어도 서로 배타적이라고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남의 카리스마를 침범할 수는 없는거예요. 목사가 자기가 노래하고 싶다고 해서 성가대원들을 내쫒고 자기가 노래를 부르면 카리스마의 원리로부터 벗어난 겁니다. 목사에에 주어진 카리스마는 두 가지 성례식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죠. 그런점에서 평신도의 설교에 대해서는 반대합니다. 이거는 목사들만이 꼭 하나님의 뜻을 잘 안다거나 그런 차원이 아니라 교회의 카리스마의 원리에 의한 것입니다. 주일학교 교사는 그 일을 잘하면 되면 되고요. 만약에 주일학교 교사 중에서 설교하고 싶다고 생각하면 그러면 인제 소정의 신학교 교육을 받고 목사를 하면 됩니다. 그런데 일반 평신도들의 설교권은 논란이 많이 있습니다. 침례교회에서는 그것이 많이 열려져 있는 것 같구요. 거기까지 나가면 말이 길어지고요. 어쨌든 목사의 신격화는 문제이다 그러나 카리스마는 보장되어져야 한다. 이게 하나의 극단이구요.

또 다른 현상은 점점 더 이런 쪽으로 흘러오고 있는 것 같은데요 목사에 대한 피고용의식입니다. 교회가 목사를 고용했다는 의식이 강합니다. 지금 그렇게 일종의 고용 사장입니다. 그런 현상이 어느 정도까지는 제가 일일이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교회도 있고 아닌 교회도 있고 아주 건전한 교회도 있기는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장로들 중심으로 파워가 센 교회에는 시험 치듯이 목사들이 가서 설교해 봐야 되구요. 그거야 뭐 하나의 검증이니까 뭐 그런 대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만 목사가 와서 몇년내 교회 부흥시키지 못하면 장로 눈치 봐야 도구요. 고용사장이 회사를 잘 부흥시키지 못하면 주인들한테, 이사들의 눈치를 보듯이 그런 형편이구요.

고 대목의 마지막 패러그래프를 보겠습니다. 정리했는데 목사직은 여전한 주술적 기대와 새롭게 대두된 합리주의적이고 도구적이고 기능주의적인 성직자관으로 인해서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다. 이런 교회관은 이 시대정신만이 아니라 목사탓이 크지 않느냐 이렇게 정리를 했습니다. 마지막 단락은 네. 그만 두겠습니다.

장로 문제요. 이 문제도 제가 자세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냥 마지막 단락만 보면요. 장로제도가 한국 교회를 부흥시킨 좋은 에너지 역할을 했는데 이제는 문제점들이 제가 보기에는 더 많습니다. 이게 뭐냐 이런 것들은 접어두고요. 그거는 다른 직분들하고 다 연관시켜서 교회 직분에 대한 한국 신자들의 넘치는 열심, 그 집착이 뭘까? 평신도들이 왜 그렇게 왜 직분을 받으려고 애쓰는지 나는 그것을 이해를 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냥 제가 쉽게 이야기하는건데요. 왜 이해를 못하겠습니까? 하긴 하는데요. 그냥 정말 안타까와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안수집사, 조금 특별한 게 안수집사이구요. 또 여자분 들은 주로 권사, 정점, 직분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장로인데요. 주욱 올라가죠. 안수집사가 되어야 장로가 되고. 제가 만약에 평신도라고 한다면...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말하기 힘드네요. 이미 기존 교회의 질서에 교회를 더 봉사를 해야 되니까? 있는 거를 더, 그 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일하기 힘든 거라 말입니다. 그러니까 좋은게 좋은 것으로 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러나 지금 솔직한 심정으로 말씀드린다면 이런 거 안할 거예요. 그냥 예배만 잘 드리는 정도로 하구요. 꼭 필요한 경우에는 봉사를 할 수 있을지 모르지요. 그러나 가능한대로 그런 것을 지워 나갈거예요. 일단 교회전체 구조하고도 연관되는데 교회 일이 너무 많아요. 자꾸만 평신도 지도자를 세워나가야 되는 건데요. 그게 세뇌가 되어서 그런지 정말 하나님 은혜인지 한국 교회 신자들은 그걸 즐거워 하는거거든요. 힘들면서도 즐거워하는 것 같아요. 어쩌면 금욕적이면서 가학적인 증세, 심리적으로요. 그런 것이지 않을까요? 사람은 이상해서 자학적인것에도 쾌감을 느낍니다. 제가 지금 선정적으로 이야기를 했는데요. 조금 강하게 말씀드리려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장로되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많이 씁니까? 장로되지 못해서 교회를 나간다 만다 서로 당파를 짓고 말이죠. 왜 이럴까? 그리고 왜 교회안에 직분 서열이 많을까? 서리집사는 뭐고 안수 집사는 뭔가? 그것도 조금 코미딕하지 않습니까? 집사는 뭐고 장로는 뭔지 뭐하러 그런 구분을 두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침례교회제도가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거기는 몽땅 다 집사거든요. 여기는 교회관리라고 하는 메카니즘에서 이렇게 서열화 해야 서로 경쟁심이 붙어서 서로 할려고 하는 그러한 심리가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

어쨌든 신자들은 고생 많습니다. 목사들이야 주일 그렇게 수고하더라도 월요일이라도 쉬죠. 그리고 주중에도 눈치껏 목사들은 쉴 수 있거든요. 정 힘들면 기도원에 간다고 하고 거기서 쉬어도 되죠. 평신도들이야 일주일 내내 노동현장에서 시달리다 주일날도 그렇게 되고 참 대단합니다. 이 직분에 대한 과도한 열심, 이걸 조금 진정시키는 게 한국 교회의 멀리 내다보고 건강성 회복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결국은 이게 당회의 교회권이 집중되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제 의견은 당회를 해체하는 거요. 해체하지 않으면 당회를 임기제로 하든지요. 그냥 당회는 원로급으로만 형식으로만 해놓고 실질적으로 교회는 여전도회 대표, 청년회 대표, 이런 사람들이 있어서 교회 운영위원회, 이런 사람들을 실질적으로 교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면 내 생각에는 그렇게 굳이 장로 뭐 되겠다 하지 않을 거 같애요. 좋잖아요. 그냥 원로로 대우해주고 실제적인 문제들은 교회 운영위원회에서 하고 말이죠. 성별 나이별 골고루 다 대표들이 다 할 수 있는 거 말이죠. 안될까요? 안될 이유가 없는데요. 한국 교회는 당회가 모든 것을 다 독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여성안수도 말할 거 없죠. 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네 아까 제가 말씀드린 공지사항, 혹시 늦게 오신 분이 있을까 말씀드립니다. 다음 주 목요일 휴강, 6월도 강의 쉬지 않고 나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편히 주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