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공부, 2015520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6장 욥의 대답(1)

 

욥기는 인간에게 임하는 재앙에 대해서 신학적인 논쟁을 전개하는 성경이다. 재앙의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확실한 대답은 마지막까지도 주어지지 않는다. 다만 그런 재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의와 선과 전능은 부정되지 않으며, 따라서 이런 재앙 가운데서도 인간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고, 더 나가서 찬양할 수 있다. 이게 가능할까? 그리고 옳은가?

 

1-7: 엘리바스의 충고를 들은 욥은 자신이 하나님께 반항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괴로움과 파멸이 바다의 모래보다 무겁다. 그래서 나의 말이 경솔할 수밖에 없다. 공동번역은 나의 말이 거칠다면, 그 때문이리라.’고 번역했다. 그는 자신이 이유 없이 전능자의 화살’(4)을 맞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전능자라고 한 이유는 그 재앙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8-13: 욥은 절망적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을 것 같다. 그는 9절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죽여주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고통이 너무 심해서 죽고 싶다는 절규에 떨어진 것만은 아니다. 더 깊은 의미가 여기에 있다. 욥이 하나님에 의해서 죽임당하는 것을 기뻐하는 이유는 고통 가운데서도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자기가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대단한 신앙이다. 웬만하면 고통 가운데서 기가 죽어 회개하라는 말을 따르고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릴 텐데, 욥은 끝까지 자기가 재앙을 받을 정도로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붙들고 있다.

 

14-23: 자신의 입장을 앞에서 설명한 뒤에 욥은 이제 자기를 충고하는 친구들을 맞상대한다. 친구들은 욥을 동정하는 게 아니라 가르치려고 한다. 욥은 그들을 믿을 수 없다. 그들은 개울처럼 변덕이 심하다. 길을 벗어나서 광야로 들어가 물을 찾다가 죽는 대상(隊商)과 같다. 욥은 그들에게서 직접적인 도움을 바라지 않고 이해만을 바란다(22,23). 충고나 상담은 쉽지 않다. 그게 오히려 해악을 끼칠 수가 있다. 특히 종교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지혜로 어떤 사태를 재단하는 경우가 많다. 기도해라, 회개해라, 교회에 잘 나와라, 등등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경우에 따라서 그런 처방이 필요할 때가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상대방을 이해해 주는 것이 최선이다. 설교자도 신자들의 삶을 규정하고 처방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 앞에 서도록 인도하는 것에 머물러야 한다.

 

24-30: 욥은 친구들을 좀더 강하게 압박한다. 죄의 탓이라거나 교육적인 기회라는 말만 하지 말고, 욥의 잘못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라는 것이다. 그럴듯한 말이 오히려 욥에게는 고통스럽다(25). 친구들의 말은 교언영색(巧言令色)이다. 28절에 따르면 친구들이 욥을 외면하는 것 같다. 욥이 고통으로 인해서 판단력이 흐려졌다고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그는 정색하고 다음의 사실을 말한다. ‘나의 의가 건재하다.’(29)고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긋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대단한 확신이다. 이런 확신이 없었다면 그는 친구들의 충고에 맥없이 나가떨어지거나, 적당하게 타협했을 것이다. 욥의 이런 태도는 옳은가? 자기의()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