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공부, 2016316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42: 하나님 경험

 

에피소드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시합- 이세돌은 일방적인 승리를 말했다가 거꾸로 당했다. 빅테이터에 의한 바둑 수읽기가 인간의 수읽기를 넘어섰다는 뜻이다. 암산이나 주판을 아무리 잘 하는 사람이라도 계산기를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장 큰 차이는 사람의 흔들리는 멘탈이다. 알파고는 대상이나 분위기 등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기 때문에 자기실력을 100% 발휘할 수 있다. 구글은 일주일 사이에 50억 이상의 주가를 올릴 수 있었다. 앞으로 구글 같은 정보회사가 인류 역사에서 황제 역할을 하고, 더 나가서 신의 경지에 이를 것으로 예측된다. 그게 사실이고, 이런 변화 앞에서 기독교는 하나님을 어떻게 말할 수 있나?

 

욥기 마지막 장 42:1-6절에 욥의 반응이 나온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5)라고 한다. 재앙이 죄의 결과라는 지혜전통에 맞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판결을 받고 싶다는 욥의 기대가 성취되었기 때문에 그는 딱 떨어지는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하나님을 경험한 것이다.

38-41장은 자연의 깊이와 비밀을 말한다. 여호와는 욥을 향해서 자연 현상의 원인을 아느냐고 질문한다. 그것이 우리를 초월해 있다는 뜻이다. 자연이 초월적인 이유는 하나님이 그것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이를 반대하는 주장도 많다. 결국 자연은 인간의 기술에 의해서 정복당할 것이기 때문에 초월적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게 신학과 과학기술 사이에 벌어질 논쟁의 핵심이다. 현대는 과학기술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과학기술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날이 올 것이라는 낙관론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 하이데거는 기술과 전향에서 기술의 본질이 자연을 닦달(Ge-stell)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닦달은 강제적으로 끌어내는 것을 가리킨다. 어느 한도까지 자연은 인간 기술의 요구를 듣겠지만 결국에는 인간 전체를 위협하는 상황으로 나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위험이 가까워올수록 구원자에게 이르는 길은 더 밝게 빛나고, 더 질문하게 된다.’고 한다. 질문이 사유의 영성(die Frömmigkeit des Denkens)이기 때문이다(101).

 

자연과 과학의 관계는 심층적이다. 자연의 본질과 과학의 본질을 우리가 여전히 다 아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연관해서 몇 가지 경구를 참고하라. 비트겐스타인- <논리철학> ‘그것에 관하여 말할 수 없다면 침묵을 지켜야 한다.’, 불립문자, 공즉시색 색즉시공, 판넨베르크- die alles bestimmende Wirklichkeit., 화이트헤드- Reality is pocess., 폴 틸리히- ultimate concern, 성경- 무로부터의 창조, 예수의 재림, 종말 심판...

 

하나님을 눈으로 본다는 것은 어떤 환상이나 환청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존재 신비를 또렷하게 경험했다는 뜻이다. 거룩한 두려움(누미노제)이 여기에 가장 가까운 말이다. 하늘의 별을 볼 때 느끼는 아득함도 여기에 포함된다. 성경에는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린다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욥은 2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 못할 게 없다는 말은 세상을 자기의 기준으로 재단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사람은 매 순간 일희일비한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은 삶을 전체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로부터 자유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