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답시간(080330) 부자와 나사로, 보이지 않는 현실성

시원한 대답을 드리는 것보다는 스스로 질문할 수 있도록 하는데 목표가 있는데요 질문을 잘 안 하시는 것 보니까 제 강의가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 지금 올리셨군요.

질문: 예수님이 말씀하신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비유 말씀인지 또 신인동성동형론과의 관계는?

신인동성동형론하고는 관계가 없고요. 천국과 비유의 말씀도 아니고요. 그건 또 어떤 관점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서 조금씩 달라지겠습니다마는 구체적으로 몇 장 몇 절인데요. 16장. 오늘은 제가 여러분들이 질문이 없으면 제가 오늘 설교한 것 ‘보이지 않는 현실성’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보충 설명해볼까 합니다. 질문을 쓰셨으니까 잠간 보겠어요. 사실 성경 한 부분을 해석한다고 하는 것은 독립된 단락도 나름대로 중요하지만 전체 맥락, 한장 안에 있는 누가복음 전체 맥락과의 관계에서 관계를 놓치지 말아야 되구요. 늘 전체를 다 본다는 것은 힘들구요. 어떤 흐름이 있거든요. 부자와 거지에 대한 이야기가 어느 맥락에서 거론된 것인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16장에 보면 옳지 않는 청지기 비유가 나오고요. 소제목을 제가 읽고 있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이야기는 이거는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은요. 고대인들의 어떤 세계이핸데요. 저는 지금 그게 있다 없다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성서에 나와 있는 그러한 개념들이, 딱 이렇게 결정되어서 진술되는 게 아니라 이렇게 해석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 겁니다. 그게 어느 시간에 딱 결정되어서 그것이 그대로 고수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생각들이 풍부해지구요. 주변의 영향을 받으면서 더 심화되고 그러한 과정에 있는 거예요. 천국과 지옥 이런 것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부활에 대해서도 좀 이야기한 것으로 생각되는데요. 그것이 주변이 여러 다른 종교들에서도 영향을 받고, 유대교에 뿌리를 두기도 하구요. 초기 기독교 공동체 고유한 예수님에 대한 경험이기도 하구요. 그런 것이 두루두루 섞이면서 초기 기독교의 신앙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부자와 거지 비유를 거론하면서 아 예수님도 천국과 지옥이 있었다 말씀하셨다라든지, 뭐 그런 방식으로 이야기하구요. 또 이걸 아전인수로 해석한다면 윤석전 목사님이 하시듯이 거지 나사로는 예수님을 사생결단하고 잘 믿었다. 그분의 trademark 인가요. 결사적으로 예수님을 잘 믿었기 때문에 천국에 갔다. 이 땅에서는 비록 구더기처럼 살았지만 그러나 아브라함 품에 안겼다. 그렇게 이야기하거든요. 이것이 신인동성동형론,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고요.

이것은 하나의 비유이기 때문에 뭘 애기한다고 할까요? 지금 이 자리에서 제가 충분하게 준비를 하고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딱 단정적으로 말씀 드리기는 힘듭니다. 다만 상식적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두 가지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거지와 나사로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두가지.

첫째, 우리 죽은 이후 우리 운명에 대한 것은 하나님만 결정한다는 하나님의 결정권을 말하는 것. 이것만이 아니라 최후의 종말에 대한 마태복음에 나와 있는 것도 다 그런거예요.  오른편과 왼편에 나온 사람들, 자기들이 생각했던 것과 정반대로 결정되거든요. 하나님의 판단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어떤 상식을 뛰어넘으니까요. 전혀 준비 않는 사람이 우편에 간 걸로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거지 나사로와 부자도, 어떻게 보면 부자가 아주 고상하게 살았고요. 윤석전 목사님은 여기서요. 부자는 예수님을 잘 못믿고 하나님을 잘 못 믿고 나사로는 결사적으로 믿었다고 하는데요. 아마 상식적으로만 본다면, 상식적으로만으로 본다기보다는, 일반적인 그 당시의 유대인들의 삶의 모습을 본다면 이 부자, 사람이 하나님을 훨씬 더 하나님을 잘 믿었을겁니다. 욥기서에 나왔듯이요. 욥기서도 역사가 아니라 소설입니다. 어떤 것을 말할려고 하는 구약의 문학적 장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잠간만요. 제가 요 또 캠코더를 키지를 않았네요. 네 이제 캠코더 다시 켰습니다.) 거지와 나사로 비유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의 고대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삶과 그들의 판단, 사회적인 분위기, 이런 것을 본다면 여기 성경에 나와 있는 부자가 오히려 하나님을 잘 믿고 살았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여기 본문에 이 부자가 하나님을 믿었다 안 믿었다 그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요. 그가 그런 것에 대해서는 오늘 본문이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좋은 옷 입고 호화롭게 날마다 즐기더라. 간단하게 이야기했거든요. 거의 다른 묘사가 없습니다. 멋있게 산거구요. 사치스럽게 살았으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트집을 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오늘 성서기자가 그걸 이야기하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이 욥기서의 욥처럼 의인이 복을 받고 살 수 있는거거든요. 그리고 오히려 가난하고 병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어요.

나사로 거지는 정말 비참한 인생을 살았군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먹었구요.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핥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자와 나사로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여튼 그렇게 그렇게 살았다. 그런데 우리가 상식적으로 본다면 이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서도 더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드러나야 되는데 정반대예요. 이 비유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결정권, 우리 미래에 대한 것은 하나님에게만 있다. 이야기하는 거죠. 그 뒷부분에 가서 이야기하는 것이 이 부자가 지옥 불에서 힘들어 하면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내 형제들에게 자식들이게 이 상황을 이야기해줘야 된다 그런 말을 하잖아요. 31절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온 사람이 와서 권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 사실 기적적인 일이 일어나도 그런 일로 사람들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고 하는거죠. 그러니까 여기서 특별하게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습니다. 이건 조금 더 연구를, 공부를 해봐야 할 문제인데요.

두 번째는 조금 이거를 확대해석해서 이 부자의 어떤 사회책임감, 책임에 대한 무책임성이라고 할까, 책임을 지지 않는 것, 책임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 책임을 물음, 말이 좀 이상합니다. 사실은 이 부자가 가난한 거지 나사로를 부양해야 될 책임은 없었습니다마는 그러나 그 시대를 함께 산 사람으로서 혼자 잘 먹고 잘사는 것, 이런 것에 대한 책임을 묻는 그러한 비유의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뭐 더 이상 말씀드리기는 힘드네요. 뒷부분에 나와 있는 거로 본다면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뭐라고 이야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듣지 않는다. 조금 더 영적인 생각으로 한 부분만 더 이야기한다면 사람은 생각이 변하지 않는 거예요. 사람은 생각의 틀, 패러다임이라고 하는데요. 이런 것이 한번 굳어지면 고치기 힘든 것이 아닙니까?

제가 이것을 잘 해석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 그렇게 흘렀네요. 제가 뭔가 중요한 부분을 이야기하려다고 놓쳤네요. 저 캠코더 신경쓰다가. 그정도까지만 하겠습니다. 두 가지를 물어보신 것에 대한 간접적인 답변이었습니다. 거지와 나사로 이야기가 신인동성동형론적인 그러한 틀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건데요. 그거와는 다른 이야기구요. 천국과 지옥에 대한 실증적인 증거냐? 그러한 것도 아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유대와 이집트 문화를 이용한 예수님의 비유라고 누가 그런다. 그러죠. 그럴 수 있지요. 그거는 더 성서 주석으로 깊이 들어가 봐야 되기 때문에 그거는 그렇게 정리하구요. 그러면 다른 질문이 있으면 주시구요. 강의하는 중에도 질문이 있으면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제가 처음 생각했던 대로 설교에 대한 보충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설교는 다 이야기를 하지 못해요. (지워야 되겠네요.) 오늘 핵심은 보이지 않는 현실성에 대한 겁니다. invisible reality에 대한 것이었어요. 설교의 한계입니다. 설교라고 할때, 제가 보통 30분 내외를 하는데요. 거기서는 모든 것을 다 설명하기가 힘듭니다. 비약되는 부분들이 많이 있어요. 고런 대목이 올 때마다 아 이거는 좀 더 설명해야 되는데...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설교시간에 그거를 일일이 다 설명하기는 힘들구요. 그래서 그냥 전달되는 건만큼 하자고 생각을 하고, 결국은 내가 아무리 내가 설명을 잘한다고 하더라도 그거는 듣는 사람과의 상호 교환이기 때문에 내가 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요. 그래서 그냥 넘어갑니다.

조금 더 궁극적으로는 모든 깨달음은 성령의 문제이니까요. 성령은 진리의 영이니까, 보혜사 깨닫게 해준다는 뜻도 있고요. 진리에 관계되고 생명의 영이구요. 창조의 영이니까 말입니다. 아주 근원적인 거거든요. 사실은 이거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들이 어디 있을까요? 진리, 참인것, 생명, 창조 조금 더 나아가서 종말도 마찬가지구요. 이런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원초적, 다이나믹, 힘 통치능력이 성령이니까요. 우리는 다 이 안에 들어 있지 않습니까? 창조안에, 생명안에, 진리의 힘안에 종말론적으로 열려진 세계 안에 들어 있어서요. 결국 우리들의 깨우침 이런 것들은 영의 문제입니다. 저는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많이 느껴지게 됩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라고 보는데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어요. 대부분 그거는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가르친다고 하는 것에 대해 저는 별로 신뢰를 하지 않습니다. 그거를 무의미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선생이 있고 학생이 있고 가르치긴 해야 하는데 그건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일단 선생의 입장에서 본다면 목사도 선생이구요. 제가 집에서는 아버지니까 딸들에게는 나름대로의 선생이잖아요. 선생의 장점 단점이 다 있겠지만 장점같은 거야 조금 먼저 길을 갔다고 하는거죠. 조금 길을 안내한다고 하는 점에서 뭐 당연히 선생이 되구요. 그러나 선생이라고 하는데 참 위험이 많습니다. 저 자신을 향해서 하는 이야기도 하구요. 이미 요한복음에서도 그런 말씀을 하시죠. 선생은 없다. 하나님이외에 어떻게 선생이라고 나설 수 있느냐 서기관이라든지 바리새인들은 선생노릇하기를 좋아한 거거든요. 그게 나한테도 있는 겁니다. 이거는 인격의 문제라기보다도 인간의 속성인 것 같애요. 자기중심이니까 말입니다.

우리가 선생이라고 나선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알고 있는 관점으로만 세계를 봅니다. 고정관념이라고 할 수도 있고요. 자기 틀이 있어요. 저도 인제 제 관점으로만 뭘 보거든요. 사실은 진리라고 하는 것은 그런 안에 함몰되는 것이 아닌데 계속 그 안에 머물러 있어서 학생들을 자꾸만 그리로 끌어드리는 겁니다. 물론 좋은 선생들은 아예 그렇지 않죠. 맡기죠. 다른데. 예를 들자면 음악선생이 있다면 학생들에게 레슨을 할 때 말이죠. 시원찮은 선생들은 자기식대로 가르칩니다. 자기를 따라서 하라고 하는 거죠. 바담풍 하듯이 사실은 자기가 바이올린, 피아노, 클라리넷 이런 그 세계에 들어가지 못했으면서도 자기의 아는 것, 그 깊이가 백이라고 한다면 자기는 겨우 3,4밖에 모르거든요. 그런데 이게 어떤 깨달음이라고 한다는 것은 예술, 문학, 신학도 마찬가지지만 내가 들어가 본 만큼만 알지 그것보다 더 깊이 있는 것은 아무리 들어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경은 100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영적인 세계인데요. 부활이다 재림이다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많이 듣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냥 낱말로만 알뿐이지 사실은 우리가 3정도 깊이 말이죠. 100이 있다고 한다면, 사실은 그것은 끝이 없는거죠. 진리 깨달음이라고 하는 거는요. 3정도까지 안다고 한다면 밑에 있는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 변죽을 울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선생들은 자기가 몰라도 선생노릇을 해야 하니까 요 안에 있는 것을 절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 거예요. 결국은 진리라고 하는 거는 어떤 요 안에 들어있는 정보를 갖다가 반복해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쪽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운동이거든요. 이쪽으로 자꾸만 나가게. 밑으로 나가게 하는데 밑에는 전혀 모르니까 요거만 갖고 선생노릇을 하려니 얼마나 힘이 듭니까? 교육이라는 것이 안되는거죠.

교회 목사님도 그렇습니다. 여기만, 3도 아니고 더 조금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목사 노릇을 해야 되니까, 뭔가를 아는 것처럼 이야기를 해야 되니까 거기는 인제 힘이 들어가게 되고, 과장하게 되고 이 진리 자체에 대해서는 말할 것이 없으니까 여기 들어오는 학생들이요. 학생들을 쥐어짜는 거죠. 제 집사람이 피아노를 하기 때문에 학교에서 피아노를 가르칩니다. 간혹 인제 그런 이야기를 같이 하면서 아 그게 신앙교육하고 예술하고 비슷하다는 것을 공감합니다. 피아노나 바이올린 가르치는 사람들도 그게 잘 안되어 있으면 학생들을 들볶아요. 왜 그렇게 못하냐? 왜 연습 안했냐? 고 부분에서는 더 즐겁게 해라하는 것이든지. 자기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학생들을 들들 볶습니다. 그렇게 잘 따라 하는 학생에게는 점수를 잘 주고. 말이 제가 자꾸만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고자리에 머물러 있죠. 고 부분이 중요해서 강조하느라고 그랬습니다.

선생들이 학생들을,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기 때문에 가르치지 못합니다. 정말 괜찮은 선생이라고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음악선생도요. 자기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의 소리와 학생을 만나게 해주는 거예요. 내가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이 강의를 지금 직접 화면으로 보지 못하고 나중에 동영상으로만 보는 분들은 여기 그림이 눈에 잘 보이지 않아서 전달에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요 앞에 글자로 쓴 소리, 이 소리하고 학생과 만나게 해주는 요 작업, 그러니까 만나게 해줄 수도 없죠. 학생에게 소리가 저기 있다 거기에 귀를 기울여라. 그 몸짓만 할 수 있습니다. 학생과 소리가 만나면 그때 예술이 되는거구요. 안되면 선생을 따라서 기술자가 되는거구요. 기술자가 되더라도 사람들이 피아노 한다 바이올린 한다 예술가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평신도들이 목사의 설교를 모르는 것처럼 그냥 그 안에는 종교적 교훈 영성이 있기 때문에 판단을 못하는 것처럼 예술에서도 피아노만 두드리면 손가락 잘돌아간다 그렇게만 알지 저 사람이 정말 예술의 세계에 들어갔는지 아닌지는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

예. 이런점에서 교육이라고하는 것이 근본적이라고 사람에게서는 불가능하다. 겸손하게 근원적인 힘, 성령이 그런 것을 한다. 기독교적인 용어로 말하면 그렇고요. 소리의 존재론적인 힘, 성령입니다 사실은. 예술의 깊이에서 존재론적으로. 그러니까 우리가 좌우할 수 없는 힘으로서 나타나는 진리의 세계들이 바로 성령의 활동이니까요. 설교를 하면서 그런 한계를 스스로 잘 알지 못하면서도 아는 것마저도 다 설명하기 힘든, 그래서 그냥 저는 지나갑니다. 몰라도 괜찮다. 결국은 성령과의 소통이 신자들에게 일어나면 내가 그냥 비약하고 지나더라도 영적인 스파크가 일어난다고 믿기 때문이죠. 그리고 설교가, 설교 한편에서 신자들이 변하고, 변한다고 하기 보다 좋은 충격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드뭅니다. 축적이 되어야 되요. 이게 오랫동안 지나면서 어떤 일들이 영적인 변화 일어나게 되죠. 멀리보고 가야되기 때문에 설교 30분 동안 아쉬움이 있어도 즐겁게 그렇게 지나갑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invisible reality였는데요. 제가 여기서 드리려고 했던 핵심은 이겁니다. 이것저것 성경본문도 이야기하고 논리적으로 나가고 있었습니다만 두 가지의 다른 명제를 통합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세계로 들어가자고 하는 거죠. 서로 다른 혹은 보기에 따라 모순이 있을 수 있는 명제가 무엇일까요? 설교에 구체적으로 나왔습니다. 서로 모순되는, 서로 다른 명제의 일치될 수 있는 그 지점으로 나가자고 하는 것이죠.

오늘도 부활 설교였습니다. 교회력에 따라서 본문을 선택하고 그 본문에 따라서 한 설교였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첫째 명제는요.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세계, 사실은 뭐 부활만 그렇습니까? 하나님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우리는 결코 직접적으로 대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다 죽습니다. 죽지 않으면 현재와 질적으로 다른 세계로 우리가 옮겨지지 않는 한 하나님을 우리는 대면할 수 없습니다. 신성불가침인거죠. 부활도 마찬가지고 기독교의 신앙의 가장 궁극적인 그런 문제들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 예수 부활은 확실하다. 예수 부활의 확실성. 이 두개가 보통 이 두개가 보통 우리는 보이지 않으면 확실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삽니다. 그러한 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실증적 세계관, 그런 프레임에 꼭 묶여 있어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확실하다고 생각하기 힘듭니다. 물론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지 않지만 나는 확실하게 믿는다고 말합니다. 제가 설교에서 이야기했습니다만 광신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광신과 기독교의 건강한 신앙, 이게 종이 한 장 차이예요. 많은 경우에는 우리 정통기독교 안에도 광신적인 요소가 많이 있을 겁니다. 그걸 딱 선명하게 구분해 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거는 어떤 몇 가지 기준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요. 다만 이렇게는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들이 실제로 생명 지향적으로 나가는가? 생명지향성, 이걸로 아마 어느 정도 구분할 수는 있지요. 그러나 이것도 그렇게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엇이 생명 지향적인 것인가에 대한 최종적이고 완료된 대답을 아직 갖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 저 사람이 예수 믿거나 어떤 종교를 갖고 나서 신실해졌다. 술 담배 안하고 집에도 일찍 들어오고 아내하고 옛날에는 많이 싸웠는데 지금은 괜찮아졌다.’ 이런 것을 보고 우리는 생명 지향적으로 변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아 옛날에는 생태적인 마인드가 없었는데 저 사람이 예수 믿고 난 다음에는 물건도 아껴 쓰고 에너지도 절약하고 생태운동에도 참여하고 그러더라.’ 생명 지향적이기도 합니다만 그것만 가지고는 그 사람이 생명 지향적인가 아닌가 우리가 판단하기 쉽지 않습니다. 제3자가 판단하기 쉽지 않습니다. 속으로는 욕구불만 가능하면서도 겉으로는 상당히 세련되고 행동할 수 있는게 사람이거든요. 그냥 이런 기준으로 대충 우리가 잡을 수 있을 뿐이지.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 힘든 거죠.

네. 지금 광신과 신앙, 이 차이를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요. 보이지 않는 부활세계를 내가 확실하다고 하는 것, 이 두개의 다른 차원의 명제들이 어떻게 우리 우리의 신앙적 세계속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왜 광신이라고 하는 말씀을 드렸느냐 하면요.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세계라고 하는 것을 그냥 막연하게 생각해버리고요 그리고 확실하다고 하는 것도 사실 속으로 정말 믿어지지 않으면서도 그냥 믿는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건 광신이다 제가 그런 말씀드리는 거죠.

광신까지는 안 간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보이지 않는 세계의 확실성의 그 깊이에 들어가지 않는 경우에 빠지기 쉬운 또 하나의 믿음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연민입니다. 제가 이건 아마 다른데도 여러 번 이야기했을까요. 자기연민, 기독교 신앙을 자기 연민으로 생각합니다. 요즘 우리 다비야 사랑채, 작은자 닉네임하는 친구가 신학이 필요하나 그러한 생각을 썼네요. 그런 것들이 자기 연민이지요. 말하자면. 신앙을 예수님과 나와의 개인적인 관계안에서 고 안으로 축소시키고 그 분을 증거하고 그게 도대체 하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것은 전혀 없이 자기 자신의 신앙적 실존적인 대상을 위로하는 대상으로 만들어 놓는겁니다. 그렇다면 굳이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있을까요? 부처님을 믿어도 되구요. 영천에는 돌, 하루방을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단 믿으면 됩니다. 돌이 나를 구원한다 절절한 신앙이 나올 수 있습니다. 남편에게 구타당하는 여자들이 어떤 경우에는 왜 그렇게 맞고 사냐 헤어지지. 그래도 헤어져 나오지 못하는 이유가 자기연민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구타하는 남자가 또 순간 자기를 끔찍이 사랑하는 것같이 느껴지는거거든요. 심리적으로 거기에 묶여서 떠나지 못합니다. 기독교도 신앙적으로 나르시시즘이라는 자기 연민에 빠질 위험성이 다 있습니다.

이러한 확실성, 리얼리티, 보이지 않는 세계, 창조 이런 것들이 열리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거는 이야기한 대로 100보다 더 밑으로 들어가야 할 수의 세계에서 자기는 3까지만 알아. 3의 개념뿐에 몰라. 3의 개념도 확실하게 모르는 거죠. 이걸 안다면 아 더 많은 수가 있다. 생각을 하고 내려가게 되는데 이것도 모르고 딱 굳어진 그거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죠. 이렇게 되면, 결국은 이것만 갖고는 재미없잖아요. 고안에서. 그러니까 자기의 어떤 심리적인 욕구, 이거에 빠져들 수 밖에 없습니다. 많은 여성도님들이 교회갈 때마다 울고 반복적으로 부흥회 해야되고. 거의 습관적으로 그렇게 하잖아요. 그렇게 해서 카타르시스하고요. 그런 신앙들, 어쩔 수 없습니다. 과연 그런 것들이  필요하긴 한데 우리의 영성을 건강하게 하느냐 제가 보기에는 그냥 퇴행으로, 퇴행이죠. 다른 길이 없으니까 그 길로 갈 수 밖에 없거든요. 퇴행을 생명 지향적이라고 할 없거든요. 어린아이 같은 믿음이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믿고 그렇게 하는 거다. 예. 어린아이들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살아도 그런 것으로 만족할 수 있겠지요.  어린아이라면 손가락 빨고요. 똥싼것 만지고요. 심리발달에서 어린 아이라고 만족할 수 있겠지요. 어린아이같으면 그렇게 하지만 어른이 그렇게 한다면 임상의 대상이죠. 신앙하고는 거리가 멀지 않겠어요.

이 두 사이를 구분하기가 힘들기도 하지만 자꾸 착각을 합니다. 믿음을 심리적인 위로, 거기에 머물고 있는지 아니면 어떤 세계에 들어가려고 하는지. 사람들은 세계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위로받으면 된다고 합니다. 이게 인간 심리에 나타난 메조키즘 비슷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메조키즘이 교회안, 신앙안에도 심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공격적이기도 하고 자기학대적이기도 하구요. 이게 병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지요. 이게요. 교회안에서는 그게 병이 아닌것 처럼 느끼는게 이게 종교적으로 포장이 되어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들어가게 되면 그 안에는 신앙의 깊이 역설적이면서도 그러나 실존적 운명을 다 맡기는, 결단하는 세계보다도 그냥 묻지마 식의 이런 것 말이죠. 광신, 퇴행 이런 것들이 제가 보기에는 한두 가지가 아닌 것 같습니다. 뭐 그런 것을 만족하고 산다면 어쩔 수 없죠. 예. 그러니까 이 말씀입니다. 보이지 않는 그 부활의 세계를 나는 믿는다 믿는다 하는 말이 이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이 두 가지 문제에서 두 번째 문제를 먼저 이야기해야 되겠습니다. 부활의 확실성, 과연 확실하냐 하는 겁니다. 이걸 우리가 얼마나 고민을 했는가 하는 겁니다. 이거는, 제가 오늘 설교에서 짚은 거는 사도성의 문제예요. 제가 차 한잔 하겠습니다. 네 홍차인데 참 맛이 좋습니다. 죄송합니다. 여러분도 한 잔하세요. 제가 저에 물이 보석이라고 했는데 그 보석을 마시고 있습니다. 많이 우러나왔네요. 확실성, 사람님의 질문 제가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거기 머물러 있을 수 없으니 일단 진도나가구요. 가능하면 동영상 메뉴에다 올려주었으면 좋겠고요. 제가 나름대로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이 확실성이라고 하는 문제가, 부활이 확실하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근거로 말할 수 있느냐? 말할 근거가 사실 얼마 없습니다. 자연과학적으로 그것을 가타부타 결정할 수는 없는 상태죠. 자연과학자들이 부활이 없다고 말할 수 없을걸요. 혹은 반대로 있다고 말할 수도 없구요. 그것은 자연과학이 실증학문으로서 상당히 근거가 있는 이야기이지만 그러나 모든 것을 결정적으로 대답해 줄 수 있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연과학도 미완의 학문입니다. 그래도 그중에는 가장 실증적이죠.

심리학 이야기했는데. 정신분석학이요. 정신분석, 이것도 마음에 대한 과학입니다. 인간이 정신의 일정한 유형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렇게 나타나긴 하지만 인간의 정신도, 우리가 컴퓨터로도 다 계산해 낼 수 없는 그런 많은 가능성들, 그러한 variation이라고 그러죠. 변화, 그런 것을 가지고 있어서 기계적으로 다룰 수 없습니다. 다만 확률이죠. 인간의 심리를 다루는 심리학과는 달리 물리학이나 생물학 이런 것들은 물론 확률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절대적인 엄밀성, 엄밀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뭐 신학하고 과학 이런 것과 말할 수 있는 게제는 아니고요. 그거는 다른 주제인데 신학적 어프로치가 무엇이냐 그런 것 말할때 자연과학하고 차이를 말씀드리는데요. 진리에 대한 신학적 어프로치가 생물학이나 물리학이 접근하는 것에 비해 근거가 없는게 아니다는 것을 말하는 한 과정, 부분입니다. 제가 언젠가 말씀드렸다시피, 한번 짚고 넘어간다면, 물리학 생물할 자연과학 지금까지 이야기들에 대한 확실한 그림, 지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세계를 끌어가고 있는 과학적인 것들에 대한 지도, 안내서죠. 그러나 앞으로 세계가 어떻게 변할지 어떻게 압니까? 모르는 상태니까 달라지는 거구요. 쓸데없는 이야기를,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한 것을 공연히 끄집어내서 트집잡힐 만한 그런데로 끝났습니다. 아는 것으로 하고 지나겠습니다.

사도성의 문제, 확실성, 부활의 확실성을 이야기하는 데서요. 부활이 확실하다고 하는 것은 사도들의 증언에 근거한 거죠. 예수의 부활이 확실하다는 것. 일전에 말씀드렸듯이 이거는 사도 이외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과 몇몇 그 사람들이요.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와 있는 사람들하고. 복음서에 나와 있는 막달라 마리아와 등등. 그런 사람들, 그들을 통틀어 제가 사도라고 말하는 건데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난 그들의 특별한 신앙, 궁극적 생명 경험인거죠. 이게 그냥 예수와 상관없는 사람들도 알아 볼 수 있는 어떤 사건은 아니었다고 하는겁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부활의 확실성을, 물리학 이런 것들은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 종교에 상관없이 남자냐 여자냐 상관없이 객관적인 어떤 사실들을 이야기하잖아요. 예수의 부활은 그런 방식은 아니라고 하는겁니다. 사도의 경험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본질을 대해 이야기할 때 니케아 공의회에서 나온 네가지 규정이 있잖습니까? 그중에 하나가 사도성이잖아요. 단일성, 보편성, 세 번째는 거룩성(성성), 네 번째가 사도성입니다. 이 사도적인 신앙을 일단 우리는 전제합니다. 이게 이들의 경험이 진리라고 하는 것을, 그렇게 말하면 될까요? 아니면 그들이 조금 경험을 약간 다르게 할 수 있으니까, 사도들의 경험을 전하고 있는 문서들도 각양각색이니까, 단순히 사도들의 경험을 진리라고 말한다. 그렇게 설명을 하면 충분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세밀한 부분은 좀 제외하고 일단 그 틀에서 말씀드립니다. 기독교 신앙은 근본적으로 사도들의 경험이 옳다. 진리다. 궁극적인 생명의 경험이었다 이거를 전제합니다. 이거하지 않으면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을 가질 필요가 없는거죠. 그냥 그러면 종교학적인 거로 나가도 되고요. 다르게 해도 됩니다. 기독교 정체성은 이 사도, 예수님에 대한 경험을 사도들이 정확하게 한거거든요. 사도들을 통해서 하는거거든요. 우리는 직접 예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우리는 듣지도 못했구요. 그렇습니다. 사도들의 부활경험에 근거해서 우리는 부활이 확실하다고 하는 것을 전제합니다.

막연한 것 같죠. 사도들이 만약에 잘못 경험했으면 어떻게 하냐? 그랬다면 우리의 신앙이 말짱 헛일이죠. 만약에 그게 의심스럽다면 기독교 신앙을 좀 유보하고 좀 천천히들 생각해 보십시요. 일단 우리가 기독교 공동체안에 들어왔다면 그것을 전제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종교든 아무리 자기의 객관적인 입장을 취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단계에서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선택의 문제이예요. 우리가 결혼할 때 자기의 남편, 아내를 결정하는 거잖아요. 이때 가장 나에게 맞는 여자, 혹은 남자다 생각해서 결단하듯이요. 그 사람이 그 남자가 그 여자가 객관적으로 볼때 가장 뛰어나다 그래서 결혼하는게 아니잖습니까? 이게 적당한 비유인지는 제가 잘 모르겠어요. 그냥 생각이 나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게 그러니까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와 결혼한다는 거거든요. 거기에는 한 순간에는 결단이 필요한거예요. 선택의 문제인거예요. 내가 거기다 내 운명을 맡기겠다고 하는거예요. 사도들의 부활경험을 통해서 예수의 부활이 확실하다고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게 맞는 이야기일까요? 여러분들 어떻게 생각하세요? 뭔가 조금 더 이야기가 필요한 것 같긴 한데. 아~ 제가... 음. 안되겠습니다. 나중에 생각나면 더 하기로 하구요.

이거는 보충해야 되겠군요. 그러면 사도들이 말하는 것이 말이 안 되더라도 믿어야 하느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한계가 있었어요. 2천년전이라고 하는 시대적인 한계를 담고 어떤 궁극적인 경험, 역사적 예수에게서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들의 표현은 고대인들의 어떤 방식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걸 조금 구분해야 되겠죠. 2천년전에 사람들이 살았던 세계관, 그 한계 안에서 뭔가를 절대적인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놓여 있었던 그 시대적인 상황, 그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잖아요. 그들이 성령을 받았으며 방언을 했습니다. 열광주의적 상태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모두  방언을 해야 성령을 받는다 그런 방식으로 이야기하면 곤란하거든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영에 대한 체험을 그런 방식으로 한거죠. 영에 대한 체험인거죠. 그러니까 오늘 우리들은 방언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성령을 경험하면 되는 거죠. 애기가 자꾸 빙빙도네요. 어떻게 된거예요. 네. 고정도 하구요.

부활의 확실성이라고 하는 것은, 제가 이것을 자꾸만 강조하려고 하다보니까 여기에 치우쳐 버리는 것 같아요. 사도들의 예수님 경험이 진리다. 이것을 전제하고 우리는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전제 되지 아니면 우리는 다른 길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런데요. 지금은 예수님이 안계시고요.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경험했던 사도들도 없고요. 그들이 전한 문서, 성서만 남아있습니다. 그러니까 부활은 실제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drloved님이 질문하셨군요. 부활을 사도들의 경험에만 근거를 둔다면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변증하기가 불가능 한 것인가? 사람님이 철학과 기독교는 비슷하다고 하셨는데  두 분 다 이야기가 맞습니다. 부활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변증이 불가능합니다. 이거는 설명할 방법이 없는 거예요. 생명의 궁극적 미래에 대해서 알 수 있어요? 그것을 증명할 수 있어요? 과학적으로 가능할까요? Analogy, 유비는 가능하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은 세상이 끝날 때에 우리가 참여하게 될 궁극적인 ultimate life라고 할까요. 궁극적인, 이 말이 너무 진부하죠. 궁극적이라고 하는 말이. 그러나 다른 단어가 없어서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예 그런건데 그걸 무슨 수로 사람들에게 변증할 수 있다고 하는 겁니까? 아퀴나스가 신 존재증명을 열 가지 했나요? 아리스토텔레스 방식에 의해서 하긴 했는데 그건 하나의 방식이지 그건 또 하나의 모순으로 빠지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도 사실은,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 해명의 문제예요. 변증은 해야 되죠. 변증이 무의미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거를 증명할 수는 없는 겁니다. 어떤 단계에서는 우리가 가능한대로 보편적 근거에서 해명하고 변증하지만 어떤 단계에서는 선택의 문제예요.

기독교 신앙이 철학적인 접근하고 비슷하다고 애기 했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네. 보세요. 철학은 보통 metaphysics이라고 합니다. physics의 meta의 세계니까 이 세계가 physic 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구요. 예. 우리들에게 주어진 것은 이 창조입니다. 이 세계, 성령이 여기서 활동하시고 특별히 예수, 2천년전의 예수님에게 그 사건이 생명과 부활과 하나님의 성육신, 이런 것들이 일어났다고 하는 그 사실에 우리 기독교 신앙의 토대가, 초점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거를 이해해 가는게 철학적 사유가 없이 가능하겠습니까? 존재와 인식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이라든지, 하이데거의 존재이해, 화이트헤드의 프로세스 이러한 이해들, 그 다음에 많은 이런 저런 것들, 그런 것들에 대한 이해 없이 우리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세계의 현실성을 도대체 우리가 포착할 수 있겠어요. 이게 지금 관건입니다. 하나님의 문제도 그렇구요. 하나님의 나라도 그렇고 죽음이후에 천당간다고 하는 것도 그렇고 보이지 않는 확실성, 현실성, 이걸 잡아내야 합니다.

철학도 어쩌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미 철학하고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그러면요. 철학은 그냥 일종의 현상학적인 접근이라고 한다면 기독교는 아! 현상학적인거보다도 계시론 적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 말이 적당한지는 모르겠어요. 현상학적인 거면 조금더 귀납법적인 것 같구요. 이 세계를 잘 뚫어봄으로서 원리를 찾아낸다고 한다면. 그리고 요즘의 철학이야 고전적인 철학을 다 잃어 버렸습니다. 궁극적인 것을 찾지 않아요. 언어철학이라고 부분적으로 다 떨어져 있기 때문에 지금은 굉장히 분산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알리는 것만큼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점에서 연역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을 붙이자면 귀납적이라는 것, 그렇습니다. 기독교 신학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더 근원적인 힘이 있는 그러한 존재, 하나님, 이름을 어떻게 붙이든지 그분의 말씀, 그 분의 계시에 근거해서 세상을 해명한다고 한다면 철학은 세상에 대한 해명을 하는 거죠. 설명이 잘 되었나요.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을 설명한다면 철학은 세상을 설명함으로서 궁극적인 어떤 것을 말하려고 하는, 서로 고게 만나는 지점이 있는거죠.

예, 어디를 한 거죠. 지금요. 시간이 많이 되었군요. 네. 그렇습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 보이지 않지만 확실한 세계, 이게 어떤 것인지 느낌이 오시죠. 그래서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왔지만already 아직은 오지 않은not ready 이렇게 개념적으로 설명할 수 밖에 없었어요. 실증적으로가 아니라 개념적으로 설명 것이죠. 보이지 않는 확실성, 확실하기는 한데 그 손에 잡히지 안는거, 이런 방식은 아닌 거예요. 이거를 제가 조금더 설명을 해야 되는데. 이걸 우리가 어떻게 접근해야 하느냐 하면, invisible reality라고 하는 게 왜 이런 쪽으로 우리의 생각을 넓혀 가야 하는 건요, 왜 그럴 수 밖에 없느냐 하는 건요 두가지로 제가 생각해보았습니다.

하나는 현재 우리의 오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여기에 던져져 있습니다. 어떤 주어진 존재들이예요. 이 안에 던져져 있는 존재, 3차원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바깥에 넘어서는 다른 세계, 이거는 우리가 확인할 수 없습니다. 개미들이 우리 인간의 삶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하여튼 예를 들자면요. 초월하거든요. 그렇게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고 해서 없는 거는 아니잖아요. 없다고 단정할 수 없잖아요. 보통 4차원 6차원 7차원 물리에도 그렇게 이야기하니까요. 차원이 다르게 되면 낮은 차원에서 높은 차원을 전혀 우리가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또 하나는 시간의 문제인데요. 우리가 지금 있다 없다 확실하다 아니다 보인다 안보인다 하는 말은 시간안에 있는거예요. 현재 확실하지 않는거예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컴퓨터로 말하자면 5백년 전에는 컴퓨터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때는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컴퓨터가 있습니다. 없던것이 있습니다. 지금은 이제 현실이 되었죠. 5백년전에는 현실이 아니었습디다. 보이지 않았어요. 미래의 있어야 될 어떤 것입니다. 그렇다면 5백전에는 없지만 지금은 있는 것, 5백년 전에는 그것이 reality가 아니었을까요? 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나오고 나니 5백년전에도 여전히 reality입니다.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그 5백년전과 지금이 컴퓨터가 있다고 할때 연관되는지. 발전해 온 거 아니예요? 뭔가가. 인간의 지능이든지 뭐든지. 발전해 온거 아니예요. 이때는 다만 실체로서 드러나지 않았을뿐이지 현실성은 현실성입니다. 나중에 드러났으니까요. 부활생명이, 궁극적 부활생명이 아직도 우리 손을 잡을 수 없어요. 미안하지만. 제가 뭐 여러분에게 미안하게 생각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만. 이게 잡히는 문제가 아니니까 확실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약속을 받았고 그렇게 믿고 있고 희망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5백년 전에 과학자가 컴퓨터라고 하는 것이 현실성이다 말했다면 미친 사람 소리 들었겠죠. 그러나 하나님은 5백년전이나 5백년후나 전체 다로서 존재하신 분이잖아요. 이미 미래까지 가 계신분이잖아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2천년전에 특별한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사건을 끌어다가 나타내실 수 있지 않습니까? 이게 너무 논리적인 설명인가요? 말장난 같이 들리시나요. 혹시 그렇게 들리시나요. 우리는 그 미래, 그게 5백년이 아니라 수 억년 후 일수도 있습니다.

그때 미래요. 그때 모든 것이 완성된다. 종말론입니다. 그때에 예수의 부활이 실체로 드러나게 되는 거예요. 컴퓨터가 5백년 후에 실지로 들어났듯이 말예요. 이 종말이 그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의 토대입니다. 에스커탈러지eschatology 예요. 이게. 종말론, 사람들이 아 휴거된다. 새 하늘과 새 땅, 쉽게 애기하지만 그래서 우리 현실 상관없는 것처럼 막연하게 생각하지만. 여러분. 그거는 이게 신학적 준비가 되어 있지 다만 우리가 어떤 연관성인지는 해명하지 못할 뿐이지 오늘 삶까지 지배하고 있는 절대적 힘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방법이예요. 컴퓨터가 어떤 방식으로 5백년전 에도 현실성이었지 지금은 알 수 있지만 전에는 몰랐듯이 종말에 그렇게 됩니다. 이러한 종말에 모든 오늘 우리의 삶의 의미와 근거와 희망을 두고 사는 것이 이게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게 인제 2천년 전의 예수 그리스도 사건과 어떻게 연관되냐 그걸 해명해 나가는 게 기독교 신앙이고 설교고 신학이고 그런 거죠.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희망의 신학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미래에 대한 희망, 생명의 완성, 그걸 믿는거구요. 5백 년 전이지만 컴퓨터를 믿을 수 있는 사람, 현실로 느끼는 사람들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예언자 같은 사람들이었죠. 지금 우리는 기독교인들은 우주적인 세계관을 갖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지금 살지만 몇 억년 후일지 몰라. 그때 세계가 완성된다. 그 희망에 부풀어서 사는 것이죠. 그때 확연하게 꽃이 피듯이 생명이 발현한다. 구체적인 것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너무 그거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기 때문에. 5백년 전의 컴퓨터를 상상해 보세요. 그때 컴퓨터를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그거보다 더한 거예요. 질적인 변화, 극단의 변화.

오늘 설교하면서 인용하지 못한 본문이 있어요. 병행 본문인데요. 설교 준비를 하다가 그걸 놓치는지? 베드로전서 1장 8절과 9절인데요.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너희가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이런 말씀도 정말 우주론적이거든요. 보지 못해, 은폐되어 있어. 숨어있어 그러나 그걸 믿어요. 이게 광신이 아니잖아요. 그걸 이해하시겠죠? 내가 더 길게 말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갔네요. 영혼의 구원을 얻는다. 이러한 보이지 않지만 믿는, 그것을 현실로 믿는 invisible reality, 그 안에 들어가 그걸 믿는 것, 그 삶이 기독교 삶이고 그러므로 영혼이 구원을 받는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영혼의 구원이 무언지. 영혼이 뭔지. 놀라운 이야기 아닙니까? 영혼이 뭐예요? 이런 것들을 인문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신학이기도 하고 다비아가 추구하고 있는 인문학적 성서읽기입니다. 특별한 것은 아니고요. 이걸 일상적인 걸로 이해하라는 것이예요. 영혼, 사람들이 막연하게 생각하잖아요. 인간의 구성요소인데요. 한 부분이 아니고 전체 구성요소인데요. 인간 생명의 가장 깊은 차원, 그걸 우리는 영혼이라고 합니다. 구원받는다. 종말론적인 구원인거죠. 그때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날까요? 여러분들이 그 세계를 향한 희망, 진정한 희망을 열어 가십시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질문이 있군요. 광신하고는 조금 다른 거죠. 지금 이러한 것들을 이해하면서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는 것, 그러면서 결국 이것은 아직 증명이 안 된 거죠. 종말에 대한 것은, 미래. 그러나 자기가 선택을 하는 거죠. 거기에 자기의 운명을 맡기고 거기서 생명의 가장 깊은 차원이 구원을 받는다. 나중에 가서 장가가고 시집가고 이러한 차원이 아니라니까요.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명의 가장 깊은 세계, 그거는 우리가 그림을 그려낼 수 없는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 찬란한 그러한 생명을 여러분들이 맛보게 될 것입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