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akirahoony.mireene.com/zbxe/files/attach/images/2007/11651/chohyunsil_2.jpghttp://akirahoony.mireene.com/zbxe/files/attach/images/2007/11651/chohyunsil_1.jpg기독교가 뭐꼬? 14강(080410) 받아쓰기 - 지평 융해, 계시록은 역사서다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4월 들어 두 번째 강의 시간이 되었군요. 6개월 예상했는데 벌써 우리가 3개월이 지났고요. 조금 지루하기도 하죠? 이렇게 직접 보는 게 아니라 화면을 통해 이야기를 하려니까 소통의 다이내믹이라고 할까요.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구요. 그래도 이런 인터넷이 있으니까 이런 정도라도 가능하지. 그렇지 않다면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책을 보더라도 이것이 책이거든요. 강의안이 파워포인트로 떠있구요. 여러분들에게 화일로 다 갔으리라 봅니다. 제가 보니 반쯤 했는데요. 전체적으로 12장까지 있구요. 12장까지 있는데 오늘로 5장까지 끝내게 됩니다. 반인데요.  지난주에 신약성서에 대한 이야기를 반 정도 했고요. 오늘은 뒷부분이 됩니다. 복음서부터 시작해서 서신서와 요한계시록 그러니까 신약성서의 내용에 들어가게 되죠. 그 내용을 일일이 다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강의안을 읽어보시면 되겠구요. 거기서 핵심적인 것이라든지 혹은 거기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제가 보기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그런 부분들을 찾아보도록, 좀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복음서의 이야기부터 시작하는데요. 마태마가누가요한 보통 이 세 복음 마태 마가 누가 복음서를 공관복음서라고 하구요 요한 복음서를 사복음서라고 하는데 이 네 개를 묶어서 사복음서라고 합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구요. 예수님이 주인공으로 된 전기다. 그렇게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나머지들은 사도행전부터 시작해서 요한계시록까지 이 전체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기는 한데요. 예수님에 대한 사도들이나 사도들의 권위를 빌린 초기 기독교 문필가의 진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크게 나누면 신약성서는 복음서와 편지라고 할 수 있죠. 사도행전을 역사서라고 합니다만 이거는 누가복음하고 연관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 후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고 이어서 사도들의 일대기라고 할 수 없구요. 이따가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주로 사도바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도들의 활동에 대한 진술 혹은 해명, 서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도 전체 다 편지나 마찬가지입니다. 크게 나누면 복음서와 서신으로 나누는데요. 다른 것은 제가 접어두고. 이 복음서가 왜 네 권이나 되었을까 하는 겁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신약성서 안에 자리 잡게 될 때 핵심적으로 한권이면 충분하지 않겠어요.

예수님의 일생이라고 하는 것이 복음서에서는 크게 서너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요 갈릴리 호수의 이야기예요. 갈릴리 호수, 이 부근에서 갈릴리호수를 중심으로 한 예수님의 활동, 그 다음에 거기서로부터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기, 이게 두번째 파트구요. 세 번째는 예루살렘이 활동, 예루살렘에 들어와서의 활동,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가? 마지막에는 예수님의 수난이 큰, 물론 이것도 크게 보면 예루살렘 안에 있는 이야기인데요. 그래도 예루살렘과 아 이게 정확한 구분은 안 되겠군요. 여행기와 사마리아와 유대지역에 있었던 것도 있구요. 그건 제가 세부적인 것은 다 줄이겠습니다. 갈릴리호수에서 갈릴리에서 갈릴리나 갈릴리 호수나 제가 비슷한 의미로 쓰는데 조금 구분되기는 합니다. 주님은 나사렛에서 시작하셨는데요. 일단 요단강, 요단광야에 와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면 이미 유대 땅으로 온 거예요. 왔다가 갈릴리로 다시 올라갔을까요? 예 고거, 그러한 예수님의 연대기에 대해서는 그렇게 확실하게 나타난 것이 없습니다. 복음서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로 하지만 예수님의 연대기를 순서에 따라서 하나하나 정확하게 쓴건 아닙니다. 순서가 인제 엉클어져 있는 것도 많이 있어요. 뒤에 있던 것이 앞에 온다거나. 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서를 중심으로 해서, 특별히 요한복음 더 말할 것도 없구요. 이거는 조금 제쳐 놓아야 합니다. 이거는 공관복음서하고는 여러가지 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어서요. 같이 연관시켜서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요한복음에 있어서도 공관복음에 있었던 사건들이 병행구로 나오기는 합니다. 중요한 예수님의 공생애 있어서 중요한 것들이 같이 묶여 나오기는 하는데 전달방식도 다르구 해석도 다르고 그렇습니다. 다르다고 해서 결정적으로 예수님의 본질자체에 대한 다른 시각이라고 보다도 요한복음의 독자들이 달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건 그렇고요. 이 공관복음서를 통해서도 예수님이 정확하게 언제 어디서 어떻게 순서를 거쳐서 사셨는가에 대한 연대기적인 역사를 추정해 낼 수 없습니다. 대충 우리가 윤곽을 잡는거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이 나오는데 그렇다면 나사렛에서 사시다가 유대땅에 내려오셔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나서 다시 갈릴리로 올라 가셨다는 것이 조금 어색하기는 하네요. 말하자면. 네. 그거는 뭐 우리가 예수님의 역사를 탐색하는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묻어두고 가겠습니다.

큰 덩어리로 볼 때 예수님의 공생애 앞부분은 갈릴리 호수 이야기구요. 두 번째는 거기서부터 갈릴리 오기까지 이야기구요. 그 다음에 예루살렘에 입성하면서 벌어진 이야기, 그게 대부분 수난설화라고 하는데요. 예루살렘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이 또 한편으로 들어가죠. 이렇게 보면 되겠군요. 갈릴리로부터 유대까지 여행, 여기는 사마리아와 유대, 그다음에 예루살렘에 들어간 이야기, 수난 이야기. 여기까지 굳이 말하자면 예수님의 공생애라고 할 수 있겠구요. 부활은 조금 성경이 다른 겁니다. 그건 예수님의 공생애하고는 좀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앞에서 부활 이야기할 때 여러 번 말씀을 드렸으니까 접구요.

네. 그런데요. 이러한 예수님의 공생애를 다룬 거라고 한다면 한권이면 충분하지 왜 신약성서안에 이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가 네 권이나 들어갔을까 그리고 그것이 조금 다른 것이 들어갔을까? 물론 같은 거라면 들어갔을 리가 없습니다만. 네 복음서 중에서 괜찮은 것 한권만 선택하지 왜 네 권을 다 경전으로 했을까. 참 재미있습니다. 재미라기보다도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만 주제라고 할 있겠죠. 그 이야기를 이 강의안에 추정해 볼 수 있다 정의했는데 네 대충 맞지 않겠습니까? 이렇습니다.

초기기독교는요. 절대적인 교권이 행사되지 않았기 때문에 각각의 지역교회가 독립적이었다고 하는 겁니다. 지역교회의 자유가 보장되었던 것 같다. 자기들의 공동체가 처한 상황에서 나름대로 각기 예수에 대한 전승들을 편집할 수 있을 정도로 열려져 있었다는 말이다. 예. 그러니까 마태공동체, 누가 공동체, 마가공동체 또 나중에 들어오게 된 요한 공동체, 이렇게 서로 예수에 대한 전승들을 따로 수집했고 또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에 약간씩의 차이를 둔 그러한 공동체 자유가 보장되었기 때문에 나중에 독립되어서 발전된, 그리고 자기들안에서, 자기들 공동체 안에서 중요한 예수님을 증거하는 문서가 된 복음서가 하나도 배척되지 않고 경전 안으로 들어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복음서도 많이 있어요. 그러한 것들은 외경이라고 해서 조금 권위가 떨어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쳤구요.

그러나 네 복음서는 카르타고 회의라 397년 카르타고 회의, 신약성서가 결정된 때가요. 397년 카르타고 종교회의에서, 상당히 후입니다. 397년이군요. 397년. 생각해 보십시오. 397년이라면 그냥 이렇게 거칠게 계산해서 예수님 사건이 있은 다음에 거의 400년, 조금 더 줄이면 최소한도 350년 동안은 아직 신약으로 결정되지 않았다고 하는 겁니다. 상당히 그 시일이 길죠. 우리가 생각했던 거보다 상당히 길죠. 상식적으로만 생각한다면 예수님 사건이후 교회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면 금방 경전으로 했어야 하는데 왜 안했을까 이상한 생각이 들어요. 아마 일반 평신도들은 신약성서가 아마 처음부터 경전으로 되어 있을거라고 생각을 할 겁니다. 그런데 자그마치 400년, 5세기, 4세기 후반, 4세기 5세기 넘어가는 4세기 5세기 어간에 까지 계속되었고 결국 397년에 되었다고 하는 거는 이때까지는 서로가 경쟁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죠.

지난 주간에 말씀드렸다시피 각 지역마다 신약성서, 구약성서는 이미 다 결정되었고요. 그건 얌니야회의 기원후 90년경 유대인들이 결정한 39권을 그대로 받아들였으니까 구약성서로 통용되었고요. 참 재미있습니다. 신약공동체, 분명 유대교와 다르고요. 상당히 초기에는 유대교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만 이방인 기독교 공동체가 활성화되면서 예루살렘 기독교 공동체가 점점 쇠락하면서 기독교 정체성이 분명해지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상당히 오랫동안 유대인들의 경전을 그대로 받았으면서 자기들이 갖고 있는 성경을 경전화 시키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이제 조금 의아스럽죠. 그러나 사실 어떤 카르타고 회의, 397년 이때에 결정적인 canonization 했습니다만 그러나 여러분이 요즘시대도 알다시피 회의를 통한 결정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요식행위입니다. 이거는 이렇게 다 무르익은 다음에 그거를 공식화하는 작업이죠. 물론 다른 사건들, 어떤 독재자 이런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법을 만든다거나 박정희 정권, 유신헌법이라든지 국민교육헌장 있잖습니까? 독재자들에게 그런 행태가 보입니다. 그러나 독재자들도 사실은 독재민중들을 이용하는거거든요. 민중들 거의가 동의하지 않으면 독재할 수 없습니다. 독재라고 하는 것은 우중정치를 이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 하는 거거든요. 이야기가 곁길로 나갔습니다.

397년까지 경전을 삼지 않고 그대로 지나왔다고 하는 것이 우리 눈에 이상하게 보이지만 그게 이상하지 않다. 그걸 말씀드리는 거죠. 397년이라고 하는 숫자는 이미 그 당시에 무르 익을 대로 무르익은 정경의 과정, 그걸 그냥 결정한 것뿐이죠. 사실은. 그러니까 그 당시에는 굳이 경전화해야 될 긴박성, 그런 것들이 없었던 거예요. 그냥 그 상태로 좋은 겁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 각각 지역 공동체들의 경전이 있었구요. 그리고 어느 정도 27권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져 있었을 겁니다. 회의라는 것은 전혀 없었던 것을 새롭게 만들지 않습니다. 이미 지역공동체에서 다 그렇게 27권, 합의가 동의된 상태에서 그래도 조금씩 작은 문제들이 불거지니까요. 서로 복음서도 서로 다른 것을 좀 쓰는 것도 나오구요. 요즘식으로 말하면 이단논쟁들도 벌어지고요. 사실 이때 이단논쟁 많았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신학적 논쟁이 활발하게 벌어졌어요. 그게 살아있는 거죠. 논쟁이 있다는 것은 바로 진리의식이 살아있다는 거죠.

지금 한국기독계에서는 신학 논쟁이 없잖아요. 이미 기독교 교리가 화석화 되었다고 할까요. 형해화되어 있다고 할까요. 박물관의 유물처럼 미이라처럼 모셔져 있어서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못본다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의 신성과 인성 이런 것들은 최기 기독교에서 정말 정통과 이론, 신학적 논쟁이 활발하게 일어난 겁니다. 가현설 문제 아다나시우스와 아리우스 문제 그게 다 4세기였어요. 물론 그 전부터 계속 조금 조금씩 발전되어 왔던 것들이 4세기때 거의 아주 첨예하게 신학화된 것이죠.

이렇게 말하다보니 생각이 나는군요. 요 시기가 4세기, 기억해 주세요. 4세기가 기독교 교리가 완성된 때입니다. 니케아 회의, 콘스탄티노플회의 이것이 다 4세기 때 된 것이거든요. 물론 그전서 부터 많은 논쟁들이 전개되어 왔죠. 이 4세기가 기독교 교리가 완성된 때인데요. 정치적으로 어떤 때냐? 유명한 기독교가 로마의 공인을 받게 된 밀라노 칙령을 선포한 콘스탄티누스. 이 사람에 의해서 기독교가, 뭐라고 해야 될까요? 그 사람에 의해서 기독교가 세계 종교가 되었다고 말하면 될까요? 그것은 정확한 묘사가 아닙니다. 그때는 이미 기독교가 유럽세계에 저변층에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가 밀랑칙령을 선포했던 안했던 이미 기독교는 어떤 힘에 의해서도 허물어 지지 않을 만큼 되었다는 것입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러한 기독교의 흐름을 먼저 포착해서 이용했다고 볼 수 있죠. 어떤 점에서 그는 정치가니까요? 그는 그렇게 신앙이 있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이 없다고 할 수도 없었구요. 다른 데로 나가지 말고 우리 이야기로 집중하겠습니다. 4세기때 결정되었는데 정말 중요한 것들이 이때 다 되었다는 것이었구요.

삼위일체 논쟁, 이때가 4세기 초에는 아다나시우스고요. 이 뒷부분으로 가게되면 어거스틴입니다. 이 사람이 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죠. 이 당시는 교부시대라고 하기도 하거든요. 이때 헬라 철학과 기독교 신학이, 가다머식 표현으로 하면 지평융해를 이룬 것입니다. 가다머, 글씨가 왜 이렇게 안 써져요. 가다머의 유명한 해석학에 관한 책, 바하이트트 운드 메토데, 해석학 철학의 고전이라고 할수 있죠. 그가 말한 것이 지평융해인거든요. 호르존트 헤어 후멘츠. 사티야님. 독일어 받아 녹취하시려면 힘드시겠네요. 과거 텍스트 지평과 콘텍스트 지평이 만나서 융해되어서 녹아난다는 것이죠. 음식을 먹고 위 안에서 소화되듯이 융해되듯이 새로운 지평, 제3의 지평이 나온다. 텍스트와 콘텍스트가 합해져서, 융해되어서 새로운 지평, 헤겔의 변증법 발상하고도 연관되는 이야기군요. 이렇게 기독교와 헬라철학의 지평융해를 통해서 기독교가 교리화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교리화, 신학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 제가 이야기하다가 자꾸만 옆으로 나가네요. 이 4세기가 중요하다고 하다보니까 연관된 몇 가지를 짚었습니다. 네.

네. 이때에 397년에 신약성서, 구약성서, 이건 이미 결정된 것을 받아들인 것뿐인데요. 신약성경이 경전화 되었는데요. 이것은 이미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역사의 흐름이 있었던 거다. 이전에 35년 이상의 초기기독교 역사가 그렇게 중구난방식으로 흘러간 게 아니라 나름대로의 경전으로의 역할을 했던 것들이 많이 있었고 397년경, 사세기 후반경에 이르러서는 이미 27권이 거의 경전처럼 전반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대 왜 복음서를 네 권을 받아들였을까 재미있는 것이죠. 그거를 다는 모르겠습니다. 그 상황이 어떤지요. 그 문서들도 제가 다 검토해보지 못했구요.

추정을 한다면 이런 것 있잖습니까? 이번에도 총선을 했는데요. 어떤 양반이 되나 모르겠습니다. 각 당에서 추천을 하잖아요. 그게 늘 힘이 팽팽하게 맞선사람 누구 미는 사람이 들어가기도 하고 빠지기도 하고 평균점에 가서 결정되기도 하잖아요. 카르타고의 대표자들이 여러 군데서 온 사람이니까 그런데 자기 지역에서 사용하던 문서들을 경전 안에 밀어 넣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도 기준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니까 나쁜 것이라고 보면 곤란합니다. 종교적인 교리가 결정되는 것 가운데서 정치적인 것이 조금 연결되거든요. 세속적인 정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권리, 교권이라고 하죠. 종교적으로 회의하고 결정해야 되니까 힘이 있는 사림이 주도권을, 그 쪽으로 회의가 결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힘이라고 하는 것이 순전히 정략적이고 정치 공학적이냐 아니면 진리이기 때문에 교권, 힘으로 나타나냐 하는 것은 판단해 봐야 하겠지요. 순전히 정치 공학적인 힘이 작용되었다면 그건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언젠가는 허물어지고 말거든요. 이런 카르타고 회의에서 정경으로 결정하였다고 하는 것은 정치공학이 아니라 진리의 차원에서, 그 신학적 깊이를 놓고 영성이라고 할까 영적인 차원에서 타당성을 가졌다. 그건 바른 선택이었고 비록 조금 정략적인 힘이 개입되었다고 하더라도 네 복음서가 들어간 것은 아주 잘 된던거다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네 복음서가 다르기는 하지만 공통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기 기본적으로는 각각 복음서들이요 조금씩 관점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예수가 그리스도다. 크리스토. 헬라어로 크리스토, 그리스도. (예. 조금 두껍게 해야 되겠군요. 잘 안보이네요. 어. 네. 되었습니다. 좀 두꺼워졌죠.) 그리스도.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 이거를 바탕에 놓고 있습니다. 제가 요즘 큐티, 다비아 묵상에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명제로 쓰고 있구요. 앞으로 일주일 정도 나가게 될겁니다. 이게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거든요. 복음서가 이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실은. 그거 머 우리가 이걸 뻔하게 다 안다고 하는 것이지만 그런 것 아니거든요. 예수라고 하는 것은 자연인 예수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버지가 요셉이었고 목수였구요. 어머니가 마리아인 두 사람 사이에서 큰 아들로 태어난 예수, 자연인 예수요. 이 그리스도는 자연인 예수는 아니잖아요. 구세주인데.

그리고... 예 이것이 어떻게 일치되는가 하는거죠. 이거를 어떻게 우리가 알 수 있을까요. 초기 기독교가 왜 이걸 고집했을까요? 똑같은 예수라고 하는 현상 앞에 유대교는 인정하지 않구요. 이슬람교도 인정하지 않구요. 그런데 왜 기독교만 그를 구세주라고 인정할까요? 그리고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연인이라고 하는 예수, 이 말은 우리와 똑같았다고 하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예수를 인간으로 보지 않고 신의 그림자다라고 보는 가현설이 초기 기독교안에 상당한 세력을 형성했는데 그것에 대해서 교부들은 아주 강력하게 저항했습니다. 예수의 인성을 조금이라도 손상시키는 사상이 있으면 이단으로 몰아내었습니다. 베레 호모 참된 인간, 이것을 놓치지 않았거든요. 마리아라는 여자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중에서 튀어나온 그림자가 아니라 우리와 똑 같이 여자의 몸 안에서 10달 동안 있다가 태어난 그 사람이다. 자연인이거든요. 초기 기독교인들은 왜 자연인이었던 예수를 메시아, 이거는 하나님의 현현이거든요. 이게 지금 유대인들에게 용납될 수 없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에게는 기적적인 사건도 있었고 특별한 일이 있었지 않느냐 생각합니다만 그런 일들은 예수님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나타나는 것들이었습니다. 제가 길게 말씀드릴 생각은 없구요. 이 맥락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거든요. 이것이 이렇게 당연한 것은 아닙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대답을 알고 있을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이것이 물론 정답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 저주의 대상이고 죽음이고 한데 이게 어떻게 구원의 길로 이해가 되었을까? 초기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근거로 해서 가장 수치스런 방식으로 죽었던 예수, 예수의 십자가를 인류의 보편적인 구원의 길로 선포를 했을까 하는거죠. ‘이미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서 자기 외아들을 보내주셨고 인류 죄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는데 당연한 게 아닌가?’ 여러분! 그런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초기기독교인들이 그거를 초기 기독교인들의 해석이예요. 어떤 말로 하자면. 그들이 예수에게 일어났던 여러가지 사건들을 그런 방식으로 해석한 것이지, 아무 것없이 쭈욱 관통해버린 것이 아닙니다. 물론 계시라고 하는 차원에서 볼때 하나님의 원천적인 통치와 힘들이 초기 기독교인들의 사유와 인식 해석, 공동체를 관통했다고 말해도 틀린 거는 아닌데요. 그렇지만 초기 기독교의 해석은 여기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사실은 이것보다도 사도바울을 많이 이야기하려고 했는데요. 자연스럽게 그리로 넘어갈 수 있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것이 신약성서에 대한 문제입니다. 형성과정, 그리고 복음서 편지들 그런 건데요.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기독교로 고백했다. 구세주로 고백했다. 한마디 더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이 말은 곧 그들의 구원이해의 독특성에서 나옵니다. 구세주는 구원을 일으킨 분 아니겠어요. 유대인들하고 이슬람교인들에 비해서 초기 기독교인 구원에 대한 이해가 달랐다고 하는 것이죠. 예수에게서 일어난 사건을 보고 유대인들은 전혀 구원에 대해 이해를 못한 반면에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거를 구원의 리얼리티로 경험한 겁니다. 그렇다면 초기 기독교인들의 구원이해가 뭐냐 이게 중요한 거겠네요. 그걸 이해해야 되겠네요.

이런 것들이 강의 전전에도 말씀드렸겠습니다만 모든 기독교가 전반적으로 유기적으로 연관된다고 하는 겁니다. 전체적인 유기적 연관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하나 띄어 놓고는 이해가 안되는 거예요.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지 못하겠죠. 예수가 구세주라고 이해하려면 구원에 대한 이해를 해야 되구요. 구원을 이해하려면 창조와 종말 이해하지 않고 구원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등등 그렇습니다. 이렇게 전체적으로 연관된다고 하는 것을 제가 지적한 것이구요. 그런 점에서 기독교 교리는 여전히 박물관에 고이 모셔져 있는 유물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숨 쉬고 우리들과 영적인 대화를 나누는 속된 표현으로 생물이라, 살아있는 사건이라고 합니다. 독일어를 써서 죄송합니다. 독일어로는 아이그니스라고 합니다. 생기, 생생하게 움직이는 기운, 어떤 딱 결정 되어버린 사실, 성품 fact하고는 다릅니다. 영어로 굳이 번역을 한다고 한다면 event라고 할 수 있습니다. fact 가아닌 event.

기독교 교리는 유기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유기적이다라고 하는 것은 살아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관계를 통해서 새로운 세계로 나간다고 하는 거예요. 참 놀랍죠. 그래서 우리 인간도 유기적이구요.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세계하고 소통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술작업이 가능한거구요. 창조적인 어떤 작업들이 가능한 거구요. 강의하는 것은 어떤 유기적인 관계성에서 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강의하는 것은 저만이 할 수 있는거예요. 제가 달리 잘났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저의 방식으로 세상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도 없잖아요. 나는 나잖아요. 내가 여태껏 걸어왔던 삶의 과정들, 내가 맡았던 꽃향기 하늘 색갈 봄 기운 이러한 것들은 나를 대신해서 해줄 사람은 하나도 없잖아요. 그런 거도 그렇고 기독교에 대한 경험도 나와 똑 같이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물론 이미 신앙의  선배들을 통해서 많이 학습을 했지만 저는 여전히 미숙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영적으로 살아있는 사람으로 어떤 기독교를 접하는 사람은 나와 똑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자꾸만 내 이야기를 해서 미안합니다. 유기적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기독교 교리가 그러니까 안방에 모셔져 있는 메주덩어리처럼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관계성속에서 새롭게 하나님의 계시를 열어간다고 하는 겁니다. 얼마나 놀라와요. 사건이니까. 살아있는 사건이니까 그런 점에서 여태까지 2000년 동안 수많은 신학자들이 있었습니다만 앞으로도 신학자들은 계속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왜 이것을 강조하느냐 하면요. 여러분들이 기독교 교리를 도그마라고 하는데요. 이게 구구단 외우듯이 외우고 말거든요. 옳은 이야기입니다. 틀렸다고 말은 못하죠. 그러나 그것들이 서로 유기적인 관계성속에서 우리들에게 손가락질하며 계시하고 있는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구원통치로 나가지 못한다면 말 그대로 도그마죠. 군주시대 군주가 농노들에게 언제까지 세금을 내라 그건 도그마죠. 그런 방식에 불과하죠. 죽은 문자에 불과합니다.

저는 한학기 동안 강의하면서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것은 딱 한가지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좀 살아있는 것으로 대해봐라 하는 거죠. 시인의 감수성, 예술가적 감수성, 실험실에서 새로운 물리학적인 진리를 추구하고 있는 과학자와 같은 그런 심정, 그건 영성이거든요. 아프리카 오지에서 새롭게 길을 내는 사람, 기독교가 사실은 그런 거거든요. 그런 것만 여러분들이 신학적인 영성이예요. 그것만 여러분들이 조금이라고 생각을 했다면 이 강의가 목표라고 하는, 소기의 목표라고 할까요. 그것을 달성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복음서가 담고 있는 대명제, 여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바울이거든요. 바울에 대해 제가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바울이요. 바울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보면, 이런 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여러분들은 사도바울하면 다메섹도상의 회심, 다마스쿠스라고 하죠. 다마스쿠스 도상, 도상의 사건, 그리고 또 뭐 스데반 순교할 때 순교 장면에 있었다. 이 정보를 어디서 얻으셨어요. 사도행전이죠. 그래서 늘 우리는  바울을 생각할 때 빛보고 회심하고 완전히 회심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조금 우리가 더 과학적으로 생각을 해야 됩니다. 사도행전이 말하고 있는 바울하고 바울의 편지 서신이 말하고 있는 바울하고는 그림이 좀 달라요. 많은 면에서 다릅니다. 사도행전에는,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더라도, 바울이 상당히 연설솜씨가 좋은, 그러한 사람으로 묘사되는 반면에 바울의 편지에 의하면 그는 말에 졸하다 그런 말을 썼습니다. 그거말구도 많이 차이가 있는데요. 지금 요 사건을 이야기하려는 겁니다.

바울이 다마스쿠스 도상에서 회심했다는 이야기를 바울은 직접적으로 증언하지 않습니다. 혹시 그런 데가 기억나면 저한테 좀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아직 바울의 편지에서는 발견하지 못했거든요. 스데반 순교의 자리에 있었다는 것도 바울이 증언하지 않죠? 왜 그럴까요? 사도행전에, 사도행전은 그러니까요.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전반적인 역사를 담은 것은 물론 아니거니와 바울을 이야기하면서도 바울을 변증하고 있는 거죠. 변증이지 그에 대한, 지난 주일 저녁에 어느 주석서를 제가 읽어 주면서 말씀드렸듯이 기록영화가 아니다. 다큐멘트 영화 기록 영화가 절대 아니다. 물론 복음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변증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실을 독자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라고 할 수 있죠. 뭘 납득시키려고 했느냐 그게 중요하죠. 서신들이 가지고 있는 내용, 신학적 진수를 찾아가는 것, 제가 자꾸 신학적, 신학적 해서 이게 기독교 신앙을 자꾸만 그렇게 이론적으로 만들어야 되겠느냐 그렇게 생각할 분들이 있을까 염려되어서 한마디 짚는다고 하면요.

용어라고 하는 것이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제가 신학적이라고 말할때는 신앙하고 대별되는 차원이 아니라 오히려 ‘영적’이라는 뜻을 여기에 담고 있어요. 영적이라는 spiritual 한 것이 Theological 한 것이거든요. 이게 두개다 궁극적 진리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적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이 세계 생명의 가장 밑바탕바탕에서 결정하는 어떤 힘들, 우리가 이것을 영이다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신학적이라고 하는 것은 Theoslogos 라고 하는 말의 뜻이 Theos, Logos 하나님, 진리,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거하구 가장 생명의 심층적 세계를 이야기 한다고 하는 것은 어때요? 똑같은 이야기거든요. 제 쓰는 용어에 대해서 오해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어서요. 신학적 진술, 영적인 진술, 가장표면적인 것이 아니라 심층적인 진술이다 하는 것이죠. 그걸 찾아내겠다고 하는거예요.

바울의 다마스커스 경험이 정말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우리는 그걸 전제하고 이야기합니다. 다메섹에 있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들에게 명령증, 증명서를 가지고 갔다. 가다가 만나서 회심했다. 우리의 머리 속에는 바울의 회심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로 이야기하잖아요. 바울은 왜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을까요? 물론 자기가 기독교를 방해하다가 이제는 아니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죠. 그러나 여러분. 그가 반대했던 기독교는요. 역사에 나타난 그 기독교가 아니라 유대기독교예요. 이건 초기 기독교의 상황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요. Judaic Christianity. 유대교가 있고 유대 기독교가 있고 이방인 기독교가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 안에서요. 유대기독교는 어떻게 보면 같은 유대교예요. 그래서 바울이 내가 당신들을 욕하다가, 욕했다 옛날에. 그 이야기는 같은 기독교 안에 신학적인 논쟁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유대기독교는 유대교안에 나사렛파, 사두개파가 있듯이 그 안에서 같은 기독교 논쟁을 한거죠.

어느때인지에 대해서는 바울이 정확하게 거론하지 않지만 바울이 이방인 기독교인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이 과정을 제가 정확히 잡아내지 못했어요. 바울이 처음에는 유대교안 바리새인이었죠. 바리새인중에 바리새인이고 그건 가장 극단적인 바리새파 운동을 하던 사람이 결국은 이방 기독교인이 되었는데 그가 부웅 뛰어넘어서 이방인 기독교인이 되었는지요. 아니면 유대 기독교를 거쳐서 갔는지 그거를 제가 정확히 말씀드리기가 어렵군요. 아마 유대 기독교안에 머물렀을겁니다. 직접 이방인 기독교도가 되기는 힘들었을거구요. 고 사이에 유대기독교로 가기 전에 그가 신학적 논쟁을 많이 벌인 거죠. 이방인 기독교가 된 다음에 유대기독교와 싸워요. 그게 갈라디아에서 잘 나옵니다. 갈라디아에서 예루살렘 기독교하고, 그 다음에 헬라지역의 이방인 기독교, 이게 인제 대립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제가 아직까지 신약성서 전공한 사람이 아니래서요. 정확하게 말씀드리기가 힘든데 그냥 큰 그림으로만 설명을 합니다. 예루살렘 여기에는 예수님의 사도들과 예수님의 동생이 지도자로 활동을 하고 있었구요. 이방인 여기에는 주로 인제 바울이죠. 갈라디아서를 제가 설명 다하지 않겠습니다. 언젠가는 한번 드린 적이 있는 것도 하구요. 시간적으로 봐서 접어두고요. 제가 핵심적으로 말씀드리려고 하는 거는요. 예루살렘 공동체에 예수님의 사도들, 동생들이 다 있었는데 이방인 기독교하고 거의 이단 논쟁 비슷하게 싸웁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바울이 이들을 향해서 너희들이 전하는 복음은 가짜야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거든요. 과연 바울의 이러한 공격이 타당성한 것인지 아닌지? 그게 조금 더 생각해봐야할 주제라고 하는 겁니다. 내용을 보자면 분명히 바울이 옳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으면 의로워진다고 하는 칭의론에 극단적으로 붙드는 거예요. 예루살렘 있는 이 사도들을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로워진다고 기초에 놓으면서 동시에 토라와 할례도 같이 가야 한다. 토라와 할례, 이것도 지켜야된다 이거를 주장한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지금 토라와 할례를 그걸 전제한다면 바울이 전적으로 옳은 것이죠.

그러나 또 어떤 면에서 볼 때 우리가 유대인들의 구약성경을 그대로 신약성서의 경전으로 받아들였다고 하는 것을, 역사적 사실을 전제한다고 한다면 유대기독교의 입장도 그렇게 틀리지 않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 전통, 유대 기독교 전통하고 순수하게 이방인 기독교의 전통이 역사안에 같이 들어오게 된 것 같아요. 거기에 자세한 내막 같은 것에 대해서는 제가 말씀드리기 좀 힘듭니다. 다른 것은 접어두고요. 이 갈라디아서를 중심으로 놓고 본다면 예루살렘 교회공동체과 바울하고는 도저히 길을 같이 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신앙적인 차원에서요.

그리고 역사의 과정을 본다면 예루살렘교회는 유대기독교에서 사라졌습니다. 70년의 로마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바리새 운동이 극단적으로 일어나면서 그들하고 같이 절충하면서 나사렛파의 특징을 살리고 가던 예루살렘의 유대 기독교회의 입지가 대폭적으로 축소되었습니다. 그래서 점 점 특성이 없어지고 예루살렘에는 기독교라 하는, 나사렛파라고 하는 명맥도 유지할 수 없게 되어서 신앙으로 이거는 괴멸되고 말았구요. 대신 이방인 기독교가 기원후 70, 80년 되어서 유럽지역의 큰 종교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네 여기에서 이제 이러한 역사적 과정에서 바울의 역할이 독특한데요. 그건 나중에 또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이야기하겠습니다.

사도 이야기가 나와서 한 마디만 더 드린다면 열두 사도 보통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잖아요. 예수님이 초기에 열두사도 임명한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열두사도는 역사 후대의 산물입니다. 그거는 사도들의 지위가 확고하게 되면서 열 두사도 전승이 복음서안에 들어간 걸로 연구되고 있습니다. 그게 어느 정도 타당한지는 제가 단정적으로 말씀드릴 입장은 아니구요. 맞지 않겠느냐 생각합니다. 사도들이 권위가 초창기에는 별로 없었다고 봐야 되죠. 그런 점에서 본다면 사도행전에서도 열두 사도의 활동들이 골고루 잘 나타난 것이 아니라 몇몇 사람들에게 편중되잖아요. 중간부분에는 주로 바울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는데요. 앞부분에도 베드로하고 요한 정도지 열두 사도가 별로 나오지 않습니다 서신에 사도들의 편지들이 별로 없어요. 베드로 전서 후서 이거도 베드로의 편지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대충 되었나요. 신약성서를 마쳐야 되니까요. 지금 복음서와 사도행전, 서신 이런 전반적인 연관성속에 있었던 초기 기독교의 상황을 강의안과는 상관없이 말씀드렸습니다. 계시록만은 제가 빼놓았는데요. 계시록, 이거 참 중요한 문서입니다. Apocalyptic 묵시문학 참 중요합니다. 이 계시록을 많은 사람들이 알레고리로 해석 합니다. 거기에 나와 있는 숫자, 색깔, 이런 것들을 신앙의 본질인 것처럼, 신앙의 본질이라기보다도 신앙적 특징이라고 할까요. 그런 것처럼 말하죠. 14만 4천명이라든지 예를 들자면 666이라는 숫자도 있죠. 구원받은 사람들이 숫자다. 사이비 이단들이 주로 말을 하지요. 1960년대 많은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유럽연합까지도 적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이야기하고 말이죠. 바코드와 연관시키기도 하고.

 이렇게 보는 것은 근본적으로 성서의 묵시문학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묵시문학은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현대의 극단적인 난해시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혹은 초현실주의 추상화 그림, 네. 초현실주의죠. 뭐 추상화 같은 것들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데는 경험되지 않는 거지만 그래도 더 궁극적인 예술가의 경험을 말하고 있는 거잖아요. 뜬 구름 잡는 이야기는 아니잖아요. 요한계시록은 그 당시에 있었던 특별한 유대인들의 묵시록이라고 하는, 극단적 상징을 통해서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계시록은 이렇게 이야기하면 됩니다. 역사서다. 틀림없습니다. 역사라고 하는 것은 당대의 역사도 있구요. 미래의 역사도 있는 거거든요. 종말론적인 미래. 종말론적인 당대와 미래, 과거도 있구요. 전반적인 흐름에서 하나님의 현신들을 진술하고 있는, 예언하고 있는 책이다라고 볼 수 있죠. 여기에는 하늘이 종이장처럼 말린다거나 바다속에서 용이 튀어나온다고 하거나 그러한 정말 우리가 일상에서는 말하기 힘든 것들이 많이 나오지만 그건 제가 보기에는 역사를 정확히 뚫어 본 어떤 예언자의 놀라운 문학적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그건 아주 오늘날에도 요한계시록의 지평에서 역사를 해석하구요. 새하늘과 새땅 이야기하잖아요. 새 예루살렘 이야기 하잖아요. 거기가면 생명수가 사시사철, 이런 것들 어떤 목사님들은 사실처럼 설명하시는데. 천당에 가면 먹을것처럼 말이죠. 어린이들은 거기에 혹하겠죠. 어른이 되면 잘 먹고 잘 살고 맛있는 것 먹고 언제까지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되겠어요? 그런 거 계속 살기 원하세요? 죽은 다음에 새로운 세상에 가서 맛있는 것 먹고 배고프지 않고 알콩달콩 살기 원하세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극단적으로 좋아지는 복지의 극대화? 요한 계시록은 그러한 방식으로 쓰여졌으니까 말이죠. 그런 생명을 원하시나요? 어른이 되면 더 이상 그런 것 원하지 않습니다. 그거는 한번,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은 한번으로 족한거죠. 전혀 새로운 생명이 우리들에게 온다고 하는, 우리를 기다리고 하는 사실을 묵시문학적 방식으로 기록한 것이 계시록입니다. 새로운 역사에 대한 희망인거죠.

계시록은 역사에 대한 이야기다. 역사는 종말에 가서 완성되니까요.  eschatology 묵시문학의 토대, 이게 모판에서 자란 기독교의 역사이해가 종말론입니다. 종말론, eschatology는 기독교의 역사관이예요. 세계관이예요. 역사, 세계의 흐름이 역사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현실안에서 보느냐 그걸 말하는거죠. 네. 여기까지구요. 다음에는 오늘 이야기하다가 좀 부족한 것은 주일저녁에 이야기하겠구요. 다음 목요일서 부터는 교회 현실적인 문제를 하겠군요. 기독교의 형태와 본질 예배 헌금 기도 그런 것들 교회 실천적 문제들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여성안수 이런 것들도 나오는군요. 고맙습니다. 오늘도 수고하셨구요. 질문 있으면 동영상란에 올려 주었으면 고맙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