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가 뭐꼬?(080515) 받아쓰기-삼위일체

하늘은 왜 이리도 푸른지
미치도록 아름다운 올해 가을
단풍 저리 붉게 우는 날 알게 되었어
이별의 계절 슬프도록 아름다운 올해 가을
가을이 빨간 이유를 나도 알았어

붉은 가을 이별의 계절엔
그리움도 흔한지
깊은 숨을 쉬면 가슴이 아프다
가슴이 너무 아프다  

넌 눈물이 있으니 참 좋겠다
눈물 보일 수 없는 난 어쩌겠니
내 눈물은 돌이 되어 쌓이는지
가슴이 무겁다

붉은 가을 이별의 계절엔
그리움도 흔한지
깊은 숨을 쉬면 가슴이 아프다
가슴이 너무 아프다

넌 눈물이 있으니 참 좋겠다
눈물 보일 수 없는 난 어쩌겠니
내 눈물은 돌이 되어 쌓이는지
가슴이 무겁다

-가을이 빨간 이유 -김원중(배경희 글,곡/류형선 편곡)

네 수고하셨습니다. 노래.. 재미있죠? 오월 15입니다. 스승의 날이네요. 네 보통 이럴 땐 스승의 노래 부르던데요. 학교에서. 이 강의 이 모임에서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모양이네요. 일단 들었다 생각하구요.

5월 15일 시간이 빨리 지났습니다. 늘 상투적인 이야기 같은데요.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더 빨라진다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우리도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니다. 도대체 시간이 뭘까요? 그걸 아는 사람이 있다면 당장 노벨 물리학상이나 그런 걸 타더라도 손색이 없을 겁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그게 어디까지 진행될 것인가 그런 것도 그렇구요. 그리고 왜 이 세상이 시간과 공간으로 엮여져 있는 것도 이게 정말 신비한 것이거든요. 이러한 관계들이 다 하나님과의 문제에도 연관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 세상을 이 모양으로 이렇게 만드셨을 가 하는 그런 궁금증이구요. 우리는 대개 그렇게 있는 것으로 전제하구요 거기에 익숙해 있어서 당연하다 우리가 이렇게 뭐를 먹고 살고 말을 하고 색깔이 있고 하는 것들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당연한 것은 아니잖아요. 우리가 다른 예를 빌린다면 색맹, 색깔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이 색깔이 없다 말입니다. 전혀 다르게 보이겠지요. 청각 장애인들에게는 소리를 전혀 경험하지 못하니까 전혀 다른 세상이죠. 어쨌든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는 부분적으로 우리가 다 포착하지 못하니까요. 우리가 청각 장애인이 아니지만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청각 장애인일 수도 있구요. 어떤 부분에서는 우리가 장애일수도 있구요. 우리가 모르는 어떤 부분의 인식의 한계를 안고 살고 있습니다. 고걸 모르면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거예요. 이 청각장애를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소리가 있다는 경험을 모르고 태어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인데요. 얼마나 신비로운지 모르겠습니다.

그 하나님 우리는 어떻게 경험할까요? 지난 주에 시작해서 오늘 마치게 되겠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말을 하면서 좀 황당하기도 합니다. 제가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제가 신학적으로 읽을 책들의 내용들도 있고 또 나름대로 작은 경험이 있어서 뭔가를 제가 말할 수 있고 또 말을 했기도 하고 또 앞으로도 애기를 하기도 하겠구요. 어쩌면 다비아에서 행해지는 모든 이야기, 글 쓰기 다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일 겁니다. 그러나 이거는 너무나도 부분적이기 때문에 이런걸로 하나님에 대해 어느 정도 어림짐작으로 말했다고 이렇게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 제가 예를 들었듯이 큰 동물의 털 하나에 붙어갖고 전체를 보고 있는 정도인데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우리는 말해야 되니까요? 이렇게 또 묻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디서 어떻게 하나님을 경험하시나요? 늘 우리는 신앙적으로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곁에 늘 계시다고 말이죠.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말이죠. 그런 익숙한 신앙 형태 속에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처럼 삽니다.

오늘 뒷부분에 대해서 중간 이후로 가서 삼위일체를 이야기하게 되는데요. 보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잖아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말이죠. 성령도 하나님이라고 하는데요. 이 세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경험하는 겁니까? 이게 가능한 건가요? 보통 여러분들이 기도할때 어떤 하나님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나요. 그러한, 그게 아마 천차만별일겁니다. 여러분들 그냥 그저 복음서에만 나온 바로 그 예수님만 생각하며 기도들릴 수 있겠구요. 아니면 구약에 있는 하나님 대한 진술 있잖아요. 그런데서 나온 하나님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어쩌면 아이성과 여리고성을 함락시키고 가나안땅을 정복하게한 그 하나님을 여러분들이 머리속에 넣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노아의 홍수와 같은 심판의 하나님일까요? 아니면 많이 뜨거워지게 만드는 성령의 체험, 성령의 하나님을 생각하는 걸까요? 여러분들은 언제 어떻게 하나님을 경험하시나요? 뭐 이런 경험들은 많이 있을겁니다. 찬송을 열심히 잘 부르구요. 마음이 편안해지고 따뜻해지고요. 또 어떤 집회에 가서 예수님을 잘 배워 들어서 아 예수님이 정말 나의 구원자라고 하는 내가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도 고백하고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함으로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는 그러한 경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하나님을 다 이야기한 것일까요?

고대 유대인들의 하나님 이해는, 사실은 그 시대의 세계관 안에서 이루어진 겁니다. 그 당시 세계관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 땅, 지하, 우주를 그런 방식으로 생각했거든요. 하늘에는 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고요. 또 이 세계를 다 주술적으로 생각하던 시대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십시오. 중국에 대 지진이 일어났잖아요. 그리고 끊임없이 지구에 재앙이 내리고 있는데요. 지금처럼 자연과학이 발달해 있는 상태에서도 이런 것들 앞에서는 두렵지 않습니까? 고대인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한번 돌이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진도 경험을 했을 거란 말입니다. 화산, 폭발 이런것도 했을 거구요. 해일도 경험하고 했을 텐데 도대체 그들이 그러한 자연들 앞에서 얼마나 두려워했을까 하는 것을 창세기를 보면 그들이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들였다고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노아 홍수 같은 것도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노아홍수 같은 것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딱 생각하지 않죠. 그건 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르긴 합니다만 고대인들하고는 우리들과는 전혀 세상을 다르게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이해도 좀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약공동체도 유대인과 그렇게 다르지 않아요. 다만 예수님에 대한 독특한 경험이 있었다는 것이 그 하나고 그러한 경험 때문에 고대 유대인들의 민족주의적인 하나님이해, 일종의 시오니즘 이런 것을 벗어났다고 하는 차이가 있지만요. 그러나 기본적 밑바탕에는 똑같습니다. 2천 년 전이나 3천 년 전이 고대인들은 이 세계를 그렇게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한 하나님 이해가 지난번에 실체론적 형상이라고 이야기했는데요. 하나님도 실체로서 우주 공간 어디엔가 있을 거라고 생각을 많이 한거죠. 그러한 생각들은 오늘 현대에 아무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죠.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우주공간 어딘가에 하나님이 옥황상제처럼 정좌하고 있어서, 자리를 잡고 있어서 그리고 이 지구에 있는 사람들을 체스 하듯이 하나하나 놓아간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금 없지 않습니까? 1992년 다미선교회의 파문이 있었을때 북극성 어디인가에 휴거다다고 생각했습니다. 휴거라고 하는 표상, 그런 것들이 요한계시록에 있는데요.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러한 방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들의 세계 이해가 그런 거니까요. 어떤 궁극적 생명의 세계가 휴거의 방식으로 간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오늘날 제대로 정신이 박힌 사람이 그러한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휴거, 예수님이 오시고 재림하시고 우리를 영접하고 휴거라고 하는 이러한 신약성서의 신앙적 표상 이런 것들이 무의미한 것들은 아닙니다. 다만 그 시대의 신화적인 방식으로 이야기한거죠.

오늘 우리는 그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이해가 계속 발전해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발전이 글쎄, 어떨까요? 하나님이 변한다고는 말 할 수 없죠. 어떻게 하나님이 변한다고 말할 수 없죠. 다만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다고 할 수 있죠. 하나님 그러니까요. (제가 쓰는 것 준비를 좀 해야 되겠습니다.) 이 창조라고하구요. 종말이라고 생각하면요. 창조시대와 종말, 그리고 종말 이후에 어디 가겠죠. 어디까지 갈까요. 영원히 갈까요. 창조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하니까요. 무라고 하니까요. 우리는 이 점에 있습니다. 이렇게 가고 있는거죠. 하나님은 이 전체를 통해서 자기를 계시하고, 신학에서 말할때요. 계시하신다고 말합니다. 전체. 종말에 가서야 그분의 실체가 들어나게 되는거죠. 우리는 요 점으로 있기 때문에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이거예요. 과거에 있었던 그러한 거하구요. 이러한 한계에서 볼때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죠. 하나님은 변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와 더불어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심화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 이런 것 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그러한 사람들도 많이 있구요. 그래서 계속 오늘의 시대와 충돌하게 됩니다. 옛날식으로 곧이 곧대로 믿는다고 할 까요? 아니면 이런 표현들이 정확하지 않는데요. 이렇게 말을 해야 되겠구요. 이미 지동설 이후를 살고 있는데 여전히 하나님을 천동설, 제가 맞게 이야기 하는거죠. 천동설, 옛날엔 천동설이 다 진리였으까요. 지금은 지동설 맞죠. 이런 전혀 패러다임이 달라졌는데도 많은 신자들의 머리에는 천동설에 근거한 하나님으로만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여기서 참고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요. 제가 물리학자는 아니지만 이 천동설이 무조건 잘못된것 아니예요. 부분적으로 보면 지동설이 맞기는 합니다만 이 우주 전체도 움직이잖아요. 그런 점에서보면 이 천동설이 완전히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그거, 고거만 잘못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잘못 되었다기 보다도 그런 정도만 이해를 했던거죠. 그러니까 이 우주가 어떻게 되었느냐 하는 것은 천동설이다 지동설이다 이걸로 딱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나가면 앞으로 또 어떤 다른 패러다임이 우주 물리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올지 몰라요.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가는거죠. 아까 우리가 청각 시각장애가 어떤 차원에서 그렇게 가능하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이거와 연관 되는데요. 우리는 과학이 아무리 정밀하고 엄밀하고 실증적인 학문이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아는 것만큼 압니다. 미래는 아직 모르는 거예요. 이거는 가봐야 아는 거예요. 뉴턴이라고 하는 물리학자가 그렇게 위대했지만 양자 역학을 몰랐잖아요. 정말 있는가 상상을 못한다는 겁니다. 뉴턴의 물리학하고는 양자역학하고는 이거는 전혀 맞지 않는 거거든요. 맞지 않는다기 보다 말하기가 물리학적 용어로 내가 정확하게 말씀드리기 힘듬니다만 완전히 상반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립되는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전혀 다른 차원이죠. 그런 것처럼 천동설, 지동설 이런것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밝혀진 물리 생물학적인 토대를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거죠. 그 방식으로 우리가 세계를 이해해야 되니까요.

오늘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여전히 천동설적인 차원에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기복적이다 다 그런거죠. 어떻게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이 자기 이쁜 사람에게만 사탕을 더 주고 하십니까? 이미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데요. 하나님이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고 햇빛을 주신다고 그렇게 말씀을 했는데 우리는 여전히 편애하는 하나님, 그쪽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게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닌데요. 좀 다른 차원에서 이야기를 해야 되겠지요. 우리가 사탕을 덜 먹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거거든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를 편애한다. 예수믿는 사람들을 특별히 사랑한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가치로 사업을 했는데 잘된다던지,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든지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하면 천동설적인 하나님 이해라고 할 수 있겠죠.

이런 것을 극복할려고 애썼던 가장 대표적인 신학자가 본 훼퍼입니다 본훼퍼요. 이 사람이 이름이 이러게 써야 될까요? Dietrich Bonhoeffer. 이 사람은 성숙한 시대라고 그랬거든요. 본훼퍼 신학을 이해하는데, 1906에서 태어나 1945년, 39살에 죽었구요. 나이로 따르자면 칼바르트보다 훨씬 후대에 태어났군요. 바르트는 1886년인가. 아마 본훼퍼도 칼 바르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은데 히틀러 암살에 체포되었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교수형을 당했죠. 본훼퍼는 좀 재미있는 학자입니다. 굉장히 영성이 깊고요. 대단히 자유주의적, 진보적인 신학자였습니다. 그러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재미있는 게 이분의 신학이 상당히 radical 한데, 복음주의쪽에서 받아들일만한 요소들이 별로 없는데도 이상하게 본훼퍼만은 복음주의에서 많이 받아들입니다. 그 이유가 본훼퍼 영성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실은 착각하고 있는 걸꺼예요. 이 사람의 영성이라는 것이 복음주의쪽에서 생각하는 그러한 정도가 아니거든요. 이 본훼퍼의 신학을 이해할 때 중요한 키워드를 몇가지를 말씀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가 성숙한 시대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비종교화. 두 개가 연관되어 들리시죠. 성숙한 시대, 이거는 지동설 이후 모더니즘 이후에 사는 제가 모더니즘에 대한 각주 설명을 강의안에는 썼습니다. 모더니즘을 거친 시대, 성숙한 시대인데 여전히 기독교가 종교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본훼퍼가 이야기하는 이 종교론이라는 것은요. (뒤로 넘어가야 되겠네요. 자꾸 움직이네요.) 그가 말하는 종교라고 하는 것 종교화,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종교는 그러니까 성숙한 시대가 아니라 유아적인 신앙을 가진 그러한 종교성을 이야기하죠. 예를 들어 이야기하자면 예를 들자면 죽음이나 외로움이나 허무 이런 것이 두려워서 종교 생활하는 것, 그런 것입니다. 아주 가장 원초적인 종교성이죠.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신을 찾는다거나 자기에게 다가올 불행을 막기 위해서 신을 찾는다거나 샤머니즘도 포함되겠구요. 오늘 한국 기독교인들도 거의 다 이러한 종교성에 머물러 있을 겁니다.

그러한 유아적인 상태의 종교성을 가르켜, 여기서의 하나님 상을 두 가지로 말하는데요. 하나는 하나님을 폭군으로 나타납니다. 두 번째는 자동응답기. 하나님, 무서워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말 잘 들으면 복을 주고 말 잘 듣지 않으면 혼낼 것 같은 그런 폭군으로서의 하나님 상이 있습니다.

어느 책에서 보았는지 모르겠는데요.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꾸민 이야기인지 실지 있었던 이야기인지 모르겠는데요. 어느 수녀가 주일학교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일학교 어린이 하나가 어느날 성당 나오지 않고 부모들과 같이 마차타고 놀러갔다가 마차가 전복되어 죽었습니다. 다음날 주일날 아이들에게 봐라 제가 주일 날 성당 나오지 않고 나갔다가 죽었다. 하나님의 벌을 받았다 그런 식으로 가르쳤다고 하는 겁니다. 아 그 이야기가 어느 수녀가 사생아를 낳은 그런 연극 있죠. 뭐죠? 기억이 안나네요. 신의 아그네스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중세기 때 하나님에 대한 진노, 죄책감, 죄책감이 제가 다른데도 몇번 이야기했는데. 한국교회에서 죄의 문제 죄책감 이거 심각한 문제입니다. 더 이상 현대인들이 이 죄책감 사로잡히지 않았어요. 죄의식이 별로 없습니다. 좋다는 뜻이 아니라 그게 현실이라는 것이구요. 그것을 어떻게 설명을 해야 될까요? 여기서 머물러 있으면 안되는데.

이 신자들을 가능한대로 죄의식에 빠지게 하는 목회가 성행하고 있습니다. 노골적으로 그렇게 하기도 하고 또 은근하게 그렇게 이야기하기도 하고 간단하게 예를 들자면 그렇죠. 십일조 떼어 먹으니까 그거 나가는 것 만큼 사고나던지 해서 다 나가더라. 아들이 다치거나 해서 나가더라. 그렇게 하면 되냐? 이러한 설교 많이 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어떻게 복음이 전파되려는지 참 그렇습니다. 기독교 영성은 죄책감이 아니라 죄에 대한 책임감은 당연히 있어야 되지요. 이거는 심리적인 죄의식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에 책임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요거는 좀 접어두겠습니다.

폭군의 상으로서 하나님이 자리 잡고 있고 자동응답기, 비슷하죠. 다른 것 같지만 비슷한 겁니다. 구하기만 하면 다 그대로 주는 것과 같은, 신자들을 다 어린아이와 같이 만들구요. 자동응답기에다 기도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그런 방식, 이런 방식들이 성숙한 시대에는 맞지 않는, 정말 순전하게 원초적인 종교성이나 기독교는 그게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게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는 그런 종교성이 아니라 이 삶의 한가운데서 있는, 그러한 신앙으로 이야기하죠.  결론 부분의 그 본훼퍼의 이야기. 네. 다시 볼께요. 제 책하고 강의안에 올라간 것하고 잘 연결이 안되는 것같아요. 본훼퍼의 비종교학 개념에 볼 때 인용한 부분을 읽어야 되는데. 본훼퍼의 비종교학, 찾았습니다. 옥중서간에서 본회퍼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유명한 책이죠. 그 분이 돌아가신 후 친구 뢰트게가 쓴 책입니다. 감옥속에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이게 본훼퍼 신학의 진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른 아홉살된 젊은 신학자, 양심적이고 애국적이 그리고 신앙이 깊었던 영성가, 그리고 목회자 였던, 앞날이 창창한 그 본훼퍼가 감옥속에서 유언비슷하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한계에 처해서가 아니라 중심에 있어서, 약함에 있어서가 아니라 힘에 있어서, 따라서 죽음과 죄책을 계기로 해서가 아니라 생과 인간의 선에 있어서 신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 … 인식론적 초월성은 신의 초월성과는 무관하다. 신은 우리의 생활 한 가운데서 피안적이다. 교회는 인간의 능력이 미치지 않는 곳, 한계에서가 아니라, 마음의 한 가운데 있다.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잘들어 보세요. 이건 굉장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으면 성실할 수가 없다. 신은 우리가 신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우리와 함께 하는 신은 우리를 버리는 신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엘리엘리라마 사박다니 하시면서 신의 유기를 경험한 것이 생각나는군요.) 신이라는 작업가설 없이 우리를 이 세상 속에 살게하는 신은 우리가 항상 그 앞에 서 있는 신이다. 신 앞에서 신과 함께, 우리들은 신 없이 산다.”

마지막 구절이 많이 인용됩니다. 신 앞에서 신과 함께, 우리들은 신 없이 산다.  이 사람이 이야기하려고 하는 핵심은 여태까지 초월성만 강조하고 폭군이요. 자동응답기의 하나님으로만 가르쳤던 그러한 기독교의 가르침과는 달리 이 세상성에 대한 강조입니다. 독일어로 벨트리카이트 weltlichait 라고 하는것.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 이 중심에 교육, 사랑 이러한 삶의 중심에서의 피안, 그게 같이 변증법적으로 담겨있는거죠. 그 이전까지는 무조건 이원론적으로 초월적인 저 세상만 수호하게 되는데 그것은 성숙하지 않는 시대에 해당 되었던 것으로, 성숙한 시대에 모더니즘 이후로, 지동설 이후로 우리들은 그러한 폭군이요 자동응답기의 신이 아니라 오히려 신 없이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하는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네 이 분이 하는 이야기야 다 옳다 그렇다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 이해가 시대와 더불어서 시대와 더불어서 새로와 지고 심화되었다고 하는 것, 그런 것 우리가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본 훼퍼에게서는 우리의 죄, 또 우리의 한계를 보충하기 위한 절대자를 요구한다는 그런 종교성이 아니라, 그런 것을 극복하고 건강한 삶 안에서의 하나님 이해, 그것을 우리가 배울 수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것들을 근본으로 하면서 그러나 이런 것들, 과정 지나가고 있거든요. 그 뒤로도 해방신학이다. 여성신학, 생태신학, 그래서 거기서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여성신학 같은데서 하나님의 아버지상으로부터 이해가 여성성을 포함한 그쪽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하여튼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하나님에 대한 상 그게 고정되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불변이기는 한데 우리의 인식의 한계 때문에 부분적으로 알게 되던 것들이 조금더 알게 되는거죠. 가부장 시대에서는 여전이 여성 신학이 문제가 제기하듯이 하나님이 곧 아버지처럼 인식되었다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을 성적인 차원에서 뛰어넘는 하나님으로 이해되듯이 시대와 더불어서 세계 이해와 따라서 세계를 이해하는 지평에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도 우리가 달라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게 어디까지 갈까요? 우리가 세상을 얼마나 더 알게 될까요? 어느 때가 되어야 이 세계가 온전히 우리들에게 실체를 드러낼까요. 그게 정말 궁금합니다. 그걸 제가 알 도리도 없구요.  잠간 이렇게 살다가 가는데 지금까지 인류역사가 풀어낸 것도 다 알지 못하는데 더 궁극적인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도 인제 그러한 궁극적 세계와 연관되어 있어서 그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조금 어지럽죠.  현묘하다고 할까요. 또 그런 점에서 신비롭기도 하고, 그런 점에서 온전하게 내 삶, 내 운명, 죽음까지도 포함한 그 모든 것을 의존해야 될 온전한 대상이라고 하는 사실을 더 깊이 알게 됩니다.

어쨌든 이러한 조금 변화되는 하나님이해에서 더 근원적인 하나님이해가 뭔가? 그걸 바탕에 놓고 나와야 되거든요. 그것은 곧 삼위일체입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제가 창문을 좀 열겠습니다. 열을 내서 그런지 좀 덥네요. 착, 차르르륵 착.)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 아 이거 정말 어려운데 들어왔군요. 우리가요. 여러분들이 많이 들었을 겁니다. 그냥 진도 나가볼까요? 삼위라, 삼위가 뭐예요. 아버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그 다음에 아들로서의 하나님, 여성분들 화내지 마세요. 딸로서의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 다음에 영으로서의 하나님, 이게 하나라고 하는 건데요. 그림을 그릴까요. 아버지. 아들 다음에 영, 이 셋, 셋이 일체라고 하는 거거든요. 이게 말이 되나요?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삼위일체론 존재론적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세계가 따로 따로 있는 것이 하나다 그런 것이 세상에 없습니다.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하겠어요. 우리가 지금 인식론적으로 생각해야 되는데요. 제가 정확하게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버지, 아들, 영으로 삼위일체로 아버지, 아들, 영, 이렇게 삼위로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을 하는 거죠. 그게 그 말인가요? 예.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셋으로 딱딱 나눠져서 존재한다고 하는데 포커스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신비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런 방식으로 인식을 하고 있는 겁니다. 세개이면서 하나인것은 없잖아요. 불가능하잖아요. 우리의 세계 경험에서 말이죠. 여기서 하여튼 일단 말은 그렇습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뭐냐 하면 무소불위하고 전지전능하고 한 그러한 주로 구약에서 말하는 하나님, 유일신, 유일하고 전지전능하고 그러한 하나님의 페르조나예요. 좀 어려운 말 나와도 이해해 주세요. Persona 위격이라는 뜻입니다.  그러한 격을 가지고 있는 분, 아들은 역사적 예수님입니다. 이 아버지는 초월적이라면 이 아들은 역사적인 거예요. 역사적이고 역사 의존적이죠. 한계를 가지고 있죠. 똑같이 우리처럼 죽었죠. 역사를 초월한 분이구요. 이 두 관계는 대립적입니다. 일단. 예수님도 하나님에게 기도드린 거예요. 만약에 이거를 존재론적으로 하나라고 생각한다면 자기가 자기에게 기도한거죠. 말이 안되죠. 예수님이 공생에서 하나님에게 기도드렸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상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구별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존재론적으로 그게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구별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구별되는 거죠.

영은 보통우리가 말하는 성령인데요. 성령은 현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현재성이라고 할까요. 이 하나님은 초월적이기 때문에, 초월적이기도 하구요. 그러니까 지금 현재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은 아니구요. 이 예수님도 2천년전에 역사안에 들어오셨다가 떠나셔서 지금은 안계십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경험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셋이 일체라고 하는 겁니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게 어떻게 일체가 될까요? 그냥 구구단 비슷하게 한 말씀만 드리면 이렇습니다. 본질적으로는 본질은 하나고 격은 셋이다 하는 겁니다. 페르조나는 셋인데 우시우스라고 하는 헬라어로 본질을 나타내거든요. 그것은 하나다. 이러한 존재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수 있을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이거는 아무래도 제가 강의안을 조금 더 읽어가는 방식으로 시간이 되는대로 하겠습니다. 중요한 부분을요. 네 유대교는 유일신론이거든요. 여기서 기독교가 삼위일체론으로 넘어오면서 유대교와 구별되는거예요. 앞서 제가 말씀드린 아버지 하나님은 유대교의 하나님이고 마호멧이 말하는 알라 하나님입니다. 그거는요. 기독교가 만약에 유일신론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면 그 유대교랑 이슬람교와 구별되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구별되는 결정적인 요소가 바로 이 삼위일체론이거든요. 이 삼위일체로 넘어오는 길목에 기독론 논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기독론이요. 삼위일체론이 처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구요. 핵심은 예수죠. 예수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가 당면한 모순, 그들이 풀어야 될 숙제가 있었는데요. 다음과 같은 두가지 대립된 명제를 극복하는 겁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유일신이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 뿐이다는 것, 이건 명제가 분명하죠. 두 번째는 예수도 하나님이다. 이거도 또 분명한 겁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의 경험에서요. 하나님이 유일신이다라는 것은 유대교로부터 나온 것인데요. 예수도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 공동체 신앙의 고유한 경험이었습니다. 이렇게 서로 대립되는 거잖아요. 하나님이 한분이신데 예수님도 하나님이라는 하는 말이 어떻게 되나요? 이게 풀어야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단일성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예수의 신성을 설명하기 위한 기독론 논쟁이라고 하는거요. 기독론 논쟁은 그게 핵심이죠. 하나님 한분, 예수도 하나님 이걸 해명하는 것입니다. 이걸 극복하기 위해서 서로 여러 가지의 주장들이 나왔는데 정통에서 빠진 것 다 이단이니까요. 이단들이 출현했습니다 .

대표적인 것은 예수의 인성을 강조한 에비온주의자인거죠. 이 사람들은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종속론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종속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죠. 하나님에게.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인성을 강조하면 당연히 그거는 당연히 한계가 있는 존재니까 하나님에게 종속당하죠.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했어요. 예수님의 인성은 약화되었어요. 당연히. 가현설로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뒤를 이어서 양태론으로 발전되는 겁니다. 정통교회는 크게 보면 두개, 에비온주의자와 가현설, 양태론 이것과 투쟁했습니다. 양쪽다 일리있는 이야기예요. 인성을 강조했고 신성을 강조했는데 그 투쟁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에비온파는 하나님을 완전한 인격체로 생각하고 로고스, 혹은 아들과 성령은 하나님의 속성에 취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는 본질적으로는 하나님과 다르고 인간이지. 인간으로서 신성을 입은 자에 불과하다는 거죠. 이걸 동성론이라고 했구요. 대표적인 사람이 그 유명한 아리우스입니다. 니케와 공회의때 아리우스와 아다나시우스 두 사람이 크게 싸웠습니다. 그게 기독교의 분수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리우스는 예수를 성자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정통주의와는 달리 예수가 결국 피조물로서 신적존재이지 하나님 자체는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이거와는 다르게 정반대로 가현설(Gnosticism)은 인간 예수를 부정하고 단순히 하나님의 현시로 보기 때문에 예수를 참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고 참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유일한 하나님이 자기를 드러내는 세 가지 양태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보기 때문에 이를 양태론이라고 했습니다. 215년 경 로마에서 가르쳤던 사벨리우스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은 단일한 실체(monas)이다. 하나님의 존재 안에는 구별이 없으며, 단일체인 하나님은 세 가지의 상이한 양태, 혹은 형태로 자기를 나타낸다. 흡사 연극 배우가 관중 앞에서 세 가지 역할을 할 수는 있지만 그 인격은 하나인 것과 같다.” 지금 많은 신자들이 삼위일체론을 양태론적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정통교회의 입장과 별반 다르지 않는 것 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엄밀히 보면 문제가 있습니다.즉 예수의 인격, 인격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구요. 위격(페르조나) 이 하나님으로부터 구별되면서 서로 의존하는 것, 요거 중요한 문제인데요. 이 세 격이 전달되나요? 제가 하는 이야기가요. 너무 관념적인 이야기 인것 같죠.그런데 이런 투쟁을 교부시대때 치열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가 기독교 2천년사입니다. 이 세 격이 구별되면, 구별을 해야 되어야 해요. 구별하지 않으려는 것이 전부 이단이 되었어요. 구별되면서 서로간에 의존적인 거예요. 하나님은 하나님만으로서 온전한 하나님이 아니라 아들에 의해서 자기의 자신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는 겁니다. 예수에게 의존하는 거죠. 예수는 동시에 하나님에게 의존하는 거죠. 역사적 예수만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면 여러분은 삼위일체인 신론에 벗어나는 겁니다.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도 예수님도 성령에 의존되면서 구별되는 그런 이야기들입니다. 요거는 여러분들이 머리속에 넣어두시는 것이 좋겠네요. 우리는 하나님을 자꾸만 유일신 유일신하는데 유일신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삼신론도 아니예요. 삼신론. 이거는 양태론인거죠. 유일신론도 아니구요. 구별되지 않으니까요. 삼위일체는 이 세 격이, 그게 들어오시나요? 어떻게 세 페르조나가 구별되면서 서로 의존적이고 그러나 세 가지 독립된 신은 아닌 그러한 하나님. 네. 그러니까 이 단일한 실체, 모나스(monas), 여기에 이거를 강조하려고 하는 흐름들이 아주 오랫동안 지탱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이단사상 앞에서 초기기독교는 예수에 관한 두 가지 문제를 풀어야 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구별된 예수님의 고유한 인격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 동일한 예수의 본질이다. 다시 나왔죠. 인격은, 위격은 구별되요. 그러나 본질은 동일해요. 이러한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삼위일체론안에서 시도됩니다. 삼위일체의 기초를 놓은 터툴리안은 말합니다. “아들은 아버지와 구분되어 있으나 나눠지지 않고, 구별되어 있으나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단순히 유일신이 아니라 ‘하나의 실체-세 인격’이다.” 터툴리안이 뭐 삼위일체론을 결정짓지 못했습니다. 여기도 양태론적인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게 점점 발전하게 되죠.  

325년 세계 최초의 종교회의가 니케아에서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서 소집되었고, 381년에는 2차 종교회의가 콘스탄티노플에서 데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소집되었었는데요. 여기서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이 결정됩니다. 두번에 걸친 종교회의와 그 중간에 진행된 몇가지 회합, 포럼, 325년의 첫 번 째 회의에서 대표적으로 이질론(헤테로 우시오스)을 주장한 아리우스와 동질론(호모 우시오스)을 주장한 아다나시우스가 대결했는데 결국 중간에요 회의가 끝나지 않고 완전한 결정을 짓지 안고 일단락 되었습니다. 뒤에 이질론이 나와요. 이질론은 본질이 다르다. 예수님의 본질이 다르다. 아리우스가 주장한거구요. 아다나시우스는 같다. 호모 우시오스. 같다. 본질이 하나다. 중간쯤 되는 사람들이 이를 중재하기 위해서 아니다 왜 그러게 극단적으로 나가느냐? 유질이다. 비슷하다. 호모 이가 들어갔습니다. 호모이시우스. 유질론이 나왔습니다. 재미있죠. 그 당시에는 이단논쟁이 아주 격했습니다. 결국 이런 과정을 통해서 아리우스가 대두되고 삼위일체가 확정됩니다. 아다나시우스가 그 주장이 결정되죠. 세 입장의 차이는 작은 것 같이 보지만 그가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초기 기독교가 오랜 논쟁을 통해서 결국 예수님의 동질론을 선택했다는 것은 하나님 이해에 있어서 혁명적 전환입니다. 예수에게서 인간성을 제거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과 동질로 생각한 이러한 하나님 의식은 유대인들의 사고 범주안에서 용납될 수 없는 신성모독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끌어내리는 거나 마찬가지다 생각했죠. 그러나 초기 기독교는 이러한 논쟁과정을 통해서 인간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해볼까요. 여러분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니까 가르치니까 그러려니 생각하지 말고 실제로 본인이 그것이 인식되는가, 이해되는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기독교 신앙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가? 기도 열심히 하고 신앙생활 잘하면 되지 않느냐? 그렇게 해도 됩니다. 그러나 바둑에서도 고수가 되려면 여러수를 알아야 되잖아요. 동네 바둑두면서 바둑 취미 생활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면 여러분들의 영성이 더 풍요로워 지겠죠. 정말 여러분들이 이해하고 그것을 있는가? 질문해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떻게 인간이 신으로 들어 올림을 받을 수 있는가? 양자론이구요. 하나님이 인간으로 내려올 수 있는가 성육신론이구요. 어떻게 하나의 인격을 가진 예수가 반신 반인이 아니면서 온전한 인간성과 신성을 유지할 수 있었는가? 가능합니까? 아닙니까? 생각하셔야 될거예요. 우리는 안타깝게도 이러한 문제들을 수학공식처럼 풀어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초기 교회에서 전개론 삼위일체론 논쟁을 통해서 호모우시우스 요거 하나만이라도 외워 두시죠? 호모우시오스 본질, 동질, 예수와 하나님과는 본질이 동일하다는 신학적 주장이 채택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인간 예수가 하나님이 인간 예수가 되었던 하나님 인식에서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만한 단안을 내렸다. 인간 예수는 하나님이다.

조금 남아 있는 것을 읽어볼까요.

초기교회는 어떻게 인간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본질인 신성을 인식하였으며, 네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예수, 바로 거기에 하나님이 현실한다고 믿었던 건데요. 그 참 발상을 전환하지 않으면 이건 불가능한 겁니다. 십자가 처형, 부끄러움, 수치, 스캔들 이런 것에 불과한건데 하나님은 아까 삼위일체에서 하나님은 절대자이고 전지전능 무소불위한 분인데 십자가는 절대적인 무력감, 무기력감, 이 두 개가 어떻게 일치될 수 있는가 하는것, 초기 기독교는 그걸 본거예요. 유대교인들은 그건 불가능한 거예요. 십자가 처형당한 자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이지. 그게 어떻게 하나님이신가 용납되지 않는거죠. 그러나 초기 기독교는 그걸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과 동질이라고 믿게 되었을까? 그들은 왜 예수를 주라고 불렀는가? 예수가 스스로 “나는 영원하고 절대적인 신이다.”라고 말했다고 해서, 그렇게 말한 적도 없고 그럴 리도 없지만, 신이 되는 것은 아닌데도 말이다.  대충 결론, 대답이 되는군요.

사도들과 초대 기독교회가 예수에게서 메시야적 표징을 발견했다는 것이 그에 대한 대답이다. 복음서 곳곳에서 증언되는 모든 이야기의 결론은 인간 예수에게서, 그의 인격과 그의 행위에서, 궁극적으로 그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하나님의 메시야적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복음서 기자들에게 예수의 도덕적 가르침이나 지혜의 가르침이나 초자연적 행위들은 그 자체로서 별로 의미가 없었으며, 예수와 관련된 모든 진술과 사건은 구원론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그의 메시야성 안에서만 그 타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 이 말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하나님의 존재론이 그의 구원행위에 있는 것 처럼 예수에게서 발생한 구원사건이 곧 하나님이며 동시에 하나님 나라였다는 사실이다. 이제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神표상이었던 영원하고 절대적인 존재로서 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의 구원행위 안에서 자기를 드러내는 분, 자기를 낮추시는 분, 십자가에서 자기를 내주시는 분으로서 인식되었다. 예수는 온전한 인간이었지만 그에게서 온전한 메시야성이 드러나게 되었다.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것이 오히려 신성이고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됨으로서, 부활이죠. 궁극적 종말에 일어나게될 생명을 선취한 그 분, 그 사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을 초기 기독교인들이 따른 거죠. 경험한거죠. 경험하고 인식하고 구약성서에 근거해서 해석한거죠. 그래서 독특한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역사의 실존, 역사의 한계 안에서 들어온 하나님 그 안에서 하나님과 동질의 격으로 올림 받은 예수, 인간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유대교는 인간 예수를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기독교 공동체를 용납할 수 없었으며, 로마인들도 역시 기독교인들을 무신론자들이라고 여기고 무시했다. 이 틈바구니에서 그들과 구별된 새로운 종교, 바로 기독교가 시작하게 되었다.

네. 여기까지 입니다. 제가 바르게 설명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삼위일체론만 하더라도요. 다시 몰트만의 책을 소개하겠습니다. 삼위일체와 하나님 나라는 책도 있구요.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역사, 제가 조직신학 강의에서 11장에 삼위일체에 대해서만 많이 다루고있습니다. 판넨베르그도 조직신학 책에서 그 부분을 다루고요. 헤겔이후로 삼위일체가 기독교 신앙에서 대충의 진리로 부각되었습니다. 네 이것은요. 여러분 어거스틴과 교부들이 플라톤 신학의 영향을 받아서 기독교 신앙을 헬라철학화한 그러한 단순한 사변적 교리가 아니라 기독교의 아주 독특한 하나님 이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학자들이 그저 머리를 굴려갖고 그럴듯하게 기독교를 설명하기 위한, 다른 사람들의, 무식한 사람들의 눈속임을 하기위한 요설이 아닌, 가장 궁극적 하나님의 현실안에서 하나님을 진술하기 위한, 기독교의 정직하고 치열한 자기 진술이다. 신앙고백이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참 놀라운 거죠. 하나님이 역사안에 들어오셨고 그리고 이 시간에는 영으로 그를 경험하고요. 그리고 그 셋이 서로 의존적이고 그리고 세계 역사를 하나님이 완성시키실 겁니다. 여기까지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