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3월 9일 질답시간
안녕하세요? 제 목소리 들립니까? 제가 조금 다른 것 하다가 서두르느라고 USB 꽂는 것을 잊어 버려서 카메라가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주일 잘 지냈습니까? 반갑습니다. 시간이 참 빨리 지나가는데요. 오늘은 두 가지를 나눠서 하겠습니다. 앞부분에서는요. 김혜란씨가 질문한 부활의 문제이구요. 후반부에서는 지난 목요일 저녁에 우리가 함께 공부했던 기독교 2천년 역사 중에서 1517년에 있었던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에서 슬로건으로 내세웠던 세 가지 문제를 조금더 풀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종교개혁 시대의 주제들을 우리가 파악하는 것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 현실 신앙생활에서도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먼저 김혜란 님이 질문한 것입니다. 몇 번 제가 시간을 놓쳤고요. 기억에 있다가 없어지구요. 또 간단하게 한 두마디로 정확한 대답을 드리기 힘들어서 차일피일 미루었어요.
(목소리가 작아요? 네.. 그러면 뭐를 올려야 되나요? 마이크 딱 누느리까? 올릴까요. 좋습니까? 조금만 더 올리겠습니다. 네. 아 이게. 네 되었습니까? 이제요. 네 고맙습니다.)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는데 동영상 강의란 달아주어서 제가 잊지 않고 다루게 되었습니다.

동영상 강의 메뉴를 들어가면 그 안에 세분화되어 있어요? 기독교가 뭐꼬? 로부터 시작해서 다섯, 여섯 항목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앞으로 그 항목을 잘 정리할까합니다. 동영상이라고 하는 문을 통해서 몇 개, 그 안에 메뉴를 다시 만들 생각입니다. 지금까지 한 강의도 정리를 하겠습니다만 앞으로 할 강의도 분리해서 넣을 생각입니다. 예를 들자면 고전읽기라든지 어떻게 큐티 묵상 이것도 동영상으로 좀 해볼까 생각합니다. 그쪽으로 다양한 여러분과 제가 소통할 수 있는 채널로 만들어 볼까 하는데요. 동영상은 서버가 좀 많이 필요하더라구요. 그것을 지금 구축하고 있는중입니다. 일단 1년을 계약했어요. 일단 그 문제는 박원관 조교가 우리 교우예요. 계약을 했어요. 그것을 확보했어요. 이건 크지 않는 서버같습니다. 우리 동영상 정보가 어느 정도 더 많아질 지 모르지만 따라서 더 준비 하든지 하겠습니다. 그 동영상쪽으로 설교보기도 그쪽으로 넘기고 모든 동영상을 그쪽으로 넘기고 거기에 들어오는 분들은 유료로 할까 생각중입니다.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구요. 현재는 약간 단락만 나눠졌구요. 박원관 교우하고 그 문제를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기에 현재 있는 시스템으로 분류를 해 볼까 생각중입니다.

거기에 우리 김혜란 만화작가가 지난번에 올라온 것 보니까 장난이 아니던데요. 오늘 들어오셨겠지요. 네. 나의 그림일기. 나는 그런 정도면 프로페셔널하다고 생각합니다. 몇 몇 분들이 이런 것은 고정 코너로 마련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는데요. 김혜란 거기 글을 올리셨구요. 천재네요. 너무 늦었네요. 이제 나타났다니. 기왕에 나타났다면 성공했을텐데요. 뭡니까? 최소한도 이원복교수인가 세계 기행에 대해서 만화로 그려서 수백만부 파신 분, 지금도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데요. 색다른 여성의 정서를 안고 있는, 잘 되었을텐데 늦었네요. 지금도 데뷰를 해보세요. 압니까? 출판사에서 같이 한번 해보자구 할지요.

부활문제에 대해서 댓글로 질문해주셨습니다. 이 부활이라고 하는 것인 실증이란 영적이고 신기한 생명사건이라는 말이 옳다고 한다면 그 말과 복음서에 보도되고 있는  빈무덤이라는 사실과 모순되는 것은 아닌가? 좋은 질문이었어요. 그런 질문을 하시면 생각이 그쪽으로 열린다고 하는겁니다. 어떤 강의를 들어도 꼭 말한 것만 생각하고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는 분들이 있는데, 그런 분들은 좀 진도가 늦는데 반해서 김혜란 작가는 그것을 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시각이 통찰이나 직관 사물에 대한 그런 것들이 이미 충분히 개발되어 있는 분이 아닌가 싶은데요. 예. 그런 질문이 좋습니다. 옳습니다. 제가 대답하기도 조금 힘들기도 한데요. 이렇게 생각하세요. 제가 거리낌 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이해하시리라 봅니다.

빈 무덤이 있었다고 하는 복음서 보도가 어느 정도 역사적 신빙성이 있는 것일까요? 여기서 역사적이라는 것이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만 우리가 지금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우리가 무덤에 가서 직접 열어보고 시체가 없다고 확인하는 이러한 방식으로서의 역사적 사실은 아니거든요. 마가복음, 복음서중에 제일먼저 기록된 것이 마가복음이니까 그걸 예를 든다면  여인들이 안식일 첫날 예수님 장례를 위한 절차를 밟지 않아서 그걸 하기 위해서 갔다가 무덤안에서 빛나는 남자를 보고 깜짝 놀라고 있을때 돌문이 열려져 있었구요. 그런 것들이 조금 전설적인 요소가 강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사실 돌문이 열려질 필요는 없잖아요. 예수님이 부활 직후 제자들을 만났을 때 방문이 잠겨 있는데도 들어오신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돌문을 열지 않아도 부활현현은 얼마든지 가능한 건데요. 그렇다면 돌문이 열렸다는 것은 제자들이 혹은 여성들이 올 줄 알고 그 사람들을 위해서 준비시켰다는 건데 그렇게 생각하기는 조금 힘들지 않습니까? 무덤안에서 천사들에게서 여자들이 그런 말을 들었어요. “너희들이 찾고 있는 예수는 갈릴리로서 가서 만나게 될것이다” 한거죠. 굳이 갈릴리였을까요? 여기에는 갈릴리 전승과 예루살렘 전승, 예수님의 부활현현이 갈릴리에 먼저 있었는가 예루살렘에 먼저 있었는가 신학적으로 논의가 좀 되고 있습니다. 갈릴리 공동체와 예루살렘 공동체의 어떤 알력이 거기에 개입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들이 있는데 이건 근거 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한 이야기들이 정작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예수님 부활의 확실성이지요.  그 이외의 것들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무덤이 비었느냐 아니냐 확인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요소는 아니죠. 이건 이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잊을까봐, 까먹을까봐 한 마디 더하자면 이 여자들이 예수님의 장례절차를 밟기 위해서 갔다고 하는데요. 그게 바로 안식일 다음에 갔는지에 대한 것도 그렇게 확실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 부활이 3일만이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죠. 그리고 어떤 주석에 보면 새벽미명시간에 여성들이 향유를 준비한 것, 안식일에는 살수 없는데요. 안식일 지난다음 새벽인데 그때도 물품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닌데요. 그전에 미리 준비했던 거라고 생각할 수 있긴 있지만, 지금 성서기자가 그러한 예수님의 빈 무덤과 부활이라고 사건이라는 것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어떤 논리는 아닙니다. 그들에게 확실했던 것은 예수님의 부활현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게 역으로 가야하지요.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다면 그러면 무덤이 비어있어야 되지 않느냐 하는 요구를 할 수 밖에 없지 않느냐? 그게 하나의 전설적 형식을 띠면서빈무덤 설화가 초기 기독교 안에 전승되어 왔고 그것이 복음서에 기록된 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기독교 신앙과 그 근본들이 너무 좀 불확실한게 아니냐. 그렇게 불확실하거나 토대가 좀 부실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좀 어떤 관점에서 보면 토대는 부실합니다. 예수 제자들이 제가 몇 번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구요. 십자가 처형이라는 사건앞에서 보인 비굴한 모습들  등등 여러가지를 통해서 볼때 이 복음서에 이렇게 연대순으로 시간순으로 차근차근 보도되어 되어 있는 빈무덤과 부활과 이런 것들은 확실한 객관적 증거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나중에, 훨씬 후대에 예수님의 부활의 확실성을 담보하기 위한, 그것을 해명하기 위한 하나의 근거들로 들어오게 된 겁니다. 이렇게 제가 말이 좀 막히죠. 그건 정확한 용어를 제가 찾을 수 없어서 그렇습니다. 이것은 흡사 동정녀 마리아 사건과 비슷하게, 사실은 동정녀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죠. 이것은 여자의 몸에서 예수가 태어났다고 하는 가현설에 대한 반론으로서 확실성을 이야기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거거든요.

연역적 방법을 썼는데 연역적인 것이 아니라 이건 오히려 귀납적이라고 할 수 있겠죠. 예수의 현현의 확실성에 근거해서 어떤 것을 역으로 찾아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니까요. 마리아의 여성의 몸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한 놀라운 사건을 헬라지역에, 그리스 지역에 있는 사람들에게 변증하기 위한 방식으로 동정녀라고 하는 것이 들어왔을 뿐이지 그것 자체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제가 말씀 드렸듯이요 어기서도 빈무덤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확실성을 담보하는 토대로 도입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혀 없는 이야기를 누가 꾸며서 한 것이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요. 거기까지 제가 말씀드리기 힘듭니다. 꾸민, 없는 이야기를 꾸며서 한 거는 아니죠.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다음에 무덤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했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지냈다고 하잖아요. 고거도 얼마나 역사적 신빙성이 있느냐에 대해서 학자들이 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십자가 처형당한 사람은 무덤에 로마법에 의해서 안장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총독을 찾아가 허락을 받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특별한 사건인데요. 과연 그게 그렇게 가능했을까요? 로마 총독이 이렇게 자기들의 법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예외를 인정했을까에 대해서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초기 기독교안에 많이 이렇게 나돌아 다녔고요. 그런 것을 복음서 기자들이 정리하는 과정안에서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복음서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중에는 이미 우리가 지금 사도신경을 암송하듯이 구체적으로 되는 전승들도 있고 복음서 기자들의 편집도 있구요. 여러가지 요소들이 그 안에 들어왔습니다. 복음서들을 읽을 때 초기 기독교안에 이미 형성된 것들인지 저자의 이야기인지 등등을 세심하게 구분을 해야 됩니다.

사도신경에 보면 빈무덤이라고 하는 게 있나요?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이렇게만 되어 있습니다. 사도신경이 굉장히 중요한 초기 기독교의 신조, Creed입니다. 그들의 신앙을 끌어갔던 핵심들이 담겨 있는거죠? 여기에 보면 핵심이 그겁니다. 십자가에 못밖혀 죽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구요. 장사한지 사흘만에, 장사했다는 것은 죽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죽었다고 하는 것이 확실하다고 하는 것을 사실을 확인하는 것, 장사지냈다는 것이죠. 빈무덤에 대한 것은 없습니다. 빈무덤에 관한 것은 설화라고 할 수 있겠죠. 설화라고 하는 말을 설교 비평에 썼다가 유아무개 설교 교수에게 정용섭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설화, 신화라고 하니 위험하다.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말씀을 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성서의 권위를 깎아내리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한 거죠. 그러나 그안 에 여러 문학 장르들이 있어서 그걸 구분하자고 하는 겁니다. 복음서 안에 여러가지 설화들이 조금 복잡하게 때에 따라서 필요에 따라서 가감되어 들어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빈무덤을 읽으셔야 되겠죠.

그리고 여기서 조직신학적인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요. 부활은 죽었다가 그냥 사는 게 아닙니다. 이건 근본적으로 새로운 생명으로 창조되는 겁니다. 부활은 창조예요. 창조는 무로부터 창조라지 않습니까? 부활은 창조론과 연관되는 것입니다. 무로부터의 창조. 이것 외워두세요. 무로부터의 창조입니다. creatio ex nihilo 크리아티오 엑스 니힐로, 동정녀탄생은 사도신경에도 고백하는 바인데... 설화로 봐야하는지요. 네 그렇지요. 설화라는 것을 무조건 부정적인 의미로만 생각하지 마세요. 본질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문학적 형식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 여러분들이 전혀 거부반응을 일으킬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부활은 기본적으로 창조의 문제예요. 부활은 새로운 생명으로 창조지요. 지금 살고 있는 모습으로 복귀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이 이런 몸으로 살기원하세요? 부활이 이런 몸으로 산다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그런 점에서 부활은 무로부터의 창조와 똑같다고 하는 차원에서, 빈 무덤을 비었느냐 아니냐 확인하는 것은 절대적인 요구는 아니지만 그것을 해명하기 위한 하나의 전제조건이다. 그 당시의 글쓰기 방식이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네. 참고적으로 어떤 다른 성자들에게는 무덤이 중요해요. 경배하고 성지 순례도 되고 하지 않습니까? 기독교에서는 무덤은 의미가 없어요. 무덤이후를 말하기 때문에요. 무덤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 그러한 생명, 세상이 어떤거냐? 네 그런 것들은 우리가 많은 생각이 필요하고. 우리가 아무리 생각해도 다 잡아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그쪽으로 넘겨야죠. 사람들은 그것을 못 참는거예요. 하나님의 권위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계시 우리가 입으로 말은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러한 기독교 신앙의 맥락속으로 신자들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자기가 확인하려고 하는 거예요. 여러가지 면에서 그렇습니다. 아주 실증적인 것을 요구합니다. 실증적인 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청부론도 어떤 면에서는 하나의 경제적인 실증론이라고 할 수 있겠죠. 깨끗하게 노력해서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이런 것들은 실증, 기복주의나 등등이 다 그렇습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그런 실증주의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이건 그렇다고 해서 오늘의 삶에 하나님이 아무런 상관이 없다거나 무능력하다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하는 것이죠. 설교조로 한다면 그렇습니다. 하나님 스스로 존재론적으로 통치하도록 맡겨두고 우리가 거기에 의존하는 그러한 삶을 이야기 합니다.

부활 문제와 빈 무덤의 문제는 이런 정도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르겠어요. 이 설명이 얼마나 적합한지 여러분들에게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처음에 말씀을 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기독교 신앙의 정보들 자세하게 많이 가르쳐 드리는 것을 강의 목표로 삼지 않고 있습니다. 그건 되지 않구요. 제가 알고 있는 것 말씀드려봐야 아주 부분적인 것 뿐이고 또 상대적으로 다른 의견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이구요. 다만 어떤 신학적인 영성, 사유하는 쪽으로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 기 때문에 오늘 부활과 빈무덤의 관계를 딱 부러지게 설명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또한 여러분들에게 신앙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않더라하더라도 그 맥락안으로 들어가는데 조금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도로 가헸습니다.

두 번째 단락입니다. 말씀드린대로요. 세가지 문제, 마틴 루터가 주창했던 세가지 문제를 조금 더 설명하겠습니다. 지난 목요일날 너무 급하게 지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앞으로 이야기한 부활과 빈무덤에 대해 급하게 질문할 것 있으면 문자로 주세요.

1. Sola Scriptura 사실 이러한 대가들이요. 루터 칼빈 어거스틴 안젤름 다 대가들이죠. 이런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는 많은 것을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따라가지 못해서 그렇지. 제가 자주 예로 드는 바둑만해도 그렇습니다. 한수 수 하나 그거 생각할것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 몰라서 그렇죠? 이 세 가지.

2. Sola Gratia 여러분들이 잘 외우고 있을 문제인데요. 순서는 조금 바낄 수가 있습니다.

3. Sola fide가 위로 올라갈 수 있구요.

1517년 마틴 루터가 Wittenberg 성당, 베르그란 산이란 뜻입니다. 조그만 도시입니다. 베를린에서 남쪽으로 1시간 떨어진 멀지 않는 곳, 오지입니다. 중세기 16세기라고 하면 로마가 종교적으로 헤게모니를 잡고 있을 때이기 때문에 교황의 눈으로 볼 때 비텐베르크에서 신학을 가르치면서 성당의 몇몇 사제중의 한사람으로 있었던 사람이 대자보 형식으로 95개 조항 신학적 명제를 내걸었다고 하는 것은 가소로운 일입니다. 만약에 교황청에서 마틴 루터의 시도를 네가 그렇게 해봐라 뭐 별 일 있겠냐 그냥 모른척하고 지나갔으면 오늘과 같은 개신교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긁어 부스럼 만든다는 말이 있듯이 교황청에서 이 사건을 알레르기 반응으로 대처한 것 같아요. 물론 역사가 지난 다음에 어떻게 되었을까 말하는 것이 우습기도 합니다만 아마 교황청에서도 건들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판단이 서서 종교 재판을 하구요. 보름스에서 제국회의가 열리는 곳인데 그때 종교재판을 한거거든요. Worms 보름, 영어라고 하면 웜스라고 하죠. 보름스라는 도시에서 종교재판까지 하구요. 아마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일으키겠다고 하는 어떤 의도를 갖고 한 것은 아니고 그냥 신학자적인 양심으로 자기가 속해있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있는 몇가지 신학적인 문제들을 제기한 것 뿐입니다. 이러한 논지를 갖고 한번 신학토론을 해보자 그렇게 이야기한 것인데요.

그것이 마침 마침 금속활자가 발명된 이후였기 때문에 95개조항을 찍어서 급속도로 확산되었습니다. 만약 금속 활자가 발명되지 않았으면 역사가 달리 흘렀겠지요. 종교개혁이 나름대로 성공한 이유는 신학적인 배경이 탄탄했었고 여러 가지 사회적인 배경들이 갖춰지곤 했었죠. 또 하나는 독일의 기업가들, 부르조아 계급들이 막 발흥하기 시작했다고 하는 겁니다. 상인들이 많이 나와서 그들이 발언권을 갖게 되었고, 돈이 있었고 그들이 힘이 있게 되었고 그들이 마틴 루터를 지지했습니다. 또 하나는 독일이 이탈리아하고 관계가 나빴거든요. 자기들이 거둔 헌금을 다 로마로 갖고 가는 것이 기분이 나쁘고 그래서 반로마 반이탈리아 정서가 그 당시에 만연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 얼키고 설켜서 독일중심으로 지지하는 세력이 되었고. 그 안에는 마틴 루터의 신학적 노선이 분명했다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만 그렇게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가지 인데요. 각각 이것이 어떤 주제인지는 아시겠지요. 이것은 삶의 기준, 준거라 합니다. 솔라 그라티아는 구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총뿐이냐? 아니면 우리 인간의 업적도 필요하냐?는 것이구요. 솔라피데는 의로움의 문제입니다. 이 세가지 주제가 있다고 하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삶의 기준이 오직 성서냐 아니면 교회냐 하는 거구요. 이게 의로와 지는 것이 오직 믿음이 뿐이냐 아니면 우리의 행위도 필요하냐 이런 것입니다.

심심하니까 아래서 올라갈까요? 보통 위에서 부터 하는데. 왜 의 문제를 그 당시 생각했을까요. 오늘 설교에서도 로마서의 주제이기도 하구요. 포항에서 하는 갈라디아서의 주제이기도 하구요. 구약성서 전체는 의로움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왜 성서 기자들이 의로움 문제를 집착을 해서 생각을 했을까요? 그 의라고 하면 불의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의롭지 못한 세상, 왜 세상이 불의하냐?  누가 연역적이다 귀납적이다 라는 말이 나왔습니다만 기독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연역적인 것 같은데요. 하나님은 사랑이다. 그렇게 어떻게 나오지 않아요? 하나님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존재로부터 죽죽 나와요. 그러나 어떻게 보면 상당히 귀납적입니다. 세상이 불의하다고 하는 것을 뚫어보는 거예요. 도대체가 왜 이렇게가 살해, 강도들이 많은가. 그러한 문제를 깊이 뚫어 보구요. 결국은 이것이 의와 연관되는 거구요. 결국 이것이 죄로 인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귀납적인 결론이죠. 이것은 죄로부터 오게 되는 것이고 죄는 결국 하나님과의 분리로 생각을 하고. 훨씬 더  종교적 차원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죄라고 하는 것은 몇 가지 이렇게 부덕한 일을 행한 것, 그런 것들이 불의한 거죠. 그러나 성서는 거기에 머물지 않아요. 현상적인 것에 머물지 않고 불의하게 된 근원이 뭐냐 그쪽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죠. 결국 그것은 죄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거구요. 죄가 어떻게 발생했느냐? 그거는 인간 스스로 죄의 원인이 인간에게 있다고 말하기는 좀 어렵죠. 하나님이 지으셨는데. 그런데 결국은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아가게 되는 거잖아요? 인간의 꼴을 보면 좀 우습잖아요. 그런데 인간을 만든게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책임이잖아요. 우리가 지능을 가진 로보트를 만들었을때 그가 반사회적, 폭력적 일을 한다면 로보트를 만든 과학자에게 책임이 있듯이 하나님이 책임이 있잖아요. 성서기자들이 하나님의 책임을 물을 수 없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누구라 그러겠어요. 사탄 마귀 뱀으로 형성되어 있는, 이 꼬임에 빠져서 인간이 죄를 지었다고 하는 것이죠. 원리적인 이야기로 돌아가는데 다 아시는 이야기죠.

하나님과 대립되는 근원이 있느냐?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맞서서 대항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강력한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귀마저도 하나님의 통치안에 있어요. 욥기서에서 봐도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하게 되거든요. 설명하기가 간단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죄나 악이 하나님이 근원이신 것이 아니라 그런 방식이 아니면 해명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설명하는거예요. 인간이 죄를 짓게 되는 것은 사탄 혹은 마귀 꾀임에 빠져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 거예요. 잘 생각하세요. 제가 이런 설명 하면서도 이런 말들을 여러분들이 자꾸 머리속에 그림을 그릴 까봐 조금 조심스럽습니다. 에덴동산에 있었던 뱀이 어떻게 유혹한다고 하는 것을 실질적인 그림으로 여러분들이 머리속에 떠올리게 되면 성서가 말하는 근원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거든요. 고대인들은 그런 방식으로 설명하려고 한 건데요. 그렇게 말하려고 한 핵심은 죄의 더 근원적인 뿌리가 있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 건데요. 뱀이라고 하는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중심으로 제자리도 돌아오겠습니다. 의의 문제는 성서기자들에게 중요한 것이었구요. 이 의로움으로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불의를 통해서 하나님과 원상회복되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서, 의로움에 대한 해명이니까 이러 이러한 6백 몇가지 입니까? 토라 그러한 계명들을 잘 지키고 안할 걸 안하고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 그런점에서 의로움을 획득하는 것은 신앙에서 본질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는거죠. 그런데 여기서 의로 들어가는데 믿음뿐이냐 아니면 행위도 따라가야 되느냐 하는겁니다. 유대 기독교인들,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배경인데요. 갈라디아서 강해를 읽으신 분들은 알겠습니다만 유대인들이요.

초기 기독교 상황을 이야기합니다. 유대-기독교인이 있었어요. 그리고 이방 기독교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관계만 다 잘 설명하려고 하더라도 길고요. 논문이 필요합니다. 쓸만한 주제가 됩니다. 이방 기독교, 요거는 바울을 중심으로 하는 것인데 이들은 율법 토라와 전혀 상관없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는 다는 것을 극단적으로 강조한 사람들이고 유대인들은 이미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유대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동시에 토라와 할례를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강조를 했습니다. 이들은 다 유대인들이니까 유대교인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예루살렘 공동체가, 우리는 지금 그들이 기독교인들이라고 생각하는데 유대교인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제가 요즈음 들고 있어요. 그게 아주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천천히 빠져나왔거든요. 이방인 기독교는 확 빠져 나왔구요. 유대 기독교는 좀 나오려고 하다가 다시 그쪽으로 들어가 버리고 만겁니다. 그래서 역사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어요. 그들은 행위를 통해서 유대인들이 행위, 율법을 말하는 것이구요. 유대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믿음과 또 율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의를 강조한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들이기 할례와 토라를 지킨 것뿐이죠. 그런데 갈라디아서에 보면 이방인들인데도 유대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토라와 할례를 지키는 쪽으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바울이 정말 화가 나서 이건 기독교의 위기라고 생각해서 갈라디아에서 상당히 흥분해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통해서 의로워진다는 것이 손에 안 잡히니까 문제인거예요. 제가 아까 기독교 신앙이 실증이 아니라고 그랬지요. 여기도 마찬가지예요. 믿음을 자꾸 실증이라고 생각하려고 하는,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기독교인 다운 어떤 변화된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죠.  이게 굉장히 설득력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설득력이 있지만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뉴스엔조이에 쓸린 하루 이틀 전의 글에 이런 내용의 글을 본적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좀 세상을 감동시켜야 된다”고 것이죠. 그 말이 그럴 듯하지만 뭔가 잘못되었습니다. 우리가 조금 모범적으로 해서 그들을 감동시키자고 하는 거 아니겠어요. 그건 행위를 강조합니다. 행위강조는 교회 안팎에서 지지를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세련된 교회는 교양적인 설교를 하게 되거든요. 그런 것들이 늘 기독교 2천년동안 요구되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작은 부분, 변죽은 될 수는 있는데 중심은 되지 못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군요.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귀결이지 그게 또 하나의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는 아니다라고 하는거죠. 이것은 사실 힘들어요. 믿음만이라고 하는 것이자칫하면  공염불이 되고 관념적이 되고 말장난이 되어 떨어져 버릴 염려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하는데 말장난으로 떨어지지 말고 이 솔라피데라고 하는 능력안으로 들어가는 훈련이, 인식하고 뛰어 들어가는 것, 그게 능력이죠.

여기서 말하는 능력은 그렇게 사람들에게 보이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존재론적 변화를 이야기하는 거죠. 자기자신을 설득시키는 것이 가장 힘듭니다. 자기 자신의 존재론적 변화가 힘듭니다. 그것이 잘 안되니까 사람들이 행위로 나갈 수 밖에 없어요. 이거냐 저거냐 양자중에서 결단해라. 이런것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반적으로 옥한흠 목사님도 그렇고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님도 그렇구. 인제 기독인답게 사는 여기에 관심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좋으신 분들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필요한 말이기도 한데 위험합니다. 결국은 율법문제이니까. 이 말은 율법이 필요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분들이 논리속에는 칭의론, 솔라피데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하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거든요. 이것이 해결되겠습니까? 평생동안 믿음의 세계속으로 들어가더라도 해결되지 않는, 끝나지 않는 종말론적 문제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용어들이 역사이해나 기독교 신앙전반에 연관되었다는 것을 아시겠죠? 가끔 솔라피데,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것이 종말론과 연관되는가 이해하는 것이 신학적 사유입니다. 이게 신대원이나 Th.M 졸업했다고 하더라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요. 목사님들도 마찬가지고. 옥한흠 목사님이나 박영선 목사님들, 훌륭하신 분들이 잘 가다가 조금 뒤뚱 뒤뚱대는 것은 신학적 토대가 충실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할 게재가 아닙니다. 제 앞도 가리지 못하는 사람이 훌륭하신 설교자요 목회자이신 분들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한다는 게 좀 우습긴 합니다만 이것은 강의시간이기 때문에 어떤 신학적 사유, 토대글을 설명하기 위해 끌어드린 것 뿐 들입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어떤 신앙의 하나, 칭의, 성만찬, 교회 이런 것들을 종합적으로 설교할 수 있는 능력이 상당히 떨어집니다. 이것은 한국 신학교의 문제인 것 같아요. 결코 신학생들이 신학적 사유를 공부하지 못합니다. 같이 있는 사람들도 못한다고 봐야하겠지요.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누구 말대로 수입해다가 알려주는 것뿐이지 자기에게 소화된 이야기는 없는거예요. 그러니까 많은 신학정보를 학생들에게 나열해서 알려주기는 하는데 그러나 학생들이 신학적 사유는 배우지 못합니다.

이 솔라 피데가 기본적으로 종말론적인 지평을 갖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믿음으로 당장 의로워 지는 것이 아닙니다. 의로움의 실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법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아시죠? 인정한다고 하는 것뿐이지 실증적인 것은 아니죠. 그런데 우리는 늘 실증적인 것을 요구하거든요. 실증적, 포지티브한 것을 요구하거든요. 그런 방식으로만 이 세상을 살았고 신앙도 그런 방식으로 생각합니다. 믿음을 루터가 솔라 피데라고 강조하는 것은 일종의 신앙의 화두와 같은 것이죠. 지금 당장 우리가 실증적으로 의로와지는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에서도 그렇고 구체적으로 나왔는데요. 그런 성령을 통해서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는 희망을 우리가 기다린다. 기다림의 문제, 기다림은 바로 종말론적인 문제거든요. 여러분들이 그 문제를 더 생각하셔야 하겠군요.

신학은 이렇게 한 두 과목 듣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꾸준하게 어떤것들을 붙잡아 나가야할 힘들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종말적이다. 실질적으로가 아니라 종말론적으로 완성된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현재에는 뭔가가 없는 거 같은 허전한 감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이 어떻게 하느냐 하면 행위로 나가든지 교회를 짓는다거나 확장시킨다거나 등등 그런 것을 통해서 내가 믿음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거나 아니면 자기의 주관에 빠져 버립니다. 믿는다, 진짜 믿는다기 보다 어떤 믿음의 사태 속으로 들어간 다기 보다 믿는 자기 자신에 만족하는 거예요. 가능한겁니다. 이단에 빠져드는 사람들이 다 자기 주관성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 것 들은 결국은 솔라 피데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종말론적 지평에 만족하지 못하고 지금 당장 확인하려고 하는 조급증에 의해서 벌어지는 문제라고 할 수 있겠죠.

솔라피데. 우리의 행위로 결코 의로움을 얻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현재는 아무거도 아니냐? 맹탕이냐? 그냥 희망으로만 기다릴 뿐이냐? 그게 아니죠. 기다림. 종말에 일어나게 될 의로움,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죠. 우리는 지금 받아들여지지 않았잖아요. 지금 이렇게 살면서 어떻게 받아들여집니까? 실질적인 이러한 생명 형식은 아니고 완전히 다른건데. 물 안에서 있다가 물 밖으로 나오든다든지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생명이거든요. 알에 있다가 새가 된다든지 번데기로 있다가 누에, 나비로 된다든지 이건 다른 생명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에게 우리가 받아들여지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결코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하지만 실질적인 것은 아닙니다. 약속이고 미래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맹탕이냐 그것은 아닙니다. 종말에 이루어지게될 하나님과의 일치,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것, 실질적인 하나님의 통치안에 들어가는 것, 우리가 다른 말로 하면 영생을 얻는 것, 다 통하는 이야기들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 그것은 영생, 그것은 부활이기도 하고 그것은 온전한 의로움을 실질적으로 득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약속이고 미래이고 기다림이기도 하지만 그 기다림이 현재 우리의 삶에 실존적으로 선취라고 할까요? 그렇게 된다면, 그러한 종말에 일어나게 될 의로움의 능력이 오늘 우리의 삶을 당연히 지배하죠.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죠. 요 맥락을 여러분들이 잘 생각해야 합니다. 능력, 쉼, 이런 것들은 내가 용기를 내서 선교사 되고 교회를 세우고 하는 이런 차원이 아닙니다. 이런 것은 내가 능력이 없어도 자기만족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거예요. 이건 자기만 압니다.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있고 없는 것은 성령만이 아시고 다른 사람이 아니고 자기가 어느 정도는 자기가 판단할 수 있겠죠. 그러나 완전히 판단하기 힘들 것 같구 사람은 간사하기도 하구 자기 자신도 자기를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하고 자기 착각, 자기최면도 걸구요. 자기암시로 자기 자신도 판단하지 못할 수 있어요. 그러나 심리적인 것을 접어두고 말하는 요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 나라의 의, 하나님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졌다고 하는 그러한 상태인 의, 이것은 순전히 종말론적인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오늘 우리 현재의 삶을 통치하고 지배합니다. 그게 능력이거든요. 그걸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자유죠. 평화죠. 남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건 성령이 우리안에서 활동하는 것들이거든요.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 는 말씀이 있죠. 그런 것들이야말로 능력입니다. 아시겠지요. 여러분들들이 아시겠죠.

여러분. 제가 정말 설명을 잘하고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기독교 신앙이 얼마나 포괄적이고 역학적이 심층적인지 조금 이해하시겠지요. 솔라 피데라고 하는 이야기 하나만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야 됩니다. 제가 하지 못한 이야기도 얼마나 많거든요. Anthropology에 대한 이야기도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하는 것이 인간이해, 인간이해도 심리학적, 사회학적인 인간이해가 있지 않습니까?  타종교와의 관계에서 기독교가 말하는 믿음이 어떻게 연관되는가 말할 수 있습니다. 등등 그렇습니다. 거기까지만 해야 되겠네요.

구원의 문제, 의에 대한 또 하나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사실 의로와 지게 되면 하나님과 일치되게 되는 것이구요. 하나님의 일치가 구원인데요. 연관되는 문제입니다. 그런 점에서 업적과 행위, 이런 것들도 연관되는거구요. 그런데 왜 마틴 루터가 이 두개를 구분해서 이야기했는지 조금 더 생각해야 하는데 그런 정도만 하지요.  강의안에 좀 적어 놓았습니다만.

사실 이것은 로마 가톨릭을 이해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솔라 스크립투라와 교회문제. 이것이 무조건 우리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성서가 우리의 삶의 기준이라고 하는데 성서를 결정한 공동체는 교회이거든요. 교회가 먼저 있었느냐 성서가 먼저 있었느냐? 답은 뻔합니다. 교회가 먼저 있었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형성된 것이 성서이거든요. 그런 관점에서 머문다면 교회가 더 상위개념인거죠.  로마 가톨릭교회가 말하는 것이 그렇게 터무니 없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물론 우리쪽에서도 이야기할 수 있죠. 역사적으로는 교회가 먼저 있지만 그러나 더욱 근원적인 차원에서 보면 성서가 먼저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가르침 이런 것들을 성서에 원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성서가 먼저 있었던 것이죠. 그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성서가 더 상위다. 교회가 더 상위다 각각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균형을 맞춰야 되는데요.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개신교회가 로마 가톨릭을 비판합니다. 이 교회는 교황을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교황 우상숭배다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사실 내용을 들어가게 되면 개신교에도 우상이 많습니다. 여기는 교황 한사람이지만 개신교회는 우상이 수천 수만명일걸요. 성서만이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사실 우리가 성서만을 우리의 삶의 기준으로 삼습니까? 교회 전통, 법, 불문율, 습관 이런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것을 신앙의 기준으로 삼으면서 우리가 어떻게 로마 가톨릭보고 우상 숭배한다고 비판한다고 할 수 있겠어요. 사실은 똥 묻은 개, 겨 묻은 개 뭐라고 하는 것과 비슷할지 모르겠습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질문있으면 질문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