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가 뭐꼬?(080320)

매화꽃 수정이야기
매화꽃, 화분에 심겨있는 매화꽃에 수정을 했어요. 보통 벌이 날라와서 자기들이 음식으 만들때 수정이 자동적으로 되잖아요. 아파트 안이니까 벌이 들어올 수 없으니 교우 한 사람이 붓으로 하나 하나 다 건들여줘야 한다고 하더라구요. 30분정도 걸렸어요. 그림 그리는 붓(가장 작은, 400원주고 산 것)으로 색칠하듯이 했어요. 놀랍더군요. 매화꽃 과수원에 있는 꽃들이니까 멀리서 보니 화사하다 생각했었는데 화분에 심은 가까이서 본 것은 처음이었구요. 꽃에 수정을 시키는데 이렇게 붓을 건드리니까 꽃가루가 하늘에서 눈이 오듯이 좌악 떨어지거든요. 그냥 볼때는 꽃이다 그런 정도로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붓으로 살살 건드려서 하다 보니까 꽃가루가 정말 대단히 많더군요. 매화꽃이 그렇게 크지 않잖아요. 꽃가루가 아마 모르긴 몰라도 수백개가 될 것 같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꽃가루였습니다. 아마 그걸 확대해서 본다면 어마어마한 장관을 이룰 것 같습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의 보통 마이크로 라고 하는 것들을 다 놓치고 사는 것 같습니다. 큰 세계 매크로쪽도 놓치고 아주 작은 것도 놓치고 그냥 우리가 알 수 있는 평범한 세계안에서만 경험하고 사네요. 오늘 저는 매화꽃 수정하는 작업 30분을 하면서 황홀한 경험을 했습니다.

우리는 지난 목요일에 이어서 구약성경에 관한 공부를 계속하겠습니다. 오늘은 후반부구요. 구체적으로 내용속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모세 오경이라는 그 단락입니다. 앞부분에서는 개론적인 것기도 한데 구약성서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 이야기구요. (전체가 21쪽 까지 있는데요 오늘은 13쪽이군요.) 모세오경, 구약성서가 39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늘 하는 내용은 정말 초보인데요. 구약성서 개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39권의 내용을 압축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성서에 대한 전이해가 있으신 분들은 오늘 좀 심심할 것 같습니다. 한쪽 편에 TV 켜두고 건성으로 들으셔도 되겠습니다. 다 아는 이야기를 제가 할 것 같으니까요. 또 이런 점도 있습니다. 다 아는 이야기일수도 있지만 아는 것도 수준, 차이가 있을수도 있어요. 가능한 제가, 쪽집게 과외가 있죠. 입시준비하면서 시험에 나올 확률이 높은 것, 집어내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런 자세로 해보겠습니다. 바람직한 것은 아닌데 실용정부가 들어서고 있으니까, 우리나라가 언제 실용적이 아닌적이 있었나요. 미국을 닮아서 언제나 실용적이었죠. 이번에는 노골적으로 실용정부라 하니까 저도 성경공부를 좀 실용적으로 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에게 꼭 필요한 시험에 나올 이야기만 하겠고 오늘 한 이야기만 딱 여러분이 머리속에 기억하고 있다면 어디가서도 구약성서에 한 말씀 할 수 있는 준비가 갖추지 않을까 싶습니다.

서른 아홉권으로 쓰여져 있는데요. 내용을 어떻게 설명하느냐 그겁니다. 우리가 지난 목요일에는 구약성서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그런 등등의 그런 이야기를 한거예요. 한 말씀 더 짚고 넘어가야 하겠네요.  지난번 강의에 어떤 분이 얌니야공의회가 70년이 아니라 90년이 지적해 주었습니다. 아 저도 착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디서 정보를 찾아서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는데 잘못알고 있었습니다. 70년이 아니라 90년입니다.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서 멸망한 것이 70년이고 얌니아 공의회는 90년, 이때 구약경전이 결정되었다. 그 20년간에 바리새인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 운동이 가열차게 진행된 것 같습니다.

지난 목요일에는 그러한 등등한 본문에 들어가기 이전 까지의 이야기를 다루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직접 39권의 내용속으로 들어갈까 합니다. 그러면 39권이 뭐냐 하는거죠. 어떻게 우리 머리속에 집어넣어야 구약이 뭐냐 하는 것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까요? 구약성서는 전체적으로 세 부분입니다. 하나는 모세오경, 토라라고 부르구요. 두번째 부분은 예언서라고 합니다. 세번째 부분은 성문서라고 부르지요. 모세오경은, 이유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독일어 성경이나 영어성경은 우리처럼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렇게 부르지 않고 모세의 첫번째 책, 모세의 두번째 책이라고 부릅니다. 이 다섯권이 모세의 저작이라고 하는 전통 때문인데요. 거기에 얽힌 여러가지 사연들은 제가 지금 말씀드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이것을 우리가 토라라고 부르기도 하고 율법서라고 한다. 요 부분이 구약성서에서 핵심입니다. 다른 것들, 성서안에서 중요도를 따진다고 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만 사실은 따져야 합니다. 신약성서도 마찬가지구요. 마틴 루터는 야고보서 같은 것들은 지푸라기와 같다 그렇게 이야기 했고요. 그외에 다른 성서도 이렇게 경전안에 비록 들어왔지만 권위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그 안에 들어오지 않는 외경은 조금더 수준에 떨어지고요 외경에 들어오지 않는 위경은 훨씬 더 멀리 있는 것들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 그렇고 기독교 공동체안에서도 그렇고 수많은 문서들이 오리지날도 있고 위작도 있고 중간쯤 되는 것도 있고 그렇습니다.

쉽게 생각해 보세요. 지금도 설교가 많이 있잖아요. 어떤 설교들은 정말 기독교 전통에 바르게 서서 그리고 설교를 들어야할 청중들의 삶도 충분히 이해하고 무게가 있는 설교가 있는 반면에 저는 판넨베르크의 설교가 좀 그렇다고 보고, 몰트만 설교도 괜찮고 폴틸리히의 설교집도 제가 신학대학교에 다닐때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흔들리는 터전이라고 하는 책이요. 한번 여러분도 보십시오. 틸리케의 설교도 번역되어 있구요. 역시요. 신학대가들의 설교가 다릅니다. 설교가 권위가 있는 반면에 사실은 조용기 목사님, 이런 분들, 대중적인 분들의 설교는 사실은 한번 그냥 그렇구나 지나버리고 마는거예요. 그러니까 앞으로 100년 200년후에 우리 후손들이 이런 설교들을 읽을거냐? 상당히 기독교 중심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바깥에 머물러 있다는 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게 현재 인기를 끄는 이유는요. 사람들이  전통, 깊이, 본질 거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기 개인의 종교적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것 교회운동 이런 설교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종교적 욕구하고 사회 삶의 욕구들이 겹쳐 있거든요. 그런 것들이 교묘하게 신앙인 것처럼 이렇게 무늬를 갖고 있지만 내면으로 들어가게 되면 바울이 갈라디아서에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육체의 욕망, 그런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적절하게 자극해주면 사람들은 거기에 따라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단 논쟁이 늘 많이 있는데요. 신천지, 영생교도 있었고. 그런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발을 붙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신앙의 내용, 본질 이거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청중들에게 종교적 만족만 주면 되는거에요. 그거는 얼마든지 가능하니까요?

예, 그렇게 그 당시에 많은 문서들이 있어서요. 서로 무게 차이는 분명히 있습니다. 이 모세오경, 율법서라고 하는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가장 먼저 경전으로 결정된 것입니다. 얌니아 회의때에, 기원후 90년에, 구약성경 39권이 경전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성문서까지 포함한 일절 그것이 결정되었다고 하는 것이지, 모세 오경이 미리 앞에서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모두가 인정하는 성서였습니다.

두 번째 중요한 것은 예언서구요. 모세오경 율법이라고 부르는 것은 내용이 주로 율법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예언서는 주로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역사를 담고 있고 역사와 더불어 역사 안에서 활동했었던 예언자들의 설교입니다. 나중에 조금 더 자세하게 말씀드리겠는데요. 전기 예언서는 역사, 후기 예언서는 예언자들의 설교입니다. 보통 혼란을 겪는 분들이 있는데요. 성문서, 예를 들자면 역대기는 역사가 아니냐 하는 분들이 있는데요. 그거는 예언서에 있는 전기 예언서와는 조금 다릅니다. 물론 중복되고 있어요. 그러나 이 역대기는 성문서로 분류합니다. 이런 성문서는 주로 남왕국의 패망과 포로귀환 등 혼란한 시대에 형성된 문학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거죠.

모세오경 먼저 보겠습니다. 차례대로 보면 여기 나와 있으니까 참고 하시구요. 구약성서 39권 다 외우세요? 주일학교 다니신 분들은 기억에 남으실거구요. 모세오경에는 주로 네 단계로 나누려고 합니다. 창조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의 족장들의 설화, 이집트의 이야기, 이집트에서 엑소더스 연관된 거구요. 광야생활. 창조, 모세 오경의 핵심되는 거를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조그만 냇가를 건널 때에 징검다리가 있잖아요. 돌로된 징검다리를 하나 하나 밟고 건너가야 하는 것처럼 모세오경을 전체적으로 윤곽을 잡기 위해서 네 가지 디딤돌을 제가 좀 만들었습니다. 생각을 한거예요. 창조, 족장이야기, 애굽 이야기, 광야생활. 네 요기까지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거죠. 가나안 직전까지 입니다. 광야까지. 제가 이거를 표시를 하고 있는데요.

(강의판에 나오죠. 이거를 오늘 직접 실시간에 강의를 듣지 못하신 분들은 나중에 동영상강의에 올려 놓은 것을 본 분들은 강의판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조금 듣는데 차이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앞으로 저희들이 동영상 쪽에 어떻게 끌어가야 될지 생각중입니다. 실시간으로 할지 시간날때 제가 시간날때 녹화해서 올려놓는 것을 해야 할지 실시간을 해야 할지 연구중에 있습니다. 표시를 하다보니 강의를 듣지 못하신 분들이 나중에 들을때에 이해에 어려움이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가나안땅 직전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네 단계로 이끌어갑니다. 창조, 족장, 출애굽과 광야생활, 모세오경 이야기가 뭐냐 이 네 가지만 기억하면 딱 되는거예요. 제가 잘 요약을 했죠. 창조이야기가 있구요. 이스라엘의 족장들의 이야기가 있죠. 애굽에서의 이야기, 출애굽 이야기, 엑소더스 이야기요, 광야에서 살았던 40년의 생활, 이 네 가지입니다. 네 가지만 잘 알고 계시면 되구요. (바깥에 샐러드 학생이 있는데 못들어오고 있네요. 컴퓨터가 나쁘거군요.)

그러면 첫 번에 자, 지금 제가 말씀드린 것, 네 가지 머리속에 기억할 수 있으시죠. 창조 족장, 애굽, 이집트 이야기, 광야 요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 핵심주제는 창조입니다. 물론 여기에 창조를 중심으로 타락이야기, 노아홍수이야기, 바벨탑 등등이 나오고 있는데 결국은 창조이야기죠. 창조와 타락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1-11장까지를 보통 모든 역사의 根源이 된다고 해서 源역사라고 합니다. 독일어로 우워게쉬히테라고 합니다. 이거는 어떤 역사의 객관적인 사실이라기보다 역사에 대한 근원적인 의미를 담아내는 설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 1장에서 11장까지는 이스라엘의 민족사, 족장사가 시작하기 이전에 보편적 세계이해를 설화방식으로 진술하고 있는 거죠. 세계 시작했다고 하는 이야기, 시작하는데 인간 삶을 보니까 거기에 폭력 살인 이런 것들이 많잖아요. 이 세상이 왜 이러냐 이런것을 해명하기 위한 하나의 귀납법적인 원인 제시라고 할 수 있는 타락이야기 그런 것들이 들어 있는거죠. 이런 것은 신학적 해석이고 고백이지 역사적 사실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원역사, 구약성서의 맨 처음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창세기 1: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여러분, 태초가 언제일까요? 물리학자들이 보통 이야기하는 120억년 바로 그 순간을 이야기할까요. 네 그런 것은 우리가 조금더 많이 더 생각해야 될 부분입니다. 그걸 생각해서 창조 사건, 아담과 이브의 불순종, 가인과 아벨 아까 이야기한 부분을 이야기합니다. 전 다른 것은 다 접어두겠습니다. 이건 그냥 이렇게 제목으로만 여러분이 알고 지나가시면 되겠구요. 주로 창조이야기. 이 1장에서 11장까지 어떤 것에 포커스를 두고 봐야 하겠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신앙적 위치가 달라질 수 있겠지요. 창조영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창조 사건을 앞에 놓고 이야기하겠고 아니면 인간의 죄의 용서, 죄사함, 사죄의 영성에 기초를 놓게 된다면, 거기에 무게를 둔다면 타락이야기, 이런것도 이야기 해야 되겠지요. 어쨌든 저는 창조이야기만 하겠습니다. 창조된 순서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첫째는 빛, 둘째날은 하늘, 육지와 식물, 별, 마지막 여섯째 날은 들짐승과 인간, 같이 만들었어요. 보통 우리는 여섯째 날에 인간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들짐승과 같이 만들었습니다. 정확한 이야기구요. 칠일째 안식하셨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알고 있고요.

조금 이야기를 더 해야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창세기에는 창조이야기가 하나만 나오지 않아요. 보통 이제 J문서와 E문서, 아 E 인지 P 문서인지 각축을 벌이고 있습니다. 창조사건에서. J는 야훼를 이야기하거든요. 하나님을 야훼라고 부르는 어떤 기자, 보통 야훼문서라고 부릅니다. 그 사람이 말하는 창조이야기하고 하나님을 엘로힘이라고 부르는 그러한 성서기자의 창조이야기가 좀 달라요. 그거만 비교해서 주욱 설명하더라도 한 시간이라도 그렇게 넉넉하지 않습니다. 간단하게 인간창조로만 이야기만 하면. 아마 E 문서인가요. 거기서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든거예요. 남자여자 만든 걸로 나오는데. J 문서인가 여기서는 남자만들고 갈비뼈로 뽑아 여자를 만든, 갈비뼈가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그랬을까 생각을 해야 되겠구요. 여기서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창조 이야기도 조금씩 문서에 따라 차이가 있다. 중요한 것은 아닌데 한번 참고적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창조 사건에서 저는 주로 빛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잘 생각해십시오. 하나님이 처음에 빛을 창조하셨다는 것, 그거는 성서가 뭔가 하는 이야기와 연관되는데 그 이야기는 그렇게 실증적으로 확실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을 누가 보았나요? 보지 않았잖아요. 하나님이 맨처음에 빛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하나님이 계시하셨다. 그렇게 말하기 시작하면 성서안의 모든 사실이 실증적 사실로 자리잡아서 스스로 모순이 일어나 도대체 해결이 안됩니다. 물론 근원적으로는 하나님의 계시라고 말할 수 있는데요. 그 계시의 인식, 하나님이 계시, 자기를 알리시지만 그거는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인식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이 달라진다는 것이 아니라) 그 계시에 드러나는 부분들이 조금씩 차이가 있다고 하는 거죠. (말이 겉도네요) 요 대목에서 여러분들이 이렇게 생각하셔야 되요. 제가 여러번 이야기를 드립니다만 성서를 읽을때 중요한 것은 성서기자다. 성서기자가 왜 창조순서에서 빛을 가장 첫머리에 놓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거죠. 빛이 있으라 하니까 빛이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여기 제가 강의안에 쓴 그대로예요. 빛을 왜 하나님의 창조물로 썼을까 하는겁니다. 이건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생각해보세요. 우주물리학적인 지식에 미개했던 고대인들이지만 세계를 직관하는 것은 우리와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고대인들이나 지금 우리나 세계를 직관한다는 면에 있어서는 별로 차이가 없어요. 그 당시 구약성서가 기록될때가 3천년 전이라고 한다면, 대충 2천5백년에서 3천년, 그때 그들이 바라보았던 빛과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빛이 똑같습니다. 그들은 그 앞에서 충격을 받는 거죠. 태양, 빛이 있는거예요. 태양이 비치죠. 빛이 바로 모든 생명과 존재 근원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꿰뚫어 보았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잖아요. 빛이 있어서 식물이 자랄 수 있었고 우리랑 똑같이 그들이 생각을 한 겁니다. 빛이 없으면 생명이 유지가 되지 않는 건 다 드러나잖아요. 그들이 인제 본 세계입니다

참고적으로 성령에서도요. 그들이 이거예요. 제가 자꾸만 이 부분을 강조하는 것 여러분 잘 기억하십시요. 성서기자들이 왜 성령을 이야기했을까? 성령이 있으니까 성령을 이야기했지, 그렇게 말하면 자꾸만 우리는 성서의 세계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미숙합니다. 그렇게 믿는다고 해서 크게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만. 그들이 왜 영, 영이죠. 영을 히브리어로 루아흐라고 하는, 히브리어로 루아흐라고 하거든요. 이름을 붙였을까? 이게 바로 바람이라는 뜻이거든요. 바람과 영이에요. 고대인들은 평소에 바람과 영을 똑같은 것으로 본거죠. 바람은 공기죠. 따뜻한 바람과 찬 바람이 있어서 생명을 죽이고 살리는 것처럼 영이라고 생명의 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북아메리카에 있는 인디안들도 비슷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아지랑이를 생명의 영이라고 생각한거죠. 성서시대에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여러분들이 염두에 두라는 말입니다.

그들 앞에 직면해 있는 빛, 우리도 지금 그 빛을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빛이 하나님이 (일번타자?) 첫번째로 만들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게 모든 생명의 근거라고 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별로 아무것도 아니다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이것은 신앙고백이기도 하구요. 또 아마 주변의 다른 종교들도 (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겁니다. 바벨론이나 이집트도 마찬가지였을텐데요. 이 빛에 대해서 고대인들이 생각했던 던것과 우리가 생각했던 것들이 차이가 있을까요? 우리가 빛에 대해 뭘 알까요? 저는 고대인들이나 지금이나 실체 파악에 대한 궁극적인 것을 꿰뚫어 보려고 했지만 다 알지 못하고 그것을 하나님 관계에서 해명하려고 했던 점에 있어서는 저는 고대인들이나 우리나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이 빛을 우리는 잘 몰라요. 보통물리학자들이 그렇다고 그렇잖아요. 이게 파장인지? 입자인지? 입자, 그건 알멩이라는 뜻입니다. 태양으로부터 뜨거운 것이 오면 입자인지 그런것이 아니라 파도칠때 파도가 흐름인것처럼 파장인지 물리학자들이 이거를 밝혀내지 못했다고 그러네요. 빛은 그렇게 신기한 겁니다. 파동, 파장, 파동이라는 뜻인가요? 파장이라는 말은 다른 뜻인가요? 파동입니까? 내가 지금 말을 헷갈린 것 같습니다. 파동, 입자, 어쨌든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차이는 이해하시겠죠. 물리학이 요런 것도 아직 우리가 확실하게 밝혀내지 못했다는 사실. 빛은 신기하다고 하는 겁니다. 파장은 wavelength라고 하구요. 파동은 wave구요. 아그렇군요. 잘 알았습니다. 파동.

아, 여러분. 이건 빛의 문제만이 아니라 빛이 ‘있다’고 하는 사실 생각해보세요. 이건 보통 ‘자인’이라고 하거든요. (아. 오늘 이 이야기만해도 한 시간이 다가겠는데요. 가도 좋아요.) 보세요. 이건 대단한 이야기입니다. 창조하실때 이렇게 하셨습니다. 빛이, 아 아까 내가 했죠. 빛을 창조할 때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 그렇게 나오죠. 빛의 창조인데요. 있으라고 하니 있은 거예요. 존재의 문제입니다. 보통 창조론에서 이야기할때 無로부터의 창조를 이야기하거든요. 무로부터의 창조. 비존재로부터 존재, 기존 무로부터, 독일어로 니스츠라고 하는데요. 없는 데서 있음으로. 참 대단하죠. 이걸 생각하면 제가 어지럽습니다. 깜깜해요. 어떻게 왜 없는데서 있는가? 있는거는 뭐고 없는거는 또 뭘까?

하이데거가 프라이부르크 대학 취임 강연을 할 때 그 제목이 ‘형이상학이란 것이 무엇인가?’였습니다. What is metaphysics? 그 내용은 주로 다음과 같은 거였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자이엔데’ 존재하는 것은 왜 존재하고 있고, 자인과 다른거죠. 자인과 자이엔데는 다른 것입니다. 하이데거가 복잡한 의미로 쓰고 있는 것은 자인인데요. 존재하는 것들, 보이는 모든 사물, 빛까지도. 왜 니스츠, 무는 도대체 없는가? 그것을 강의안에서 해명하고 있다고 합니다. 태양이 있으니까 빛이 있지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면 간단하죠. 그런데 왜 태양이 빛을 내어야 할까. 다른 별들도 빛을 냅니다만 왜 그런 빛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을까? 참 신기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다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이데거가 이야기한 것을 조금만 이야기를 더하자면요. 왜 무가 없는가 이야기하잖아요. 여기가 토끼가 있다고 하고 토끼가 있고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그 중간은 없어요. 이 세계가 무에요. 니스츠예요. 인간은 있고 토끼가 있는데 그 중간은 없어요. 자이엔데. 존재하는 것으로 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왜 그게 없는가 하는거죠. 반드시 그래야만 되는가 하는 겁니다. 물론 하이데거가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없는 것을 통해서 있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그러한 힘, 존재라고 하는데요. 그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보통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물에 중심을 두지 않고 없는 쪽에 더 중심을 놓고 이 세계를 해명하는 방식입니다. Metaphysics라고 하는 것은 보통 피직, 물리의 세계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원리를 찾는 거거든요. 세계가 물이다. 탈레스가 말하듯이. 그러면 물이다라고 하는 것이 보편적 원리라고 하는거요. 하이데거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은 잘못되었다. 그건 늘 존재하고 있는 세계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거지. 그것 말고 오히려 무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무로 부터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더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이것마저도 신비롭기는 합니다만 이 세상뿐만 아니라 무까지도 통치하시는 분, 사실은 우리는 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없어요. 단어적인 의미만 본다고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이 구약성서 기자들이 빛에 대해서, 빛을 창조의 첫 번째 사건으로 이렇게 설정한 것은 옳다, 바르게 보았다. 생각이 듭니다.

참조적으로 제가 빛에 대해서 약간 조사한 것을 강의안에 썼는데요.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대로 1억5천만Km 떨어져 있구요. 8분인가 9분인가 태양에서 지구까지 오는데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디오니게스에게 얽힌 그러한 이야기를 여러분이 아실거구요. 알렉산더대왕이 고목나무 둥치에 살고 있는 디오게네스에게 뭐를 해줄까 물었더니 당신때문에 햇빛을 받을수 없다. 권력에 대해서 아첨하지 않는 철학자의 반골기질을 이야기했다고 볼 수 있지만 디오게네스의 존재론적 근거가 빛이 아니었나 그렇게 잠간 생각했습니다. 빛고 하나님, 우리가 생각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존재하게 한다. 신기하죠. 우리는 이 땅에 이렇게 살다가 죽은 다음에 창조의 세계를 떠나게 됩니다. 무의 세계로 돌아가게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의 세계로 돌어가게 되는 것을 두려워 생각하지 마세요. 그것까지도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통치세계일겁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뭐냐하는 것에 대한 성서에 많은 설명이 있는데요.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이 아니라 희락과 화평, 그런 속성들을 이야기하잖아요. 그거는 우리가 이 땅에서, 여기서 경험하는 것과 전혀 다른 생명의 형식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네. 창조안에서 우리가 생각할게 많이 있죠. 그런 정도로 이야기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두번째 단락은 족장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 세 사람만의 이야기를 하구요. 요셉전승도 중요한 족장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이 네사람을 이스라엘의 중요한 족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창세기 12장부터 50장까지 나온 이스라엘의 족장설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생지인 갈대아우르에 살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떠나라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요. 제가 다른 성경공부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나는데요. 갈대아우르를 떠난 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명령이라고 한 것이라기 보다도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가 데라였잖아요. 데라와 아브라함사이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누가 어떻게 느꼈을까 그것도 조금 더 생각을 해보아야 할 이야기인데 어쨌든 구약성서에는 아브라함 전승이 더 주를 이루고 있어서 데라는 거의 명함도 내밀지도 못해요. 갈대아우르를 떠날때 주도권을 가진 사람은 데라가 분명합니다. 아브라함과 손자와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데라가 떠나는데 왜 다른 아들들은 떠나지 않았을까? 둘째 아들이 있었는데 안왔어요. 요 이야기를 서울오프에서 상상력을 발휘해서 써보았는데 관심이 있는 분들은 서울오프 메뉴에서 보십시오.

저는 주로 떠나라고 하는 말에 관심을 갖고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겁니다. 1장에서 11장까지 원역사에서는 제가 빛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구요. 족장들의 설화에서는 떠나라고 하는겁니다. 요즘 노마드라고 하는 것, 그런 것 맞습니까? 저는 노마드라는 말을 말을 들었는데 어디서 나왔는지 정확하게 제가 찾아보지 않았구요. 유목민의 정신이라고 하는 것 같은데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뿌리가 바벨론 문명인 것은 분명하죠? 아예 성서가 그렇게 명시적으로 지적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구약성서가 바빌론 문명하고 이집트 문명 이 두개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메소포타미아하고 이집트 하고 하나 더하면 모세가 광야생활하면서 미디안, 장인 제사장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안 영향을 많이 받았구요. 그 다음에는 율법을 완성한 모세를 중심으로 해서 보면 이집트에서는 사십년 왕자로 살았고 미디안에서 목동으로 살았으니 바빌론, 이집트, 미디안 이 세 종교의 짬뽕이라는 뜻은 아니고 거기에 영향을 받은 겁니다. 어떤 종교도 독자적으로 나온 것은 없어요. 기독교도 기본적으로 유대교, 기독교와 유대교는 정말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반유대적으로 나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유대교 신앙을 그대로 받는 것은 아니지만 뿌리가 거기에 있다고 하는겁니다. 차이도 분명하죠. 앞부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처음부터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독립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특별히 예루살렘 공동체, 베드로, 요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등, 그당시 중심되는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핵심으로 활동하던 예루살렘 공동체는 유대교의 한파인 나사렛파로 자리 잡고 있었던 거예요. 바울은 거기서 튀쳐나오게 되는데 그거는 제가 몇번 이야기를 했구요.

유대교와 완전히 단절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 종말론도요. 그게 우리의 핵심이잖아요. 우리 기독교가요 모든 세계를 종말론적 시각으로 보는 거고 하나님 나라도 종말론적이거든요. 종말에 완성될 세계를 내다보고 그 종말의 생명이 오늘 우리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선취되어 있느냐 그런 것을 해명하고 있는건데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도 종말론에 비추어서 가능한 이야기인데요. 십자가는 실패인데요.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승리가 되느냐? 이 승리는 종말론적인 의미입니다. 현재 우리가 예수믿고서 잘 먹고 잘산다는 것은 그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실패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종말론적으로 승리라고 알고 있고 이러한 종말론적인 생명, 승리만이 참된 것이라고 믿고 삽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삶의 방식들은 다 지나가 버리고 마는 것이기 때문에 이 지나가 버려서 무의미하고 허무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완성된 것은 아니예요. 여기에 종말에 완성될 생명이 신비의 방식으로 오늘 우리의 삶을 견인해나가고 있다고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결국은 그 종말론적인 생명을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그 종말론이 기본적으로 유대교의 묵시사상에서 온거거든요. 묵시사상은 세상을, 묵시 사상의 핵심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세상을 시간으로 이해한다거죠. 죽 가는거죠. 혹은 오는거다. 시간적으로 이해하는거죠. 공간적인 것과 반대되는 의미입니다. 이게 말장난이 아니라 세계를 그렇게 뚫어보는겁니다. 시간으로. 또 하나, 두번째는 이원론적인 세계관입니다. 선악의 대립이죠. 이 세상은 악하고 오게될 에온, 새로운 세계가 오는것, 종말론적인 시각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롭게 기독교 공동체가 세계를 바라보는 관이 되는거죠. 이원론적인 의미가 좀 있지만 이건 좀 퇴색되었습니다. 종말론에 비해서는. 이 세상은 악하고 오는 세상은 선한. 대립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부분이 좀 남아 있을뿐이죠. 시간이라는 것은 분명하게 들어있습니다. 세계를 시간, 종말론적인 시각, 카이로스, 이거 시간이죠.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나라는 시간. 공간이 아니라 어디가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그런 것이 아닌 시간. 그렇게만 말씀드려도 되겠지요.

창세기 12장부터 50장까지는 족장들의 이야기인데 키워드를 찾는다면 ‘떠나라’입니다. 계속 그렇습니다. 갈대아우르에서 떠났구요. 하란까지 갔죠. 여기까지는 데라가 주도권을 행사했습니다. 하란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거든요. 왜 데라가 하란에서 멈추었을까? 그건 모르겠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당시 데라와 하란 이런 사람들이 이주할때 집단이주인지는 아닌지 모르겠어요. 여러분 고대사를 한번 연구해보십시오. 이 시대에 그런게 있을 수 있었던 가능성이 보입니다. 집단적으로 이주를 하잖았습니까? 어떤 민족이 가는거지요. 그 중에 한 사람일 가능성도 높습니다. 그러니까 데라와 아브라함만 온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떼거리로 왔지만 그러나 이거를 그중에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이해한 사람들이 데라와 아브라함이었고 특히 아브라함이 거기에 집중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 사람들중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많이 갔는데요. 많이 갔잖습니까?  그걸 어떤 사람이 이거를 하나님의 소명으로 이해하고 뿌리를 박게 되구요. 어떤 사건들이 일어나고요. 교포, 이민 사회에서 정말 세계를 새롭게 할 어떤 사건들이 일어나게 된다면, 이스라엘 역사에서 예수님이 역사안에서 출현했듯이 그런일들이 역사안에서 발생하게 된다면, 미국으로 처음 이민간 사람들의 사건은 정말 하나님의 소명인거죠. 역사가 우연한 것 같지만 필연으로 가게 됩니다. 그게 하나님의 섭리가 뭔가 잘 파악해야죠. 여기에서 아브라함이 바로 정확하게, 역사 비평을 접어두고 성서만 말하는 것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이런 것들이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후대에 해석된 것을 문서로 작성된 것이거든요. 고 시대가 다윗과 솔로몬, 그 당시가 국력이 있었기에 가능했구요. 접어두고요. 구약성서를 따라가고 있으니까 그것은 접어두겠습니다.

떠난거예요. 하란에서 떠나 가나안까지 가구요. 아브라함때에 흉년이 들어서 갔다오고 이삭도 갔다오고 했어요. 일시적으로 갔다고 오고 그랬어요. 그 다음에 요셉이 이집트로 가구요. 그 다음은 설명을 하지 않겠습니다. 결국 야곱을 중심으로 한 70여명의 사람이 이주를 해서 고센으로 가서 살았는데 목축을 하기에 굉장히 좋은 곳이었습니다. 요셉이 파라오에게 자기 식구들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 형제들은 모두가 다 목동들이다. 그거를 강조하면서 이 고센이라는 땅을 불하 받았습니다. 이 족장들의 삶을 한마디로 특징화한다면 떠나라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계속 떠나는 결국에는 이집트로까지 떠나게되었다.

진도를 좀 빨리 나가야 하겠군요. 모세오경의 두번째 권은 출애굽기인데요. 이스라엘민족은 거기서 400년정도 터잡고 살다가 떠나야 되었습니다. 계속 떠나지요. 광야에서 계속 살구요. 가나안 정착 이게 어쩌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영적으로 부패하게 되는 단초였을지 모릅니다. 어디에 편하게 안주하고 있으면 영적인 긴장감이 떨어지게 되거든요. 오히려 광야생활 이었을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호세아가 그랬나요.  광야생활을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허니문이었다. 정말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 그런데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가나안 문명, 가나안 문명이 화려하고 편안하니까요. 정착하면서 영적으로 쇠퇴한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엑소더스 이야기 제가 다 이야기해드릴 필요없죠. 아홉번째 재앙이 나온 다음에 장자가 죽은 열번째 재앙이후 바로가 그 다음에 버티지 못하고 떠나게 됩니다. 홍해를 건넜다. 논란이 많이 되었으니까.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요. 홍해가 히브리어로 보면 갈대늪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요. 홍해를 건넜다고 하는 것, 여기서 미리암이 부른 여자들이 소고를 들고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른것. 이게 출애굽 사건에 중요한것입니다.  이스라엘사람들에게는 우리나라 아리랑처럼 전해오는 노래였을것입니다. 여호와를 찬송하자. 영화롭고 말과 그 탄자들을 바다에 던졌음이로다. 이스라엘의 정형화된 신앙의 표현이었습니다. 홍해란 말은 원어적으로 보면 갈대밭이라 말로 번역된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에도 홍해바다가 갈라져서, 모세의 영화에서 보듯이 그런 개연성은 별로 많이 않을 것 같아요. 오히려 모세를 잘보세요. 40년동안 광야에서 양을 치던 사람이었거든요. 그쪽 지리에 익숙합니다. 어디로 가면 늪지가 있는지 비밀 통로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모세가 없었다면 홍해앞에 걸려서 건너가지 못하죠. 모세가 광야에서 40년동안 목동으로 살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히브리 사람들을 출애굽시키기 위한 사전준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40년동안 이곳 지리를 손바닥보듯이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죠. 이런 것이 다 하나님 은총이죠. 꼭 바다가 갈라지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건너오고 파라오 기마병들이 바다속으로 들어가서 수장되었다. 그것은 신앙의 본질과 관계가 있는것은 아니고 중요한 것은 미리암이 소고를 치며 여자들과 춤춘것, 노랫말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찬양하죠.  유대교가 세 개 종교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했죠.

이러한 영향을 받으면서 고유한 신앙의 정체성을 확보해 나간거죠. 처음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명료한 것은 아니고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우리는 하나님을 명료하게 모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완전히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계시는 종말까지 계속되는거예요. 세계가 아직 끝나지 않았죠. 빛이 파동인지 입자인지 모르죠. 그리고 우리 영과 육으로 되었다고 했는데 그것이 어떻게 결합되었는지 모르죠. 나무가 나무에서 파란잎이 나오는지 그건 생물학적으로 설명을 하지만 왜 그런 방식이 있는지 근원적인 것은 우리가 모른다. 존재하는 것도 모르고요. 이 세계를 아직 우리가 모르고요. 중층적입니다. 이 세계가 두꺼워요. 그것을 다 드려다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직까지 자기를 다 드러내신 것이 아니예요. 이 세계가 완전히 자기의 실체를 드러낼 때 그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거예요. 그때 우리가 하나님의 실체를 알게되는거예요. 일시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고 사는 거예요. 80년을 사는 사람들이 수십억년의 세계를 다 알겠어요? 하나님도 그와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코끼리의 작은 털하나를 붙들고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하나님의 정체성을 우리가 아직 모르고

그러나 꼭 하나를 이야기해야 되겠네요. 모른다고 해서 제가 불가지론에 빠진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온전히 하나님이 자기를 드러낸 사건에 기대해, 의존해 있습니다. 뭘까요? 아직까지 하나님이 다 드러내지 않았다. 거기에 우리 모든 신앙을 걸고 산다. 그것이 뭔가? 아시죠. 대답하시죠? 예수사건입니다. 성육신, 부활, 십자가 전체적으로 예수사건입니다. 이거 하나에 우리 기독교가 모든 것을 여기에 걸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이게 그럴만한 것이냐 아니냐 그것을 우리가 변증해야 합니다. Apologetic 변증은 독백, 도그마가 아니라 아포로지틱입니다. 도그마는 어쨌다 언제 전쟁나가니까 나와. 이것이 도그마죠. 변증은 독단, 도그마가 아니라 주변에 있는 보편성 보편적인 토대를 가지고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왜 진리인가를 설명하는거죠. 기독교가 그런 역사를 지나왔습니다. 왜 예수사건이 종말론적 진리이고 생명의 근원인지에 대해서 사도들과 특별히 교부들, 2천년 역사, 신학의 역사는 다 이 변증입니다. 그런 점에서 조금씩 영향을 받은거요. 다른 종교에서.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늘도 기독교 신앙이 주변에서 영향을 받을 수 있어요. 한국에 들어오는 기독교라고 하면 한국의 토착적인 어떤것에... 토착화를 말씀드리는 것은 아니구요. 한국 사람만의 세계이해들이 기독교 신앙에 접목될 수는 있습니다. 그게 쉬운 이야기는 아니예요. 한복입은 예수님을 그리면 되는거냐? 성찬식할때 포도주대신 막걸리를 쓰면 되느냐? 그런 방식은 아닙니다. 그건 하나의 형식이니까 그런 것을 토착화라고 하면 곤란하구요. 토착화는 어떤 먼에서 중요한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근본이 중요한 거죠.

예를 들면 삼위일체 같은 것들이 그런 것입니다. 삼위일체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거든요. 어거스틴이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구성한 기독교의 교리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게 도그마가 된 것이죠. 변증,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 예수가 하나님이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한분이시니 유일신, 이게 모순되는거잖아요. 모순되지만 두개다 진리니그것을 해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참된 하나님, 참된 인간이다 결국 삼위일체라고 하는 것에서 이것이 명료하게 해명이 되거든요. 이것이 말하자면 헬라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거예요. 고대 유대교가 바벨론, 이집트에게 영향을 받았듯이 역사적 기독교도 헬라철학에게 영향을 받아서 기독교의 본질이 더 드러나게 되는거죠. 이런 과정이 사실 계시, 하나님이 자기를 드러 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이죠. (시간이 지났군요)

이렇게 이스라엘 사람의 신앙이 구성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이죠. 간단한 것이 아니죠. 이렇게 한 분이 바로 야훼, 하나님이다. 자기들을 구원한분, 파라오의 군대마저도 손쉽게 바다에 던지는 하나님, 야훼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이렇게 되는거죠. 또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그 여호와 하나님이 이른비와 늦은비를 적당하게 내려주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유목민에게는 이른 비와 늦은비가 필요없습니다. 잔잔한 호수가로 인도해주면 됩니다. 양을 잘 키우기위해서는 풀이있는 곳으로 인도해주는 것이 필요한 것이죠.  농사짓는데는 늦은비와 이른비가 필요한 거죠. 가나안 종교의 영향을 받은거죠. 그러면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심화되었습니다. 성서의 역사이기도 하구 2천년 기독교 역사이기도 하구요. 그러한 변화, 흐름, 정체성 확보. 이런 것들이 역사를 통해서 나오는데 비뚜르게 가기도 하구 가지도 치기도 하구 막 나갑니다. 그러나 중심에 흐르는 것이 있죠. 간혹가다가 1517년에는 가지가 친 것이 개신교인데, 얼마나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와 틀리느냐? 그거는 좀 더 생각을 해봐야 하구요. 제가 보기엔 이것이 같은 물줄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단들은 많이 빠져 나가는 거구요.

그 다음에 해야할 것이 만나와 메추라기인데 이거는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 시간이 지났군요. 고맙습니다. 오늘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