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답시간(080323)

안녕하세요. 부활절 잘 지내셨어요. 부활절 축제, 잘 보내셨습니까? 오늘 저희 교회에서 예배 드릴때 찬송가를 새것으로 하나 불렀습니다. “되살아오네 우리속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부활찬송입니다.

되살아 오네 우리 속에서 영원한 희망의 몸으로
되살아 오네 우리 속에서 불멸의 거룩한 몸으로
죽음의 사슬, 죄악의 세력 물리치고
영원한~ 생명으로 되살아-오네

되살아 오네 우리 속에서 영원한 희망의 몸으로
되살아 오네 우리 속에서 불멸의 거룩한 몸으로
어두운 끈을, 동트는 새벽 깨우어서
우리의 사랑으로 되살아 오네


이것이 우리 가락이니까 흥겹더라고요. 두둥실 둥둥 하면서 어깨춤을 추면서 부를 그러한 노래였습니다. 여러분과 같이 불러야 하는데 같이 못하니까 아쉽구요. 따라 부르시죠.

주일 저녁에는 질문대답을 하는데요. 이번에는 특별한 질문을 주지 않으셨어요. 다만 지난 목요일 저녁에 언뜻 끝나면서 제 머리속에 남아 있는 문자로 주신 것 하나가 족장설화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해달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구약성서하고 있죠. 설화에 대한 보충설명이었습니다. 아브라함 설화, 족장에 속하는 사람인데 왜 설화라고 부르느냐 그 뜻을 아는데 설화라고 부르느냐? 네 그 이야기를 좀 하구요. 우리가 공부한 내용중에서 충분하게 생각하지 못한 몇 가지를 짚고 조금 더 시간이 아면 오늘 부활절이니까 부활에 관한 이야기 조금 하도록 하겠습니다.

설화는 이야기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 세 사람을 중요한 족장으로 이야기하구 또 하나 요셉을 이야기한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에 관한이야기가 창세기 12장부터 50장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1장부터 11장까지는, 구분되죠. 1장에서 11장까지, 12장부터 50장까지. 1장에서 11장까지는  보통 원역사, 워게쉬히테, 보편적 역사의 근본이 되는 것, 그거는 우리가 보통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역사는 아니죠. 그거는 죄의 근원이 뭐냐 창조에 대한 문제 이러한 모든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들의 단초에 대한 해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거는 주변의 여러 종교들의 영향을 받기도 하구요. 그러면서 고유한 유대교 경전의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런 것들이 사실의 역사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거기는 굉장히 중요한 역사이해, 하나님 이해입니다.

그게 텍스트에 대한 문제인데요. 성서가 텍스트잖아요. 지금 우리들에게 있는 것이 이겁니다. 성서도 텍스트니까요. 이게 문자잖아요. 이 문자가 있기 전에 언어가 있었다고 하는 것 여러분들 더 말할 것도 없죠. 언어예요. 그러니까 어린아이들도 문자를 배우기전에 엄마에게 언어를 배웁니다. 이 언어가 될 때까지는, 또 어떤 사건에 대한 경험이 있는 거구요. 이건 대충 지난시간에 말씀드린 것이기 때문에 자세히 하지 않겠습니다. 성서텍스트가 어떤 사건이 벌어졌죠. 출애굽도 좋고 등등 아브라함의 갈대아 우르나 하란을 떠난 이야기도 좋습니다. 그런 것들이 어떤 사건입니다. 그 사건이 그대로 내려올 수 없잖아요. 사건 자체가 반복되는 것 아니잖아요.

사건이 언어를 통해서 내려옵니다. 이게 역사죠. 5천년전 백년전 우리 사이에는 이어줄 것은 하나도 없어요. 모든 것들이 사라져요. 다만 그것에 대한 해명, 그것이 남아있고 언어가 문자가 생긴 다음에는 문자가 되구요. 내려오죠. 내려오면서 모든 것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변형됩니다.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또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사건이 역사에 따라서 자꾸만 해석하는게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내용도 조금씩 조금씩 변하게 됩니다. 그거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그들이 살았던 삶의 자리에 따라서, 그 사건들의 의미들이 달라지고 해석들이 달라지고 그 내용이이나 이런 것들이 조금씩 변하게 됩니다. 그런 것들이 어느 때에 텍스트가 되죠. 요렇게 되면 변하지 않습니다. 문자가 경전이 되는거요. 구약성전이 완료된 다음에 텍스트로 굳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텍스트를 통해서 찾아야 할 것이 이 사건이거든요. 이 사건까지 가려면 이 사이에 뭐가 있었는가? 역추적을 해야 합니다. 이 과정까지가 설화라고 합니다.

그렇게 제가 말하는 것이 정확한지 모르겠습니다. 윤곽만 말씀드리는 것이니까 제가 이것을 구약 신학적인 관점 이전에 학문적으로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 흐름만 말씀드리니까 이해를 하십시오. 공부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 것 같아요. 그냥 그 흐름을 따라가는 방법이 있고요. 거기에는 조금 세밀하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 하나 정확하게 모든 것을 짚어 나가는 방법이 있는데 두 가지 다 필요하겠죠. 아마 실제적인 공부는 전체적인 윤곽을 잡는 것입니다. 개념을 파악하는 것이거든요. 성서도 개념이고 내가 시간이 되면 말씀 드릴 이 부활도 어떤 면에서는 개념 이예요.

네. 불확실하다는 차원에서 개념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이 확증된 것으로 우리가 생각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개념은 생각이 넓어지는 거잖아요. 부활은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이해하느냐 따라서 이해하는 것만큼 우리에게 열리는 것입니다. 고정되어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 사건이거든요. 계시자체가 다 그런데 이건 절대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텍스트하고도 연관되는 건데 텍스트도 그런 면에서 완료되거나 고정되어 있지 않는 건데요. 무슨 소리냐? 아브라함이 뭐했고 뭐했고 있지 않느냐?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건 그렇게 성서를 기록한 사람들이 이해를 한 것입니다.

말이 정확한지 모르겠네요. 오늘 제가 좀 이야기가 좀 두서가 없을 겁니다. 개인적인 이야기 한 말씀 드리겠어요.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큰 딸 송별도 좀 했습니다. 만으로 23살 조금되는데 대학 졸업하고요. 바이올린 하는데 프랑크푸르트 공부하러 갑니다. 28일 날 출국합니다 돌아오는 금요일이죠. 교회 식구들 모여서 송별도 하구 저의 아버지인 나도 그렇고 어머니도 그렇고 큰 딸을 떠나보내는 거거든요. 마음의 준비도 그렇고 그래서 떠난 다음에 우리의 생활이 어떻게 바뀔까. 생활이 그대로일 것이겠지만 기분이 어떨까? 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말씀드렸습니다.

이게 그러니까 부활도 개념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얼마만큼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훨씬 그 심층을 드러낸다는 겁니다. 개념이라는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거는 뜬 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더 깊이 안다는 겁니다. 수학 같은 거도요. 수학도 역시 개념입니다. 숫자의 개념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참된 수학공부일겁니다. 음악도 그렇구요. 음악도 사실 큰 딸에게도 자꾸만 이야기하지만 음악이 바이올린 하는데 기술이 문제가 아니다 기술보다도 음악의 세계다. 세계란 말을 제가 기독교가 뭐꼬? 하면서 설명한 것 인데요 개념 세계 다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야 된다 이야기했는데 잘 안되더군요. 준비가 되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보이지 않습니다.

부활절 설교를 주욱 했는데요. 설교를 하는 사람들이 부활에 대한 개념이 어떻게 알고 있느냐에 따라 이 설교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 부활에 대한 개념은 생명과 연관되는 거니 생명을 이해해야 하고 생명은 시간과 연관되니까 시간 공간의 문제구요. 이거는 또 영에 대한 문제고 다 연관 되죠. 이러한 전반적인 이해를 그 사람이 얼마나 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부활에 대한 것도 천차만별입니다. 유치원 아이들처럼 부활을 마술적인 거로 생각 하는 게 있고요. 그런 사람들이 분명 많이 있을 것입니다.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거거든요. 그런 점에서 신학이해도 그렇고요. 하나님 이해도 마찬가지거구요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개념이다 그런 겁니다.

설화라고 설명하다가 이쪽으로 내려왔습니다만 그 이야기죠. 성서, 텍스트,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이런 사람의 삶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구약 텍스트는 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본 사람이 그대로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 아니라 아주 옛날부터 내려온 그러한 이야기들을 한참 후대에 어떤 성서기자가 자기 나름대로의 시각으로 그것을 편집했다는 의미입니다. 전승된 이야기들이라고 해서 설화인거죠.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전승과 설화하고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설화라 하면 신화, 근거가 없는 이야기라는 느낌을 많이 받으실 텐데 그냥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이야기들로 내려오다 보면, 제가 말씀드리면서 그때 한번 짚었습니다만, 이게 성서에는 할아버지와 아들 손자 증손자 이렇게 내려오게 되는데 원래는 이게 각각 독립되어 있던 것들입니다 아브라함 이야기 설화라고 해도 좋아요. 야곱이야기가 따로 있고 요셉이야기가 따로 있던 것들을 성서기자가 주욱 연결해 놓은 겁니다. 그걸 어떻게 아냐? 구약성서학자들이 다 연구를 하는 거죠. 되었나요. 요 정도만 할까요? 지나가고요.

전승과 해석

두 번째, 엑서더스 이야기하다가 놓친 부분을 이야기 하겠습니다. 질문 있으면 해주세요. 말씀드리겠습니다. 엑서더스에서 열 가지 재앙이요. 특별히 마지막에 있었던 재앙, 이집트 백성들의 장자와 짐승의 맏배가 모두 떼죽음 당했다는 이야기죠.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홉 가지 재앙이 내렸는데도 바로가 모세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마지막 재앙으로 하나님께서 이집트 전역에 죽음의 천사를 보냈습니다. 이 죽음의 천사라고 말할 수 없겠네요. 어떻게 죽음을 가지고 오는 것이 천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마귀를 부리는 것은 아니죠. 그냥 성서적 표현으로 보면 천사, 맞겠죠. 적군과 싸울 때 싸울 힘을 주는 것이 천사라고 한다면 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사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인데요. 천사가 과연 무엇일까요? 대립적으로는 악마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것들은 이 땅에서 벌어지는 선한 것들, 아름다운 것들, 혹은 악한 것들, 이런 것들을 성서가 그냥 현상적으로 본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본다는 거예요? 존재론적으로 본다는 이야기에요. 우리에게 벌어지는 악이 우연하게 어쩌다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야기하는 더 근원적인 존재가 있다. 존재론적으로 그게 있다. 그런 관점인거죠. 선한 일들도 그것을 끌어가는 힘이 있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천사가 꼭 있다 없다 말할 수 없다 말할 수 없는 거죠. 이런 방식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될 수도 있죠. 이렇게 설명하지 않을 수도 있죠. 그러나 이게 일단 성서가 보는 관점인거예요.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만이 아니라 세계를 창조 관점으로 보는 거죠.  이걸 누가 옳다 그르다고 결정적으로 그걸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계속 성서적인 관점 2천년 기독교 신학의 토대에서 그런 것들을 설명하고 있는 거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죽음의 천사가 가지 않았다고 그래요.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대로 문설주에 양의 피을 발라서 죽음의 천사가 지나가가 지나가고 그것이 없었던 이집트 집집마다 들어가서 장자가 죽고 짐승의 맏배가 떼죽음을 당했다는 이약기가 나옵니다. 그러자 파라오가 깜작 놀라서 두 손 들고 모세를 내보내줬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게 뭘까요. 도대체가. 사실일까요? 이런 것들을 사실이 아니다 맞다 접근만 하면 이게 또 조금 곤란합니다.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위한다는 뜻으로 이스라엘백성들의 출애굽을 위해서, 이집트의 장자들, 어린아이들도 많이 있었을 텐데 이게 과연 옳을까요? 과연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까요? 생각해 보세요. 동의할 수 없죠? 파라오를 죽이면 몰라. 그건 아주 공식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한 패악하다. 뭐라고 그랬죠. 파라오의 마음을 패역하다고 그랬던가요. 거기도 그런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파라오가 아홉 가지 재앙을 모세에게 들어주는 척하다가 다시 돌아서는 것을 창세기적 표현을 따르자면 하나님이 그렇게 완악하게 했다가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은 묘한 뉘앙스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면 책임은 파라오에게 없는 거잖아요.

거기서 여러분들이 창세기 기자가 뭐를 이야기 하려는지 잘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파라오의 책임은 결국 파라오에게 있는 거예요. 그러나 결국 그것마저도 총체적으로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다. 일원론적인 거죠. 모든 세계는 하나님이 지배아래 있는 거죠. 천사, 악마까지도 모두가 다 하나님의 지배아래 있는 겁니다. 지배아래 있지만 악의 책임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악마와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있는 겁니다. 모순처럼 들리죠. 하나님의 모든 통치아래 있는데 이건 각자 책임이라니. 네. 이건 나중에 알게 될겁니다. 종말에 가서는. 왜 그런지는 우리도 잘 몰라요. 다만 성서기자들과 또 그것에 기초해서 하나님을 2천년동안 해명해온 기독교 신학에 의하면 이 두 가지 명제, 한 가지는 악마까지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다. 그러나 악의 책임은 악마다, 사탄이다. 악을 행한 사람이다. 이 두 가지가 서로 모순되는 것 같은 이것이 둘 다 각각이 옳다는 뜻입니다. 이런 명제들은 많아요. 서로 각각은 옳은데 합쳐놓으면 모순되어요. 그러나 모순되는 것에서 이세상의 신비를 보는 겁니다.

여러분 신비라는 말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이 세상 자체가 신비인데요. 다 해명이 되지 않으니까. 세상. 생각하면 제가 자주 쓰는 용어로 아득해집니다. 세상 앞에 서게 되면. 성서를 보게 되면, 아까 텍스트 이야기했습니다만 아득한 겁니다. 장자가 죽는다. 맏배가 죽는다고 하는 이 사실은 성서기자들은 대단히 불합리한 이야기인데 왜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을까  이게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사실은 정말 부도덕한 이야기인데 왜 그들은 그렇게 썼을까 생각하면 정말 아득한 거죠. 따라가기가 정말 힘든 거예요. 그런 것이 한두 가지이겠습니까?

모순된 명제들이 기독교인에 있다는 예를 들다가 다른 말들도 조금 나왔습니다만 하나님은 유일신이다. 그렇죠. 옳은 이야기죠. 인간 예수도 하나님이다. 이거는 모순된 이야기입니다. 유일신인데 예수도 하나님이야? 각각은 기독교가 그것을 진리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같이 모아 놓으면 모순이지만 각각은 진리인, 이거를 해명하기 위한 기독교 하나님 개념이 삼위일체인데요. 이거는 신비죠. 하나님 존재의 신비. 그러면 기독교라고 하면 툭하면 잘 모르겠으면 모순되면 신비로 도망 가냐? 그렇게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신비라고 하는 막연하게 해명이 안 되니까 도망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두개다 엄연한 진리야. 엄연한 진리인데 이 사이를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는 인식론적 통로가 아직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등등 여기서 벌어졌던 많은 것들요. 그걸 신비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게시판질문: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이 각각의 전승이 합쳐진 것이라면,  그러면 이스마엘도 또한 다른  전승이었겠네요. 하나로 합쳐진 부족이 있고 배제된 부족이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이 되는것 같습니다. 그들은 모두 한민족인가요)

이게 다른 전승도. 물론이죠. 창세기에 수많은 전승들이 있습니다. 전승들이 어울리는 것도 있고 어울리지 않는 것도 있고 갑자기 중간 툭 튀어 들어와서. 성서학자들이 잘 해부하듯이 구별해 놓아요. 이거는 다른데서 들어와서 어떻다. 네 그렇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장자를 모두 죽인다 이거는 구약성서에 여러 번 나오죠. 가나안 땅을 정복하면서 이방인들을 싹쓸이하듯이 죽이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이 여호수아 휘하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여리고 성과 아이 성에 있는 삶들을 다 죽이는 것 하나님이 하신 것일까요. 말이 되지 않는 것을 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 했을까요? 그런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거는 성서가 말이 안 되는 것을 억지로 한다는 것이 아니에요. 그 안에는 어떠한 진리를 보는 눈이 있어요. 세계를 해석하는 고유한 성서의 눈이 있습니다. 그거를 놓치고 그냥 성서에 있는 것들을 실증적인 역사로만 밀어붙이면, 그러면 이제 패권주의, 제국주의적인 그러한 생각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엑서더스에서 벌어졌던 장자죽음이야기로 돌아가 보지요. 그리고 일단 이 장자가 죽은 것이 정말 사실이었을까요? 그게 하나님이 죽음의 천사를 보내서 죽인 것이 사실일까요? 제가 강의안에 기록했습니다만 이것은 그 당시에 유행했던 전염병이었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고대시대에는 위생건강이 취약하기 때문에, 페스트라든지 유럽에서도 중세에 그런 일이 있었다죠. 1/3이 죽었다고 하던가요. 고대시대에는 그런 일들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염병이 돌아서. 유대인들은 먹을거리도 가려 먹구요. 이 사람들은 돼지고기 같은 것 고지방질 음식은 안 먹고. 위생건강에 그런 것은 좋은 것이거든요.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같은 전염병에 노출되었다고 하더라도 유대인들은 죽지 않고 이집트 사람들은 죽었을 가능성은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어린아이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아이들을 약하지 않습니까? 그걸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 해석했을 가능성이 사실을 많이 있습니다. 그걸 나중에 일정한 성서를 쓰는 역사관에 의해서 그러한 사건들을 하나님의 심판 이런 걸로 해석한거죠. 후대의 해석이예요. 이스라엘의 역사관은 신명기 사관이라고 하는 것 말씀드렸죠. 신명기, 하나님의 뜻대로 잘 따르면 복을 받고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고 하는, 이건 권선징악하고 비슷하긴 한데 그건 아닙니다. 권선징악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뜻을 그들이 아주 치열하게 그것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유대인이 다른 민족과 구별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더 근원적인 질문을 하나 더 할 수 있습니다. 과연 이집트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이었을까 하는 거죠. 여러분들은 그런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잖아요? 아 그래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구체적으로 출애굽에 대한 소명을 받지 않았느냐 하는 거죠. 다 그런 것들이 다 설화예요. 전승입니다. 그것이 불확실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신문기자가 그 자리에 있어서 사진 찍어 촬영하고 르포 보도 하듯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후대의 해석이기도 하고 그러한 전승들이 내려 온 거죠.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출애굽 공동체라고 이야기하잖아요. 자기들이 엑서더스 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어야 된다는 하는 당위가 있는 거예요. 자기들의 뿌리에 대한 신적인 권위를 확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거야말로, 이 사건이야말로 소수민족으로 고센에서 살다가 나온 것이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사명을 주신 바로 그 사건이다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일제 시대 때 해방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많은 목사들이 설교를 했을 거 아니에요. 어떤 친일부역한 사람들은 다른 이야기를 했겠습니다만 그러나 역사의식 민족의식을 가진 사람은 분명히 그러한 설교를 했을 거란 말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도 그렇게 해석이 되어서 이집트 탈출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거기서 벌어졌던 수많은 이야기들, 열 가지 재앙을 비롯해서 이런저런 많은 이야기들이 흐름을 타고 정리가 된거죠.

이렇게 되면 아마 여기서 여러분들이 조금 혼란스러운 점이 있을 겁니다. 그러면 성서는 하나님의 계시인데 그러면 역사 후대 그를 해석한, 인간의 해석에 불과한 거냐. 하나님의 계시와 사람들의 역사해석, 이건 다 역사해석입니다. 구약성서는 해석이에요. 그 관계를 잘 생각하셔야 됩니다. 그렇다면 이게 조금 하나님의 계시라고 하는, 하나님의 권위가 손상되는 것이 아니냐?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네. 여기서 이게 어려운 문제인데요.

칼 바르트라고 하는 사람이 요 문제를 이렇게 설명했어요. 계시에 대해서. 사건으로서의 계시. 쓰여진 계시, 그 다음에 선포된 계시. 쓰여진 것은 성서, 선포는 설교겠죠. 사건은 원래 계시. 지금 우리가 가진 것은 이거(성서) 하나죠. 이것을 바로 계시와 직결 시킬 수 없죠. 성서자체가 계시라고 할 수 없습니다. 계시는 상당히 폭넓은 거죠. 사건이기도 하고 그것이 문자로도 기록되었고 그것이 선포된 것, 이것을 다 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건 뭐 신학적인 문제니까 접어둔다 하더라도 굳이 계시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분명하죠.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가 그 해석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하는 거죠?

여러분. 말씀자체가 해석이예요. 제가 말씀 드렸을 거예요. 말씀 자체가 해석, 우리가 어떤 사건을 차제를 해석한다고 하는 것은 이거는 하나님의 계시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가 바르게 해석을 하면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들에게 바르게 드러나는 것이고 못하면 안드러나는거죠. 이런 말이 조금위험하기도 한데요. 말을 하다가 보니까 어떤 점을 강조하려다 하다 보니까 고 작은 차이를 정확하게 제가 짚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늘 우리의 해석에 의존하느냐? 제가 그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 해석은 우리 인간의 인식론적 노력이니까 그것에 의해서 하나님의 계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느냐 그런 것을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 계시는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죠. 우리가 의존하는데 의존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구약성서 기자들이 바로 그 일을 감당한 거죠. 그런 점에서 우리는 구약성서를 하나님의 계시다 이렇게 말해도  잘못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쓰여진 계시가 단독으로서만 계시가 아니라 성서말씀보다 우선한 하나님이 계시한 사건이 있다고 하는 것을 머리에 두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는 거죠. 성서에는 많은 것을 이야기, 해석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그 해석자체가 다 옳은 것은 아니요. 우리와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거든요.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많은 사람들을 죽이면서까지 하나님이 자기들을 인도한다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옳은지 아닌지 우리가 지금 판단해야 하는 거예요. 다만 우리들이 지금 여기서 성서기자들이 잘못되었느냐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고요. 성서기자들이 하는 이야기를 몽땅 다 옳다고 생각하며 안 되는 거예요. 그들에게서 옳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어떻게 자기 뜻을 알렸느냐에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였다고 하는 사실을 중요하게 높이 평가하는 거거든요. 그들이 그것을 잘 알았다고 하더라도 실제 적용에서는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람은 그 시대의 아들, 딸이기에 그 시대에 자기들이 옳다고 생각했던 것을 행한 거예요.

여호수아 사건에서도 제가 이야기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간을 죽이잖아요. 아간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식들도 다 죽입니다. 그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었을까요? 여리고성 들어가서 몇 가지 외투도 개인적으로 착복하고 그런 일 때문에 재판을 받고서 결국은 죽게 되는데 아간만 죽였다고 하면 정상적인 재판이라고 하지만 가족들을 모두 다 죽이고 돌을 던져서 아골 골짜기를 만들었다. 하나의 전설이죠. 그렇게 내려오는데요. 과연 여호수아가 판단을 잘한 것일까? 이런 것에 대해서 우리가 계속 비판적인 눈으로 봐야 되겠죠. 그렇습니다. 혹시 여기에 대해서 질문 있으면 하시겠어요. 없으면 요거는 접구요.

부활의 오늘과 내일

15분쯤 남았는데요. 최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하겠다고 했구요. 인간 창조에서 두 가지 전승이 있다고 하는 것도 있었고, 부활에 이야기를 좀더 하겠다고 했는데 어떤 거 할까요? 세 가지 중에서. 네 부활이요. 그렇게 할까요? 네 오늘 달걀 먹었습니다. 우리는 시장에서 사지 않고 교우 중에 한분이 농장에서 가져온 거예요. 유정란이라고. 우리가 정말 살아나는, 병아리가 되는 계란이니까 부활을 잘 기념한 것 같습니다. 달걀을 먹는 전통이 언제부터였는지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인제 그것이 알에서 병아리가 된다. 그걸 인제 부활과 연관시키는 거죠.

어떤 것부터 이야기를 드려야 될까요? 오늘 제 설교에서의 핵심이 ‘‘부활의 오늘과 내일’, 제목이 그랬습니다. 오늘은 뭐냐? 현재는 부활의 실체를 얻지 못했습니다. 이건 곧 아직 우리가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어도 그 확신만으로 구원받은 것은 아닌 거거든요. 우리가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예수와 더불어 죽고 더불어서 하나님을 향해서 산다고 하는 건데. 이미 부활했는지 부활의 실체는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숨어있다는 것. 은폐성, 부활의 오늘은 숨어있는 생명이다. 은폐되었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가 설교에서 조금 설명했습니다. 아마 이거를 현재 드러난 것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오늘 예로 든 거는 나뭇가지를 예로 들었는데요. 나뭇가지가 있다. 여기서 잎사귀가 난단 말입니다. 그런데 잎사귀 나오기 전에 나뭇가지를 아무리 잘라서 실험을 해보아도 잎은 없어요. 잎이 나오기 전에 이것이 있기는 있는데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죠. 잎이 숨어 있는 거죠. 실체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부활의 몸을 입었다고 하는 해석은 실체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 숨겨져 있다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누구냐 계속 질문하는데요. 오늘은 제가 거기까지 갈 필요가 없습니다. 부활의 상태만 이야기하는 것이니까 그 정도로 머무는 게 났습니다.

부활의 내일은, 여기서요, 예수님은 이미 부활의 실체가 되신 분입니다. 부활의 실체를 우리가 지금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아직 부활의 실체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론적인 걸로 언어가 그것 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말씀드리지만 이론일수 있는데요. 어떤 부활 생명의 개념, 세계를 설명하는 겁니다. 제가 그렇게 실제로 믿고 있고 그런 것을 말씀드리는 거죠. 지금 우리가 죽기 전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경험하고 있는 것은 실체가 아니나 하나님 속에 은폐되어 있는 것이다 하는 것이죠.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의 경험만 갖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저의 이러한 말씀 듣고 그건 좀 비겁하다. 자꾸만 이 세상 경험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이야기 하면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이 그 뭔가 토대가 탄탄하지 않는 게 아니냐? 변명하려는 것 아니냐?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정통신앙이 상당히 관념적이래서 문제가 있다. 그렇게 비판하는 자유주의 신학자, 진보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도 그렇게 비판하는데요. 저는 그런 비판들이 기독교 신앙을 전혀 모르는 거구요. 뭐가 과연 실체냐 실체라는 말을 몇 가지 봐야 겠습니다만, 정말 참된 것, 리얼리티를 이야기하겠죠. 우리가 이렇게 확인할 수 있는 것만 리얼리티가 아니잖아요.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확인할 수 있는 것하고는 전혀 질적으로는 다른 그런 방식으로 참된 리얼리티다.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현실, 정말 참된 것, 여러분 이런 것들 자꾸만 확인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런 아예 불가능 한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확인하지 않고 어떻게 신앙을 확실히 알 수 있느냐? 예. 그건 뭐 이 시간에는 그만 두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폐성에 우리가 들어가 있는 거구요. 우리가, 아 웃겨님의 그림에 나왔네요. 새 애기. 그런 말씀하셨더군요. 뱃속에 어머니 애기집속에 잇는 아이가 세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 양수 속에 떠있거든요. 어머니의 영양분을 탯줄을 통해서만, 그의 생명의 방식은 그겁니다. 철저히 어머니에게만 의존해 있는 겁니다. 그 아이에게 어머니 밖의 세계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됩니다. 설명이 안 되고 이해할 수 없는 거죠. 우리가 흡사 그런 정도로 세상을 이해하고 삽니다. 그거는 분명하는 것 같아요. 우리가 아는 것은 어머니 뱃속의 아이와 똑 같은 수준이에요. 무엇이 존재하고 있는 것 자체를 우리가 모르니까요. 빛의 이야기는 오늘 안한다고 했습니다만 이게 왜 있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사실 잘 모릅니다. 그때 하이데거 이야기를 좀 했는데요. 우리는 자꾸만 겉으로 드러나 있는, 존재하는 것들을 존재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참된 존재가 아니다. 하이데거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무로서 없음으로서 있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을 존재라고 이야기하거든요.

우리가 이렇게 살지만 백년 후만 가면 우리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지구의 원소로 다 변해 버리겠지요. 그래서 허무하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는 다 하나님 안에 우리 부활의 생명이 숨겨져 있다. 내일, 이거는 종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종말론적입니다. 이때 가서 다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때 뭔지를 알아요. 제가 자주 인용했던 바울이 말하는 얼굴이 얼굴로 맞대어서 압니다. 이때까지는 모든 것들, 모든 확실성들은 유보됩니다.  골로새서 3장 오늘 제가 설명한 본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 지금은 생명이 하나님 안에서 숨겨져 있지만 그때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 부활이죠, 우리가 영광중에 드러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게 뭘까요? 그때에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누군지, 생명이 뭔지, 하나님이 누군지, 총체적으로 알게 될 겁니다.

그전까지는 우리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는 태아처럼 그냥 숨만, 맥박만 뛰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은 그것과 하나도 다를 게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굉장히 화려하게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생명을 만끽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죠. 어느 순간에 지구가 반쪽 날 수도 있구요. 시간만 가게 되면 아주 위태합니다. 이거는. 불덩어리가 될 수도 있고. 빙하기가 오게 되면 지구 전체가 얼음으로 뒤덮이게 되고. 모든 생명은 다 죽게 되고. 인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아주 토대가 약합니다. 어머니 배속에 잇는 태아나 마찬가지예요.

우리 기독교 신앙은 모든 것들의 궁극적 실체가 종말에 드러난다. 그게 예수님이 오시는때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게 맞는지 틀리는지는 어떻게 우리가 알 수 있을까요? 이거는 둬 둡시다. 우리는 기독교인들이니까 그거는 맞는다고 전제하고 신앙생활하고 있는데요. 일단 이게 우리가 이해하고 믿고 있는 세계 이해입니다. 신앙은 어떻게 보면 세계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했고 종말에 모든 것이 드러나고 그러나 2천년전 예수에게서 부활의 리얼리티, 부활은 생명의 리얼리티를 부활이라고 합니다. 그거는 종말에 드러나게 될 생명이 예수에게서 미리 일어났다고 하는 거거든요. 그렇게 우리는 세계를 이해하고 거기에 우리의 모든 운명을 건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는 것은 다른 사람이 판단할 문제예요. 계속 그것은 검증을 받아야 됩니다. 그거는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고, 다른 종교학자들이라든지 과학자들이 옳은지 그른지 검증하라고 하십시오. 그리고 다만 우리는 우리가 기독교 신앙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꾸준하게 구도정진, 용맹정진하는 자세로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그렇게 터무니 없는 것이 아니거든요. 종말에 드러난다고 하는 말이 아 그것이 좀 불확실하다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실증적인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 자연과학도 아무것도 확실하게 말하지 못하다니까요. 지난 목요일저녁에 이야기했듯이 빛이 파동인지 입자인지도 모른다니까요? 이 우주가 얼마나 넓은지도 모르고 무엇이 왜 있고 없는지 그걸 모른다니까요? 지구에 왜 현재와 같은 이러한 생명의 현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는 모릅니다. 그건 진화론적인 차원에서 본다고 하더라도 수십억분의 확률도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자연과학이 하는 것도 정말 일부 작은 것을 정적하게 해명해 보려고 하는 노력들입니다. 정말 소중한 거예요. 그러나 그런 것들도 코끼리의 꼬리털하나 붙들고 잇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니까 종말에 드러난다고 하는 말도 터무니없는 말이 아닌 거죠. 다만 이런 것들이 왜 근거가 있는지 자연과학적인 측면에서도 확실성을 찾아내어야 하는 겁니다. 이건 신학자들이 해야 될 문제입니다. 교회현장에서는 그런 것들이 기독교 삶에서 드러나도록 해야 되는 거죠.

지금 제가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하면서도 확실한 것을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냥 최소한도의 방향을 이야기한 거구요. 이런 걸 말하려면, 그렇다면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생명을 뭐라고 종말이해는 뭐냐? 계속 나오는 그러한 핵심들이요. 창조와는 어떻게 관계되었으며 현재 우리가 부활이 은폐되었다고 하는데 그래도 칭의로움을 얻었다고 하는 차원에서 어떻게 연관 되냐? 세례를 받는 것과 성만찬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전반적으로 연관되어 있어서요. 제가 지금 속 시원하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다고 해서 다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일부분을 말씀드립니다. 현재는 오늘은 은폐되어 있지만 종말에 드러나서 우리가 나뭇가지에 매화꽃이 어느 순간에 확 피듯이, 우리의 생명의 실체가 드러난다. 그것이 종말이다. 그때를 우리가 희망하며 산다. 그러니까 오늘 내가 여기에서 성취하는 것에 모든 승부를 걸지 말자. 그게 이원론적인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을 악하게 본다는 뜻이 아니라 오늘 골로새서에 나와 있는 이야기인데 이건 지나가는 문제들이예요. 결국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잠정적입니다. 잠정성. 이것은 전제됩니다. 이게 허무주의냐 그게 아닌데 설령 그렇게 말한다고 하더라도 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말하고 있는 겁니다. 모든 것들은 지나가는 거예요. 대한민국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자들은 민족주의 안에 빠질 수가 없어요. 남성과 여성 이게 계속되는 거 아니죠. 나중에 어쩌면 인간이 중성이 다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구요. 그렇다면 어느것도 다 마찬가지거든요. 그러니까 그 지나가는 것들, 잠정적인 것들 무상한 거죠. 이런 것들에게 생명을 걸고 그게 내 삶을 보장해줄 것 처럼 사는 것은 어리석다. 그 이야기죠. 역사 허무주의에 빠지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런 것은 다른 차원이예요. 우리가 윤리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것은 두번째 이야기, 다른데서 이야기해야 될 거고 이 땅에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잠정적이다라는 것을 전제하고 기독교 신앙을 출발하는 겁니다. 시민권이 하늘나라에 있다고 하는 것도 그거예요. 그 다음에 잠정적이지 않는 것이 뭐냐? 그게 영생, 부활, 하나님 나라고 천당이고 그렇게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이러한 제가 여러분들에게 아 기독교 신앙이 불확실하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아주 우리는 성서와 2천년 기독교 신앙은 명백한, 리얼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 리얼리티가 다른 차원인거죠. 종말론적인 것이고 창조론 적인 것이고 생명지향적인 것이고 칭의론적이고 그러한 차원에서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은 진화론하고 맞상대해서 싸울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진화론은 부분적으로 이 세상의 생명현상을 바르게 설명해주는 거니까 옳은거는 옳은거고 부분적으로 잘못되었으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거고요. 우리는 그 자연과학적이 방식이 아니라 신학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삶의 태도라고 할 수 있죠. 확실합니다. 역사적 예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심판자이고 그에게서 우주가 마지막일 때 일어나게 될 참된 생명이 그에게 선취되었다. 우리가 그런 믿음으로 무상하지 않는, 잠정적이지 않는, 그러한 생명의 알갱이속으로 들어간다. 하나님과 똑 같은 하나님의 영광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더 자세히 알려면 하나님의 영광(독사)이 뭐냐?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뭘까 그런 것을 생각해야 되죠? 하나님 나라에 가서 어떤 사람은 황금면류관, 개털모자를 쓰고 거기 가서도 뭐 이렇게 상급이 차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이거는 정말 유치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지 못하는 세속주의, 출세 지상주의, 조금 더 나아가서 복지활동 이런 것들을 확대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부활은 하나님의 나라는 뱃속에 있는 아이가 밖으로 나오듯이 전혀 질적으로 다른 생명으로 변화하는 거다. 바울의 표현을 빌자면 옷을 갈아입는 거다. 그래도 그런 이야기도 막막하다.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라.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기를 보여줄 때까지 기다려야 됩니다. 여기까지요.

고맙습니다. 네. 신비롭죠. 막연한 신비가 아니라 굉장히 확실한 신비니까 안심하십시오. 네 고맙습니다. 여러분들도요. 새롭게 한주를 시작하는데 부활의 기쁨도 많이 누리십시오. 하나님에게 내 생명을 맞기고. 그때 우리가 그냥 공기처럼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걱정하지 마세요. 그게 훨씬더 하나님이 준비한 평화와 기쁨 그러한 생명일테니까요. 온전한 신뢰가 필요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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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화일중 목사님의 되살아 오네 노래 녹음이 있습니다.
음질이 좋지는 않지만 따라 불러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