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강 받아쓰기(080327)-물, 오십견, 만나와 메추라기

물이야기
봄볕도 쬐고 행복한 그러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겨울철에는 화초에 물을 일주일에 한번 정도 주는데요. 요즈음은 물을 많이 먹어서 이틀에 한번 어떤 화초는 아침마다 주어야 되구요. 모양이 조금 다르더군요. 제가 맞춰서 하고 있습니다. 물을 줄때마다 너무 신기해서 오늘 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조리 있잖아요. 떨어지는 물줄기가 볼수록 신기한거예요. 지구에 어떻게 물이 있을까 다른 돌 덩이들, 모래 같은 것들은 물조리에 넣고 아무리 뿌려도 물처럼 그러한 멋진 모습은 연출하지 못하잖아요. 물만 가지고 있는 특별한 성질이거든요. 어떻게 지구에 물이 있을까 이건 제가 자꾸만 생각을 해도 신기할 뿐이지. 제가 물리학자도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생성되었는지 설명할 수 없습니다. 물리학자들도 설명할 수 있겠어요. H2O 분자 기호는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만 산소와 수소가 결합하여 물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지구의 특별한 현상 아니겠어요. 그러한 원소가 있다는 자체가 그렇구요. 원소가 어떻게 결합될까요. 수소 두개에 산소하나죠. 결합된다고 하는 자체가 이게 정말 놀랍구요. 물리학 적인 것이니까 제가 말할 필요가 없으니가 접어두고 어쨌든 물 자체가 너무 신기한거예요.

요즘 물을 주면서 잎사귀 큰 나무 화분도 크고 잎사귀도 초록색이지만 그것마다 다 다르더군요. 조금 넓은 잎사귀가 있는데 고게 인제 화분 고 밑에 약간 말라서 두 세장이 떨어졌어요. 물을 주다보니까 물조리를 옆에 내려놓고 보니까 마른 낙엽이죠. 거기에 물이 젖지 않고 신기하던데요. 여러분들이 매번 느끼는 것입니다만 그게 새롭게 느껴져서 말씀드리는 것이예요. 정말 보석같더군요. 다이아몬드라든지 루비라든지 이런것만 보석이 아니라 저는 물이 더 보석중에 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도 다 동의하리라 생각하구요. 일반적인 보석은 없어도 우리가 사는데 큰 지장은 없지만 물은 없으면 안되는 거구요. 생명의 가장 밑바탕에 물이 있다고 하구요. 태양은 없어도 물이 있으면 미숙한 생명은 초보적인 생명은 생명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물이 모든 생명의 토대인것 같습니다. 탈레스가 만물의 본질은 물이다 하는 말이 헛말이 아닌것 같습니다. 제가 여기서 조금 더 over하는 말을 듣는다고 해도 한마디 더하면요. 내가 죽은 다음에 다시 물이 된다하더라도 큰 아쉬움은 없겠다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이 참 평화인 것 같아요. 이것이 엉뚱한 이야기인줄 모르겠습니다. 지난주 부활을 지났는데 여러분 부활에 대한 생명을 생각하시잖아요. 우리 모두가 다 물이 되는 것 이게 우리의 이후의 삶의 모습이 될 수 있겠다.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고 크게 잘못된 것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 입장에서보면 물과 우리는 비교할 수 없다. 우리가 탁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창조론하고도 연관되는 건데요. 과연 인간이 다른 존재, 생명체는 접어두고 생명이 없는 사물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것보다 더 뛰어나다 그러한 명백한 증거가 어디 있을까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시고 다른 것보다 더 보기 좋았더라 그런 말씀이거나 아니면 인간에게만 이 세상을 다스릴 권한이나 책임을 주셨다거나 뭐 그런 걸로 이야기 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네. 그렇게 말하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네 오늘 제가 이런 것을 신학적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니구요. 물, 아침마다 물조리개로 물주는 속에서 느끼는 어떠한 자연적 영성이라고할까 그런 차원에서만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우리가 부활생명을 얻는다 하나님 나라에 간다. 속되게 말하면 천당간다. 죽음이후에 삶 말이죠. 그런 것들을 여기서 살아가는 삶이 연속되는거로, 여기서 경험하는 삶이 아름다와지는것. 그러니까 복지가, 우리가 지금 여기서 가장 귀하게 생각하는 것이 복지 아니겠습니다. 모두가 잘 살고요. 정의롭게 살고 생명보험 일제 다 처리되고 말이죠. 교육도 다 예를 들면 무상교육이 되고 그러면 복지사회라 그러잖아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손상당하지 않고 인간다움을 회복할 수 있는 세계, 복지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도 과연 복지가 극대화된 곳이냐? 우리는 자꾸만 그러한 표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표상이라고 하는데요. 독일어로 포스텔룽(Vorstellung)합니다. 앞에 놓는다고 하는거예요. 신학용어로 표상, 그렇게 표상을 하거든요. 표상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니체도 그 비슷한 책을 쓴 것 같은데요. 정확한 책 제목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어떤 개념인거기도 하구요.

부활도 사실은 실증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닙니다. 그 안으로 우리가 얼마나 들어가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우리에게 열려지는 거예요. 종말론적으로 우리가 열려져있다는 말을 가끔했었죠. 그것을 여러분들이 낱말 뜻으로는 알아들으셨을지는 모르지만 신학적으로 표현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의미인지는 여러분들이 생각한 만큼 들어 왔을 거예요. 그거는 어떤 배움, 제가 얼마나 높은 수준을 가르칠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시간에 배움이라고 하는 것은 가르치는 사람만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의 눈높이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비약이라고 하는 것은 없어요. 자기가 들을 수 있을 것만큼만 듣게 되거든요. 부활을 우리가 자꾸만 실증적으로 이야기를 하니까 잘못된 그림을 자꾸만 머리속에 그립니다. 그거는 결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생명의 궁극적 실체인데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그것을 그려낼 수 있겠습니까? 개량하거나 검증하거나 실증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세계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대해서는 말을 안할려고 그래요. 부활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 삼위일체 부활 등등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두 가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양극단인거죠. 이것을 쓸데없이 인간학적인 구도에서 자기의 욕망의 실현으로 그려내는 거죠. 하나님도 그런 방식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게 극단화되면 신인동인동성형론(anthropomorphism)으로 빠지게 되는 거죠. 거지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 다비야에서 잠간 논란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 품에 안겨 있는 거하고 지옥 불구덩이속에 들어가 있는 것을 사실로 그렇게 그려내는 거죠. 그런거는 정말 우리들의 망상이라고 할 수 있겠구요. 그거는 자기 무의식을 발로라고 할 수 있고요. 자기의 기대, 그거는 신학이 아니라, 계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자기를 알려주시는 것에 대한 당연한 우리의 response가 아니라, 자기의 발현에 불과합니다. 많은 신자들은 대개 거기에 매력을 느낍니다. 설교도 그런 방향으로 하면, 청중들이 원하고 자기들이 원하는 것에 대해서 포퓰리즘, 그러한 식입니다. 그게 하나의 극단이구요.

또 하나는 이거를 아예 언급조차 못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부활, 예수님 부활했다. 우리가 부활한다는 이야기만 하지 부활의 리얼리티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는 것, 이미 2천년동안 그것에 대해 말하려고 했던 흐름들을, 역사적 발자취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것, 극단이긴 한데 맞물려 있습니다. 두개다 문제예요. 네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가야 되는데, 그게 우리가 정답을 찾으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게  과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는 하나님의 계시에, 우리가 적합하게 그리고 올바르게 그리고 진리론적으로 상응하려고 하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이라고 하는 것도 늘 우리 욕망의 실현으로 대개요. 그런거로 우리에게 표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정말 기독교 신앙이 이야기하려고 하는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나중에 물이 된다고 하면 어떨까요? 그런 시가 있지요. 우리 다시 물이 되어 만나리 우리가 다시 물이 된다면 정말 속상한가요? 여기서 제가 그냥 일반적인 자연주의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것하고 제가 신학적인 어떤 것을 이야기하는데 섞여서 혼란스러울지 모르겠는데 여러분들이 구분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지금 왔다갔다 하면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우리가 물이 된다고 한다면 그럼 지금의 관점으로만 보면 그럼 그거는 말도 되지 않는거로 생각할 겁니다. 인격도 없고 아무것도 하나님 찬양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그게 무의미하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바꾸어도 그렇지 않아요. 시인들은 이미 물이 흘러가면서 소리를 내는 것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이야기하구요. 그렇지 않습니까? 인간이 하고 있는 이 방식만이 하나님과 최고로 가깝게 소통하고 있다고 하는 보장이 있느냐 이거죠. 그건 없습니다. 그건 아닙니다. 물이 우리 물이 되어보지 못했으니 물이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있는지 모르는거예요. 자기 자신이 자기가 주인이 되서 늘 생각하니까요. 내려놓는 것이 참 필요한 것 같습니다. 특별히 우리도 피조물이고 돌도 피조물이고 다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절대화 하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의 욕망들 우리의 설계도들 내려놓을 수 있는거죠. 마땅히 그래야 되는거죠.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를 계시하시는가? 거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영적인 시각을 맞추어 가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물 정말 소중한 사물인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창조 능력 인것 같아요. 여러분들 컴퓨터 앞에 차한잔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오늘 준비를 못했습니다만. 우리가 차 한잔 마시는 거를 보석 덩이를 마시고 있다. 특별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액체로된 보석을 마신다 하는 겁니다. 이건 그렇지 않는데 그런 것처럼 자기만족이 아닌거예요. 제가보기엔 실질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런 자연주의적인 영성, 기독교 영성과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닌데요.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사실 다 부자인거죠. 지천에 널려져 있잖아요. 물 한모금 마실 수 있구요. 얼마나 얼마나 넉넉합니까? 그것만이 아니라 화초라 교감할 수 있고 다 우리가 부자다 넉넉한 마음으로 편안하게 살아도 됩니다. 아 그러면 지금 돈도 벌지 못하고 가난하게 살면 배고프고 애들 교육시키기도 힘들지 않느냐? 네 그건 다른 문제구요. 그러나 우리가 조금씩만 노력을 한다면 최소한 생존은 보장된 사회에 사니까. 요거는 고런 정도로만 하겠습니다.

오십견
두가지 한다고 그랬죠. 또 하나는 다음과 같습니다. 두 세주일전에 제가 정형외과에 갔습니다. 어깨가 좀 아파서요. 들기도 좀 나쁘구요. 지금도 좀 돌아, 지금도 좀 불편합니다. 팔을 들기도 힘들구요. 테니스치기도 나쁘고요. 생활하는데 는 지장이 없습니다. 밤에 자다보면 그쪽 오른쪽 어깨가 돌리게 되면 통증이 심하더라구요. 아 이거 그냥 있으면 안되겠다. 그게 상당히 오래되었거든요. 정형외과가서 사진을 찍었더니 별 이상이 없다고 합니다. 그 의사선생이 하는 이야기가 테니스 치다가 어느 부분이 다쳤을 텐데 그것 때문에 팔 근육을 쓰지 않는 바람에 어느 부분이 굳었다는 겁니다. 굳으면 그쪽으로 팔을 옮기면 아프거든요. 그러면 더 그럴수록 더 움직이지 않는거죠. 오른쪽 어깨 움직이는 반경이 점점 줄어 드는겁니다. 굳어지게 되고 쓰는 근육이 점점 축소되는 거예요. 다른 근육도 점점 굳어지고요. 이게 악순환되는거라고 하면서 약을 주는데 세 가지 작용이 있는 것이더군요. 하나는 통증제거하는것, 통증이 조금 약해지는 진통제, 치료를 받으려면 안 쓰던 근육을 막쓰면 거기가 상하지 않게 하는 곪지 않게 하는 것 있습니다. 하나하구 소화제 하고 항생제 맞네요. 아 의사 선생님 계시니까 딱 나오네. 의사선생님은 말씀도 안해서 약사한테 물어봤더니 세개라고 친절하게 설명해주더라구요. 두주 정도 먹었나요. 지금 안갑니다

아주 중요한 것을 배웠습니다. 아프다고 근육을 안 쓰면 안 쓸수록 더 나빠진다. 써야된다. 그래서 그 의사선생 말씀을 듣기 전에 내가 팔을 돌리면 아프니까 내가 쓰지 말아야지. 그쪽은 조심을 해야지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상황이 나쁘게 된 것입니다. 모르고서 상식적으로만 생각하고 그런 결과가 되었습니다. 이번에 아주 좋은 것을 배웠어요. 어디에 쓴 글 일텐데요. 무슨 말인가 하면요. 샘터교회 고기에 나왔을 겁니다. 영적인 스트레칭, 스트레칭이 필요하더라구요. 아파도 참고 합니다. 아파도 그다음에는 조금 더 좋아져요. 영적인 스트레칭이 필요하다는 글을 제가 한번 썼습니다. 요번에 근육 통증 때문에 그걸 절실히 느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죠. 한국 교회에서 일반적으로는 이런 상태입니다. 근육을 안씁니다. 영적인 어떤 부분을 안씁니다. 아프니까 안쓰는 거예요. 매번 쓰는 것만 계속 쓰는 겁니다. 그래서 고쪽만 계속 반복되지요. 다른 부분은 원활하게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결국은 건강을 잃어버리게 되는겁니다. 영적이 스트레칭라고 하는 것은 보통 때는 일상적인 생활에서는 쓰지 않던 부분을 써서 보통 스트레칭으로 근육을 푸는것 처럼 신앙생활에서도 보통 교회 생활할 때는 쓰는 게 별로 없습니다. 영적인 신학적인 생각을 할 필요가 없어요. 교회생활 얼마나 편한지 아시요. 인격적으로 잘하면 대우받구요. 얼마든지 모범생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다 장로 되구요 그렇게 설치지 않고 보통만 하더라도 다 됩니다. 성경말씀 읽고 큐티도 하구요. 그렇게 하면 영적인 건강을 잃어버립니다. 영적인 근육을 움직여야지요. 그게 신학입니다 영적인 스트레칭, 그것은 신학입니다. 창조 종말 제가 지금 여러가지 말하고 있는 부분들을 힘들더라도 자꾸만 생각해야지요. 무죄한 자의 고난, 이게 신정론, 신자들 생각하기 싫어합니다. 언제 그것까지 언제 다 생각하냐. 그냥 바쁜데 교회 열심히 다니고 성경 말씀 열심히 읽고 복받고 성실하게 살면되지 무죄한 자의 고난이라든지 삼위일체 하나님, 신 존재증명이라든지 칭의와 성화같은  이러한 신학자들이 말에 관심이 없고요. 그렇습니다. 대충 그렇게 살라고 할 사람들 살라고 하구요. 그렇다보면 쓰지 않는 근육이 굳어지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날이 갈수록 정말 그렇습니다. 그런 식으로 아마 평생 신앙생활해보세요. 죽을 때쯤 되면 아무 생각도 안 남을 겁니다. 그냥 교회생활 수십 년 동안 반복했던 매너리즘에 빠져서 자기 암시에 빠져서 그렇게 그런 것만 남겠죠. 뭐 그래도 다른 사람보기에는 멀쩡합니다. 물이야기, 오십견 이야기 두가지 했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
우리가 지난번 모세오경 이야기를 하다가 세 가지를 했습니다. 빛에 대해서 이야기했구요. 고향을 떠남에 대해서 이야기 했구요. 세번째 엑소더스. 예. 이거는 주일 저녁에도 보충한 이야기가 나오죠. 광야에서 있었던 만나와 매추라기 말입니다. 이 저간의 사정은 제가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기 때문에요. 광야, 이거는 자연적인 겁니다 설명할 필요도 없는데요. 아 하나님이 그들만 위해서 만나 메추라기를 보내주셨다 하는 것이 신앙적으로 크게 잘못될 것 없지만 우리가 진지하게 성서텍스트와 세계 역사를 생각한다면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만나라는 것은요. 제가 설교에서도 했었고 서울 오프모임에서도 성경공부를 했는데요. 이건 지금도 있어요. 만나는요. 이거는 어떤 식물에서 나오는 액체인가요? 꽃은 아니고 하여튼 그런겁니다. 그래서 그게 아침에 나와요.  햇빛나면 녹아버리고요. 그건 특별한 식물, 꽃에서 나온 씨앗 비슷한거예요. 흔한 거예요. 모세는 광야에서 40년 살았기 때문에 어느 곳에 가면 먹을 것, 비슷한 것이 있다 알고있었던 거예요. 그쪽으로 백성들을 끌고 다닌거예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은 만나가 있어도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하면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선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게 정말 놀라운 사실, 이게 중요한 겁니다. 똑 같은 자연적 사건인데 어떤 사람들의 눈에는 그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으로 받아들여지는 거죠. 아까 제가 물 이야기를 했죠. 보석이죠. 오늘 저녁 샤워하면서 물이 여러분의 몸으로 흘러가는 느낌을 느껴보십시오. 황홀합니다. 그게 어디서 느낄 수 있겠어요. 지구에서만 가능한 목욕 샤워, 우리들은 다 그런 것을 놓쳐버리고 다른 것에 머리가 가득차 있는거거든요. 머리속에 인제 어쩌면 쓸데없으로 가득차 있어서 소중한 것들은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로 들어올 틈이 없어요. 온갖 것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만나를 다른 민족들은 시시하게 봅니다. 저놈의 것 심심풀이다. 우리가 어렸들때 아카시아 꽃 같은 것 먹고 했잖아요. 진달래꽃도 먹고 하는 것처럼요. 심심풀이였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광야 생활동안 이것을 먹었습니다. 이게 그러니까 참으로 놀라운 영성이예요. 이게요. 가난한 사람만 맛볼 수 있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입니다. 먹을 게 많은 사람에게는 만나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가난한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 말씀을 여러분 이것을 너무 관념적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아주 실질적으로 생각하셔야 되요. 가난해야만 주변에 있는 사소한 것들이 사소하지 않는 것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외로운 사람만이 사람의 정을 깊이 느끼게 되는거예요. 가난한 사람이 다 그러느냐? 추해지기도 하더라. 네 그렇습니다. 고 문제는 지금 이 시간에 제가 더 길게 말씀드리지 않겠어요. 그거에도 다른 의미가 있으니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사십년 동안 얼마나 생존의 위기, 생존이라고 하는 말을 잘 기억해 두십시오. 생존, 생존의 위기를 경험했어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우습게 보는 만나 이게 정말 달게, 달짝지끈하게 느껴집니다만, 정말 맛있게 들어오게 되는 거죠. 참고적으로 히브리 사람들이 광야에서 만나만 먹고 산 것은 아닙니다. 대상들, 광야를 왔다갔다하는 대상들에게서 먹을 것도 좀 샀겠죠. 이집트 탈출할 때 보석들 많이 가져왔거든요. 좀 그런 것만 갖고는 다 살기 힘든거예요. 광야에서 야생 토끼, 동물도 잡아 먹고 살았겠죠. 숫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만나도 굉장히 중요한 먹을거리가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이 전승, 설화에서 여러분들 잘 아시죠. 자기 식구들것만 갖고 가야지 내일 것도 준비하자 하면 썩었다고 합니다. 사실 만나는 보관을 못한다고 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햇빛에 닿으면 그냥 녹아버린다고 해요. 그날 먹을거리였는데요. 거기에도 창세기 기자들이 영적인 의미를 담는 겁니다. 생존에 딱 맞 닥드려 사는 것, 그러니까 일용할 양식이죠. 이 경험이 하나님 경험과 굉장히 흡사합니다. 생존의 경계선으로 가서 사는거죠.

기독교 신앙은. 영성은 바로 그것을 의미합니다. 생존은 그 먹을 것만 아니라 자기 삶의 의미 절망 허무 다되죠. 좀 실존이라고 할 수 있구요. 그런 것이 다 연결되는 것이잖아요. 우리는 완전히 무와 유, 없는 상태와  있는 상태 그 경계선에 늘 놓여 있습니다. 백척간두 진일보 시방세계 이렇게 나오죠. 누가 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장대꼭대기에 올라 떨어지는데 한 번 더 나가야 그래야 세계가 탁트인다고 합니다. 불교 용어이기도 합니다. 기독교 신앙도 그런 부분들이 많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과 직면한다고 하는 것은 끝자락에 가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그러한 하나님이 이런 생존을 보장한 거예요. 그래서 만나사건도 그렇고 하여튼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이 생존의 토대다. 그거를 확인해가는 역사가 이스라엘의 역사다 말하자면.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국력을 키운다거나 하면 그런쪽으로 나가게 되면 늘 부패했습니다.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요 우상숭배, 이거는 뭐를 쌓아두는 것, 생산해서 풍년이 들어서 창고에 많이 쌓아놓고 놀고 먹자. 편안하자. 창고에 쌓이는 것을 보니 내가 몇년간은 먹고 살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는거요. 그걸 보장해주는 겁니다. 가나안에 있는 신들, 바알과 아세라가 그걸 보장해주는겁니다. 야웨 하나님은 그런 방식이 아니라 생존만 지켜주는 거예요. 살아있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아마 그러면 여러분들은 성경에서 다른 이야기들을 기억하시겠군요. 하나님이 축복해주신다는 약속이 많이 나오기는 합니다. 그걸 여러분들은 잘 생각하세야 합니다. 하나님이 축복해 주신다는 약속도 이런 것들이 과연 뭔가? 거기까지 더 나가지 말고요. 더 여러분들이 생각해 보시고요, 경계선이다. 네. 한마디 더해야 되겠군요. 매일의 삶을 죽음과 삶의 경계선으로 좀 들어가야 됩니다. 세례를 받는 게 죽음과 삶의 경계에 들어갔다 나온다는 것이거든요. 성만찬, 매주 예배마다 원칙적으로 보면 성만찬을 해야 됩니다. 죽음과 삶의 확인, 세례의 반복입니다.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서 늘 피에로가 줄 타듯이 거기에 서있는 겁니다. 아마 우리에게는 그게 잘 안될 겁니다. 많은 든든한 것들이 있으니까 통장, 주식도 있고 집도 있고 자식도 있고 예를 들자면 보통 우리들이 많은 현대인들이 원하고 있는 우리들도 포함해서 우리를 편하게 하고 있는, 복지죠. 그런 것들이 우리를 지켜준다는 생각이 강합니다.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고요. 시행착오를 통해서 아 그런 것이 없으면 정말 불편하다는 것을 많이 느끼기 때문에 그쪽으로 가게 되구요. 뭐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 것들을, 그런 한계가 우리가 있기는 있지만 다시 내버려두고 우리가 그 경계선으로 들어가 보자. 죽음과 삶의 경계선을 늘 안고 살자. 그게 영성입니다. 그런 영성을 가지면 세계가 새롭게 보이죠. 물이 정말 보석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살면 남편이 아내가 새롭게 보이죠.

사람님이 구름 따라 이동했다는 그거는 화산 폭발이에요. 밤에는 불이고 낮에는 구름. 그런 거죠. 아 그러면 아무것도 아니네? 성경은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런 자연현상을 기준으로 아 어떤 광야에서 방향을 정했구요. 그것을 하나님이 자기들을 인도하신다는 기준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런 눈이 참 중요한 거죠. 물 한 모금을 마시더라도 이게 하나님의 창조와 생명과 유일회적인 지구 안에서의 생명현상, 그런 것을 연관하여 마시는 것과 아무 생각없이 마시는 것이 다른 것처럼 화산폭발을 보고 아 우리 갈 방향을 하나님이 인도 해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른거죠. 오늘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생존조건을 하나님이 광야에서 지켜주셨다고 하는데 이런 점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될 겁니다. 하나는 자기의 생존, 하나님이 나의 생존을 지켜주신다는 확신을 여러분들은 가져도 됩니다. 생존은 경계선, 가장 밑바닥이라고 그랬죠. 거기가 있으면 다른 것들은 사소해 보이는거죠. 그러한 영성에 들어가기는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게 우리 기독교 신앙의 대답입니다. 제가 다리가 하나 잘라진다고 하더라도 상당히 불편하겠지만 그것 없이도 얼마든지 생명의 경계에서 살아갈 수 있거든요. 죄송합니다. 제가 장애인들의 아픔을 너무 쉽게 이야기하는 것 같애서요. 장애인에 대한 아픔을 제가 말씀을 드리려고 한 것은 아니고요. 예를 들다보니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 창조와 그 경계선에 들어 가는게 하나님이 우리의 생존을 보장하신다고 하는 약속이 그 안에 담겨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질적인 약속입니다. 걱정 하시지 않아도 되어요. 걱정은 우리가 밑바닥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타인, 다른 사람의 생존도 우리는 지켜야 하겠죠. 이거는 아마 복지 차원일텐데 우리가 어떻게 이 세계를 생존안에서 나와 너가 더불어서 살아가는 세계로 끌어가느냐 기독교인에게 주어진 윤리적 책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가 자연적인 것이지만 여기에는 놀라운 영적인 가르침이 있다. 그 이야기였습니다.

그 다음에 구약성서를 크게 세 토막으로 말씀드렸습니다. 모세오경, 예언서, 세 번째 성문서. 모세오경은 했고요. 예언서입니다. 예언서도 전기예언서, 후기 예언서가 있다고 했구요. 후기는 대예언서 소예언서가 있다고 했고요. 여기 설명이 되어 있군요. 전기예언서는 왕정시대에 예언자들이 어떻게 활동했는가는 사실을 보도한다. 이게 역사입니다. 여호수아서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가 그렇습니다. 이 안에 가나안땅 정복과 그 안에서의 모든 사사시대를 이어가고 또 통일왕국과 분열왕국 등등 역사가 다 담겨있습니다. 전기 예언서입니다. 후기예언서는 예언자가 왕과 귀족들에게 한 설교 입니다 대예언서 소예언서 이거는 양의 차입니다. 대예언서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 길죠. 60편 70편. 소예언서는 열두권으로 된 예언서입니다. 잘아시는 이야기구요. 전기 예언서는 사실상 1천년에 걸친 이스라엘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요한 연대기적 흐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나안 입성, 사사시대, 통일왕국, 분열왕국, 북이스라엘 멸망 BC 720년 남유다 예루살렘 멸망 바벨론 포로로 잡혔다가 귀환하는 이야기  BC 537년, 포로도 한번에 잡혀가지 않고 여러번에 걸쳐서 있었서요. 대표적인 것은 성전 복구합니다. 이 뒤로 역사는 흐지부지되요. 성전복구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은 성문서에 많이 들어 있습니다. 문학성에요. 전기예언서에. 요것도 정확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포로귀한 앞부분이 나온 것같은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전기예언서, 이스라엘의 1천년 역사다. 가나안 입성에서부터 포로귀한까지다 그리고 그 뒤의 이스라엘 역사는 구약 신약 중간기라고 하는데요. 거기는 역사가 별로 없습니다. 거기는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 이런데 계속 식민지 당했구요. 사실은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라의 정체성은 거의 유명해졌다고 봐야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를 쓰지 못합니다. 히브리어를 이스라엘이 쓰지 못합니다. 큰 나라들이 오면 제국의 흡수 정책에 따라서 언어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 나라도 일제시대가 오래 계속되었으면 우리나라 말을 잃어 버렸을지 몰라요. 수백년동안 세월이 있 었기 때문에 그 지역에 쓰던 아람어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용어 였구요. 팔레스틴 안에서도 순수하게 이스라엘 사람만 살지 않고 섞여서 살았습니다. 복잡한 문제니까 모르셔도 되구요.

전기 예언서는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이거는 길게 설명하지 않겠구요. 하도 많이 들어서 잘 아시겠구요. 잘 모르시면 강의안을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여기서 결론 부분을 이야기해야 되겠는데요. 이거죠. 여기서 부터예요. 전기예언서에서 볼 수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의 특징은 두 가지다. 가나안 입성에서부터 사사시대를 거쳐서 통일왕국 분열왕국 바벨론 포로, 포로귀한 여섯가지 항목으로 나눌수 있ㄱㅖㅆ군요. 구약성경 읽을 때 이스라엘 역사의 어느 부분에 해당하는구나. 아시면 좋죠. 전체 역사의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전반부에 진술되어 있는 이스라엘 역사를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영토싸움이다. 이스라엘은 지금도 영토싸움을 하고 있네요. 참 기구한 운명의 민족입니다. 출애굽이후 광야 4십년을 지난 다음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해서 가나안을 정복하면서 시작한 싸움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구약성서는 전쟁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걸 여러분들이 염두에 두고 읽으셔야지 그것 없이 읽다가는 정말 그거는 기독교를, 구약성서를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트집을 잡을 만한 이야기들, 부도덕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고요. 하나님이 전쟁의 신인 것처럼 부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제가 여러번 강조했습니다만 여리고성, 아이의 사람들, 어린아이까지 다 죽이라는 신의 명령을 해석학적 토대없이 문외한들이 읽다보면 구약성서는 잔인한 신의 싸움판이다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거는 인제 해석이 뭔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인데 김용옥 선생도 조금 경솔하기도 하구요. 기독교에 관심을 가져 주시는 것이 감사하기는 합니다만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성서 해석을 하고 한다는 것이 제가 보기에는 좋지 않습니다.  본인은 1년동안 공부해서, 주석서랑 필요한 책들을 천만 원어치를 샀다고 하던가요. 그렇게 해서 공부를 했다고 하는데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1년 바짝했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워낙 명석하신 분이기 때문에  잘했다고 치지만 그러나 허점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최근의 문제가 많이 되었던 기독교 신에 대해서 이름이 뭐예요? 없는 신, 죽은 신 그런 책들도 허점이 상당히 많습니다. 일반, '만들어진 신' 맞군요. 저는 읽어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읽어본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허점이 많은 거구요. 조직신학적 관점으로도 허점이 많이 있을거예요. 그러나 그런 이야기들이 바깥에 있는 삶들에게는 설득력이 있는 것일겁니다.

고대시대 영토 싸움이라고 하는 것은 제로섬 게임이거든요. 전무냐? 전생이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는 윤리가 개입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건, 성서는 메타윤리((Meta ethics)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서는 그 당시의 보편적인 윤리를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전쟁터에서 너 죽냐 나죽냐 하는 싸움판에 어떤 윤리가 개입될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러한 와중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찾으려고 독보적인 민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살았던 삶이 다 고상한 게 아니예요. 그들이 돼기고기 먹지 않았던 그러한 삶이 고대인들에게 위생건강에게 필요하기는 했지만 지금 여호와의 증인처럼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 그걸 안먹는다 그렇게 성경을 그대로 따른다고 한다면 그건 어리석은 일입니다. 성서안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우리가 배우지 말아야 될것이 많습니다. 물론 배워야 할 것도 있지만. 그건 그들이 살았던 삶의 자리에서 어떤 것을 이해하고 선택했을뿐이예요. 선택이 잘된 것도 있고 잘못된 것도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여리고 성에 들어가서 침략한 것은 제가 보기인 잘못된 것인데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를 한 거예요.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죠. 영토싸움입니다. 전쟁 가운데 이게 생존에 관계되는 거니까요? 그 이야기를 제가 조금했습니다.

둘째는 왕정이 들어선 이후로 조금 안정이 되죠. 이스라엘의 역사는 왕과 예언자의 갈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전반부에는 영토를 중심으로 한 일곱 부족과 갈등이라고 한다면  왕정이 들어선 다음에는 왕정이 들어섰다고 하는 것은 상비군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사들도 거의 왕과 같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사들은 어떤 위기 상황에서만 지도력을 발휘했지만 군사력도 있었습니다. 모집해서요. 모병제죠. 이 왕정이 들어섰다고 하는 것은 상비군이라고 하는것인데요. 사무엘 뒤로 그게 상당히 논란이 많았습니다. 그런 여러분이 잘 아시는 내용이구요. 어쨌든 이때부터 왕과 예언자들의 갈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왕은 당연히 힘을 키우려고 하구요. 예언자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야 된다고 하는 그런 것을 요구했구요. 왕권을 무한대로 확장시켜 보려는 왕과 귀족들, 그들의 권력을 하나님의 말씀에 예속 시키고자 하는 예언자들이 서로 주도권을 잡기위해 투쟁한다. 성서는 참된 예언자들의 말씀을 소홀히 할때 시련에 봉착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게 역사를 해석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전기예언서고 후기 예언서는 이스라엘역사에서 활동한 예언자들의 설교 모음집입니다. 여기서 예언자들의 보통 예언서라고 예언을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언자들은 역사가라고 보면 정확합니다. 지나간 역사를 보고 오늘의 삶을 비판하고 앞으로 나갈 길을 제시해주는 것이죠. 여기에 물론 예언자들은 훌륭한 영적인 경험을 합니다. 예언자들만이 갖는 영적인 경험요. 이들은 설교, 예언을 했습니다.

제사장은 이스라엘의 또 하나의 종교지도자들입니다. 물론 제사를 드리죠. 제사, 죄용서, 이런 전통이 있고. 예언자들은 설교. 오늘의 목사는 이 두 가지 전통을 다 가지고 있네요. 아 그러니까 준비도 안 된 제가 이 두 가지를 다한다고 하니까 힘듭니다. 옛날에는 예언자는 설교만 하고 제사장은 제사를 드렸는데요. 이 제사장은 그런 면에서 왕족에 많이 붙어 있었습니다. 기득권쪽으로 흐른 흔적이 있습니다. 예언자들의 특별한 경험들이 있는데 그걸 우리는 신탁 oracle이라고 합니다. 신이 자기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고 싶을 때 어떤 한사람에게 그 뜻을 전하고 그 사람이 그 뜻을 듣는 사건, 우리는 그것을 신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으로부터 신의 뜻이 인간에게 온다. 이게 가능하겠어요? 신이 어떻게 인간의 말을 할 수 있을까요. 희랍신화에 보면 헤르메스가 나옵니다. 헤르메스의 제우스의 역할이 심부름꾼, 제우스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립니다. 해석학을 독일어로 Hermneutik이라고 합니다. 예언자들이 바로 헤르메스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뜻을 인간의 말로 번역, 해석, 통역하는 거죠.  과연 그게 뭘까 가능할까 생각해 보십시오. 아모스 이런 사람들이 어느날 어떻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렇게 나섰습니다. 그 당시 돌아가서 여러분들이 생각해 보십시오. 같이 목동이었던, 농사짓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내 말을 들어라 하면 당신 맛이 간 거 아니냐? 그렇게 많이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 당시 예언자들은 그러한 어려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대중들이 자기 말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은 여러분들이 구약성서를 보면  예언자들이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고 지금의 대중 설교자들처럼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선포했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 당시 예언자들끼리 각축을 벌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후죽순처럼 여기 저기 나타나서 특히 어려운 시대 때에는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그렇게 나선거예요. 지금 목사들이 너도 나도 설교를 하고 있는 것처럼 그랬습니다. 예언자들이 네가 잘했다 잘못했다 설교 비평하듯이 니가 사이비다 누가 어떻다는 이야기를 그 당시에도 했었다는 이야깁니다. 예레미야같은 사람들은 감옥에 갇히기도 했구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어려움을 많이 당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포퓰리즘에 빠진 사람들, 그러니까 청중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는 그러한 예언자들도 많았습니다. 어떻게 판단하냐? 그 사람의 설교, 그게 정말 하나님으로 부터 신탁인지 아닌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었을까요? 구분할 수 없습니다. 이게 문제인거죠. 그러니까 대중들은 구분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대중들은 그것을 구분할 만한 영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참된 예언자들은 많죠. 예레미야와 맞서고 있었던 사람들, 대중성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은 스스로는 알수 있어요. 그러나 모를 수도 있어. 예레미야와 대적했던 사람들은 정말 하나님의 신탁을 받았다고 확신하고 있었을까요? 아니면서도 그럴듯하게 교언영색으로서 대중들을 자기를 속이고 청중들을 속였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조금 좋게 본다면 정말 자기가 하나님에게 무엇을 받은 것처럼 착각했을수도 있었습니다. 모르고서도 그렇게 할 수 있어요. 동기는 순수한 거죠. 그러나 그러한 것도 참된 예언자인 예레미야의 눈에는 보이는 거죠. 그런 것을 다른 사람들이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왕도 판단하지 못하고 대중들도 그렇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민중신학에 대해서는 조금 회의적으로 생각합니다. 민중의 의식을 깨워서 메시아적인 메시아니즘으로 끌어가는 것이 얼마나 낭만적인가 나이브 한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성문서, 간단히 강의에도 썼습니다. 이런 문서들이거든요. 다 이런 것들이 어려울 때 바벨론 포로 기간에 벌어졌던 독특한 여러가지 장르 소설도 있고 여러가지 장르로 쓰여진 문학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다 시가 영적인... 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질문 동영상 강의에 올려주시기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