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답시간(080406) 민중신학, 설교 준비 방법,

따뜻한 봄이 무색할 정도로, 그 말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한낮에는 좀 더웠던 것 같습니다. 오늘 샘터교회에서는 예배마치고 친교 식사를 마치고 1시 40분부터 옆의 숲을 산책을 했습니다. 숲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돌아서 과수원과  논과 밭 사이길을 돌아서 저수지 끝을 가로질러 다시 산속으로 들어가서 한 바퀴 돌고 왔습니다. 약간 덥더군요. 위의 겉옷도 벗고 와이셔스만 입고 돌았습니다. 좋은 경치였습니다. 복숭아 과수원 지났는데 꽃들이 막 필려고 하더라구요. 어떤 사람들은 팝콘이 터지는 것처럼 꽃들이 나온다고 표현했는데 맞는 것 같습니다. 온갖 종류의 과일의 꽃들이 이미 한창이고 터지기도 하구요. 숲속에 들어가니까 조그만 앵두나무의 꽃도 있구요. 저는 인제 그 꽃을 잘 분간하지 못하지만 우리 샘터교회 교우 한분이 잘 아시는 분이 있어요. 앵두꽃이라 그랬는데 예쁘게 보았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주 좋은 하루 즐겁게 보내셨다고고 보구요. 제가 자주 말씀드리는 거지만 이게 우주의 시간중에서 딱한 번 주어진 것인데요. 물론 겉으로만 보면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비슷하다고 보죠. 내년 봄이 되면 반복되는 것이 아니냐 생각할 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같은 날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년의 4월 6일은 금년의 4월 6일하고는 다릅니다. 날씨가 조금 따뜻하다거나 좀 더 춥다거나 비가 온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본질적으로 같은 날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건 물리학적으로는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그것도 아주 명확한 사실이구요. 지구가 이제 45억년동안 주욱 진행되고 있으니 결국 변하는거 아니겠습니까? 45억년이후에 지구가 사라진다고 한다면 그동안의 지구가 나이 먹어 늙어가는 건데, 우리 몸도 늙어가듯이요. 물리학적으로도 거의 명백한 사실이구요. 성서적, 신학적으로는 우리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볼 때, 물리학적으로 조금 다르다고 할 때 성서적으로, 신학적으로 명확한 사실이죠. 기독교 신학적으로는 종말이니까 그쪽으로 간다고 하는 점에서 오늘 이시간은 딱 한번 뿐입니다. 귀한 시간을 보냈는데요. 저는 가끔 가다가 지구에 와서  우리의 이러한 모습을 보면 얼마나 새로울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가능하면 저도 다른 별에서 살다고 온 사람처럼 노력하고 있는데요. 오늘도 아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왔습니다.

주일 저녁은 질문응답시간인데요. 구체적인 질문응답은 없어요. 시간이 되는 대로 계획을 했습니다. 하나는 요즘 제가, 요즘이 아니라 계속 숙제로 안고 있는 민중신학에 대한, 보통 제가 기독교 사상 4월호에 썼습니다만 진보 신학에 대한 문제이거든요. 그리고 두 번째는 오늘 제가 설교한, 설교의 본문에 대한 예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거는 앞부분에 있는 겁니다만 같은 장이거든요. 사도행전 2장에 나옵니다. 성령강림과 베드로의 설교와 제가 오늘 본문으로 잡은 것은 설교 끝난 다음 뒤풀이라고 할까요. 보통 이제 뒷 담화, 뒤풀이. 설교 끝난 다음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나, 요거를 본문으로 했는데요. 그러니까 오순절 성령강림부터 주욱 연관된 이야기입니다. 그걸 우리가 어떻게 봐야 하느냐 문제하구요. 시간이 허락되면 신약성서를 공부하고 우리가 지금 신약성서를 공부하고 있구요. 구약성서와 연관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성서 형성과 역사의 신비, 역사성해도 좋습니다. 역사의 신비. 이렇게 제목만 붙여도 아마 뭐를 이야기하려는지 아실것 같아요. 역사, 방금 물리학 이야기했습니다만 그게 다 역사안에 들어와 있는 거거든요. 이게 인문학적으로 ?? 일이기 때문에 어떤 사건들이 그 역사 안에서 시작하고 역사 과정과 더불어서 확대되거나 축소되기도 하고 역사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신약성서도 그 현상중에 하나 거거든요. 고 문제를 조금 짚어볼까 합니다.

예 신학단상에 올리기도 하고 기독교 사상에 제가 4월에 쓴 article의 제목이 ‘진보신학 비판적 성찰’이었습니다. 민중신학에 대한 문제인데요. 이게 저의 실존적인 상황에서 나온 이야기기도 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는 (내가 지금 이야기하면서도 혹시 질문이 있으면 올려주세요. 제가 시간 봐서 질문에 대답하기로 하겠습니다.) 제가 속해 있는 교단은 기성이라고 합니다. 성결교회에 속한 것이거든요. 기성과 예성으로 나눕니다. 성결교회는요. 그게. 예성은 더 보수적이고 기성도 보수에 속합니다. 예장의 통합보다 더 오른쪽으로 치우쳤다고 볼 수 있지요. 기성과 예성이 갈라진 이유는 1950년 60년 그 어간에 WCC에 탈피하느냐 마느냐 문제였습니다. 이게 아마 통합측에서도 통합과 합동이 갈라진 것이 이러한 1969년 WCC문제였을 겁니다. 세계교회협의회, 이게 에큐메니칼 운동이고 제3세계, 그런데 관심을 많이 갖는 운동이어서요. 한국교회에서 정서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나와야 한다. 탈퇴해야 한다하는 성결교회 사람들이 있었고 그럴거 있냐  남아있자하다가 결국 갈라졌습니다. 이렇게 교단이 갈라지는 것보다는 같이 탈퇴하자. 그래서 같이 탈퇴했는데 결국 갈라졌어요.

저는 이 기성에 속해 있습니다. 저는 사실 신학을, 서울 신학대학을 졸업했기 때문에요. 시기성이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입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1년 재수했습니다. 일반대학에 실패했고요. 그전에 고등학교 다니면서 신학교도 생각을 해봤는데 구체적으로 누가 끌어 주는 사람도 없고 막연하게만 생각하고 있다가 재수하는 과정에서 이런 저런 여러 가지 이유에서 가게 되었는데. 이건 제가 말할 생각이 없었는데 쓸데없는 말까지 끄집어냈군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이 신학교를 갈 때는 뭔지 모르고 갑니다. 그러니까 그게 진보적인 신학교인지, 보수적인지 온건한지 어떤지 전혀 모르고요. 자기가 다니는 교회 담임목사가 추천하는 데를 갑니다. 제가 성결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거기 목사님의 추천으로 서울신학대학을 들어간 거죠. 기성이 어찌되었던 굉장히 보수적인 데입니다. 그러나 제가 일반적으로 같이 활동하고 있는, 이 대구 경북지역에서 같이 활동하고 있는 목사들 관계는 대개 좀 진보적인거죠. 그래서 인권위원회 같은데요. KNCC입니다. 인권위라고 있어요. KNCC는 WCC와 연관된, 한국 기독교 협의회를 KNCC 라고 하거든요. 거기에 인권위에 속해서 오랫동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또 목협이라고 있습니다. 목회자 정의 평화 실천 협의회의 약자입니다. 양쪽다 한국을 대표하는 진보적인 진보단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결교회 목사가 이런데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왜 거기에 들어갔느냐 하는 것은 글쎄요. 왜 거기 들어갔을까요? 어쨌든 이런 저런 연유로 해서 들어가게 되었구요. 또 저의 신학적, 신앙적 정서에 당연히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들어가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여기에 부회장 인가 이런 것 등등 하고 있어요. 이미 인권위 대표 회장 할때도 지났는데 고사를 했습니다. 할일도 많은 데 책임을 맡으면 시간이 많이 들어가거든요. 미안한 마음으로 사실은 무거운 짐인데 다른 사람들에게 일임하고 그냥 이름만 걸어 두는 정도로 그러나 필요하면 같이 참여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뿌리는 기성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굉장히 진보적인 단체에서 활동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 조금 실망되는 부분들이 있는 거죠. 이 진보에 있다고 하는 분들이 아... 뭐라고 할까요. 다는 아니지만 상당한 부분에서 당파성을 뛰어넘지 못합니다. 당파성이요. 이거 당파성이라고 해야 하나? 자기파, 자기의 계열이라고 할까요. 민주노동당에서 평등파하고 또 뭡니까? 해방파인가요. NL과 PD, 무슨 뜻이죠. 그 사람들이 나눠지는 것 처럼 진보적인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똘레롱스가 더 많아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역사의 진보, 미래를 내다보고 일치를 내다보고 한다면 작은 차이는 극복해야 되는데 이상해요. 이걸 극복하지 못하더라구요. 물론 보수적인 사람들도 어쩌면 더할지도 모르죠? 한국 교회 교파가 백 몇십개로 갈라져 있는데 갈라져 있는 사람들이 거의 다 보수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예장 합동측으로부터 시작해서 주욱 그쪽으로 나가게 되죠. 보수는 말할 것도 없고 진보라고 한다면 본인들이 크다고 할지 모르지만 제3자가 볼때는 별로 결정적인 차이라고 볼 수 없는 차이를 넘지 못하구요. 그 안에서 알력관계가 많구요. 사실 진보인사들이요. 제가 진보쪽에 있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제 얼굴에 침을 뱉는 건데, 여기서 조금 제가 정서적으로 이런 문제는 극복되어야 되겠다 싶어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진보적이라고 한다면 훨씬 더 관용을 갖고서 문제들을 풀어 나가야 하는데 그런 정신들이 약하다 하는 것이 있고 하나는 이것도 다는 아닙니다만 말만 진보지 그 중심은 전혀 진보적이지 아닌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제가 잘 알고 있는 K모목사라 하겠습니다. 한국에서도 알아주는 그러한 민주투사,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지역대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요. 그분이 어떤 새마을 금고 있죠. 거기에 이사장을 좀 하셨어요. 이렇게 하면 너무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 같은데. 아, 예 그래도 괜찮습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존경하는 분이구요. 그러나 진보의 문제를 말하기 위해서 예를 들은 거구요. 개인적인 감정은 전혀 없고요. 사람의 한계들을 제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보냐 보수냐 이런 것 자체가 결정적으로 그 사람의 옳고 그름을 판단을 해주는 근거는 아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새마을 금고 이사장을 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작년의 새마을금고 여 사무원들을 정규직해서 비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그 방식으로 인건비를 많이 절약해서 작년 1년동안 순수익을 많이 올렸다. 10억인가 얼마 올렸다. 수년전 이야기입니다. 당사자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말씀을 듣고 마음속으로 좀 불편했습니다. 진보라고 하면 늘 안에서나 밖에서나 그러한 인간의 정의 평화, 인간의 인간다움을 위해서 그런 것을 위해서 투쟁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이거든요. 사회를 향해서는, 남을 향해서는 정의롭고 평화롭고 비정규직 다 해라 해놓고서는 자기 이권에 걸린 문제에 가서는 여전히 또 비정규직형식으로 인건비를 낮춘 것에 대한 것을 자랑할 수 있다고 하는 것, 이게 안과 밖이 다르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 것 많습니다. 사회에서는 정의 평화를 외치면서도 진보인사이면서 목사인 분들이 집에 들어가서는 아주 가부장적인 것을 많이 하거든요. 사회 민주화를 부르짖으면서 집에 들어가서는 아내에게 폭군처럼 행동하냐 하는 거죠. 그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작은 그러한 차이들을 극복하지 못하는 이런 것, 어디에 문제가 있냐 그런 것들 때문에 같이 연대하면서도 인간의 한계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뭐 그분들을 근본적으로 불신하는 것은 아니고 ‘아 그게 인간의 한계다. 그래도 좋은 뜻을 갖고 역사 진보를 위해 활동하면 좋다’ 그런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진보신학의 비판적 성찰’이라고 하는 글에서, 이건 저의 실존적 고백에서 나오는 거죠. 민중신학이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은 민중 메시아니즘이라고 하는 거예요. 메시아니즘. 내 생각에는 도대체 이게 말이 되냐 하는 거죠. 이건 뭐 신학적으로도 그렇고 그 현실적으로도 그렇고. 민중이 역사 진보의 주체가 과연 될 수 있는가 하는 그러한 질문입니다. 네 지금 선거를 앞에 두고 있는데요. 이명박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지난번에. 총선을 하게 되었는데 이게 바로 대한민국 민중들의 현주소이거든요. 그러니까 민중은 제가 보기에는 결코 역사 진보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민중이나 그렇지 않는 사람이나 민중이나 엘리트나,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야기한다면, 다 인간일 뿐이예요. 제가 보기에는 인간입니다. 인간인 민중을 이상화함으로서 기독교 메시아니즘을, 제가 보기에는, 세속화했다. 제가 지적한 것거구요. 성서가 보는 인간, 인간이 죄인이라고 하는것, 용서받아야 되고 스스로 의로워 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음으로 의로움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이러한 기독교의 기본적인 그러한 도그마가 훨씬 더 인간에 대한 바른 이해이기도 하고 아주 심층적 이해에서 나온 것이 아니냐는 생각입니다. 그런 칭의론은 마틴 루터, 칼빈, 바울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의 기본적인 신앙이거든요.

네 그렇습니다. 선거를 앞에 두고 도대체가 우리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선거해야 되느냐 말할 거리가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다비아에 젊은 친구들이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한 고민하는 글을 올리고 하는데요. 저도 하고 싶은 생각은 많이 있는데 다물고 있습니다. 조금 별로 희망적이지 않기 때문에요. 기독교 신앙은 비관론, 죄론을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에 인간에 대해서는 비관론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을 본다는 면에서 낙관론이죠. 그러니까 비관론과 낙관론이 교체하고 있습니다. 인간만 본다면 어디서도 희망을 찾아내기 힘들고요. 저는 그런 점에서 민중신학에 대한 비판을, 왜 민중들에게 희망을 거냐? 이러한 이야기죠. 민중을 의식한다거나 돕는다는 것은 당연하구요. 민중신학을 말할 필요도 없이 그냥 목회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서 충분합니다. 굳이 민중이라고 붙일필요도 없구요. 민중신학이라는 말을 붙이자면 민중 메시아니즘을 근거해야 하거든요. 민중이 구조적으로 주체적으로 메시아역할을 할수 있다는 그런 이야기거든요. 이게 과연 가능하냐? 제가 보기에는 안 된다. 오히려 성서, 고대 2천 년 전에 성서가 말한 거지만 구약성경까지 말하면 3천년전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훨씬 더 더 심층적인 Anthropology라고 저는 생각이 됩니다. 이런 민중을 안고 있는 교회, 지금 제가 목회자니까요. 교회를 생각하는 점에서요.

민중은 기회에 따라서 자기에게 유익하면 부도덕한 대통령도 선택합니다. 사실은 이렇게 말해서 미안합니다만 이명박 대통령의 한두가지 일만보더라도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대통령이 될 수 없잖아요. 실증은 없더라고 하더라도 심증은 다 간거 아닙니까? 정치적인 이야기는 제가 할 필요가 없는데 그러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한다는 것은 대한민국 민중들이 공범의식이 다 깔려 있는 거죠. 그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걸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거구요. 또 졸부근성, 나쁘게 이야기해서도 벼락부자 되는 방식, 대통령이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전 그런 가능성이 있지 않느냐 하는 그러한 대중심리에 의해서 움직인 것 같습니다. 그런 민중들이 교회 구성요소예요. 그런 분들, 제가 지금 그런 세속적이고 물량적이고 이기적이고 가족 이기주의에 빠져있고. 그렇게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게 저도 거기서 크게 다를 것 없구요. 이게 현실이다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죠. 이런 방식으로는 민중, 저를 포함한 이러한 민중들에게서는 구원의 가능성이 나오기는 힘들고요. 교회 스스로도 구원의 공동체로서는 불가능합니다.

민중신학하고 자유주의 신학있지요. 이게 뭐 조금 다르기는 합니다만 홍정수 목사, 교수님 맞죠? 베짜는 하나님 쓰신 분. 민중신학하고 다르기는 하지만 감리교는 조금 더 종교다원적인 종교다원적이기 보다 하여튼 아.. 도착화 종교다원성 뭐 그런 것을 강조하니까 그런 성향이 강하구요. 한국 신학대학은 민중신학이 강하구요. 그런게 다르기는 합니다만 정통신학을 극복하자고 하는 점에서는 비슷한 방향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유주의 신학 홍정수 목사님들에게서, 그들이 보이는 태도와 근본적이고 보수적인 대중적인 목사들 있잖아요. 근본적이고 보수적인 이분들이 보이는 행태가 제가 보기에는 비슷합니다. 어떤 점에서 비슷하냐 하면 양쪽이 다 populism 이에요. 홍정수 목사님 이러한 쪽에 있는 분들도 기독교 정통신학이 뭐 중요하냐? 청중들이 원하는 것이 바로 구원의 메시지다. 그렇게 합니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한거죠. 민중들, 대중들이 원하면 소비자가, 이들에게 종교 소비자가 중요한 거죠. 소비자가 왕이죠. 소비자 맞춤형의 기독교로 나가는 것, 그게 바로 그들이 원하는 겁니다. 이분들이 상당히 정통교회를 비판하지만 그러나 내면에 작동하고 있는 그 기제라고 할까요? 심리적 기제라고 할까요? 제가 보기에는 틀린 것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열린예배 그런 등등의 미국식의 값싼 실용주의적인 기독교가 얼마든지 얼마든지 그거는 수용됩니다. 그쪽으로 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근본주의적, 보수주의 다 그렇지 않죠. 여기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기 때문에. 그러나 대중적인 교회를 제가 말씀드리는거예요. 포퓰리즘. 명성교회 등등. 이분들에게서 양쪽 다 극과 극인 것 같은데 사실은 포퓰리즘이라고 하는 것은 똑같다. 민중에게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죠. 그들이 요구하는 것에 약간 전혀 다른 것 같지만 결국 같은 것을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양쪽 다 복음이 상품이 되는 거죠. 상품포장만 잘하면 잘 팔릴 수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책도 상품이 되버리고 있습니다. 여담입니다만 독일에서 나오는 신학책들은 표지가 단순합니다. 그냥 붉은 색이나 갈색이나 정말 촌스럽게 나옵니다. 판넨베르크 책도 다 그래요. 제가 지금 보여드릴까요? 다른 책장에 갖다 두었는데요. 아무래도 하나 보여드려야 되겠네요. 판넨베르크 거는 다른데 있는 것 같구요. 있네요. 판넨베르크 제가 번역한 책인데요. 보세요. (독일어로 !!!) 요렇게 생겼습니다. 문고판이죠. 몰트만의 하나님의 오심, 다스 코멘 코테스. 안보여요? 이거 안보이세요? 이상하네? 아 또 멈췄어요. 하 그거참 이상하네. 기다려 보십시오. 이따가 다시 보여드릴께요. 몰트만의 이 책, 제목이 다스 코멘 코테드, 하나님의 오심, 부제는 크리스테스 에트트로기(?) 그리스도론적 종말론. 몰트만을 세계적 신학자의 반열에 올려놓은 대표저작이 희망의 신학이죠. 그거은 희망의 철학자의 책, 희망의 원리라는 책을 읽고 신학적 대안으로 그 책을 썼습니다.

네, 그거 여러분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은 뭐를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까? 그것도 좋은 책입니다. 종말론입니다. 이 막시즘. 이것도 종말론이거든요. 누가 애기했는지 모르겠지만 막시즘, 이것을 세속화된 기독교의 종말론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마지막을 향한 어떤 이야기들이거든요. 성서는 이미 그런 것을 이야기하고 있구요. 2천년동안 계속해서, 물론 종말론이 2천년역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질 때도 있고 조금 약간 소홀히 다뤄질때도 있었습니다. 교회가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을때는 종말론이 조금 약화되었습니다. 교황청을 중심으로 탄탄한 체계를 가지고 있는 질서로서의 교회라고 한다면 종말 어쩌면 오지않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죠. 도스토에프스키의 책, 카마라조프의 형제들에서 나오는 심문관 등에서 그런 것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교회와 종말론은 사실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데 현실에서 본다면 교회가 막강해지면 종말론이 약화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종말론이 없잖아요. 있어봐야 다미선교회가 이야기했던 휴거, 그런 방식의 종말론 굉장히 뭐라고 할까요? 시한부종말론이라고 이야기하고요. 신화적 종말론, 그런데 머물러 있을 뿐이지. 건강한 종말론은 한국교회에 지금 실종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종말론이 들어올 틈이 없어요. 교회론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도 건강한 교회론이 아니라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된 방금 제가 예로 말씀드린, 도스토예프의 카마라조프의 형제들에게서 나오는 대심문관의 그 동방정교회처럼 재림한 예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