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313 기독교가 뭐꼬? 10강 - 구약성서와 히브리즘

당연히 어떤 제목이 올지 예상할 수 있겠지요. 신약성서와 구원의 보편성,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구약성서의 핵심은 히브리즘이라고 보았구요. 그거를 우리가 생각하려고 해도 많은 공부가 필요하겠습니다만 어쨌든 히브리즘, 시오니즘이라고 할 수도 있구요. 거기에 바탕을 둔것이라고 한다면 신약성서는 민족적이고 제한적인 그러한 구원과 메시야관으로부터 보편적 세계로 뚫고 나가는 그러한 생각을 신약성서가 담고 있습니다. 그렇게 나누는데요. 오늘은 구약성서와 히브리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를 기독교인들이 왜 읽어야 될까요? 초기 기독교에서도 구약성서를 기독교 경전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요청이 많았어요. 간단히 생각해 보십시오. 사실은 여러분들이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겠습니다만 구약성서를 기독교 교회에서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님 십자가 죽음 부활 그 이후에 천천히 형성되었는데 그들에 의해서 신약성서는 그 안에서 만들어 졌습니다만 구약성서는 그들이 읽기는 했습니다만 그들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 아니라 유대교에 의해서 결정된거예요. 그게 앞서서도 한번 우리가 짚은 거라 봅니다만 우리가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에 관계를 자칫 오해할 수 있는 근거도 됩니다. 보통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기는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다는 거죠. 더구나 예수님을 유대교의 종교 지도자들이 로마와 합작하여 십자가에 못 박은 것으로 알고 있구요. 그렇다면 기독교와 철천지 원수 관계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데 이러한 모순이 있습니다. 이러한 두가지 다 유대교와 기독교를 이해하는데 들어와 있습니다. 모순되는 것인데 들어와 있습니다.

유대교인들이 자기들의 경전으로 정확하게는 기원후 90년에 결정되었어요. 강의안에 그대로 나올 것입니다. 기원후 90년이네요. 90년이 중요한 해이네요. 얌니야 회의가 있었습니다. 이때 구약 39권이 유대교의 경전으로 결정되었어요. 조금 재미있지요. 예수님 당시에도 구약성서가 있었는데요. 오랫동안 유대인들의 구약을 읽었을텐데 왜 90년대에야 경전이 결정되었을까요? 그 이전까지는 흩어져 있었습니다. 주로 모세오경 토라는 가장 권위가 있는 성서로 받아들여졌지만 그 뒤의 예언서는 그보다 비중이 낮구요. 성문서는 훨씬더 비중이 낮아요.

이런 말이 됩니다. 예수님, 십자가 부활 승천이후 예루살렘 마가다락방에서 조금씩 모임을 갖기 시작하고 천천히 초기 기독교가 서서히 모양을 갖추게 되었는데요. 오랫동안 최소한 40년 가까이 별 충돌 없이 오누이처럼 그 안에서 잘 지냈습니다. 그런데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서 완전히 함락된 다음에 유대교가 종교적 내적 통일성을 갖추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율법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있었던 나사렛파들에게도, 우리로 보면 원시기독교죠.  그들에게 너희들도 율법을 더 지켜야 된다고 강조를 했습니다. 그 요청 앞에서 원시기독교가 고민을 하게 된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복음, 이것이 중심인데 예루살렘 기독교 공동체의 모두가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율법을 그대로 지켰거든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원시 기독교와 이방인 기독교와 계속 충돌이 있었구요. 갈라디아서 공부를 할 때도 나왔던 거구요. 사도행전공부에도 그런 흔적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자리를 잘 잡아야 하는데 고민을 한 거죠. 유대교가 요구하고 있는 율법에 더 비중을 두면 이방인 기독교와 관계가 더 껄끄러워지고요. 만약에 유대인의 요청을 거절하게 되면 유대교로부터 압박이 오구요. 그 압박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핍박하듯이 노골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유대교와 관계가 점점 멀어지게 되는겁니다. 이 말은 곧 로마로부터 종교적인 어떤 도움, 방패막이를 전혀 받을 수 없다고 그런 이야기거든요.

애기한 것을 다시 한 번 반복한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90년이 중요한데요. 얌니야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제 유대교를 강화하는 해인데 구약성서를 정경화하고 기독교가 한참후에 받아들인 것 뿐이거든요. 그것도 4세기후반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놓고 보면 기독교가 오랫동안 체계 그러한 분명한 것이 없이 지내왔다는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지금은 여러 가지 면에서 경전도 있고 교리도 있구요. 여러가지 신학도 발달하구요. 말하자면 기독교의 실증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지 않습니까? 노회다 총회다 있는 것처럼요. 물론 그런 것들이 초기 기독교에도 있었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경전이 겨우 4세기 말에 결정되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체계라고 하는 것들이 그렇게 명백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수 있겠습니다만 어떤 종교든지 세월이 지나가야 체계가 잡혀지기도 하구요.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 당시 기독교가 구심점이 사실 없었다고 봐야 될겁니다. 로마에서도 한 중심이 있었구요. 여러 학파가 있는거죠. 제가 그것을 다 머리속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 지역별로 각각의 공동체의 중심점이 있었습니다. 그 사이가 종적으로 된 것이 아니라 횡적으로 있었어요.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로부터 그리스에 있는 교회들이 별로 영향을 받지 않구요. 복음이 북아프리카 쪽으로도 많이 갔는데요. 거기서도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있었어요. 그들도 강한 기독교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거든요. 여러 학파들이 서로 팽팽하게 세력 균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그걸 하나로 묶어서 체계를 이룬다고 하는 것이 만만치 않았을 겁니다. 경전을 서로 다른 것을 사용하고 있었거든요. 로마에서는 어떤 것, 알렉산드리아, 안디옥에서는 어떤 것, 서로 자기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룩한 문서들을 따로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다 취합해서 경전, 캐논이죠. 캐노나이제이션을 만드는 것은. 개신교가 200개 교단이상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묶기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초기 기독교회에도 그러한 형편에 놓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90년의 얌니아 회의를 통해서 경전이 된 구약성서를 기독교가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게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기독교와 분명히 반대되는 것인데 왜 그것을 받아들였냐 하는거죠. 그래서 초기 기독교에서 그것을 내쳐야 한다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대표적으로는 마르시온이라고 하는 사람이었는데요. 이단이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이단은 크게 다른 것이 아니라 부분에서 좀 차이가 있었는데요. 마르시온이 주장한 것이 무엇인가는 인터넷을 열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20세기죠. 1900년대에 베를린에서 교회사가로 활동하던 하르낙 이런 사람들이 구약을 기독교 경전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런 것을 보면 계속은 아니었지만 심심치 않게 이런 주장들이 제창되었습니다.

어쨌든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의 경전을 그대로 받아들였는데 그것은 예루살렘교회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어렸을때부터 보았던 것이기에 자연스럽구요. 이방인 기독교라 하더라도 그들이 유대인들은 아니지만 그들이 구약성서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토라와, 예, 고거를 혼동하지 말아야 하겠군요. 토라라고 갈라디아서에서 공부할때 나오는 토라와 할례, 이방인 기독교가 바울을 중심으로 아주 적극적으로 방어를 했어요. 그것을 배격을 했습니다. 그런데 토라가 보통 모세 오경을 이야기하는데요. 그러나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토라하고 초기 기독교가 그대로 받아들였던 모세오경하고는 다른 의미라고 봐야 합니다.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토라는 주로 율법이라고 할 수 있죠. 고 부분이 참 미묘한 것 같습니다. 제가 거기에 대해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없네요.

이방인 기독교라 하더라도 그러면 바울의 이방인 기독교하고 바울만 거기다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이방인 기독교와도 차이가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로마서 같은 것은 바울이 사실은 바울이 한번도 로마에 가보지않는 교회에 쓴 편지거든요. 자기가 설립한 교회가 아니잖아요. 대표적인 교회이잖아요. 이방인 교회가 바울이 가기전에 세워졌어요. 안디옥 교회도 이방인 교회라 하지요. 그곳을 거점으로 해서 복음이 유럽쪽으로 확장되었는데. 물론 안디옥교회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반반씩 섞여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안디옥 교회도 바울이 설립한 교회가 아니었거든요. 이미 거기에도 예루살렘의 성지순례를 왔던 이방인들이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세운 교회예요. 이방인 기독교라 해서 다 바울이 세운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세운 사람에 따라 생각이 다를 수 있구요. 그리고 도 기독교가, 이방인 기독교죠.  예루살렘 기독교는 얼마 있다고 금방 없어졌으니까요. 그들이 상당히 영향을 끼치기는 했을거예요. 어쩌면 지금 말하다가 막 여러가지 생각이 섞여져서 좀 혼란 스러운데요. 그래서 방향을 잡아 나가야 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공부를 하다보면  예루살렘 공동체하고 갈라디아 지역에 교회를 세운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싸우는 것이거든요. 갈라디아교회라는 여자를 두고 두 남자가 삼각관계를 이루고 있는 상태다. 서로 자기들이 옳다고 싸우고 있는 배경속에서 바울이 자기 입장을 진술한 것이 갈라디아서인데요. 예루살렘에 있는 지도자들은 쟁쟁한 사람입니다. 베드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예수님의 제자 요한 등등, 하여튼 예수님 측근들이 다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일당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게임은 안되죠. 당시 게임은 안되었어요. 실제적으로 바울은 밀렸어요. 자기의 선교지도 다 놓치고 다른쪽으로 가게됩니다. 갈라디아 지역도 바울이 교회를 세우기도 했습니다만 결국은 버티지 못하고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지금의 그리스죠, 그 쪽으로 쫓겨 가게 되거든요.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마케도니아 사람이 환상속에 나타나서 우리를 도우라 하는 말을 듣고 바울이 배를 타고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유럽으로 건너간다는 이야기가 있죠. 그것은 굉장히 아름답게 꾸며진 이야기인데요. 실체적 진실은 바울이 갈라디아, 지금으로 말하면 터어키에서 선교지 확보 싸움에서 진거죠. 밀린거죠. 그런 것을 놓고 본다고 하더라도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의 이 발언권이 어떤 기간 동안에는 아주 강력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요구들이 비록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가 유대교회에 혼합되고 70년 이후로, 율법의 요구와 강요가운데서 점점 쇠락해 갔지만 그러나 그들의 요구가 바울이 예상하지 못한 정도로 초기 기독교에 상당히 많이 영향을 끼친 것 같습니다. 바울도 아마 그것을 예상하지 못했을 거예요. 어쩌면요. 제가 드리는 말씀이 어떤 학문적인 근거를 두고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가 제 머리속에 실타래처럼 헐크러져 있거든요. 거기서 한가닥 실머리를 찾아가면서 풀어내고 있는 중입니다. 아마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도 있을 것 같애요.

제가 왜 지금 이런 말씀을 드리냐 하면 바울이 유대교의 흔적을, 사실은 교회에서 다 일소 시킬려고 그렇게 노력을 많이 했거든요. 부르짖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교 경전, 보통 우리가 토라라고 하는 것, 두가지 의미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율법이라고 하는 것이 토라. 근본적으로는 구약성서 모세오경에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연결되는 것이거든요. 그렇게 적극적으로 배제했던 바울인데요. 결과적으로 보면 초대교회가 유대교회의 그것들을 다 그것을 수용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냥 형식적인 교회라고 하는 점에서는 바울의 승리죠. 예루살렘교회공동체는 역사에서 다 실종되었으니까요. 그리고 바울이 세운 이방인 기독교가 결국 주류가 되었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적으로 보면 이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성서를 그대로 오랫동안 사용하고 결국은 경전으로까지 받아들여졌다고 하는 그 점에서 본다면 예루살렘 공동체의 지도자들의 말이 결국은 초기 기독교안에 크게 자리 잡은 게 아니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말이 너무 어수선했죠?

네. 하여튼 고 유대교의 경전을 초기 기독교가 받아들였다고 하는 고 맥락을 제가 조금 설명한데요. 거기에는 간단히 우리가 한 두 마디로 끝낼 수 없는 여러 가지 사연들이 담겨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전제해야 됩니다. 요 부분에서, 그러니까 구약성서를 기독교가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다른 것들은 그런대로 넘어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메시야 개념이라는 차원에서 우리가 이해되지 안 될 때가 많이 있는겁니다. 유대교인들하고 우리하고요 메시아니즘에 대한 이해가 결정적으로 다르잖아요. 유대교인들은 구약성서에 근거해서 나름대로의 고유한 메시아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들과는 실제와는 다른 메시아를 믿고 있지 않습니까? 같은 구약성서를 받아들이면서, 유대인과 우리들 사이에 왜 메시아에 대한 이해가 다르냐 하는 거죠. 여전히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유대인들의 구약성서 해석이 옳은가? 아니면 나사렛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있는 우리의 구약성서 해석이 옳은가? 둘 다 똑같은 구약성서를 갖고 있는 상태에서 다른 메시야관이 있기에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왜 다른가? 그들이 잘못됐고 우리가 옳은가? 그들이 틀리고 우리는 옳은가? 아니면 둘 다 틀리거나 둘 다 옳은가? 이런 거죠. 요 단락에서 제가 내린 결론은 둘 다 옳다 입니다. 유대인들의 해석도 옳고 우리도 옳다. 그런데 왜 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고 우리는 믿느냐? 예. 그럴 수 있습니다. 아... 그거를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요?  뭐 제가 자신이 사실 있지는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보죠. 자신들의 시오니즘에 근거해서 예수가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 지평과는 다른 정치적 민족주의적 메시아니즘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들로서는 그게 최선이죠. 그런 범주안에서 예수와 적대적으로 행동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요 말도 제가 조금 교정해야 될까 모르겠습니다. 유대교가 정말 예수와 적대적이었는가 확신이 요즘 점점 약해져요. 앞서 애개한 구약성서를 초기 기독교가 그대로 받았들였다고 하는 것을 전제한다면 유대교가 예수를 적대적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 나오는대로 베드로가 늘 예루살렘 성전을 드나들었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의 개연성이 아주 높은건데요. 그렇다면 유대교가 예수, 자기 선생 예수를 적대적으로 대했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거던요. 그러나 복음서에 보면 바리새인들을 중심으로 해서 서기관들도 그렇고 제사장들도 그렇구요 다 예수님과 적대적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절대적으로 제사장들이 역할 을 하거든요. 왜 그랬을까요? 그 부분도 우리가 생각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유대교가 예수님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겠지만 그거을 복음서가 그려주고 있는 대로 그만큼 적대적이지 않았을 가능성은 높습니다. 그런데 복음서가 그렇게 묘사했는가 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거든요. 아마 초기 기독교 당시에 그런 방식으로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될 어떤 사정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문제는 조금 복잡해서요 제가 아직 정리되지 않는 것을 더 이상 말씀드릴 수 없겠네요.

유대교가 예수님에게 적대적이지 않았다고 하는 제 말은 오프더 레코드입니다. 바깥에 나가서는 하지 마세요. 확실하지 않으니까요. 그런 반면에 그게 인제 그들의 입장에서는 유효하다. 반면에 예수는 민족주의적 히브리이즘과는 달리 보편적인 측면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민족적인 메시아니즘, 오자가 나왔군요. 이라는 범주를 뛰어넘은 것이다. 제가 제 책에도 좀 고치겠습니다. 메시아. 네 되었습니다. 고런 정도 설명으로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여기서 유대인과 초기 기독교 사이의 하나님과 구원에 대한 해석에 패러다임이 달랐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요 제가보기에 이 히브리즘과 Christianity는 서로 지평을 달리하는 거예요. 일단.  유대교인들은 히브리이즘은 제국 틈바구니에서 생존이라고 하는 렌즈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했던 반면에 기독교는 그것을 뛰어넘는 거거든요. 세계 보편적, 하나님 나라를 향한다고 하는 지평이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잣대로 상대방을 단죄하거나 재단하거나 매도하거나 이런 일들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범주, 유대인들이 이해하는 생명과 하나님과 세계라고 하는 그러한 범주, 우리가 생각하는 범주에서 각각 최선인 것을 단순하게 비교해서 한쪽이 한쪽을 비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거죠. 그런 말들이 너무 기독론적으로 애매모호하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단이라 그렇게 말할 수 있었죠. 이단이다 아니다 그런 것으로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구요. 접어두겠습니다.

오늘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성서를 공부하는 것이니까요. 이렇게 비유적으로 설명했습니다. 현대 물리학적 관점에서 뉴턴의 고전 물리학을 바라보면 적지 않는 오류가 발견된다. 그렇다고 해서 뉴우턴이 인류 역사사아 가장 뛰어난 물리학자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아닌가. 구약과 유대인들로 비교한 겁니다. 현대 물리학도라 하더라도 뉴턴의 물리학적 기초를 뛰어넘으면 안되고 배워야 되는 것처럼 기독교인들도 역시 새로운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를 해석하기 시작했다 하더라도 유대인들의 구약성서를 배척해서는 안되고 반드시 읽고 배워야만 된다. 히브리이즘의 영적 곡간으로서 기독교인의 신앙을 풍부하게 하는 구약성서를 초기 기독교가 받아들인 것은 당연하고 잘된 선택이었다. 김용옥 선생, 도울 김용옥선생이 구약을 기독교인들이 버려야 된다고 그런 이야기를 하신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할 수는 있겠죠.

본격적으로 구약 성서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될텐데요. 오늘 본문, 구약성서가 세 구조로 나눠져 있습니다. 토라와 예언서와 성문서입니다. 예언서는 전기 예언서와 후기 예언서로 나누거든요. 후기 예언서도 다시 인제 대예언서와 소예언서로 이렇게 나눕니다. 전기 예언서는 예언자들의 활동에 대한, 예언자들과 왕정 중심의 역사 서술이라고 한다면 예언서는 전기 예언서가 사실은 이스라엘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후기 예언서는 말 그대로 예언자들의 설교인거예요. 이 둘을 예언서라고 합니다. 전기 예언서는 예언자들의 활동이고 후기 예언서는 예언자들의 설교입니다. 예언자들의 설교도 큰 설교, 부피가 큰 게 있고 작은 열두 소예언서 이렇게 나눕니다. 나중에 구분을 하겠구요. 오늘은 이러한 자세한 내용에 들어가지 않겠구요. 구약성서, 개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야기할 때 도대체 무슨 뜻이냐 하는 것이죠. 말씀, 말이거든요. 하나님의 말, 하나님이 말을 하실까요? 생각해 보세요. 보통 구약성서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직접을 말을 거는것 처럼 나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에 내가 너에게 지시할 어느 땅으로 가라 등등. 아브라함만 아니라 모세도 그렇고 많은 영적 대가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말을 들은 걸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말씀하실까요? 언어라고 하는 것 생각해 보십시오. 말을 했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음성학 소리를 통한 말씀이겠어요? 그것은 아니겠죠.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입이 있겠어요? 뭐가 있겠어요? 그러한 말은 아닙니다. 그래도 우리가 하나님이 말씀한다고 말하잖아요. 창조 사건에서도 빛이 있어라하는 말씀으로 빛이 있었다고 해요. 빛이 있었다고 하는 이 아포리즘을 뒤에서 제가 해석하게 될텐데요. 구약성서에서 중요한 한 대목이기 때문예요. 그 방향만 집는다면 보세요. 빛이 있으라는 말이 언어가 성서에 의하면 창조의 힘이예요.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론이기도 합니다. 언어, 다바르라고 하나요? 히브리어로. 로고스 우리가 보통 많이 알고 있는 헬라어로는 로고스입니다. 요한복음에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빛이 있었고 세계가 만들어졌다고 하는 겁니다. 말은 곧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론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는 그 자체거든요. 그 실체, 보통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시 말씀 드릴께요. 하나님의 존재론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어떤 힘이 개입해서 변화시키지 못하는 어떤 궁극적인 것, 그거를 존재다 라고 하잖아요.  하나님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러쿵 저렇쿵 하는 것은 그것은 존재론이 아닌거예요. 변화될 수 있는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체, 어떤 것으로 변형될 수 없는 그 참된 하나님의 모습을 존재론이라고 한다면 말, 언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다. 하이데거가 이야기한대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이야기하잖아요. 하이데거가 신학자는 아닙니다. 그리고 자기는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신학은 철학보다는 자연과학에 가깝다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신학은 오히려 실증적인 것을 이야기한다고 하는 것이죠. 그러나 철학은 실증이 아니라 존재를 말하기 때문에전혀 차원을 달리한다고 말합니다. 자기가 말하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에서 하이데거의 존재는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고 그 스스로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그가 말하는 존재는 기독교의 성령론, 신론하고 다를 게 하나도 없어요. 그건 그렇고. 말이 언어, 이것이 서양철학의 영향, 서양철학이 바로 거기에 근거하고 있기는, 다 연관됩니다. 하나님의 존재론이다. 창조의 힘이다. 창조의 힘도 사실은 하나님이거든요.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이해를 조금 더 열어놓고 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실체론적 존재로 자리잡고 있어요. 옥황상제라든지 산신령처럼 실체로 Substance 라고 한다는 실체로 있어서 체스하듯이 바둑 두듯이 놓는 것처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머물러 있는한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에게 이해하기 힘들겁니다. 제가 여기 하나님의 존재론을 이야기하는 것도 그런거예요. 우리는 자꾸 하나님을 규정하려고 하거든요. 일단 규정되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예요. 이렇게 말하다보면 도덕경에 나오는 도와 비슷하네요. 하나님을 규정해 보면 더 이상 하나님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존재론적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거죠. 하나님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규정이 가능한 거죠. 그래서 기독교 신학은 근본적으로 계시론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낼때만 우리가 아는거예요. 우리가 머리를 굴려서 인식의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연구해 내는 것이 아닙니다. 큰 착각이에요. 신학은 뭘 연구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을 제가 말씀드립니다. 제가 생각한 것은 아닌데 말하다보니 그렇습니다. 우리가 뭘 연구해서 자연과학자들이 연구해서 원리를 발견해내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연구해 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드러내는 거예요. 그것을 계시라고 하는겁니다. 드러내는 그것에 우리가 반응하는 것이예요. 그게 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진술에서 주도권은 하나님에게 있는거요. 그게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는 신학자들이 연구해서 하나님을 더 많이 알아내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알아내는 거는 곧 없어져요. 그런 것은 진리, 기독교가 말하고자 하는 진리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고거는 내가 더 이상 설명하기는 힘드네요.

하나님은 하나님 스스로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인식되는 분, 그 분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다는 개념 규정을 내리면 이미 그 하나님은 그 하나님이 아니다 라는 것이죠. 모세가 호렙산에서 자기에게 소명을 주신 하나님을 향해서 나를 부른 분을 누구라고 백성에게 이야기할까요 했을때 스스로 있는 자라고 했거든요. 그 말이 바로 그런 분을 말하는거예요. 어디 의존하지 않고 자기존재 근거를 자기 안에 가지고 있는 그런 분, 그런 분은 그분 밖에 없는거죠.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분의 생각을 모르고 토기장이와 토기처럼, 토기가 어떻게 토기장이의 뜻을 다 알 수 있겠어요. 그저 그렇게 만들어진 자기의 소임을 감당할 뿐이죠. 전혀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모세가 하나님에게 들은 하나님 이름, 신명, 나는 스스로 있는자다 I am tha tI am. 어떤 신학자에게서 규정될 수 없는 그런 하나님. 그런 점에서 신학은 끝나지 않는 작업이예요. 당연하죠. 하나님은 자기를 드러내는 것 만큼 그 계시에 대해서 자기를 민감하게 반응하는 작업을 신학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종말까지 계속해서 그런 작업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태까지 신학자들이 말했다는 하나님은 아주 일부예요.

말이 옆으로 많이 지나갔습니다. 하나님은 언어 존재론 적인 차원에 보면 언어로 존재하십니다. 그 말이 우리가 말하는 이러한 말은 아닌거예요. 그냥 창조의 힘, 생명의 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언어라고 하는 것을 그렇게 축소시키지 마십시오. 그거는 우리의 커뮤니케이션 안에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거는 더 근원적인 힘을 갖고 있습니다. 언어 철학에 있는 분들은 이렇게 이야기하네요. 나무가 있기 전에 이미 나무라고 하는 말이 있었다는 것이죠. 나무라고 하는 말을 통해서 인간이 인식하게 되고 그 인식을 통해서 볼때 그 나무가 보인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도 뭐 언어 철학을 잘 모르는데 하여튼 그러한 이야기로 언어를 이야기하는데요. 오늘 여기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했다고 하는 것 또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하는 성서의 진술을 놓고 본다고 하더라도 그 말은 말이 되는거예요.  

다시 한번 더 여러분에게 확인해 드립니다. 거기서 말하는 로고스, 말이라고 하는 것을 지금 말하는, 겉으로 드러나는 음성학적으로 나타나는 이러한 언어로 축소시켜 보지는 마십시오. 여기에, 언어 속에 훨씬 더 창조적인 생명의 근거를 갖고 있는 어떤 힘들이 있는 겁니다. 하이데거 이야기를 다시 한 번 하겠어요. 그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말을 한다. 언어가 말을 한다고 하는 겁니다. 그거는 살아있는 언어를 이야기하는 거죠. 창조적인 언어를 이야기하는 거죠. 얼마나 신학적입니까? 성령이 우리를 통해서 말씀하시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영감을 통해서 되었다고 하는 말이 하이데거가 이야기하는 언어가 말을 한다 그런것 들과 맞아 떨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조금 언어와 창조 이런 문제를 말씀드렸는데 약간 느낌이 오시나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문자적으로 쓰여졌다 말했다는 차원이 아니라 훨씬 더 언어존재론적인 차원을 걷고 있다는 것, 그거는 이해하시겠죠.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을 아버지가 아들에게 정말 이야기한 것처럼 그런데 머물러 있게 되면 우리는 성서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아 어디로 가라, 노아야 방주를 지어라 했을때 정말 소리를 낸 것이라 생각하면 그것은 어처구니가 없는 어린아이 신앙에 있는거예요. 그럼 그 당시의 노아와, 노아는 접어두고 그거는 훨씬 원역사, 고전으로 들어가니까 접어두고 아브라함이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그에게 그러한 일종의 신탁이죠, 하나님의 소리가 들렸을까? 정말 이러한 귀로 통해서 들렸는가? 깨우침인가? 아니면 자기의 삶에 대한 반성을 통해서 느껴진 것일까? 도대체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하는 그 사실이 무엇을 이야기하는 걸까요?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성서를, 특별히 구약성서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것, 분명히 옳습니다. 다만 거기서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이 의미는 무엇인지. 그 사건들이, 그 구원사건들이 어떻게 언어로 성서화 되었는지 잘 따져보아야 될 필요는 있습니다. 조금 더 속도를 내어야 되겠네요. 계시, 아까 언어가 하나님의 존재론이라고 했구요. 그런 점에서 우리가 머리를 굴려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할때만 안다고 했는데요 그 차원에서 구약성서는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이 자기를 알리신 것이죠. 그것을 어떤 개인, 어떤 민족, 어떤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알리신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시입니다. 성서가 하나님의 계시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을 우리는 영감론이라고 하는데요. 그냥 지나가겠습니다. 하나님이 성령의 영감을 통해서 성서가 다른 것들과 구분된다고 하는 것이죠.

두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보수적 입장대로 축자 영감설이 있구요. 조금 열린 사람들의 입장으로 전체 영감설이 있습니다. 이거는 문자 하나 하나가 성령이 축자적으로 기록한 것이라고하는 상당히 뭐라고 할 상당히 뭐라고 할까요 기계적이라고 할까요. 기계적인 방식으로 기록된 것을 강조한다면 전체 영감설은 문자 하나 하나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되었다고 하는 점에서 역동적, 유기적 영감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서기자죠. 기자가 기계적으로 참여 했는가? 역동적으로 참여했는가 하는것이죠. 이 말은 곧 성서의 역사성, 성서가 역사에 의존하는가? 초월하는가? 어느 영감설이 의존이라고 하는 지 답이 나오죠.  전체 영감설, 역동적 영감설이 성서가 역사에 의존해 있다고 보고요. 축자적 기계적 영감설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성서를 역사에 초월해있다 그렇게 봅니다.

그러한 두 입장이 바로 성서를 해석하는 방법에 차이를 생깁니다. 초월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성서를 성령의 도움을 얻어서만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역사성을 강조하는 사람들, 전체 영감설, 역동성 영감설인거죠. 저도 이쪽에 포함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역사 비평을 통해서만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거는 뭐 뻔한 이야기죠. 성서를 역사적 산물로 보느냐 아니면 그 너머 있는 것을 보느냐? 역사 너머 있으면서 역사 안에 있다고 보는 데 우리가 대결하는 점에서 역사 초월이냐 역사 내재냐 볼때 역사 안에서 있는 것으로 볼때 역사적 비평, Historical criticism이 필요한 거죠.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되었으니까요. 역사 비평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에게 나눠드린 메일로 보내드렸다고 보는데요. 보시기 바랍니다. 상당히 많은 연구가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이 신학이 가장 오래된 학문이거든요. 그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성서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굉장히 세밀하고 과학적으로 그것을 연구했고 그 어떤 학문보다도 훨씬 더 발전되어 있다고 할까요. 그중에 하나가 역사비평입니다. 성서 하나하나의 부분들을 살피면서 이것이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기록되었는지 정확하게 살피면서 찾아내려고 하는 작업이죠. 네. 재미있습니다. 쭈욱 들어가면. 네.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 우리가 전제해야 할 것은 전승이라고 하는 사실, 구약성서 개론을 우리가 다룬다고 하는 점에서 우리가 전승 개념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보통 독일어로는 위벌리피어링이라고 하거든요. 발음으로만 아네요. 전승.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부터 완성된 게 아니라 구전으로 시작되어 조금씩 조금씩 이렇게 전승되어 왔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한 부분들을 어떻게 제가 설명을 더 해야 될까요? 앞 대목만 제가 잠간 읽어보겠습니다.

소박한 기독교인들은 구약성서가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구조와 내용으로 되어있는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성서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바다 속에서 솟아나거나 어떤 고목나무 밑둥치에서 발견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 과정에서 출현했다. 여기서 출현했다고 하면 당연히 그 역사 뭐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하겠죠.  아주 오래 전으로 생각을 옮겨보기 바란다. 이미 태초에 구약성서가 있었을까? 아담과 이브가 구약성서를 읽었을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이 구약성서를 읽었을까? 아닙니다. 그들은 성서가 없었습니다. 아니면 훨씬 후대로 내려와서 이집트에서 해방된 히브리인들이 광야에서, 혹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는 읽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문서로 편집되기 시작한 것은 이스라엘이 명실상부한 왕정국가의 모습을 다진 이후였다. 그리고 구약성서를 최종적으로 정경화한 시기는 놀랍게도 기원후 70년이다.

이 왕정시대가 주로 어느 시대를 말하느냐 하면 다윗과 솔로몬이예요. 이 시대가 중요합니다.  구약성서는 단편적으로 많이 널려져 있었습니다. 전승이 편집되고 문서화되면서요. 처음에는 어떤 사건에 대한 구전이 있었어요. 출애굽 사건만 생각해 봅시다. 모세가 히브리 사람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서 광야로 나온 출애굽사건이 있다고 합시다. 이것이 누가 기록해놓지 않았어요. 입으로 구전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전해지고 다르게 단편적으로 전해지고. 미리암에 대한 전승도 있고 여러가지 수많은 전승들이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입으로 입으로 구전으로 해서 내려왔습니다. 언젠가부터 문서화되고요. 문서도 나중에 편집이 됩니다. 이런 과정을 주욱 걸치게 되거든요. 그런데 결정적으로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입니다. 이때 나라가 탄탄한 자리에 서게 되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리의 뿌리가 어디냐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잖아요? 어려울 때는 먹고 사는 것이 바쁘니까 그냥 정신없이 지난다 하더라도 어느정도 생활이 안정되면  내가 서 왔는지 내 부모가 어디있는지 내 조상이 어디있는지 찿듯이 미국의 흑인 역사의 뿌리, 알렉스 헤일리 소설과 비슷합니다. 조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거죠.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경제적 여유가 생기니까 학자들을 시켜서 우리가 뿌리가 무엇이냐 우리가 어디서 왔느냐? 찾기 시작했어요. 그 결론은 출애굽이예요. 출애굽 공동체입니다 출애굽에서 더 올라가면 어디냐? 족장들 시대로 올라가구요. 아브라함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더 이상은 뭐냐? 설화들로 되죠. 올라갈수록 희미한 거예요. 창세기 1장에서 11장은 우리가 원역사라고 하는데 사실의 역사는 아닙니다. 그거는 접어두고요. 다윗과 솔로몬이 학자들 시켜서 자기들 뿌리를 찾기 시작했는데 출애굽가지 올라가게 되는거거든요. 그 뒤로 역사가 진행이 되면서 또 하나 중요한 사건은 바벨론 포로 귀환입니다.

구약성서는 이렇게 보아야 합니다. 다윗 솔로몬 시대 역사를 거꾸로 쳐다본 것이고 그 다음에 역사가 내려온 것입니다. 누가 쓴 책인가요. 가시덤불과 구약개론입니다. 여기 집을 하나 지었습니다. 지붕이구요. 두껍게 해야 되겠네요. 지붕이구요. 기둥이 있어요. 이렇게. 주춧돌이구. 주춧돌. 이 두 기둥이 이게 출애굽과 바벨론 포로 석방, 바벨론. 이게 구약성서를 지탱하는 핵심이라고 합니다. 대충 이해가 되시죠. 출애굽을 중심으로 해서 역사가 신명기적 관점으로 자기들의 역사를 재구성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예언자들은 주로 바벨론 포로시절에 많이 활동을 했거든요. 이거는 주로 모세오경을 중심으로 한 여기는 예언서들이 주로 많이 쓰여졌구요. 뒤로가면 성문서가 쓰여졌습니다. 성문서는 역사적으로 가장 후기에 쓰여진 것입니다. 이 두개 기둥에 의해서, 멀리 갈수록 희미해지는, 점으로 찍어야죠. 창세기 앞부분으로 갈 수록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기 힘듭니다.  뒤로 갈수록 점선이 나와요. 신구약 중간기 여기도 또 희미해집니다. 가장 확실한 역사는 다윗과 솔로몬, 이때를 중심으로 해서 두개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데 출애굽과 바벨론 포로, 이런 역사적 과정에서 구약성서가 기록된거죠?

여기에 중요한 개념이 전승이다. 전해져 내려왔다. 생각해 보십시오. 전승은 토씨하나 하나가 그대로 되는거 아닙니다. 중간에 말 재주가 있는 사람에 의해서 어떤게 들어가고 나오기도 합니다. 흡사 우리나라 민담처럼요. 해님이 된 오빠와 달님이 된 누이, 오누이의 이야기, 할머니가 떡장사를 나갔다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고 문열어달라고 하는 호랑이에게 쫓겨서 나무에 올라갔다가 밧줄 탄 이야기 있잖습니까? 그런 것처럼 기역에 따라서 이야기가 달라지거든요. 구약 성서가 무조건 근거가 없는 설화라고 하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부분도 있는데 역사적인 부분도 많지요. 어쨌든 전승, 전해져 내려왔다는 고 부분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창세기에도 비슷한 이야기들이 중복되기도 하구요. 참고적으로 말씀드리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 세 사람이 3대족장이고 또 하나 중요한 사람이 요셉입니다. 이 사람들이 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들 손자 그렇게 이야기하잖아요. 이게 아브라함 전승이 있고 이삭, 야곱 요셉 전승이 따로 있는거예요. 따로 내려왔습니다. 그게 나중에 창세기를 기록한 어떤 최종편집자에 의해서 한 가족의 한 가문처럼 그렇게 기록된 것입니다. 그런 증거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학자들이 연구해 두었어요. 증거들이 있습니다. 사실 성서를 읽을때 다른 전승인지 한 가문인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했는지 그것을 찾으면 되는거니까요.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비평을 전문가라고 한다면 그러한 훈련을 통해서 성서에 나오는 하나님을 왜곡하지 않을 수가 있죠. 전승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간이 지났군요. 제가 그게 왜 그러냐 하는 것 몇 가지를 설명해 놓은 겁니다.

정경이야기는 됐구요. 전승된 것이 문서화되고 편집된 다음에 정경되었다고 하는 것은 앞에 짤막하게 설명했습니다. 정경, 캐논이 되었습니다. 캐논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기준, 잣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서가 유대인들에게는 구약성서, 기독교인들에게는 신구약성서를 삶의 기준으로서 저울과 같은 것으로 삼았다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캐논이 아니라, 오리지날이 없는것이 사본입니다. 기초적인 것인데 책을 읽으면 다 나오는 것입니다. 사본이 상당히 많이 여러 군데서 쓰였습니다. 지금처럼 인쇄술이 발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양피지에 일일이 받아썼습니다. 전문적, 직업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서기관들이 했구요. 수도원같은데서 그런 일을 많이 했습니다. 바울의 편지도 오리지날이 없고 사본이 있는데 사본이 조금씩 들려요. 그래서 B, E 사본, 사본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티칸 사본, 사본들이 유물이죠. 박물관에 널려 있습니다. 어떤 사본은 고린도서만 있고 어떤 사본은 복음서만 있고 어떤 27권의 신약성서만 아니라 그 외에 외경들도 사본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본만 연구하려고 하더라도 굉장히 큰 자업입니다. 이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복음서를 읽다가 어떤 것은 괄호로 치고 난외주로 이런 것은 어떤 사본에서는 빠져있음. 어떤 사본에는 빠져 있습니다. 어떤 구절들은 없기도 하죠.  성서를 변역할 때 어떤 사본을 택하느냐 따라 조금씩 내용이 틀리게 됩니다. 그런데 전반적으로 볼때 컴퓨터 작업을 죽 해보니까 현재 세계 기독교계가 쓰고 있는 것을 볼 때 거의 일치한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거의라고 하지 아직까지 우리가 완전히 복구하지는 못했습니다. 불가능하기도 하구요. 고기 까지만 하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결론을 내려야겠군요. 해석을 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사본도 아니예요. 번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번역을 올라가면 여러가지 사본이 있구. 사본 다음에 정경이 있게 되구요. 정경을 올라가게 되면 여러 편집한 문서들이 있겠고. 구전이 있겠고 구전을 더 올라가면 사건이 있는거예요. 하나님의 구원사건, 출애굽 사건, 예수님의 공생애 사건, 부활 사건, 십자가 사건, 사건이 중요한 거예요. 사건이 우리에게 없어요. 2천년, 3천년전 사건들이 우리들에게 직접 올수는 없죠. 이 과정이 있는거예요. 구전부터 쭈욱 꾸준히 내려왔습니다. 우리는 지금 번역된 성서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것을 읽고 있습니다. 이것을 바로 하나님이다 라고 말하면 곤란하죠. 중요한 것 사건으로 가야 하니까? 그러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거꾸로 잡아 올라가야되요. 한단계, 한단계. 한꺼번에 뛰어 가지 못합니다. 이렇게 한꺼번에 올라가려는 사람들이 극단적으로 되면 이단이 되는 겁니다. 문선명같은 사람, 원리강론을 썼잖아요. 그걸 보면 성서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있는데 많이 생략되었어요. 그냥 읽고 이게 하나님의 사건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마음대로 자기 생각하는 대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신천지도 마찬가지일거고 여호와의 증인도 대개 마찬가지입니다 해석이 필요하다. 이 과정을 다시 쭈욱 밟아 올려가는 것이 해석입니다. 가능한대로 사건에 가까이 갈려고 하는 노력이죠.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당장 질문이 필요한 것이 있으면 질문해 주세요. 제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죠.

오늘 강의 참 유익했습니다. 구약성서에 대한 전승... 참 좋았습니다. 성경의 그 거대한 맥을 언제 다 공부할지요...구약의 하나님의 말씀을 언어존재론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게 이해가 됩니다.그러면 신약에서 예수님이 40일 금식 중 사탄에 유혹받으실 때의 사탄의 말도 그런 의미로 이해해야 하면 되나요? 저는 그 사탄의 유혹이 어떤식으로 왔을까..늘 궁금했습니다.

사탄도 실체는 아니죠. 어떤 건지는 애기하기 시작하면 또 그게 길어져서 오늘은 사양을 하고

공지사항.
수요일 저녁 샘터교회 시편강해 노트북을 가지고 가서 하거든요.
유선을 억지로 끌어다가 했는데.
월요일 있는 거는 돌아오는 월요일에는 갈라디아서가 없습니다.
동영상 강의, 지금 우리 박원관조교께서 수고 많이 하셔서 동영상 올렸습니다.
동영상 되죠? 이렇게 우리가 시간 놓쳤을때는 그것을 보시고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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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님과 slowneasy님 화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