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가 뭐꼬? 질답시간 (080316)

안녕하세요?
지난 겨울에 그렇게 춥지는 않은거 같았는데요. 금년에는 제가 교회 옮긴데 혼자 있다보니까 보일라를 많이 때지 않고 그렇게 겨울을 보내서 약간 추웠습니다. 봄이 성큼 다가온 것 같아요. 기분 좋은 주일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사는게 재미있으십니까? 그런 표현이 적절하진 않는게 같은데요. 이게 사는게 뭔가? 하는 질문이 있고 또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두가지 다가 좀 어려워요. 삶이 뭐냐 하는 거 자체도 우리가 따라가기 힘들고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두개가 다 다르기도 하죠. 하나는 본질에 대한 거고 하나는 방법에 관한 것인데요. 이것이 보기에 따라 나눌 수도 있고 하나일수도 있습니다. 이게 인제 보통 저는 신앙이라고 하는 차원에 있어도 본질 주의자라고 할까요? 그런 쪽에 조금 가깝습니다. 하나님이 누구냐 아는 게 중요한 것이지. 하나님을 어떻게 경배해야 되냐.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느냐하는 것은 둘째다 하는 거죠. 두개가 완전히 배치되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 이렇게 날씨도 좋고 이번주간 좀 계속 좋았죠. 정말 이 순간에 살아 있는 나 자신을 보면 신비할때가 있어요. 그거는 여러분들이 다 경험하는 건데요. 그러면서 신기하기도 하구요. 도대체 삶이 뭔가 그런게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물론 그게 사춘기때부터 시작되는거죠. 어렸을때도 그런 대화는 가능합니다. 저도 초등학교 친구들을 만나서 그런 이야기를 한 기억이 있습니다.  사춘기 들어오면서 더욱 그것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구요. 그렇게 나이에 따라서 성숙해 가는데 그거는 끝나지 않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 것을 그치면 인제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는거예요. 신앙도 마찬가지고요. 근본에 대한 질문을 놓치지 않아야 될 것 같습니다. 따뜻한 봄날 점심때 밥먹으러 가기도 하구요. 하루에 한두번 왔다 갔다 하기도 하고 밤에 들어가 자는데요. 따뜻한 봄 햇살을 받으며 운전하거나 혹은 걸어서 갈때 아. 그 순간 그게 뭘까 그러한 생각이 들때가 많이 있습니다. 제가 자꾸 이런 말을 많이 할 필요없는데. 좀 해야 되겠습니다. 오늘 드릴말씀이 많이 있었어요. 질문이 두 분이나 하셨기 때문에 그 시간을 좀 쓰기 위해서. 사실 질문이 하나만 있었다면 이런 이야기를 더 많이 하려고 했는데 두 가지라 이런 말을 많이 줄이겠습니다.

삶에 우리가 좀 찰싹 붙어서 살아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그러지 못한 것이 일들이 많이 있거든요. 겉돈다고 할까요. 착 붙어 있는 거하구 떨어져 있는 거하구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티야 님도 테니스 한다면서요. 인도 방문해서 한수 하십시다) 테니스도 보면 압니다. 저 친구가 테니스 공에 붙어 있는지 겉도는지요. 세게 친다고 해서 붙어 있는것이 아니거든요. 공의 무게를 딱 붙들고. 보통 테니스 칠때 공 안아서 쳐라. 안고서 처라 이야기합니다. 자기 몸 중심 하고 테니스공하고 맞는게 임팩트 되는 순간에 느낌을 갖는 사람이 있구 그렇지 않는 사람이 있거든요. 삶에도 똑 같다고 봅니다. 신앙도 물론 똑 같구요. 그것이 어떤 것일까요. 삶에 딱 붙어서 사는것, 겉놀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는거 말이죠. 우리가 겉논다고 하는 것, 오늘 제가 설교조로 나가서 미안합니다. 삶에 겉돈다고 하는 것은 소유 지향적이라고 할까, 업적의, 성취 율법적인거죠. 어떤 자기가 생산해 낼수 있는 것을 확인하면서 거기에 자기가 몰입하는 삶이라고 하는거죠. 그건 늘 흔들리죠. 자기 성취가 많으면 즐겁고 아니면 흔들리고 말이죠. 늘 바람에 뒹구는 그러한 겨와 같다 시편기자가 이야기하는 것 그런 것하고 비슷합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이군요. 생명이 뭐냐하는 것을 알아야 하겠는데요. 거기에는 끝나지 않는 완전한 대답을  잡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만  거기에 가능한대로 붙어 있는거죠. 생명과 일치하는거죠. 그러한 삶은 봄날 햇빛에 쬐고 있고 아지랑이가 있으면 좋구요. 없어도 좋구요. 거기에 들어가 버리는 겁니다. 생명 현상속으로 자기가 들어가 버리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거기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거예요. 대학교수로 살거나 기업가로 살거나 국회의원이 되거나 그런 삶이나 자판을 벌여놓고 따뜻한 봄날 사과나 나물이나 파는 할머니들이나 똑같죠. 어떤 면에서 똑 같습니까. 생명이라고 하는 면에서 정말 똑같거든요. 우리가 볼 때는 그게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 다시 한번 설교쪼로 해서 미안합니다 설교가 공언이 아니라 필요한 이야기니까 비슷한 형식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안으로 우리가 들어가는 것이 영성이거든요. 어떻게 우리가 생명과 밀착할 수 있는가? 이것만 우리가 붙들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신앙이거든요. 왜 그런가 알죠?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을 경험한다고 하는 것은, 그거는 하나님 경험, 이거는요. 생명경험하고 똑 같습니다. 생명 경험이예요. 왜 그러냐 이 이야기를 하려면 또 한 시간이 다가겠죠. 성서가 이야기하는 그런 것부터 시작해서. 성령론도 여기에 포함되구요. 성령은 바로 생명의 영이니까요. 그래서 제가 지금 내가 하는 일들을 다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행복하겠다는 생각은, 이건 아주 분명합니다. 제가 간혹 엉뚱한 이야기를 할때가 있죠. 그러면 내가 오늘 저녁에라도 집에 돌아가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하반신이 마비된다면 내 생애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되는데요. 테니스도 못치고 되구요. 뭐. 서울에 강의하러도 못가고 불편한것이 많이 있겠죠. 그것이 결정적으로 나로 하여금 생명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지 않습니다. 하반신 마비라고 하더라도 생명은 다른 방식을 통해서 나와 연결이 되거든요.

거기를 존재론적으로 우리가 들어가는거죠. 계속 제가 존재라는 말을 여러 번 쓰는데요. 강의 시작할때 부터 썼는데요. 존재론적 하나님의 통치, 뭐 이런거도 썼구요. 존재론적 하나님. 바로 그겁니다. 존재는 사람이 어떻게 좌지우지 할 수 없는 그러한 세계, 그러한 신, 하나님에게만 존재가 가능한 겁니다. 하이데거가 이야기하는 ‘자인’이 바로 그거죠. 하이데거는 ‘자인’과 ‘자이엔데’를 구분합니다. 자이엔데. 보통 우리가 생각하고 모든 존재하는 것들, ‘자인인데’ 사물, 존재하는 것, 독일어로 영어의 Be동사 이거든요. 자인,이거는 존재하는 것들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적인 어떤 힘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시간에 2000년대 이 땅에 같이 살아가는 것은 큰 인연인데요. 여러분 각자 각자 그렇게 사십시오. 우리는 우리가 정말 감당할 수 없는 우리가 예측할 수도 없는, 우리가 어떻게 해서라도 범주화할 수 없는, 규정할 수 없고 정의할 수 없는, 하나님의 생명안에 들어와 있는 것, 얼마나 놀라운 일이겠어요. 우리는 다 놓치고 삽니다. 사실은요. 이게 단순히 자연주의자들처럼 자연예찬론, 제가 그런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기독교 신앙 자연과 연결하면서 말씀드리는 것인데요.

어쨌든 이 봄날을 놓치지 마시라. 비가와도 좋아요. 바람이 불어도 좋아요. 봄에 황사가 일어도 좋습니다. 얼마나 귀한 생명의 경험입니까? 제가 다른글에 잠깐 썼습니다만 황사가 다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그래요. 우리나라 산천이 다 산성화 되었는데 이 황사로 인해서 알칼리로 많이 변한다고 합니다 노약자는 황사 때문에 주의해야하겠지만 그냥 건강한 사람들은, 우리는 아직 건강하니까요. 이러한 삶, 모든 삶들을 순간 순간 풍성하게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행복하게 말이예요. 그러한 상태가 되면 월급이 좀 작아도 뭐 백만원만 갖고도 얼마든지 살수 있거든요. 자기집 마련하지 않고 전세로만 산다고 생각 한다면. 서울같으면 전세값이 너무 많이 뛰어서 문제지만 그래도 지금 많이 전세 오랫동안 길게 주는 것 있잖습니까? 싸게 아파트에서 길게 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사회복지가 그런면에서 많이 발전해야 되겠어요. 자기 집이 아니더라도 전세값오르는 것에 크게 신경쓰지 않고. 영구 임대주택 맞네요. 그러한 영구 임대주택을 정말 많이 지어야 되겠습니다. 사실 먹고 사는데는 돈이 많이 들지 않거든요.  지금 20대 88만원 시대에서 야단들입니다만 그런 예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라도 하양만 하더라도 계속 노동자들을 찾는 현수막이 붙어 있습니다. 핸드폰 부품 2차산업인가요. 부품만드는덴데. 계속 몇 명 몇 명 뽑는다는 현수막이 계속 붙어 있는거를 보면 일자리는 있는거예요. 그런데 열심이 일하면 150만원이상 받지 않겠어요.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사교육비 많이 시키지 않고 부부가 같이 일하게 된다면 살수 있습니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만 지금 이러한 우리들의 이러한 양극화라든지 경제구조를 그냥 생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구요. 그냥 존재론적으로 생명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 이거는 장애를 겪는다 하더라도 분명히 가능하다 그런 말씀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좋은 봄날에 쓸데없는 생각으로 우리의 삶을, 우리의 시간들을 우주의 시간에 한번 주어진 것인데 말이죠. 2008년이라는 봄을 쓰레기처럼 버리지 말자. 황홀하게 살아보자 그러한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두가지 질문을 주셨습니다. 노스탈님이 하나 주신게 있구요. 웃겨님 김혜란씨가 주신것이 있구요. 두가지 다 연관되어 있습니다. 성서 텍스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웃겨님이 주신 질문을 좀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니까요. 먼저 노스탈 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축약해서 드리고 그것과 연결해서 웃겨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는 것으로 오늘 시간을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노스탈님이 주신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 체포사건과 유대교 지도자들의 책임문제입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유대교 지도자들, 제사장, 사두개인들 이런 사람들 유대인 지도자들하고 초기 기독교하고 그렇게 대립적이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면서 그렇다면 복음서에 나온 제사장들의 행태들이 그렇게 적그리스도적인,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한다든지 그런 것이 아니지 않느냐 그런 것을 언뜻 제가 그런 식으로 말씀드렸습니다.

마태복음 26장 47절을 말씀을 인용하면서 거기는 분명 보면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보낸 많은 사람들이 군인이라고 했는데 군인은 아니고요. 아마 제사장들이 성전을 지키기 위해서 돈을 주고 고용한 심부름 하는 사람들, 사병이라고 할 수 있겠죠. 공적인 군인들이 아니라 사병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 사람들이 분명히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고 있을때 잡으러 왔다는 것은 분명하구요. 그것은 공관복음뿐만 아니라 요한복음까지 지적하고 있는 것을 보면 복음서 기자들이 다 공통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거 같습니다. 노스탈님의 질문은 그건거죠. 그렇게 분명하게 명시적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왜 지난 시간에 제사장들이 예수님에게 적대적이지 아니라고 말한 것이 이해가 안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조금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 주에 제가 말씀드린 것은 신학적 근거가 있다고 말씀드리지 않는거라고 말씀드렸어요. 개연성이 있다고 말씀드린 거구요. 이것은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다 저렇다 결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고 그랬습니다. 이거는 더 연구를 해야되고 이걸 갖고 석사학위 논문을 써도 충분하다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드린 것 같습니다.

예수님 이후 예루살렘 기독교 공동체와 유대교와 그렇게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건 사도행전만 보더라도 제가 이미 인용한 것입니다만 거기서 베드로와 요한이 정기적으로 성전에 드나들면서 기도하곤 했거든요. 거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방금 자기의 스승을 제사장들이 만약에 그렇게 고발하고 그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돌아가게 된다면 베드로 이런 사람들이 성전에 드나들 수도 없구요. 드나들지 않았겠죠.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하나 사도신경에 보면 중요한 초기 기독교의 신앙고백인데요. 거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해서 그 책임을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고 이야기 하죠. 제사장들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빌라도와 더불어 제사장에게 비슷한 무게로 돌아간다면 사도신경에서 그것을  뺄리가 없거든요. 그리고 사도바울의 편지로 제가 중요한 것을 그 전거로 말씀드렸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십자가 사건을 가장 중요한 초석으로 이야기하면서도 예수님 십자가 처형에 대한 책임에 대해서는 누구 대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쓰지 않습니다. 책임은 우리 모두인거죠. 우리의 죄로 인해서 그렇게 됐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지 복음서가 이야기하고 있는 제사장에 대한 직접적인 간접적인 책임 추궁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풀 것인가? 제가 어떻게 푼다고 말씀드린건 아니예요. 그것은 많은 공부가 필요하고 그것에 대한 연구한 책이 있는지는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이건 좀 공부해 볼만하다 하는거죠.

이렇게는 우리가 지금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복음서도 기록된거예요. 사도바울의 편지가 있듯이 복음서도 기록된 것입니다. 그것이 앞에 있고 뒤에 있고 그런 것은 세세하게 공부해야 드러나는 것이구요. 중요한 것은 그러 것들이 다 그들이 살았던 삶의 자리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이 있었다면 마가 신앙 공동체가 있었어요.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에 대한 질문을 한 것이 복음서이고 바울의 편지이고 그렇습니다. 막연하게 혹은 일반적으로, 아 이건 그냥, 일반적이란 것 이해하시겠죠.  어떤 구체적인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일반적인 것을 기록한 한 것이 성경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자리가 있었어요. 그 안에서 구체적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한 문서들, 혹은 그러한 전승들이 바로 성서입니다. 복음서도 그렇고 사신도 그렇고 다 그런거 거든요. 복음서, 네 복음서가 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제사장들이 상당히 깊숙이 관여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을까요? 역사적 사실일까요? 아니면 복음서가 놓여있었던 삶의 자리에서 나온 해석일까요? 제가 이 자리에서 다 이렇다 저렇다 끊어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네 그것이 성서 해석의 문제이기 때문에 웃겨님의 질문으로 넘어가면서 그 안에서 조금 보충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김혜란님. 요즘 나의 그림일기로 한참 줏가를 올리고 계시는 분. 오셨나요? 계신가 안계신가? 아 계시군요. 아 네. 지난 주일날 밤에 주셨지만 제가 그날 대답하지 못하고 한주간 미루었는데요. 동영상 강의 메뉴에 올려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림일기 잘 보고 있습니다. 솜씨가 대단하십니다. 너무 잘 그려야 되겠다 생각하지마시고 편안하게 한번 해보십시오. 고맙습니다.

그런데 혹시요. 김혜란씨. 제가 이 본문, 마태복음 4강부터 나오죠. 예수님의 시험받은 이야기. 이걸 본문으로 해서 한 설교를 읽어 보셨나요. 설교 읽기에 가면 2월중에 나올겁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세가지 시험, 다비야에서 가장 중요한 메뉴를 그냥 지나치셨군요. 나중에 다시 읽어 보십시오.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예.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광야에서 40일동안 금식 기도하셨고 사탄에게 시험을 받았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세 공관복음서에 다 들어 있습니다. 공관복음서에. 이제 다 아시겠지만 마태, 마가, 누가 그리고 제4복음서, 요한은 제4복음서라고 합니다. 네 번째 복음서라고 합니다. 이게 같은 방향으로 보고 있다고 공관, Synoptic 이라 하던가. 예. 영어도 정확하게 기억이 안나네요. 이 네 복음서에 시험받은 이야기가 다 나오고 있습니다. 조금 달라요. 마가복음에는 세 가지가 없습니다. 그냥 시험받았다고 하고 이야기를 하고 40일동안 계속 시험을 받은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계속 시험받은 것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에 시험을 받았다고 나와있고 마태, 마가에는 세가지 시험 순서도 첫번에는 똑같아요. 떡을 만들어라 하는 것은 똑 같은데 다음에는 성전에서 뛰어내려라 나에 절하라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조금씩 세 가지가 다 광야 시험에 대해서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요한복음은 아예 그것에 대해 침묵하고 있구요. 왜 그럴까 곰곰히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것들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한다면 복음서들이 다르게 이야기하거나 요한복음은 그것을 생략했을까요? 늘 여러분들이 그것을 생각을 하시는 게 좋습니다. 네.. 성서를 의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기에는 어떤 사연들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네. 그리고 잠깐 먼저 이걸 짚어야 되겠군요. 김혜란 씨가 질문하려고 하는 것이 네가지 시험에 대한 의미가 무엇이냐 그런 것은 아닌것같아요. 제가 지금 그걸 설명하고 있는데요. 그것이 정말 객관적인 사실이냐? 역사적인 사실이냐? 사탄 마귀가 나타나서 했다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런 이야기거든요.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느냐? 아니면 예수님의 생각이 유혹이 떠오른 것이냐? 심리적인 것이냐? 아니면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냐? 구약성서에 대한 다른 해석이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네 근데 이것이 제가 설명하는 것이 다 연관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거예요.

이러한 문제들은 하나님도 마찬가지인데요. 그런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악의 문제죠. 사탄이 등장했다고 하는 것은 이 악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성서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어떤 뿔 달린, 우리가 만화에서 보듯이 그런 것이 나타나서 예수님에게 음성학적으로 소리를 내듯이 이렇게 말하는 그런 존재냐? 늘 그런, 초등학교 학생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는데요. 그런 질문에 다른 어떤 신학자 말을 좀 인용하셨더라구요. 텍거, 그분은 이것을 굉장히 현실성이 있는것으로 이야기하더라구요. 그건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적 사실 이게 뭐냐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리얼리티라고 하는 것이죠. 사탄은 우리는 리얼한것이라고 볼때 과연 무엇이 리얼이라고 보느냐에 따라서 그것을 만화에 나오듯이 뿔달린 것으로 보야야 할 것인지 다니면 다른 관점으로 보아야 할 것인 지 그건 좀 다른 것입니다.

어쨌든 조금더 설명을 하겠습니다. 에드와르트 슈바이처라고 하는 성서학자가 있습니다. 제가 오늘 대답을 하기 위해서 주석서를 보았어요. E. Schwizer. 알버트 시바이처가 아닌 독일 사람입니다. 이 세사람이 쓴 마태복음 주석서. ‘다스 에방겔리움 마태우스’ 조금 참고를 했습니다. 이 세 가지 시험, 첫 번째는 돌을 떡으로 만들어라. 두 번째는 성전에서 뛰어 내려라. 세 번째는 사탄 혹은 마귀에게 절하라 였습니다. 에드와르드 슈바이처의 말에 의하면 세 가지 시험들 중에 세 번째 것이 제일 먼저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가장 중요한 거로 시작된거죠. 이 세 가지 중에서 조금 특색이 있죠.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예수님의 스스로 자기가 해결, 능력을 보여야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세 번째는 사탄과의 대결입니다. 그런 차이가 있는거죠. 사탄에게 절하라고 하는 것, 사탄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이게 가장 처음 중요하게 초기 기독교의 신앙적 이슈, 주제로 제시되어서 이 전승이 가장 앞에 나온 중요한 거라고 합니다. 이 말은 곧 이러한 전승들이 나오고 예수님의 이야기가 초기 기독교 안에 이렇게 논의된 것은 앞서 제가 말씀드린 대로 그들의 삶의 자리가 그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삶의 자리가 있는 거예요. 다시 한번 노파심으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객관적 사실은 없는데 초기 기독교 자리가 요구한 것 뿐인가?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부터 연대기적으로 주욱 정리되어 있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들이 다 예수님과 같이 생활한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아있었거든요. 그렇기도 하구. 여러 사람들에게 소문으로 남아있기도 하구요. 그런 것들이 초기 기독교의 삶의 자리에서 어떤 것들은 조금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어떤 것들은 약화되고 어떤 것들은 조금 더 비현실적으로, 그건 다 외경으로 빠졌습니다. 예수님이 어릴때부터 초능력을 행사한다는 그런 전승이 있었어요. 상당히 넓어요. 예수님에 대한 정보가 방대하게 흩어져 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들, 신빙성이 있는 것들로부터 쭈욱 초기 기독교에서 편집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중요하게 역할을 한 것은 기독교가 선 삶의 자리인거예요.

제 이야기를 비유적으로 설명한다면 우리가 이렇게 같이 공부하지 않습니까? 정용섭목사가 뭐 동영상이나 다비아나 오프모임을 통해서 강의를 하다가 제가 이제 어디 떠났다 거의 만나지 못한다 그러면 세월이 지나면서 우리 다비안들이 정용섭 목사에게서 어떤 어떤 점들이 있었다 하면 그게다 다른 겁니다.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기록해놓을 수 있지만 옛날에는 그럴 수 없었기 때문에 입으로 구전되는 가운데서 어떤 것은 축소되고 확대되구요. 실제적으로 편집과 문서화되는 가운데서 그들이 여러분들이요 필요에 따라 저에 대한 기억을 하는 것입니다. 저도 객관적으로 기억을 못해요. 여러분들이 글을 쓸 때 필요한 것만 크게 남는 거죠. 이해, 동의하시겠지요.

예수님에 대해서도 똑 같습니다. 공관복음서가 같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다른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들은 거의 비슷합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거가 뭔지 아시죠. 수난설화입니다. 수난설화란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지 마시구요. 예수님의 수난, 이번주간이 수난 주간이군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일주일 동안 겪었던 일들, 십자가 처형 이런 것들이 예수님 공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가장 부피가 많은 그런 내용입니다. 나머지 것들은 공관복음서에서도 조금씩 차이가 있구요. 어떤 것들은 같이 공통 소유하는데 같이 공유하는데 어떤 것들은 마가복음만 하는 것도 있구요. 조금 참고적으로 더하면, 이러한 자료가 있다고 합시다. 신약성서에는 q자료라고 합니다. 어록자료라고 합니다. 그러는 이게 없습니다. 실제적으로는 없었고 있었다 하고 가정만 하는거죠. 2천년 전에 있었던 자료들이 남아있었겠어요. Q자료라고 하는것, 독일어로 크델레라고 하거던요. 원천, 샘이런 뜻입니다. 이런 것이 있었고 이런 것을 거의 받아들여서 마가복음이 이런 것과 더불어서 플러스 알파. 마가복음을 썼습니다. 마태복음이 마가복음과 q재료를 더 포함에서 마태복음이 된거구요. 누가복음도 마태복음 비슷하게 서로 공유하면서 어떤 부분을 했습니다. 각자 각자 공통적인 부분이 있는 것은 q자료라고 합니다. 지금 살아 있지 않습니다. 학자들이 공통적인 부분을 모아 보니까 어떤 내용들이 나오게 되는거죠. 초기 기독교의 그러한 역사가 있었구요. 그런 것들을 우리가 촘촘히 잘 헤아려 봐야 성서 안에 나오는 전승들이 과연 초기기독교안에 원래부터 있었던 것인지 마태복음만의 고유한 것인지 자기가 편집한 것인지 그런 것들이 분석되는것이죠.

그런 것을 분석하는 것을 역사비평이라고 합니다. 역사비평이 성서해석의 모든 것이 아닙니다만 그러나 기초 작업입니다. 그것을 근거로 해서 완성된 텍스트를 찾아가는 것이죠. 참고적으로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중요한 관점이 뭐냐? 이거죠. 성서 텍스트를 읽을때 중요한 관점. 어떤 사람은 이것이 사실이 아니냐 그것만 따집니다. 아니면 사실로 전제하고, 사실이라는 것도 역사적 객관적 사실이냐 다른 것이냐하는 것처럼요. 제가 이미 설명했습니다만 히스토리, 게쉬히테가 있다고 하잖아요. 역사라고 하는것도요. 비슷한 겁니다. 어떤 사건들은 실증적인 히스토리요 그런 것만이 아니라 그런 것을 기초에 놓으면서 더 포괄적이고 더 함축적이고 더 역동적인 역사 사건이 되는 겁니다. 그런 관점이 없으면 우리는 어떤 텍스트를 해석할 수 없죠. 그렇고 이것은 기독교 신앙이 그러면 되나 믿어야하지 학문적으로 따지고 들면 되냐? 오히려 이런 것들이 더 신앙적인거예요. 우리가 보통 하나님의 시간 카이로스라고 하는데 그건 연대적이고 실증적인 하나님의 시간을 이야기한다면 이거는 더 역사를 깊이 있게 파야 하는거지. 먼저 믿는다고 하면 카이로스가 뭔지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성서 텍스트앞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관점이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관점이 있을 텐데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구요. 제가 정리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말씀드리는 것이어서 앞뒤가 맞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도 도움이 되실 것으로 믿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크게 두 가지로만. 저자의 문제. 예수님이 정말 그렇게 하셨냐하는 그러한 텍스트에 쓰여진 것을 보는 관점이 있겠고 그것을 전하고자 있는 저자의 편집의도, 집필하는 목적이 뭐냐 크게 보면 두 가지 관점입니다. 한국 교회는 일반적으로 그거 자체, 거기에 있는 거죠.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다 그렇게 전제, 거기에 집중하고 있는거죠. 그게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볼 수 없는데 제가 보기에는 저자가 더 중요합니다. 말이 안된다.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이 행하신 행위가 중요하지 왜 저자가 중요하냐?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저도 그 말에 동의합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과 행위가 이 텍스트가 담아내지 못한다는 것 그게 문제입니다. 그걸 100% 담아낸다면 누가 그것을 믿지 않겠어요? 이 텍스트에 나온 것들을 그대로 아 하나님의 영감, 성령의 영감으로 되어 진 것이니까 그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으로 그렇게 믿습니다. 믿으면 좋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텍스트안으로 결코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거는 광신은 가능해요. 그렇게 하더라도 이것을 몰라도 구원받는 데는 큰 지장이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예수를 잘못 믿어도 최소한도 우리가 예수가 그리스도다는 신앙 고백을 한다면 우리는 구원받습니다. 우리가 모든 기독교 신앙들의 내용을 세세히 정확히 알아야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니거든요. 그렇게 사시고 싶으신 분들은 그렇게 사십시오. 말씀을 그대로 있는 그대로 믿고 살겠습니다. 큰 문제는 아니예요. 그러나 그러한 방식으로는 기독교가 점점 세계로부터 위축됩니다. 세계, 하나님은 세계구원인데 점점 모든 세계의 주요이슈 아젠다라고 할 수 있나요. 그런 것에 대해서 대답할 말이 없어지게 됩니다. 계속 이런 방식으로 나가게 되면 세상과 대립하게 되어요. 좋은 뜻의 대립이 아니라 돈키호테처럼 싸우는 것이죠. 예수천국 불신지옥 같은 거라든지 아니면 진화론에 대해서 무조건 반대한다거나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살게 되면 결국은 기독교는 왕따를 당하게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살게되면요.

텍스트를 바르게 해석해야 되는데요. 이 저자의 생각이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는 물론 저자의 생각을 하나님이 영이 감동했다는 것을 전제하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우리를 기계처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 있는 영혼이잖아요. 우리를 로보트처럼 만든 것이 아니잖아요. 창조적인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가 성서를 기록한 사람이나 그 기록된 성서를 해석하는 사람도 창조성이 있어야 하는 거란 말입니다. 이게 가능한 거거든요. 그게 제가 보기에 이것이 더 실용적입니다. 창조론적인 면에서 볼때요. 하나님을 믿습니다. 축자영감설 문자 하나 하나 고대로 고지식하게 그런 식으로 한다면 마태복음 끝부분에 독을 마셔도 죽지아니하니라 그대로 믿고 실천해 보시죠. 그런 부분은 상징적인 것을 풀어내더라구요. 왜 같은 비슷한 부분에 있는 방언을 하는 부분은 왜 제쳐 놓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그러한 방식, 그 시대 그 삶의 자리가 있는 거예요.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여기 삶의 자리가 무엇일까요? 왜 사탄에게 절하라 그랬을때 왜 오직 하나님만 섬겨라. 그렇게 대답하시지 않습니까? 그게 핵심이거든요.

신명기 6장에 있는 쉐마, 이스라엘아 들으라 이게, 이 세 가지 시험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몽땅 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라면 어릴때부터 거의 암송하다시피한 알고 있는 구약성서의 구절을 이용한 것입니다. 그 말은 곧 초기 기독교인들이 바로 그러한 테두리안에서 살았다고 하는것이예요. 대표적인 것인은 사탄이 나에게 절하라한 것인데요. 예수님이 신명기 6:13절을 이용해서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 절하고 다만 그 분만 섬겨라. 마태 복음 공동체에 그렇게 중요한 이슈가 되었을까 하는거죠. 그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것을 이해하려고 하면 기원후 60년, 70년 그 당시 팔레스틴 사회 종교적, 정치적 맥락을 알아야 하지요. 그쵸. 우리가 지금 FTA다 뭐 미군이 우리나라에 반세기이상 주둔하고 있다고 하는, 그리고 양극화가 되고 있다고 하는 이런 상황에서 목사의 설교는 어떤 특징을 갖잖아요. 그런 맥락이 있지 않습니까? 정치 사회 경제적인 그러한 것들이 성서안에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간접적으로 들어있습니다. 그런 맥락으로 기록된거죠. 이런 것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학자들입니다. 초기 기독교 역사나 성서 신학자들이 그런 것을 연구합니다. 이미 그런 것들은 나와 있어요.

참 이상한 것은 설교비평하면서 늘 느끼는 건데 설교자들이 기초적이 성서 주석 읽으면 다 나오는 이야기를 왜 참고로 하지 않는지. 설교시간에 성서주석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성서 주석을 최소한도 거친 설교인지 아닌것인지 뻔히 보이거든요. 상당히 게을러요. 제가 보기에는 설교자들이. 그건 좀 지루하기 때문에 좀 읽기도 싫구요. 그런 책들은 다른 책을 읽으면서 경험하셨겠습니만 그쪽으로 머리가 열리지 않으면 읽혀지지 않습니다. 그런 쪽으로 신학적인 훈련이 목사님들에게 터무니 없이 부족하다는 것이예요. 신학생때 그런 훈련을 받아야 되는데 훈련을 못받아요. 바르트의 책을 읽어내는 신학생들 없을걸요. 읽으면 졸음 올겁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합니다. 번역되어 있어도 이해를 못합니다. 번역자체가 원서보다 더 이해하기 힘듭니다만 어쨌든 전체적인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거예요. 그런 상태에 또 목회 현장에 들어가면 신자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집에 와서 심방하고 기도받구요. 그런 것들이죠. 신학적 사유, 이런 것들이 전혀 필요하지 않는, 신학적 영성, 영성은 기본적으로 신학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거는 접어두고요. 영에 대한 문제니까요. 그렇습니다. 그러한 최소한 훈련되지 않는 상태에서 전혀 신학적 영성이 필요하지 않는 그냥 시장바닥과 같은 목회현장에 들어가니 목사님들이 어떻게 되겠어요. 이론적으로 전혀 생각하지 않죠.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런 신학적인 문제들을 강단에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혀 가능한 한 그런 말들을 하지 않고요. 그러나 설교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텍스트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창조적으로 풀어내야 하는데요.

삶의 자리가 뭐냐 하는 거이죠. 제가 지금 슈바이처 이야기를 조금더 여러분들에게 소개하고 있는 중입니다. 마태복음 복음 공동체에 요구되었던 것은 메시아니즘에 대한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이것은 사실 복음서 전체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메시아니즘. Messiahnism. 생각해 보셨어요. 오늘 우리 샘터교회에서도 설교 주제가 메시아니즘이었어요. 구원자라고 하는 것, 그 말이죠. 예수가 메시아냐? 그런 도전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시시하냐? 하는거죠. 메시아라고 한다면 그 당시 이스라엘이 로마 식민지 하에 있었구요. 특별히 이스라엘이 독립해야 한다는 열망이 있었거든요. 메시아라고 한다면 이스라엘의 메시아성에 의하면 로마를 한 칼에 날려버리고 시오니즘에 근거한 이스라엘 왕국을 설립하는 겁니다. 실질적으로 정치 경제적으로 정의와 평화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세계가 와야 하는 것이죠.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기독교 공동체들의 입장에 다르면 전혀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는거죠. 마태복음 공동체가 그런 질문 앞에 직면 했습니다. 예수가 메시아라고 하는 그 증거를 대라. 그리고 그러한 질문과 연관해서요.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제가 지금 바로 독립운동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고 했는데요. 특별히 60년대 열혈당원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한 30년 후에 60년하고 70년 아시겠죠. 이 70년이 어떤 의미인지. 로마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초토화 된 후에요. 중요한 해입니다. 제가 요전에 말씀드렸는데요. 60년대에 열혈당원들이 무장봉기를 시작했습니다. 본격적으로 무력투쟁, 무력봉기 반로마 무력투쟁을 아주 가열차게 펼쳤습니다. 그들은 무력을 통해서라도 독립을 해야 한다. 이게 이스라엘의 구원이다. 그러한 요구를 했고 상당히 그것이 전반적으로 호응을 얻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기독교 공동체가 어떤 대답을 해야 되었을까요? 그렇다 우리도 저들과 같이 나가서 독립투쟁하자 그렇게 이야기를 했어야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이 놓여 있었던 공동체에서는 아까 인용한 신명기 6:13절이 말하듯이 로마로부터의 독립 이것은 무력투쟁이 아니라 하나님만 섬기는 거다. 그러한 엉뚱한 대답인 것 같은데 엉뚱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전혀 투쟁과 메시아니즘에 대한 지평을 옳긴 거예요. 인문학적 용어로 Paradigm shift 입니다. 예수가 이미 그렇게 하셨고 초기 기독교가 그걸 놓치지 않았어요. 이 세대의 변혁 우리 투쟁아니다. 그러한 것으로 가능하지 않다. 하나님만 섬겨라 그만 경배하라 그런 방식으로 대답한 거예요. 이 사탄에게 절하라고 하는 요구에 대해서 거절한 것으로 예수님이 시험 세 번째에 대답하였는데 이것은 곧 마태공동체가 처했던 삶의 자리에서 그들이 제시한 대답입니다.

이거는 더 나아가서요. 아까 말씀드린 악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그런 문제입니다. 악은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를 제거하는 것, 무력투쟁을 통해서. 이게 길이다 생각했습니다. 사실은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도 로마에 대해서 무력으로 저항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었죠. Zealot, 열혈당원 두 세 명이 있었습니다. 예수에게 그런 기미를 좀 눈치 챘거나 가능성들을 보았는지도 모르지요. 가롯 유다도 그런 입장에 섰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에게서 악을 일소할 수 있는 어떤 능력을 보았는데 아무리 같이 있어도 전혀 그런 것이 없어요. 사랑을 이야기하고 인내를 이야기하고 다른 것을 이야기하니까 결국은 결국은 그렇다 좋다 당신이 십자가에 죽는 순간까지 무기력하게 있을것이냐 그렇게 해서 유다가 예수를 팔았다는 그런 이야기가 있는데 그게 얼마나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예수님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로마라는 나라 지배하에 있었는데요. 그들이 어떻게 이 지배아래서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이 악의 문제인데요. 이것도 조직신학에서 많이 다뤄지는 문제입니다. 악, 사탄, 이게 뭐냐가 아닙니다. 기건 뭐냐가 아닙니다. 여러분. 뭐냐로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걸 어떻게 우리가 그림을 그리듯이 이야기할 수 있겠어요. 성서가 기독교가 악, 사탄 이런 것들을 이야기 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죄, 그러한 것들, 요소들 많이 있잖아요. 죄의 열매들이요. 이런 것들을 존재론적으로 본다는 뜻이예요.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악, 폭력, 살인, 수군 수군대는 것 등등 그런 것들은, 우리가 윤리적으로, 잘 들으십시오. 중요한 것인데요. 우리가 윤리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반 설교자들에게서, 좀 세련된 설교자들에게서 보는 잘못이 그거예요. 우리의 그런 것들을 우리가 노력해서 성화라고 보는데. 이것은 삶의 문제이니까요. 우리가 칭의는(화요일날 대구오프에서 공부할 주제인데) 믿음의 문제이지만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지만 성화는 우리의 노력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우리가 노력을 해서 어떻게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조금 괜찮아지는 부분들이 있지요. 그거는 인제 접어두고요. 결론만 두고 이야기한다면 성화도 우리의 믿음의 문제입니다. 칭의와 성화 다 믿음의 관계예요. 칭의라고 하는 것은 믿음으로 본다면 순간적인 상태를 이야기한다면 의로와 졌다고 하는것. 성화는 지속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지속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에게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고 하는 삶이 우리에게 계속 된다면 그거는 이제 교회 예전인데는 성만찬인데요. 세례를 통해 칭의로워지고 성만찬을 통해서 지속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당연히 우리들에게는 성화의 삶이 따라오게 되는 것이죠. 이것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게 되면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이 윤리적인 악, 폭력 다 그런거 잖아요. 윤리적인건데요. 이런 것들을 우리의 행위에 고쳐서 해결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것으로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처리할 수 없는 더 존재론적인 힘에 의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렇게 보는것입니다. 이것이 옳으냐 그르냐 여러분들이 생각해 보세요. 그거는 이제 우리 기독교 심리학이 윤리학하고 논쟁할 문제입니다. 윤리학자들에게 가끔 나타나는 것, 이런 것들 존재론적으로 보지 않고 행위론적으로 볼까요. 이런 것들이 많이 있어요. 그래서 기독교 윤리학이 심리학, 인간행동에 발달에 대한 연구, 상담에 대한 차원, 사회과학, 막시즘의 사회과학 이런 것들, 경제 이게 다 사회학적인 어프로치니까요. 그런 거로 보거든요. 여러분 기독교 신앙은 그것을 존재론적으로 봅니다. 악의 근원이 있다고 보는거죠. 그게 사탄이고 뱀이고 그렇게 상징화되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오늘 우리가 말하는 주제와 연관해서 말씀 드린다면(시간이 거의 다 되었군요.) 사탄에게 절하라고 할 때 아니다 하나님만 경배하고 그분만 섬기라고 하는 것은 이 악, 사탄, 존재론적인 근원인 사탄이 다 하나님의 종속된다는 이야기예요. 이게 모순되는 것 같죠. 우리에게 벌어지는 다 부도덕한 일이 존재론적인 힘이 있다고 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통치 밑에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는거냐? 그게 서로 모순되는 것 같지만 거기에 성서와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이 있습니다. 그거는 뭐 천천히 더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악의 근원은 존재론적으로 있지만 이미 하나님의 테두리안에 있다. 그렇다면 악의 원인도 하나님이시냐?  하나님에 의해서 악이 있게 되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악이 존재론적으로 있다라는 차원과 하나님의 존재는 다른 의미죠. 사실은. 인간보다 더 우월하게 우리를 지배하는 존재론적인 악이 있지만 그것은 결국 하나님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만 능력을 행할 수 있는 존재들, 그런 점에서 오늘 저의 설교 결론 부분에 나왔나요? 이미 악은 꺾인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서 악은 이미 힘을 잃었다고 하는 전제하고 기독교 신앙은 이 세계 악과 투쟁하고 있습니다. 이미 승리한 것을 담보한 것입니다. 성취한 것입니다. 말장난이 아닙니다. 신학적 사유이고 영성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신학공부가 그냥 막연한 것이 아니고요. 우리 신앙과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참 깊은 연관을 가집니다. 이런 관점을 가질 때 우리가 세계안에서 기독교적인 삶을 올곧게 좌고우면하지 않고 구도정진의 자세로 끌고 가게 됩니다. 그게 없어서 시시때때로 왔다갔다합니다. 하나님만 섬겨라 이게 초기 기독교가 얻은 주변의 무력을 통해서라도 로마에게서 유대가 독립해야 한다고 하는 요구, 그 메시아의 증거를 대라고 하는 도전앞에서 초기 기독교가 제시한 대답입니다. 하나님만 섬겨라 하는 이 말에 많은 의미가 포함되는 거죠. 도대체 하나님만 섬기라는 것이 뭐냐. 이렇게 가면 또 이렇게 이야기를 많이 해야 합니다.

세가지중에서 한가지만 이야기했는데 다른 것도 다 그런 방식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그게 정말 사탄이 나타나서 예수님의 귀에 떠들었냐? 아니냐? 그런 식으로 질문을 한 것 같은데 그거는 성서읽기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그것을 기억하십시요. 다시 한번 오해하실까봐 마태복음 공동체에 필요한 삶의 자리에서 나온 신앙고백이라고 한다면 실제로 예수님의 공생애와는 연관이 없지 않느냐? 연관이 있습니다. 그게 어떻게 연관이 있느냐? 오늘 그것을 말하지 않겠습니다. 눈치 채실 분도 있으실 거구요. 아니면 이번 한학기 다 지난 다음에 그때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기독교 신앙을 탁탁 끊어서 이렇다 저렇다 가려고 하지 마시고요. 이러한 성서 텍스트 고백은 초기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나온 것이지만 예수님의 삶과 직간접적으로 깊숙이 연관되어 있다 요 맥락을 우리가 찾아 나서야 합니다. 그것은 그냥 주어지지 않아요. 신학적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말이죠. 그런 훈련들을 목사님들이 충분히 하셔야 설교가 가능합니다. 그게 충분하지 않으면 목사는 약장사가 되는 것이죠. 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