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가 뭐꼬? 8강(080228)
손 씻는 빌라도 할 차례이군요.
네 저는 그런대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하고 같이 어울려 살아야 되면서 동시에 사람들로부터 자유로와져야 한다는 이 두 사실, 두 사태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우리 이웃들 가족들 부터 시작해서 교우, 직장등등 여기 살아가면서 부대끼면서 살아가면서 인간적 연대성을 확실하게 유지하면서 동시에 그 관계로부터 벗어나는 능력, 그러한 태도가 동시에 필요한 것 같습니다. 사실은 쉽지 않거든요. 그런 것들을 역동적으로 잘 끌어갈 수 있는 힘이 어떤 삶의 능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두 가지 사실 앞에서 긴장을 잘 유지하면서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건강해지는데요. 그게 힘들다고 말씀드린 거거든요. 그게 왜 힘드냐면 두 가지가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잡아내기 쉽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는거죠. 그냥 사람들과의 관계, 연대성속에서 늪에 빠지듯이 푹 빠져버려서 온통 그것만이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인양 살아가거나 또 한편으로는 완전히 무시하고 보통말해서 초월적, 영적으로만 치우치는 일들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두가지, 동료애적인 연대성을 확보하면서 동시에 근본적으로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와져야 되거든요. 사람들과 가까이 있으면서 멀리있는, 사람들과 밀착된 관계에서 인간적인 삶을 누리면서 동시에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그러한 삶의 능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게 기독교 영성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한 균형이라고 할 수 있구요. 긴장이라고 할 수 있는, 제가 자주 표현하는 용어로 말하자면 변증법적인 관계를 끌어가야 하는게 쉽지가 않는데 그것을 배워야 하는지, 자기가 스스로 혼자 노력해서 될는지 말이죠. 그렇습니다.

왜 인제 이런 말씀을 드리냐 하면요. 주변에 이렇게 보면 사람들이 그게 잘 안되더라구요. 대개 한국사람들은 정에 많이 약하기 때문에 인간적인 결탁, 이게 아주 강하게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지역감정으로도 나타날 수 있구요, 가족 이기주의로도 나타날 수 있구요, 개교회주의, 자기들 신자들끼리만 끈끈한 정을 나누는. 경상도에서는 계같은 모임이 많은데 동창회등 각종의 모임들이 많이 있잖습니까? 그런데 휩싸여 버린단 말이예요. 그런 것들이 자기 개인과 사회 공동체를 개방적으로 만들고 역동적으로 만들 수도 있긴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부정적인 쪽으로 작용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전에 우리 대통령선거를 할때도 지역적인 편차가 심했구요. 그런것에 비해서 영국이나 유럽사회는 인간관계가 상당히 cool 한것 같습니다. 장단점이 다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어느쪽이 옳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구요. 기독교 신앙적으로 볼때도 하나님 나라가 여기있다 저기있다는 말씀에 근거해서 본다면 교우들 사이에 신앙의 연대성이 굉장히 중요하구요. 그러나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하는것은 단독자로 설 수 밖에 없거든요. 어느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려면 신자들과의 관계에서 멀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교회 공동체나 신앙공동체를 유지하면서 가까우면서 동시에 떨어질 수 있는 그러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참 중요한 거 같네요.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그렇게 중요하지 않는 것 때문에 힘들어 하는 것 같아서 한마디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지금 지난 주에 걸쳐서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십자가와 부활을 같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십자가에 이르는 예수님의 몇몇 과정들, 공생애에서 하셨던 말씀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일을 짚었는데요. 오늘 우리는 그 다음 단락인 손씻는 빌라도 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체포를 당하시고요. 두번의 재판을 받으십니다. 하나는 종교재판이고 하나는 사법재판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대로 종교재판은 산헤드린공회에서 정식으로 받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 가기 전에 대제사장 관저에서도 심문을 당하고, 복음서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긴 있습니다만 크게 보면 두가지 재판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벌어진 종교재판이었구요. 여기서 오락 가락하면서 거의 선문답처럼 왔다갔다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었는데요. 결국 예수님을 심문한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의회는 예수님께 신성모독죄를 언도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신성모독적인 언사가 있었느냐? 그러한 행동이 있었느냐?는 보기에 따라서 다를텐데요. 그런 것 까지 오늘 우리가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어쨌든 종교 지도자들, 그들의 눈에 예수님의 가르침이 보기 좋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게 어느정도냐 하는 것은 사실 복음서만 갖고 이야기하기는 힘이 듭니다. 갈라디아 공부하는 중에 비치고 있기도 하구요. 초기기독교 형성이라는 책에서 보게 되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이후에 공동체를 꾸려나갈때 유대교와 그렇게 극단적으로 대립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놓고 본다면 유대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이 얼마나 있느냐는 것에 대해서는 좀 우리가  다르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신성모독죄을 언도 받았구요. 이 신성모독죄는 그렇게 보일만한 부분들이 많이 있었을 겁니다. 산상수훈에서 선포된 반 율법적인 명제들요, 모세가 이야기한 것을 너희가 들었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것들이 속된 표현으로 눈꼴 사나왔을 것입니다. 성전을 허물라고 하는 이야기등등 그런 것들이 예수님이 직접적으로 하신 말씀에 얼마나 가깝냐 하는 것도 어렵기는 합니다만 성전을 허물라 사흘만에 짓는다. 그런 것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비유적으로 설명했다고 복음서 기자들이 이야기하는데 직접들은 제사장들은 기분이 나빴다고 하는겁니다. 그러한 복음서 보도들이 객관성이 있느냐 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입니다. 전혀 근거가 없다는 것이 아니고요. 상당히 복잡한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내려온 전승이기 때문에 우리는 한 두마디만 끊어서 기독교의 가르침으로 독단적인 방식으로 전하기는 힘들구요. 전체적인 성서의 맥락과 전체적인 기독교와의 관계를 잘 염두에 두고 하나하나  짚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서를 읽을때에 어려움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쉽지 않는 이야기죠. 어쨌든 예수님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신성모독자로 선언되었고 산헤드린은 그 당시에 사형을 내릴만한 권한이 없었어요. 식민지 시대래서 로마의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서 사법적으로 처리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넘어가서요. 종교적으로는 신성모독이었구요. 사법적으로는 뭘까요? 빌라도에게서 받은 재판이 사법적인건데요. 여기서 벌어진 이야기도 제가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되겠지요. 서로 이야기가 왔다갔다하구요. 복음서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긴 있습니다. 여기에 전체적인 뉘앙스로 본다면 빌라도가 예수님을 사형을 내릴만한 대상이 아니다라고 생각한것으로 복음서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건 몇가지 에피소드가 오긴 하거든요. 자기 아내가 예수의 재판에 너무 깊숙히 관여하지 말라 그런 이야기도 들었구요. 또 그런 자기의 생각을 민중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유월절에 죄수를 석방하는 풍습에 따라 그를 살려주려고 그런 시도도 했구요. 나중에 손을 씻으면서 자기는 이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퍼포먼스도 벌입니다. 하여튼 복음서가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구요. 과연 실체는 뭐냐 하는 것이죠. 성서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그 실체하고 그 사이에 어떤 것들이 있거든요. 그 차이를 잘 잡아야 되는데 오늘 성서개론을 말하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부분에서도 한 두번 말한 적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 깊숙히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요 단락하고만 연관을 생각한다면 복음서는 기독교가 로마정부와 그렇게 적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쨌든 그거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고요. 요건 그렇게 넘어가겠습니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은 이야기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요. 어쨌든 저는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의 사형선고를 이야기하려고 했어요. 이것이 마지막 단락의 마지막 파라그래프인데요. 재판받는 장면의 이야기였습니다.

예수에 대한 사형선고는 유대 종교를 대표하는 산헤드린과 로마 정치를 대표하는 총독이 합작해낸 작품이다. 종교적 광신과 정치적 폭력이 인류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 우리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종교인이라면 종교인답게, 정치인이라면 정치인답게 자신들의 합리적 논리에 근거해서 행동해야 할텐데 역사는 그렇게 흘러오지 못했다. 더우기 이번 사건에서 비열한 것은 산헤드린과 총독이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산헤드린이 예수를 자신들의 종교적 권위에 도전한 인물로 판단했다면 유대의 사형법대로 돌로 때려 죽여야 했는데 그들은 교묘하게 빌라도의 정치적 힘에 기대보려고 했다. (물론 그당시에 사형권한이 산헤드린에게 없는 것은 분명하죠. 그러나 사형 그런 것들은 벌어졌거든요. 돌에 맞아 죽는 것. 산헤드린은 자기들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겠다는 의도로 예수님께 사형문제를 맡겼다는 것이죠.)빌라도 역시 자신의 정치적 판단에 따라 기왕에 자신이 사형선고를 내려야만 했다면 끝까지 자신의 정치적, 사법적 정당성을 붙잡고 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손씻는 몸짓으로 자신의 불가피성을 비굴하게 합리화했다. 악은 그렇게 좀스럽다.

표현이 적절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 사형 언도를 했는데요. 그게 세기의 역사적으로 벌어졌던 오판이었을까요? 아니면 바른 판단이었을까요? 빌라도는 상당히 높은 직책이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의 지방장관은 독특한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지역에 총독으로 왔다고 하면 로마에 가서도 한몫할 만한 사람인데요. 그가 근거없이 예수를 죽이라고 내놓지는 않았을겁니다. 그 당시의 재판근거가 문서로 남아있지 않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가 빌라도의 재판을 객관적으로 잡아내기는 힘들기는 하겠습니다만 그냥 우리가 일반적인 것을 전제하고 그 상황을 좀 유추해본다면 빌라도는 분명히 예수를 처리하는 것이 로마의 법 정신에 맞다고 생각했겠죠. 물론 복음서에는 군중들이 예수님이 아니라 바라바를 살려라 이렇게 까지 아우성을 치는데 그런데 빌라도가 조금 자기의 몸보신, 정치적인 이해타산에 따라 자기의 판단을 굽혔다. 그런 뉘앙스로 성서보도를 우리가 읽을 수 있습니다. 빌라도가 타협을 한거죠. 그러나 일반적인 것을 놓고 본다면 총독이 그렇게 이런 걸로 타협할 사람이 아닐겁니다. 아마 예수에게서 반로마적인 요소들이 분명히 있었을거예요. 그게 얼마만한 것이냐 하는 것은 두번째 문제고 그러한 근거가 있기 때문에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결국 최종적으로 사형언도를 내렸고요.

그것에 따라서 예수님은 로마의 사형제도인 십자가, T자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얼굴, 십자가, 손 바닥에 못박고요. 손바닥에 대못이 박히니 찢어지죠. 거기에만 무게가 달려 찢어지니 엉덩이에 받치고요. 가장 고통스러울 정도로의 무게를 감당하게 걸어둔다고 합니다. 보통 건장한 남자는 일주일 걸려있다고 그래요. 일주일동안 손바닥에서 계속 피와 진액이 다 빠지면서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죠. 혼미하고 왔다갔다하면서 가장 고통스럽게 죽죠. 물론 다 드러내니까 일벌백계식으로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그러한 잔인한 사형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체력이 약하신 것인지 6시간만에 돌아가셨습니다. 성서가 그렇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여기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가상칠언이라고 하는데요. 가상칠언중 한마디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입니다. 그 가상칠언이 어떤거냐 하는거는 거기에 써두었구요. 여러분 강의안을 보면 잘나와 있을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이런 외침을 호소하셨다 그런 이야기인데요. 예수님이 십자가 달리실때 에피소드를 제가 잠간 묘사를 해두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자세한 묘사를 좀 했구요.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숨 막히는 순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면이 복음서에 묘사되어 있어요. 그게 제비뽑기였어요. 그 장면에 있을만한 사실이 아닌 것 같은데 이 사실을 네 복음가 모두 증언하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몸부림치면서 죽음과 투쟁하고 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제비뽑기, 일종의 여흥에 빠져 있습니다. 정말 어울리지 않는 두 모습이 거기에 있어요. 이게 역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자는 모든 것을 잃어가고 있는데 십자가 발 밑에 있는자는 모든 것을 잃은 자의 작은 것마저 빼았는다. 이것이 인류의 역사가 아닌가 하는거죠. 이와 비슷한 일들이야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노동, 목회현장, 가족안에서도 있겠구요. 곳곳에 있습니다. 한 쪽은 있는 작은 것마저 다 빼앗기는데 다른 한쪽은 그 안에서 그 상황안에서 더 차지하려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톨스토이 부활을 각주로 조금 인용을 했습니다. 러시아 상황에서 벌어진 이야기인데요. 위대한 작품은 읽을때마다 새로운 감동이 오죠? 카츄사의 재판장면은 이렇게 나옵니다.

톨스토이의 「부활」을 보면 그 당시 러시아의 사회상이 잘 그려져 있다. 특히 사법부, 고위관료, 귀족, 부자들의 위선이 소외계층의 고통을 확대시키고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그들 스스로도 불행해진다는 점이 부각되어 있다. 예컨대 까쮸사의 재판 장면을 보자. 억울하게 살인사건에 연루된 가련한 창녀의 재판을 맡은 판사들은 사실을 밝혀내려는 마음 보다는 엉뚱한 일만 생각하고 있었다. (한 여인이 사느냐 죽느냐는 절박한 순간에 판사들은) 자기 아내와 싸웠던 일, 대충 재판을 끝내고 내연의 여인을 만나기 위해 호텔을 찾아가야할 일, 혹은 소화불량 같은 일에만 신경을 쓴다. 그러니 재판이 옳바로 진행되겠는가. 검사도 그 사건 자체에 대한 관심 보다는 어떻게 일을 처리해야 판사들의 눈에 들어 출세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만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배심원들도 역시 까쮸사의 성적 매력에만 마음을 둘 뿐이었다. 결국 이들의 무사려한 태도, 어느누구도 카츄사의 운명에 관심이 없어요. 결국 까쮸사는 입장을 변호했지만 살인혐의로 실형을 선고받는다. 종신형을 받고 떠나게 되죠. 자기의 몸을 버리게 했던 남자(네퓰리도프)가 따라 온다는 이야기죠. 이거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는 이야기인데요. 말씀드렸습니다.

가상칠언중의 하나인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왜 예수님께서 그 절박한 순간에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다고 하는 경험을 하셨을까요? 왜 그랬을까요? 제가 여기에서는 길게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른데서 한두번 말씀드렸기 때문에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때도 이 잔을 물리쳐달라고 인간적인 호소를 하셨구요. 마지막까지 예수님은 뭔가 불안하셨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성서가 예수님이 불안하다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고 그냥 자기의 길을 가시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건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와 똑같은 30대 초반의 한 남자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다가 그렇게 죽음을 목전에 두었을때 두렵지 않겠어요? 죽음 자체보다,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두려움이기라기보다는 자기가 살아왔던 자기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라고 말할 수 없지만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이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모든 것을 다 던져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이 절망적이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그러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힘들겠어요. 본인이 죽는 것은 받아 들인다 하더라도 다른 가능성이 좀 보여야 되지 않습니까? 제자들이 내 일을 이끌어간다든지 어느정도 본인이 없어도 하나님나라의 운동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을 좀 보았으면 했는데 전혀 그것이 보이지 않으니 막막한 거예요. 사실은 막막하게 돌아가신 것입니다. 어떤 희망도 없이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떻게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렇게 예수님께서 호소하십니다.

그게 무슨, 그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유기, 버림을 받는다고 하는 사실이 뭐냐 하는 것이죠? 그 의미가 뭐냐 하는 것인가를 좀 정리를 했는데 보시죠? 오늘은 어떻게 된게 기독교가 뭐꼬? 내용보다 자꾸 설교쪼로 나가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상황에서 구원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종교다. 화려한 교회장식과 의식들이 문제가 아니라 오늘의 세계 안에도 여전히 이러한 하나님으로 부터 버림받은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고 하는 점을 눈여겨 보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여기서 잘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상황,  예수님은 이미 그 안으로 들어가신 겁니다. 누구도 원하지 않는 실패라고 하는 상황, 거기서 부터 하나님의 참된 희망이 시작된다. 하나님의 행위가 거기서 부터 나온다는 것을 전하는 겁니다. 참 중요한 겁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않아요. 모든 것이 많이 있어야 되고 가능성이 있어야 되고. 지금 장관 후보 청문회하고 있죠. 거기에서 사회에서 가장 잘 나간다고 하는 사람들, 부러워하는거거든요. 그것은 일반세상이 판단하는 방식입니다. 기독교도 그러한 쪽에 휩쓸릴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많이 그래왔구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명실상부하게 신앙의 토대로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우리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우리의 삶을 풀어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상황, 그 문제와 직면해야 되는 것입니다. 말을 그렇게 합니다만 나도 그런 것 싫습니다. 편하게 살고 싶기도 하구요. 좀 대화가 통하는 사람과 만나고 싶기도 하고. 시간을 그렇게 보내고 싶은거거든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쓸데없이 보내지 않고 알차게 보내고 싶구요. 여유가 있으면 좀 문화생활을 하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삶요. 그것은 아니라야 되는것이거든요.

십자가 신학에 의하면 그것은 기독교 중심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는 자꾸 실패하고 지지리도 못나게 살아야되느냐? 그런 것은 아니죠? 그러면 뭐냐? 그게 십자가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떻게 되느냐는 것은 누가 어떤 객관적인 기준을 말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이게 아니고 저게 아니다 아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지 뭐뭐다 이야기하기는 힘든거예요. 그러니까 잘 살고 잘나가고 청부론 비슷한 들 이런것은 기독교 신학과는 거리가 먼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은 아닌거예요. 그렇다고 일부러 지지리 못나게 살아야 되느냐? 그런 것도 아닙니다. 일부러 이상하게 살고 게으르게 살고 하는 것을 기독교적인 삶이라고 하겠습니까? 예수님도 그런 것이 아니거든요. 어떤 길을 가다가 결과적으로 십자가의 길로 들어가신 것이죠. 처음부터 의도하신 것은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중요합니다. 하나님에게 버림받는 상태를 저주받은 것으로 생각하지 말자. 거기서 어떤 가능성,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가 가능한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이죠. 제 말이 너무 이상적, 교리적으로 들리시나요? 그렇다면 조금 기독교 영성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버림받고 절망적인 상황을 희망의 불빛으로 가득채우는 것이 기독교가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다라는 것이죠. 여기 문장이 이렇게 있죠.

스릴이 넘치고 고상하고 이름나는 일은 교회가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앞장 서서 할 단체나 사람이 많지만, (이 명박 대통령이 된 것을 감사예배같은 것을 소망교회 몇군데서 했을텐데 그런 것 하지 않는것 좋지요. 교회가 왜 그런 것을 하지 않아도 누구나 앞서서 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 가도록 하고요.)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처럼 절망하는 그곳에 함께 있어주는 일은 교회가 최후의 보루다. 물론 교회가 앞서 이 일을 감당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일을 이루실 것이다. 이게 바로 ‘십자가 신학’이다.

과연 이러한 곳이 어딜까? 좀더 생각해야 합니다. 팔복에 나오는 가난한자, 무조건 물질적으로 궁핍하다고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유기받은 것이라 생각할 수 없죠. 하나님으로부터 유기라는 것을 잘 생각하십시오. 진지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삶과 죽음이 전체 달려 있는 것이니까요? 이 말을 조금 더 여러분들이 실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이렇게 보충해서 설명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안계신것이 아닌가 하는 절망감속으로까지 들어가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안 계신것이 아닌가 하는 절망감, 그런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유기입니다. 더 이상 삶에 대한 의미를 찾기 힘든 상황이죠. 이렇게만 말해서는 정확히 전달이 안되는데 여기만 머물를수가 없어서 이렇게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마지막 호소까지 이야기였습니다.

이제 빈무덤인데요. 부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신 후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 가족무덤에 안장을 했고 거기서 벌어진 일을 제가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세세히 알고 있으니까요. 오후 3시에 운명하셨다고 합니다. 6시간만에 돌아가셨다고 하는데요. 체력적으로 힘드셨는지요? 안식일이 바로 시작하는 금요일이었기 때문에 안장만했지 장례절차를 밟지 못했거든요. 안식일 지난다음에 예수님을 따르던 여자들이 예수님의 몸에 향료를 바르려고 찾아왔다고 합니다. 장례절차를 최소한 밟으려고 했거든요. 돌문이 열려져 있고 천사들이 나타나 이런 저런 이야기,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복음서마다 표현이 달리 되어있는데 과정이 그렇습니다.

그 뒤로 빈무덤이거든요. 무덤이 비었으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그게 무덤이 비었다고 해서 무조건 부활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부활하신 예수님이 여러번 현현하셨다는 것을 여러번 이야기됩니다. 복음서, 바울이 전하는 것과 사도행전에 나오는 것과 부활에 대한 묘사가 ... 네 고건 넘어가고요. 조금씩 다릅니다. 제자들에게도 한 두사람에게 개별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구요. 열한제자 모두에게 나타나기도 하고 막달라 마리아에게도 나타나셨다하구요. 5백여 형제에게 나타났다고 하고요. 5백명이라는 사람에게 동시에 나타났다고하면 상당히 중요한 사항인데 복음서에서는 없어요.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가 복음서에서는 왜 이야기하지 않았을까요? 바울에 이야기에 의하면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에게도 나타났고, 칠삭동이 같이 태어난 자기에게도 나타났다고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데 복음서에 없는 이야기예요. 복음서가 말하고 있는 것이 옳을까요? 바울이 말하는 것이 옳을까요? 왜 서로 중복되지 않을까요? 아..복음서에 나타난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자마자 나타난 것이고 바울이 전한 것은 훨씬 후다 그렇게 이야기해야 될까요? 훨씬 후의 이야기이니 복음서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하면 그 차이가 해결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서나 일반서신이나 쓰여 진 시기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만 같이 움직인거예요. 복음서도 물론 조금 먼저 쓰여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 안에도 이미 교회안에 사도신경처럼 예를 들자면요 형식적으로 완성된 이야기도 있고요. 여러가지 종류가 있는데요. 그런 것들이 서신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서가 미리 쓰여졌기 때문에 바울이 말한 것이 들어가지 않았다고 하는 이야기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생각해야 될까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가 형성되던 지역과 바울이 편지를 쓰는 지역, 공동체가 지리적으로 차이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당시 2천년전 처음 기독교가 시작할때는 정보교환이 잘 안되던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예루살렘에 있었던 사람들하고 안디옥에 있었던 사람들하고 갈라디아지역에 있는 사람들하고 빌립보 지역에 있는 사람들하고 공동체들이 긴밀한 관계를 맺지 못했습니다. 소통하기 힘들구요. 그리고 서로 신앙의 내용들이 달라서 시간이 갈수록 연락을 안했어요. 이방인 기독교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한 기독교가 시간이 갈수록 점점더 멀어졌습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도 다르게 발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쨌든 그거는 제가 정확히 말씀드릴 수 있는 부분은 아니고 신학성서학자들이 이야기를 해야 될 것 같은데요. 아마 그분들도 이 부분에 더 정확하게 말 할 수 없을거예요. 저도 이야기하다 생각나서 하는 이야기예요. 복음서에 있는 부활경험하고 바울이 이야기하는 부활 경험 그 대상자들이 차이가 있을까 하는 것이죠. 생각을 해 보십시오. 신학석사학위논문으로 성서신학에서 이런 것을 잘 짚어도 충분하리라 봅니다.

이런 사태는 부활이 뭐냐 근본적으로 그런 것과 맞물려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죽었다 사는 것으로 생각하는 거거든요. 그렇게 생각하면 이런 차이들을 해명할 수가 없습니다. 40일동안 지상에 있다가 승천하셨다고 하셨잖아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승천하셨다니 어디로 가셨을까요? 생각해보세요. 40일동안 딱 계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40일이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을 아시죠? 예수님이 40일동안 광야에서 기도하셨고 모세의 40년 광야 생활 목자생활등등, 40이라고 하는 숫자에 의미가 있는 것이고요. 예수님이 지상에 며칠 있었는가 하는 것은 사실은 잘 모릅니다. 이러한 것들이 구약성서에 기초해서 해석되는 것들인데요. 요런 문제들이 사실 좀 까다롭습니다. 내가 자꾸 여러분들을 어떤 면에서 혼란하게 복잡하게 말씀드리느냐 하면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있는 부활 개념을 땅에 좀 내려놓아라. 여러분의 머리에 부활의 개념에 너무 확실하면 성서가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부활속으로 들어가기가 힘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 앞에서 두 가지 질문을 일단 할 수 있습니다. 강의안에 직접 나온 것은 아니고요. 읽으면서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는 있고 하나는 없고요.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예상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공생애 동안에 예수님께서 죽음에 대해서 부활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서너번 언급한 것으로 나와 있는데 그러나 실제적으로 예수님 십자가 사건이후로 제자들은 전혀 예수님의 부활을 전혀 예상하지못한 것처럼 복음서가 보도하고 있습니다. 앞뒤가 맞지 않잖아요? 왜 제자들이 맹탕입니까? 몇번 들었으면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든지 아니면 무덤이 비었을 때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했음직 한데 전혀 그런것이 보이지 않고요. 예수님이 직접 현현하셨을때나 그것을 알았다고 했는데 알았다고 하더라도 부활했다고 하는 것을 실증적으로 알아들은 것이 아니예요. 그냥 혼란스러운 것이예요. 죽은 사람은 땅에 들어가서 썩어야 하는데 그렇게 있었으리라 생각한 선생님이 자기들앞에 나타난 것이예요. 이걸 어떻게 제자들이 해석할 수 있습니까? 해석이라기 보다도 어떻게 받아들일 있을까요? 도저히 안될일이 벌어진 것이예요. 허깨비, 귀신 본 것 같다고 생각한 것이 당연합니다. 복음서에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고, 갈릴리에서도 만나고 금방 공동체가 예수 이후로 된 것처럼 사도행전도 그렇게 나오고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부활의 경험은 상당히 산만한 것이예요.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복음서에서도 논리적이라고 말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부활은 더 확실한 것이죠. 만약에 이것이 꾸민 이야기라고 한다면 마술을 부려서 상상력에 의해서 합리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렇지 않고서 어느 누가 부활을 믿겠어요.

그러나 복음서는 생생하게 자기가 직접 본것처럼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부활했는지도 몰라요. 그냥 무덤이 빈거만 확인된 것이고 그냥 자기들앞에서 몇번 나타나셨다고 한 그것만 확실합니다. 그런 것들이 확실하다고 해서 아 바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하는 생각을 금방했을까요? 천만의 말씀, 그렇지 않습니다. 그 기간이 얼마인지도 모르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게 얼마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확신할 수 없었다 제가 딱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게 뭔지는 몰랐다 그것은 확실합니다. 그게 인제 앞서 제가 바울의 이야기를 끌어들여서 말씀드렸는데 그게 그 차이를 설명해줄 수있는 단서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5백명, 누구누구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상당히 후대 이야기이거든요. 부활의 주님이 승천하셨다면 40일만에 딱 승천하셨다면 지상에는 더이상 없어야 되는거잖아요. 바울은 그 이후로도 후속보도를 하는거예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바울이 경험한 부활의 주님은 실질적인 주님이 아니라 환청, 환각, 실존적인 깨달음에 불과했을까요? 이미 부활 승천하신 다음에 예수님을 경험했다면 시간적으로 보면 당연하니까요? 그 다음에 부활을 경험했다면 시간적으로 맞지 않는 이야기거든요. 여기에는 어떤 것이 있는거예요. 예수님의 부활의 리얼리티가 특이하다고 하는 것, 그거를 자꾸만 우리가 죽었다고 산다는 것으로 생각하는한 우리는 결코 성서가 말하는 부활의 실체에 들어가기가 힘들구요. 예 그렇습니다. 여기에 관계된 문제들은 너무나도 엄청난 것이 많이 있기 때문에 제가 딱딱 끊어서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산만하죠. 앞뒤 왔다갔다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부활이 프로그램에 의해서 진행되는, 단순하게 죽었던 사람이 다시사는, 그런 것들이 아니라 우주론적으로 한번밖에 없었던 한번밖에 없는 사건이기 때문에. 유일회성이라고 하는 것은 지난번에 한번 나온 개념이죠. 어떤 것으로든 설명할 수 없는 그러한 사건입니다. 그런 것을 우리가 자꾸 설명하려고 하니까 모순에 빠지고 한계에 이를 수 밖에 없습니다. 부활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거죠. 우리가 말을 해야 된다면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야 합니다. 그건 말이 좀 우스운거죠? 제가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것인 것은 실증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시키는 것, 그것을 신학의 기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 왜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을 예측할 수 못했을까? 그만큼 그 부활은 제자들을 비롯하여 어느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생명 사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 이 문제를 생각하려면 구약의 묵시 문학과 연관해서 예수의 부활사건을 이해해야 되겠죠. 그것이 전체적으로 이렇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 제가 좀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되었네요.

첫번째는 제자들이 부활을 예측하지 못한 이유. 두번째는 부활현현이 왜 믿는 사람들에게만 인식되었을까 하는 것이죠. 저는 지금 부활의 실체가 무엇이냐는 것을 조금이나마 어렴풋하게나마 여러분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견죽 비슷한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왜 그게 믿는 사람들에게만 현현되었을까 하는거죠? 여기에는 부활의 독특한 것이 있는 것입니다. 마술도 아니고 과학도 아니고 기적도 아니고요. 기적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잖아요. 모세가 열가지 재앙을 바로앞에서 행했는데 기독교는 나일강이 피로 변한다고 하는 것은 그거는 히브리사람들만 아니라 거기 모였던 사람들이 다 볼 수 있었지 않겠습니까? 일반적으로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부활은 예수와 관계있는 사람들에게만 인식되었는가 하는 것이죠? 이상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부활은 예수님과의 특별한 관계속에서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의 세계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로 그 사태를 정확하게 전달한 것은 아닌데요. 그렇습니다. 다시 한번 전체 그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런거예요. 예수님이 부활사건은 실험실에서 우리가 반복해서 증명해낼 수 있는 생물학적인, 물리학적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구약성서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묵시문학적인, 그러한 새로운 세계를 향한 기다림이거든요. 그러한 이것을 설명해야 하겠네요. 묵시문학이라고 자꾸 말만하면 또 전달이 안되니까요? 전혀 다른 세계란 것이죠. 이 세계가 아니라 저 세계예요. 장소만 다른 세계가 아니라 생명의 질적인 차이라고 하는 것, 묵시문학이라고 하는것. 여러분들이 신학책을 읽으려면 신학 용어에 대한 충분한 전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런 것없이 신학책을 읽다보면 자꾸만 끊기게 되거든요. 제가 설명하면서도 그런 어려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묵시문학적인 차원에서 봐야 하는데 바로 그것은 질적으로 다른 생명, 어떤 생명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이 땅의 어떤 것으로도 비슷한 것으로 말할 수 없는 거죠. 아 그렇다면 허황된 것이다. 세상에서 확인할 수도 없는 그런것, 말장난 아니냐? 그런 것을 어떻게 기독교 복음을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느냐? 여러분 거기서 주눅 들지 마세요. 거기서 기독교신앙의 특성이 있고 그것은 근거가 확실한 것입니다. 가능한 이야기를 하는거예요. 그리고 거기에 모험이예요. 기독교 신앙은 거기에 우리의 모든 것을 다 걸었습니다. 그거는 종말에 가서는 다 드러나는데 그때까지는 우리는 이 세상안에서 진리론적인 투쟁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에게서 이 세상이 마지막 끝날때 우리가 참여하게될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되셨다 하는 것이죠. 부활에 대해서 우리가 더 이상 많은 이야기를 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할수는 있죠. 그러나 큰 틀에서 볼대 기본 방향은 그렇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부활이 허무맹랑한 것, 그리고 이 세계 물리학이나 생물학이나 그런 것에 비해서 아주 근거가 부족한 것은 아니라고 하는것입니다. 전달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말이 좀 말이 왔다갔다하는 것 같네요.

부활의 두 가지 관점을 제가 일단 질문으로 드린거고 질문하면서 대답도 대충 된 것 같습니다. 자연과학과 부활 관계가 여러분들이 조금 불확실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어서 각주로 설명해 보았습니다.

자연과학을 신봉하는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의 이 부활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려고 들 것이다. 과학적으로 말이 안된다고. 그러나 과학만이 진리를 드러낸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게 아닐까. 부활은 하나님이 이루게 될 종말사건이며 종말희망이며 종말적인 신뢰인데, 이것을 과학적으로 논증하라는 주장은 과학의 자기한계를 넘는 발언이 아닐까 모르겠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이론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같은 현대물리학을 끌어들일 필요도 없이 최소한의 직관만으로도 이건 분명하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과학이 시간의 실체도 아직 풀어내지 못하고 있는 마당에 종말론적 진리까지 과학적 증거로 재단한다는 것은 과학만능주의적 발상이 아닐른지. ...저는 과학이 하나님 ... 고 실제적인 문제를 제기하자면, 자연과학이 인간과 우주의 미래를 위해서 지금까지 무엇을 감당했으며 앞으로 감당할 몫이 과연 무엇일까라는 것이다.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했을 뿐이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하고, 많은 것을 생산하긴 했지만 자연의 조화를 깨뜨리고, 우주를 여행할 가능성을 열었지만 자기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유럽의 중세기 때 처럼 신학적 도그마가 자연과학을 규정해버리는 행위를 종교적 독단이라고 한다면, 역으로 오늘의 과학이 신학적 진리를 자신들의 틀 안에 가두려는 태도도 역시 자연과학적 교만이다.

이런 말을 자연과학자들이 동의할 수도 있고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좌고우면 할 필요가 없구요. 기독교가 진리에 이르는 고유한 길이 있다고 하는것인데 그게 전달되는 지 모르겠어요. 부활을 놓고 이야기한 건데. 다른 것도 연관됩니다만 이것이 이땅에 있는 생명형식과는 질적으로 다른, 그래서 우주 역사에서 한번밖에 일어나지 않고 궁극적으로 일어나야할 생명이라는 사실. 그렇게 우리가 말하는 것이 터무니 없는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가 기독교 신앙이 진리에 이르는 크리스토롤로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독론적인 진리추구, 기독론적 해석학이라고 해도 좋구요. 예수에게 일어난 사건으로 진리를 파악하고 그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잇죠. 하나님 나라도 종말이지만 이미 성취되었다고 신학적으로 이해하잖아요. 자연과학자들은 그것은 형이상학이다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실증적인 것이 있어봐야 얼마나 있습니까? 우리가 지금 앞에 있는 책상도 없어지고 다른것으로 변해버리고 말이죠. 다 그렇게 되어버리는데 실증적인 것이래야 얼마나 되겠어요? 그렇다고해서 자연과학세계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나 길은 다른거예요. 실험과 데이터를 통해서 진리에 도달하는 것하고 계시론적으로 진리에 도달하려고 하는 기독교 신학교하고는 보편적 진리라고 하는 같은 토대를 갖고 있지만 배타적인 것은 아니예요. 자칫하면 배타적인데 그것은 또 연결될 수 있습니다. 다른것은 제쳐두고 제가 여기서 강조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기독교가 이 세계와 이 세계안에서 벌어지는 하나님의 계시를 바라보는 독특한 눈을 배우자. 시각적 영성을 좀 배우자. 그 안에서 우리는 부활을 새로운 질적으로 변화된 생명사건으로 충분하게 자연과학과 배치되지 않으면서 독특한 관점으로 그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중간에 설교조로 많이 이야기했는데 마무리는 설교조가 아니라서 다행입니다.

뭘까요? 마지막 파라그래프가.
위의 신학적 대답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은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묻고 싶을 것이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고 영생을 받는 것 아니냐, 부활해서 예수님과 더불어 천국에서 잘먹고 잘살고 멋지게 지내는 것 아니냐?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줄수 있는 대답은 이와 같다. 아무리 부활의 세계에 대한 희망이 강렬하다고 하더라도 부활한 다음에 우리가 어떻게 살게될 것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라는 요구는 신앙적인 게 못된다. 하나님이 종말에 이루게 될 그 생명의 세계를 우리가 어떤 그림으로 구체화 시킬 수는 없다. 생각해보라. 지금 우리가 최상으로 상상할 수 있는 세계라고 해봐야 이 지상적 삶의 확대이며 그것의 연속에 불과한 것인데, (잘나봐야 얼마나 잘나고 얼마나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가 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런 삶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이 하나님이 온전하게 통치하게될 세계를 우리 인간의 상상력 안에 끌어당겨 고정시키기 보다는 하나님의 자유에 맡기는 것이 훨씬 신앙적인 태도다. 초대교회는 이렇게 열려져 있는 미래와 종말에 대한 희망에 근거해서 저주스러운 십자가에 달린 자(놀랍죠. 정말 그렇습니다. 저주스런 운명이야. 누구도 예수님처럼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를 하나님으로 믿었고, 결국 그런 믿음으로 유대종교와 로마정치와 헬라문화의 틈바구니에서 독자적인 정신세계를 완성시켜 나갈 수 있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왜 없어졌는가?

틀이 다른거거든요. 왜 몸이 없어졌냐 하는것은 말입니다. 그런 실증적인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으로 새로운 생명사건이라고 하는데 왜 몸이 없어졌냐 하는거죠. 왜 그랬을까요? 누가 대답을 해주시겠어요. 대답이 참 궁핍하네요. 뭐라고 이야기해야 될까요? 아. 우리 김혜란씨가 좋은 학생이네요. 선생이 대답을 못해서 쩔쩔 못하게 만드는 것을 보니까요. 제가 기억을 해두었다가 다음 주일 밤에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좀해주십시오. 우리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그렇게 넘어가도 되겠습니다만 질문하신

예수님이 자기자신의 부활에 대해서 알고 계셨을까요?
그것도 어려운 질문입니다. 몰랐을 가능성이 높죠. 알더라도 부활의 사실과 일치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명백히 알고 있었다면 그렇게 불안해 하실 이유가 하나도 없죠. 지금 여러분은 부활만 이야기하지만 기독교 세계 전체 속으로 들어가는 중입니다. 확실하지만 실증적이지 않은 그게 기독교 신앙이거든요.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두가지 중에 하나만 원하거든요. 실증적으로 하든지 하나님의 그 능력으로 살든지, 현실적이란 단어, 독일어로 비브리? 리얼리티가 차원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습관적으로 늘 이렇게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식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을 확실하다고 보는데 이런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새로운 확실한것, 그걸 기독교는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신랑이 올때를 기다리는 신부처럼요. 아마 그 세계가 오면 여러분은 깜짝 놀랄겁니다. 전혀 예상하지 않는 세상이기 때문에.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불안하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여태까지 익숙했던 것을 연장시키려고 해요. 기독교 신앙은 아닙니다. 하나님나라, 새하늘과 새땅이 아니라 헌나라이지요. 헌나라. 그런 것들에 사람들은 익숙하기 때문에 그쪽으로만 가는거죠. 여러분은 부활은 우리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생명의 변화라고 하는 것처럼 기독교 신앙은 바로 그것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참 여기는 그러니까 만약에 저도 좀 잘안되지만 그러한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면 정말 눈을 반짝 반짝  하고 있을거예요. 정말 그때는 깨어 있을겁니다. 전적으로 새로운, 바르트의 표현을 빌자면 토탈리터 알리터, 절대타자예요. 전적인 새로움이죠.  거기에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이 걸려 있습니다. 지상낙원은 아니죠. 지상에서 노동이 해방되고. 이거는 세상의 사회과학이 다하는거고. 그럼 이런걸 무시하느냐? 실증적인 세계를 포기하는 것은 아닌데 이게 전혀 다른 쪽으로 변화 되는 거예요. 그게 어떤 쪽인지 우리가 도저히 감당하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그게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큰 설레임과 기다림인지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러한 기독교 신앙이 말하려고 하는 영적인 신앙에 들어가게 되면 늘 기쁘고 평화와 하나님의 통치를 같이 살아갈 수 있겠죠.

고맙습니다. 전적인 새로움. 그거 오늘 기억하고 가십시오. 오늘 밤에 주무시면서 전적인 새로움을 꼭 생각하세요.  부활의 능력은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시죠. 어떻게 예수님이 내가 부활하겠다고 부활하시겠습니까? 그러면 왜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까? 예수님은 무덤에서 죽음에서 싸워서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것이예요. 수동태, 깨움을 받은 거예요.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클라라님 화일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