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강(080306) 세계 교회의 역사

하루도 여러분 재미있게 보내셨어요? 다들 살아계시구요. 이런 인사가 의례적인 것 같기는 한데 우리가 살아있다고 하는 게 특별한 일이니까 그렇게 인사를 드리는 것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아직까지는 우리가 살아 있습니다. 아직까지 입니다. 그게 길지 않는데요. 그렇게 표현하는 것보다 살아있으나 죽은 것과 비슷한,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그렇게 명확하지 아니한  그것이 우리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네 그건 그렇구요.

요즘 제가 기독교가 뭐꼬? 라고 하는 이야기를 계속 끌어가고 있고일주일에 두번 만나서 이야기합니다. 계속 제 머리 속에도 남아있습니다. 주일날 예배드리면서 말씀을 전하고 . 그런 것들이 다 저의 영적인 순례의 한 순간들입니다. 고런 것들이 저에게 나름대로 조금은 준비가 된게 아닌가 싶습니다. 충분할 정도로 준비가 아니지만 그냥 그런대로 준비가 된것 같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제가 강의를 하거나 설교를 할때 그것이 남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소화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죠. 소화된 거는 그만큼 어느 정도 이해한다는 말도 되구요.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말하는 그 사실, 말하려고 내용들, 말하는 행위, 글쓰는 그 행위 전체가, 거기에 내가 존재론적으로 참여한다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에개는 어떻게 전달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설교를 해서 신자들을 어떻게 잘 변화 시키고 그래서 교회를 부흥시키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단 내가 설교하는 행위 자체에 집중한다고 하는거죠. 그러다 보니까 내가 목요일 주일밤, 주일예배때 설교하는 것이 늘 제 머리속에 남아 있어요.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기도 하겠습니다만 어쨌거나 그런 것들이 계속 머리속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것이죠. 사유운동이라고 하는 것이죠. 제가 성숙한 정도에 따라서 그게 달라지겠지만 어쨌든 그게 그렇습니다.

제가 월요일마다 포항에 가서 강의하고 있는 갈라디아서 그것도 그렇습니다. 이런게 제가 조금 시간의 압박감을 받으면서도 그런 강의를 하는 것이 저에게 개인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어요. 그런 것들이 다 나름대로의 저의 생각 영성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니다. 어저께는 수요일 강의, 시편강해 이런 것들 하나 하나가 저의 살을 끌어가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오늘 여러분과 이야기를 하려고 생각을 정리하다가 이러한 갈라디아서 강의와 연관하여 정리를 해야되겠다고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런 것들의 오늘 강의하고 직접 관계가 있지는 않을거고 간접적으로 연관이 됩니다. 제가 왜 관계되는 것은 뒤에 말씀드리겠구요.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구요. 어쩌면 강의 내용보다도 제가 과외로 말씀드리는 것들이 더 중요할지 모르겠습니다. 실제적으로 대학강의도 마찬가지인데요. 정보의 양이라 가는 것은 작기 때문에 그냥 지나가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인문학, 철학 그런 것들뿐만 아니라 물리학 자연과학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그러한 하나의 과정을 통해서 학생이 얼마큼 자연과학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게 핵심이지 않겠어요. 그래서 나중에 과학도과 자기 나름대로 고유한 자연과학의 길, 사유나 길 똑같은 것이니까요-을 갈 수 있는게 중요한 것이죠. 그래서 직접적으로 우리 강의하고 연관이 없다고 하더라도 제 머리속에 떠오르고 있는 부분이 짚으려고 하는 내용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난번 강의하고는 또 연관되네요. 복음서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우리가 잠간 생각을 했습니다. 복음서와 서신이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갈라디아서 강해를 하면서 더욱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캠코더 켜시고) 바울이 복음서의 내용을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이건 신약성서학자들이 더 깊이있게 다루어야 할 문제인데요. 제가 그것에 대해 확실한 대답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저도 여러분들과 똑같이 상식적으로 생각한 부분들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서와 서신들이 사실 같은 시기에 기록된 것이거든요. 어느것은 빠르고 늦고 같이 엉켜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성서에 각권들을 권위가 있는 어떤 단체에서 획일적으로 쓴 것이 아니라 서로 다 다른 곳에서 된 거거든요. 지금 뭐 문자 올려주신 분 이야기도 맞습니다. “법률 공부하는 것은 벌률 자체가아니라 legal mind를 갖추는 공부하는 것과 같네요.” 학문만 아니라 삶 자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방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삶이 길을 가는 제가 그것을 알아야 되는데요. 우리는 기술자가 아니라 도를 찾아가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렇게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다 그렇습니다 옆으로 나가지 말고 이야기로 들어오겠습니다.

복음서 서신들이요. 지금으로 말하자면 총회나 노회의 WCC의 최고의 권위를 갖고 있는 단체에서 체계있게 만든 것이 아니라 전혀 구심점이 없는 상태에서 각각 여러군데에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수집되고 문서화되고 편집되고 그렇습니다. 어떤 일관성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공동체하고 마태복음 공동체가 달랐어요. 서로가 다른 공동체가 있었다는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더 원친이 되는 예수님의 어록집같은 것은 공유된 것 같은데 그것도 차이가 있고요. 복음서도 그런데 서신은 오죽하겠습니까? 다 각각입니다. 서로 모르는 상태에서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진술한 문서들이 신약성서입니다.

바울이 복음서의 내용을 알았을까요? 참 생각을 많이 해야될 부분인 것 같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복음서를 알았다고 한다면,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바울이 복음서를 몰랐을 가능성이 훨씬 높기 때문에 그래요. 바울이 왜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을까 말이죠. 예수님은  우리가 지난번에 본 십자가와 부활을 자기 나름의 경험, 혹은 해석 그러한 세계관에 따라서 그것을 견지하고 있을 뿐이지 그 이외에 관해서는 침묵을 하고 있고 십자가 부활에 대한 역사적 사실성에 대해서 는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은 분명한 사실이잖습니까? 동정녀 마라아를 할때 한마디 비추었습니다만 바울은 동정녀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저 여자에게서 났다는 것만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복음서를 몰랐다것이 전제 될 수 있구요. 또 그가 생전에 한번도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었으니까 당연할 겁니다.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바울이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 것에 대해 해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직접 만나지 못했다고 앞서 짚은 복음서 등등을, 복음서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예수님에 대한 전승들은 곳곳에 알려졌을 테니까 그 전승을 알았다면 편지를 쓰면서 왜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요? 참 재미있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구 그렇습니다.

그런 것 하고 또 아울러서 유대기독교와 이방기독교의 차이는 얼마나 될까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공부를 여러분들이 사이트를 통해서 들어와 보신분들은 아시겠습니다만 유대적 기독교, 이게 초기 기독교의 원형입니다. 말하자면요. 그게 기독교의 못자리와도 같습니다. 예루살렘 원시 공동체라고 하는 그 교회가 유대식 크리스천입니다. 여기서 유대식 크리스처니티에서 크리스쳐니티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유대식, 여기에 초점이 있다고 봐야 됩니다. 그들은 강의 첫 부분에도 나와 있듯이 유대교로부터 독립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구요. 거기 머물러 있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와중 가운데서 이방 기독교와 갈등이 심해집니다. 이방 기독교의 태두가 바울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기독교와 바울이 세운 이방 기독교 사이에, 바울의 신앙과 예루사렘의 유대기독교 지도자들의 신앙이 크게 다릅니다. 교단이 다른 정도가 아니라, 장로교, 감리교다 성결교다가 아니라 같은 기독교안에서 교파가 다른 것이 아니라 아예 종파가 다를 정도 다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유대기독교 지도자들을 향해서 사악하고 간사하고 지금 우리가 이단을 대하듯이 대합니다. 제가 아직까지 확실하게 풀지 못한 문제예요. 갈라디아서를 공부하면서 절실하게 다가온 하나의 숙제입니다. 유대 기독교의 대표자는 야고보인데 베드로도 기독교 지도자의 대표에 속합니다.

바울과 베드로 말이죠. 베드로 성당에 가면 베드로와 바울의 상이 있습니다. 그럴 정도로 두 사람이 기독교에서는 쌍두마차와 같은 사람인데, 모르겠습니다. 그 갈라디아서에 의하면 두 사람 사이가 결코 같이 어울릴 수 없는 사이입니다. 네. 또 한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과 바울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생전에 예수님을 만나보지 못했다는 것을 몇번 짚어 드린 거구요.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의 공생애를 이야기하지 않고 순전히 케리그마로서의 예수님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문제를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역사적 예수를 죽이고 헬라화된 헬레니즘화된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있다. 예수는 빠지고 그리스도만 살아있다. 이 바울의 예수 이해를 다시 극복해야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참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우리가 오늘 문제들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고 일단 문제를 제시해드리는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 안에 있는 문제들을 지나는 중입니다. 처음 기독교 시작으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쭈욱 기독교가 뭐꼬 라고 하는 여행하는 중입니다. 처음으로 올라가서 내려오는 중입니다. 거기서 얽혀있는 사건들을 교회에서 듣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들을 조금씩 여러분들에게 나눠 드리고 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정확하게 이해를 한 것일까요? 아니면 흔히 누가 이야기하듯이 일종의 음모 비슷하게 바울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왜곡한 스도 있었을까요? 우리가 지금 여기서 다 풀어내기는 어려운 문제고요. 그러나 인제 방향만 분명히 말씀을 드린다면 그렇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바울이 예수님을 오해하지 않았다. 분명한 사실이구요. 다만 제가 여기서 조금 확실하게 정리하지 못한 부분은 예수님의 제자들, 베드로를 중심으로한 이 사람들의 전통과 바울에 의한 전통이 각축을 벌였는데 역사적으로 살아남은 파가 바로 바울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신약 성서안에는 다른 전통들도 굉장히 중요하게 들어와 있잖아요. 그러게 된다면 실제적인 역사안에 있는, 살아남은 기독교가 내용적으로는 바울의 신앙을 갖고 있는데 형식적으로는 베드로가 교황이니까 초대교황이고 가톨릭의 전통에 의해서 내려오는 것을 전제한다면 형식적으로는 여전히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것입니다. 이게 지금 잘 어울려 있는 상태인지 어울려도 될만한 것 들인지 아니면 임시조치로 그렇게 된 것인지 초기 기독교 3, 4세기에 그 당시에 성전이 경전이 되었으니까 바울이 유대기독교와 겪었던 그 갈등들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봉책으로 덮어버린 것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학문적인 검토를 거쳐서 말씀을 드린 것은 아니예요. 그냥 우리가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문제를 짚어 보고 들어가는 것이 조금 불안하기는 하지만 기독교 신앙의 진수로 들어가는 길이기 때문에 말씀을 드립니다. 예수님과 바울과 관계, 베드로나 이런 사람들보다 바울이 더 예수님을 정확히 이해했냐 아니냐 그런 문제도 그렇습니다만, 그게 다르냐는 것도 그렇습니다만 갈라디아서만 놓고 본다면 로마서도 연관이 됩니다만 참고적으로 갈라디아서와 로마서가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복음의 문제예요.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서 기독교 교리의 뼈대라 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초기 작품이고 로마서는 조금 후기 작품입니다. 거기에 주제는 같이 있어요. 바울의 신앙이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어떤 사상가든지 초기와 중기 후기 사상이 조금 변천해 간다는 그러한 일반론에 따른다면 갈라디아서에서의 칭의론과 로마서의 칭의론이 조금씩 차이가 있을수도 있습니다. 기본적인 흐름은 같다고 하더라도요. 성서신학, 신약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이 주제로 논문을 써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 나타난 칭의론 문제를 다루면서 사도 바울의 사상적 전기에서 후기로 변천되는 과장을 짚는 것 참 재미있을 것 같아요.그게 어떻게 가능한지는 제가 여기서 학위논문 지도교수도 아니고 말할 필요는 없는데요. 그게 있습니다. 문장 하나 하나에 작은 뉘앙스의 차이들, 이런 것들로 인해 차이를 분명히 짚어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바울의 관계에 있어서 거기서 우리가 전제해야 할 것은, 일단 다르다. 갈라디아서에 의하면. 유대 기독교의 지도자들의 예수님의 동생과 대다수의 사도들이 포함되는데 그들의 예수님이해와 바울의 예수님 이해, 예수님의 이해는 다른 것은 아닌데 결국은 달랐어요. 왜냐하면 유대기독교는 토라와 할례를 여전히 지켜야 된다고 강조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고 그분과 화해가 되고 의로워지고 전적으로 그분만을 통해서 은총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바울의 신학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거거든요. 이러한 차이가 당시 예수님의 사도들이 유대인들 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율법 토라를 내칠 수가 없어서 그냥 받아들인 것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기본적으로 기독론의 차이가 있는지 이거는 사실 힘겨운 문제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차이들이 신약성서 서신에 각각 나타나 있을가요? 그런 것을 가지고 베드로 전서 후서 그런 것을 가지고 베드로의 신학을 찾아 가기 힘듭니다. 그게 베드로의 편지라는 증거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바울의 편지의 7, 80프로가 바울이 원저자가 맞습니다. 다른 이야기가 길었네요. 문제들을 제가 짚은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린다고 그래서 기독교 정통 역사 이런 것을 회의적 불확실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많은 역사적인 힘들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뚫고서 기독교가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염두에 두어야 되구요. 그러니까 기독교의 가르침, 내용들, 도그마들, 하나하나가 치열한 투쟁가운데서 나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자연스럽게 풍요로운 기독교신앙이 꽃피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입니다. 황무지와 같은 거예요. 거기에서, 역사 안에서 여러사람들이 이런 저런 방식으로 참여하고요 논쟁하고 싸우고요. 그런 과정에서 기독교가 지금까지 버텨왔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버틸수 있을까요? 아니면 이러다가 시들시들해져서 예루살렘 기독교가 유대교에 합병되버리고 역사에서 사라져 버린 것처럼. 이게 참 역사의 아이러니죠? 베드로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세웠던 쟁쟁한 예루살렘교회는, 유대 기독교는 흔적이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사라진 거예요. 살아남은 것은 이방 기독교 바울이 된 것이거든요. 우리는 여전히 예루살렘교회가 기독교의 모체라고 생각하는데 따지고 들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역사적, 연대기적으로 따라 간다면 바울이 있기 전에 예루살렘 교회가 있었기 때문에 그게 원천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바울이 시작한 이방 기독교하고는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화합의 끄나풀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기독교가 살아나왔습니다.

혹시, 우리가 그러니까요. 기독교의 정체성을 바르게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면 유대 기독교가 토라와 할례를 겸해서 가다보니 그렇게 유대교와의 충돌을 두려워하고 타협을 하다 보니까. 그들이 믿음이 없었던 것이 아니예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이방인 기독교 바울과 비슷하게 있었습니다만은 그러나 유대교라는 범주를 벗어나기 않으려고 했었던 그러한 생각때문에 결국은, 물론 그 옆에는 역사적으로 우유곡절이 많이 소용돌이 치듯이 휘몰아간 그런 것이 있습니다만 어쨌던 그런 과정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역사에서 사라졌어요.

기독교도 그럴 수도 있어요. 여러분들 도저히 상상되지 않죠. 네. 그건 가능합니다. 뭐 몇백년 후를 내다보지 말고 몇 억년 후를 내다보세요. 몇억년후. 그때에도 여전히 기독교가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을것인가 말이죠. 아니면 무당, 샤머니즘 무당들이 고대에서는 정신세계를 지배한 주류 였잖아요. 지금은 변방으로 밀려났지 않습니까? 그런것처럼 기독교도 우리 삶과는 관계가 없는 작은 문제에만 해당되는 그러한 쪽으로 역사의 변방으로 물려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 전에 예수님이 오시면 좋고. 또 그렇지 되지 않을 거라고 제가 기대를 하고요. 그러기 위해서 그 역사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책임감이 큰 거죠. 유대 기독교와 같은 그러한 쪽이 아니라 바울과 같은 그러한 선택을, 그러한 진리를 향한 치열한 노력들, 투쟁들이 필요하죠. 그렇게 역사가 내려 왔구요. 제가 놓친 것 하나를 말씀드려야 겠군요.

예수님과 바울의 관계가 베드로보다 다른 사도들보다 더 월등하게 예수님에 대한 케리그마를 정확히 서술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 그런 대답을 어디서 찾을 수 있었을까요? 지난 월요일 포항에서 그러한 문제가 나오니까 어떤 박사과정에 있는 학생이 그런 대답을 하더군요. 코스웍은 이미 끝났고 논문을 쓰고 있는 것 같구요. 이런 예를 들더라구요. 자기가 조형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평전을 보았다고 합니다. 저도 그 책은 자세하게 보지는 않았지만 대충 훑어보기는 했습니다만. 그 전태일을 한번도 만나보지 그 변호사가 전태일보다 같이 살았던 보다 더 정확하게 전태일에 대해서 썼다. 그런 것처럼 예수님이 살았을 때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지만 만나본 제자들보다 바울이 더 정확하게 예수님에 대해서 쓸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 아니냐. 좋은 insight를 받았는데요. 그런 준비가 바울에게 주어졌겠지요. 그러한 초기 기독교의 (전화가 왔네요.) 바울이 그러한 준비가 된 사람이구요. 그러한 초기 기독교안에 있었던 굉장히 복잡한 그러나 중요한, 지금 신앙생활하는데 그런 것들이 그렇게 중요하냐? 정말 중요합니다. 뿌리로 돌아가는 거거든요. 만약 우리가 지금의 기독교만 보면 방향을 잃게 됩니다. 눈길을 걸을 때 미끄러질까봐 발밑만 보고 걸어가면 결국 뺑뺑돈다고 합니다. 멀리가지 못하구요. 조금 힘들어도 지나온 출발점을 보고 가야할 길을 봐야 하겠지요. 그래야 방향을 놓치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오늘의 기독교 신앙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하더라도 초기 기독교 안에 벌어졌던 복잡하고 진지했던 논쟁, 사태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방향을 놓치지 않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오늘 기독교 2천년역사를 쭈욱 훑어보려고 합니다.

세계 기독교 역사죠. 오늘 다 일일이 꼼꼼하게 살피지 않겠구요. 중요한 대목만 짚겠습니다. 나머지는 강의안을 참고 하시구요. 책이 있는 분들은 책을 참조 하시기 바랍니다.

첫번째 단락은 오순절 성령강림이예요. 요거는 주로 사도행전을 중심으로 한 것입니다 성령강림사건이 사도행전 말고도 다른데도 기록된데가 있을까요? 없지요. 사도행전이 기독교의 역사이긴 하지만 실증적인 역사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제가 말씀드렸구요. 역사를 다루면서도 어떤 시각이 있는 겁니다. 그 시각은 사도바울이 예루살렘 유대기독교 공동체와 크게 그렇게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사실을 변호하려고 했던 겁니다. 사도행전이 기록될때 그 시점  기원후 80-90년사이 이미 예루살렘 공동체는 망해져 버렸을때에요. 그리고 헬라, 그리스쪽에 세운 교회들, 로마교회, 이런 교회들이 명실상부하게 기독교 중심이 되어 있을 때입니다. 사도 바울이 뿌린 씨앗들이죠. 물론 사도바울은 죽었구요. 그때 누가라고 하는 이름을 빌려서 어떤 저작자가 자기 역사안에 살아있는 이방인 기독교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사도들의 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말은 많이 달랐기 때문에 복구하려고 하는 겁니다. 뿌리를 더 확보하려고 하는 역사적 근거를 예루살렘에 두려고 하는 그러한 해석학적 방향이 있었습니다. 그런 첫 출발이 인제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 임했던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입니다. 이 이야기는 제가 설명해 드리지 않아도 되죠? 오순절 성령강림.

여러분들은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순절이 된것이 아니라 오순절이라고 하는 유대인의 절기입니다. 부활절이 지난 다음, 부활절은 유대교의 유월절과 연관된, 유월절 시작할때 예수님의 부활사건 있었잖아요. 그때부터 오십일 후에 오순절이라고 하는데요. 유대 절기입니다. 이때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 강림한 사건인데요. 그때 성령이 강림하셨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성령은 이미 창조 사건때서 부터 있었구요. 기독교 삼위일체론 근거에 의하면 하나님의 존재 방식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는 분명 성령강림으로 되어 있죠. 그거는 초기 기독교의 특별한 신앙경험, 은사 경험을 저런 방식으로 설명하는 겁니다. 불의 혀같이 바람같이 이런 것들이 임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방언을 하게 되었구요. 그당시 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그런 현상들이 신을 경험하는 매개가 되었어요.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도 그런 것들이 중요했구요. 그리고 바울이 교회를 개척한 곳곳에 그러한 방언 현상이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서 같은데 보면 잘 나와 있구요. 광적인 신비주의 은사 운동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의 뿌리를 예루살렘 교회에 두고 있는거죠. 실제로 오순절날 그런 것이 있었나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 확실성이 없습니다. 제가 자꾸 여러분들에게 성서에 있는 것을 역사적 확실성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말씀드리는 것이 조심스럽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잘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무조건 다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더 근원적인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거예요. 누가라고 하는 사람이, 이름을 빌려서 사도행전을 기록한 사람이 저런 오순절 강림 사건을 묘사하게 된데는 반드시 역사적 사실로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있었다고 해서 누가 기록을 해두겠습니까? 사진을 찍어두겠습니까? 다 지나간 것인데. 누가복음이 80년대에 쓰여졌다고 한다면 50년전 사건인데요. 그 사건을 지금처럼 정보가 늘 잘 교환되는 때도 아닌데요. 한구석에서 부분적으로 일어났던 현상들을 그대로 직관적인 사실로 전달될 수 있었겠습니까? 이거는 누가복음 기자가 그런 방식으로 초기기독교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어떤 영적들이 사태가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한 거죠. 성령, 오순절날 성령강림한것이 기다 아니다 말하는 것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오순절 성령강림사건들, 어쨌든 그들이 특이한 영적경험을 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한 영적 에너지죠. 그런 것들이 없었다면 그들이 그러한 어려운 상황들을 잘 뚫고 나가기가 불가능 했을 겁니다. 요거는 이런 정도로 넘어가겠습니다.

방언이 어떻게 되었느냐? 다른 언어로 말하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 베드로가 예루살렘 사거리에서 말씀을 전하자. 아람어로 했을테니까요. 오순절 세계 곳곳에서 모인 사람들이 오순절에는 성지 순례를 온 사람들이 많았지요. 디아스포라는 아람어를 모릅니다. 이집트말을 쓰기 때문에요. 베드로가 아람어로 설명하는데  다 알아들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어떤 현상이엇을까요. 그러나 그거를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생각하려고 하면 조금 무리한 일들이 벌어질겁니다. 넘어가구요. 성령강림사건이후로 마가다락방이 초기 기독교의 출발이라고 이야기하구요. 예루살렘, 사마리아, 안디옥을 거쳐서 점점 멀리 퍼지게 되죠. 로마의 중심부까지 기독교가 들어가게 됩니다. 유대교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갈등, 제가 그 이야기를 조금 쓰기는 썼는데요. 책에는요. 그때는 미처 갈라디아서를 깊이 있게 공부하지 않을 때였기 때문에 유대 기독교와의 갈등이 더 컸다고 하는 사실을 정확하게 짚지 못했습니다. 책을 개정 증보하게 되면 그 부분들을 좀 보충할까 합니다.

구도가 이렇게 되어 있는 거죠 유대교가 있구요. 유대 기독교가 있구요. 다음에 이방기독교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물론 유대교와 유대기독교가 있었구요. 하나라고 봐도 좋습니다. 둘 사이가 나뉘지 않았어요. 유대교 안에 하나의 파였습니다. 초기에는 그러니까 이방인기독교와 유대기독교가 싸운거예요. 바울이 기독교를 박해한다고 하는 거는 박해하고 돌아섰다고 할때는 유대교로 있으면서 유대 기독교를 반대한 것이구요. 그러한 바울이 나중 이방 기독교가 되더니 유대기독교와 싸웠습니다. 유대기독교가, 사실은 바울이 유대 바리새인으로 있을때나 완전히 기독교인이 되었을 때 계속 싸웠던 대상이 유대기독교입니다. 이렇게 이방인 기독교가 유대 기독교와 완전히 싸울 필요가 없어요. 완전히 다르니까. 유대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유대적인 그대로 안고 있으니까  회색분자죠. 어떻게 보면. 이방 기독교가 볼때는 유대 기독교가 더 위험해 보일 수 있었을 겁니다. 제가 책에 쓴 내용은 보충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유대교가 기독교를 직접적으로 박해하지는 않았더라도 유대기독교에 압력을 많이 넣었어요. 70년후에. 그래서 유대기독교가 이방인 기독교와 가까와질 수 있었는데, 중간 입장에서요. 유대교의 압력으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현실 타협을 하고 유대교 쪽 입장에 많이 기울어지게 됩니다. 이때가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시기였던 것 같아요. 유대기독교 베드로와 중심되는 사람들, 70년경에는 다 없었을테지만. 말하다보니 또 다른 모순이 생기네요. 베드로가 로마에 가서 순교한 것이 맞나요. 그렇게 역사로는 나오고 있는데 그렇다면 유대교안에 머물러 안에 있었다는 말이 나오는데. 베드로가 로마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 그래서 초기 교황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역사적인 근거는 제가 보기에는 없는것 같습니다. 제가 여기에 대해서 학문적으로 충분하게 검토를 하지 않고 나와서 자신은 없는데요.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겁니다. 어쨌든 지나가고요.

유대교와 이방인 기독교사이에서 유대기독교가 샌드위치처럼 있었습니다. 70년 이후에 고 시점이 중요해요. 유대기독교가 유대교로 기울어집니다. 결국은 유대기독교는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죠. 만약에 유대기독교가 좀 힘들다고 하더라도 계속 이방인 기독교와의 관계를 더 강하게 했다면 기독교 역사가 조금 달라질 수도 있었을텐에요. 어쨌든 그것은 지나간 역사입니다. 유대교로부터 조금더 자유로와져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파워포인트가 다 없어졌습니다.) 유대교로부터 벗어나구요. 대신 로마로부터 박해가 심해집니다. 그 이야기는 콜롯세움에서 격투사와 싸운 이야기, 카타콤으로 들어간 이야기. 쿼바디스에서 보셨죠. 96년에 카타콤에 한번 가보았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박해를 피해서 땅굴을 판 것이 아니라 로마시에서 만든 지하공동묘지예요. 로마는 깨끗한 도시이기 때문에 법률로 무덤을 만들수 없게 했습니다. 계속 밑으로. 석회암을 파고 들어가서 묘지를 만들었는데 또 하나의 지하세계입니다. 그런데 가서 숨어 들어가서 그렇게 박해를 받다가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서 공인을 받습니다. 그게 313년예요. 그래서 제목을 313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기독교 역사를 한꺼번에 훑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몇 개를 아시게 되면 전체 흐름을 이해하시게 됩니다. 313년, 콘스탄틴 대제, 밀라노 칙령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인정받지 못한 종교에서 인정받는 공인, 공적인 인정을 받았습니다. 국교가 된것은 한참뒤인 391년 데오도시우스에 의해서 된 것입니다. 콘스탄틴이라는 사람, 기독교를 말할때 빼놓지 않는 사람인데요 국교화한 데오두시우스보다 더 중요한 사람으로 언급됩니다. 대단한 사람인데요. 역사적인 무슨 일을 했다고 하는 사람들은 독재자예요. 문제가 좀 있습니다. 기독교를 공인했다고 하는 것은 순수한 종교적 체험이라고 전쟁을 앞두고 환상을 보았다고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만 기독교를 이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콘스탄틴은 어떤 사람이냐? 직업군이 아버지와 여관주인 어머니사이에서 출생하였는데 아버지가 황제가 됩니다. 그때는 로마가 분열되어 있을 때입니다. 전쟁을 했지요.
그런데 이 사람이 재미있는 게요. 누이의 남편, 매제가 또 하나의 황제였었는데 죽였고 자기의 장남도 죽였고 자기의 왕위를 넘본다는 생각이었을까요/  자기 아내도 욕조에서 질식사 시켰을 정도로 권력에 방해되는 것은 다 처형해 버렸습니다. 콘스탄틴이후로 종교와 정치가 누이좋고 매부좋고하는 과정을 걸었습니다.

긴 과정에 대해서는 강의안에 썼으니 보시고요. 로마의 국교가 됨으로서 기독교는 손대지 않고 코풀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를 맞았지만 반면에 갈릴리 예수의 복음의 역동성 이런 것들은 상실해 가지 않았느냐 양면성이 있습니다.

그런 세월이 주욱 흐르다가요. 1054년 동로마제국인 콘스탄니노플이요. 여기의 주교와 서로마의 주교인 교황이 서로 파문을 하므로 교회가 분리됩니다. 최초의 분리죠. 서로마교회와 동방교회가 분리됩니다. 콘스탄티노플을 세운 사람이 콘스탄틴 대제요. 이스탐불이라고 하죠. 거기도 얽힌 사연이 많이 있으나 생략할테니 강의안을 읽어보시죠. 갈라지게 된데는 신학적인 이유도 있지만 정치적인 문제가 많이 들어갑니다.

그렇게 해서 세월이 흐른 다음에 1517년에 개신교가 또 분리되게 되지요.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마틴 루터, 신부죠. 그 사람에 의해서 종교개혁이 일어납니다. 그 내용도 여러분이 잘 아실테니까 제가 여기서 반복할 수 필요없습니다. 숫자 세군데 있죠. 313, 1054, 1517. 이 세숫자를 기억해 주십시오. 1517년. 마틴루터가 95개조항의 신학명제가 들어 있는 비텐베르크 성당 출입문에 붙였구요. 그것을 기점으로 해서 유럽전역에 종교 개혁의 불길이 퍼지게 요원의 불길처럼 퍼지게 됩니다. 루터의 개혁과정을 보면 단순히 신학적, 실증적 요소만 아니라 독일인들의 반이탈리아 정서가 강하게 작용됩니다. 종교와 정치가 결탁되어 있어요. 순수하게 종교적인 것만으로 이런 것들이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글쎄요. 그렇게 말하는 게 성령의 역사를 무시하는 말인지 모릅니다만 역사는 그렇게 많이 흘러왔습니다. 그런 정치의 흐름까지 성령의 역사라고 우리는 볼 수가 있죠. 마틴루터 앞서 많은 사람들이 종교개혁을 외쳤지만 다 실패하거든요. 정치적인 힘이 받쳐주지 않았습니다. 시대가 받쳐 주지 않으면 아무리 다른 이야기를 하더라도 희생만 당하지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영웅이 시대를 만드느냐 시대가 영웅을 만드느냐 그 말이 있듯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서로 딱 맞아 떨어질때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겠죠. 1517년입니다. 고 차이들이 뭐냐하는 것도 이야기를 했는데 그런 것도 여려분들이 강의를 읽으면 쉽게 들어오니 지나가겠습니다.

로마가톨릭과 개신교 신학적 차이를 마틴 루터가 이야기한 세 가지의 슬로건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솔라스크립투라, 신앙생활을 규정하는 자체가 성서냐 성서 더불어 교회냐 교회는 사제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사제의 수장인 교황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종이로된 성서와 사람이된 절대자 교황, 교회, 교황입니다. 성서와 교황이라고 보면 됩니다. 교회는 그들에게 교황이었죠. 이 두가지가 다 필요하다. 이런 권위로 기독교 신앙의 기준을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느냐 설명해 두었으니 보십시오.

두번째는 솔라피데요. 여기서 핵심은 의로움의 문제입니다. 이 의로움이 왜 중요하냐. 구약성서에도 그렇구요. 아브라함에게서도 그렇구요. 로마서의 주제이기도 하구요. 갈라디아서의 주제이기도 한데요. 이 의로움. 이런 것들도 여러분들이요. 그래 예수님 믿고 의로워진다 간단하게 생각하지 말고요. 충분하게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왜 의문제가 종교의 핵심이 되었느냐? 불의, 죄 다 연관이 되지요. 인간이 왜 죄를 짓는가? 죄로 인해서 불의해졌다. 죄라고 하는 것이 뭐냐 하나님으로부터 단절이다. 우리가 어떻게 교만이다. 등등 많은 것들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의로움이라는 하나의 창을 통해서 수십가지 기독교 신앙의 주제들과 생각할 수 있을때 그때 우리는 신학적 사유하는 능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됩니다. 의로움의 문제가 바울이 이야기한데로 루터가 이야기한데로 오직 믿음인가? 믿음과 더불어 행위도 필요한가? 이렇게 보면 로마 가톨릭교회가 행위를 강조하면 율법인데 유대기독교와 맞아 떨어지는 것 같구요. 지금 우리도 신앙생활이 복음 공동체라고 하지만 여전히 율법적이지 않습니까? 법이 많잖아요. 같이 해야 된다고 생각하잖아요. 믿는 것만으로 안 된다. 행위가 따라야 한다는 것, 거기에는 어떤 함정이 있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을 잘 모르고 하는 이야기인거죠.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실존, 존재 자체가 던져지는 행위, 결단, 신뢰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그런 믿음의 단계에 들어가게 된다면 이미 행위까지도 포함한거로 전제가 되어야 되는거죠. 그런데 행위를 믿음과 더불어 필요한 어떤거로 이해한다면 복음공동체가 아니라 유대기독교의 율법공동체에 가깝습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이런 성격이 강할걸요.

세번째는 솔라 그라티아예요. 이것의 주제는 구원입니다. 세가지를 이야기했는데 첫째는 삶의 기준, 의에 대한 것, 세번째는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세가지가 연관되기는 하는데 신학적인 개념을 나누기 위해서 정리를 한 겁니다. 구원이 루터에 의하면 오직 은총에 의해서 주어지는데 가톨릭에 의하면 은총과 더불어 인간의 업적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왜 그러느냐는 것들을 이야기하면 많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참고하십시오.

1999년 10월31일 로마 가톨릭 측의 에드워드 카시디 추기경(교황청 교회일치위위원장)과 독일의 루터교 세계연명 크리스티안 크라우저 감독은 독일 남부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열린 예배에서 놀라운 선언을 같이 나눕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 아닌 ‘신의 사랑’에 의해서만 정당화 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공동선언문에 서명했다. 이것만 놓고 본다면 로마 가톨릭교회가 개신교쪽으로 많이 넘어온 거예요. 이 공동선언문은 각기의 전통을 수호하면서도 서로의 신앙적 지평을 넓힘으로써 일치의 틀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루터교회는 아우구스부르크 신조와 소교리문답서만을, 로마 가톨릭은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만을 신앙적 기초로 주장했다. 이제 이 공동선언으로 인해서 지난 500년간의 종교적 갈등이 완전히 해소될 수 있을른 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 초보는 이룬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네 그렇습니다. 좋은 회의 였던 것 같습니다. 이게 마지막이죠. 아 하나 남았네요. 숫자가 많이 나왔습니다. 복습하는 차원에서 다시한번 살펴보시죠. 313년, 1054년, 1517년, 1948년 중요한 숫자들입니다. 1948년은 WCC의 창립창회가 벌어진 날입니다. 1948년 암스텔담에서, 이게 9차까지 되었죠. 제가 여기 1차부터 썼습니다. 1차: 암스텔담(네델란드, 1948년), 2차: 에반스톤(미국, 1954년), 3차: 뉴 델리(인도, 1961년), 4차: 웁살라(스웨덴, 1968년), 5차: 나이로비(케냐, 1975년), 6차: 벵쿠버(캐나다, 1983년), 7차: 캔버라(호주, 1991년), 여기서 우리 한국 여자 신학자가 가서 오픈예배에 설교를 해서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한쪽으로는 굉장히 호의적인, 한쪽으로는 문제가 있다 이런 쪽으로요. 전현경교수라고 아시나요. 이화여대 조직신학 교수하다가 지금은 뉴욕의 어딘가에 미국 어딘가에 신학대학의 교수로 가 있고 가끔 글도 쓰고요. 그분 어머니가 무당이셨어요. 그래서 신기가 있어보이기도 하구요. 미안합니다. 이런 말씀을 공개적으로 드려서요. 본인이 그렇게 많이 간증도 하구요. 아주 독특한 그러한 종교간의 대화 그런 것들 하고 있는데 저하고는 취향이 별로 맞지 않아요. 어쨌든 대단한 분인데 이때 떴습니다. 8차는 하라다구요. 그러고 9차가 2006년에 브라질 보르투알레베에서 있었습니다. 2년전이군요.

아쉽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없었습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세계적으로 그렇게 기독교 세력이 강한데도 우리나라에서 WCC가 열리지 않았다는 것이요. 짐바브웨같은 나라에서도 열리는데. 앞으로 우리나라가 통일되면 우리나라에서 열리지 않을까 싶네요. WCC 1차부터 9차까지 열렸던 이 문서들을 여러분들이 검토해 보면 세계교회의 세계 교회의 신앙적 신학적 관심도, 관심이 어디있는지 여러분들이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연관된 우리나라의 단체가 KNCC라고 합니다. 그냥 NCC라고도 하죠. 이게 한국을 대표하는 에큐메니칼 단체인데 요즘에는 힘이 없습니다. 대신 한기총 막강합니다. 돈 있는 대형교회가 다 한기총 지지하니까 KNCC는 힘을 잃었는데 뭔가가 비정상적입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도 그렇고 당연하다 용공주주의자다 그렇게 예기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니까. 1948년도에 WCC 창립총회가 있었구요. 그래서 개신교 에큐메니칼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고 그랬습니다.

네 끝이군요. 되었습니다. 2000년 기독교 역사를 한번으로 보았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있었던 성령강령 사건이후로 원시적인 기독교 모임이 시작되어서 거기는 강력한 은사중심의 모임이었죠. 이것이 예루살렘 전체와 유대 사마리아 그리고 갈릴리, 안디옥 주욱 퍼져서 세계 중심의 종교로 이렇게 확장되었습니다. 중요한 시기, 로마의 인정을 받고 동서교회가 분리되고 다시 일치의 세계로 가고 있다. 네. 유니온신학교군요. 네 맞습니다. 유니온 신학교. 거기에 전현경교수 종신교수인가 그렇게 있네요. 하여튼 우리나라 뛰어난 신학자로 뛰어난 활동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질문있으시면 급한거면 지금해주시고요. 아니면 동영상 메뉴에다 올려주시면 되겠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성서로 들어가네요. 5장은 구약성서, 6장은 신약성서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네. 수고했습니다. 오늘 편히 주무시고요. 다음 시간 있으신 분은 월요일 밤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