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2010년 11월3일, 저녁 8시, 시편 109편

저주의 악순환을 넘어서

시편 109편은 당혹스럽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입에서 저주가 쏟아지기 때문이다. 신약성서는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라고, 또한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가르친다. 스데반은 순교 장면에서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했다.(행 7:60) 이런 신약의 가르침을 근거로 구약의 진술을 재단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구약은 나름으로 고유한 ‘삶의 자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시편기자는 왜 탄원기도를 드리면서 저주를 쏟아내는가?

1-5, 분노

시편기자가 처한 상황은 억울함의 극치이다. 그가 헤쳐 나갈 수도 없다. 그는 무고를 당하고 있으며, 거짓 증언을 당하고 있다. 유대 율법에 따르면 두 세 사람이 공개적으로 증언을 하면 법적 효력이 있다. 선을 베풀었지만 악으로 되돌아왔다. 그의 배신감이 어땠을지는 상상이 간다. 시편기자가 저주를 쏟기 전에 이미 저주를 당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분노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가 하나님께 탄원한다는 것은 다른 비열한 방식으로 원수를 갚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향해서 중심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극심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저주의 기도가 시편에 묶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6-19, 저주의 내용

시편기자는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저주의 탄원을 올린다. 원수의 자녀가 고아가 되게 하고, 아내는 과부가 되며, 자손이 끊어지게 하라고 한다. 이 내용은 시편기자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당시의 일반적인 주문이다. 이 저주는 위에서 지적했듯이 시편기자의 대적자들이 시편기자에게 먼저 쏟아낸 것들이다. 시편기자는 이를 다시 반복함으로써 자기에게 내린 저주를 확인한다. 여기에 다른 이의 삶이 파괴되는 것을 보고 쾌감을 느끼는 인간의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 인간은 왜 그런가? 한 두 마디로 대답할 수는 없다. 인간성이 파괴된 일부의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지만, 모든 인간에게서 가능한 일들이기도 하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에서 말하듯 인간에게는 선을 향한 의지와 악을 향한 의지가 경쟁하고 있는지 모른다.

20-31, 저주를 넘어 감사와 찬송으로

20절에서 시편기자는 저주를 내린 이들에게 그 저주가 그대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여호와의 보응이라고 말한다. 겉으로만 보면 여호와께서 시편기자의 원수를 갚아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저주의 악순환을 넘어서려는 영적 통찰이다. 고대인들은 자신들의 저주가 그대로 전달된다고 믿었다. 시편기자의 생각에 따르면 이런 저주를 끊을 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다. 모든 재앙도 저주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것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 줄을 그들이 알게 하소서.”(27절)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원수들도 더 이상 저주하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다. 시편기자는 사람들의 저주에 화가 치밀지만 결국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라고 기도한다.(30절) 이것은 자기합리화가 아니라 정확한 영적 통찰에서 나온 고백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시어 그의 영혼을 지키신다는 사실에 대한 것이다. 생명의 가장 깊은 차원에서 지키시는 하나님을 알고 있는데, 어찌 감사와 찬송을 하지 않으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