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질문의 장소 마련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나름대로 많이 고민되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 있어야합니다."
구원받는 믿음, 구원받은 신자라면 언제가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제게는 매우 고통스러운 말입니다.
제 주위 적잖은 목사님들이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담임목사님도 "고등학교 수련회 때 인격적인 만남이 있었습니다. 수련회 그 때, 온 세상이 환하고 사랑스러워짐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고
원로목사님은 방탕하게 살던 어느날 밤중 자기 때문에 죽을 정도 고민하던 아내의 일기장을 보는 순간 허물어지면서 " * * 야" 하는 음성을 들으면서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 생겼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그런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중고등학교 때 동네 교회 그냥 다니다가 그냥 저항없이 청년부도 다녔습니다.
고등학교 일기장에 어느날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가야할 길이다"라고 써논 것밖에 없습니다
나이 좀 먹은 지금...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모든 말씀이 하나님말씀인 것,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기록인것, 예수님이 구세주되심을
지정의로 인정하고 믿고 신뢰합니다.
진짜로 제가 인격적만남이 없어서 구원과 무관하다면
지금이라도 무엇이든지 새로이 할 것입니다. "제가 한다" 이 말이 주님의 역사하심을 제가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만...
구원에 이르는 인격적 만남이 과연 무엇인지요?
PS 인격적 만남이 구원의 확신이기도 하나요? 빈손들고 옵니다의 심정입니다. 진심으로 ... 목사님 감사합니다...
정용섭목사님, 감사합니다.
답글 보자마자 인사글 올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여러번 읽어보느라고,
찾아보니 '하나님의 인격성'이란 2003.9.30 목사님 글을 보느라고
'목의 속량을 기다라며' 설교해설 유튜브 영상물에서 목사님 보느라고 인사글 늦었습니다.
환갑을 넘겼는데 신앙과 인격의 미성숙함이 심하게 부끄럽습니다. 무지함도...
조용히 성경말씀으로 다시 들어가보겠습니다...이 땅 떠나기전 소리없는 영적인 유레카, 필요하다면 기대해봅니다.
감사합니다.
끝이 안보이는 코로나와 장마를 지나 무더위에 더욱 건강하시길 빕니다.
ps."하나님이 누군지를 삼위일체의 깊이에서 더 알아보십시오"...제겐 좀 어려운 말이었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그것이 우리 안에 있다고 믿을때 더 이상 확신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마음은 아침 저녁으로 달라지거든요. 어제 굳게 믿었던 것들이 내일 전혀 믿을 수 없게 되는게 사람의 마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더군나 구원에 관해서라면 그 출발은 언제나 하나님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리 아시고 부르시고 의롭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나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시는데 정말 부족함이 있으신 분이신가? 아담 이후로 그 많은 믿음의 조상들을 인내로서 참으시고 사랑하시고 결국 구원으로 인도하신 하나님, 하나 뿐인 독생자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셔서 우리 죄를 대속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게 하셔서 우리에게 영생이라는 소망을 갖게 하신 하나님. 하나님을 알아가시는 만큼 구원에 대한 확신이 더 높아져 가는 것임을 믿습니다. 썩은 밧줄을 매달고 안전하다고 확신하고 뛰어내리는 사람들 보다 튼튼한 동아줄을 매달고 그래도 약간은 걱정과 두려움을 갖고 뛰어내리는 사람 두 사람이 있다면 본인들의 확신의 수준이 그들의 생명을 지키는것과 얼마나 상관이 있는 것일까요? 결국 본인이 매달린 동아줄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에 합당한 확신이 생기지 않을까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항상 하나님과 대화를 하고 기도응답이 빛의 속도로 되고 재난을 피해가고 복권이 당첨되고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도 75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갖는 것에 대해 25년이란 긴 시간을 기다려 응답을 받았습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는것 그리고 그분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것 또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혹시라도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을 만날때 모르고 지나쳤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하나님께서 항상 곁에 계셨음을 느끼게 되어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게 되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너무 잘 하고 계신거라 하나님께서 별로 티가 안나게 원글님을 지키고 계신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문제 없는 자녀들은 부모나 항상 지켜보긴 하지만 간섭하거나 뭐라하지 않거든요. 반면에 항상 문제를 일으키는 자녀들은 매번 나서서 잔소리 해야 하는게 부모의 심정이니 잘 하고 계신거라 믿고 싶습니다.
항상 하나님만 바라 보고 살아가시는 분 같으세요. 응원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지나가다 한줄 남깁니다.
샬롬
한걸음 님, 반갑습니다.
오랜만에 "인격적 만남"이라는 표현을 들으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그 표현을 기독교 역사에서 누가 처음으로 사용했는지 모르겠는데,
좋게 보면 하나님 경험의 확실성에 대한 은유로서 받아들일 수 있어요.
약간 비판적으로 보면 하나님 경험을 사적인 차원으로 떨어뜨리는 표현입니다.
저런 표현을 자꾸 의식하다보면 흉내 내는 신앙이 되고 맙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사야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거나
제자들이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들은 것을 보고
인격적인 만남이라고 말하는지 모르겠군요.
이런 보도는 은유라는 걸 전제하고 읽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인동성동형론에 떨어집니다.
하나님이 인격적인 존재이니 우리가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는 말도 있을 텐데,
그 하나님의 인격이라는 게 무언지 우리는 정확하게 모릅니다.
관념적인 표현이지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바로 하나님의 인격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싶다면
하나님이 누군지를 삼위일체의 깊이에서 더 알아보십시오.
아는 것만큼 보이고, 보이는 것만큼 가깝게 만날 수 있겠지요.
가능하면 "인격적인 만남"이라는 상투적인 표현은 아예 모른 척하는 게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