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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509
지성수 목사님의 최근 4편의 글을 읽고 혼란을 일으킨 어린양입니다.
철학, 심리학들의 이론들은 어떻게 검증되고 증명되나요?
지목사님의 글들을 읽으며 매우 그럴듯 하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공계 출신으로, 제 분야의 모든 가설은 반복이 가능한 실험으로 증명이
되어야, 새로운 이론으로 대접을 받습니다.
그러나 철학적 이론에도 이런 것이 가능한가요? 그냥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고
그 이론을 보강 하면, 그게 새로운 이론(진리)으로 대접 받게 되나요?
과학사를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동조하고,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에는 틀린 것으로 증명된 가설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인문학적 가설, 이론들은 이런 실험적인 검증이 없기 때문에
그럴듯한 것들이, 진리로 받아들여질 위험성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대단한 논리, 지성, 통찰력 처럼 보이는 것들이, 100년도 못사는 인간의
작은 두뇌에서 어떤 개인의 경험과 지식에서 process되어 나올진대,
그것이, 이 물질세계의 물리법칙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오묘한 인간의
정신, 신의 세계를 오류없이 설명할 수 있울까요? 검증도 없이요?
그럼면에서 모든 철학은 신앙과 같은 것인가요?
보지않고(검증없이) 믿는 것.....
철학, 심리학들의 이론들은 어떻게 검증되고 증명되나요?
지목사님의 글들을 읽으며 매우 그럴듯 하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공계 출신으로, 제 분야의 모든 가설은 반복이 가능한 실험으로 증명이
되어야, 새로운 이론으로 대접을 받습니다.
그러나 철학적 이론에도 이런 것이 가능한가요? 그냥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고
그 이론을 보강 하면, 그게 새로운 이론(진리)으로 대접 받게 되나요?
과학사를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동조하고,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에는 틀린 것으로 증명된 가설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인문학적 가설, 이론들은 이런 실험적인 검증이 없기 때문에
그럴듯한 것들이, 진리로 받아들여질 위험성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대단한 논리, 지성, 통찰력 처럼 보이는 것들이, 100년도 못사는 인간의
작은 두뇌에서 어떤 개인의 경험과 지식에서 process되어 나올진대,
그것이, 이 물질세계의 물리법칙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오묘한 인간의
정신, 신의 세계를 오류없이 설명할 수 있울까요? 검증도 없이요?
그럼면에서 모든 철학은 신앙과 같은 것인가요?
보지않고(검증없이) 믿는 것.....
2007.11.01 14:27:09
늘오늘님,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 글 올린건데, 무플의 치욕(ㅎ)을
당하지나 않나 조마조마 했었습니다. ㅎㅎ
인문학에 문외한이지만
저도 설득력과 공감 정도가
인문학의 이론을 검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인간의 설득력과 공감이라는게
역사적으로 매우 부정확하다는게 이미 증명되었다는겁니다.
일례로 100년전만해도 지구 최고의 과학적 지성들조차
우주공간이 Ether라는 물질로 채워져 있다고 생각했었으니까요.
그래야 말이 된다고 믿었구요. 그러나 잘못된 가설로 밝혀졌죠.
이런 예는 과학사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가치를 결정하게 되는 어떠한 진리를
우리의 공감(지적인, 감정적인, 경험적인...)만으로 결정하고
믿기에는, 너무 무모한 감이 없지 않나 싶습니다.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 글 올린건데, 무플의 치욕(ㅎ)을
당하지나 않나 조마조마 했었습니다. ㅎㅎ
인문학에 문외한이지만
저도 설득력과 공감 정도가
인문학의 이론을 검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인간의 설득력과 공감이라는게
역사적으로 매우 부정확하다는게 이미 증명되었다는겁니다.
일례로 100년전만해도 지구 최고의 과학적 지성들조차
우주공간이 Ether라는 물질로 채워져 있다고 생각했었으니까요.
그래야 말이 된다고 믿었구요. 그러나 잘못된 가설로 밝혀졌죠.
이런 예는 과학사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가치를 결정하게 되는 어떠한 진리를
우리의 공감(지적인, 감정적인, 경험적인...)만으로 결정하고
믿기에는, 너무 무모한 감이 없지 않나 싶습니다.
2007.11.01 15:20:23
시드니?
첨보는 아이디 같기는 한데 전혀 그런티가 안나는군요.
sydney님하고는 상관없으신거 같고...
넘 어려운 말이라서 인사만 답니다.
방~갑~습~네다.
첨보는 아이디 같기는 한데 전혀 그런티가 안나는군요.
sydney님하고는 상관없으신거 같고...
넘 어려운 말이라서 인사만 답니다.
방~갑~습~네다.
2007.11.01 16:43:14
All-live님,
저도 지목사님처럼 시드니에 산답니다.(벌써 14년이 되어가는군요..)
약 1년반 정도의 다비아 눈팅이 저의 신앙생활에 많은 변화를 주었답니다.
그 중에서 정목사님의 설교비평은 거의 모두 읽었고, 정말 새로운 눈을 뜨게
해 주셨어요. 근본주의 교회에 출석하고 있지만, 계속 마음을 열어 놓고
진리를 받아드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 터줏대감들이신 늘오늘님이나 All-live님들 같은 분들의 글을 댓글을
통해서 많이 접해서, 저는 너무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반갑게 맞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지목사님처럼 시드니에 산답니다.(벌써 14년이 되어가는군요..)
약 1년반 정도의 다비아 눈팅이 저의 신앙생활에 많은 변화를 주었답니다.
그 중에서 정목사님의 설교비평은 거의 모두 읽었고, 정말 새로운 눈을 뜨게
해 주셨어요. 근본주의 교회에 출석하고 있지만, 계속 마음을 열어 놓고
진리를 받아드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 터줏대감들이신 늘오늘님이나 All-live님들 같은 분들의 글을 댓글을
통해서 많이 접해서, 저는 너무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반갑게 맞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2007.11.01 17:41:21
늘오늘님의 '공감'의 방식을 더 세분화해볼 수 있겠네요.
인문학적 증명방식은 다소 막연한 듯하지만 그렇지않읍니다.
최소한 과학을 표방하는 인문사회과학의 어느 한 분파는
'현실'을 판단준거로 제시하죠.
그러나 현실은 변화하죠. 그래서
변화하는 현실이 그 준거가 되죠.
그래서 절대적 진리란 가능하지않게되죠.
이것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현실에 다가가기위한 '점근적 노력'을 하게되죠.
그럼 현실파악만 해서는?
그것이 인간의 자유에 기여하는가 또는 평등에 기여하는가, 자율적 개인을 상정하는가?
인간을, 환경을 도구적으로 전제하는가 라는 '가치평가'가 따르겠죠.
현실을 그 준거로 삼지않는 듯 보이는 많은 사조들과 관점들이 있을 수 있읍니다.
그러나
그것의 명멸, 또한 현실적 관계를 고려하지않고는 해석되기어렵죠.
그래서 '이데올로기' 라는 개념이 중요하게됩니다.
절대적 진리를 표방하면서 저질러졌던 여러 역사적 기억들을 갖고있는 우리는
그 이데올로기성을 주목하게되고,
이데올로기는 억압기제로 또는 무기로도 사용될 수있고,
그 중층적 성격으로말미암아, 단정적 결론은 참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다시 '현실'이 중요하게 되는 것이죠.
지금의 현실은 부단한 변화의 와중에 있는 것이고,
그 변화의 동인(motives)을 포착하여 그 변화의 물꼬를 보다 해방적이면서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게하려는 노력이 현재의 관심이 될 수밖에 없겠죠.
변화하는 현실의 검증을 계속 견뎌내어야만 하는 끊임없는 긴장이 있는 것이죠.
인문학적 증명방식은 다소 막연한 듯하지만 그렇지않읍니다.
최소한 과학을 표방하는 인문사회과학의 어느 한 분파는
'현실'을 판단준거로 제시하죠.
그러나 현실은 변화하죠. 그래서
변화하는 현실이 그 준거가 되죠.
그래서 절대적 진리란 가능하지않게되죠.
이것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현실에 다가가기위한 '점근적 노력'을 하게되죠.
그럼 현실파악만 해서는?
그것이 인간의 자유에 기여하는가 또는 평등에 기여하는가, 자율적 개인을 상정하는가?
인간을, 환경을 도구적으로 전제하는가 라는 '가치평가'가 따르겠죠.
현실을 그 준거로 삼지않는 듯 보이는 많은 사조들과 관점들이 있을 수 있읍니다.
그러나
그것의 명멸, 또한 현실적 관계를 고려하지않고는 해석되기어렵죠.
그래서 '이데올로기' 라는 개념이 중요하게됩니다.
절대적 진리를 표방하면서 저질러졌던 여러 역사적 기억들을 갖고있는 우리는
그 이데올로기성을 주목하게되고,
이데올로기는 억압기제로 또는 무기로도 사용될 수있고,
그 중층적 성격으로말미암아, 단정적 결론은 참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다시 '현실'이 중요하게 되는 것이죠.
지금의 현실은 부단한 변화의 와중에 있는 것이고,
그 변화의 동인(motives)을 포착하여 그 변화의 물꼬를 보다 해방적이면서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게하려는 노력이 현재의 관심이 될 수밖에 없겠죠.
변화하는 현실의 검증을 계속 견뎌내어야만 하는 끊임없는 긴장이 있는 것이죠.
2007.11.01 18:23:18
인문학의 또다른 어려움은 실험자나 측정장치가 실험대상에 대해서 완전히 중립적이지 않으며,
제어(control)가 가능치 않다는 것입니다.
자연과학에서는 실험대상으로부터 실험자를 철저히 제외 시키며, 실험도구즐을 정밀하게
제어하여 실험 목적이외의 다른 여건이 실험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합니다. (온도, 기압, 중력등의
영향을 정밀하게 조정하고 실험결과에서 이들의 영향을 제거합니다.)
그러나 지목사님의 '농담 대선 심리학'에 나오는 글을 예로 든다면,
"빌헤름은 사회가 민주적이라고 해도, 성적으로 일반인들을 억압하고, 성적발산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게 될 때, 도착적으로 성을 더 억압할 수 있는 정치적 구조를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교양이 풍부한 상식적인 중산층이나 가난한 서민들이 성적으로 억압기제가 장치된 사회에서는 자신의 경제계급에 해당하는 적절한 정치적 대변자들에게 정치적 지지성향을 보이는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엉뚱하게 성적억압을 더 심하게 하는 파시즘적 정치지도자들을 선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가 더 어렵게 되는 경우 이러한 성적 억압기제를 내세우는 파시즘에 대한 선호도는 더 격렬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히틀러가 정치적으로 성공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을 주장하는 빌헤름이란 학자(실험자)는 이미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의 시대적, 국가적, 문화적
영향을 받고 있으며, 개인적으로도 자라난 가정환경, 그날의 심리상황, 부부관계 등 수많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고 정확히 측랼할 수 없는 factor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있다는거죠.
이렇게 실험자와 실험도구가 제어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검증이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보여집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인문과학자의 주장은 신앙에 가깝다고 보여집니다.(물론 문서비평이나 역사연구 같이
자료가 뒷받침이 되는 분야는 좀 더 자연과학에 가까워 지지만..)
그리고, 변화하는 현실을 검증을 계속 견디어낸다는 면에서 본다면, 성경 말씀만한게 없갰군요.
제어(control)가 가능치 않다는 것입니다.
자연과학에서는 실험대상으로부터 실험자를 철저히 제외 시키며, 실험도구즐을 정밀하게
제어하여 실험 목적이외의 다른 여건이 실험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합니다. (온도, 기압, 중력등의
영향을 정밀하게 조정하고 실험결과에서 이들의 영향을 제거합니다.)
그러나 지목사님의 '농담 대선 심리학'에 나오는 글을 예로 든다면,
"빌헤름은 사회가 민주적이라고 해도, 성적으로 일반인들을 억압하고, 성적발산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게 될 때, 도착적으로 성을 더 억압할 수 있는 정치적 구조를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교양이 풍부한 상식적인 중산층이나 가난한 서민들이 성적으로 억압기제가 장치된 사회에서는 자신의 경제계급에 해당하는 적절한 정치적 대변자들에게 정치적 지지성향을 보이는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엉뚱하게 성적억압을 더 심하게 하는 파시즘적 정치지도자들을 선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가 더 어렵게 되는 경우 이러한 성적 억압기제를 내세우는 파시즘에 대한 선호도는 더 격렬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히틀러가 정치적으로 성공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을 주장하는 빌헤름이란 학자(실험자)는 이미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의 시대적, 국가적, 문화적
영향을 받고 있으며, 개인적으로도 자라난 가정환경, 그날의 심리상황, 부부관계 등 수많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고 정확히 측랼할 수 없는 factor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있다는거죠.
이렇게 실험자와 실험도구가 제어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검증이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보여집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인문과학자의 주장은 신앙에 가깝다고 보여집니다.(물론 문서비평이나 역사연구 같이
자료가 뒷받침이 되는 분야는 좀 더 자연과학에 가까워 지지만..)
그리고, 변화하는 현실을 검증을 계속 견디어낸다는 면에서 본다면, 성경 말씀만한게 없갰군요.
2007.11.01 19:31:29
철학, 문예 등 인문학에,
'가설', '진리', '검증'
- 등의 개념이 과연 어울릴까요?
뭐, 철학 중에서도 경험론적인 사조라든지,
언어학, 논리학 등의 분야에서는,
자연과학에 흡사한 접근이 필요하긴 하겠습니다만요.
근대 이후,
'과학'이라는 것을, 진리, 정답 등과 조건반사적으로 등치시키고,
그 잣대로 모든 것을 측정하는 경향이 짙습니다만,
그것이 과연 '타당'한가 말이죠.
그 '타당'성의 여부를 어찌 가늠하느냐도 문제겠습니다만,
검증이 되어야만 '유의미'한 명제라고 생각했던, 전 세기의 이성주의는,
(근대적 낙관주의라 할 수 있겠지요)
이미 많은 비판을 받았고, 지금도 그러한 줄 압니다.
'진리'를 수학적, 논리학적 개념으로만 생각해서는,
인문, 예술, 종교 등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고 보며,
삶과 세계의 '이해'도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가치중립을 구현하려 든다 해도, 결국, 어느 편의 이익에 복무하게 되며,
가치관과 시대 사조를 형성하고,
정치와 경제, 즉, 권력의 영역에 깊은 영향을 끼치고 말았다는 걸,
우리는, 역사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설령, 자연과학의 영역에서라 하더라도,
위에 쓰신 바와 같이, "새로운 이론(진리)", 즉,
'새로운 이론 = 진리'
- 라는 식으로 받아들이신다면, 곤란하지 않나요?
굳이, 포퍼의 비판적 합리주의니, 반증(검증이 아닌) 가능성이니를 말씀드릴 필요는 없겠지요.
'가설', '진리', '검증'
- 등의 개념이 과연 어울릴까요?
뭐, 철학 중에서도 경험론적인 사조라든지,
언어학, 논리학 등의 분야에서는,
자연과학에 흡사한 접근이 필요하긴 하겠습니다만요.
근대 이후,
'과학'이라는 것을, 진리, 정답 등과 조건반사적으로 등치시키고,
그 잣대로 모든 것을 측정하는 경향이 짙습니다만,
그것이 과연 '타당'한가 말이죠.
그 '타당'성의 여부를 어찌 가늠하느냐도 문제겠습니다만,
검증이 되어야만 '유의미'한 명제라고 생각했던, 전 세기의 이성주의는,
(근대적 낙관주의라 할 수 있겠지요)
이미 많은 비판을 받았고, 지금도 그러한 줄 압니다.
'진리'를 수학적, 논리학적 개념으로만 생각해서는,
인문, 예술, 종교 등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고 보며,
삶과 세계의 '이해'도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가치중립을 구현하려 든다 해도, 결국, 어느 편의 이익에 복무하게 되며,
가치관과 시대 사조를 형성하고,
정치와 경제, 즉, 권력의 영역에 깊은 영향을 끼치고 말았다는 걸,
우리는, 역사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설령, 자연과학의 영역에서라 하더라도,
위에 쓰신 바와 같이, "새로운 이론(진리)", 즉,
'새로운 이론 = 진리'
- 라는 식으로 받아들이신다면, 곤란하지 않나요?
굳이, 포퍼의 비판적 합리주의니, 반증(검증이 아닌) 가능성이니를 말씀드릴 필요는 없겠지요.
2007.11.01 19:32:37
無名齋님 반갑습니다~
인문과학에서의 과학이란 의미는 검증,증명등이 아닌,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학문화 시키는 것
정도로 이해해야겠군요. 저도 진리가 자연과학 법칙 처럼 증명 될거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사실은, 하도 많은 이론들이 자신이 진리라고 주장하는데, 그것들 중에서 어느게 진짜 진리인지 판단할
능력이 턱없이 모자란, 어떤 공부가 모자란 사람의 푸념이었습니다.
어떤때는 지적인 도전을 받게 되어서 기쁘게 받을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지치고, 수많은 정보, 주장,
그럴듯함, 끌림 속에서 허우적 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 말씀이 절대 진리라고 믿으면서도, 늘 옆을 기웃거리게 되는건 왜일까요?
인문과학에서의 과학이란 의미는 검증,증명등이 아닌,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학문화 시키는 것
정도로 이해해야겠군요. 저도 진리가 자연과학 법칙 처럼 증명 될거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사실은, 하도 많은 이론들이 자신이 진리라고 주장하는데, 그것들 중에서 어느게 진짜 진리인지 판단할
능력이 턱없이 모자란, 어떤 공부가 모자란 사람의 푸념이었습니다.
어떤때는 지적인 도전을 받게 되어서 기쁘게 받을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지치고, 수많은 정보, 주장,
그럴듯함, 끌림 속에서 허우적 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 말씀이 절대 진리라고 믿으면서도, 늘 옆을 기웃거리게 되는건 왜일까요?
2007.11.01 19:49:19
저도 반갑습니다^^
군소리 한 마디 더 늘어놓자면,
우리 인간은,
'진리 강박관념'을 벗어버려야 할 것 같습니다.
종교적 근본주의와, 근대 과학적 세계관은,
진리를 물화(物化)시키고 말았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진리라고 주장하는 이론, 주장이라면,
현대 인문학과 사회과학, 자연과학에서
과연 대접이나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진리라고 주장하는 게 용납되는 영역은 종교 뿐인 것 같습니다.
더욱이, 여기서의 '진리'가,
수학 등 자연과학에서의 '진리'와 같은 의미인지도 의문이구요.
군소리 한 마디 더 늘어놓자면,
우리 인간은,
'진리 강박관념'을 벗어버려야 할 것 같습니다.
종교적 근본주의와, 근대 과학적 세계관은,
진리를 물화(物化)시키고 말았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진리라고 주장하는 이론, 주장이라면,
현대 인문학과 사회과학, 자연과학에서
과연 대접이나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진리라고 주장하는 게 용납되는 영역은 종교 뿐인 것 같습니다.
더욱이, 여기서의 '진리'가,
수학 등 자연과학에서의 '진리'와 같은 의미인지도 의문이구요.
2007.11.01 20:18:04
시드니님 안녕하세요?
재밌는 질문을 주셨군요. 이미 나름의 답을 가지고 계신 것 처럼 보이지만...^^
조금 보충해야할 부분이 잇군요.
일단 시드니님의 질문부터 살펴보아야겠네요
"인문학적 가설, 진리는 어떻게 검증되나요?"
아이러니하게 이거야말로 너무나 너무나 "철학적인" 질문입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서문인 프롤레고메나는 철학의 학적 지위에 대해서 칸트의 고민을 담고 있습죠.
거기서 고민되는 것은 뉴튼등으로 인한 자연과학의 승승장구 진로앞에 철학의 위시한 學들은 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고찰이 담겨있습니다. 이런 것이 메타적 성찰이고 이것이 철학의 본령이라고 하죠.
메타적 성찰은 근대에 들어와서 제학문의 방법론으로 스며들어가 있습니다.
과거에 비해서는 꽤 초라하죠. 혹자는 이런 철학의 운명을 '리어왕'에 비유했습니다만....
여하튼 자연과학은 특정 대상을 분석하고 귀납적 방법으로 연구하는 수행행위라면
철학은 그것의 정당성을 의심하고 (방법론적), 과학이 사용하는 언어(수학)의 실재성을 딴지걸며, 연구수행자가 기본으로 전제하고 들어가는 공리에 관해 존재론적 의미를 묻는 역할을 합니다.
일단 시드니님이 말씀하신 자연과학적 연구방법인 귀납의 문제에 있어서 일찌기 흄은 귀납적 방법은 곧 믿음에 다름없다는 회의론으로 결론내렸죠. 흄의 이러한 "파산선고"는 논리적으로 자연과학자들이 피해갈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도요. 시드니님이 피력하신 자연과학적 연구방법론은 이미 비엔나 서클의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주장한 바와 같습니다. 하지만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주장은 칼 포퍼의 반증가능성 논변에 의해 무력화되었고, 20새기 들어 (과학사를 공부해보셔서 아시겠지만) 토마스 쿤의 입장은 이미 너무도 유명해졌습니다.. 정상과학과 반동과학 사이의 패러다임 쉬프트라던가 공약불가능성등은 자연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과학자들의 위치가 그다지 생각하는처럼 중립적이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고, 무엇보다 그는 그것을 실증적으로 예시를 드는데 성공했습니다. 거기에 반해 포퍼는 진리의 박진성을 내세우며 점진적으로 진리에 가까워 지는 방식으로 우리의 인식지평이 넓어져 간다고 얘기한 바 잇구요. 파이어아벤트는 anything goes, 즉 어느 체계안에서던지 과학은 존재하며 그것은 다 동등하다라고 얘기했었죠. 거기에 비해 임레 라카토슈는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 가설을 들어 과학의 성공가능성 여부에 따라 보조가설들이 바뀌는 것을 의견으로 제시했구요. 그 어느쪽이던지 자연과학이 부동적이거나 완전중립가능한, 그리하여 (시드니님이 묘사하신 것 처럼) 실험대상과 실험자 사이의 영향이 없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양자역학만 해도 그렇습니다. 실험자의 개입이 양자중첩상태를 관찰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죠.
아, 나는 자연과학이 아니라 인문학에 대한 학적 정당성을 묻고 싶은데 왜 자연과학 얘기를 하느냐?라고 물으실 것 같아서 여기서 과학철학의 얘기는 멈추죠 ( 풀어놓으면 너무 길어지니까) 요점만 말씀드리겠습니다.
1. 철학자들의 자연과학의 학적 지위와 정당성을 논하는 작업, 그러니까 상기한 철학史만 보더라도 자연과학과 철학의 차이를 구분하실 수 있을겝니다. 즉 철학은 메타적 성찰 수행이죠.
2. 사실, 빌라드 반 콰인이후로 철학의 이러한 지위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앞서 설명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따르면 분석명제(수학)와 종합명제(과학)의 구분이 사실상 언어를 사용함에 잇어서 그 발달심리학적 사실로 정당하지 않게되엇다는 것이죠.
3. 수학의 문제가 남아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말 단순하게 수학-과학-공학을 이과라고 하며 같이 분류하고 있는데 수학은 어떤 대상을 탐구하여 귀납적으로 실험하는 그런 "科學"이 아닙니다. 수학의 존재론적 지위에 대해서는 실재론과 구성론이 있지만 그 어느쪽도 수학 자체를 자연물 처럼 대상에 대한 탐구로 보진 않습니다. 하지만 자연과학에서는 수학을 그들의 언어로 사용하고 있죠. 수학자들은 사실 모두 철학자들입니다. 수학자들 자신은 그냥 수학자라고 얘기하는 걸 더 좋아하지만 그들은 가장 순수한 (그들이 표현하기로) 영역에서의 자체 증명을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수학이 과학의 방법론 탐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위치임을 자연과학자들이 인정한다면 수학에 대한 탐구는 곧 자연과학 방법론에 관한 탐구, 곧 철학이 되는 것이죠. 실제로 수학기초론이란 분과에서 철학자-논리학자들의 공은 지대했습니다.
4. 고로 철학의 가설, 검증은 어떻게 하나요? 라는 질문 자체가 오류가 있는 것입니다. 되돌아가 님의 질문이 철학적이라고 했던 것은 다 이런 차원에서의 얘기입니다. 철학이 물론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논리학은 실상 언어의 규칙이고, 그 언어의 규칙은 언어로 생각하고 표현하는 인간 이상, 자연과학이고 인문학이고간에 사고를 하는 사람들의 프로세스라는 점에서 보편적인 것이지요. 비교를 쉽게하기 위해 사회과학의 경우, 사회현상이 그들 연구의 진위를 가려줍니다. 자연과학과 수행하는 목적이 비슷하죠. 다만 자연과학 보다 훨씬 덜 귀납적이고 중립적이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위치에대해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교량역할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견 타당하기도 하거니와 어떤면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6번을 보십시오
5. 한편, 예로 드신 지성수 목사님이 인용하신 정신분석학의 경우 인문학의 범위에 속합니다. 칼 포퍼에 의해 "그럴수도 아닐 수도 있다"라는 반증가능성 자체를 막아버리는 이러한 사상은 칼 맑스의 사상이기도 하죠. (역사발전론) 건강한 과학일 수록 반증에 열린체계를 갖추어야 하는데 그렇지못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말씀하신바대로 인문학은 설득력이나 신앙의 차원에서 믿어지는 것인가. 현상적으로 말씀드리면 "그렇다"입니다. 다만 자연과학도 흄의 의한바, "믿음"의 영역에 속하는 부분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 믿음, 곧 신앙은 실상 우리는 "존재"케하는 기제로서 작용합니다. 학적 연구를 수행할때는 전제 혹은 공리로, 일상생활을 살아갈때는 상식이란 이름으로 말이죠. 다만 말씀하신 가설과 검증의 문제에 있어서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은 "정도"의 차이이며 인문학은 자체의 "신앙적 생명력"으로 말미암아 상기한 두 과학을 존재지워주고, 때로는 존재지움받으며 존해하고 있습니다. 인문학에서는 그런면에서 검증보다 "상상력"이 중요합니다. (가스똥 바슐라르) 이화여대 최재천 교수님이 말씀하신바 "어차피 모든 학문은 인문학에서 출발했고 결과물도 인문학에서 내어놓아야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말이 타당한 것은 상상력으로서의 인문학적 소양이 성공한 자연과학자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는걸로'검증'될수 있겠죠? 하이젠베르크는 그리스 철학의 뛰어난 해석가였으며, 아인슈타인은 에른스트 마흐의 철학에 영향받아 상대성이론을 고찰했습니다.
6. 이제 인문학이 가설과 검증을 신앙적으로 한다는 말에 대한 의미를 대충이나마 파악하셨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사족으로 시드님이 궁금증을 가지신 학적구분문제에 대한 현재 학계의 흐름을 대강 거시적으로나마 짚어드릴필요가 잇을 것 같아서요. 현재 학문이 나뉘어진 연원은 19세기 독일식의 자연과학-사회화학-인문학의 세 갈래입니다. 독일어권에서는 인문학을 정신과학이라고 한다는데 정확한 용어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쨋든 이러한 인위적인 학문 구분은 애초에 없었습니다. 이제 다시금 통섭이라는 주제하에 학문이 모여들고 잇습니다. 인간의 예컨대 인간의 '마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연구를 하기위해서 철학, 언어학, 인공지능, 인류학, 심리학, 신경과학, 사이버네틱스 등등의 학문이 머리를 맞대고 잇으며 현재 우리나라에서 한양대에 수행인문학이라는 프로젝트로 사회-자연과학에 참여하고 잇다고 알고 잇습니다. 몇몇 분들이 통섭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는 것은 그 통섭의 헤게모니가 자연과학쪽으로 쏠려잇기 때문에 가지는 거부감과, 우리나라 특유의 학과별 집단의식에 기인한 걸로 알고 잇습니다. 하지만 외국의 경우, 유니버시티 프로페서 즉, 학과를 가리지않고 강의하는 교수가 늘고 잇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학자들의 르네상스적 능력때문이기도 하지만 더이상 학과의 구분이 진리탐구를 위해 필수적이지 않다는데에 공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7. 철학의 최후인 (윤리학)가치론마저 현재 게임이론과 생물유전자학으로 많이 바뀌어가고 잇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善인가 무엇이 正義인가 하던 담론들이 자연과학적 옷을 입는다하더라도 그것이 인문학에서 출발하여 언어분석적 전통을 통한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그것이 가설정립과 검증의 차원과는 학적 수행이 다름을 아시게될겁니다. 앞서 말씀드린바 자연과학이건, 인문학이건 결국 결론은 믿음이며 그것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인문학적 수행이라고 생각하시면 될것 같습니다.
8. 그럼, 다른 인문학은? 사학, 문학등은? 흔히들 문,사,철이 기본 인문학 3총사라고 불리는데 철학의 경우 상기한바 제학문의 방법론으로 메타적 수행을 하고 있고, 사학도 그런 작업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로 어느 학문이던지 분과학문에 ~史가 붙어있다는 걸 보셨을겁니다. 물리학사, 생물학史 등등...이러한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그 개별과학에 대한 메타적 성찰이 가능한 것이니까요. 문학의 경우, 실상 가장 원초적인 것이라 말씀드리고 싶네요. 문학을 위시한 여러 예술들은 고대이래 위에서 말씀드린 상상력의 근원적 저장고로 존재하여 왔습니다. 더구나 공자가 말한 善=美는 미학과 윤리학의 통섭적 예비였으며 우리는 이를 통해 인간이 가지는 美에 대한 자연과학적 고찰도 가능합니다. (진화심리학, 신경미학, 신경음악학)
9.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는데 많은 부분이 빠져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의문점은 댓글로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뱀발하나 달자면 제가 사실 철학-통계학-신경과학(학부 땐 심리학)을 전공했고(덕분에 졸업 늦음;;;) 나름 학문적 정당성과 위치에 관해 고민을 많이 했더랬습니다. 그래서 결국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학제학문을 택했고(인지과학) 저자신은 지금 주전공으로 신경과학을 하고 있지만 한번도 철학을 하고있지 않다고는 생각한 적이 없을 정도로 이곳 학계 분위기는 철학을 우대한답니다.^^
10. 정말 끝으로, 호주의 수도가 캔버라시티죠? 제가 창원에서 좀 살았는데 창원이 캔버라시티를 모방해서 만들었다하더라구요. 정말 캔버라시티도 창원처럼 멋진 곳인지 궁금합니다. (사진이라도 좀;;)
재밌는 질문을 주셨군요. 이미 나름의 답을 가지고 계신 것 처럼 보이지만...^^
조금 보충해야할 부분이 잇군요.
일단 시드니님의 질문부터 살펴보아야겠네요
"인문학적 가설, 진리는 어떻게 검증되나요?"
아이러니하게 이거야말로 너무나 너무나 "철학적인" 질문입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서문인 프롤레고메나는 철학의 학적 지위에 대해서 칸트의 고민을 담고 있습죠.
거기서 고민되는 것은 뉴튼등으로 인한 자연과학의 승승장구 진로앞에 철학의 위시한 學들은 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고찰이 담겨있습니다. 이런 것이 메타적 성찰이고 이것이 철학의 본령이라고 하죠.
메타적 성찰은 근대에 들어와서 제학문의 방법론으로 스며들어가 있습니다.
과거에 비해서는 꽤 초라하죠. 혹자는 이런 철학의 운명을 '리어왕'에 비유했습니다만....
여하튼 자연과학은 특정 대상을 분석하고 귀납적 방법으로 연구하는 수행행위라면
철학은 그것의 정당성을 의심하고 (방법론적), 과학이 사용하는 언어(수학)의 실재성을 딴지걸며, 연구수행자가 기본으로 전제하고 들어가는 공리에 관해 존재론적 의미를 묻는 역할을 합니다.
일단 시드니님이 말씀하신 자연과학적 연구방법인 귀납의 문제에 있어서 일찌기 흄은 귀납적 방법은 곧 믿음에 다름없다는 회의론으로 결론내렸죠. 흄의 이러한 "파산선고"는 논리적으로 자연과학자들이 피해갈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도요. 시드니님이 피력하신 자연과학적 연구방법론은 이미 비엔나 서클의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주장한 바와 같습니다. 하지만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주장은 칼 포퍼의 반증가능성 논변에 의해 무력화되었고, 20새기 들어 (과학사를 공부해보셔서 아시겠지만) 토마스 쿤의 입장은 이미 너무도 유명해졌습니다.. 정상과학과 반동과학 사이의 패러다임 쉬프트라던가 공약불가능성등은 자연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과학자들의 위치가 그다지 생각하는처럼 중립적이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고, 무엇보다 그는 그것을 실증적으로 예시를 드는데 성공했습니다. 거기에 반해 포퍼는 진리의 박진성을 내세우며 점진적으로 진리에 가까워 지는 방식으로 우리의 인식지평이 넓어져 간다고 얘기한 바 잇구요. 파이어아벤트는 anything goes, 즉 어느 체계안에서던지 과학은 존재하며 그것은 다 동등하다라고 얘기했었죠. 거기에 비해 임레 라카토슈는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 가설을 들어 과학의 성공가능성 여부에 따라 보조가설들이 바뀌는 것을 의견으로 제시했구요. 그 어느쪽이던지 자연과학이 부동적이거나 완전중립가능한, 그리하여 (시드니님이 묘사하신 것 처럼) 실험대상과 실험자 사이의 영향이 없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양자역학만 해도 그렇습니다. 실험자의 개입이 양자중첩상태를 관찰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죠.
아, 나는 자연과학이 아니라 인문학에 대한 학적 정당성을 묻고 싶은데 왜 자연과학 얘기를 하느냐?라고 물으실 것 같아서 여기서 과학철학의 얘기는 멈추죠 ( 풀어놓으면 너무 길어지니까) 요점만 말씀드리겠습니다.
1. 철학자들의 자연과학의 학적 지위와 정당성을 논하는 작업, 그러니까 상기한 철학史만 보더라도 자연과학과 철학의 차이를 구분하실 수 있을겝니다. 즉 철학은 메타적 성찰 수행이죠.
2. 사실, 빌라드 반 콰인이후로 철학의 이러한 지위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앞서 설명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따르면 분석명제(수학)와 종합명제(과학)의 구분이 사실상 언어를 사용함에 잇어서 그 발달심리학적 사실로 정당하지 않게되엇다는 것이죠.
3. 수학의 문제가 남아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말 단순하게 수학-과학-공학을 이과라고 하며 같이 분류하고 있는데 수학은 어떤 대상을 탐구하여 귀납적으로 실험하는 그런 "科學"이 아닙니다. 수학의 존재론적 지위에 대해서는 실재론과 구성론이 있지만 그 어느쪽도 수학 자체를 자연물 처럼 대상에 대한 탐구로 보진 않습니다. 하지만 자연과학에서는 수학을 그들의 언어로 사용하고 있죠. 수학자들은 사실 모두 철학자들입니다. 수학자들 자신은 그냥 수학자라고 얘기하는 걸 더 좋아하지만 그들은 가장 순수한 (그들이 표현하기로) 영역에서의 자체 증명을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수학이 과학의 방법론 탐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위치임을 자연과학자들이 인정한다면 수학에 대한 탐구는 곧 자연과학 방법론에 관한 탐구, 곧 철학이 되는 것이죠. 실제로 수학기초론이란 분과에서 철학자-논리학자들의 공은 지대했습니다.
4. 고로 철학의 가설, 검증은 어떻게 하나요? 라는 질문 자체가 오류가 있는 것입니다. 되돌아가 님의 질문이 철학적이라고 했던 것은 다 이런 차원에서의 얘기입니다. 철학이 물론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논리학은 실상 언어의 규칙이고, 그 언어의 규칙은 언어로 생각하고 표현하는 인간 이상, 자연과학이고 인문학이고간에 사고를 하는 사람들의 프로세스라는 점에서 보편적인 것이지요. 비교를 쉽게하기 위해 사회과학의 경우, 사회현상이 그들 연구의 진위를 가려줍니다. 자연과학과 수행하는 목적이 비슷하죠. 다만 자연과학 보다 훨씬 덜 귀납적이고 중립적이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위치에대해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교량역할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견 타당하기도 하거니와 어떤면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6번을 보십시오
5. 한편, 예로 드신 지성수 목사님이 인용하신 정신분석학의 경우 인문학의 범위에 속합니다. 칼 포퍼에 의해 "그럴수도 아닐 수도 있다"라는 반증가능성 자체를 막아버리는 이러한 사상은 칼 맑스의 사상이기도 하죠. (역사발전론) 건강한 과학일 수록 반증에 열린체계를 갖추어야 하는데 그렇지못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말씀하신바대로 인문학은 설득력이나 신앙의 차원에서 믿어지는 것인가. 현상적으로 말씀드리면 "그렇다"입니다. 다만 자연과학도 흄의 의한바, "믿음"의 영역에 속하는 부분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 믿음, 곧 신앙은 실상 우리는 "존재"케하는 기제로서 작용합니다. 학적 연구를 수행할때는 전제 혹은 공리로, 일상생활을 살아갈때는 상식이란 이름으로 말이죠. 다만 말씀하신 가설과 검증의 문제에 있어서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은 "정도"의 차이이며 인문학은 자체의 "신앙적 생명력"으로 말미암아 상기한 두 과학을 존재지워주고, 때로는 존재지움받으며 존해하고 있습니다. 인문학에서는 그런면에서 검증보다 "상상력"이 중요합니다. (가스똥 바슐라르) 이화여대 최재천 교수님이 말씀하신바 "어차피 모든 학문은 인문학에서 출발했고 결과물도 인문학에서 내어놓아야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말이 타당한 것은 상상력으로서의 인문학적 소양이 성공한 자연과학자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는걸로'검증'될수 있겠죠? 하이젠베르크는 그리스 철학의 뛰어난 해석가였으며, 아인슈타인은 에른스트 마흐의 철학에 영향받아 상대성이론을 고찰했습니다.
6. 이제 인문학이 가설과 검증을 신앙적으로 한다는 말에 대한 의미를 대충이나마 파악하셨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사족으로 시드님이 궁금증을 가지신 학적구분문제에 대한 현재 학계의 흐름을 대강 거시적으로나마 짚어드릴필요가 잇을 것 같아서요. 현재 학문이 나뉘어진 연원은 19세기 독일식의 자연과학-사회화학-인문학의 세 갈래입니다. 독일어권에서는 인문학을 정신과학이라고 한다는데 정확한 용어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쨋든 이러한 인위적인 학문 구분은 애초에 없었습니다. 이제 다시금 통섭이라는 주제하에 학문이 모여들고 잇습니다. 인간의 예컨대 인간의 '마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연구를 하기위해서 철학, 언어학, 인공지능, 인류학, 심리학, 신경과학, 사이버네틱스 등등의 학문이 머리를 맞대고 잇으며 현재 우리나라에서 한양대에 수행인문학이라는 프로젝트로 사회-자연과학에 참여하고 잇다고 알고 잇습니다. 몇몇 분들이 통섭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는 것은 그 통섭의 헤게모니가 자연과학쪽으로 쏠려잇기 때문에 가지는 거부감과, 우리나라 특유의 학과별 집단의식에 기인한 걸로 알고 잇습니다. 하지만 외국의 경우, 유니버시티 프로페서 즉, 학과를 가리지않고 강의하는 교수가 늘고 잇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학자들의 르네상스적 능력때문이기도 하지만 더이상 학과의 구분이 진리탐구를 위해 필수적이지 않다는데에 공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7. 철학의 최후인 (윤리학)가치론마저 현재 게임이론과 생물유전자학으로 많이 바뀌어가고 잇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善인가 무엇이 正義인가 하던 담론들이 자연과학적 옷을 입는다하더라도 그것이 인문학에서 출발하여 언어분석적 전통을 통한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그것이 가설정립과 검증의 차원과는 학적 수행이 다름을 아시게될겁니다. 앞서 말씀드린바 자연과학이건, 인문학이건 결국 결론은 믿음이며 그것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인문학적 수행이라고 생각하시면 될것 같습니다.
8. 그럼, 다른 인문학은? 사학, 문학등은? 흔히들 문,사,철이 기본 인문학 3총사라고 불리는데 철학의 경우 상기한바 제학문의 방법론으로 메타적 수행을 하고 있고, 사학도 그런 작업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로 어느 학문이던지 분과학문에 ~史가 붙어있다는 걸 보셨을겁니다. 물리학사, 생물학史 등등...이러한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그 개별과학에 대한 메타적 성찰이 가능한 것이니까요. 문학의 경우, 실상 가장 원초적인 것이라 말씀드리고 싶네요. 문학을 위시한 여러 예술들은 고대이래 위에서 말씀드린 상상력의 근원적 저장고로 존재하여 왔습니다. 더구나 공자가 말한 善=美는 미학과 윤리학의 통섭적 예비였으며 우리는 이를 통해 인간이 가지는 美에 대한 자연과학적 고찰도 가능합니다. (진화심리학, 신경미학, 신경음악학)
9.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는데 많은 부분이 빠져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의문점은 댓글로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뱀발하나 달자면 제가 사실 철학-통계학-신경과학(학부 땐 심리학)을 전공했고(덕분에 졸업 늦음;;;) 나름 학문적 정당성과 위치에 관해 고민을 많이 했더랬습니다. 그래서 결국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학제학문을 택했고(인지과학) 저자신은 지금 주전공으로 신경과학을 하고 있지만 한번도 철학을 하고있지 않다고는 생각한 적이 없을 정도로 이곳 학계 분위기는 철학을 우대한답니다.^^
10. 정말 끝으로, 호주의 수도가 캔버라시티죠? 제가 창원에서 좀 살았는데 창원이 캔버라시티를 모방해서 만들었다하더라구요. 정말 캔버라시티도 창원처럼 멋진 곳인지 궁금합니다. (사진이라도 좀;;)
2007.11.02 08:12:20
한글 시드니 님!
우선 징하게 반갑습니다.
무엇 보다도 제대로된 토론을 하도록 촉매를 시켜 주셔서.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댓글들을 꼼곰히 못 읽고 우선 급한데로 인상만 전합니다.
우선 님의 논지는 꼭 경제학 교수를 하는 우리 큰 아들 녀석과 같군요.
녀석은 계량경제학을 하더니 점점 건방져져서 인문학을 완전히 개무시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읽어보라고 권한 것이 있습니다.
검색엔진에서 '양신규'를 찾으셔서 '양신규와 홍성욱의 논쟁'을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두 무림의 고수가 펼치는 인문학의 효용성에 관한 피 튀기는 논쟁이 가히 볼만합니다.
참고가 되시기를 바라며...
우선 징하게 반갑습니다.
무엇 보다도 제대로된 토론을 하도록 촉매를 시켜 주셔서.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댓글들을 꼼곰히 못 읽고 우선 급한데로 인상만 전합니다.
우선 님의 논지는 꼭 경제학 교수를 하는 우리 큰 아들 녀석과 같군요.
녀석은 계량경제학을 하더니 점점 건방져져서 인문학을 완전히 개무시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읽어보라고 권한 것이 있습니다.
검색엔진에서 '양신규'를 찾으셔서 '양신규와 홍성욱의 논쟁'을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두 무림의 고수가 펼치는 인문학의 효용성에 관한 피 튀기는 논쟁이 가히 볼만합니다.
참고가 되시기를 바라며...
2007.11.02 09:25:10
와우~
정말 놀랐습니다. 역시 다비아 군요.
잠 잘자고 사무실에 나와서 다비아에 들어와 보니, 우선 제 게시물이 옮겨졌다는 쪽지가 있었고,
그래서 쟁토방에 있나 가봤다가 없어서, 질문/대답 란에서 드디어 찾았습니다.
그런데, 아이고 맙소사... 멋모르는 어린아이가 지뢰선을 건드렸군요...
야고보님의 융단폭격(좋은 뜻입니다.).. 놀랍습니다.
세상은 넓고, 공부할거는 많고, 고수는 많다는걸 다시 느낍니다.
제목의 '무식한 질문'은 나름대로 겸손을 떨어 본건데...
겸손이라는 말을 입밖에 내기에도 부끄럽게 됬습니다. 차원이 다르다는건 이럴 때 쓰는거군요.
야고보님 글을 참조해 가며, 새로운 분야를 탐구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재밋는 일거리가 생겼네요. 그래봐야 또 수박 겉핥기라~ 어디가서 또 엄한 소리나 하겠지만...
야고보님, 켄버라는 한국에서 손님들 오시면 안내차 몇번 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계획도시로 거주지구 업무지구 상업지구가 칼같이 나뉘어져 있어서, 깨끗하기는 하지만
왠지 사람사는 냄새가 나지를 않습니다. 창원은 잘 모르겠고(한 두번 가보긴 했는데...)
과천과 그 분위기가 매우 흡사합니다.(물론 14년전의 과천을 이야기 합니다.) 과천을 보면서
왠지 평양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켄버라가 비슷합니다. 모든것이 구획되어져 있고, 계획적이지만
사람사는 냄새는 나지않는...
영문 Sydney님, 지목사님 너무 반갑습니다. 그동안에 글로만 뵙다가, 제글에 이렇게 답글을 달아주시니
영광입니다. 지금 한국이시죠? 좋은 여행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하신 논쟁 바로 찾아서 읽어 보겠습니다. 이 분야로 들어가는 길을 안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인도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압니다. 이런 도움 없이 혼자서 길을 찾아들어가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낭비와 노력이 필요한데....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정말 놀랐습니다. 역시 다비아 군요.
잠 잘자고 사무실에 나와서 다비아에 들어와 보니, 우선 제 게시물이 옮겨졌다는 쪽지가 있었고,
그래서 쟁토방에 있나 가봤다가 없어서, 질문/대답 란에서 드디어 찾았습니다.
그런데, 아이고 맙소사... 멋모르는 어린아이가 지뢰선을 건드렸군요...
야고보님의 융단폭격(좋은 뜻입니다.).. 놀랍습니다.
세상은 넓고, 공부할거는 많고, 고수는 많다는걸 다시 느낍니다.
제목의 '무식한 질문'은 나름대로 겸손을 떨어 본건데...
겸손이라는 말을 입밖에 내기에도 부끄럽게 됬습니다. 차원이 다르다는건 이럴 때 쓰는거군요.
야고보님 글을 참조해 가며, 새로운 분야를 탐구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재밋는 일거리가 생겼네요. 그래봐야 또 수박 겉핥기라~ 어디가서 또 엄한 소리나 하겠지만...
야고보님, 켄버라는 한국에서 손님들 오시면 안내차 몇번 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계획도시로 거주지구 업무지구 상업지구가 칼같이 나뉘어져 있어서, 깨끗하기는 하지만
왠지 사람사는 냄새가 나지를 않습니다. 창원은 잘 모르겠고(한 두번 가보긴 했는데...)
과천과 그 분위기가 매우 흡사합니다.(물론 14년전의 과천을 이야기 합니다.) 과천을 보면서
왠지 평양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켄버라가 비슷합니다. 모든것이 구획되어져 있고, 계획적이지만
사람사는 냄새는 나지않는...
영문 Sydney님, 지목사님 너무 반갑습니다. 그동안에 글로만 뵙다가, 제글에 이렇게 답글을 달아주시니
영광입니다. 지금 한국이시죠? 좋은 여행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하신 논쟁 바로 찾아서 읽어 보겠습니다. 이 분야로 들어가는 길을 안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인도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압니다. 이런 도움 없이 혼자서 길을 찾아들어가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낭비와 노력이 필요한데....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2007.11.02 11:03:58
아... 옆에 마산사는 친구가 그러더라구요...창원은 너무 인공냄새(?)가 많이 나서 이상하다고....
저는 깨끗하고 정비되어 있어서 보기좋던데, 저도 강남보다 사람냄새나는 강북이 좋긴하니 취향이 변해가나봅니다.
그리고 지목사님이 추천해주신 논쟁은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양신규 교수님이 사망하셨으므로) 두 서울대 동창 출신 엘리뜨(여기서는 북미권에서 교수를 했다는 일종의 '은어'입니다)의 지상논쟁(모니터상)입니다. 옛날부터 많이 회자되어온 글이죠.
전 故 양신규 교수쪽이지만 지성수 목사님의 아드님처럼 계량경제학을 인문학 보다 우위에 두는 발언은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정치적인 태도이기도 하거니와 (^^) 저는 계량경제학보다 더 "엄밀한" 실험경제학파 거든요. 그 쪽 입장에서 보면 계량경제학이나 인문학이나 뭐 대동소이하죠. ㅎㅎㅎ
저는 깨끗하고 정비되어 있어서 보기좋던데, 저도 강남보다 사람냄새나는 강북이 좋긴하니 취향이 변해가나봅니다.
그리고 지목사님이 추천해주신 논쟁은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양신규 교수님이 사망하셨으므로) 두 서울대 동창 출신 엘리뜨(여기서는 북미권에서 교수를 했다는 일종의 '은어'입니다)의 지상논쟁(모니터상)입니다. 옛날부터 많이 회자되어온 글이죠.
전 故 양신규 교수쪽이지만 지성수 목사님의 아드님처럼 계량경제학을 인문학 보다 우위에 두는 발언은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정치적인 태도이기도 하거니와 (^^) 저는 계량경제학보다 더 "엄밀한" 실험경제학파 거든요. 그 쪽 입장에서 보면 계량경제학이나 인문학이나 뭐 대동소이하죠. ㅎㅎㅎ
2007.11.02 11:55:12
그런데 신경과학이 그렇게 매력적인가봐요?
교회의 아는 청년은 의대 입학 허락을 받고도, 신경과학을 전공하고 지금 박사중인데...
매일 생쥐 뇌를 썰고 잇다죠~ ㅎ
그거 끝나고 의대 간다고...
그 친구에게서 잠간씩 강의(?)를 듣기는 했는데, 워낙 어려운데다가
이 친구가 한국어가 그리 익숙지 않아서리...
유명한 논쟁은 지금 찾아서 읽고 있습니다.
저한테는 어렵네요, 그래도 기 쓰고 읽고 있습니다.
왠 사람 이름들은 그리 많이 나오는지, 머리에 쥐가 날려고 합니다~ ㅎㅎ
교회의 아는 청년은 의대 입학 허락을 받고도, 신경과학을 전공하고 지금 박사중인데...
매일 생쥐 뇌를 썰고 잇다죠~ ㅎ
그거 끝나고 의대 간다고...
그 친구에게서 잠간씩 강의(?)를 듣기는 했는데, 워낙 어려운데다가
이 친구가 한국어가 그리 익숙지 않아서리...
유명한 논쟁은 지금 찾아서 읽고 있습니다.
저한테는 어렵네요, 그래도 기 쓰고 읽고 있습니다.
왠 사람 이름들은 그리 많이 나오는지, 머리에 쥐가 날려고 합니다~ ㅎㅎ
2007.11.02 13:24:19
으허허...그렇지요..저도 랩에서 생쥐랑 냄새나도록(?) 놀다왔는데요....ㅋㅋㅋ
신경과학이 매력적이란 건 근 10여년동안 미국에서 신경과학에 집중지원한 것 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국가전략차원이지만....
유명한 철학자, 인식론분야 사람들은 잠정적으로 모두 신경과학자로 분류됩니다.
데카르트, 버클리, 흄.....칸트까지도.
인식론이란게 인간이 대상을 인식하는 방법에 대한 정당성을 논하는 것인데, 그 인식방법에 대한 실증적 대답을 하는게 신경과학이거든요. 그러나 아직 신경과학에서 풀지못한 많은 문제들, 특히 의식 (Consciousness)문제는 철학자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뭐 "빨강은 어찌하여 그렇게(빨갛게) 느껴지는가?" 라는문제입니다) 저도 궁극적으로는 의식문제에 도전하는게 목표랍니다. 그걸 위해서 이것저것 가리지않고 잡식하는 중이죠. ^^
아마 학문의 통섭이 일어나면 심리학 같은 학문은 극소수의 몇몇 분야를 제외하고 신경과학으로 환원될 겁니다. 나머지 사회과학 대부분은 계량사회학이나 실험인류학, 게임이론을 위시한 경제학등의 행동과학등으로 포섭되겠죠. (이건 우리나라에서 내노라하는 심리철학자이신 김재권 브라운대학교 교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신경과학이 매력적이란 건 근 10여년동안 미국에서 신경과학에 집중지원한 것 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국가전략차원이지만....
유명한 철학자, 인식론분야 사람들은 잠정적으로 모두 신경과학자로 분류됩니다.
데카르트, 버클리, 흄.....칸트까지도.
인식론이란게 인간이 대상을 인식하는 방법에 대한 정당성을 논하는 것인데, 그 인식방법에 대한 실증적 대답을 하는게 신경과학이거든요. 그러나 아직 신경과학에서 풀지못한 많은 문제들, 특히 의식 (Consciousness)문제는 철학자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뭐 "빨강은 어찌하여 그렇게(빨갛게) 느껴지는가?" 라는문제입니다) 저도 궁극적으로는 의식문제에 도전하는게 목표랍니다. 그걸 위해서 이것저것 가리지않고 잡식하는 중이죠. ^^
아마 학문의 통섭이 일어나면 심리학 같은 학문은 극소수의 몇몇 분야를 제외하고 신경과학으로 환원될 겁니다. 나머지 사회과학 대부분은 계량사회학이나 실험인류학, 게임이론을 위시한 경제학등의 행동과학등으로 포섭되겠죠. (이건 우리나라에서 내노라하는 심리철학자이신 김재권 브라운대학교 교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2007.11.03 10:34:17
사라진 것이 아니었군요.
자연과학적 사실조차 (가치)중립적일 수 없다는 견해에는 이제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듯 합니다.
똑같은 원리가 신학에도 적용가능할 듯 합니다.
위에서 예로 든 빌헬름의 연구결과, 전체주의의 대중심리학,
억압된 성적열망이 기독교적 세계관(중에 어느 일부이긴 하지만 기독교전통에 기초한)
과 결합되어 나치즘을 낳을 수 있었다는...또 어머니의 이기심도 보태어졌죠.
저는 빌헬름의 글을 읽고, 현실에 대해 객관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뼈저리게 느꼈읍니다.
이것의 검증방식 역시 가치중립적일 수 없고
아울러 절대적 진리라고 할 수 없읍니다.
그러나 '현실설명력'을 따져야 하고, 역시 관건은 '현실'입니다.
현실이라는 것이 얼마나 복잡한 여러 힘들의 중층적 결정인지에 대해서는 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진리의 검증을 불가능하다고 할 수 없읍니다.
빌헬름의 논리를 누가 어떻게 검증하겠는가?
'당대성'의 포착이 제대로된 '총체성'안에서 해명되는 것은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가치중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겸손하게 깨닫는것,
신학의 사명이 신학을 당대성 안에서 해명해어야하고, 변화를 담보해내어야 하듯이,
그러면서도 신학적 총체성을 지켜내며 풍부하게 해야하듯이말이죠.
급한 일이 있어서 이만...
자연과학적 사실조차 (가치)중립적일 수 없다는 견해에는 이제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듯 합니다.
똑같은 원리가 신학에도 적용가능할 듯 합니다.
위에서 예로 든 빌헬름의 연구결과, 전체주의의 대중심리학,
억압된 성적열망이 기독교적 세계관(중에 어느 일부이긴 하지만 기독교전통에 기초한)
과 결합되어 나치즘을 낳을 수 있었다는...또 어머니의 이기심도 보태어졌죠.
저는 빌헬름의 글을 읽고, 현실에 대해 객관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뼈저리게 느꼈읍니다.
이것의 검증방식 역시 가치중립적일 수 없고
아울러 절대적 진리라고 할 수 없읍니다.
그러나 '현실설명력'을 따져야 하고, 역시 관건은 '현실'입니다.
현실이라는 것이 얼마나 복잡한 여러 힘들의 중층적 결정인지에 대해서는 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진리의 검증을 불가능하다고 할 수 없읍니다.
빌헬름의 논리를 누가 어떻게 검증하겠는가?
'당대성'의 포착이 제대로된 '총체성'안에서 해명되는 것은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가치중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겸손하게 깨닫는것,
신학의 사명이 신학을 당대성 안에서 해명해어야하고, 변화를 담보해내어야 하듯이,
그러면서도 신학적 총체성을 지켜내며 풍부하게 해야하듯이말이죠.
급한 일이 있어서 이만...
2007.11.03 10:56:45
위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지향성의 차이와 엄밀성을 향한 태도의 차이입니다. 요새는 많은 사회과학과 인문학도 엄밀성을 얘기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각자의' 엄밀성이죠. 엄밀성은 가치중립성과도 연결됩니다. 예로 드신 빌헬름의 경우, 정신분석학의 무의식 이론인데 실상 이런 류의 설명은 현실에 대한 우리의 해석적 지평을 넓힐 뿐 검증대상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현대의 검증이란 칼 포퍼의 반증가능성에 다름 아닌데 프로이트의 이론은 반증가능성에 열려있지 않거든요. 결국, 자연과학과는 다른 차원의 내러티브란 얘기죠. 자연과학자들이 보기엔 실상 '이래도 맞고 저래도 맞은' so what? 설명일 뿐입니다. 현실설명력이란 것도 실상 어느 해석이던지 다 동등할 뿐이지 우월한 해석은 없거든요. 하이에크는 케인즈식의 정부개입은 계속적인 문제를 나을 것이라 예견했습니다만,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죠. 케인즈 학파가 아니면 발도 못붙일 시대에는 말이죠. 그러나 케인즈 학파가 퇴조하자, 신경제와 함께 하이에크의 이론이 '현실설명력'이 있다고 추앙받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유럽에선 여전히 하이에크류는 아니죠. 이런 점들은 말씀하신 것처럼 현실이 중층적이고 유동적이라는데 원인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어떤 '원리'는 있는바, (예를 들어, 복잡계 이론) 그 원리라는 것은 인간이 물리적 존재라는 것에서 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기본적인 전제들에 대한 암묵적 '합의'가 없는 학적 이론들은 그야말로 뜬구름 잡기가 되는 것입니다. 신학이던, 물리학이던. 자체적으로 긴가 민가를 가장 '확실히'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수학 뿐이라는 점에서 나머지 학들은 그 암묵적 합의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신학이 인간학이라는 명제는 그런점에서 의미가 있겠죠.
2007.11.05 14:19:41
어떤 이론이 어느 발전단계에선 설명력을 갖거나 헤게모니를 갖다가 그 의미가 퇴색되는데,
자연과학도 그 주기가 길 따름이지 비슷한 운명이거든요(수학만 예외인가요?).
이런 운명을 전제한다면
케인즈의 이론, 하이에크의 이론이 여러 요소들의 복합적인 힘의 역학에 의해 우위를 점하기도 그렇지않기도 하다는 것은 어느정도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케인즈 이론이 주도적일 때, 케인즈적인 렌즈가 효과를 냈을 것이고,
그러다가 여러 도전을 견딜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겁니다.
이런 부침은 너무 당연한 것이죠.
그렇다고 모든 이론들을 똑같은 것으로 놓을 수는 없습니다.
이건 굉장히 위험한 발언인듯 합니다.
케인즈 이론의 당대의 현실설명력뿐 아니라 어떤 현실을 가능하게 하였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야하는 것이고,
역시 현실이 관건이 될 수밖에 없다는 당연한듯한 결론에 다시 도달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많은 이론들이 상부구조로서의 존재의미를 부정할 것입니다.
이러한 부정이 갖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는 분명해보입니다.
토대가 변화하고있는데 상부구조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관관계를 전체적 관계안에서 설명해낼 뿐 아니라
어떤 현실을 만들어가는가 라는 질문을 다시 반복하지않을 수 없는 것이죠.
자연과학도 그 주기가 길 따름이지 비슷한 운명이거든요(수학만 예외인가요?).
이런 운명을 전제한다면
케인즈의 이론, 하이에크의 이론이 여러 요소들의 복합적인 힘의 역학에 의해 우위를 점하기도 그렇지않기도 하다는 것은 어느정도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케인즈 이론이 주도적일 때, 케인즈적인 렌즈가 효과를 냈을 것이고,
그러다가 여러 도전을 견딜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겁니다.
이런 부침은 너무 당연한 것이죠.
그렇다고 모든 이론들을 똑같은 것으로 놓을 수는 없습니다.
이건 굉장히 위험한 발언인듯 합니다.
케인즈 이론의 당대의 현실설명력뿐 아니라 어떤 현실을 가능하게 하였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야하는 것이고,
역시 현실이 관건이 될 수밖에 없다는 당연한듯한 결론에 다시 도달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많은 이론들이 상부구조로서의 존재의미를 부정할 것입니다.
이러한 부정이 갖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는 분명해보입니다.
토대가 변화하고있는데 상부구조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관관계를 전체적 관계안에서 설명해낼 뿐 아니라
어떤 현실을 만들어가는가 라는 질문을 다시 반복하지않을 수 없는 것이죠.
2007.11.05 16:05:11
일단은 제가 포퍼와 라카토슈의 입장에 있단 걸 전제하고 말씀드리죠.
제가 모든 이론이 똑같다고 말씀드린 건 파이어아벤트류의 anything goes가 아닙니다. 그건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합리주의, 상대주의거든요.
제가 말씀드린 모든 사회과학 이론이 거기서 거기라는 말은 SRP(과학적 연구 프로그램)개념에서 보조가설과 중핵이론의 차이랍니다. 말씀드리자면 케인즈나, 하이에크나 실상은 모두 '자본'이라는 강력한 원리하에 그 원리를 둘러싼 보조가설에 지나지 않는 지위를 가진다는 겁니다.
이 보조가설들의 특징은 언제든지 반증에 도전받고 응전하며 방어에 성공하기도 하고, 깨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중핵이론 (아담 스미스와 데이빗 리카도 등의 '자본'주의 원리)은 여전히 그들의 암묵적 합의내에 있지요.
그런면에서 자연과학이 주기가 길다는 표현은 사실이 아닙니다. 자연과학은 그 보조가설이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나오고 반박들이 이틀이 멀다하고 나오기 때문에 오히려 가장 반증가능성에 열려있는, 그래서 깨지기도 쉽고, (이겨낸다면) 더욱 강력해지기 쉬운 토양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오히려 사회과학이 주기가 긴 편입니다) 하지만 매일 쏟아지는 자연과학의 수만건의 논문중에 일반상대성 이론이나, 진화론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또다른 '중핵이론'은 없습니다. '중핵이론'은 어느날 갑자기 천재가 만들어 낸게 아니라 인류가 쌓아온 , 곧 역사적으로 축적된 하나의 완성된 체계거든요.
따라서 모든 해석이 다 동등하다라는 것은 그것들이 중핵이론이 아닌, 보조가설의 위치와 기능을 갖는다는 점에서 동등하다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실설명력과 함께 현실영향력도 고려해야한다는 뒤의 주장에 대해선 따로 말씀드릴 필요가 없겠군요.
단, 말씀하신 것 처럼 "이론의 현실에 대한 영향력"을 고려하는 고찰이 해당 보조가설들 사이에서 우열을 논하는데 하나의 기준이 될 수는 있을 것 같네요. 그러나 눈여겨 살펴보아야 할 것은 말씀하신 대부분이 사회과학 영역에 매우 많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과 역사적으로 "자연과학이론이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끼칠 때"라고 생각할 수 있는 대부분의 사례는 사회과학과 인문학측에서 자연과학의 연구결과물들을 마구 윤색해서 일어난 점이란 사실을 잊으셔선 안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어떤 이론이 '사회에 어떤 현실을 가능하게 하는가'라는 고찰은 자칫, 정말 어떤 이론 자체가 현실가능성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환상을 심어 줄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이론자체는 실상 어떠한 영향력도 가질 수 없습니다. 진화론이 비정한 생존경쟁의 적자생존으로 왜곡되어서 나타난 예라던가, 역사발전론이 맑시즘에서 프롤레타리아-유토피아적 이론적 뒷받침을 한다던가, 나폴레옹을 보고 말 안장위에 앉은 세계정신이라 칭한 헤겔조차, 이론 자체가 현실에 영향을 끼친다기 보단 이론의 현실 적용과정에서 (모든 이론은 일종의 모듈이라는 점에 동의한다면) 뭔가가 강조되고, 뭔가는 축소되고, 뭔가는 삭제되고, 뭔가는 창설된다는 역사적 사실을 보여줍니다. 만약 인문학이 어떤 존재 당위성을 가진다면,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런 것들에 대한 원형의 의미들을 복원시키는 것일테지요.(문헌과 해석의 연구등으로)
케인즈 이론이 어떤 현실을 가능하게 하였는가를 우선 따질 때는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과연 케인즈 이론이 정말 실재에 부합하는 모듈로서 적용되었는가? 즉, 케인즈 이론이 '순수한 상태에서' 어떤, 현실을 만들어 나가는데 적용이 되었느냐는 것이죠.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브레튼우즈 체제가 무너지고 밝혀진, 케인즈 이론 자체가 가지는 약점은 그 자체의 논리적 모순 때문이 아니라 케인즈이론을 '제대로' 적용하지 않았던, 그리고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환경이거든요. 우리는 "맑시즘이 사회에 어떤 현실을 가능하게 하였는가"라는 고찰을 할 때 이 점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제정혁명 당시 볼셰비키라던가 중국 공산당이 과연 "맑시즘이 사회에 어떤 현실을 가능하게 하였는가"라는 고찰에 도움이 될까요? 레닌/스탈린이나 모택동 체제는 실상 실재하는 맑시즘의 거대한 실험장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맑시즘이 어떤 현실을 가능하게 하였는가"라는 질문보단 "맑시즘이 어떻게 현실에서 변형생성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더 합당합니다. 이론과 현실의 간극이라는 얘기지요.
따라서 이론간의 현실설명력이란 모듈(이론)과 실재(현실)의 동형성에 기초하여, 미래작 조망으로는 물리학과 미래학이, 과거의 성찰에는 역사학과 생물학이 참여하여, 연구되고 "평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이론의 현실참여는 전자에 비해 비교적 왜곡될 소지가 많고, 간극이 깊을 뿐더러, 현실가능성 여부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불가능한 것인바 (즉, 반증가능성에 노출되지 않는 것이므로)
이 둘을 동등한 위치에 놓고 그 연관관계를 종합적으로 고찰한다는 건 좀 무리가 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모든 이론이 똑같다고 말씀드린 건 파이어아벤트류의 anything goes가 아닙니다. 그건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합리주의, 상대주의거든요.
제가 말씀드린 모든 사회과학 이론이 거기서 거기라는 말은 SRP(과학적 연구 프로그램)개념에서 보조가설과 중핵이론의 차이랍니다. 말씀드리자면 케인즈나, 하이에크나 실상은 모두 '자본'이라는 강력한 원리하에 그 원리를 둘러싼 보조가설에 지나지 않는 지위를 가진다는 겁니다.
이 보조가설들의 특징은 언제든지 반증에 도전받고 응전하며 방어에 성공하기도 하고, 깨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중핵이론 (아담 스미스와 데이빗 리카도 등의 '자본'주의 원리)은 여전히 그들의 암묵적 합의내에 있지요.
그런면에서 자연과학이 주기가 길다는 표현은 사실이 아닙니다. 자연과학은 그 보조가설이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나오고 반박들이 이틀이 멀다하고 나오기 때문에 오히려 가장 반증가능성에 열려있는, 그래서 깨지기도 쉽고, (이겨낸다면) 더욱 강력해지기 쉬운 토양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오히려 사회과학이 주기가 긴 편입니다) 하지만 매일 쏟아지는 자연과학의 수만건의 논문중에 일반상대성 이론이나, 진화론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또다른 '중핵이론'은 없습니다. '중핵이론'은 어느날 갑자기 천재가 만들어 낸게 아니라 인류가 쌓아온 , 곧 역사적으로 축적된 하나의 완성된 체계거든요.
따라서 모든 해석이 다 동등하다라는 것은 그것들이 중핵이론이 아닌, 보조가설의 위치와 기능을 갖는다는 점에서 동등하다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실설명력과 함께 현실영향력도 고려해야한다는 뒤의 주장에 대해선 따로 말씀드릴 필요가 없겠군요.
단, 말씀하신 것 처럼 "이론의 현실에 대한 영향력"을 고려하는 고찰이 해당 보조가설들 사이에서 우열을 논하는데 하나의 기준이 될 수는 있을 것 같네요. 그러나 눈여겨 살펴보아야 할 것은 말씀하신 대부분이 사회과학 영역에 매우 많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과 역사적으로 "자연과학이론이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끼칠 때"라고 생각할 수 있는 대부분의 사례는 사회과학과 인문학측에서 자연과학의 연구결과물들을 마구 윤색해서 일어난 점이란 사실을 잊으셔선 안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어떤 이론이 '사회에 어떤 현실을 가능하게 하는가'라는 고찰은 자칫, 정말 어떤 이론 자체가 현실가능성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환상을 심어 줄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이론자체는 실상 어떠한 영향력도 가질 수 없습니다. 진화론이 비정한 생존경쟁의 적자생존으로 왜곡되어서 나타난 예라던가, 역사발전론이 맑시즘에서 프롤레타리아-유토피아적 이론적 뒷받침을 한다던가, 나폴레옹을 보고 말 안장위에 앉은 세계정신이라 칭한 헤겔조차, 이론 자체가 현실에 영향을 끼친다기 보단 이론의 현실 적용과정에서 (모든 이론은 일종의 모듈이라는 점에 동의한다면) 뭔가가 강조되고, 뭔가는 축소되고, 뭔가는 삭제되고, 뭔가는 창설된다는 역사적 사실을 보여줍니다. 만약 인문학이 어떤 존재 당위성을 가진다면,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런 것들에 대한 원형의 의미들을 복원시키는 것일테지요.(문헌과 해석의 연구등으로)
케인즈 이론이 어떤 현실을 가능하게 하였는가를 우선 따질 때는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과연 케인즈 이론이 정말 실재에 부합하는 모듈로서 적용되었는가? 즉, 케인즈 이론이 '순수한 상태에서' 어떤, 현실을 만들어 나가는데 적용이 되었느냐는 것이죠.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브레튼우즈 체제가 무너지고 밝혀진, 케인즈 이론 자체가 가지는 약점은 그 자체의 논리적 모순 때문이 아니라 케인즈이론을 '제대로' 적용하지 않았던, 그리고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환경이거든요. 우리는 "맑시즘이 사회에 어떤 현실을 가능하게 하였는가"라는 고찰을 할 때 이 점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제정혁명 당시 볼셰비키라던가 중국 공산당이 과연 "맑시즘이 사회에 어떤 현실을 가능하게 하였는가"라는 고찰에 도움이 될까요? 레닌/스탈린이나 모택동 체제는 실상 실재하는 맑시즘의 거대한 실험장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맑시즘이 어떤 현실을 가능하게 하였는가"라는 질문보단 "맑시즘이 어떻게 현실에서 변형생성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더 합당합니다. 이론과 현실의 간극이라는 얘기지요.
따라서 이론간의 현실설명력이란 모듈(이론)과 실재(현실)의 동형성에 기초하여, 미래작 조망으로는 물리학과 미래학이, 과거의 성찰에는 역사학과 생물학이 참여하여, 연구되고 "평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이론의 현실참여는 전자에 비해 비교적 왜곡될 소지가 많고, 간극이 깊을 뿐더러, 현실가능성 여부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불가능한 것인바 (즉, 반증가능성에 노출되지 않는 것이므로)
이 둘을 동등한 위치에 놓고 그 연관관계를 종합적으로 고찰한다는 건 좀 무리가 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2007.11.08 09:57:52
긴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야고보님께서 말씀하신 중핵, 역시
현실의 내용이 '자본'을 중핵으로하고있다는 것이겠죠.
윗글의 결론,
불가능하지만, 가능한한
'점근적으로' 다가서려고 애쓴다는 것,
이론은 현실에 종속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말이죠.
맑시즘의 최초 수정자는 맑스일 것입니다.
야고보님께서 말씀하신 중핵, 역시
현실의 내용이 '자본'을 중핵으로하고있다는 것이겠죠.
윗글의 결론,
불가능하지만, 가능한한
'점근적으로' 다가서려고 애쓴다는 것,
이론은 현실에 종속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말이죠.
맑시즘의 최초 수정자는 맑스일 것입니다.
2007.11.08 13:02:33
중핵을 현실로 설명할 수는 없구요 ^^;
만약 중핵을 현실로 설명해버리면 우리 모두 소박한 실재론자가 됩니다. ^^;
'자본주의'의 자본은 현실이 아니랍니다.
다만 아담스미스는 최초로 화폐경제에 대한 도덕행동학적 아이디어를 냈다는 측면에서 중핵의 자리에 있는 것이지
그 후의 사람들이 발전시킨 '자본주의'의 자본이 현실 , 즉 실재가 아니라 아니란 말이죠.
어디까지나 중핵은 구성물이되 현실설명력이 너무나 강해서 인류가 오랫동안 축적해온 진실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되는 덩어리입니다.
맑스도 케인즈도, 슘페터도 모두 그 중핵에 대한 보조가설들로서 동등할 뿐이지요.
이론이 현실에 종속된다는 명제 또한 쉽사리 결론 내릴게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그 명제의 전제는 현실이라는 고정체(이데아같은 검증기준)가 존재하고 이론이란 것이 (불완전한) 모사품이라는 생각이 깔렸는데 그건 상기한 바 소박한 실재론자들이 주장하는 바거든요. 오늘날 소박한 실재론자는 물리학자 몇명 외에는 없을겝니다.
앞으로 우리의 집중대상은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즉 이론이 현실에 종속된다거나 현실이 이론에 의해 구성된다거나 하는 것들이 아니라 (그건 답이 나오지않습니다.) 그런 것들이 운동하는 과정이어야 한다는 거시적 생각이 특권님과 저의 종합적 도출이 되지 않을까 싶으네요. ^^
만약 중핵을 현실로 설명해버리면 우리 모두 소박한 실재론자가 됩니다. ^^;
'자본주의'의 자본은 현실이 아니랍니다.
다만 아담스미스는 최초로 화폐경제에 대한 도덕행동학적 아이디어를 냈다는 측면에서 중핵의 자리에 있는 것이지
그 후의 사람들이 발전시킨 '자본주의'의 자본이 현실 , 즉 실재가 아니라 아니란 말이죠.
어디까지나 중핵은 구성물이되 현실설명력이 너무나 강해서 인류가 오랫동안 축적해온 진실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되는 덩어리입니다.
맑스도 케인즈도, 슘페터도 모두 그 중핵에 대한 보조가설들로서 동등할 뿐이지요.
이론이 현실에 종속된다는 명제 또한 쉽사리 결론 내릴게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그 명제의 전제는 현실이라는 고정체(이데아같은 검증기준)가 존재하고 이론이란 것이 (불완전한) 모사품이라는 생각이 깔렸는데 그건 상기한 바 소박한 실재론자들이 주장하는 바거든요. 오늘날 소박한 실재론자는 물리학자 몇명 외에는 없을겝니다.
앞으로 우리의 집중대상은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즉 이론이 현실에 종속된다거나 현실이 이론에 의해 구성된다거나 하는 것들이 아니라 (그건 답이 나오지않습니다.) 그런 것들이 운동하는 과정이어야 한다는 거시적 생각이 특권님과 저의 종합적 도출이 되지 않을까 싶으네요. ^^
‘인문학에서의 주장들은 어떻게 검증하지?’하는 의문이 들데요. ^^
文, 史, 哲이 인문학이라고 한다면?,, ??
人紋학이라 풀이하는 것을 들은 일도 있는데,, ??
이럴 땐 우선, 국어사전을,, ^^
인문과학(人文科學) : 정치⋅경제⋅사회⋅역사⋅학예 등
널리 인류 문화에 관한 정신과학의 총칭. ↔자연과학(自然科學)
검증의 대상이 되는 사안이 많을 듯도 하네요. 자연과학의 도움을 받아서요.
그렇지만, 결국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에 이르면,
검증의 문제가 아니라, 공감의 문제인 듯합니다.
증명의 범위를 넘어서는 문제들에 대해서,
우리들 인식의 깊이와 넓이가 달라지는 것을 반영하는 주장이,
설득력과 공감을 획득하는 과정.
그렇게 보면 되지 않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