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신이예요?" [user friendly 신학의 본보기]

1. 질문
사람들은 끊질기게 묻는다: "예수님이 신이예요?" 혹은 "... 그러면 예수님이 신이 아니란 말이예요?" 쉽고도 어려운 문제요, 기독교인들에게는 영구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의 하나이다. 이미 여러 가지 경우에 대답을 하였지만, 이 곳에서 내가 만나는 이들이 아직도 묻기에 또 다시 대답을 시도한다.

2. 모든 신학도가 알아야 할 사전(事前) 상식
성경을 푼다 혹은 신학을 한다 -- 그 말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각자  자신의 주변 언어 세계를 반드시 먼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언어에는 죽은 언어가 있는가 하면, 살아 있는 언어가 있다. 또한 적극적/긍정적, 좋은 언어가 있는가 하면, 부정적/소극적, 나쁜 언어가 있다. 죽은 언어는 이제는 힘을 상실한 옛 말이다. 예컨대, "고려장"이라는 말은 죽었다. "효도"라는 말은 비실거리지만 아직은 살아 있다. 고려장이 한때는 효의 한 행위라고 간주되어, 긍정적/적극적인 언어였으며, "좋은" 말이었다. 그러나 점차 소극적/부정적인 언어로 변하였고, 마침내는 온전히 죽고 말았다. 남녀칠세 부동석, 칠거지악 등의 말도, 또 남자는 하늘이라는 말도 이미 죽었다. 살아 있다고 하면, 죽여없애야 할 "나쁜 언어"일 뿐이다. "콩심은 데 콩나고 팥심은 데 팥난다"는 말은 어떤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그 말은 통한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 말은 이미 죽은 말이다. 그들의 경험 세계와 모순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축복을 받으면 부자가 된다는 말"은 아브라함과 신명기 시대에는 살아 있는, 좋은 말이었다. 그러나 예수 당대에는 "부자는 천국(복된 자 중)에 들어가기가 몹시 힘들다"는 말이 기독교 표준 사전에 수록된 말이었고, 따라서 오늘날과는 달리 "부자"라는 말이 소극적인 언어였다.

3. 사도신경 -- 기독교 언어의 중요한 표본
특정 언어가 일단 죽고나면, 그 언어에 대하여 긍정적, 좋은 말이냐 부정적, 나쁜 말이냐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긍정/부정을 따지는 것은 살아 있는 언어에 속하기 때문이다. 나는 기독교인들의 주요한 개념 대다수가 2세기의 작품인 [사도신경]에 드러나 있다고 믿기에 종종 사도신경을 되새겨 보는 작업을 한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 중 대다수의 언어가 이미 죽은 언어가 되었거나, 겨우 살아 있는 경우 매우 소극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하면, 사도신경을 통째로 되살려 낼 수 있을까? 내가 일생을 통하여 맡은 한결같은 숙제이다.

4. 신학하는 아픔
그 동안 나의 신학하기는 간혹 옥토에 떨어져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의 경우 돌짝밭에 떨어져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때로는 잘 정돈된 남의 집 화단을 망친다 하여 나의 씨뿌리기 작업은 거부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나의 꽃씨는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나는 고통스럽다. 잊고 싶은 이야기, 다시는 남의 평화를 방해하고 싶지 않은데, 오랜 동안 죽어 있던 지하묘소의 미이라 손안에 들어 있었다던 생명의 씨앗처럼, 나의 신학하기란 꽃씨는 오늘도 여기저기서 뜻하지 않은 방식으로 새싹을 낸다. 아, 이 무슨 운명이란 말인가!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는 "이 잔을 옮겨달라"고 기도하셨듯이, 나는 나의 신학하기를 이젠 잊고 싶다. 정말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 지구 기독교의 미래는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나는 그럴 자격도 권리도 없다. 하느님 사업은 하느님께서 알아서 처리할 일이다. 나는 내 일만 하면 된다. 그러다가 가끔씩 입을 연다. 씨앗을 땅바닥에 흘리듯. 그러면 가끔 싹이 트고 꽃이 핀다. 나는 괴롭다.

5. "연구 수업"
기독교 신학을 하기 수 십 년, 이제는 지치고 또 지쳤다. 알어먹는 사람이 너무 적기 때문이다. 왜일까? 내가 무능한 탓만은 아니다. 예수께서도 "나는 하느님과 하나다"라고 말하자마자 여기저기서, 또 내부에서조차 질문 공세가 밀어닥쳤다 하지 않던가?

5-1.
당신이 하느님과 같다는 말이요? 사람인 주제에?
당신이 모세나 세례자 요한만큼은 된다는 말이지요? 별 볼 일 없는 보통 사람이면서?
당신이 황제, 아니 황실 내시도 못되는 주제에, "하느님의 아들"이라도 된다는 말이예요?
당신 "하느님, 아버지"에게 우리를 데려다 주실 수 있나요? "아버지"를 보여 주실래요?

예수,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그러나 말을 아니 할 수 없었다.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神)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10:34)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내가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게 믿어지거든, 내가 "너희에게 보내진 '하느님(의 아들)'"인 줄로 믿어도 되지 않겠느냐?(요14:11)

제자들은 또 불평이다: "아, 이 말이 어렵도다! 누가 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으랴(요6:60)"

5-2.
이보다 더 좋은 신학 "연구 수업"은 없다. 초등학교 시절, 가끔씩 하면 우리가 "연구 수업"을 하면, 장학관 아저씨들이 구경(?)을 나오곤 하였다.
요한복음(특히 6, 10, 14장)은 바로 예수께서 보여 주신 신학 연구 수업의 실제 상황을 방불케 한다. 과목명: "너희가 신학을 뭘로 아느냐?" 주제명: "예수라는 사람의 신성(神性)."

5-3. 예수라는 신학자의 신학하기
신학 발전사적으로 본다면, 요한복음은 매우 후대의 작품임이 확실하다. "예수가 누구냐?"하는 질문이 마가(마태, 누가)복음의 그것보다 훨씬 더 세련되어 있고, 이 질문의 언어학적 특수성이 주목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서에서는 이 중요한 질문이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단순한 대답으로, 마태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덧붙여진 현재적 대답으로, 누가복음서에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라는 혼합적 대답으로 각각 단락을 짓는다. 그러나 요한복음서는 동일한 질문을 기회 있을 때마다 끈질기게 반복하여 묻는다(대답의 하나: 주는 그리스도시요, 이 세상에 오고 계시는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예수(사실은 기독교)의 주장이 매우 당혹스러운 말임을 감추지 않고 있다. 나아가, 예수와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기능적인 것, 구원론)만이 아니라, 그가 그의 "아버지"와 무슨 상관(근원론, 존재론)이 있는지를 캐묻는다. 그리고 그 결과, "그의 직계 제자들조차 납득하기가 용이하지 않았음"이 첫 연구 수업 참관자요 장학사인 요한 보고서의 핵심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언어는 "당시 사람들이 능히 경험할 수 있는 말"을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놀랍다. 아니, 오늘 우리들도 경험할 수 있는 말들이라는 점에서 정말로 신기하다. 반면에, 다음과 같은 말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처녀 탄생, 어떤 사람이 사람임과 동시, 동일 수준에서 신(의 아들)도 된다, 삼위일체, 죽은 자가 무덤에서 되살아나 영원히 산다 등. 이런 말은 요한복음서에는 없다. 그런 말들은 그 후의 기독교에서 발전되어, 점차 제국의 시녀가 된 후기 기독교에서는 매우 중요한 자리를 굳혔는데, 오늘 우리들은 도저히 "경험"할 수 없다. 우리의 경험 세계를 철저히 뛰어넘는 이런 말들이 "믿어지는" 이상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믿음이 좋은" 혹은 "믿음이 있는" 사람들로 자부하며, 반면에, 이런 것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스스로 "믿음 없는 사람"으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나 자신은 물론, 예수의 제자들과 요한복음서의 예수도 "믿음 없는 사람" 중에 든다. 천국? 그게 어딘지는 모르지만, 예수와 그의 직계 제자들이 간 곳이 아니겠는가? 즉 위에서 말한 그런 의미의 "믿음 좋은 사람들"이 가는 곳은 아니다.

[예수] 믿을 수 있으면 믿으라! 못 믿겠거든 내가 하는 일을 (보고) 믿으라!(요10:38)
[제자들] 뭘 믿으라고요?

6. 예수가 "신"이라는 걸 믿으라!
6-1. 이제는 죽은 대답
이 세상에서 오직 예수만이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태어났으며, 어릴 적부터 비범하였으며, 아무에도 배운 바 없지만, 신과 직접 교신하여 학식이 어렸을 적부터 뛰어났으며, 성인이 되어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각종 기적들을 행사하셨으며,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셔서, 우리들에게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비밀스런 특권을 마련하셨는데, 언젠가는, 조만간 구름을 타고 다시 이 땅에 오실 분이다. 혹은 그는 하느님과 동일 본질이시요, 온전히 동등한 분이시다. 사람들 중 참으로 유일하게 예수만이 동정녀 탄생자이시요, 신성과 인성을 한 몸에 지녔으며, 죽음을 영원히 이기시는 자이다.
이런 말은 우선 성경의 속뜻과 일치하지 않으며, 더 나아가 예수의 신학 방식에 어긋난다. 기독교 안에서, 예수보다 자칭타칭 더 위대한 신학자 그 누구리요? (성경의 속뜻은 성경 학자들, 특히 예수 세미나 연구를 참고하라!) 예수의 신학 방식은 "우리의 경험 세계 밖"으로 우리를 몰고 나가지 않는다. 예전에는 황제들, 석가, 씨족의 조상이 동정녀에서 나오기도 하고 알이나 짐승에게서 나오기도 하였지만, 지금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런 언어는 "속뜻"이 따로 있지(나는 이것을 믿는다) 않다면, 지금은 확실하게 죽은 언어이다. 예수가 그의 죽음 후에 무엇을 하였는지 모르지만, (사실은 존재하지도 않는) 아담의 형벌로 인하여 인류는 여전히 죽음의 독침을 맞고 있다. 예수는 아담의 후예 곧 인간들의 운명을 조금도 바꾸어놓지 못하였다.

6-2. 예수가 말하는 예수의 신성
다시 한번 예수의 신학 연구 수업을 참관하자.

당신이 하느님과 같다는 말이요? 사람인 주제에?
당신이 모세나 세례자 요한만큼은 된다는 말이지요? 별 볼 일 없는 보통 사람이면서?
당신이 황제, 아니 황실 내시도 못되는 주제에, "하느님의 아들"이라도 된다는 말이예요?
당신 "하느님, 아버지"에게 우리를 데려다 주실 수 있나요? "아버지"를 보여 주실래요?

예수,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그러나 말을 아니 할 수 없었다.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神)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10:34)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내가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게 믿어지거든, 내가 "너희에게 보내진 '하느님(의 아들)'"인 줄로 믿어도 되지 않겠느냐?(요14:11)

제자들은 또 불평이다: "아, 이 말이 어렵도다! 누가 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으랴(요6:60)"

나에게 정말 어려운 대목은 제자들의 마지막 불평이다. 왜 제자들 상당수가 이 신학 수업을 끝으로 예수를 떠나고 말았을까? (이 대답은 성경 학자들에게 물어보라.)

6-3. 내가 아직 예수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
나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말과 행동이 하느님의 말과 행동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예수가 하시는 일, 그 모습을 직접 보았기 때문은 아니다. 게다가 그것을 직접 본 사람들도 나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면 보지 않고도 믿는단 말인가? 그렇다, 그러나 그렇다고, 무턱대고 믿는다는 말은 아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루살렘 군중 중에는 "그리스도가 오신다고 할지라도 더 많은 표적을 행하시지는 못하리라"는 약삭빠른 계산 때문에 예수를 믿는 자가 많았다는 보도가 있다(9:31). 나는 그 수준이다.
사람은 저마다 잘 혹은 바로, 혹은 재미있게 혹은 보람있게 살아보려고 무진 애를 쓴다. 그리고 여러 가지 방식, 여러 길로 노력한다는 점에서 대개의 사람들은 어느 시기까지는 다신론자가 된다. 나도 그러했다. 예수를 알기 전에도, 알고 나서도, 지금도, 내게 주어진 운명의 시간을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까 하여 여러 가지 궁리를 한다. 알게 모르게 예수의 길과 다른 길, 반대의 길도 가본다. 그러고는 늘 제자자리로 돌아온다. "예수, 당신은 하늘이 보낸 나의 영원한 스승, 다정한 친구입니다." 나는, 신약성경에 만연되어 있는 바와는 달리, 특히 바울이나 히브리서, 묵시록과는 달리, "보상"을 바라고 예수를 믿지는 않는다. 이미 보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내가 발견한 예수, 복음서 속의 예수가 가르쳐 준 삶의 길이 나에게 삶의 재미, 적어도 삶의 보람을 주는 충분한 길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신이예요?" "예, 그렇습니다." 그러나 내 방식대로, 요한복음서의 예수 방식대로 그렇다.
즉, 이 세상에 신(神)이 있다면, 나는 그 신에게서 "내가 삶의 재미와 보람, 적어도 둘 중 하나를 느끼며 살 수 있는 지혜(와 힘)를 주십시오"하고 부탁할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예수에게서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7. 신학하는 아픔 -- 되짚기
예수의 아픔, 나의 아픔, 그리고 모든 신학하는 자의 아픔은 통하는 데가 있다. 어떤 신학교에서는 "예수는 만병통치약이라"고 가르치지만([사람들의 욕구를 알아내라. 주라. 그리하면 교회 사업이 잘 된다]), 내가 알고 있는 성경 속의 예수는 그렇게 만능은 아니다. 그의 "아버지"도 만능은 아니었다(창세기를 보라!). 요즘 한국의 유행어 하나처럼, 하느님도 하늘에서 종종 "못해 먹겠다!"고 소리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만능자는 없다. 하늘의 신도 그렇지 못하다. 예수, 우리와 같은 사람, 그는 물론 만능이 아니다. 그는 "6백만불의 사나이"나 "스파이더맨" 정도도 아니다. 그래서 아픔이 있다.
신학 공부 한 강좌의 마감 시간에 되면, 으레 희비 쌍곡선이 그어진다. 어떤 사람들은 해방을 얻고, 어떤 사람들은 심각하게 실망을 한다. "예수가 그러면 신이 아니란 말이예요?" 그들이 못다한 말을 나는 안다: "그러면 예수가 6백만불의 사나이나 스파이더맨 정도도 힘이 없다는 얘기군요? 속았네요. 기독교 안에 뭔가 있는 줄 알았어요!" 없다. 아무 것도 없다. 지혜가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너무 큰 것을 원한다. 하느님이 친히 오시더라도 할 수 없는 큰 일을 원한다. 아니, 하느님의 섭리 속에서 말하면, 누군가가 많은 사람들이 갈망하고 있는 그 "큰 일"을 해 주면, 그는 사람들을 "사람 이하의 존재"로 전락시키고 만다. 그래서 우리 하느님, 나의 예수는 할 수 있어도 하지 못한다.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성질상, 본질상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 같은 어버이는, 아무리 힘이 있어도, 자식을 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큰 일"을 해 줄 신(神)을 찾고 있는 사람들, 요한복음서의 예수 제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것 때문에 신학하는 자는 늘 가슴이 아프다. "원하는 바"를 늘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8. 건강한 신학의 3 기준
기독교 신학의 대법정은 누가 뭐래도 예수이다. 성경이 아니다. 교리가 아니다. 교회의 가르침도 아니다. 내 기분은 더더욱 아니다. 말하는 자의 힘, 무력은 물론 아니다. 세계적인 "큰 교회"의 큰 목사님들 중 내가 아는 몇 분들은 예수를 모르거나, 알고도 근거하지 않는다. "맘먹은 대로 된다," "복받는 비결" 등을 운운하는 목사는 기독교 목사가 아니다. 백보 양보하면, 그들은 건강한 기독교 신학을 모르는 이들이다. 예수에게 근거해 있지 않으면서 예수 이름을 파는 그들의 신학은 병든 신학이요, 사람들을 병들게 한다. 이것이 신학의 첫째 기준이다. 예수.
요한의 예수 선생이 보여 주신 바대로, 사람들의 경험 세계 안에 있는 말을 사용해야 한다(그렇다고 신비나 초월을 잊으라는 말은 아니다. 이것은 다른 문제이다). 예수는 자신의 신격을 이스라엘 민족이 열방에 대하여 갖는 관계에 빗대어 해명하였다. 즉 유별난 일로 주장하지 않았다. 인간들 중 그 아무도 "신의 아들"로 불리울 수 없는 세상에 태어나셨다면 -- 오늘날 -- 그는 자신의 역할, 신격을 전혀 다른 말로 표현하였을 것이 확실하다. 오늘날에는 아무리 성스런 삶을 살다간 사람이라도, 그/녀가 "아비 없이 임신"되었기 때문에 그런 위대한 삶을 살았다고는 말하지도 않고, 생각지도 않는다. 이게 사실이라면,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처녀 탄생의 예수"라는 말은 "새 부대"에 담겨져야 한다. 즉 신학의 둘째 기준은 "통하는 말"이다. 통하는 말은 곧 경험될 수 있는 말, 사건을 발생시킬 수 있는 말이다. 처녀 탄생을 믿는 자와 아니 믿는 자가 삶에서 아무런 "차이"를 드러낼 수 없다면, 그것은 "죽은 언어"이다.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말이다. "처녀 탄생"을 우리 시대의 말로 대충 되새기면, "비천한 태생 + 한 시대를 움직이는 인물" 정도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건강한 신학은 사람, 사회, 생명을 건강하게 치료하는 약이라야 한다. "차이,"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약은 폐기처분 당해야 한다. 그러나 "독약"(니이체)이 있다면, 만방에 경고해야 한다. 조용히 폐기처분함으로써 끝날 일이 아니다. 지금, 서울에서, LA에서, 기독교 약을 먹은 오래 복용한 사람들(기독교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면에서 더 건강한가? 이것이 셋째 기준이다. 좋은 변화.

9. 후기
셋이 있지만, 그 중 제일은 xxx이다. 바울 선생의 용기이다. 신학의 기준이 셋 있지만, 그 중 제일은 "제3 기준" 곧 "좋은 변화"이다. 판단은 각자가 한다. 각 시대가 한다. 각 공동체가 한다. 각 단위 생명 연대가 한다. 어떤 종교들이 역사의 심판을 받고, 골동품이 되고 말 듯이,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다. 아무리 예수라 할지라도, 사람들에게, 생명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면, 레위기의 종교처럼, 죽은 시스템이 되고 만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게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아직도 예수를 붙들고 있는데, 무수히 많은 "성공한" 사람들이 오래 전에 이미, 사실상, 예수를 떠났다고 하는 요한 보고서의 사실이다. 이 대목에 오면 나는 늘 무서워진다. 내가 최후의 도망자가 되지 않을까 하여. 무섭다. 그래서 나는 "동굴 속의 후렴"을 다시 듣는다: "바알에게 키스하지 않은 자가 7천이나 있다!(왕상 19:18)" 하느님의 말씀이다.

홍정수 박사가 쓴 글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