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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509
정목사님, 안녕하시온지요?
다비아 온라인을 통해서 조직신학을 배우고 있습니다.
예수승천 설화에 대하여 질의하오니 혜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목사님께서는 다비아의 온라인 강의 중 조직신학 6장(예수의 승천과 재림)에서 예수의 승천 설화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저와 같은 사람을 두고 ‘난감하고 답답한’ 이유를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이 말씀하신대로라면 성서의 깊이가 부족한 자들은 자칫 광신에 빠진 자로 오인되기도 쉬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6장 2쪽 하단에 “거의 모든 설교자들과 신자들이 무조건 ‘믿음’이라는 자세로 성서의 신화적인 보도를 역사적인 사실로 믿는다는 게 과연 신학적으로 정직한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라고 하셨습니다.
설화에 대한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니 아래와 같이 풀이해 주고 있군요.
[「명」「1」있지 아니한 일에 대하여 사실처럼 재미있게 말함. 또는 그런 이야기. 「2」『문』각 민족 사이에 전승되어 오는 신화, 전설, 민담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
고민해도 안 될 때는 물어보는 것이 제일 좋은 것 같습니다.
예수의 승천이 설화라면 다른 성경의 내용도 역사적인 사실보다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하고 더구나 기적에 관한 글은 거의 설화라는 귀결에 이르게 됩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출애굽기의 10가지 재앙, 홍해가 갈라지는 것, 여호수아서의 요단강이 갈라지고, 해가 멈추는 것 그리고 엘리야가 불병거를 타고 승천하고, 갈멜산의 제단에 불이 떨어져 제물을 태운 것, 엘리사가 연못에 빠진 도끼를 떠오르게 한 것 등. 또한 예수님 당시 오병이어사건, 바다 위를 걸으신 것, 나사로와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린 것 등 모든 기적의 사건들이 설화가 아니겠는지요? 설화가 아니라면 기자가 상상력을 동원하여 쓴 픽션(허구)이라는 생각까지 들지 않겠는지요?
예수승천 사건을 모든 사도가 보는 가운데 구름에 싸여 승천하였으므로 객관적으로 입증된 역사적 사실의 기록으로 단순하게 믿으면 안되는 것인지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하늘로 오르실 때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기까지 그분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모습은 전혀 이상할 것 없지 않다고 생각이 드는데요.
성결교회 부흥강사이셨던 이성봉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어릴 때 이 분의 강의를 들었는데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분은 항상 오른손을 꽉 쥐고 다니셨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동행하는 습관이 되어 그런다고 했습니다. 또 먼 하늘에 이상한 구름만 떠도 주님이 다시 오시지 않는가? 하며 바라보셨다고 했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승천하시고 올라가신 모습대로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셔서 그렇게 믿음을 가지고 사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님의 동 6장 2쪽에 쓰신 축자영감설*을 읽어보면 ‘승천하던 예수를 구름이 휩쌌다는 묘사는 그런 승천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문학적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40일동안 제자들과 여러 증인들에게 부활의 몸을 친히 나타내 보이시고 때가 되어 구름에 싸여 승천하신 것이 고대인들의 이해방식인 신화 내지는 설화로 접근해야만 하는 것인가요? 전능하신 하나님이 구름이 아니라 불병거를 보내서 엘리야처럼 승천케 하셔도 별 문제가 될 것이 없지 않나요? 이 사건을 역사적인 사실과 믿음을 가지고 받아들이면 설화와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성서에 나타난 신비한 기적의 사건을 바라볼 때 어디까지가 설화이고 어느 것이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믿어야 하는지요? 성서를 해석하는 자의 지식, 신앙, 신학에 달린 것인지요?
다비아 온라인을 통해서 조직신학을 배우고 있습니다.
예수승천 설화에 대하여 질의하오니 혜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목사님께서는 다비아의 온라인 강의 중 조직신학 6장(예수의 승천과 재림)에서 예수의 승천 설화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저와 같은 사람을 두고 ‘난감하고 답답한’ 이유를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이 말씀하신대로라면 성서의 깊이가 부족한 자들은 자칫 광신에 빠진 자로 오인되기도 쉬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6장 2쪽 하단에 “거의 모든 설교자들과 신자들이 무조건 ‘믿음’이라는 자세로 성서의 신화적인 보도를 역사적인 사실로 믿는다는 게 과연 신학적으로 정직한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라고 하셨습니다.
설화에 대한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니 아래와 같이 풀이해 주고 있군요.
[「명」「1」있지 아니한 일에 대하여 사실처럼 재미있게 말함. 또는 그런 이야기. 「2」『문』각 민족 사이에 전승되어 오는 신화, 전설, 민담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
고민해도 안 될 때는 물어보는 것이 제일 좋은 것 같습니다.
예수의 승천이 설화라면 다른 성경의 내용도 역사적인 사실보다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하고 더구나 기적에 관한 글은 거의 설화라는 귀결에 이르게 됩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출애굽기의 10가지 재앙, 홍해가 갈라지는 것, 여호수아서의 요단강이 갈라지고, 해가 멈추는 것 그리고 엘리야가 불병거를 타고 승천하고, 갈멜산의 제단에 불이 떨어져 제물을 태운 것, 엘리사가 연못에 빠진 도끼를 떠오르게 한 것 등. 또한 예수님 당시 오병이어사건, 바다 위를 걸으신 것, 나사로와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린 것 등 모든 기적의 사건들이 설화가 아니겠는지요? 설화가 아니라면 기자가 상상력을 동원하여 쓴 픽션(허구)이라는 생각까지 들지 않겠는지요?
예수승천 사건을 모든 사도가 보는 가운데 구름에 싸여 승천하였으므로 객관적으로 입증된 역사적 사실의 기록으로 단순하게 믿으면 안되는 것인지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하늘로 오르실 때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기까지 그분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모습은 전혀 이상할 것 없지 않다고 생각이 드는데요.
성결교회 부흥강사이셨던 이성봉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어릴 때 이 분의 강의를 들었는데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분은 항상 오른손을 꽉 쥐고 다니셨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동행하는 습관이 되어 그런다고 했습니다. 또 먼 하늘에 이상한 구름만 떠도 주님이 다시 오시지 않는가? 하며 바라보셨다고 했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승천하시고 올라가신 모습대로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셔서 그렇게 믿음을 가지고 사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님의 동 6장 2쪽에 쓰신 축자영감설*을 읽어보면 ‘승천하던 예수를 구름이 휩쌌다는 묘사는 그런 승천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문학적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40일동안 제자들과 여러 증인들에게 부활의 몸을 친히 나타내 보이시고 때가 되어 구름에 싸여 승천하신 것이 고대인들의 이해방식인 신화 내지는 설화로 접근해야만 하는 것인가요? 전능하신 하나님이 구름이 아니라 불병거를 보내서 엘리야처럼 승천케 하셔도 별 문제가 될 것이 없지 않나요? 이 사건을 역사적인 사실과 믿음을 가지고 받아들이면 설화와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성서에 나타난 신비한 기적의 사건을 바라볼 때 어디까지가 설화이고 어느 것이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믿어야 하는지요? 성서를 해석하는 자의 지식, 신앙, 신학에 달린 것인지요?
2008.06.02 11:51:41
케이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설화"라는 용어는 제가 쓴 것이 아니고 정목사님이 조직신학 6장에 쓰신 글의 인용입니다. "史話"라는 말은 더더욱 정목사님이 쓰신 설화라는 말과는 거리가 먼 것 같구요. 제게도 생소하게 들립니다. 영어 saga는 (영웅·왕후(王侯) 등을 다룬) 북유럽의 전설; 무용담, 모험담; 계도(系圖)라고 나와 있습니다. 설화는 신학적 용어도 영어도 아닌 정목사님이 쓰신 대로 객관적으로 표현된 한국적 단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정목사님은 한글(토속어)과 한자어, 고사성어 등을 잘 쓰시는 것 같거든요.
"설화"라는 용어는 제가 쓴 것이 아니고 정목사님이 조직신학 6장에 쓰신 글의 인용입니다. "史話"라는 말은 더더욱 정목사님이 쓰신 설화라는 말과는 거리가 먼 것 같구요. 제게도 생소하게 들립니다. 영어 saga는 (영웅·왕후(王侯) 등을 다룬) 북유럽의 전설; 무용담, 모험담; 계도(系圖)라고 나와 있습니다. 설화는 신학적 용어도 영어도 아닌 정목사님이 쓰신 대로 객관적으로 표현된 한국적 단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정목사님은 한글(토속어)과 한자어, 고사성어 등을 잘 쓰시는 것 같거든요.
2008.06.02 12:53:41
정목사님께 드리는 질문인데 잠시 끼어들어보면
구약은 잠시 젖혀두고
설화의 논란이 되는 복음서를 중심으로 살펴보지요.
요한복음은 다른 세 복음서와는 전혀 다른 형식과 내용(?)은 아니지만 다른 성격의 복음서이므로 제외하고 흔히들 공관복음이라고 하는 마태, 마가, 누가 이 세 복음서를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사실 신약성서개론(역사비평과 문헌 비평 등을 인용한) 정도만 읽으셔도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래도 개론수준의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신약성서학자 들에 의하면(정설? 또는 다수설) 마태와 누가는 마가복음서를 그 자료로 하여 편찬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가서에는 없는 내용들과 어록들도 존재하는데 이는 동일하게도 어떠한 어록이 기록된 자료(일명 Q자료로 불림)로부터 인용되었다고 봐지는데 실재의 자료가 존속하지 않으므로 그 누구도 실체를 알 수는 없지만 결코 그 존재 여부(과거에)를 부인할 수도 없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Q자료는 예수의 어록만 기록되고 설화적인 요소가 전혀없는 반면
마태와 누가, 그리고 가장 먼저 쓰여져 마태와 누가의 자료가 된 마가복음마저도 설화(신화)적 내용과 기술을 포함하고 있어서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혼란을 주는 것입니다.
위 꼭지글에서 설화의 의미를 살펴보셨지만, 성서의 내용을 설화라고 말하기보다는 설화적 기록방법을 이용했다고 보시는게 더 맞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시적으로 기록하였느냐, 아니면 문학적(소설 혹은 수필처럼 설화적)표현으로 기술하였느냐하면 복음서들은 설화적으로 기술하였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사실을 보고 쓰는 기사처럼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후대에 기록한 사람들이 설화적으로 기록하였다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생각합니다.
그 기술인 복음서의 내용을 오늘날에 읽는 우리가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기록된 사건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기록자(또는 편집자)의 의도와 고백이 무엇인가를 해석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하다못해 똑같은 사건에 대해서와 예수의 어록부분에 해당하는 내용에서도 마태는 마가보다 또 누가보다도 더 많은 해석을 한 기록을 남긴 것(추가로 덧붙여 쓴 흔적이 있음)을 보더라도 오늘날 우리가 그 기록내용을 Fact로 보고 무조건 그 사실을 믿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당시의 시각으로 해석하여 오늘날에 적용하는 과정이 필요하리라 생각하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정목사님도 아직 나서지 않으셨는데 먼저 이렇게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나름의 답을 한 번 써 봤습니다.
구약은 잠시 젖혀두고
설화의 논란이 되는 복음서를 중심으로 살펴보지요.
요한복음은 다른 세 복음서와는 전혀 다른 형식과 내용(?)은 아니지만 다른 성격의 복음서이므로 제외하고 흔히들 공관복음이라고 하는 마태, 마가, 누가 이 세 복음서를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사실 신약성서개론(역사비평과 문헌 비평 등을 인용한) 정도만 읽으셔도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래도 개론수준의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신약성서학자 들에 의하면(정설? 또는 다수설) 마태와 누가는 마가복음서를 그 자료로 하여 편찬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가서에는 없는 내용들과 어록들도 존재하는데 이는 동일하게도 어떠한 어록이 기록된 자료(일명 Q자료로 불림)로부터 인용되었다고 봐지는데 실재의 자료가 존속하지 않으므로 그 누구도 실체를 알 수는 없지만 결코 그 존재 여부(과거에)를 부인할 수도 없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Q자료는 예수의 어록만 기록되고 설화적인 요소가 전혀없는 반면
마태와 누가, 그리고 가장 먼저 쓰여져 마태와 누가의 자료가 된 마가복음마저도 설화(신화)적 내용과 기술을 포함하고 있어서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혼란을 주는 것입니다.
위 꼭지글에서 설화의 의미를 살펴보셨지만, 성서의 내용을 설화라고 말하기보다는 설화적 기록방법을 이용했다고 보시는게 더 맞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시적으로 기록하였느냐, 아니면 문학적(소설 혹은 수필처럼 설화적)표현으로 기술하였느냐하면 복음서들은 설화적으로 기술하였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사실을 보고 쓰는 기사처럼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후대에 기록한 사람들이 설화적으로 기록하였다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생각합니다.
그 기술인 복음서의 내용을 오늘날에 읽는 우리가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기록된 사건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기록자(또는 편집자)의 의도와 고백이 무엇인가를 해석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하다못해 똑같은 사건에 대해서와 예수의 어록부분에 해당하는 내용에서도 마태는 마가보다 또 누가보다도 더 많은 해석을 한 기록을 남긴 것(추가로 덧붙여 쓴 흔적이 있음)을 보더라도 오늘날 우리가 그 기록내용을 Fact로 보고 무조건 그 사실을 믿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당시의 시각으로 해석하여 오늘날에 적용하는 과정이 필요하리라 생각하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정목사님도 아직 나서지 않으셨는데 먼저 이렇게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나름의 답을 한 번 써 봤습니다.
2008.06.03 11:34:42
월광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역사비평을 공부하니 성서해석에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왜냐면 사실을 보고 쓰는 기사처럼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후대에 기록한 사람들이 설화적으로 기록하였다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생각합니다. 그 기술인 복음서의 내용을 오늘날에 읽는 우리가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기록된 사건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기록자(또는 편집자)의 의도와 고백이 무엇인가를 해석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님의 말씀 충분히 이해합니다.
공관복음 저자, 기록연대를 조사해보니 마태, 마가, 누가라는 것과 연대도 추정에 불과합니다. 마태복음을 마태가 썼다면 공생애기간 예수님과 함께 하였으니 가장 밀도있는 사실기록을 하였을 것 같은데 그것도 마태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썼는지 확실치 않다고 합니다. 신학자들이 저자와 연대를 추측하여 정의를 내리는 것 뿐이지요. 설화 또는 설화적 기록도 좋습니다. 그렇다고 고대사람들이라고 하여 꼭 설화의 기법으로 썼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오늘날도 사실을 사실대로 쓰는 분도 있고, 꾸며서 쓰는 분도 있고, 설화를 쓰는 분도 있지요. 제가 궁금한 것은 예수님이 승천할 때의 구름에 관한 이야기니깐 이것에만 한정하겠습니다.
구름은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냈지요. 이것도 설화 내지는 설화적 기법이라고 할런지는 모르겠지만요. 하여튼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 영광, 거룩성을 나타내며 구약에 많이 나타나지요. 신약에도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변형되실 때 구름이 감쌌지요(마17장). 구약시대로 부터 이어진 고대근동의 설화가 변신유형을 강조하니 신약시대도 거기에 준하여 설화로 보아야 한다는 분들이 계시겠지요. 구약성서 기록연대와 신약시대를 구분하면 1000년정도가 흘러 간 것 같구요.
그래도 1000년이 지난 후 신약시대 석학 사도바울이 체험한 주님을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바울이 지성과 체험을 겸비한 신학자요 사도이니깐 그렇게 신비주의자 같지도 않고 정직하고 진솔하게 후대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지 않았겠는지요? 바울은 환상과 계시도 보고 삼천층에도 갔다오고 그랬습니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고후 12:1,2)
이분이 구름 이야기를 또 말씀하시네요.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살전 4:16-18)
사랑방에 들렀더니 서울 촛불집회 다녀오시느라고 수고 많이 하셨네요.
건강 잘 챙기시기를 빕니다.
역사비평을 공부하니 성서해석에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왜냐면 사실을 보고 쓰는 기사처럼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후대에 기록한 사람들이 설화적으로 기록하였다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생각합니다. 그 기술인 복음서의 내용을 오늘날에 읽는 우리가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기록된 사건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기록자(또는 편집자)의 의도와 고백이 무엇인가를 해석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님의 말씀 충분히 이해합니다.
공관복음 저자, 기록연대를 조사해보니 마태, 마가, 누가라는 것과 연대도 추정에 불과합니다. 마태복음을 마태가 썼다면 공생애기간 예수님과 함께 하였으니 가장 밀도있는 사실기록을 하였을 것 같은데 그것도 마태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썼는지 확실치 않다고 합니다. 신학자들이 저자와 연대를 추측하여 정의를 내리는 것 뿐이지요. 설화 또는 설화적 기록도 좋습니다. 그렇다고 고대사람들이라고 하여 꼭 설화의 기법으로 썼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오늘날도 사실을 사실대로 쓰는 분도 있고, 꾸며서 쓰는 분도 있고, 설화를 쓰는 분도 있지요. 제가 궁금한 것은 예수님이 승천할 때의 구름에 관한 이야기니깐 이것에만 한정하겠습니다.
구름은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냈지요. 이것도 설화 내지는 설화적 기법이라고 할런지는 모르겠지만요. 하여튼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 영광, 거룩성을 나타내며 구약에 많이 나타나지요. 신약에도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변형되실 때 구름이 감쌌지요(마17장). 구약시대로 부터 이어진 고대근동의 설화가 변신유형을 강조하니 신약시대도 거기에 준하여 설화로 보아야 한다는 분들이 계시겠지요. 구약성서 기록연대와 신약시대를 구분하면 1000년정도가 흘러 간 것 같구요.
그래도 1000년이 지난 후 신약시대 석학 사도바울이 체험한 주님을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바울이 지성과 체험을 겸비한 신학자요 사도이니깐 그렇게 신비주의자 같지도 않고 정직하고 진솔하게 후대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지 않았겠는지요? 바울은 환상과 계시도 보고 삼천층에도 갔다오고 그랬습니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고후 12:1,2)
이분이 구름 이야기를 또 말씀하시네요.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살전 4:16-18)
사랑방에 들렀더니 서울 촛불집회 다녀오시느라고 수고 많이 하셨네요.
건강 잘 챙기시기를 빕니다.
2008.06.02 23:09:45
광야님! 이해를 하신다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좀...그렇지요?
그냥 사실이면 고민할 필요도 없을텐데 말입니다.
정히 그러하시다면 우리나라의 역사기록 중에 혹시 그 당시에 기록된 역사가 있는지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현존하는 역사서 중에는 적어도 1~2세기에 기록된 것은 없고, 거의 12~13세기가 되어서야 기록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가장 오래된 역사서입니다.
그 중 고조선말고 고구려의 시조로 불리우는 동명성왕 주몽이나 기타 우리나라의 국조 들은 이상하게도 모두 알에서 태어나는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들은 설화집에서 찾아낸 이야기들이 아니라 그냥 역사책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왜 알에서 태어났는지 아십니까?
주몽의 지혜와 무예 등은 너무나 신묘해서 도저히 사람의 것이라 할 수 없을 정도였기에 결국 알에서 태어난 것으로 신화화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님께서 구름의 이야기로 한정하셨으니 구름만 가지고 한 번 살펴봅시다.
광야님께서는 구름의 현대적 정의를 잘 알고 계시지요?
구름이란 [명사]로서 공기 중의 수분이 엉기어서 미세한 물방울이나 얼음 결정의 덩어리가 되어 공중에 떠 있는 것을 말하지요.
그런데 그 구름을 탄다구요? 그게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진술에 혹시 공감이 가셔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인지 오히혀 제가 더 궁금합니다. 진짜 그렇게 믿어지시는지???
바울로가 이해한 하늘이 진짜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그 우주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더 이상의 이야기는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면 그건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아무 근거가 없는 이야기인데 논리적 이야기가 될 수는 없으니까요.
이미 정용섭목사님이 하늘이 열린다는 의미를 가지고 말씀을 하셨었고, 또 여러 곳에서 언급되었던 내용인데 또 어슬픈 제가 나설 내용은 아니네요.
광야님께서는 자꾸 성경에서 구름 탄 것을 본 자들이 고백했다고 이야기하는데 결국 다시 사실에 대한 일기와 같은 기록이냐 아니냐의 문제로 돌아와버리고 만답니다.
혹시 구름을 타보고 싶으시면 굳이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리실 것 없이 지리산에 구름이 걸릴 때 타실 수도 있구요,
아님 좀 과격하게 비행기에서 뛰어 내리셔도 타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비행기에서 내려 구름을 타실 때는 낙하산을 꼭 준비하시구요...
그런데 아직도 좀...그렇지요?
그냥 사실이면 고민할 필요도 없을텐데 말입니다.
정히 그러하시다면 우리나라의 역사기록 중에 혹시 그 당시에 기록된 역사가 있는지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현존하는 역사서 중에는 적어도 1~2세기에 기록된 것은 없고, 거의 12~13세기가 되어서야 기록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가장 오래된 역사서입니다.
그 중 고조선말고 고구려의 시조로 불리우는 동명성왕 주몽이나 기타 우리나라의 국조 들은 이상하게도 모두 알에서 태어나는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들은 설화집에서 찾아낸 이야기들이 아니라 그냥 역사책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왜 알에서 태어났는지 아십니까?
주몽의 지혜와 무예 등은 너무나 신묘해서 도저히 사람의 것이라 할 수 없을 정도였기에 결국 알에서 태어난 것으로 신화화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님께서 구름의 이야기로 한정하셨으니 구름만 가지고 한 번 살펴봅시다.
광야님께서는 구름의 현대적 정의를 잘 알고 계시지요?
구름이란 [명사]로서 공기 중의 수분이 엉기어서 미세한 물방울이나 얼음 결정의 덩어리가 되어 공중에 떠 있는 것을 말하지요.
그런데 그 구름을 탄다구요? 그게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진술에 혹시 공감이 가셔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인지 오히혀 제가 더 궁금합니다. 진짜 그렇게 믿어지시는지???
바울로가 이해한 하늘이 진짜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그 우주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더 이상의 이야기는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면 그건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아무 근거가 없는 이야기인데 논리적 이야기가 될 수는 없으니까요.
이미 정용섭목사님이 하늘이 열린다는 의미를 가지고 말씀을 하셨었고, 또 여러 곳에서 언급되었던 내용인데 또 어슬픈 제가 나설 내용은 아니네요.
광야님께서는 자꾸 성경에서 구름 탄 것을 본 자들이 고백했다고 이야기하는데 결국 다시 사실에 대한 일기와 같은 기록이냐 아니냐의 문제로 돌아와버리고 만답니다.
혹시 구름을 타보고 싶으시면 굳이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리실 것 없이 지리산에 구름이 걸릴 때 타실 수도 있구요,
아님 좀 과격하게 비행기에서 뛰어 내리셔도 타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비행기에서 내려 구름을 타실 때는 낙하산을 꼭 준비하시구요...
2008.06.03 10:32:09
설화적 표현으로 받아들이느냐 사실적 표현으로 받아들이느냐의 여부는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신앙고백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구름"을 상징적 표현으로 생각하는 분은 그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구름을 실존적 구름과 동일하게 생각하는 분은 그에 어울리는 신앙생활을 충실히 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만, 자신의 해석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거나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말입니다.... 아, 그나저나 정목사님 답변 좀 부탁드려요...
2008.06.03 11:33:10
영원한 그리고 실재적인 소망에 관한 이야기를 했더니 지리산구름을 타보거나,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라...... 저를 초등학교 수준 정도로 멘트하시는 데 리플이 대단하시다는 생각도 들고 허허롭기도 합니다.
그래서 궁극적인 소망을 아주 쉬운 표현으로 썼는데 달빛이 너무 눈부셔 그 부분은 지우렵니다.
그래서 궁극적인 소망을 아주 쉬운 표현으로 썼는데 달빛이 너무 눈부셔 그 부분은 지우렵니다.
2008.06.03 14:06:45
광야님!
제 글이 좀 조폭수준이라고 청개구리님이 멘트를 하셨더라고요.
아마 아직은 저의 글쓰기 자질이 부족해서 그렇지 않은가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급적 아래에 댓글이 달렸을 경우에는 오자나 탈자를 수정하는 문제가 아닌 경우에는 삭제하지 않는 것이 댓글문화정착에 도움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밑에 달린 댓글도 다 수정이 되어야하는데 그것을 검토하자면 또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문맥파악이 어렵기도 합니다.
제가 광야님과 같은 소망을 가지고 있었을 때가 분명히 있는데 어찌 그것을 폄하하겠습니까?
저 역시 당시에는 정말 간절히 그날을 소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 소망을 간직하고 있느니 차라리 현실을 직시하기를 바라는 맘에서 좀 심한 예를 들었는데 혹 맘이 상하셨다면 용서를 바랍니다...
제 글이 좀 조폭수준이라고 청개구리님이 멘트를 하셨더라고요.
아마 아직은 저의 글쓰기 자질이 부족해서 그렇지 않은가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급적 아래에 댓글이 달렸을 경우에는 오자나 탈자를 수정하는 문제가 아닌 경우에는 삭제하지 않는 것이 댓글문화정착에 도움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밑에 달린 댓글도 다 수정이 되어야하는데 그것을 검토하자면 또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문맥파악이 어렵기도 합니다.
제가 광야님과 같은 소망을 가지고 있었을 때가 분명히 있는데 어찌 그것을 폄하하겠습니까?
저 역시 당시에는 정말 간절히 그날을 소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 소망을 간직하고 있느니 차라리 현실을 직시하기를 바라는 맘에서 좀 심한 예를 들었는데 혹 맘이 상하셨다면 용서를 바랍니다...
2008.06.03 16:10:17
닥터 케이님이 말씀하신 것에 동의합니다. 다만 승천 기사를 조심스레 다루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단순히 그게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말씀을 광야님께 드리고 싶어서, 댓글 답니다.
잘 아시는 대로, 승천 기사는 신약에서 세 번 나옵니다. 막16:19, 눅24:51, 그리고 사도행전 1:9지요. 이 중 마가복음이 제일 먼저 기록되었고 다른 복음서들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마가복음 16:9절 이하 부분이 처음부터 마가복음에 속해 있던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1) 가장 오래되고 신뢰받는 두 종류 사본에 이 부분이 없고, 2) 16장 부분이 들어있는 다른 사본들도 서로 내용을 달리하고 있으며, 3) 9절이하 부분의 표현/어법이나 내용이 이전 부분과는 차이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방식으로, 누가복음-사도행전의 기록 역시 사본들 사이에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주로 소위 "서방 사본"으로 분류되는 사본들에서 "하늘로 올리우시"는에 해당되는 구절이 없습니다. 또한 남은 공관 복음인 마태복음에는 아시다시피 아예 승천 기사가 없지요.
"그렇다면 너는 지금 승천 기사가 전부,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냐?" 이렇게 물으실까봐 두렵습니다. 다만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현재 우리는 무시할 수 없을 만큼의 차이를 보이는 사본들을 여럿 가지고 있고, 그 차이의 원인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추측할 수 있을 뿐, 어느 쪽이 진정 영감을 받아서 적은 것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런 차이가 있는 본문들을 대할 때 조심스레 접근해야 한다고 믿는 것이구요.
잘 아시는 대로, 승천 기사는 신약에서 세 번 나옵니다. 막16:19, 눅24:51, 그리고 사도행전 1:9지요. 이 중 마가복음이 제일 먼저 기록되었고 다른 복음서들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마가복음 16:9절 이하 부분이 처음부터 마가복음에 속해 있던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1) 가장 오래되고 신뢰받는 두 종류 사본에 이 부분이 없고, 2) 16장 부분이 들어있는 다른 사본들도 서로 내용을 달리하고 있으며, 3) 9절이하 부분의 표현/어법이나 내용이 이전 부분과는 차이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방식으로, 누가복음-사도행전의 기록 역시 사본들 사이에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주로 소위 "서방 사본"으로 분류되는 사본들에서 "하늘로 올리우시"는에 해당되는 구절이 없습니다. 또한 남은 공관 복음인 마태복음에는 아시다시피 아예 승천 기사가 없지요.
"그렇다면 너는 지금 승천 기사가 전부,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냐?" 이렇게 물으실까봐 두렵습니다. 다만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현재 우리는 무시할 수 없을 만큼의 차이를 보이는 사본들을 여럿 가지고 있고, 그 차이의 원인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추측할 수 있을 뿐, 어느 쪽이 진정 영감을 받아서 적은 것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런 차이가 있는 본문들을 대할 때 조심스레 접근해야 한다고 믿는 것이구요.
2008.06.03 16:51:23
광야 님,
저에게 직접 질문을 주셨는데,
이렇게 늦어서 미안합니다.
틈을 내기 힘들었습니다.
빈이 님이 대글을 올리지 않았다면
깜빡하고 그냥 지나칠 뻔 했어요.
요즘 꼭지글과 대글들이 많이 올라오는 바람에
중요한 것들을 놓치는 경우도 있답니다.
위의 대글에서 빈이 님이 일단 핵심적인 거는 짚어주신 것 같군요.
빈이 님이 더 좋은 답을 주실 수 있을 거 같은데,
아닌가요?
'설화'라는 단어부터 조금 불편하셧지요? 광야 님.
꾸며낸 가짜라는 뜻으로 그 단어를 사용한 건 아니에요.
나의 독특한 어법도 아니구요.
성서신학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됩니다.
'전승된 이야기' 정도로 이해하시는 어떨는지요.
성서는 모두 '구전'에서 시작되었어요.
그 과정에서 첨삭이 반복되었지요.
그게 참으로 중요한 거랍니다.
어떤 사건이든지 실증적으로 객관적인 사건보다는
후대에 의해서 해석된 사건이 훨씬 심층적인 의미가 담기기 마련이에요.
성서는 바로 그런 과정을 거친 유대교와 기독교의 고유한 유산이지요.
닥터케이 님이 지적한대로
설화는 진짜다, 아니다 하는 관점이 아닙니다.
광야 님이 정작 말하고 싶은 것은
성서의 이야기를 객관적 사실로 받아들이면 왜 안 돼냐, 하는 거겠지요.
특히 승천기사를 중심으로 말씀하셨네요.
하늘로 올림을 받는다는 이 이야기가 과연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를 따지기 보다는 그냥 사실대로 믿고 싶다고 하신다면
그렇게 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마 광야 님도 이성적으로는 믿기 힘들지만
신앙은 이성을 초월하니까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시겠지요.
성서의 이야기가 모두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확인이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성서텍스트가 말하는 걸 정확하게 아는 건 아주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고대 성서시대 사람들이나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똑같이 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처럼
고대인들은 그들의 세계관 안에서 하나님을 해명했답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승천설화, 또는 그런 전승으로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려야겠군요.
고대인들에게 하늘은 은폐된 생명의 세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승천했다는 것은 그런 은폐된 생명의 세계로 가셨다는 뜻이에요.
그 은폐된 생명의 세계는 종말에 우리에게 확연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참고적으로
부활과 승천은 똑같은 사건을 가리킵니다.
둘 다 궁극적인 생명과 연관되는 고대인들의 종교적 표상이랍니다.
부활후 40일 동안 세상에 계셨다는 걸 알고 계시지요?
그런 건 큰 의미가 있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구약에 근거해서 변증하려는 성서기자의 노력입니다.
이런 사건을 실증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그것이 가리키는 신앙적 현실로 해석하는 것과의 차이를 물으셨지요?
이건 아주 큽니다.
만약 모든 기독교인들이 시골 할머니들처럼
단순하게 세상을 이해하고 그런 믿음으로 산다면
무조건 모든 걸 사실(fact)로 받아들여도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실체와 그 신비를 들여다보는 사람들은
그런 걸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성서의 이야기는 사건(event)로 전달되어야 합니다.
전자는 Historie(실증적인 역사)라고 한다면
후자는 Geschichte(해석된 역사)입니다.
오늘의 시대에게 기독교가 보편적 진리의 근거에서 변증되기 위해서라도
성서 이야기들은 그 본래적 현실(reality)을 확보해야 하며,
오늘의 지평에서 해석(hermeneutics) 되어야 합니다.
광야 님,
이런 작업이 성서의 권위를 훼손한다거나
기독교 신앙의 깊이를 파괴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참고적으로,
세계 기독교의 차원에서 볼 때 이런 해석이 정통'(?)이랍니다.
좋은 하루!
저에게 직접 질문을 주셨는데,
이렇게 늦어서 미안합니다.
틈을 내기 힘들었습니다.
빈이 님이 대글을 올리지 않았다면
깜빡하고 그냥 지나칠 뻔 했어요.
요즘 꼭지글과 대글들이 많이 올라오는 바람에
중요한 것들을 놓치는 경우도 있답니다.
위의 대글에서 빈이 님이 일단 핵심적인 거는 짚어주신 것 같군요.
빈이 님이 더 좋은 답을 주실 수 있을 거 같은데,
아닌가요?
'설화'라는 단어부터 조금 불편하셧지요? 광야 님.
꾸며낸 가짜라는 뜻으로 그 단어를 사용한 건 아니에요.
나의 독특한 어법도 아니구요.
성서신학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됩니다.
'전승된 이야기' 정도로 이해하시는 어떨는지요.
성서는 모두 '구전'에서 시작되었어요.
그 과정에서 첨삭이 반복되었지요.
그게 참으로 중요한 거랍니다.
어떤 사건이든지 실증적으로 객관적인 사건보다는
후대에 의해서 해석된 사건이 훨씬 심층적인 의미가 담기기 마련이에요.
성서는 바로 그런 과정을 거친 유대교와 기독교의 고유한 유산이지요.
닥터케이 님이 지적한대로
설화는 진짜다, 아니다 하는 관점이 아닙니다.
광야 님이 정작 말하고 싶은 것은
성서의 이야기를 객관적 사실로 받아들이면 왜 안 돼냐, 하는 거겠지요.
특히 승천기사를 중심으로 말씀하셨네요.
하늘로 올림을 받는다는 이 이야기가 과연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를 따지기 보다는 그냥 사실대로 믿고 싶다고 하신다면
그렇게 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마 광야 님도 이성적으로는 믿기 힘들지만
신앙은 이성을 초월하니까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시겠지요.
성서의 이야기가 모두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확인이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성서텍스트가 말하는 걸 정확하게 아는 건 아주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고대 성서시대 사람들이나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똑같이 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처럼
고대인들은 그들의 세계관 안에서 하나님을 해명했답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승천설화, 또는 그런 전승으로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려야겠군요.
고대인들에게 하늘은 은폐된 생명의 세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승천했다는 것은 그런 은폐된 생명의 세계로 가셨다는 뜻이에요.
그 은폐된 생명의 세계는 종말에 우리에게 확연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참고적으로
부활과 승천은 똑같은 사건을 가리킵니다.
둘 다 궁극적인 생명과 연관되는 고대인들의 종교적 표상이랍니다.
부활후 40일 동안 세상에 계셨다는 걸 알고 계시지요?
그런 건 큰 의미가 있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구약에 근거해서 변증하려는 성서기자의 노력입니다.
이런 사건을 실증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그것이 가리키는 신앙적 현실로 해석하는 것과의 차이를 물으셨지요?
이건 아주 큽니다.
만약 모든 기독교인들이 시골 할머니들처럼
단순하게 세상을 이해하고 그런 믿음으로 산다면
무조건 모든 걸 사실(fact)로 받아들여도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실체와 그 신비를 들여다보는 사람들은
그런 걸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성서의 이야기는 사건(event)로 전달되어야 합니다.
전자는 Historie(실증적인 역사)라고 한다면
후자는 Geschichte(해석된 역사)입니다.
오늘의 시대에게 기독교가 보편적 진리의 근거에서 변증되기 위해서라도
성서 이야기들은 그 본래적 현실(reality)을 확보해야 하며,
오늘의 지평에서 해석(hermeneutics) 되어야 합니다.
광야 님,
이런 작업이 성서의 권위를 훼손한다거나
기독교 신앙의 깊이를 파괴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참고적으로,
세계 기독교의 차원에서 볼 때 이런 해석이 정통'(?)이랍니다.
좋은 하루!
2008.06.03 17:30:49
정목사님의 답변을 보면 '
'설화' 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적 의미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고 들립니다. 맞지요?
제 생각에도 굳이 이 단어를 국어사전적 의미로 생각할 필요 없는 것 같습니다.
광야님께서도 저와 같이 그런 의미로 생각해서 질문을 올리신 것이 아니라
정목사님께서 '설화'라고 말씀하신 그 속에는 승천을 사실로 보지 않으시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 이에 대한 질문을 하신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에 대한 정목사님의 답변은 "승천이란 은폐된 생명의 세계로 가셨다는 뜻이고
그 은폐된 생명의 세계는 종말에 우리에게 확연하게 드러나게 될것이다"라는 것이네요.
의미가 어떠한 차이가 있건 예수님의 승천을 사실로 보고 계신 것이지요? 맞사온지요!
제가 이미 언급한 것을 싸가지 없이(?) 제 나름대로 정리를 한 이유는
댓글을 다신 분들 중에 '설화'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적 의미로 받아들이고
승천은 '설화'이지 사실이 아니다라고 하신 분들이 있는 것 같아서입니다.
사실로 보느냐 안보느냐는 닥터케이님 말씀에 적극 공감합니다.
이는 개개인의 생각에 따라 다르겠지요.
그래서 제 생각을 말씀드리면 전 사실로 믿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표현되었든지 관계없이 일어난 사실을 성경에 적었다고 믿습니다.
어떤 것은 믿고 어떤 것은 믿지 않고 얼마든지 개인의 생각에 따라 그렇게 할 수 있겠지요.
저도 창세기 1장 부터 믿지 않고 의문을 제기했던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제가 교만했었고 우매했었는가를 무려 15년이 흐른 후에 알았지만 말입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그것도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이런 저런 기록들을 가지고
사실이니 아니니 하는 것도 사실 부질없다고 감히 생각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고 했듯이
그냥 믿으렵니다. 그냥 믿으니까 좋기만 하더라구요.^^
'설화' 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적 의미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고 들립니다. 맞지요?
제 생각에도 굳이 이 단어를 국어사전적 의미로 생각할 필요 없는 것 같습니다.
광야님께서도 저와 같이 그런 의미로 생각해서 질문을 올리신 것이 아니라
정목사님께서 '설화'라고 말씀하신 그 속에는 승천을 사실로 보지 않으시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 이에 대한 질문을 하신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에 대한 정목사님의 답변은 "승천이란 은폐된 생명의 세계로 가셨다는 뜻이고
그 은폐된 생명의 세계는 종말에 우리에게 확연하게 드러나게 될것이다"라는 것이네요.
의미가 어떠한 차이가 있건 예수님의 승천을 사실로 보고 계신 것이지요? 맞사온지요!
제가 이미 언급한 것을 싸가지 없이(?) 제 나름대로 정리를 한 이유는
댓글을 다신 분들 중에 '설화'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적 의미로 받아들이고
승천은 '설화'이지 사실이 아니다라고 하신 분들이 있는 것 같아서입니다.
사실로 보느냐 안보느냐는 닥터케이님 말씀에 적극 공감합니다.
이는 개개인의 생각에 따라 다르겠지요.
그래서 제 생각을 말씀드리면 전 사실로 믿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표현되었든지 관계없이 일어난 사실을 성경에 적었다고 믿습니다.
어떤 것은 믿고 어떤 것은 믿지 않고 얼마든지 개인의 생각에 따라 그렇게 할 수 있겠지요.
저도 창세기 1장 부터 믿지 않고 의문을 제기했던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제가 교만했었고 우매했었는가를 무려 15년이 흐른 후에 알았지만 말입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그것도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이런 저런 기록들을 가지고
사실이니 아니니 하는 것도 사실 부질없다고 감히 생각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고 했듯이
그냥 믿으렵니다. 그냥 믿으니까 좋기만 하더라구요.^^
2008.06.03 17:42:30
빈이님이 잘 말씀하셨네요.
이왕 성서비평의 이야기가 나온김에 여기서 잠깐 살펴볼까요?
성서비평에는 가장 먼저
1. 역사비평이 있습니다. (가장 많이 편향되었다고 비판받는 방법론입니다.)
역사비평은 1)비문 증거 2)고고학적 증거 )사회학적 증거 등의 증거를 이용하여 이스라엘의 과거에 대한 성서의 기록 이면에 있는 “실제의 역사 사건들”을 넘어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성서의 이야기를 우리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현실로 끌어들이는 방법을 말합니다.
2. 두 번째로는 자료비평이 있습니다.
자료비평은 광범위한 히브리필사본과 고대 번역본들에 기초해 가능한 한 본문이 실제 말해진 가장 최초의 단계를 추적하는 방법입니다.
3. 세 번째로 전승사비평이 있습니다.
“전승”이란 말의 넓은 의미는 다음세대로 계속 전달되는 한 집단이나 공동체의 삶과 관습 그리고 경험 모두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특별히 언어전승 다시 말해 말과 기록의 형태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말과 문서를 뜻하는 좁은 의미를 가집니다.
4. 네 번째는 양식비평으로 양식비평이란 구약성서 각 책에 사용된 문학적인 장르를 규정하고 분류하며 각 장르들이 구전적인 형태에서 기록적 형태로 발전된 것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기록적인 형태를 취한 것인지 추정하는 작업을 말합니다.
5. 다섯 번째로 편집비평이 있는데 편집비평은 구약성서 본문의 발전 단계를 역사적으로 설명하여 그 새로운 역사적 상황마다 강조되었던 독특한 신학적인 사상을 찾아내기 때문에 역사적인 면에 치중한 본문의 의미산출을 한다.
6. 여서 번째는 사회과학적 비평이 있는데 사회과학적 비평이란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고대 이스라엘의 사회적 상황을-사회구조, 구성원, 그들간의 갈등 상황 등을 포함- 현대의 다양한 사회과학적 이론과 방법들을 통해 연구함으로써 그 사회를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재구성하고, 그 결과로써 현재의 해석자가 속해있는 사회의 올바른 변화를 위해 적용할 수 있는 교훈을 찾으려는 시도를 말합니다.
이 이외에도 다양한 성서비평의 방법이 있겠지만 간략하게 정의정도만 소개를 드렸습니다.
더 궁금하신 사항은 성서비평에 관련된 책을 구입하시던지 아니면 강의를 수강하시던지 하시면 많은 도움을 얻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왕 성서비평의 이야기가 나온김에 여기서 잠깐 살펴볼까요?
성서비평에는 가장 먼저
1. 역사비평이 있습니다. (가장 많이 편향되었다고 비판받는 방법론입니다.)
역사비평은 1)비문 증거 2)고고학적 증거 )사회학적 증거 등의 증거를 이용하여 이스라엘의 과거에 대한 성서의 기록 이면에 있는 “실제의 역사 사건들”을 넘어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성서의 이야기를 우리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현실로 끌어들이는 방법을 말합니다.
2. 두 번째로는 자료비평이 있습니다.
자료비평은 광범위한 히브리필사본과 고대 번역본들에 기초해 가능한 한 본문이 실제 말해진 가장 최초의 단계를 추적하는 방법입니다.
3. 세 번째로 전승사비평이 있습니다.
“전승”이란 말의 넓은 의미는 다음세대로 계속 전달되는 한 집단이나 공동체의 삶과 관습 그리고 경험 모두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특별히 언어전승 다시 말해 말과 기록의 형태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말과 문서를 뜻하는 좁은 의미를 가집니다.
4. 네 번째는 양식비평으로 양식비평이란 구약성서 각 책에 사용된 문학적인 장르를 규정하고 분류하며 각 장르들이 구전적인 형태에서 기록적 형태로 발전된 것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기록적인 형태를 취한 것인지 추정하는 작업을 말합니다.
5. 다섯 번째로 편집비평이 있는데 편집비평은 구약성서 본문의 발전 단계를 역사적으로 설명하여 그 새로운 역사적 상황마다 강조되었던 독특한 신학적인 사상을 찾아내기 때문에 역사적인 면에 치중한 본문의 의미산출을 한다.
6. 여서 번째는 사회과학적 비평이 있는데 사회과학적 비평이란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고대 이스라엘의 사회적 상황을-사회구조, 구성원, 그들간의 갈등 상황 등을 포함- 현대의 다양한 사회과학적 이론과 방법들을 통해 연구함으로써 그 사회를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재구성하고, 그 결과로써 현재의 해석자가 속해있는 사회의 올바른 변화를 위해 적용할 수 있는 교훈을 찾으려는 시도를 말합니다.
이 이외에도 다양한 성서비평의 방법이 있겠지만 간략하게 정의정도만 소개를 드렸습니다.
더 궁금하신 사항은 성서비평에 관련된 책을 구입하시던지 아니면 강의를 수강하시던지 하시면 많은 도움을 얻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2008.06.03 18:26:38
빈이님, 눈사람님, 감사하구요.
그리고
정목사님, 자세한 답변 감사합니다.
목사님, 어제 오전 대전 반석동에 있는 교회에서 강의 하셨지요?
한번 가서 듣고 싶었는데 시간을 못내었습니다.
'고대인들에게 하늘은 은폐된 생명의 세계를 가리키고,
예수님이 승천했다는 것은 그런 은폐된 생명의 세계로 가셨다는 뜻'이라고 하셨네요.
그러면 고대인들의 하늘 인식과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의 하늘 인식은 다른 건가요?
동일하다고 생각이 드는데요.....하늘의 세계, 은폐되어 있는 생명의 세계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보겠습니다.
편안한 저녁시간 되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정목사님, 자세한 답변 감사합니다.
목사님, 어제 오전 대전 반석동에 있는 교회에서 강의 하셨지요?
한번 가서 듣고 싶었는데 시간을 못내었습니다.
'고대인들에게 하늘은 은폐된 생명의 세계를 가리키고,
예수님이 승천했다는 것은 그런 은폐된 생명의 세계로 가셨다는 뜻'이라고 하셨네요.
그러면 고대인들의 하늘 인식과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의 하늘 인식은 다른 건가요?
동일하다고 생각이 드는데요.....하늘의 세계, 은폐되어 있는 생명의 세계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보겠습니다.
편안한 저녁시간 되시기를 빕니다.
2008.06.04 04:54:05
글쎄요. '승천 기사를 [객관적으로 입증된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라고 믿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건, "예수님이 그 당시에 지상의 어느 지점에서 하늘의 어느 지점으로 올라가셨다"고 믿으시겠다는 것 아니었나요?
이 경우의 하늘이란, "은폐된 생명의 세계"라기보다는, 공간 좌표계로 표현되는 기술적 용어겠지요. 만약 광야님께서 믿고 싶어하시는 내용이 정목사님의 설명과 일치하는 것이었다면, 애초에 질문이 시작될 이유가 없었을 것 같은데요.
"성서는 모두 '구전'에서 시작되었고, 이후 첨삭이 반복되었다"는 목사님 말씀에 사족을 달자면, 마가 복음의 작성 연대가 추측일 뿐이라는 광야님 말씀은 옳습니다만, 그 연대가 65년 이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 말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부활/승천 이후 복음서가 문서로 정리되는 데 적어도 한 세대 정도의 공백이 있다는 뜻이고, 그 기간 동안에는 신약에 나오는 주요 기사들은 구전되거나, 간략한 자료로만 전해져 왔을 것으로 사람들은 추측합니다.
한 세대 정도가 지나서, 복음서의 저자들은 이제까지의 전승된 기사들과 (현재는 알려지지 않은) 단편적인 자료들을 종합해서,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읽힐 것을 목적으로, 복음서를 만들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전승된 기사를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복음서를 작성한 것은 아닐 것이라는 주장을 지지하는 몇몇 증거들을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복음서의 '원본'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신약 성서의 조각은 2세기 초반 것이고, 모든 내용을 담고 있는 완전한 사본은 4세기에 작성된 것이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그리스어로 기록된 사본(조각)만 5000개가 넘는다고 하는데, 그 사본들이 완전히 똑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 어느 쪽이 과연 '영감을 받아 작성된' 원본에 가까운 것인지 밝히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은 위의 댓글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씀은 모두 객관적으로 입증된 역사적 사실이다, 끝!", 이렇게 한 방(?)에 정리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그렇게 말하기 어려운, 해석이 개입될 수 밖에 없는 '현실적인' 조건들이 이러이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 경우의 하늘이란, "은폐된 생명의 세계"라기보다는, 공간 좌표계로 표현되는 기술적 용어겠지요. 만약 광야님께서 믿고 싶어하시는 내용이 정목사님의 설명과 일치하는 것이었다면, 애초에 질문이 시작될 이유가 없었을 것 같은데요.
"성서는 모두 '구전'에서 시작되었고, 이후 첨삭이 반복되었다"는 목사님 말씀에 사족을 달자면, 마가 복음의 작성 연대가 추측일 뿐이라는 광야님 말씀은 옳습니다만, 그 연대가 65년 이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 말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부활/승천 이후 복음서가 문서로 정리되는 데 적어도 한 세대 정도의 공백이 있다는 뜻이고, 그 기간 동안에는 신약에 나오는 주요 기사들은 구전되거나, 간략한 자료로만 전해져 왔을 것으로 사람들은 추측합니다.
한 세대 정도가 지나서, 복음서의 저자들은 이제까지의 전승된 기사들과 (현재는 알려지지 않은) 단편적인 자료들을 종합해서,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읽힐 것을 목적으로, 복음서를 만들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전승된 기사를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복음서를 작성한 것은 아닐 것이라는 주장을 지지하는 몇몇 증거들을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복음서의 '원본'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신약 성서의 조각은 2세기 초반 것이고, 모든 내용을 담고 있는 완전한 사본은 4세기에 작성된 것이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그리스어로 기록된 사본(조각)만 5000개가 넘는다고 하는데, 그 사본들이 완전히 똑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 어느 쪽이 과연 '영감을 받아 작성된' 원본에 가까운 것인지 밝히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은 위의 댓글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씀은 모두 객관적으로 입증된 역사적 사실이다, 끝!", 이렇게 한 방(?)에 정리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그렇게 말하기 어려운, 해석이 개입될 수 밖에 없는 '현실적인' 조건들이 이러이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2008.06.04 09:50:16
성서의 영감설을 믿는 입장에서는 다비아의 성서해석이 썩 좋아보이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이성의 한계를 인정한다면,우리의 좋은 이성을 우리가 이해할수 없는 것에 낭비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차라리 진화론의 허구같은 것을 밝히는 데 사용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은 분명 인간의 손에 의해 쓰여지고 보존되었으나 인간의 담론과는 구별되는 그 무엇이 있다고 믿습니다
2008.06.04 10:27:15
청개구리님, 그나마 다비아의 입장은 대부분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이루어졌음을 믿는 사람들이랍니다. 다만, 축자영감설은 대부분 거부하지요. 축자영감설을 지지해야만 믿음이 성립되는건 아니랍니다. 비록 성경은 인간에 의해 씌어지고 오랜 세월동안 첨삭이 반복되어 왔으나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손길이 개입하셨음을 믿는 것이 다비아 회원들 대부분의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예 하나님의 개입이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자유주의자들과는 다른 입장이지요.
2008.06.04 11:20:37
모든 연구를 크게 나누면 부인하기 위한 연구와 인정되는 사실에 대한 증거를 확보하기 위한 연구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비아에 대해 완전히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동안 제가 대한 다비아는 부인하기 위한 연구나 비평을 하는 곳은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가끔 다비아의 운영진도 아닌 분들 중에 다비아의 취지와 어긋나는 말씀을 하신 분들이 있지만,
처음엔 저도 그분이 다비아의 무엇인가를 대변하는 분으로 생각했었지만
결국 저처럼 자신의 소견을 말하는 분으로 판단되어졌고
그래서 전 다비아 운영진님들의 댓글을 제외한 다른 댓글로는
다비아의 성격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감히 어떻게 인간이 무엇을 얼마나 파헤칠 수 있으며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기에 증명하고픈 욕구와 연구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가능하면 역사적 실체와 성경을 접목하여 성경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것을
정확히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 다비아의 목적이라 판단됩니다.
결코 성경의 사실을 부인하고자 함이 아니라고 생각되기에
좀 더 폭넓게 이곳의 글들을 많이 읽고 있습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서로 질문하고 답변하는 다비아가 되기를 바래봅니다.
물론 인간이 얼마나 정확한 답과 질문을 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심지어 그 질문과 답마저도 무의미한 것이 될 수 있겠지만...
다비아에 대해 완전히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동안 제가 대한 다비아는 부인하기 위한 연구나 비평을 하는 곳은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가끔 다비아의 운영진도 아닌 분들 중에 다비아의 취지와 어긋나는 말씀을 하신 분들이 있지만,
처음엔 저도 그분이 다비아의 무엇인가를 대변하는 분으로 생각했었지만
결국 저처럼 자신의 소견을 말하는 분으로 판단되어졌고
그래서 전 다비아 운영진님들의 댓글을 제외한 다른 댓글로는
다비아의 성격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감히 어떻게 인간이 무엇을 얼마나 파헤칠 수 있으며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기에 증명하고픈 욕구와 연구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가능하면 역사적 실체와 성경을 접목하여 성경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것을
정확히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 다비아의 목적이라 판단됩니다.
결코 성경의 사실을 부인하고자 함이 아니라고 생각되기에
좀 더 폭넓게 이곳의 글들을 많이 읽고 있습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서로 질문하고 답변하는 다비아가 되기를 바래봅니다.
물론 인간이 얼마나 정확한 답과 질문을 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심지어 그 질문과 답마저도 무의미한 것이 될 수 있겠지만...
2008.06.04 17:32:31
빈이님, 리플을 달면 자꾸 혼선이 있을 것 같지만 이해를 돕고자 또 몇 자 적습니다.
"글쎄요. '승천 기사를 [객관적으로 입증된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라고 믿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건, "예수님이 그 당시에 지상의 어느 지점에서 하늘의 어느 지점으로 올라가셨다"고 믿으시겠다는 것 아니었나요?
이 경우의 하늘이란, "은폐된 생명의 세계"라기보다는, 공간 좌표계로 표현되는 기술적 용어겠지요. 만약 광야님께서 믿고 싶어하시는 내용이 정목사님의 설명과 일치하는 것이었다면, 애초에 질문이 시작될 이유가 없었을 것 같은데요. "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의견을 이야기 하며 질문을 할 뿐입니다. 질문하면서 자신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곳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입시키거나 주장할 능력도 없고요. 질문을 주고받다보면 선입견, 고정관념이 삶과 신앙의 자리에 깊이 뿌리 내렸다는 것을 깨닫기도 하지요. 그래서 공부를 다시 하기도 합니다. 사유라면 좀 거창하지만 사유해 봅니다. 승천하셨다면 하늘 어디인가 계시겠지요. 지상 위치는 제자들이 있던 어느 지점으로 생각이 드는데, 님이 말한 하늘좌표와 공간의 위치는 잘 모르겠고요. 그냥 정목사님이 설명한대로 하늘이 은폐된 생명의 세계로 이해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해가 되었어요.
고대인들도 그렇게 생각했다는데 현대인인 우리가 그렇게 생각 못할 것 없잖아요. 물론 불신자는 땅이 은폐된 생명의 세계로 믿는 분도 있을테지요. 사람의 인식은 다양하잖아요. 믿는다고 하는 사람도 머리 속이 이렇게 다양한데요. 오늘 조직신앙 19장"성서에 대해" 읽었는데 새롭네요. 어쩌면 정목사님은 이렇게 글을 잘 쓰실까 탄복이 되고요.
사실, 제가 질문한 골자는 하늘로 올라가시는데 구름으로 가리어져 올라가셨다는 거였어요. 그런데 6장에는 그게 아니라는 거고 설화라는 거였지요. 위 글에 썼다시피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 임재, 거룩함을 나타내지요. 사도 바울도 환상중에 계시를 받았는지 보았는지 구름타고 오신다고 말하고 있고요. 바울은 지성인이요 학자요 이성이 뚜렷한 석학이잖아요. 바울도 예수님이 천사들과 함께 구름타고 오신다고(살전4:16-18) 하기에 그렇게 믿은거죠.
바울의 기록은 편지라서 다른 사람이 쓴 것도 아니고 직접 자기가 쓴 것같구요. 찬송가도 있잖아요.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고 큰 나팔이 울려나면 주예수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해도 겁 없겠네" 그래서 바울의 글도 믿고 찬송도 은혜롭고 하여 믿은 것이 아주 오래 되었어요. 구름타고 가셨다가 구름타고 오신다고 하는데 안 믿으면 안되잖아요. 우리 신앙의 핵심은 예수부활과 재림이라고 확신하거든요. 공부하면서 정목사님의 종말론적인 실재, 종말론적인 통치가 제일 마음에 와 닿았어요. 파루시아 시에 공중에서 주님 맞이하려면 밑에서 받쳐주는 구름이 있다면 얼마나 푸근하고 안정감이 있겠어요. 그냥 그렇게 단순하게 믿은 거예요. 좀 환상적인 것인가요? 그런데 다비아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하네요. 다비아에서 역사비평, 문학비평, 사회과학비평을 이야기 해서 저도 다시 한 번 공부했죠. 저도 역사를 좋아해요. 설교학 책인데요 역사비평에 관한 내용이 담겨있는 그레이다누스가 쓴 책이 참 좋은 것 같았어요.
정목사님과 생각이 같다면 질문을 뭐하러 하셨냐구 하셨죠? 같지는 않아요. 어떻게 사람이 생각이 같을 수가 있겠어요? 신학자이시니까는 물어보고 정말 궁굼하고 배워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질문을 시작한거예요. 그 결과로 '은폐된 생명의 세계'를 제 마음에 접수한 거예요. 님은 "은폐된 생명의 세계"라기보다는, 공간 좌표계로 표현되는 기술적 용어겠지요."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그렇게 이해 안했는데요. 위치가 한정된 좌표정도로 축소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할 수도 없잖아요. 이렇게 생각했어요.
우주에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이 안미친 곳이 없다고 생각했죠. 우주를 놓고 볼때 현 태양계가 하나의 먼지에 불과하다면 이 우주엔 이러한 태양계 같은 것들이 수없이 많을 것이다. 물론 그곳에도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가 충만할 것이다. 하나님은 하늘이 자신의 보좌요 땅은 자신의 발등상이라고 하셨지요. 우리가 생각하는 무한정의 그 이상의 절대타자, 절대초월자는 우주 어디에나 충만하시다. 그렇게 이해를 했어요. 예수님은 하나님이라고 하니깐 자신이 본래 존재하던 그 영광 속으로 들어가셨다. 그 영광의 세계가 바로 '은폐된 생명의 세계'이다라고 이해했죠. 그리고 가실 때 제자들이 보았다. 그런데 그때 구름이 예수를 둘렀다. 성경의 말씀에 설화도 있지만 진짜 본지 누가 아냐? 구름은 물론 상징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상징도 역사를 초월하시는 그분 앞에서는 실재한다. 이렇게 이해한거죠. 이것이 생명과 구원에는 별 문제가 미치지 않을 것 같거든요.
바르트는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한 질문은 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역사적 존재이고 하나님은 그 초월자이기 때문에 인간의 인식 안에 묶어둘 수 없다. 바르트의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빈이님,
좋은 하루 되세요.
"글쎄요. '승천 기사를 [객관적으로 입증된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라고 믿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건, "예수님이 그 당시에 지상의 어느 지점에서 하늘의 어느 지점으로 올라가셨다"고 믿으시겠다는 것 아니었나요?
이 경우의 하늘이란, "은폐된 생명의 세계"라기보다는, 공간 좌표계로 표현되는 기술적 용어겠지요. 만약 광야님께서 믿고 싶어하시는 내용이 정목사님의 설명과 일치하는 것이었다면, 애초에 질문이 시작될 이유가 없었을 것 같은데요. "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의견을 이야기 하며 질문을 할 뿐입니다. 질문하면서 자신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곳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입시키거나 주장할 능력도 없고요. 질문을 주고받다보면 선입견, 고정관념이 삶과 신앙의 자리에 깊이 뿌리 내렸다는 것을 깨닫기도 하지요. 그래서 공부를 다시 하기도 합니다. 사유라면 좀 거창하지만 사유해 봅니다. 승천하셨다면 하늘 어디인가 계시겠지요. 지상 위치는 제자들이 있던 어느 지점으로 생각이 드는데, 님이 말한 하늘좌표와 공간의 위치는 잘 모르겠고요. 그냥 정목사님이 설명한대로 하늘이 은폐된 생명의 세계로 이해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해가 되었어요.
고대인들도 그렇게 생각했다는데 현대인인 우리가 그렇게 생각 못할 것 없잖아요. 물론 불신자는 땅이 은폐된 생명의 세계로 믿는 분도 있을테지요. 사람의 인식은 다양하잖아요. 믿는다고 하는 사람도 머리 속이 이렇게 다양한데요. 오늘 조직신앙 19장"성서에 대해" 읽었는데 새롭네요. 어쩌면 정목사님은 이렇게 글을 잘 쓰실까 탄복이 되고요.
사실, 제가 질문한 골자는 하늘로 올라가시는데 구름으로 가리어져 올라가셨다는 거였어요. 그런데 6장에는 그게 아니라는 거고 설화라는 거였지요. 위 글에 썼다시피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 임재, 거룩함을 나타내지요. 사도 바울도 환상중에 계시를 받았는지 보았는지 구름타고 오신다고 말하고 있고요. 바울은 지성인이요 학자요 이성이 뚜렷한 석학이잖아요. 바울도 예수님이 천사들과 함께 구름타고 오신다고(살전4:16-18) 하기에 그렇게 믿은거죠.
바울의 기록은 편지라서 다른 사람이 쓴 것도 아니고 직접 자기가 쓴 것같구요. 찬송가도 있잖아요.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고 큰 나팔이 울려나면 주예수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해도 겁 없겠네" 그래서 바울의 글도 믿고 찬송도 은혜롭고 하여 믿은 것이 아주 오래 되었어요. 구름타고 가셨다가 구름타고 오신다고 하는데 안 믿으면 안되잖아요. 우리 신앙의 핵심은 예수부활과 재림이라고 확신하거든요. 공부하면서 정목사님의 종말론적인 실재, 종말론적인 통치가 제일 마음에 와 닿았어요. 파루시아 시에 공중에서 주님 맞이하려면 밑에서 받쳐주는 구름이 있다면 얼마나 푸근하고 안정감이 있겠어요. 그냥 그렇게 단순하게 믿은 거예요. 좀 환상적인 것인가요? 그런데 다비아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하네요. 다비아에서 역사비평, 문학비평, 사회과학비평을 이야기 해서 저도 다시 한 번 공부했죠. 저도 역사를 좋아해요. 설교학 책인데요 역사비평에 관한 내용이 담겨있는 그레이다누스가 쓴 책이 참 좋은 것 같았어요.
정목사님과 생각이 같다면 질문을 뭐하러 하셨냐구 하셨죠? 같지는 않아요. 어떻게 사람이 생각이 같을 수가 있겠어요? 신학자이시니까는 물어보고 정말 궁굼하고 배워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질문을 시작한거예요. 그 결과로 '은폐된 생명의 세계'를 제 마음에 접수한 거예요. 님은 "은폐된 생명의 세계"라기보다는, 공간 좌표계로 표현되는 기술적 용어겠지요."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그렇게 이해 안했는데요. 위치가 한정된 좌표정도로 축소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할 수도 없잖아요. 이렇게 생각했어요.
우주에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이 안미친 곳이 없다고 생각했죠. 우주를 놓고 볼때 현 태양계가 하나의 먼지에 불과하다면 이 우주엔 이러한 태양계 같은 것들이 수없이 많을 것이다. 물론 그곳에도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가 충만할 것이다. 하나님은 하늘이 자신의 보좌요 땅은 자신의 발등상이라고 하셨지요. 우리가 생각하는 무한정의 그 이상의 절대타자, 절대초월자는 우주 어디에나 충만하시다. 그렇게 이해를 했어요. 예수님은 하나님이라고 하니깐 자신이 본래 존재하던 그 영광 속으로 들어가셨다. 그 영광의 세계가 바로 '은폐된 생명의 세계'이다라고 이해했죠. 그리고 가실 때 제자들이 보았다. 그런데 그때 구름이 예수를 둘렀다. 성경의 말씀에 설화도 있지만 진짜 본지 누가 아냐? 구름은 물론 상징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상징도 역사를 초월하시는 그분 앞에서는 실재한다. 이렇게 이해한거죠. 이것이 생명과 구원에는 별 문제가 미치지 않을 것 같거든요.
바르트는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한 질문은 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역사적 존재이고 하나님은 그 초월자이기 때문에 인간의 인식 안에 묶어둘 수 없다. 바르트의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빈이님,
좋은 하루 되세요.
2008.06.04 18:49:53
예, 저는 광야님이 승천 기사를 위 댓글에 쓰신 것처럼 '해석'하시는 데 대해 아무런 이의가 없습니다, 없구요 ^^;
제가 경계했던 부분은, 성서의 기사들을, 말의 엄격한 의미에서, "객관적으로 입증된 역사적 사실의 기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그런 식으로 해석 없이 성서를 읽을 때의 '하늘'은, "은폐된 생명의 세계" 보다는, 로케트가 발사되고 인공위성이 돌아다니는, 기술적인 공간을 지칭하는 단어일 것이라고 말씀드린 거구요.
제가 광야님의 글을 잘못 읽었을 수도 있습니다만, 광야님의 원 질문은 제 생각엔 "설화도 있지만 진짜 본지 누가 아냐?" (진짜일 수도 있을 텐데 그냥 역사적인 사실 기록이라고 하지 왜 설화라고 부르나?) 같습니다. 앞서 이 주제를 연구한 사람들도 다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거라고 믿습니다.
다만 역사적 기록이라고 강조하는 경우, 성서 외적인 증거의 유무는 제쳐두고라도, 모든 사도들이 목격한 이토록 중요한 사건이 왜 전승 과정에서 걸러지고, 결과적으로 (다른 기사들과는 달리) 초기 복음서에 공통적으로 길게 실리지 못하게 되었는 지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위에 말씀드린 대로 상당수의 초기 사본들은 아예 승천 기사 부분만 빼고 (물론 특정한 신학적 동기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만) 적기도 하는데요, 역시 강력한 구전 전승이 있었다고 한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요.
제가 경계했던 부분은, 성서의 기사들을, 말의 엄격한 의미에서, "객관적으로 입증된 역사적 사실의 기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그런 식으로 해석 없이 성서를 읽을 때의 '하늘'은, "은폐된 생명의 세계" 보다는, 로케트가 발사되고 인공위성이 돌아다니는, 기술적인 공간을 지칭하는 단어일 것이라고 말씀드린 거구요.
제가 광야님의 글을 잘못 읽었을 수도 있습니다만, 광야님의 원 질문은 제 생각엔 "설화도 있지만 진짜 본지 누가 아냐?" (진짜일 수도 있을 텐데 그냥 역사적인 사실 기록이라고 하지 왜 설화라고 부르나?) 같습니다. 앞서 이 주제를 연구한 사람들도 다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거라고 믿습니다.
다만 역사적 기록이라고 강조하는 경우, 성서 외적인 증거의 유무는 제쳐두고라도, 모든 사도들이 목격한 이토록 중요한 사건이 왜 전승 과정에서 걸러지고, 결과적으로 (다른 기사들과는 달리) 초기 복음서에 공통적으로 길게 실리지 못하게 되었는 지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위에 말씀드린 대로 상당수의 초기 사본들은 아예 승천 기사 부분만 빼고 (물론 특정한 신학적 동기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만) 적기도 하는데요, 역시 강력한 구전 전승이 있었다고 한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요.
2009.03.30 16:06:51
바르트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하네요...
"축자영감과 역사 비평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축자영감을 택하겠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나에겐 너무나도 다행스럽다."
예를 들어서 축자영감에 깊이 뿌리박은 신앙은 성서의 기적 자체를 너무 절대화하는 경향으로 가게 되면, 일반적이고 보편적 상식. 순리성에 어긋나는 비현실적 인간형을 만들 가능성이 많지 않을까... 반면에 역사비평을 절대화 한다면 인간의 이성이 우상화되어 사실상 신비인 "신앙" 이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지지 않을까...
바르트는 그 두 가지 태도 사이에서의 긴장감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긴장감이야말로 우리의 삶 속에서 신앙의 실제가 어떠해야함을 여실히 드러내 주는 것이 아닐까요... 상식과 합리성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서도 그 너머를 바라보는 신앙 말이에요...
바르트는 성서의 언어를 보는 제 삼의 눈을 넌지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시사하는 바가 아주 크지 않나, 마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십니다... (이명박 버전 ㅋㅋ)
"축자영감과 역사 비평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축자영감을 택하겠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나에겐 너무나도 다행스럽다."
예를 들어서 축자영감에 깊이 뿌리박은 신앙은 성서의 기적 자체를 너무 절대화하는 경향으로 가게 되면, 일반적이고 보편적 상식. 순리성에 어긋나는 비현실적 인간형을 만들 가능성이 많지 않을까... 반면에 역사비평을 절대화 한다면 인간의 이성이 우상화되어 사실상 신비인 "신앙" 이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지지 않을까...
바르트는 그 두 가지 태도 사이에서의 긴장감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긴장감이야말로 우리의 삶 속에서 신앙의 실제가 어떠해야함을 여실히 드러내 주는 것이 아닐까요... 상식과 합리성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서도 그 너머를 바라보는 신앙 말이에요...
바르트는 성서의 언어를 보는 제 삼의 눈을 넌지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시사하는 바가 아주 크지 않나, 마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십니다... (이명박 버전 ㅋㅋ)
즉, 요셉의 이야기는 뭉뚱그려서 요셉설화, 출애굽 사건 전체를 뭉뚱그려서 출애굽 설화 이렇게 표현하는데, 실제로 요셉이 살았는지 아니면 요셉으로 상징되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로 뭉친건지, 실제로 200만명이 한번에 출애굽 한것인지 아니면 소수의 노예집단들의 투쟁에 관한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모세라는 인물로 축약되어 신화적 언어로 변형되어 전승된 것인지 이러한 판단은 신학적 용어로서의 "설화" 라는 단어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Saga 라는 용어는 그것이 역사적 사실 그대로이냐, 아니면 역사적 사실에 약간의 변형이 가미된 전승이냐, 아니면 완전히 가공된 전설이냐의 판단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saga 를 설화라고 번역하는건 좋지 못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저는 차라리 "사화(史話)" 라는 용어가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물론, 광야님의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은 못됩니다만, 사전적 의미를 말씀하시길래 잠시 코멘트 드렸습니다.
제 의견으로는 Saga 를 역사적 진실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상징적 언어의 전승으로 받아들일 것인가의 궁극적인 판단은 개인의 실존적 믿음의 고백속에서 결정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정목사님께서 좀 더 좋은 답변을 주시리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