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다비아에서 활동하다가 한동안 푹 쉬고 왔습니다.
정목사님께서 공부가 더 필요한것 같다고 말씀하셔서
틈틈히 책도 보고 생각도 많이 해보고 있습니다.
컴백 인사를 질문으로 하게 되었네요.
저는 다비아에서 '신화적 사건'이라고 부르는 사건에 대해서 문자 그대로 믿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물위를 걷는것,물로 포도주 만드는 사건,동정녀 사건 등)
물론 정목사님께서는 그런 사건들을 문자 그대로 믿지 않고
해석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계시더군요.
(사실 그래서 많이 혼란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부활은 어떻습니까?
그것은 역사적 사건인가요 아니면 신화적 사건인가요?
아마 역사적 사건이라고 보시는데 이견이 없을 것 같은데...
(혹시 이견이 있다면 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질문) 만약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 사건이라고 한다면,
성경의 다른 이적들은 신화적 사건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죽음에서 살아나신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물 위를 걷는게 왜 불가능한 사건이어야 하는지?
만약 제가 불신자라면 성경의 다른 기적은 그럴수도 있겠다 싶어도
예수의 부활은 절대 믿지 않을 것 같거든요.
그만큼 예수의 부활은 다른 이적보다도 더 놀라운 일이 아닌가요?
제 생각엔 예수의 부활로써 복음서의 이적들이 역사적 사건임이 확증되는것 같은데...
어느 문자냐에 따라서 의미도 달라지기도 하지요
희랍어(코이네)로 읽을 것이냐 아님 영어로(영어도 번역본이 엄청나지요) 아니 한글로 (
한글도 개역, 개역개정, 공동번역 ,새번역, 표준새번역 등등 ... 이건 말 장난하자는것이 아닙니다
한글만이라도 비교해 읽어 보시면 내용이 달라지는 부분도 참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다 아는 것 같지만 "하느님" 하나님"의 용어 차이 같은 것이지요
그래서 성서를 읽을 때는 성서만 읽는 것이 아니라 여러 주석을 참고 하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엉뚱한 참견 이었습니다
그냥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다라고 믿는 것이죠.
예를 들어 신문에 어제 살인 사건이 있었다라고 나오면
진짜 살인 사건이 있었나보다 하고 믿는 것처럼 말이죠.
'평민'님 말처럼 번역에 따라 또 원어의 의미에 따라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것의 의미가 달라질수 있지만,
제가 말하는 것은
'그 사건이 실제 역사라는 시공간에서 일어났는가?'
하는 것에 포인트가 있습니다.
물론 성서해석의 기본 원칙에 대한 것은 알고 있습니다.
(주석참고,문맥읽기,문화적요소 고려,비유 등의 문학적 표현기법 등)
전에 정목사님은 문자 그대로 믿는다는 얘기에 대해서
만약 그렇다면 고린도서의 '여자는 머리에 수건(?) 써야 한다'는 것도
문자 그대로 실천하느냐고 물으시더군요.
그런 식의 대답은 핵심을 비껴간 것 같습니다.
저는 바울이 그런 권고를 한적이 있는가, 즉 그 권고가 역사적 사실인가를 묻는 것이거든요.
그 권고를 지금도 따를것이냐 하는건 그 다음 문제이구요.
예수가 물 위를 걸었다고 하는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건이 어느 날 밤에 실제 있었던 사건인가 아니면 없었던 사건인가에 따라서
그 말씀에 대한 해석과 적용이 크게 달라진다고 봅니다.
만약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면 그 사건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이나
성서 기자의 결론 같은 부분은 상상과 거짓에 기반한 것이므로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봅니다.
복음서의 이적들은 (그것이 이적이라고 불리는것에서 알수 있듯이)
실제 사건임을 전제로 해야 예수의 신성을 말할수 있는것이니까요.
다른 분들의 답변을 기다립니다.
문자 그대로 믿는다는 것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신문을 볼 때 오늘날 누구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기자의 해석이며 편집장의 해석이며 자본과 정치의 해석입니다.
실제로 살인하지 않은 자도 살인자가 되기도 하며
실제 살인자라 하였더라도 그 주목하는 관점도 달라지고 때로는 또다른 덤탱이를 쓰기도 합니다.
성서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 사건이냐도 중요한 것이지만
그 사건을 바라보고 읽는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신학이 존재합니다.
신학은 이렇게 성서와 교회를 위해 그러한 측면에서 봉사하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겠지요.
어쨌든 우리는 성서를 읽을 때 문자 그대로 읽는 전근대적 방식은 버려야 할 것입니다.
이미 잔칫집가는길님께서는 잘 알고 숙지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이 전제하에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자면,
말씀하셨다시피 잔칫집가는길님의 관심은 "시공간에서 일어난 사건이냐?"는 것이지요.
그런데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믿냐 믿지않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는 쉽습니다.
그 믿음으로부터 사건을 사실이 되게 하는 것 또한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기적)를 물리적 시공간으로 끌어오는 것은 만만한 작업이 아닙니다(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뒤에는 어마어마한 신학적 담론들이 요구되고 있으니까요.
(물리학자들도 자신들의 상식으로는 상상은 커녕 꿈도 꿀 수 없는
10차원이니 11차원이니 이야기를 합니다만
수학을 통해 그것들을 구성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최소한 하나님을 "구경꾼 역할"로 전락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판넨베르크, 자연신학, 박일준 역, 97).
이는 무엇이냐면,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것으로 여겨지는 기적들만 쏙쏙 빼다가
이건 하나님 것이고 나머지의 "일상적 사건"(이건 사건으로 여겨지지도 않았죠)은
자연법칙의 순리대로 돌아가는 정상적 물리체계로 이해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고 그는 주장합니다.
판넨베르크는 이에 대해 브렛슈나이더(Bretschneider)의 글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누구도 보전개념에는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아울러 자연사건들 속에서 하느님의 즉자적 활동은 오직 기적들로만 국한되었다"(97)
판넨베르크는 잘 아시다시피 구속사를 보편사로 확장시킨 신학자입니다.
(이에 대하여는, 아마도 읽어보셨겠지만,
다비아의 신학마당<특강<"보편사적 해석학"으로 가셔서 해당 글,
특히 가다머의 지평융해를 판넨베르크가 어떻게 확대 발전시키는지, 읽어보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이것은 엄청난 해석학적 전환입니다.
그리고 이는 예수의 행위들과 공명을 잘 이루고 있는 듯 합니다.
기적에만 몰두하고 관심을 보이던 많은 회중들과 특별히 바리새인들을 기억해보세요.
하나님의 기적을 통한 활동은 그러한 기적을 통해
"난 최고의 신이다"를 말하려고 한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판넨베르크가 말했듯이, 기적은
"기대될 수 없는 것"(제 판넨베르크의 "피조물의 우연성" 번역을 참조해주세요)을 의미하며
이것의 핵심은 시공연속체를 초월해계시며
영원(Ewigkeit)안에 편재(Allgegenwart)해 계시는 하나님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앞서 인용하였듯이,
이것을 단지 기적 사건(이해될 수 없는 사건)에만 몰두하여 이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제 이 이야기가 얼렁뚱땅 넘어가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쉽게 포기하지 마시고 생각의 끈들을 붙잡아
계속 이어나가셨으면 합니다.
잔칫집가는길 님의 질문을 해결하기 위한 핵심들을 요약하자면,
"역사란 무엇인가?"
"오늘날 물리학에서 이해하는 시공간은 무엇인가?"
"실제(현실)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게는 다중질문으로 들리는
"그 사건이 실제 역사라는 시공간에서 일어났는가?"
에는 한마디로 예/아니오를 답할 수가 없네요.
그러나 그것이 예수의 신성과 연관시키는 건 또 다른 문제입니다.
예수의 신성이 단지 부활의 사실성에 국한된 사건이라면
전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적 행위를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전지전능의 하나님이 한 사람을 살렸다는 게
우리에게 기적이구나! 하고 할 만한 일일까요?
이 기적을 진짜 몸으로 체험하는 기적다운 기적으로서 경험한 자들은
2천년전 사람들 몇 뿐입니다.
그것은 이제 기적(기대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사건"과 "역사"로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역사의 경험은 계시의 체험이며
따라서 2천년전 사람들의 경험과 완전히 동일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보편적 역사를 통해 우리는 그 역사에 참여자요 경험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문제는 아마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고
또 "지속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과 그 사실의 고리들로 이해하고 있는 인간의 눈으로 인식하는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보편사 안에 융해되어 있다는 사실을 통해 볼 때,
이것이야말로 핵심을 비껴간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러한 지적 가속을 멈추지 마시고 정진하시길 바랍니다!
복음서의 기적들이 역사적으로 사실이냐 아니냐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기적들이 역사적으로 사실이었을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지요. 그런것은 현재의 자료로는 도저히 객관적으로 입증할 방법이 없답니다. 그러나, 설령 부활이 액면 그대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할지라도 기독교 신앙은 파괴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숙한 단계의 신앙이지요. 어느날 고고학자들이 예수님의 무덤과 유골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기독교 신앙은 여전히 살아남아 빛을 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구요? 왜 그런지는 좀 더 깊은 공부와 묵상을 통해서 배워가시기 바랍니다. 한국교회는 바울 사도가 말한것처럼 "젖이나 먹고 딱딱한 것을 먹지 못하는"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바른 신앙을 고수하는 영적으로 순결한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자처합니다. 하지만, 신자들을 깊은 신앙의 단계로 이끌어가지는 못하더군요...
복음서 기자들이 그토록 열정적으로 복음을 기록한 것이 단순히 기적에 대한 놀라움 때문이었을까요?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였던 것일까요? 진짜로 그게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면 기독교는 시작부터 무너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열렬한 신앙인으로 만들었을까? 그것에 대한 고민부터 먼저 해보시는 것이 좋을것 같습니다.
그 기적이라는 것이 속임수일수도 있고 또 다른 초자연적인 존재의 활동일수도 있으니까요.
우리가 일상이라고 부르는 일들과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이 삶 자체가
하나님의 개입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일수 있기에 어떤 의미에선
기적과 기적 아닌것을 구별해내려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이 성숙할수록 특별한 사건 없이도 하나님을 알아가는데 지장이 없으니까요.
제가 잘 이해가 안되는 것은 흔히 얘기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나 속성을 생각할 때,
도대체 물을 포도주로 만든다거나 물 위를 걷는다거나
죽은 사람을 살려낸다거나 심지어는 죽음에서 부활하는 것이
하나님께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결국 복음서나 다른 성서의 기적(비일상적인 일)이
신화적 사건이든지 어떤 사건에 대한 또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결국 전통적인 하나님 개념을 변화시켜야 가능한것 아닌가요?
결국 초월적이고 전능한 신은 없는 것이죠.
(만약 그렇다면 이 세상과 나 자신은 참 어둡고 쓸쓸하고 가망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판넨베르크의 보편사 개념이나 기타 그의 신학은 제가 잘 모릅니다.
앞으로 관심을 갖고 공부해보겠습니다.
긴 댓글 감사드리고 늘 강건하시기를!
그래서 저는 성서의 사건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어떤 믿음을 갖느냐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기록된 계시를 신뢰하여 고고학자들이 무슨 말을 하든지 부활이 역사적 사건임을 믿어야 하는것 아닐까요?
신정통주의 계열의 신학자들이 이 부분을 염려하였다는 것을 압니다.
만약 고고학자나 과학자 등 권위있는 누군가에 의해 성서와 모순되는 견해가 제시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설혹 부활이나 기타 성서의 많은 사건들이 실제 사건이 아니더라도 기독교 신앙을 유지할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그런 부분에서 그들의 진정성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과학과 철학 그리고 자유주의 신학의 공격에서 너무 열심히(?) 기독교를 변호하다보니
어느새 기독교의 중대한 기반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들어 부활이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고 입증됐다고 치고,
또 그리스도인들도 그것을 다 인정한다고 했을 때,
그 때 우리가 복음에 대해서 불신자들에게 말하는것이 가능할까요?
그 부활을 아무리 잘 포장하고 또 부활이라는 신화에 대해서 깊은 의미를 전한다고 할지라도
본래 성서가 전하고자하는 것들을 전할수 없게 되지 않을까요?
부활이 신화적 사건(의미있는 허구)이라고 얘기하고
창조와 타락과 구속을 얘기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요.
제 생각엔 아마 제 정신상태나 지능(?)을 의심할것 같습니다.
끝으로 예수께서 기적을 행했기 때문에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요한복음을 보면 명백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적을 행할때마다 제자들은 예수를 믿었다고 했지만
결국 제자들은 십자가의 희생과 부활을 통해 진정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지요.
그래서 부활이 역사적 사건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부활의 역사성은 당시 제자들에게도 중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뭐하러 예수께서 그렇게 번거롭게 친히 찾아오셔서
같이 식사를 하시고 상처에 손을 넣게 하시는 등 부활을 증거하시려고 하셨을까요?
그 말씀을 보는 사람마다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 사건임을 강조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을까요?
역사적 사건으로서 예수의 탄생도 결국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증거하시기 위한 것이었음을 생각할 때,
예수의 생애 전체의 역사성은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그 구원 역사를 증거하는데 필연적인 것이 아닐까요?
이것은 구원론의 논리적 전제로서도 꼭 필요한 것이라고 봅니다.
전통적인 구원론의 논리상 예수의 탄생, 죽음과 그리고 부활 가운데 어느 한가지라도 허구라고 한다면
인간의 구원이 불가능하게 되니까요.
쓰다보니 주저리 주저리 얘기가 나오네요.
여기서 멈춰야 겠습니다.
댓글 감사드리고! 늘 평안하시길!
모두 아시는 것들이지만 한 번 써볼랍니다.
신학적인 차원을 떠나서 부활의 신앙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 사건도 마찬가지구요.
만약 십자가 사건이 사실이 아니었다거나 그냥 예수라는 한 사람의 치기어린 행동이었다거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부인하거나
어떤 신학자의 말대로 에세네파에서 예수를 교육시켜 일을 진행했다거나 하는 등등의 말들을
그리스도인이라면 강하게 부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인 사실이었느냐하는 물음에
다른 분들은 그것이 사실이었느냐 아니냐는
우리의 신앙과 별관계가 없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으로 느껴지는데
전 아직 어린아이 수준의 신앙이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신앙은 십자가 사건, 부활, 재림이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면 기반을 상실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겠느냐고 저에게 물으신다면
전 솔직히 확답을 하기 힘듭니다.
이것들이 사실이 아니라면 무엇을 누구를 어떤 것을 믿어야 하는지 알 수 없을 것 같고
결국 자칫하면 자신이 만든 그 무엇인가를,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믿는 식으로
흘러가버릴 수도 있다는 미련한 생각이 듭니다.
전 이 모든 일들을 사실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인간의 지식으로 증명할 수 없고 인간의 지식으로 생각할 때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인간의 수준으로 가두어 놓고 보기 때문이 아닌가 감히 생각하고
제 수준으로는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건 순전히 제 수준에서 판단한 것이므로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 가능하심을 믿습니다.
저는 이런 논쟁은 신앙의 진보를 위해서 꼭 까놓고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게 좋다고 다비아의 평화를 위해서 아예 말 자체를 꺼내지 않는 태도나, 또한 말을 꺼냈는데도 그냥 논점을 비켜가면서 계속 둘러대는 태도 모두 지양해야하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박쥐성향인지, 원글을 비롯하여 댓글 쓰신 분들의 진심이 다 읽힙니다... 제가 문자적으로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하고 물었던 것은 어쩌면 문제 제기를 한 번 해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실로 믿느냐 믿지 않느냐... 이게 참 뜨거운 감자일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사실로 믿지 않는다는 의미" 는 기독교의 신비가 그냥 교훈과 감동 수준으로 떨어져버리는 것을 의미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우리의 구원이 없어져버리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또한 "사실로 믿는다는 것" 은 위에 안희철 목사님께서 이야기하시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에서 너무나도 중요한 "신비의 일상성"을 질식시켜서, 하나님의 구원이 "실제성"을 잃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사실"이란 것은 참 편리하긴 한데, 굉장히 안이하게 만들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도 굳이 증명을 해낼려면, 요새 과학에 "처녀생식" 이라는 것이 있답니다... 수천만분의 일의 가능성인가 뭣인가 하던데, 정자의 개입 없이 난자가 어떤 강한 전기 충격이나 개입을 통해서 스스로 분열하면서 난자의 유전자 정보로만 하나의 독립적인 개체가 되는 현상이라고 하네요...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하는 말이라 브리즈 님께 쫑크 먹겠다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현대물리학이 고도로 발달한 어느 날... 증명해내지 못할 것도 없지 않을까 뚱딴지 같은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그 사실이 증명이 되었다고 한들, 이게 우리에게 무슨 의미일까 하는 생각이듭니다... 그냥 죽은 사실로만 끝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저는 그래서 성서의 기적... 아니 가장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뭔가 상대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절대적 사실, 궁극적 사실로 보고싶습니다...
잠시 있다가 또 쓸게요...
궤변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또 둘러대고 계시는구만 해도 할말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했다" 는 그 사실이 우리의 존재와 영과는 전혀 관계가 없이 동떨어져 있는 평면적인 사실이 아닌, 우리의 영과 존재를 변화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우리에게 똑같은 부활을 이루어주신다는 "실제적이고 원초적인 사실" 의 측면에서...
저는 부활이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기준으로서의 사실과 하나님 기준으로서의 사실은 비교하기 힘들만큼 다를 수도 있으니까요.
물론 같은 것도 있겠지요.
저는 첫 부활이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재림시에 부활할 것이라는 부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성경의 모든 것들을 증명할 수도 없고, 저는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않고 있지요.
성경 말씀에서 신비적인 것만을 강조하는 설교나 강의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제가 다비아를 만난 것도 저에게는 기적입니다.
성경의 어느 것 하나를 분리시켜서 그것만을 강조해서는 안되고
또한 그 어느것이라도 부인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저의 소견입니다.
첫날처럼님의
"사실로 믿지 않는다는 의미" 는 기독교의 신비가 그냥 교훈과 감동 수준으로 떨어져버리는 것을 의미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우리의 구원이 없어져버리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또한 "사실로 믿는다는 것" 은 위에 안희철 목사님께서 이야기하시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에서 너무나도 중요한 "신비의 일상성"을 질식시켜서, 하나님의 구원이 "실제성"을 잃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라는 말씀이 저의 마음에 다가오네요.
성서의 부활사건은 역사적 사건으로 믿으면서
그 이전의 생애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왜 신화적 사건으로 바라보는가.. 이시지요?
맞아요, 우리가 어떻게 같은 복음서의 서술들 중에서
취사선택하여 어떤 것은 역사적 실재사건이고,
어떤 것은 의미상의 진술이다라고 할 수 있을런지요.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의 최고봉'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제 개인적으로는 이보다 낮은 레벨(?)의
여러 사실들을 문자적으로도 믿습니다.
이는 예수의 신성의 기반들이 되는 사실들이며
그 사실들이 없이 부활이 있다는 것은
지나치게 뜬금이 없다는 겁니다.
잔칫집가는길님께 제가 제안하고픈 것은
예수생애의 부활을 포함한 모든 사건을
액면 그대로도 받아들일 수도 있는 넓이와
그 사건들을 '해석'이라는 작업으로
볼륨감을 줄 수 있는 깊이로도 들어갈 자세를
우리가 넉넉히 준비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령 부활이 액면 그대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할지라도 기독교 신앙은 파괴되지 않습니다." 라고 하셨는데요
왜 그런지를 좀 더 설명해주시겠어요?
"왜 그런지는 좀 더 깊은 공부와 묵상을 통해서 배워가시기 바랍니다" 라는 답변 말구요..
질문도, 대답도, 정리도...하나같이...
한번 꼭 오프에서 뵙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해집니다.
도대체 어떤 분들이기에!
약간 뜬금없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오래전부터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신비"라는 말을 종종 사용해 왔습니다.
이것이 때로 얼렁뚱땅 넘어간다는 의미로 들릴 수도 있겠으나
제게는 인간이 신에게 말할 수 있는 최고의 영적 신앙고백이라고 받아들입니다.
신앙인이라면 바로 이러한 신비들에 복종하고 낮아지는 자세를 잊어서는 안 될 겁니다.
저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신비라는 것을 마치
숨겨져 있는, 그러나 영원히 공개될 수 없는 보화처럼 여긴다면
이 또한 신이 인간에게 허락한 것들(이성을 포함하여)에 대한 직무유기가 될 것입니다.
저는 제 인생을 바로 이 부분에 헌신하기로 하였습니다.
그것의 다른 이름은 신학이 될 수도 있겠지요.
혹은 우리가 말씀을 듣고 읽고 해석하는 모든 것들,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하고 파악하는 일들 모두가
이러한 우리의 의무 가운데 하나가 될 것입니다.
모든 분들이 그러하시겠지만
저 또한 신비라는 측면에 대해 늘 잊지 않고 그것에 대해 존엄하게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어려운 작업인 듯 보이지만
저는 주님이 우리 인간에게,
특히 21세기 멀티형 인간에게 주신 역설의 은총이라고 나름 생각합니다^^.
뭐, 제 신앙고백처럼 되버렸는데...
사실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것을 신비로 받아들이는 믿음,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신비에 대해 세대와 세계가 던지는 질문을 외면하지 않고
끝없이 탐구하고 연구하는 지성,
전, 그 두가지가 제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양대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쓸데없는 이야기에 죄송...하지만 모든 분들 참 멋져요. 그 말 하려구요...
저의 짧은 생각은 부활의 신비라는 것도, 부활의 실재성을 담보하지 않으면 더이상 신비로서 발전이 되기 어려울것 같은데 어떤가요? 특히 부활에서 '몸의 부활'을 거부하는 이단들과의 논쟁들 속에서 기독교를 변증하면서 '몸의 부활'을 지키고, 특히 예수의 몸의 부활은 그 시대에는 특별히 생명과 같이 지켰던 교리인것으로 추측되어지는데요.
'사실여부를 떠나서 신비로 받아들여지는 믿음...' 이 말은 솔직히 그리 와닿지 않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면 그 부활의 신비는 전혀 알수 없는 어떤 화석화된 교리로 전락하고 마는 것일까요? 아니면 오히려 부활의 신비로 더욱 영성을 발전시켜주는 시발점과 매개체가 되지는 않을지 조심스레 의문을 품습니다. 저도 보편사개념에 대해서 공부를 좀 해봐야겠네요. 늦은밤 편히쉬시길....
역사적 사건이라면 그 외의 예수 기적의 성서 표현은
왜 신화적으로 해석하는가에 대한 부 질문에 대한 ,
그동안 다비아글을 통해 배운 저의 생각은...
기독교는 예수 부활의 역사적 사실성에 신앙을 담보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부활과 그것의 증인된 사도들과 그 부활체험을 근거로한
신앙 공동체들의 신앙고백에 기독교의 뿌리가 있습니다
일견 작고 불안하며 확증적이지 않아보이지만
그것이 기독교의 출발이라 생각합니다
예수 부활이 추상적 종교성으로만 치부되거나
예수없는 우주론적 창조주만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기독교라 칭하기 모호하지 않을까요 사실, 창조주를 표현하는 종교는
기독교 만이 아니니까요. 예수와 예수부활의 창으로 하나님과 생명과 구원을
해석해 나가는 것이,범신론이 아닌 종교 다원주의가 아닌
기독교만의 진리의 길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성서의 예수 기적의 많은 부분은 사도들의
신앙고백적 신화적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은,기적이 사실일 경우 기독교적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예수의 인간적 실체,그리고 신적 실체의 구분됨에서 그러합니다
하나님과 동격인 그의 독생자가 이 땅에 성육신 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이시지만 이 땅에서는 철저히 한 인간으로 사셨습니다
참된 하나님(vere Deus)이 참된 인간(vere homo)으로 태어나 모든 인간의 부족함을
살아내시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다가 죽임을 당하셨읍니다
그 사실이 우리에게 구원의 문이 됩니다
정목사님의 표현대로 참된 하나님과 참된 인간이라는, 우리에겐 이해할 수 없는 간극이
기독교 신앙의 신비이고 '은총'입니다
참된 인간으로서의 예수는 기적으로 우리를 구원치 않으셨읍니다
하나님께 집중한 증거된 '십자가'로 구원하셨읍니다
거의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그런 글들..
시와 그림님의 말씀에 편승해도 될런지요.
저의 마음을 너무 잘 표현해주신 것 같아서.^^
예수라는 한 인간이 하나님나라를 천명하며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은 구원이 되지못합니다.
그의 참됨의 증거도 없으며
십자가는 인생의 종지부의 장소일 뿐이지요.
그의 참된 신성의 강력한 증거인 '부활'이 있는 다음에야
그의 과거의 '참된 인간'도 증명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상의 죽음은 자칭 '인간의 대표속죄자' 주장이며,
그 후의 '부활'이 그것이 단지 주장이 아닌 사실임과
나아가 '구원자'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예수 그 분의 상황이고,
확장해서 우리 인간이
'십자가'만 바라보는 것으로 끝난다면
역시 죽음으로 끝이 나는 거지요.
그리고, 공생애기간의 여러 사건들은
하나님나라의 끝자락이 이 땅에 스치고
지나간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회복, 죄사함, 풍성, 생명, 기쁨, 평등, 나눔, 소망, 사랑..
하나님나라의 끝자락이 스치는 곳에
어떠한 현상적인 일도 있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제 생각입니다.
어제는 바빴는데
아.....오늘 환자들이 없네요..
인터넷에서 아마 다비아 밖에 없을 것 같아요.
푸짐한 밥상을 앞에 두고 있는 것 같이 흐믓합니다.
이제 숟갈을 듭니다. ㅎㅎ
복음서에서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이 직접 음식을 같이 먹으면서, 또한 도마에게 창 자국에 손을 집어 넣어보라고 하는 면에서는 부활이 이 지상의 육체와 같은 것처럼 느껴지게 하다가도, 엠마오 도상에서처럼 또한 모인 장소에 홀연히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점이라든가, 또한 사두개인들과의 부활 논쟁의 이야기에서는 이 지상의 육체성과는 다른 부활체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구요...
고린도전서 15장 같은 경우에도 바울이 말하는 "몸의 부활" 은 이 땅의 육체성을 물려받는 거랑은 전혀 다른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땅의 사람, 하늘의 사람의 대비에서도 보이고,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물려받지 못한다고 단호하게 이야기 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지상의 상대적인 것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문제의 것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다시금 사족처럼 달아봅니다...
예수님이 인성과 신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고백한다면, 또 그분이 선포한 복음의 속성과 신비에 대해서 생각해본다면, 기적의 실제에 대해서도 신앙고백적인 일부의 과장과 축소는 이해하더라도 기적자체는 문제될것이 없지 않냐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안잡아봤으면 말을 하지 마세요.
전 잡아봤는데 엄청 빨라요.
10분동안 따라다녔는데 이것이 지치지도 않은지 앉지도 않아요.
결국 허공을 가르는 재빠른 동작으로 잡긴 잡았는데
진이 다 빠져서 한참을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작년만해도 몸이 이 정도는 아니었는디.
물론, 이러한 그룹들의 신학이나 신앙이 보수적인 신앙생활을 영위해왔던 분들 - 이른바 복음주의적 혹은 근본주의적 그룹들 - 이 보기에는 매우 탐탁치 않게 보일 수도 있으나 기독교 교리와 성경의 메세지에 대한 관점을 조금 바꾸어서 생각해본다면 그들을 배척해야만 할 이유는 없는 것이거든요. 그들은 이미 복음서의 예수 부활의 전승이나 그외의 이적설화에 대한 역사성은 배제한지 오래입니다. 그렇지만 그분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 기독교가 아니라거나 변질된 복음이라고 폄하할 수는 없어요. 이게 왜 그러냐를 이야기하려면 배경설명이 너무 길고 방대해서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군요... 죄송하지만 이 방면으로 개인적인 연구를 조금 더 해보시면 좋겠습니다.
그 경험을 예수의 입장에서 복음서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와
그리고 복음서에 나타난 기독교공동체에서 두 가지 각각 경험한
것이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에 대한 것을 보았는데, 이해와 긍정과
신뢰가 갔습니다. 문자적, 역사적, 신화적인 것을 모두 수용하면서
모두 하나님의 현현과 현존을 드러냅니다. 설명하기가 좀 그래서
몇자 옮겨 봅니다. 샬롬!
"학문의 역사를 보면, 부활경험 이전의 예수와 경전적인 예수 사이의 차이에 대한
신학적인 반성은 때로 불필요한 이중택일로 몰고가는 경우가 있다.
즉 그리스도인의 삶에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역사적 예수이거나 아니면 경전적인 예수,
둘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불필요한 선택이다. 두 가지가 모두 중요하다.
부활경험 이전의 예수를 살펴 본 결과, 이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든지,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삶 속에서 구체화 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밝혀 주었다.
그리고 경전적인 예수는 예수가 초기 기독교 공동체들의 경험과 삶 속에서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밝혀주고 있다.
우리는 이들 사이에서 하나만을 선택할 필요는 없다.
예수의 의미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우리가 역사적인 예수와
경전적인 예수를 동시에 보고 동시에 긍정하게 될 때, 더욱 풍부한 것이 된다.
부활경험 이전의 예수와 부활이후의 예수는 둘 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이미지이다.
둘 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드러낸다."(새로 만난 하나님, 마커스 보그, 제4장,169쪽 일부 옮김)
워낙에 한국 교회는 마술적 능력에 기초한 "기적" 에 목을 매어 왔기 때문에, "기적" 이란 것이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틀림 없습니다... 시와 그림 님의 말씀은 그런 맥락에서 공감이 되구요...
또 한 편으로는 예수의 기적은, 특히나 치유의 기적은 엘리야의 희생 제물 위에 내리는 하나님의 불처럼, 예수가 강한 마술적 능력으로 일으킨 기적이 아닌,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자신 스스로를 완전히 비운 상태에서 일어난 하나님 자신의 사랑의 역사였다는 "본질"에서 본다고 하면, 이 "기적"은 엄청난 중대성을 가진다는 생각이 듭니다...(예수는 항상 자신이 치유의 기적을 행하면서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고, 항상 그 이 후에는 자신을 숨겨버렸으며, 또한 나은 자에게 내가 너를 낫게 했다고 한 것이 아니라 너의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고 합니다.)
문선명이나 정명석이는 택도 아닌 것들이 스스로를 하나님이라고 잘만 이야기 하는데, 참 인간이 되신 하나님 예수는 자신에게 신적 자각 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참 하나님 참 인간 예수의 신비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한 "절대의 빔(空)" 속에서 아버지의 사랑의 능력이 강하게 나타나는 그 표현 방식... 그 것이 "기적" 이라고 생각합니다...
"초보적 신앙 단계"라느니
공부해서 배워가라는 식의 표현다는 훨씬 보기가 좋네요..
앞으로도 부탁드립니다..
사실 그런 표현때문에 질문을 드린거랍니다..
잠시 쉬어가는 페이지.
파리라고 우습게 보지 마세요. 파리는 초당 200회, 모기는 초당 500~600회 날개 짓을 합니다. 음속이 대략 340m/s이므로 모기의 앵~하는 소리는 바로 음속을 돌파할때 나는 파열음입니다.
파리. 대단하지요. 그런 파리를 10분 동안이나 따라다니셔서 잡으신 눈사람님도 더욱 대단하십니다. 그런 파리와 눈사람님을 모두 창조하신 하나님은 더욱 놀랍습니다.
님께서 바울의 글을 인용 하시면서 .. 부활의 역사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젖이나 먹고 딱딱한 것을 먹지 못하는"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라고 결론 지으셨는데.
저 사견으로는 바울의 모든 글을 통하여 조명해본 부활에 대한 바울의 시각은 "역사성"을
강력히 지지하는 분으로 생각됩니다. 그럼 바울 자신이 ^^ 자기자신을 향하여 "초보적 단계"의
신앙인이라 서술했다는 주장을 하시는 것인가요? 아니면 바울 나아가 신약의 저자들(저는 적어도 그들이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인이라 생각지 않습니다)의 글들중 바울을 포함한 그들이 부활의 실존적 역사성에 대해 애매한 입장을 취하였다거나 닥터게이님 과같이 성숙한 신앙인들과 동일한 부활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근거를 아주 조금이라도 유추해 볼 수 있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근거가 있으신지요.
저는 "부활의 역사성과 실체성"은 기독교 신앙의 존립근거요 신앙의 뿌리가 된다 봅니다.
부활의 역사성이 부정되면.. 초기 기독교의 사도들은 다 ^^ 상당히 어리숙한 협잡꾼들이 될 뿐입니다.
그들로 인하여, 그들이 증거하였던 부활을 믿고 따르는 수많은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들이 꾸며낸 "죽은자의 부활"을 근거로 로마의 압제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로 부터 노인에 이르기 까지 모두 사자밥이되고 화형에 이르게한 사악한 종교지도자들 일뿐만아니라, 꾸며낸 부활 이야기를 근거로 자신들도 로마의 사형장에서 가버치 없는 죽음을 당하여야만 하였던 아주 멍청한 사기꾼들이 되는 것이라 봅니다.
사도 바울이 배설물처럼 여기었던 세상 학문에 대해 높은 경지에 이르신 신학자 분들의 다소 이해하기 어렵고 고고한 언어들로 쓰여진 글들을 읽으며 , 비록 사도들과 초기기독교 집단의 가르침이 아무리 고고하다 할찌라도 꾸며낸 부활이야 기로 많은 죄없는 생명을 았아가는 원인을 제공한 사도들과 바울같은 대단히 어리석은 인물의 글들을 연구하여 밥벌이 하는 신학자분들 참으로 애처롭게 느껴집니다.
"부활의 역사적 실제성"을 자신있게 이성적으로 인정할 수 없고 믿어지지 않는 다면. 일찌감치 기독교 신학 접으시고 부할없는 다른 인본주의 철학사상 연구하시는게 바람직하지 않나 생각 합니다.
^^
제가 말한 내용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들로 제 주장을 곡해시키고는 멋대로 빈정거리는 말투로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제가 언제 "부활의 역사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신앙의 초보" 라고 주장했습니까? 제가 언제 "부활의 역사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젖이나 먹고 딱딱한 것을 먹지 못한다" 고 말했습니까? 제가 언제 "부활 이야기는 꾸며낸 이야기다" 라고 말했습니까? 없는 말 지어내지 마시고 원글을 똑바로 읽고 제대로 내용을 파악하시기 바랍니다. 뒤늦게 이런 무례한 댓글을 접하니 아주 기분이 나쁘군요.
(ps) 코람데오님의 댓글을 읽고 감정이 격하여 위의 댓글로 끝내려다가 마음을 추스리면서 부연설명을 달아놓습니다. 일단 제 개인적인 신앙은 부활사건을 역사속에서 벌어진 실제적 사건이었다고 믿습니다. 이 점을 코람데오님께서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신것 같아 분명하게 적어둡니다. 그렇지만 제 입장은 부활의 역사성에 대해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들의 의견도 폭넓게 들어볼 필요는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초보적 신앙이라고 비난한 것은 자신의 해석과 조금만 다르면 배척하고 탄압하는 독선적 근본주의 성향을 보이는 교회들을 향해서입니다. 저는 분명히 "부활이 문자 그대로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면 기독교 신앙을 가질 필요가 없다" 는 견해를 비판하였지, "부활의 역사성을 주장하면 초보신앙" 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이 두 문장의 차이는 엄청나게 큽니다. 전자는 근본주의 내지는 문자주의적 신앙을 비판하는 것이고, 후자는 기독교 신앙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근본은 부활신앙에서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활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것은 기독교 자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성" 이라는 말을 해석하는데에 있어서는 문자에 얿매이지 않는 좀 더 다양한 견해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그 다양함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분들이 잘 설명해주셨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설명드려도 그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코람데오님의 신학적 소양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시고 남의 의견을 멋대로 곡해하고 빈정대기 전에 스스로의 부족함부터 먼저 반성하시기 바랍니다. 코람데오님의 윗글은 정말 무례한 글로써 내용의 진정성을 떠나 빈정거리는 말투가 몹시 기분나쁩니다.
닥터 케이님 글 잘 읽었습니다. 제글이 매우 무례하게 느껴지셨나 보군요?
두번째 님의 글을 통하여 님의 부활의 역사성에 관한 시각에 대해 좀더 잘 이해하게되었습니다.
님의 주장에 관한 저의 이해는
"부활의 역사성을 단순히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신앙의 초보"라는 명재로 요약이 되고
님이글을 다시 읽고 좀더 깊이 있게 이 부분의 글을 요약해보니
"부활이 역사적으로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면 믿을 가치가 없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은 신앙의
초보 단계에 있다" 라는게 님의 주장이시군요.
저도 님의 입장처럼 소위 말하는 문자주의적 근본적인 신앙의 잘못된 점을 잘 알고 있으며
소위말하는 문자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성경해석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역사성"은 그런 근본주의 문자주의와는 맥락이 크게 다른 사안임을 님꺼서
간과하고 계신다 생각합니다. 님께서는 두번째 글에서 "부활의 역사성"을 진리의 영역에 두고 그렇지
않은 주장에 대해서 들어볼 가치가 있다고 주장 하였다 하셨는데 님은 앞선 글에서 "부활이 액면
그대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할지라도 기독교 신앙은 파괴되지 않습니다"라고 말씀 하심으로서
부활의 역사성을 부인하고도 기독교 신앙이 존립하는데 문제가 없음을 본의이든, 본의가 아니든
주장하고 있는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고 봅니다.
추신으로 언급한 문제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님께서는
"부활이 문자 그대로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면 기독교 신앙을 가질 필요가 없다"
는 식의 주장을 비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식의 사고를 "근본주의적, 문자주의적인 신앙"
의 한 형태로 언급 하셨습니다.
여기서 님과 저의 시각차가 갈라 지는군요...
저나 님이나 근본주의적이고 문자주의적인 신앙을 경계하고 비판한다는 점에서는 ^^
동일합니다. 그러나 저는 님께서 주장하시는 바
"부활이 문자 그대로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면 기독교 신앙을 가질 필요가 없다"
는 주장을 부정적 의미의 "근본주의" 그리고 "문자주의"에 기인한 신앙과 동일시 하시는
논리의 확장은 정당하지 않다고 봅니다.
고린도 전서 15장의 바울의 주장을 보십시요^^ 바울의 15장 14절의 주장은 님이 근본주의요
문자주의로 몰아붙인 부활의 역사성이 없으면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것입니다.
혹시 제 글이 마음을 상하게 하였다면 죄송 합니다.
님께서는 님의 글이 조롱당하는데 분노를 느낄지 모르겠으나 저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피로 기록한
글들이 신학,철학,인문학의 이름으로 판단되고 왜곡되어지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하는 노력조차
근본주의니 문자주의로 몰아가는 세대에 안타까움을 느낌니다.
닥터 케이님 "주님을 자신의 목숨처럼 사랑하십니까?" 그러면 저의 철없는 분노가 조금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되어지리라 생각되며.. 제 마음이 조금 이해되시면 초림때 종교지도자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이라는 말과 더불어 여러가지 언어들로 그들을 비꼬았던 주님의 마음이 조금더 이해되시리라 봅니다.
..
간단하게... 앞에 이 이야기가 나온 것인지 분명치 않으나. 일단...
신화성=비역사성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신화적이라는 것이 역사적 사실로써의 사건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화라는 것은 사건을 바라보는 세계관이며 표현 양식입니다.
만약에 예수가 물위를 걸었다.라는 것은 신화적 표현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신화적 세계관을 가진 관찰자에 의해서 신화적 언어들을 통해 표현된 것이라는 말일 뿐입니다.
그것이 실제 어떤 형태로 이루어진 사건인지 알지 못합니다.
이것은 곧 '예수가 물위를 걸었다는 것은 뻥이다.'라는 말도 아니고 '예수가 물위를 걸었다는 것은 사실이다.'라는 말도 아닙니다.
다만 그 당시 사람들이 믿었던 '물위를 걷는 인간'이라는 이미지가 현대라는 세계 안에서 일반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비역사성에 무게를 두는 것일 뿐입니다
신화성이란 하나의 관점입니다.
신화적 본문을 문자 그대로 믿는 것도 문제이나 신화적 본문이라 하여 역사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도 문제라 하겠습니다.
신화성의 상대어는 역사성이 아니라 합리성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떤 이는 역사를 신화적 세계관으로 관찰하고 어떤 이는 합리적 세계관으로 관찰하는 것입니다.
실제 역사는 어떤지 모릅니다. 다만 관찰자에 의해서 고백된 것만을 알 수 있을 따름이지요.
흔히들 신화성이란 비역사성이라고 받아들이시는 것 같아서 개념 정리 차원에서 적어보았습니다.
물론 제글이 님의 기분을 상하게 한것에 대해 저 또한 즐거운 마음은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님의 상한 마음을 위로하기위해 제글에 대해서 깊은 사과의 말씀을 님에게
"머리숙여 사과한다느니"하는 류의 글은 올리고 싶진 않군요. 답변 감사드립니다..
매우 좋은 적절한 지적이라 생각 합니다.
그러나 님의 지적에는 적잖은 오해의 소지와 "어쩌면" 약간의 문제성이 있다고 생각 합니다.
님께서는 신화성과 비역사성을 달리보는 시각의 예로 예수가 물위로 걸어간 사건을 드셨습니다.
저또한 예수께서 물위를 걸으신 사건에 대한 신화성과 역사성에 관한 님의 의견에 상당부분
동의할 마음가짐이 되어 있습니다. 왜냐면..
예수꼐서 물위를 걸으셨던 사건은 그것이 역사성을 가지고 있던 그렇지 않던간에 기독교신앙의
본질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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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물위를 걸으신 사건"과 "예수의 부활"사건을 동일한 관점으로 적용 할수
있는 동일한 성질의 것이라 생각한다면 너무나 단순한 논리의 전개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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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님이 사용하시는 "신화적"이라는 언어또한 엄밀이 말하면 성경의 기록한 성경저자의
시각을 표현하기에는 매우 부적절한 언어라 생각 합니다.
베땅이님.. 제 짧은 경험 상으로 성경을 깊이 알면 알수록 성경저자들이 성경을 함부로 대충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간혹 다비아의 글들을 보면 신약성경을 전설의
고향 내용 기록한 정도로 기록한 것 처럼 간주한 신학자들이 철없이 사용하는 용어라 생각
합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신약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을 뭐 요즘 유명한 신학자들 이나 유명한 스님들
보다 엄청 사고의 퀄리티가 얕은 사람들 정도 생각하기도 하던데 .. 과연 그럴까요?
만약 대문호 톨스토이나 . 바르트가 예수의 제자가 되어 성경을 기록 하였다. 가정해 봅시다..
과연 그 글들의 토시하나 배열하나 교묘히 정성을 기울이지 않았을까요?
성경은 (신앙을 배재하고 라도) 인류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스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나사렛 예수"로 부터 3년이상 숙식하며 그 사상과 철학을 배운 직계 제자들이 기록한
글 입니다. 그들이 자신의 스승의 삶을 기록하기에 자기 맘대로 했을 거라 판단한다면
큰 오산일 겁니다.
이런분들은 사도들의 삶과 사상과 철학의 깊이가 위대한 신학자나 철학자들보다 한참
수준이 낮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글을 대하기에 "신화성"같은 성경저자들을 평가절하
하는 감각을 가진 언어들을 차용 하는것 아닐까요?
우선 학문적 용어로 '신화적, 신화성'이라는 것은 무엇을 무시하는 어감이 절대 아닙니다.
앞에서 제가 신화성이 비역사성이 아니다라고 말씀 드린 것도 "신화는 곧 뻥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적당치 않음을 말함을 통해서 신화성 자체가 가진 가치를 이야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신화는 못배운 무식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요소가 아닌 당시의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던 공통의 분모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현대의 사고로 볼 때 '신화적'인 것이지 당대의 사고로 본다면 '신화적'이기 보다는 '일반적'인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 반대도 또한 주의해야 할 부분입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 제자의 글을 무척이나 뛰어난 글인 것처럼 여겨 세밀한 것 하나하나에 의미를 담으려는 노력 같은 것 말입니다.
그 안에 담긴 진리의 내용들은 깊음이 있겠으나 그들의 학적 능력은 당시의 시대를 살아가는 일반인 이상이었다고 보기 힘들 것 같습니다.
즉, 오류도 있고 실수도 있으며 그냥 의미없이 배열한 것들과 습관적으로 쓰고 있는 것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자기 스승의 대한 글을 쓰면서 대충 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최선을 다했겠지요. 많은 자료들도 참고하면서 이야기도 많이 듣고 구전들도 많이 수집하고...
하지만 그것이 그 시대가 가진 신화성을 보충하거나 저자의 인간적 한계를 초월시켜주지는 않습니다.
소크라테스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들이 추앙받는 이유는 그들이 현대의 철학자들보다 더 학적으로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들도 신화적인 세계관 안에 살았고 세상이 몇개의 요소로 구성되었다든지 하는 말도 했습니다.
피타고라스같은 경우는 밀교의 교주였다는 이야기도 어떤 교수님께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 시대안에서 그들이 뛰어난 자들이었던 것과 그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 아래서 최선을 다해서 예수에 대해서 기록한 것은 코람데오님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이 살던 시대가 가진 신화성이라는 세계관을 현대적인 것으로 만들어주지는 않습니다.^^
이와 같은 논리로 예수의 부활 문제를 본다면 '실제 역사가 어땠는지는 모르겠다'가 가장 최선의 대답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관찰하고 경험한 당시의 사람의 세계관적 언어로 된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우리의 신앙의 기초가 되었고 그것은 여전히 오늘 우리에게도 다른 형태일지라도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는 정도...
덧 붙이자면 비신화화해서 실존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정도...(불트만을 좋아해서...^^)
참고로 저는 부활의 역사성은 인정하지만 제 믿음이 부활의 '역사성' 위에 서 있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그게 역사적으로 거짓말이어도 관계없다 뭐 그런 식이 되겠네요.^^
마지막으로 저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톨스토이나 칼바르트 같은 사람들이 제발 아니었길 바랍니다.
그런 이들이 쓰는 밭에 묻혀있는 하나님의 나라라던가 하나님 나라가 너희안에 있다는 말은 매력이 없거든요.
저처럼 잘 모르고 복잡한 거 싫어하고 가난한자 못배운자도 알아들을 수 있는 그들과 비슷한 사람이 써준 이야기이길 바랍니다.
제가 알고 있는 예수의 메시지는 그런 부족한 자들을 통해 전해졌을 때 진정 힘이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널리 알려진 호교론자인 윌리엄 크레이그 교수와 [성서 왜곡의 역사 (Misquoting Jesus)]의 저자로 우리나라에도 알려진 바트 어만 교수가 "예수의 부활에 대한 역사적 증거가 있는가(Is There Historical Evidence for the Resurrection of Jesus)?"라는 주제로 2006년에 벌인 공개 논쟁인데요, 관심있어 하실 분들도 계실 것 같아서 링크를 퍼왔습니다.
전문은 여기 (pdf, 영문입니다)에 있구요 youtube 에 비디오도 올라와 있습니다.
여러 기적에 대하여 저는 사실여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에 종속적인 기독교 교리인
죄사함, 거듭남, 영생의 부활 등은 존재기반을 상실해버리게 됩니다.
병고침, 오병이어의 기적, 물위를 걸으심, 죽은자를 살리심
등등의 기적도 사실로 믿습니다.
기적은 예수님께서 안믿는 자들에 대하여
천국의 모형을 이세상에서 보여주는 표시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무조건적으로 성서축자영감설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성서기자들 모두가 전승이나 신화를 이용하여
숨겨진 뜻을 성서에 기록했다고 보기는 무리가 많은것 같습니다.
성서내용을 보아도 그렇고(비록 헬라어, 히브리 원어성경을
읽을 능력은 안되지만) 일부 성서기자들은 그만한 학식이 못되어 보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고수들은 바둑을 둘때
두세가지 수단을 동시에 보고 착점하듯이
성령님께서도 성서기자들의 감동을 통해
역사적인 사실을 드러내고 또한 그 속에 숨은
하나님 나라의 계시도 함께 하시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약함을 통해 강하게 하시는 역사가
성서의 불완전함을 통하여 오히려 온전케 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말이지요.
만일 신약성서시대 기록방식들이
고대인들의 신화화된 사고로 인하여
그 사실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면
그 당시나 그 이전 전세계의 다른 기록들도
모두 마찬가지 라고 보아야 할것입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한 것이 사실인지,
소크라테스가 감옥에서 탈옥하지 않고
사형당한 것이 사실인지, 이런 오늘날 일반적으로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믿는 모든 사건들이 부정될수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성서에 기록된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행한 기적을 믿는 것이 비이성적이라는 태도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명제가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이 되는군요.
신화라는 것은 본문에 없는(혹은 찾기 힘든) 숨은 뜻을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의미를 감추는 것은 신화가 아닌 시간의 간격이지요. 2000년의 시간의 간격을 넘어 그 텍스트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언젠가부터 잘못되었다는 이해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번역의 문제와 본문비평의 문제를 제외하더라도 기록자의 삶의자리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철거민의 아픔을 겪어보지 않은 조중동과 용산구청장이 용사철거민을 전문 데모꾼이라고 몰아가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 사건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철거민의 삶의 자리에 대한 분석과 용산구청장이 가진 가치와 세계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처럼 신화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이유는 그 당시의 세계관을 명확히 밝힘을 통해서 그 시간의 간격을 좁혀보려는 시도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는 것은 신화라는 것은 역사성을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줄 아는 용기를 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것을 연구할 때 카이사르에 관한 기록이 모두 역사 그대로 기록되었다고 판단한 후 연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카이사르를 찬양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혹은 깍아내리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저자가 로마인인지 기득권층에 있는 사람인지등... 저자의 세계관을 파악한 후에 그것을 감안하고 봤을 때 역사성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저자가 황제의 혜택을 입고 있는 기득권층이라면 황제를 찬양하려는 의도들이 많기 때문에 큰 사건을 제외하고 세밀한 사건들에서 카이사르가 긍정적으로 묘사되는 것들은 역사성을 의심하는 것과 같은 방식입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한 것이 사실이듯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그 사건이 역사적 진실인 것과 그 기록의 역사적 신뢰성은 대등관계를 갖지는 않습니다. 하나가 사실이어도 다른 것은 관점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부활도 사실이라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저의 믿음이지 '역사적 사실로 증명할 수 있는가?'에 대한 얘기는 다릅니다. 그리고 그것이 '복음서의 기록 그대로'의 사실이 아니라 할지라도 신앙의 존재기반은 크게 흔들리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저의 신앙적 견해는 그렇습니다. 역사적 사실 관계가 중요하신 분들은 다를 수 있겠죠.^^
당장 말씀하신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만 해도 소크라테스의 직접 기록이 없이 그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록에 의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역사성을 그대로 인정하지는 않고 있는 상황으로 알고 있습니다. '악법도 법이다'같은 말들도 소크라테스에게 귀속될 수 있는 말인지 연구중인 것으로 알고 있고 많은 부분 부정적 견해가 나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사실 여부 확인은 못했습니다. 들은 풍월)
기적을 믿는 것은 비이성적이지 않습니다. 다만 그 역사성을 파악하는데는 많은 근거들과 방법들이 따릅니다. 믿는 것과 증명하는 것은 이야기가 다르겠지요. 그리고 또한 제자들이 믿었던 것과 그것이 그들이 보고 이야기한 그대로의 진실인지를 파악하는 문제도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는 그 증인들을 신뢰합니다. 하지만 내가 신뢰하는 것과 학문적 연구로써 사실을 밝혀내는 작업은 얘기가 틀립니다. 그리고 그들의 증언이 혹 착각 혹은 거짓이었다 해도 전 여전히 그 증인들의 고백을 신뢰할 것입니다. 철거민의 아픔을 알고 그들이 정작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한다면 경찰의 살인적 진압상황이라는 것이 혹 거짓이나 착각이었다고 밝혀진다해도 그들을 거짓말장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여전히 그들 옆에서 함께 아파할 것입니다. 그게 신뢰 혹은 믿음이 아닐까요?
베땅이님.
발음이 재미있어요. 무슨뜻인지요?
베짱이로 처음에는 잘못읽었었는데..ㅎㅎ
님의 사이트에도 들어가보았습니다.
젊은 교역자이신가보군요.
열린마음, 순수한 신앙, 학문적 소양, 열정, 두루두루 앞날이 많이 기대됩니다.
개신교의 미래가 베땅이님같은 분들로 밝아보입니다.
여러가지면으로보아 지식이 깊으시므로
님의 의견을 알고 싶어 두가지 질문만 하고 싶군요.
첫번째, 님께서는 성서에 예수님 가르침의 기록도
성서기자의 신화적인 사상에 입각해 씌여진 것으로 믿으시는지,
두번째, 그렇다면 신약성경 중에 어떤 예수님의 말씀을
기독교 신앙의 기초로 믿을수 있는지.
본것에 대한 기억이 들은것에대한 기억보다 훨씬 정확한것이 일반적입니다.
본것에 대한 진술이 신화적인 것이라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기록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고 생각이 되는군요.
베땅이님(을 포함한 대부분의 성서신학자들)이 사용하는 "신화적" 이라는 말은 허구적이라는 뜻 혹은 지어낸 이야기라는 그런 부정적인 뜻이 아니라는 점을 먼저 확실하게 이해하셔야 두분간의 대화가 진전이 있을듯 합니다. "신화적" 이라는 것은 그 시대의 보편적인 사고방식이 그랬다는 것이고 눈앞에 벌어진 사실들을 그러한 세계관으로 해석했다는 그런 뜻입니다.
"본것에 대한 진술이 신화적인 것이라면.." 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맞습니다. 그 시대 그들이 본 사실들을 글로써 적을때 그들의 신화적 세계관으로 재해석하고 그러한 용어를 사용하여 기록하였다고 보는 입장이 타당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오늘날에도 일어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여 도저히 해결되지 않을듯한 난감한 입장에 처했을때 절실히 기도하니 놀랍게도 그 일이 쉽게 해결되는 일을 체험했을때 우리는 어떻게 말합니까? "나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셔서 놀라운 능력으로 해결해주셨다" 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만약 이러한 일을 자서전으로 간결하게 적는다면 "내가 이러저러한 어려운 일로 마음이 괴로와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친히 그 일을 해결해주셨다" 라고 적을것입니다.
이 서술은 객관적인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으로서, 글쓴이의 주관적 신앙이 깊이 개입된 것입니다. 즉, 어떤일이 해결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때문이라는 주관적 해석이 개입되어 있는 서술이지요. 이것을 굳이 특정 용어로 규정짓자면 "신앙적 세계관" 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자신의 신앙적 세계관으로 해석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오늘날에도 일어나는 일들이지요. 베땅이님이나 다른 분들이 말씀하시는 2000년전의 신화적 세계관이라는 말도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생각해보시면 어느정도 이해하실 수 있을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성서의 저자들이나 헬라의 철학자들이나 같은 차원의 신화적 세계관을 가졌던 것일까요? 거기에 대해서는 성서의 저자들의 신화적 세계관에는 하나님의 영감이 함께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기술들이 비록 신화적 용어로 채색되어 있지만 그것이 허무한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진 영적인 선포가 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기록 역시 신화적 세계관 위에서 쓰여진 것일 것입니다.
하지만 밑에 닥터케이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이것은 하나의 관점일 뿐 그것이 거짓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두번째 질문에는 각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뭔가 하나로 묶어서 교리 비슷하게 만드는걸 별로 안좋아해서요...^^;;
하지만 예수님의 인생을 관통하여 흐르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또한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 역시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큰 중요성을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추가로 덧달자면 본것에 대한 기록이라고 말할만한 성서의 기록은 그렇게 많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복음서라는 것이 누군가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그때그때 적어넣은 속기록이라기보다는
나름의 기획과 토대위에서 제작된 하나의 작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건의 배열이라던가 복음서간의 서로 다른 사건기록등은 그 기록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임을 알게 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신화적인 것이야! 혹은 이것은 신화야!! 가 아니라 이것들은 신화적인 세계관 위에서 쓰여진 사건 기록이야!가 그나마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