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폰 라트의 구약성서신학1권이라는 책을 샀습니다.
한자가 이렇게 많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토도 안달려 있고 해서...
서문 읽는데만도 한시간이 넘게 걸렸네요..
한자 세대가 아니라 한자를 잘 몰라서 한글자 한글자 찾으려니 시간이 장난아니네요..
괜히 샀나 싶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ㅎㅎㅎ

1. 여기에 六經(Hexateuch)이라는 말이 몇번 나오는데요. 6경이라는게 무엇을 뜻하는건가요? 모세오경과는 다른 것인가요?

2. 이미지 첨부했는데요. 10번째 줄 쯤에 있는 한자가 뭔지를 아무리 찾아봐도 모르겠네요
문○비평학적으로 라고 나오는데요.....문 다음에 저 글짜 아시는 분 있으시면 답 좀 부탁드립니다.



 

第 1版 序文

“舊約聖書神學”은 아직 年輪이 짧은 學文, 아니 聖書學 分野들 中에서 가장 年輪이 짧은 것들 中의 하나이다. 그 歷史- 18세기 末과 19세기 初에 시작된 것으로 볼 것이다 - 의 槪略을 말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런데도 注目할 만한 것은 이런 舊約聖書神學이 本來 취급해야 하는 對象이 무엇언가에 관해서는 오늘날도 아직 일치된 意見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同一한 題目下에 제이콥 (E. Jacob) 이나 프리젠 (Th. C.Vriezen) 의 舊約聖書神學, 또는 이 책에서 提示되는 舊約聖書神學같이 相異한 作品들을 내놓을 수 있었겠는가! 내 생각에는 最近 20년 내지 30년동안의 硏究에서 수행된 槪論學과 成書神學 사이의 놀라운 接近, 아니 상호간의 交叉가 오늘날의 硏究商況의 特性을 보여주는 것 같다. 舊約聖書神學이 주로 

 

 

文○批判學的으로 

 

 

硏究하는 槪論學에서 배울 수 있었던 것 이 時期決定問題와 多樣한 型式들 外에 다른 것은 거의 없었던 時代가 아직도 우리의 기억에 생생하다. 그 당시에는 新學이 이스라엘 宗敎의 歷史的 敍述 以上의 것을 意圖하려고 했을 때 (쾰러 (L. Köhler)와 함께 ), 神學이라든가 人間學, 救援論救이라는 敎義들에 의해 展開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것은 學問이 , 궁켈 (Gunkel)의 類型(Gattung) 硏究에서 자극을 받아, 來歲法形式들 (sakrale Rechtsformen), 多樣한 祭儀 本文들(Kulttexte) , 祭式文들 (Rituale) , 禮典文들(Liturgien) , 특히 아주 옛 信仰告白 語套들, 즉 구약성서의 神學的 理解롤 위해 中心 意味를 가진 認識들(Erkenntnisse)에 부딪쳤을 때 달라졌었다.이것은 거의 언제나, 뻔했거나 혹은 새로운 樣式史學的發見에는 변했거나 혹은 새로운 神學的要件이 適合했다는 것이 아니었는가? ’戰勝史學(Überlieferungsgeschichte) 은 三代作品- 六經(Hexateuch) 과 신명기 史學派的 歷史書, 歷代記的 歷史書 - 중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걸어온 神의 歷史에 관한 극히 多樣한 敍述樣式들을 傳乘層별로 보는 새로운 方法을 가르치고 이스라엘이 어느 屍臺에나 神의 特定한 관여에 의해 자신의 歷史를 理解하기 위해 어떻게 노력했으며, 신의 이 관여가 그때 그때 어떻게 달리  敍述되었는가를 分明하게 보여주었다. 이로써 舊約聖書神學에는 새로운 課題들이 부과되지 않았는가? 만일 全體六經이 어느 時代에나 이스라엘의 本質을 規定하는 것으로 된 몇몇 아주 옛 信仰告白의 진술들 위에 세워졌다는 認識에 어떤 眞理가 있다면, 그것은 舊約聖書神學이 바로 이 사실에서 出發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重要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의 硏究를 촉진시킨 어떤 特別한 神學的衝動들이 아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진술들과 文學的 遺産의 形式的 構造에 대한 새로운 注目과 구약성서 각 책들 및 그것들 중에 改作되어 있는 傳承들의 적철한 分析이 바로 舊約聖書神學의 유일한 對象일 수 있다는 것을 한층 잘 볼 수 있게 가르친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信仰告白 진술들의 歷史를 年代記的順序에서 보려는 얄팍한 생각은 곧 進行不可能한 것으로 證明될 것이다. 물론 六經은 이미 傳統의 層에 따라서 神學的인 形成에서, 극심한 차이를 認識하게 하지만, 이 傳統들이 由來한 時期를 決定하려는 경우, 우리는 暗中摸索하거나 아주 一般的인 時期決定 以上을 넘어서는 일이 거의 없다. 그리고 우리가 場所的인 出處와 相異한 傳統集團들의 대표자들에 관해 알고 있는 것 역시 큰 使料集에 수정되어 있는 풍부한 特殊 形式들 및 神學的 表現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 즉 이렇게 우리의 敍述은 이미 그 方法的 槪要에서 過多한 假說로 重壓을 받고 있다.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적인 진술들의 歷史的 敍述을 포기하는 일은 우리가 이스라엘에 의해 救援史의 문맥들 속에 배열된 資料들을 그대로 투고 볼 수 있게 하는 長點을 가지고 있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神學的 作業중 가장 重要하고 가장 흥미있는 측면이 보다 分明하게 우리의 視野에 들어오는데,이것은 神의 救援活動들을 언제나 새롭게 現在化하는 것이며, 결국 옛 信仰告白 진술들을 그렇게 방대한 傳統의 덩어리로 증대시컨 神의 行爲에 대한 –언제나 새로운 把握과 告白이다. 구약성서의 內容을 敎義들(新論, 人間論 等)의 尺度에 따라 파악하려는 神學은, 철두철미 歷史와 結付되어 있는 이 信仰告白 진술들, 몇몇 神의 救援活動들 위에 이스라엘 信仰의 토대를 닦는 일과 이 救援活動들에 관해 언제나 새롭게 理解하려는 노력을 올바르게 평가하지 못할 것이다. 가장 重要한 古代 이스라엘의 祭儀制度들과 그 信仰史의 段階들율 가능한 한 간략하게 示唆하는 歷史的部分이 神學的部分 앞에 배 열되 었다. 古代 이스라엘의 信仰 및 祭儀의 歷史를 전체적인 複雜性에서 敍述하는 것을 전혀 企圖하지 않은 이 歷史的部分에서는 神學的部分이 그 知識을 前提하고 있는 主題들만을 그것들의 歷史的 연관성에서 보여 주려고 했다. 이 部分과 이 책 全般의 構想은 必然的으로 重要한 主題들을 여러 번 다루어야 하는 結果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 同一한 문제가 神學的으로 여러 측면과 여려가지 연관성을 가지고 讀者의 視野에 뚜렷하게 들어온다면, 무조건 그것을 短點으로 느낄 必要는 없을 것이다. 歷史的傳承들의 神學을 다루는 이 영역에서 예언자들에 관해서는 擧論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예언자들은 神의 과거의 制度들 (Setzungen) 이 그 時代사람들을 위해서도 救援의 能力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否定하고, 그들의 時代에는 전혀 새로운 歷史行爲를 위한 神의 出現(Aufbruch) 이 두드러 지게 나타난다고 본 것이 그들의 宣布의 特性이기 때문이다(참조. 77-78면,134-136면). 그러므로 예언자들의 傳乘들의 神學에 관한 것은 다른 연관성에서 다시 擧論되어야 할 것이다. 내가 그리 멀지 않은 장래에 出版할 수 있기를 바라는 제 2 권 역시 舊約聖書에 관한 몇 가지 기본적인 神學的熟考들로 끝낼 것이다. 물론 오늘날 一團의 本質的인 것과 重要한 것을 어느 정도라도 충분히 說明하는, 적어도 우리의 상황에서는, 舊約聖書神學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아직도 모두들 개인의 方法으로만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도 조만간에 구약성서의 보다 充分한 神學的理解에 도달하는 길이 열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펴 내는데 끊임없이 나를 도와준 나의 옛 두 제자의 수고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副牧師 할러 (E. Haller. Neuendettelsau)는 原稿 通讀과 校定의 큰 일을 맡아주었고, 나의 助手이며 神學博士 후보자언 슈반 (K.Schwan, Sandhausen)은 수많은 聖書句節을 精密히 조사하고 索引標를 만들었으며, 할러와 함께 교정도 보였다. 이 두 사랑의 희생적인 수고에 심심한 謝意를 표한다. 

 

하이델베르크에서 1957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