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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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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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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5장 16-20절
중풍에 걸린 사람을 사람들이 침상 채로 들고 와서 지붕을 뚫고 내려 주님 앞에 데려와 치유함을 입는 장면입니다.
20절에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과연 그들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어습니까?
과연 그들이 주님을 메시아로 알고 주님 앞에 환자를 데려온 것입니까?
이 사람들의 믿음과 현재 신자들이 주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믿음에는 차이가 없습니까?
일반적으로 이 사람들의 믿음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으로 "과감성", "적극성" 등을 들고 있는데, 이렇한 특성들은 그 믿음의 방향성이 옳을 때 가치가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을 때에는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여기 저기에 치유의 은사니, 금이빨의 은사니 하는 기적을 일으키는 집회가 있습니다.
그러한 집회에 "과감"하게, 또는 "적극"으로 참여하는 하는 것이 과연 옳은 믿음인지요?
아직 주님의 메시아 되심이 선포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 사람들이 병자를 주님에게 데려온 것은 오직 치유의 기적을 바라보고 온 것은 아닌지요.
그렇다면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신 말씀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요.
주님께서 이 사람들에게서 보신 "믿음"은 과연 어떤 믿음이 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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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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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5장 16-20절
중풍에 걸린 사람을 사람들이 침상 채로 들고 와서 지붕을 뚫고 내려 주님 앞에 데려와 치유함을 입는 장면입니다.
20절에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과연 그들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어습니까?
과연 그들이 주님을 메시아로 알고 주님 앞에 환자를 데려온 것입니까?
이 사람들의 믿음과 현재 신자들이 주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믿음에는 차이가 없습니까?
일반적으로 이 사람들의 믿음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으로 "과감성", "적극성" 등을 들고 있는데, 이렇한 특성들은 그 믿음의 방향성이 옳을 때 가치가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을 때에는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여기 저기에 치유의 은사니, 금이빨의 은사니 하는 기적을 일으키는 집회가 있습니다.
그러한 집회에 "과감"하게, 또는 "적극"으로 참여하는 하는 것이 과연 옳은 믿음인지요?
아직 주님의 메시아 되심이 선포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 사람들이 병자를 주님에게 데려온 것은 오직 치유의 기적을 바라보고 온 것은 아닌지요.
그렇다면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신 말씀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요.
주님께서 이 사람들에게서 보신 "믿음"은 과연 어떤 믿음이 었습니까?
2008.01.16 23:30:38
아네모네 님,
대글이 없어서 서운하셨나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까 이해해주세요.
믿음은 해위와의 관계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지
믿음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랍니다.
오해는 마세요.
믿음이 별 것 아니라는 말씀이 아니에요.
믿음에 앞서서 하나님의 구원해위가 중요하고,
그것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고,
그런 이해 안에서 우리의 믿음이 따라오게 됩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 하신 그들의 믿음이 무엇일까요?
친구의 병이 나을 거라는 믿음일 수도 있고,
예수님에 대한 신뢰일 수도 있겠지요.
병의 치유가 반드시 믿음을 전제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불쌍해서 고치시기도 하셨지요.
믿음은 그 언어 자체 안에서 어떤 완결된 의미를 갖는 게 아니라
주변의 상황과 연관해서 의미를 갖습니다.
따라서 믿음이 우리가 의로워지는 유일한 길일 수도 있고,
또는 자기 확신에 머물 수도 있어요.
주의 은총이.
대글이 없어서 서운하셨나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까 이해해주세요.
믿음은 해위와의 관계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지
믿음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랍니다.
오해는 마세요.
믿음이 별 것 아니라는 말씀이 아니에요.
믿음에 앞서서 하나님의 구원해위가 중요하고,
그것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고,
그런 이해 안에서 우리의 믿음이 따라오게 됩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 하신 그들의 믿음이 무엇일까요?
친구의 병이 나을 거라는 믿음일 수도 있고,
예수님에 대한 신뢰일 수도 있겠지요.
병의 치유가 반드시 믿음을 전제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불쌍해서 고치시기도 하셨지요.
믿음은 그 언어 자체 안에서 어떤 완결된 의미를 갖는 게 아니라
주변의 상황과 연관해서 의미를 갖습니다.
따라서 믿음이 우리가 의로워지는 유일한 길일 수도 있고,
또는 자기 확신에 머물 수도 있어요.
주의 은총이.
2008.01.17 03:59:40
중풍환자에 대한 그 사람들의 긍휼함, 그 궁휼함이 행위로 옯겨지는 걸 보신 주님이 이걸 믿음이라고 칭찬하신 것.
중풍환자를 끌고 여기 저기 다니며 고치려 했던 친구가 됐던 가족이 되었던 그 사람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의 소문들 듣고 또 거기로 중풍환자를 데리고 온다.
그들의 간절함을 보시고 그것을 믿음이라고 칭찬하신다.
환자라는 자기 인식, 그리고 고통
고침을 받고자 하는 간절함, 그리고 그 간절함을 아는 주위 사람들의 긍휼함
그 간절함과 긍휼함으로 고침을 찾아 나섬
여기 저기 치유를 찾아 헤매다님. 방황.
주님에 이름
그리고 주님의 치유....
결국 이것이 믿음의 여정일까요?
목사님의 댓글을 보고 생각해 본 것입니다.
원체 둔해서...
계속 배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중풍환자를 끌고 여기 저기 다니며 고치려 했던 친구가 됐던 가족이 되었던 그 사람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의 소문들 듣고 또 거기로 중풍환자를 데리고 온다.
그들의 간절함을 보시고 그것을 믿음이라고 칭찬하신다.
환자라는 자기 인식, 그리고 고통
고침을 받고자 하는 간절함, 그리고 그 간절함을 아는 주위 사람들의 긍휼함
그 간절함과 긍휼함으로 고침을 찾아 나섬
여기 저기 치유를 찾아 헤매다님. 방황.
주님에 이름
그리고 주님의 치유....
결국 이것이 믿음의 여정일까요?
목사님의 댓글을 보고 생각해 본 것입니다.
원체 둔해서...
계속 배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을 달아 주시는 분이 없었는데...
정목사님 강의 노트 중에 이런 글이 있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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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대상은 그 이야기에 나오는 여러사람들중에 복음서에서 핵심은 예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포커스는 예수님. 예수님과 상대하는 어떤 사람들을 이야기해야 한다면 삭개오가 아니라 거기는 바리새인들,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간 것에 대해 불평하던, 수군수군하던 사람들이었다. 문제는 그 사람들이다. 예수님과 수군대던 사람과의 알력, 충돌관계에 있던 사람들, 굳이 상대한 사람들을 불러서 설교의 주제로 삼아 설교하려면 삭개오가 아니라 바리새인, 율법주의, 자기성취, 자기집중이 얼마나 하나님나라와 관계가 먼가. 삭개오는 말만 주인공 바리새인들의 문제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나오게 되는 그들을 말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 더 중요한 것은 본문에서 잃은 자를 구원하러 왔다. 그 핵심이다. 그 삭개오 이야기에서 삭개오의 변화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만난다고 해서 재산 잘라내는 것이 아니다.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