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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509
안녕하세요, 목사님...
지금 뉴스앤조이에서 희년법에 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더군요.
사실 저도 이 문제에 대해 질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레위기의 희년법이 오늘 날 사회에서, 특히 투기가 만연한 한국사회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 나와 있는 예수가 이 땅에 오신 이유 중 하나로 희년의 해를 선포하시기 위함이다는 말씀을 경제적 공의를 회복하시기 원하신다는 말씀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해석학적인 성경비평에 관한 글들을 읽으면서 고대의 토지법을 오늘날에도 유효하다고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생기더군요. 제 자신의 경우를 돌아다보면, 여성의 문제라든가 구약의 종교의식의 문제라든가의 경우에는 오늘날에는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보와왔던 반면, 토지문제와 경제문제 등에 있어서는 구약에 나오는 것을 규범으로 하여 오늘날의 문제를 비판하는 준거로 사용해왔던 것이지요.
제 안에서 두 가지 기준이 상충하고 있다는 것을 최근에 발견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뉴스앤조이에서 김승욱 교수와 고영근 씨의 논쟁을 보면서 이 질문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김승욱교수와 고영근씨의 입장을 자세히 살피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질문드리고 싶은 것은, 성경의 내용 중에서 어떤 것은 문화 상대주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한편 어떤 것은 절대성을 가진 원칙으로 보는 식으로 "이중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 문제는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명쾌한 답변을 기다립니다..
지금 뉴스앤조이에서 희년법에 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더군요.
사실 저도 이 문제에 대해 질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레위기의 희년법이 오늘 날 사회에서, 특히 투기가 만연한 한국사회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 나와 있는 예수가 이 땅에 오신 이유 중 하나로 희년의 해를 선포하시기 위함이다는 말씀을 경제적 공의를 회복하시기 원하신다는 말씀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해석학적인 성경비평에 관한 글들을 읽으면서 고대의 토지법을 오늘날에도 유효하다고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생기더군요. 제 자신의 경우를 돌아다보면, 여성의 문제라든가 구약의 종교의식의 문제라든가의 경우에는 오늘날에는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보와왔던 반면, 토지문제와 경제문제 등에 있어서는 구약에 나오는 것을 규범으로 하여 오늘날의 문제를 비판하는 준거로 사용해왔던 것이지요.
제 안에서 두 가지 기준이 상충하고 있다는 것을 최근에 발견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뉴스앤조이에서 김승욱 교수와 고영근 씨의 논쟁을 보면서 이 질문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김승욱교수와 고영근씨의 입장을 자세히 살피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질문드리고 싶은 것은, 성경의 내용 중에서 어떤 것은 문화 상대주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한편 어떤 것은 절대성을 가진 원칙으로 보는 식으로 "이중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 문제는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명쾌한 답변을 기다립니다..
2008.01.16 23:25:17
이방인 님,
이 질문을 진작에 읽었지만 어찌어찌 하다가 이렇게 늦었습니다.
제가 대답하지 않아도 이방인 님은 이미 충분한 대답을 갖고 계실 것 같기도 하고,
더 솔직하게는 내가 명쾌한 대답을 드릴 능력도 없구 해서,
이렇게 차일피일 늦었습니다.
어쩌면 이방인 님은 내 대답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구약의 모든 규정과 규범 자체는 오늘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걸 문화상대주의라고 말하셨나요?
물론 우리가 지금 지켜야 할 좋은 전통도 많긴 합니다.
그러나 2천5백년 전의 삶의 자리에 나온 형식들을
오늘 우리가 추종한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죽게 합니다.
희년 제도가 소중하긴 하지만 그 정신을 살릴지언정
그것 자체를 그래도 지킬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희년제도는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구약의 규범과 율법과 전통은 해석되어야 합니다.
해석의 과정을 통해서 그것의 정신이 오늘 우리에게 바르게 전달될 수 있겠지요.
주의 은총이.
이 질문을 진작에 읽었지만 어찌어찌 하다가 이렇게 늦었습니다.
제가 대답하지 않아도 이방인 님은 이미 충분한 대답을 갖고 계실 것 같기도 하고,
더 솔직하게는 내가 명쾌한 대답을 드릴 능력도 없구 해서,
이렇게 차일피일 늦었습니다.
어쩌면 이방인 님은 내 대답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구약의 모든 규정과 규범 자체는 오늘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걸 문화상대주의라고 말하셨나요?
물론 우리가 지금 지켜야 할 좋은 전통도 많긴 합니다.
그러나 2천5백년 전의 삶의 자리에 나온 형식들을
오늘 우리가 추종한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죽게 합니다.
희년 제도가 소중하긴 하지만 그 정신을 살릴지언정
그것 자체를 그래도 지킬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희년제도는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구약의 규범과 율법과 전통은 해석되어야 합니다.
해석의 과정을 통해서 그것의 정신이 오늘 우리에게 바르게 전달될 수 있겠지요.
주의 은총이.
2008.01.17 12:29:27
제가 희년법에 대해 알게된 것은 대천덕 신부님의 강의와 "토지와 자유"라는 그 분의 책츨 통해서입니다. 약 20여년 전에 읽었기 때문에 기억이 가물거립니다. 대천덕 신부님은 희년제도의 와해를 이스라엘 공동체가 바알신앙을 수용한 데서 찾으시던데요. 그것에 관한 연관 고리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만 (대천덕 신부님도 그 부분에 관해 설명을 하시지 않으신 것도 같고요..) 그러한 입장에 따르면, 희년법을 지키느냐 아니냐는 여호와 신앙을 고수하느냐 이방신을 섬기느냐의 문제가 되지요. 이것이 고영근 부장이 김승욱 교수의 의견에 대해 현대판 바알주의라고 비판을 하는 근거가 되는 듯 하구요.
희년제도가 고대 농업사회를 근간으로 하는 것이어서 그것을 똑같이 오늘날 적용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50년을 기준으로 해서 불평등한 구조를 다시 평등하게 되돌리자는 것과 다른 사람이 잃어버린 생존권을 회복시켜주는 일 ("대신 물러주기"-저는 이 말에서 redemption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는가 생각이 드는데, 틀리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등이 필요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4장에서 이사야의 말을 인용한 부분에서 예수님이 "은혜의 해를 선포하기 위해 오셨다" (요즘 한글 성경을 읽지 않다보니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습니다만..)는 부분을 간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고요..
어찌되었건 이 문제 자체와는 별도로, 성경에서 어떤 것은 상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절대적인 것으로 고수해야하는가 하는 질문을 최근에 하게되었습니다. 정목사님께서 규범과 전통은 버리고 정신은 살려야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규범이나 전통과 정신을 어떻게 구분하는가가 관건이 되겠습니다. 홍시님께서 말씀하신 표현에 따르면 '옷'과 '타인에 대한 생명존중 정신"인데 사실 희년법의 경우는 '옷'과 '정신'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는 생각이 드는 반면, 바울의 여성에 대한 이야기의 경우 '버려도 되는 옷'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중적 잣대를 스스로 문제삼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구약의 희년제도가 여호와 신앙의 고수와 관련되고 예수님의 사역의 중요한 부분으로 희년정신을 회복하는 것으로 보자면, 과거의 전통과 규범이라 할지라도 중요도에 있어서 차등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쩌면 제가 횡설수설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희년제도가 고대 농업사회를 근간으로 하는 것이어서 그것을 똑같이 오늘날 적용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50년을 기준으로 해서 불평등한 구조를 다시 평등하게 되돌리자는 것과 다른 사람이 잃어버린 생존권을 회복시켜주는 일 ("대신 물러주기"-저는 이 말에서 redemption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는가 생각이 드는데, 틀리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등이 필요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4장에서 이사야의 말을 인용한 부분에서 예수님이 "은혜의 해를 선포하기 위해 오셨다" (요즘 한글 성경을 읽지 않다보니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습니다만..)는 부분을 간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고요..
어찌되었건 이 문제 자체와는 별도로, 성경에서 어떤 것은 상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절대적인 것으로 고수해야하는가 하는 질문을 최근에 하게되었습니다. 정목사님께서 규범과 전통은 버리고 정신은 살려야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규범이나 전통과 정신을 어떻게 구분하는가가 관건이 되겠습니다. 홍시님께서 말씀하신 표현에 따르면 '옷'과 '타인에 대한 생명존중 정신"인데 사실 희년법의 경우는 '옷'과 '정신'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는 생각이 드는 반면, 바울의 여성에 대한 이야기의 경우 '버려도 되는 옷'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중적 잣대를 스스로 문제삼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구약의 희년제도가 여호와 신앙의 고수와 관련되고 예수님의 사역의 중요한 부분으로 희년정신을 회복하는 것으로 보자면, 과거의 전통과 규범이라 할지라도 중요도에 있어서 차등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쩌면 제가 횡설수설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이스라엘의 야훼 신앙공동체"의 틀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습니다.
레위기의 희년법이 오늘날에도 유효한가 하는 질문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그 전에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습니다.
오늘 우리 민족이 이스라엘과 같은 야훼신앙경험을 갖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민족 전체가 야훼신앙 공동체로 출발한 특징이 있는 반면
우리의 민족은 이스라엘과 같은 신체험적 역사 경험이 없습니다.
한 때 민중신학계에서는 팔일오 광복을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과 일치시킨 적도 있었지만
고대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과 20세기 한국의 팔일오 사건은 사회과학적 측면에서만 보면
비슷한 성격이 있기는 하지만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소수민족(약소민족)이 강대국(제국)의 식민지를 겪었다는 점에서만 보면 유사점을 찾을 수 있겠지요.
허지만 구약성서의 출애굽은 사회과학적 통찰을 제공하기 위해서 생겨난 문서가 아니거든요.
출애굽기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역사경험을 통해서
야훼백성으로서 정체성을 어떻게 확보했던가를 해명하는 문서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야훼신앙을 갖고 있지 않는 상태에서
이스라엘의 희년법을 획일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오늘날 다양한 민주적 가치와 종교가 공존하는 한반도에서
고대 이스라엘 사회의 유일신 야훼에서 출발한 법을
21세기에 획일적으로 적용하기에는 무리입니다.
그렇다고 희년법의 정신이 무의미하거나 무가치 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희년법의 정신은 그 자체로 숭고합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조건에서 출발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빈부차가 생기는 왜곡된 사회현상을
어떻게 해결할지 그들은 고민했습니다.
그 고민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 야훼의 이름으로 주어진 희년법이라는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 숭고한 정신이 담긴 희년법이 오늘날 다양한 가치와 종교가 공존하는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한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지평이 다른 차원에 속합니다.
결론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앙공동체 안에서 희년법의 정신을 살리는 길은 모색해 볼 수 있지만
우리 사회에 보편적으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게 제 생각입니다.
오늘날 토지를 이익과 재테크 수단으로 삼는 천민자본주의적 삶의 행태를 바꾸기 위해서라면
굳이 고대 이스라엘의 희년법이 아니더라도
보다 더 합리적인 제도를 보편타당한 차원에서 도입하면 되지 않을까요?
이스라엘 사회라면 가능하겠지만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성서에 등장하는 고대 이스라엘의 희년법이 당시로서는 최선의 길이었지만
그것이 유일한 길은 아니라는게 제 생각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희년법을 옷에 비유한다면 좋은 옷, 멋진 옷입니다.
하지만 그 옷이 무시간적, 탈역사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어울리는 옷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희년법의 궁극적 목적은 타인의 생존(생명)을 고려하는 것이거든요.
오늘 우리 시대에 맞도록 이웃과의 관계에서 참된 생명과 평화,
타인의 생존도 함께 확보해 나갈 수 있는 보편타당한 법을 만들어 내는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이웃사랑이 아닐까요?
제 머리 안에서 떠 오르는대로 급하게 두서없이 써내려가다보니 글이산만하네요.
제 글은 어설프지만 정목사님께서 깔끔하게 정리해 주실 겁니다.
기다려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