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아 매일묵상의 헛된예배의 말씀 중 "자기 자신의 믿음 자체에 만족하면 이것이 곧 헛된예배다" 라는
정용섭 목사님의 말씀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있는데요.
선교단이나 중고등부, 청년부 수련회의 열광적인 찬양집회에서 두 손을 높이 들고 감격하고 눈물을 흘리는 현상을 '자기 자신의 믿음 자체에
만족하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들 나름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고 예배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는가요? 대부분의 교회에서 찬양예배 시간에 빈번하게 볼 수 있는 현상인데 그런 현상을 헛된 예배라고 하시는 게 아직 불편한 마음이 있어서 여쭈어 봅니다.
그리고 예배에서 가능하면 인본주의적인(혼합주의적) 요소를 제거하는게 최선이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고 그리고 주일공동예배 이외에 여러 종류의 예배가 존재하고 있고 또 극단적인? 본질주의도 뭔가 문제가 있다고 여겨지는데 그런 류의 집회나 예배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인지 아직도 혼란스럽네요.
결벽증처럼 완전히 그런 요소를 신앙생활에서 제거하는 게 가능한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죄송합니다. 웬만하면 인문학적 성서읽기를 표방하는 다비아에 이런 질문을 하지 않으려 했는데 제 생각에 확신이 없고 그런 사람들은 헛된예배를 드리고 있구나! 라고 비난하는 것처럼 보여서 맘이 불편하고 제가 또한 그런 마음을 가질 것 같아서 불편한 마음이 사라지지가 않아서요. 그들 나름의 눈높이와 현실을 존중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온마음 군의 질문은 본인 한 사람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거에요.
요즘 나도 그것에 관해서 깊이 생각해야 할 일이 있었어요.
온마음 군이 말한 그것도 각각 다 다른 현상으로 나타니까 일괄적으로 말하기 힘든데,
일단 열광적인 (또는 감격스러운) '경배와 찬양' 유의 예배, 또는 '씨씨엠 집회'로 규정하고 가봅시다.
중요한 문제라서 글이 좀 길어질지 모르겠군요.
이런 답글에서 길게 쓰기도 힘들고, 좀 난감하네요.
구약의 선지자들이 가장 강력한 어투로 비판하고 경계한 것은 우상숭배에요.
우상의 종교 형식이 좋은 뜻이든 아니든, 열광주의랍니다.
엘리야의 갈멜산 이야기를 알지요?
아합과 이세벨의 바알 선지자들은 울부짖고, 더 나가서 자해하면서 기도하지요.
지금도 형식만 다르지 자해 수준에 이르는 종교 행위가 적지 않아요.
엘리야는 조용히 기도만 합니다.
유대교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쉐마)이라면
근동 종교의 핵심은 사람들의 열정을 화끈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비롯해서 구약이 경계하고 있는 대다수 우상숭배가
다 이런 인간의 열광적 현상을 바탕으로 합니다.
인간에게는 그런 욕구가 내재해 있기 때문이제요.
화끈하고 재미있고, 감정적으로 승화되고, 그래서 은혜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걸 은혜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살면 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은혜와는 완전히 다른 경험이고,
생명을 잠시 들뜨게 할 수는 있어도 풍성하게는 하지 못해요.
그래서 선지자들이 거품을 물고 반대를 한 거지요.
나는 선지자들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부단히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 데에도
이런 매력적인 요소가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그렇게 무조건 나쁜 거는 아닙니다.
실제로 사람에게 위로가 되요. 그래서 반복해서 그런 종교행위를 하는 거지요.
일본 토착화 불교인 일련정종 신자들은 몇 시간이고 염불을 외웁니다.
거기서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위로를 얻는 거지요.
종교의 본질이나 목적을 그런데 둔다면 그런 종교가 좋은 거에요.
인간의 허무와 외로움을 그런 방식으로 극복할 수 있으니까요.
고린도교회도 그런 열광주의 영향을 제법 받았어요.
지금도 세계 기독교에서 그런 경향의 종파가 제법 됩니다.
정통교회 안에서도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인간에게 그런 욕망이 강하기 때문이에요.
일종의 심리적 '힐링'을 경험하는 거지요.
허전한 마음이 치료되는 거니까 좋은 거지요.
대중 음악에도 이런 능력이 있습니다.
나도 송창식, 조용필, 비틀즈의 노래를 듣고 기분이 좋아질 때가 많았지요.
사실 좋아진다기보다는 그냥 재미가 있는 거지만요.
사람이 살면서 그런 재미를 느끼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아요.
그런 거로 삶을 만족한다면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도 좋습니다.
경배와 찬양 유의 예배, 씨씨엠 집회 등은 다 대중음악 콘서트와 비슷한 효과가 있어요.
눈물을 흘리게도 하고 마음을 뜨겁게도 하고 상처난 마음에 힐링도 가능하고,
뭔가 가슴에 뭉클하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지요.
대중음악은 그것대로 의미가 있지만, 기독교 신앙은 그거와는 본질이 달라요.
그걸 일단 구별해야 되요.
성서가 부단히 그걸 말하고 있어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선지자들은 그런 인간의 열광적 종교 현상을 거부했고,
왜 그랬는지를 설명하려면 또 길어져서 그쪽으로는 더 이상 갈 수 없는데,
신약 성서기자들도 어쩔 수 없이 열광적인 현상이 있는 걸 경우에 따라서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말씀 종교'로 방향을 잡았어요.
그래서 기독교 신앙을 헬라철학의 토대에서 변증하려고 최선을 다했어요.
그게 신학이지요.
만약 그런 노력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일종의 소종파로 떨어져버리고 말았겠지요.
그만 줄여야겠네요.
문제는 기독교 신앙의 수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대답은 달라집니다.
피곤한 세상살이를 버텨내기 위해서 대중음악과 비슷한 수준에서 마음의 힐링을 목표로 한다면
찬양과 경배 유의 예배와 씨씨엠 집회를 쫓아다녀도 됩니다.
그게 아니라 구약과 신약, 그리고 2천년 기독교 역사에 충실한 신앙을 원한다면,
이럴 때만 단순히 심리와 정서의 치유가 아니라 영혼의 자유가 가능한 건데,
그런 집회에는 발걸음을 그만 해야겠지요.
가끔 심심풀이로 가는 건 좋아요. ㅎㅎ
목사님이 나름 정성스럽게 답글을 주셨는데
제가 우려하는 지점이 바로 이런 정성과 사랑이 담긴 답글입니다.
제 생각은 이런 진심 때문에 속는다고 봅니다.
그런 진심에도 불구하고 가만 들여다 보면 매우 오만한 자세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나는 이런 기독교의 본질속에 있고 이게 본질인데,
이런 본질속에 있으려면 있고,
감정 놀음이나 하면서 힐링하고 싶으면 집회나 따라다녀 이 이야기잖아요. ㅎㅎ
혹은 무수한 역사의 흐름중에 많은 사람들을 그냥 그루핑해서 그건 그냥 열광주의라는 단어로 탁 정의하고 넘어가잖아요. 개개인의 고유한 삶을 도매가 넘겨버리는 매우 경솔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과연 인간을 그렇게 짐짝 분류하듯이 툭툭 분류할까요 ...
그리고 정목사님의 정통신학이라는 기반도 근본적으로 자의적입니다.
왜냐면 자신의 말이 정답이라는 걸 알려면
정답지를 미리 가지고 있어야 되는데
인류역사상 정답지는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거든요.
그냥 본인이 이제껏 접해온 신학중에서 본인의 감과 취향을 따라서 주장하는 것 뿐이지요.
그래서 저는 다비안들이 최소 이지점에서 시작하면 독단론은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
판단은 알아서들 ... ^^
님께서 알아서 스스로 판단 잘 하시는 것처럼,
다른 이들도 각각 알아서 판단을 잘하고 있는 것 같은데 왜 거듭 충고해주시는지요?
속다니요? 오만하다니요? 경솔하다니요? 독단론에 빠졌다니요?
지금 누가 자의적 판단으로 경솔하게 독단하고 있는 걸까요?
정답지는 없는 것이니, 각자 최선으로 여겨지는 길을 따라 가는 거 아닌가요?
단 최소한의 예의를 좀 지키면서 걸어가면
상쾌한 기분을 잃지 않는 여행길이 되겠지요?
스테이트루님
종교는 기본적으로 그 종교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독선적이고 오만하고 경솔한 겁니다.
당연히 인간은 정답지를 알수 없지요. 하지만 이곳은 성서의 세계관을 정답지로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고 정목사님은 성서의 세계관이 정답지란 전제하에서 성서의 본질적 내용(문자그대로가 아닌)이 무엇인지 연구하고 해석하여 우리에게 설명하시는 분입니다. 이곳에서 당신이 정답을 알아, 각 사람들의 마음을 다 알아 비판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생각됩니다.
절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파하는 스님에게 당신이 어떻게 자연의 이치나 윤회, 사후세계에 대해서 그렇게 잘알아. 독선적이야 이렇게 비판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요.
정용섭 목사님은 기독교 틀안에서 기독교인에게 성서의 참 뜻에 대해서 설명하고 계신겁니다. CCM이나 찬양집회 수련회가 기독교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을 성서내용을 바탕으로 설명하고 계신거지요.
님이 말하는 하나님은 (성경을 레퍼런스라고 표현했듯이) 철학속에서 일반적인 창조주를 표현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며, 정목사님께서는 성서를 텍스트라고 전제하고 성서 세계관안에서의 하나님을 설명하셔서 관점이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철학적이지 않고 철저히 기독교안에서 기독교인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떻게 그런 오만한 성서 해석이 기독교의 본질이냐는 겁니다.
어떻게 ccm 집회에 모이는 많은 사람을 그렇게 쉽게 열광주의라고 특정짓냐는 겁니다. 그 사람들의 복잡미묘한 관계들을 무시하고 그 사람들과 모임을 매도 하냐는 겁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요.
찬양을 통해서 임재하시는 하나님과 그 가사에 깊이 몰입한 사람도 있을거고 힘든 상황에서 말씀붙들고 힘을 얻는지 도대체 뭘 다 알길래 신이라도 되는냥 평가하냐는 겁니다.
이런 유체이탈에 전지주의적 작가시점은 어찌보면 어떤 분의 어법과 닮아있지 않나요?
중요한건 대부분의 어법이 이렇다는데에 있습니다.
이런게 종교의 특징이여서 기독교도 그렇게 받아들여라는 말씀은 아니시겠죠... 그렇다면 내 종교 기독교를 위해서라도 그런일은 막아야겠지요 ...
목사님 개인을 욕하는게 아닙니다.
우리 몸과 마음에 깊게 스며들어 있는 생각들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한번 생각해보라는 의미로 남기는 댓글들입니다.
내일은 촛불을 밝혀야 되니
이만 줄이고 들어가 보겠습니다.
내게는 이 폭력적인 세계내에
기독교가 똑같이 폭력적인 종교가 아니였으면 좋겠습니다.
햇빛처럼 님과 허재훈 님이 대글을 달 정도라면
스테이트루 님의 글이 다비아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거 같아서
한 마디 할 수밖에 없네요.
스테이트루 님이 한계를 넘어서 발언하는 거 같군요.
지금까지 스테이 님의 발언에 대해서 제게 직접 한 말 이외에는
가능한 침묵한 이유는 두 가지에요.
하나는 핵심을 잡는 말이 아니니 대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방식으로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게 내버려두는 게 좋겠다는 거에요.
지금까지 다비아에는 수많은 그런 분들이 와서 시비 걸듯이 말하다가 떠나곤 했는데,
다비아가 일종의 배설구 역할을 하는 것도 괜찮은 거지요.
스테이 님은 제가 말하는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반복적으로 말꼬리 잡기 식으로 접근하니까
적절하게 대응하기가 힘든 거에요.
온마음 군은 제 딸들 보다 젊은 청년이에요.
진심으로 저에게 조언은 바란 거지요.
내 딸들에게 말하듯이 기독교 전통에 따르면 이렇고 저렇다 설명한 거지,
씨씨엠, 찬양과 경배 사람들을 향해서 '너 문제 있어.' 하고 말한 게 아니에요.
내 딸들에게도 똑같이 말했을 겁니다.
스테이 님은 뭔가 나에게 화를 내고 있네요.
아니면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게 뭔지 잘 모르겠지만 이런 방식의 대응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구약도 그렇고 신약과 2천년 기독교 역사는 진리 투쟁의 역사에요.
아주 작은 문제로로 머리 터지게 싸웠어요.
루터와 쯔빙글리의 성만찬 논쟁도 그렇고,
진리 자체가 이런 논쟁입니다.
선지자들도 작은 일로 서로 다퉜어요.
작은 일은 아니지만 아무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일을 놓고 싸웠어요.
그런 투쟁 방식으로 살아남는 것은 살아남고
도태될 것은 도태됩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구별되듯이요.
이게 야박한 거 같지만 진리의 역사가 바로 그렇습니다.
만약 스테이님의 논리라면
이단 논쟁은 무의미한 거에요.
선천지 신자들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어요.
기독교를 기복주의로 가르치는 목사에 대해서도 말할 게 없어요.
그들의 마음을 누가 다 헤아리겠어요.
박근혜와 삼인방과 등등, 이들을 비판할 거도 없어요.
그들의 진정성을 누가 판단하겠어요.
스테이 님은 스스로의 모순에 빠져 있어요.
내가 씨씨엠, 경배와 찬양 유의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
또는 부흥회에서 열광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의 깊은 삶을 직접 체험하지도 못한채 비판한다고 말하면서
나를 잘 알지도 못하면 독단적이라고 비판하네요.
그런 비판으로 제 생각이 허물어진다면 허물어져야겠고,
다비안들이 흔들린다면 흔들려야겠지요.
한마디로 저는 스테이 님이 뭘 말하려고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저로서는 저 친구가 뭔가 속상한 게 있으니까 저렇겠지 하고 그냥 그려니 지나갈 수 있는데
다른 다비안들을 불편하게 하는 거 같아서
앞으로 이런 일들이 다시 일어나면 강퇴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일로 시간을 쓰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 짧아요.
예수에게 일어난 사건을 알아가는 것만 해도 힘에 부치는데,
엉뚱한 말에 신경을 쓰는 건 시간 낭비에요.
제가 볼 때 이 질문은 매우 뿌리가 깊은 질문이고, 제가 고민하고 있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일단, 정목사님의 온화하신 성품상 그들을 배제한다는 식의 말씀은 하지 않으실겁니다.
그런데, 매우 근본적인 지점에서는 글에서 지적한 사람들은 배제당하는게 맞습니다.
이유는 신학이 서있는 사상적 지반이 그러한 예외들을 허용하지 않고,
그들 나름의 차이나는 신앙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신학은 앞으로도 발전하면서 변증법적으로 모든걸
통일된 신학체계 안에서 완성하고
글에서와 같이 예외적인 사람들도 설명하고 포괄할 수 있다고 장담하지만
저는 마지막 순간까지 예외는 사라지지 않으리라 장담합니다.
왜냐면, 바로 제가 늘 예외로 있을 것이고,
훗날에도 저와 같은 사람들이 늘 예외로 서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자연도 그런 독단적이고 오만한 인간의 생각을 허용하지 않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정목사님의 글과 책에서 많은 걸 배웠지만,
그러다 발견한 그 분이 서있는 독단적인 신학적 기반에 저는 계속 반기를 드는 것이이지요 ...
결론은, 열광적인 찬양집회에서 하나님의 감동으로 눈물 흘리는지,
취업이 안되서 눈물흘리는지 자기 자신과 하나님밖에 모른다고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늘 1:1 이지요...
그외에는 신학이든, 다비아든, 찬송이든, 간증이든, 심지어 성경까지도 레퍼런스라고 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그 무엇도,
천사도, 권세자도, 사이비 교주도, 이만희도, 정용섭목사님도
그 뭐시깽이도 침범할 수 없는 거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