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등록한 교회인데 전혀 은혜를 받지 못하뿐만 아니라 영적갈증은 갈수록 깊어져만갑니다.

저한테 문제가 있을까요?

설교문 읽어보시고 여러분들은 어떠신지 의견 듣고싶습니다.




(2008-6-15)
본문: 요15:5
제목: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오늘 VIP초청 주일을 맞아 이 앞가운데를 VIP석으로 정해두었습니다. 2부예배 때 들어오며 보니까 여럿이 앉아 계시길래 VIP시구나 했는데 앞에 가서보니까 모두 아시는 분들이었습니다. 김샛죠. 그렇지만 낙심할 건 없습니다. 우리도 한땐 누군가의 VIP였지만 지금은 이 자리에 있잖아요. 언젠가는 우리의 VIP들이 반드시 주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3부예배엔 낯선 분들이 많으시네요. 반갑습니다.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시기까지 쉽지는 않으셨지요? 망성리기도 하셨지요? 저희들도 여러분을 많이 기다렸고 기도했었습니다. 아무튼 잘오셨습니다.
개인차가있긴 하겠지만 대체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유를 다음 몇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이성주의입니다. 이성이나 경험이나 상식으로 볼 때 하나님이 이해되지 않고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특히 진화론에 익숙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하는 창조론보다는 우주의 모든 것이 우연과 진화에 의해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래전 경희대 앞에서 한 청년을 태워주면서 복음을 전했을 때 자신은 빅뱅이론에 관심이 많다고 했습니다. 사실 진화론이란 과학적이지도 않고 증명되지도 않는 가설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진화론을 진리처럼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없다고 생각하고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립니다.

둘째는 예수님은 좋은데 예수믿는 사람들이 싫다는 것입니다. 인도의 간디가 그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영국에서 유학하는 동안 인종차별로 인해 많은 불이익과 괄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영국에 있을 때 처음에는 교회를 다녔지만 결국 예수 믿는 사람들 때문에 받은 상처로 인해 마음에 빗장을 쳐버렸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늘 옆에 두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못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우리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더러 있죠. 교회에서 상처받고, 교인들로 인해 상처받고 그래서 예수님도 멀리하고 교회도 멀리하죠. 여기계신 우리들 중에도 한두 번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나와있다는 건 하나님의 큰 은총입니다.

세째는 태어날 때부터 집안이 불교이거나 무속신앙의 분위기에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불공을 드려서 낳았다’ ‘사주팔자가 어떻다더라’ 그래서 걸핏하면 점을 보고 굿을 합니다. 우리교회 어느 집사님도 글쎄 며느리될 아이 사주를 봤더니 그게 아니래요. 그래서 관습상 예수님을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떤 사람은 교회 나오면서도 점집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습관이 쉬 고쳐지지 않아서 그렇겠지만 빨리 털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무속신앙의 핵심은 기복신앙입니다. 기복신앙과 기독교 신앙의 차이는 이렇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 중심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움직입니다. 언제나 하나님 뜻을 품고 삽니다. 그러다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이 고상해지고 모습이 거룩해져 갑니다. 그러나 기복신앙은 매사 내가 중심입니다. 그래서 내가 잘 된다고 나와 관계된 것이 잘 된다고 하면 앞뒤 제지 않고 그 길로 갑니다. 철저한 이기주의 개인주의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그런지 얼굴을 보면 표시가 납니다. 심술과 욕심이 가득 서려있습니다.

오래전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났어요. 어떤 사람이 잘되고 싶어서 점을 보러 갔대요. 점쟁이 하는 말이 조상 묘를 잘 써야 되겠다고 하더래요. 그러면서 증조할아버지 묘자리가 좋은데 그래서 이 묘자리 자식이 잘된거라 하더래요. 이 말을 듣고 그날로 증조할아버지 대신에 그곳에 자기 아버지를 이장했다는 거예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지요. 어떤이는 점쟁이가 예수 믿지 말라고 했다고 안 믿고, 며느리 사위도 예수 믿는 사람은 아예 손사래를 쳐요. 그런데 어떤 이는 점쟁이가 예수 믿으라고 했다 해서 교회 나왔다는 분도 있어요. 우리 교회에도 그런 사람이 몇 있습니다. 그 뒤로 점집을 끊었기에 다행이긴 했지만...

넷째는 문화적인 이유로 하나님을 만나기 어려워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소위 기독교가 서양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다는 말이 우리의 것을 믿어야지 왜 남의 것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불교도 유교도 우리 것이 아니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모든 인류를 지으신 분이십니다. 동,서양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어령씨가 지난주 어느 목회자 모임에서 간증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분이 예수님을 믿게 된지 얼마되진 않았지만 세례도 받으시고 바쁜 중에서도 신앙생활을 잘하시나 봅니다. 이어령씨에 대해 알만한 분은 다 아실 것입니다. 문명, 문화인류학, 문학을 전공하신 우리나라 지성을 대표하시는 분입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그의 학문적 배경 때문에 하나님께 일절 관심이 없었습니다. 평생 예수 안 믿을 사람처럼 하시던 그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을 두고 사람들은 이런저런 얘기를 하나 봅니다. ‘의외다’는 사람도 있고 ‘사람이 별 수 있나?’ 라는 분도 있나 봅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게 된 동기는 따님과 손주 때문이었습니다. 손주는 태어나면서 불치의 병을 앓고 있었고 미국 변호사인 따님은 아이를 간호하던 중 암을 얻었고 급기야 앞을 못보게 되었습니다. 고난 중에 따님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신앙심으로 이를 극복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아픔을 안아주셨고 가정의 문제를 모두 치유해 주셨습니다. 이런 과정을 지켜보면서 아버지 이어령의 마음에도 하나님은 찾아오셨고 그 역시 눈물과 감격속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딸과 손주를 고쳐주신 후 이어령선생은 딸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나의 지식과 돈이 너를 구하지 못했다 네가 주님 안에서 평안과 새 생명을 얻었는데 나는 너를 위해 한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그런데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무력함에 매달려 지금까지 살아왔구나. 이제 같이 동행하자. 네가 시력을 잃어가면서 본 빛을 나에게도 보게 해주겠니?’ 이렇게 예수님을 믿게 된 그가 요즘 강연에서 전하는 주제는 ‘문화와 복음’ ‘지성에서 영성으로’ ‘이성에서 영성으로’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이번 목회자모임에서는 포도나무와 열매에 대해 얘기를 했습니다. 들어보니 그는 교회를 포도원이라고 했습디다. 그러면서 시국이 어렵고 사회가 흔들릴수록 포도원의 포도나무가 넝쿨을 넓게 뻗쳐가야 하고 이 일에 목사님들의 절대적인 수고가 있어야 할 것 이라고 했답니다.
맞아요. 이세상 모든 크리스천 공동체는 하나님의 포도원이죠. 물론 교회도 포도원입니다. 그리고 크리스천들은 모두 포도원집 사람들이고요. 물론 아직은 자신이 포도원집 아들, 딸인걸 실감하지 못한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포도원에 종종 놀러오신 분들도 계실 것이고 다니러 오신 분도 계실 것이고 탐색하러 오신 분도 계시겠죠? 또한 오늘처럼 정식으로 포도원집 사람들의 초청을 받고 VIP로 오신 분들도 계십니다. 아무튼 오셨으니 여러분 모두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도 만나시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님도 만나시고 그리고 그분의 양아들 양딸인 우리들과 사귀셔서 명선포도원과 친해졌으면 합니다.

한 열흘 전 우리교회 어느 집사님의 올케되신 분이 저를 방문했었습니다. 그 올케는 최근 위암판정을 받고 수술을 했는데 의사들이 수술을 시작했지만 막상 가슴을 열어보고는 수술이 불가능 해서 그냥 닫아버린 모양입니다. 그 말을 듣고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측은했는지 모릅니다. 자매님은 절망속에서 시누이의 권유로 교회로 온 것입니다. 병원에 있던 며칠동안 집사님은 올케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했고 자매님의 마음엔 자신의 생을 하나님께 의탁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날 저는 자매에게 우리가 좀 전에 읽었던 말씀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해 주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몸이 죽고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해 보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영원히 사느냐 영원히 죽느냐는 것이다. 죽어도 다시 사는 길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매님의 포도나무시다. 뿌리시다. 그러므로 이제 그분께 모든 것 내려놓고 그분이 주시는 힘으로 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날 자매님은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모셔 들였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남편과 함께 시골로 요양을 떠났습니다. 자매가 제 방을 나설 때 나는 그녀에게 이스라엘에서 가져온 감람나무로 만든 십자가상을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를 볼 때마다 예수님께서 자매님을 위해 해주신 일을 기억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 포도나무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참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주 ‘나는 oo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진리다’ ‘나는 생명이다’ ‘나는 길이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생명의 물이다’ 역사이래 어느 누구도 스스로에 대해 그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외엔.
사람들은 석가모니를 진리나 인생의 길쯤 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불교의 경전인 ‘나마다경 38-8’에 이런 글이 있다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何時爺蘇來 吾道無油之登也
하시야소래 오도무유지등야
(언젠가 예수 오시면, 내가 깨달은 도는 기름없는 등과 같다)
이처럼 석가모니도 예수님을 기다렸던 사람입니다. 오직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나는 참 포도나무다’(요15:1)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이는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참’, 이는 거짓에 반대되는 의미에서 사용하신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참’이라는 표현이 스물한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세상에는 가짜가 진짜인 것처럼 둔갑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차별화하셔서 포도나무이되 참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살아있는 참 좋은 포도나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통해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려 하신 것입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이 말씀에는 많은 사실들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참포도나무요, 우리를 가지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 자신이 가지인 우리를 생존하게 하는 뿌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나는 너의 뿌리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뿌리이십니다. 나의 뿌리이십니다. 내 인생의 근본이십니다.

우리가 이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뿌리없는 가지는 존재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물론 뿌리에서 짤려진 꽃과 나무가 쓸모 있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장식품으로 사용합니다. 하지만 얼마 못가서 시들고 말라버리고 맙니다. 아름다움과 싱싱함은 잠깐일 뿐 그건 이미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없는 인생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없는 인격, 재산, 명예, 학문, 건강, 부귀영화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린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출세를 못해도 괜찮아요. 공부를 못해도 괜찮아요. 제대로 배우지 못하였어도 괜찮아요. 과거가 어쨌던 상관없습니다. 먼저 예수님께 붙어있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인생의 근본인 이것이 흔들려 버리면 그 인생이 아무리 화려해보여도 그것은 꽃병의 꽃과 같은 인생일 뿐이죠.

그러나 인생이 뿌리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그분의 생명이 내 안에서 내 생명이 되고 그분의 능력이 내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 엄청난 자원이자 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도나무와 가지의 얘기는 잘되고 못되고의 얘기가 아니라 생명에 관한 얘기인 것입니다. 먼저 생명이 있고야 잘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조엘 오스틴이 쓴「잘되는 나」라는 책에 대해서 몇주전 언급한 바 있습니다. 혹 그 책을 보면서 ‘일단 잘되고 보자’ ‘인생에 있어서 잘 되는 것이 장땡이다’고 생각하고 다만 잘되는 요령을 찾으려고 한다면 그건 큰 오산입니다. 낭패를 볼 것입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생명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아무리 성공한다 해도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잘되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하나 물어봅시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잘 되는 것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진짜로 잘되는 것은 예수님과 생명에서 생명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뿌리가 되고 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뿌리가 되시고 나는 예수님의 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저가 내안에 내가 저안에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우선되고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영원히 잘되는 길이요 세상의 모든 잘됨을 의미있고 가치있게 만들어 줍니다. 예수님 믿는 것을 시덥잖게 생각하심.

그리고 영혼이 잘되고 난 사람에겐 하나님께서는 그의 범사를 잘되게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과 생명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주시는 주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님을 인생의 뿌리로 알고 예수님 안에 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죠?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안에 있으면 범사가 잘 됩니다. 원리상 잘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 사용권과 기도사용권을 허락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사람들의 얘기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런 사례는 기독교역사에도 많이 있고 우리교회에도 많이 있습니다. 제가 인도하는 확신반이 이번주면 다 끝납니다. 20주가 넘게 큰 감동속에 보낸 날들이었습니다. 형제자매들이 써낸 간증문을 보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다시 한번 감격들, 예수님 안에서 변화된 삶, 그리고 확신,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평안과 용기와 담대함과 소망등등 간증문을 읽으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소유의 여부를 불문하고 이미 잘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잘 될 사람들입니다. 대대손손 잘될 가문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잘 되려면 일단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잘 되어야 축복을 쏟지 않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잘난체 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겸손합니다. 그리고 내 것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내 노력으로 뼈빠지게 해서 번 것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 공로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잘된 것은 자신이 예수님의 가지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더 잘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나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늘 하나님의 손안에서 겸손하십시오.

여러분, 하나님은 포도원의 주인이시고 예수님은 우리의 참 포도나무시요 나의 뿌리시요 나는 그분의 가지입니다. 결코 이를 잊지 마십시오. 산술로 되는 것 아니다. 우리는 특면한 사람. 그래서 저는 무슨 일을 하기 전에 이 말씀에 근거하여 늘 하나님 앞에서 배짱있는 주장을 합니다. ‘농부이신 아버지, 제 포도나무요 뿌리이신 예수님, 저는 주님의 가지입니다. 제가 이제 이 일을 하려합니다. 알아서 하십시오.’ 설교하러 올라올 때도, 강단에 설 때까지 간구하는 제목은 오직 하나입니다. ‘주님은 저의 포도나무이시며 저는 가지입니다’ 좀 전에도 그렇게 기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