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23:39-40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마27: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질문1.
같은 사건에서 한 누가복음서는 한명만이 비방했다고 하며,
마태복음서는 "강도들"이라며 복수를 사용함으로서 둘다 욕했다고 하는데...이러한 차이점은 어떻게 보아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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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5:1-2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
눅8:26-27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마8:28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하더라
질문2
가다라 지방과 거라시인 지방이 동일 장소인가요
질문3
거라사인 지방에 이르렀을때 귀신들린 사람이 한명인가요 두명인가요
거라사인 지방이라고 하는 마가복음은 1명, 누가복음도 1명이나 마태복음에서의 가다라 지방은 2명이라고 합니다.
만약 거라사인 지방과 가다라 지방의 장소가 다르다면, 두 사건으로 봐야할지...
그러나 거라사인 지방과 가다라 지방이 동일 장소라면, 귀신들린자가 1명인지 2명인지에 대해 궁금합니다.
복음서 뿐만 아니라 구약의 성경이 기록된 목적이 있습니다.
성경의 기록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입니다.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것을 미리 예언하였고
예언의 주인공이 오셨고 그가 거닐고 머무르면서 만난 사람들과의
나눔에 대한것이 복음서입니다.
복음서 역시 바로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세주이며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다시 살아나셨고 부활하셨고
언젠가 다시 오실 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들은 복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이 목적입니다. 누가나 마가나 요한이나 마태가 기록한 것이 예수에 대한 증거입니다.
예수가 누구냐 하는 것을 던지고 그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볼 때 사건의 현장이 어디며 누구이며 남녀는 몇명이며 당시의 풍습은 어떠했으며
날씨는 어땠고 권력자가 누구였으며 라는 세세한 부분은 그닥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것입니다.
그가 무엇 때문에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형으로 고통을 받으며 죽어야 했는가...
나와 예수는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하여 복음서와 씨름하고 있는가...
나는 왜 사는가
등등의 문제들이 전부가 복음에 대한 문제이고 이 복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초기 사도들이 성령의 권능으로 전한 복음이 이것이었습니다.
예수 그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으며 그를 힘입어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의 이름으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
그의 십자가의 흘린 피로 죄 싯음을 받는다는것을 믿으면...
믿는자에게 죄 사함이 주어지며 성령이 선물로 주어진다는 것을 전하였습니다.
아주 간단한 복음입니다. 이 복음이 예수 이름안에 들어 있습니다.
진리이며 길이며 생명이라고 스스로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올 수도 없다고 합니다.
또한 누구든지 아버지께서 내게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올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럼으로 구원은 은혜이며 선물이라고 합니다.
복음서를 통해서 믿는자들이 확인하는 것이라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이며
그의 십자가의 흘린 피로 우리의 주홍같은 죄들이 씻겨지고 희고 깨끗하여 저서
하나님앞에 자녀로서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도 산 길을
열어 주셨다는 놀라운 복음을 듣고 믿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 구원은 우리가 무엇을 행하고 못하고 이전에 이미 주어진 사건입니다.
바울사도는 이것을 로마서 5장에 서술하였습니다.
우리가 아직 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때를 맞추어서,
경건하지 못한 사람을 위하여 이미 죽으셨습니다.
의로운 사람을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선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감히 죽을 사람은 드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으로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었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로 있을 때에도 그분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에 와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롬5:6-11) 놀랍지 않습니까?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서는 바로 복음의 실체이신 예수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구원에 대하여 우리의 어떤 것도 포함 시키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의로움 따위도 없고 이미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다 해결하셨다는 소식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기 전에 좀더 나아가서 몰랐거나 믿지 못한다고 아우성을 치거나와 전혀 상관 없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속죄제물로써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거부하거나 말거나 이미 십자가에서 이루셨습니다. 이것을 알고 받아 누리는 삶의 시기와 때가 다른것일 뿐입니다. 먼저 알고 받아 누렸던 이들이 그들의 삶을 통해서 나누고 전파한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서를 통해서 우리가 확인 해야할 것은 복음의 진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부지런히 복음의 진리 대로 행하는것입니다. 성령을 힘입어서 그의 능력을 통해서 말씀을 먹고 생명의 복음을 나누는 삶... 그것을 위하여 우리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구원이라 합니다. 복음서는 우리에게 구원자 예수의 삶을 전하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를 읽으면서 우리가 무엇을 확인해야 할까요? 부족한 저의 소견을 나누면서 이만... 2009/08/19.ⓒ사랑그리고편지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파란혜성님 안녕하신지요^^
어째 분위기가 금방이라도 내어 쫒는 분위기 같습니다~
게시판에서 물의를 일으켰다고 보는 것은 님의 자유이지만...
그렇게 속단하고 단정하는 것은 좀 과하지 않을까요^^
서로의 성숙되지 못한 몰 이해와 배려적인 측면에서의 부적절한 처사라고 봅니다.
물론 제가 사실 토론에 전혀 성숙함도 없고 경험도 없어서 여러분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것은 인정하지요~
그렇다해도 저에 대한 선입견이 상당히 부정적이신가 보군요...
사실 가입신고를 하려다가 망설인 것입니다.
혹시 또 쫒겨 날가 싶기도 하고 ~ 지은 죄도 있고 해서 말이지요^^
조용히 눈팅이나 하려고 한것이지 몰래 숨어서 엿보려고 한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런 의도였다면 제가 닉을 왜 다른것으로 하지 않았을가요?
솔직히 닥터케이님과는 네이버 카페에서 회원으로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숨기지 않은것이고 그렇기에 금방 케이님이 저를 알아본 것이랍니다.
원하신다면 사랑채에 신고를 하지요^^
복음서는 구전으로 전해지던 내용을 여러 사람들이 여러개의 단편적인 문서들로 정리한 것을 다시 편집하여 최종본으로 완성한 것입니다. 그 편집의 과정에서 저자의 (혹은 저자가 속한 그룹의) 신학적 시각이 개입하여 개별 사건들을 재해석하는 과정이 추가되기도 하므로 네개의 복음서는 같은 사건을 두고도 평가하는 시각이 조금씩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언급하신 십자가상의 강도이야기나 거라사인 귀신들린자의 이야기에서 세부적으로 인원수가 차이가 나는 것은 첫째는 전승의 과정에서 조금씩 세부적인 차이가 있어서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으며, 둘째는 필사본을 작성하는 과정에서의 오류로 인해 그런 것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복음서들 사이에는 동일한 사건을 두고도 이러한 세부적인 차이가 나는 경우를 종종 관찰하게 되는데, 이러한 것들도 모두 전승 및 편집의 과정에서의 차이점이거나, 혹은 필사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일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여기서 저의 사적인 견해를 말씀드리자면,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극한의 외로운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두명의 강도가 모두 욕한것으로 묘사하였고, 누가복음에서는 회개하는 자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푸시는 구원자 예수의 모습을 부각하기 위해 회개하는 강도를 삽입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 물론, 이것이 최종적 견해는 아니며, 다른 해석도 가능합니다.) 거라사의 귀신들린 사람의 문제는 두 복음서가 같은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전승자료 (한 자료는 거라사의 귀신들린자 1인, 다른 자료는 가다라의 귀신들린자 2인) 를 참고하여 복음서를 완성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소나 인원수의 문제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습니다. 핵심사항은 더러운 귀신들도 예수의 말씀의 권위앞에 힘을 쓰지 못했다는 것이니까요.
어쨌든, 이러한 세부적인 문제에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의 주 목적은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역사속에서 일어난 사건들 가운데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활동을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서간에 약간의 서술의 차이가 있다고 해서 성경의 권위가 무너지는 것은 아니며, 이러한 것들은 그야말로 지엽적인 문제에 불과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