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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509
정목사님!
한가위 잘 보내셨나요?
판넨베르그의 신학에 대한 아티클을 읽다가 좀 궁금한 게 있어서 질문해 봅니다.
판넨베르그에 의하면 (보편)역사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라고 했더군요.
제게는 판 할아버지의 주장에 고개가 끄떡여지더군요.
기존 신학자들과는 식학적 지평이 완전히 다른 새로운 관점에서 통찰력을 던져주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가지 의문은 판넨베르그의 주장대로, 보편역사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라면 굳이 신앙이 필요할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위의 주장대로라면 제가 보기에는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는데 신앙보다는 이성이 더 요구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리고 그런 신학이론을 인정하더라도, 역사 또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그것을 하나님의 계시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시대가 지금까지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보편사가 하나님의 계시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20세기에 판넨베르그를 태어나게 했는지.......
또 한 가지는, 판넨베르그가 예수의 부활사건을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했다면 자신이 역사적으로나 성서 속에서 객관적인 단서를 발견했는지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성만으로 복음서를 들여다보면 오히려 예수부활은 신화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런데도 예수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인다는게 이성적으로 납득이 잘 안 가서요. 판넨베르그에 있어서 예수부활이 어떻게 보편적인 역사가 될 수 있는지 판넨베르그를 전공하신 정목사님께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한가위 잘 보내셨나요?
판넨베르그의 신학에 대한 아티클을 읽다가 좀 궁금한 게 있어서 질문해 봅니다.
판넨베르그에 의하면 (보편)역사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라고 했더군요.
제게는 판 할아버지의 주장에 고개가 끄떡여지더군요.
기존 신학자들과는 식학적 지평이 완전히 다른 새로운 관점에서 통찰력을 던져주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가지 의문은 판넨베르그의 주장대로, 보편역사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라면 굳이 신앙이 필요할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위의 주장대로라면 제가 보기에는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는데 신앙보다는 이성이 더 요구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리고 그런 신학이론을 인정하더라도, 역사 또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그것을 하나님의 계시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시대가 지금까지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보편사가 하나님의 계시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20세기에 판넨베르그를 태어나게 했는지.......
또 한 가지는, 판넨베르그가 예수의 부활사건을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했다면 자신이 역사적으로나 성서 속에서 객관적인 단서를 발견했는지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성만으로 복음서를 들여다보면 오히려 예수부활은 신화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런데도 예수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인다는게 이성적으로 납득이 잘 안 가서요. 판넨베르그에 있어서 예수부활이 어떻게 보편적인 역사가 될 수 있는지 판넨베르그를 전공하신 정목사님께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2007.09.29 12:14:41
저는 판넨베르그의 역사개념을 히스토리로 이해했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계시를 역사로 보는 것과 역사를 계시로 본다는 그 차이를 제가 구분하지 못 했군요.
그렇지만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이 선취의 방식 운운이나
계시가 역사의 마지막에 온전히 드러난다는 주장은
모든 신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내용이 아닌지요?
그렇다면 판넨베르그에게 있어서 성서 보도 역시 절대적이라기 보다 잠정적이란 뜻인가요?
계시를 역사로 보는 것과 역사를 계시로 본다는 그 차이를 제가 구분하지 못 했군요.
그렇지만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이 선취의 방식 운운이나
계시가 역사의 마지막에 온전히 드러난다는 주장은
모든 신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내용이 아닌지요?
그렇다면 판넨베르그에게 있어서 성서 보도 역시 절대적이라기 보다 잠정적이란 뜻인가요?
2007.09.29 12:53:59
아이고 정교승님.. 판넨베르크와 헤겔의 역사이해를 개략적으로 설명을 부탁하시다니요..
거진 논문을 하나 쓰라시는 말씀 같네요 ㅡ.ㅡ;;
제가 그럴 깜냥이 있지도 않고.. 또 간략히 쓴다고 이해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라고 사료됩니다.
앞서 정목사님이 소개한 <말씀신학과 역사신학>을 정독하시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거진 논문을 하나 쓰라시는 말씀 같네요 ㅡ.ㅡ;;
제가 그럴 깜냥이 있지도 않고.. 또 간략히 쓴다고 이해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라고 사료됩니다.
앞서 정목사님이 소개한 <말씀신학과 역사신학>을 정독하시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2007.09.29 15:51:19
어떤 한 신학자의 사상을 한 두 마디로 재단하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어거스틴, 안셀름, 아퀴나스, 루터, 칼빈, 바르트, 판넨베르크 같은
신학의 대가들의 경우는 더 그렇습니다.
판넨베르크의 신학적 착상이 헤겔의 역사철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이길용 박사의 말처럼 "헤겔의 것을 빼다 박은 것 같다."고 하면
아마 판 할아버지가 서운해 하실 겁니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전혀 없을 수도 있지만
작은 차기가 결정적으로 다른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요.
헤겔과 판넨베르크의 결정적인 차이는 이렇습니다.
헤겔의 역사는 결정론적이라고 한다면
판넨베르크의 역사는 열려 있는 것이지요.
헤겔에게는 이미 역사가 그런 길을 갈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칼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헤겔의 역사철학에서 나오게 되는 거지요.
그러나 판넨베르크의 역시 개념은 묵시적이고 종말론적입니다.
그 역사는 그 어떤 프로그램이나 표상 안으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 역사는 헤겔의 변증법적 발전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미래의 힘이 현재로 개입되는 겁니다.
어쨌든지 헤겔이나 판넨베르크에게나 역사는 키워드임에 틀림없습니다.
김한국 님의 질문 중에서
판 할아버지의 몇몇 신학착상이 기존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는 게 있군요.
모든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로
한 신학자가 모든 세부적인 항목까지 완전히 새로운 걸 말하지 않습니다.
소위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물리세계도 역시
앞서 있었던 물리적 사실들을 모두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되 앞서의 논리들을 그 바탕에 놓습니다.
바르트가 자유주의 신학을 완전히 뒤짚었지만
모든 걸 다르게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는 자유주의 신학의 모든 신학방법론을 그대로 따릅니다.
그래서 한국의 보수주의자들로부터 자유주의신학이라고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르트는 인간의 가능성으로부터 하나님의 가능성으로
신학의 중심축을 바꿨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신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판넨베르크도 역시 바르트의 말씀실증주의로부터
역사(Geschichte)로 신학의 중심축을 이동시켰다는 점에서
독일어를 쓰는 신학계에서 가장 독창적인 신학자이지요.
"역사는 신학의 가장 포괄적인 지평"이라는 명제로
1960대 초에 혜성처럼 나타난 신학자입니다.
판 선생의 성서이해는 김한국 님의 지적과 비슷합니다.
성서는 계시 자체가 아니라
계시를 지시하는 손가락이지요.
좋은 주말.
특히 어거스틴, 안셀름, 아퀴나스, 루터, 칼빈, 바르트, 판넨베르크 같은
신학의 대가들의 경우는 더 그렇습니다.
판넨베르크의 신학적 착상이 헤겔의 역사철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이길용 박사의 말처럼 "헤겔의 것을 빼다 박은 것 같다."고 하면
아마 판 할아버지가 서운해 하실 겁니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전혀 없을 수도 있지만
작은 차기가 결정적으로 다른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요.
헤겔과 판넨베르크의 결정적인 차이는 이렇습니다.
헤겔의 역사는 결정론적이라고 한다면
판넨베르크의 역사는 열려 있는 것이지요.
헤겔에게는 이미 역사가 그런 길을 갈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칼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헤겔의 역사철학에서 나오게 되는 거지요.
그러나 판넨베르크의 역시 개념은 묵시적이고 종말론적입니다.
그 역사는 그 어떤 프로그램이나 표상 안으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 역사는 헤겔의 변증법적 발전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미래의 힘이 현재로 개입되는 겁니다.
어쨌든지 헤겔이나 판넨베르크에게나 역사는 키워드임에 틀림없습니다.
김한국 님의 질문 중에서
판 할아버지의 몇몇 신학착상이 기존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는 게 있군요.
모든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로
한 신학자가 모든 세부적인 항목까지 완전히 새로운 걸 말하지 않습니다.
소위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물리세계도 역시
앞서 있었던 물리적 사실들을 모두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되 앞서의 논리들을 그 바탕에 놓습니다.
바르트가 자유주의 신학을 완전히 뒤짚었지만
모든 걸 다르게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는 자유주의 신학의 모든 신학방법론을 그대로 따릅니다.
그래서 한국의 보수주의자들로부터 자유주의신학이라고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르트는 인간의 가능성으로부터 하나님의 가능성으로
신학의 중심축을 바꿨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신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판넨베르크도 역시 바르트의 말씀실증주의로부터
역사(Geschichte)로 신학의 중심축을 이동시켰다는 점에서
독일어를 쓰는 신학계에서 가장 독창적인 신학자이지요.
"역사는 신학의 가장 포괄적인 지평"이라는 명제로
1960대 초에 혜성처럼 나타난 신학자입니다.
판 선생의 성서이해는 김한국 님의 지적과 비슷합니다.
성서는 계시 자체가 아니라
계시를 지시하는 손가락이지요.
좋은 주말.
2007.09.29 17:28:58
헤겔의 역사발전의 종국에는 세계정신의 발현, 즉 역사과정을 신(God)의 의지의 과정으로 보는 것 아닐까요?
[정신현상학]의 치밀한 서론, 본론 이후의
신(God)중심의 결론을 보고 왜 헤겔을 관념론자라고 하는지 이해가 되더라고요.
헤겔이야말로 기독교적 학자인데,
헤겔의 신(God)본위의 기본적 세계관과 전체모습이
맑스와의 연결관계때문에 헤겔좌파(헤겔우파는 잊혀진)의 관점으로 자주 언급되어진다는 생각이 살짝 드네요.
맑스가 헤겔에게서 빌어온 것은 개념의 치밀성(과학성)과 변증법정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정신현상학]의 치밀한 서론, 본론 이후의
신(God)중심의 결론을 보고 왜 헤겔을 관념론자라고 하는지 이해가 되더라고요.
헤겔이야말로 기독교적 학자인데,
헤겔의 신(God)본위의 기본적 세계관과 전체모습이
맑스와의 연결관계때문에 헤겔좌파(헤겔우파는 잊혀진)의 관점으로 자주 언급되어진다는 생각이 살짝 드네요.
맑스가 헤겔에게서 빌어온 것은 개념의 치밀성(과학성)과 변증법정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2007.09.29 20:37:35
초신자님 말씀처럼 헤겔은 숨겨진 신학자라고 볼 수 있겠죠.
판넨베르크의 열린 역사관에 비해 헤겔의 역사관은 결정론적이라 볼 수는 있겠지만
그 초점이 어디냐에 따라 해석은 달라질 수 있을 겁니다.
범재신론적 속성이 강한 헤겔의 입장에서는
절대정신에 초점을 두고 있기에 역사는 그의 완성을 향한 결정론적인 움직임이 되겠지요.
헤겔이 말하는 변증법이란 존재의, 즉 절대정신의 존재하는 스타일을 말합니다.
자기 안에 모순적 내용을 포함한 존재의 방식..
내 안에 있는 낯선 나.. 이것이 정신의 존재하는 스타일로 읽은 것이죠.
그리고 그것이 계속해서 완전한 실현을 위해 진행되는 과정을 역사로 본 것이겠구요.
그런 점에서 헤겔의 철학은 지극히 유대적이고 신학적이라고 봐야 할 겁니다.
이성의 한계를 현상계로 묶어버린 칸트의 설정을 헤겔은 그런 식으로 극복하길 원했겠죠.
그러다보니 이성적 존재의 한계를 무너뜨려야 했고
그러면서도 현상계를 끌어안아야 하는 이중고를
절대정신의 자기 실현과정을 역사로 보면서 해결하기 원했겠죠.
그런 점에서 역사를 절대정신의 자기 실현과정으로 해석한 헤겔이 오히려 더 신학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헤겔의 절대정신이 그리스도교의 신과 일치하느냐 는 또다른 문제겠지요.
여하튼 그의 작업이 그리스도교적이냐 아니냐를 떠나
사유의 진행방법이 충분히 신학적으로 보인다고 할 수 있겠죠.
판넨베르크의 열린 역사관에 비해 헤겔의 역사관은 결정론적이라 볼 수는 있겠지만
그 초점이 어디냐에 따라 해석은 달라질 수 있을 겁니다.
범재신론적 속성이 강한 헤겔의 입장에서는
절대정신에 초점을 두고 있기에 역사는 그의 완성을 향한 결정론적인 움직임이 되겠지요.
헤겔이 말하는 변증법이란 존재의, 즉 절대정신의 존재하는 스타일을 말합니다.
자기 안에 모순적 내용을 포함한 존재의 방식..
내 안에 있는 낯선 나.. 이것이 정신의 존재하는 스타일로 읽은 것이죠.
그리고 그것이 계속해서 완전한 실현을 위해 진행되는 과정을 역사로 본 것이겠구요.
그런 점에서 헤겔의 철학은 지극히 유대적이고 신학적이라고 봐야 할 겁니다.
이성의 한계를 현상계로 묶어버린 칸트의 설정을 헤겔은 그런 식으로 극복하길 원했겠죠.
그러다보니 이성적 존재의 한계를 무너뜨려야 했고
그러면서도 현상계를 끌어안아야 하는 이중고를
절대정신의 자기 실현과정을 역사로 보면서 해결하기 원했겠죠.
그런 점에서 역사를 절대정신의 자기 실현과정으로 해석한 헤겔이 오히려 더 신학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헤겔의 절대정신이 그리스도교의 신과 일치하느냐 는 또다른 문제겠지요.
여하튼 그의 작업이 그리스도교적이냐 아니냐를 떠나
사유의 진행방법이 충분히 신학적으로 보인다고 할 수 있겠죠.
판넨베르크 신학에 관심을 보여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보편)역사가 하나님의 계시라는 말을
단순히 실증적인 역사와 계시의 일치로 보면 안 됩니다.
여기서 판 씨의 신학 전체를 말하기는 힘들구요,
관심이 있으면 졸저 <말씀신학과 역사신학>(한국신학연구소)를 보세요.
간단히 설명하면,
판 씨가 말하는 역사는 계시를 설명하고 있는 신학개념이에요.
계시를 역사로 보는 거지요.
그 역사는 하나의 종말론적인 보편 역사입니다.
오늘의 실증적 역사 사건을 잘 들여다본다고 해서
계시가 그대로 드러나는 건 아니지요.
그 계시는 역사의 마지막에 온전히 드러납니다.
그 과정이 곧 계시에요.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말을 이해하려면
역사의 실증주의를 벗어나야 합니다.
역사가 아직 종료되지 않았다면
현재의 역사적 사건들도 아직 끝난 게 아니지요.
부활은 역사 전체로 증거되어야 할 역사적 사실이라는 겁니다.
그 전체 역사의 실질을 이해하려면
역시 종말이 와야겠지요.
그 종말이 오기 전에 우리는 선취의 방식으로
역사 안에서 발생한 예수의 부활을 대하고 있습니다.
다시,
예수의 부활은 역사의 시작과 끝을 통시적으로 보는 보편사의 차원에서
역사적 사실이라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