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 해설이나 다른 글들을 보면 베드로전서 3,4장을 사후구원론의 논거로 활용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바로는 사후구원론의 근거로는 활용되기 어렵다는 입장이라서 제대로 된 사후구원론의 근거를 알고 싶습니다.
아직까지 제가 읽어본 내용들중에는 (제가 싫어하는) 구절주의적 해석론 방법밖에 없었거든요.

물론 구원은 하나님의 몫이고 우리는 그 구원에 대해서 잘 모른다가 맞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근거로 위의 구절이 쓰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아니라면 그 이유가 알고 싶습니다.




참고로 제 생각은

베드로전서 3장 8절 ~ 4장 6절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위의 구절은 마틴 루터가 가장 해석하기 어려워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표현한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를 포함한 구절입니다. 역시 해석하기가 쉽지 않은 본문입니다. 
 
위의 구절은 카톨릭과 일부 개신교에서 제 2의 구원의 기회를 이야기하기 위해 인용되는 구절입니다. 물론 구원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기에 우리가 그 전부를 알지 못합니다. 그저 우리는 성경을 통해 계시된 정도까지만 이해할 뿐입니다.
 
 
1. 베드로전서의 시대적 배경 및 저술목적
베드로전서는 사도 베드로에 의해 쓰여졌다고 합니다. (벧전1:1) 성경비평쪽에서는 사도 베드로의 이름을 빌어 베드로의 사상을 대변하는 베드로 공동체에서 쓰여진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만 중요한 것은 그 시대에 예수를 믿음으로 박해받는 공동체에게 고난을 견디는 힘을 주기위해 쓰여졌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받는 성도들이여, 비록 너희가 육체적으로 고난을 받지만 결국 영적으로 승리할 것이다. 그러니 그 고난을 견디고, 삶으로 승화시키라는 것이 베드로전서의 저술 목적입니다.
 
 
2. 벧전 4:6의 해석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이 구절을 이해하는 것이 앞의 구절을 이해하기 편하므로 순서를 바꾸어보겠습니다. 여기서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표현이 사후 제2의 기회가 있다고 오해를 하게 만드는 구절입니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 죽은 자들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자들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전서가 쓰여질 당시에 헬라 사상에는 죽어버리면 구원을 못 받는 그런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다가도 죽어버리면 구원이 없다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나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다. 비록 육체적으로는 죽을지라도 구원자이신 예수를 통해 영으로 살아서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선포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비슷한 내용의 권면을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8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마찬가지로 데살로니가 교회에도 죽으면 구원이 없다는 그런 헬라사상이 퍼져 있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영과 관련된 문제에서 영의 존재를 부정하는 경향이 강했죠. 그래서 육체적 죽음은 곧 끝을 의미하기에 이미 죽은 자들에 대해서 구원을 못 받는다고 생각하고 슬퍼했고, 이에대해 그렇게 슬퍼할 일이 아니라고 권면한 내용입니다.
 
다시 베드로전서의 내용으로 돌아가서 보면 4장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너희가 당하는 것처럼) 육체적 고난을 당하셨으니라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내용은 그리스도를 따라 죄를 멀리하는 것에 대해서 방탕한 세상 사람들이 자신과 다름으로 인해 비방을 하고 박해를 할 것이지만 결국 심판의 시기에 그에 대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이 심판을 피하기 위하여) (주 예수를 믿음으로 인해)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이미)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구원) 하려 함이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구절을 죽은 모든 이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본다면 본문의 흐름을 완전히 무시하는 해석이 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고난 받는 형제들아 너희를 비방하는 무리들은 심판의 때에 그에 합당하게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런 심판을 위해 믿지 않고 죽은 모든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파될테니 고난을 받은 자든, 박해를 한 자든 다 구원을 받을거야라고 말 한다면 위로가 될까요?
 
또한 죽은자들에 대해서 이어지는 내용에서 죽은자란 사람으로 심판을 받은 자라고 한정하여 이야기 하고 있는데 이 표현에 의해서도 죽은 자들은 모든 사람으로 범위를 확장시킬 수 없습니다.

 
3. 벧전 3장 19절의 해석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참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 본문내용입니다. 그렇지만 구절만이 아닌 전체를 읽으면 어느정도 해결이 가능한 본문이기도 합니다.
이 구절은 크게 세가지 해석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사후 제 2의 기회가 있다는 해석이 있고, 하나는 예수님께서 노아의 방주 시대에도 노아를 통해서 심판을 선포하셨다는 해석이 있고, 하나는 예수님께서 부활 전에 영적 상태에서 주님의 주님 되심을 선포하셨다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저도 잘 모를때에 마지막의 선포하심으로 생각했으나 이제는 노아를 통해서 심판을 선포하셨다는 것으로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라는 본문을 해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 된 시점이 그들이 죽기 전의 상태였고 그들이 고난을 받다가 죽은 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즉 (현재시점의) 죽은 자들에게도 (과거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라는 문법구조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구절도 마찬가지로 생각하면 의외로 난제가 쉽게 풀립니다. (현재 시점의) 옥에 있는 영들에게 (과거에-그들이 물로 심판을 받기전 살아있을 때에) 영으로 가서 복음을 선포하셨다는 의미입니다.
 
한동안 왜 이 구절에 뜬금없이 ‘또한’이라는 표현이 등장할까에 대해서 궁금해 했었습니다. 앞의 구절과 시간적으로 이어진다면 영으로 살리심을 받은 시점에서 그냥 이어져야지 또한이라는 표현이 붙는 것은 어색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위의 해석처럼 시간의 흐름이 아닌 다른 사건의 소개로 이어지는 것이기에 ‘또한’이라는 표현이 붙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본문에 소개한 내용은 3장 8절에서부터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선을 행하여 고난을 받으나 너희가 영적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니 참고 견디라는 이야기입니다. 베드로전서의 모든 내용이 고난을 받더라도 참고 견디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육체적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영적구원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내용입니다.
 
17절 이하에서 보면 예수께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고 육체적으로 죽음을 당하나 영적으로 살리심을 당하니라고 표현되어 있고,
 
18절에서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라고 하십니다.
                                                                  
19절에서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고 이어집니다. 즉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육체적 죽음까지 당하신 예수님이, 또한 이전의 사건에서도 (노아의 방주라는 복음 선포 사건에 대해서 무시하고 그 결과로 심판받은 사람들에게도) 영으로 노아의 방주 사건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는 겁니다. 굳이 이런 이야기까지 쓴 이유는 육체적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끝이 아닌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만약 이 구절이 사후 제2의 구원설의 근거가 되려면 몇 가지를 넘어야 합니다.
 
첫째로 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고난을 받는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내용의 편지에 사후에도 구원이 있다고 썼을까요? 이것을 돌려 말하면 너희 지금 고난을 받는 거 잘 안다. 이후 심판의 날에 너희를 박해한 사람들도 다 같이 구원을 받을테니 그 고난을 잘 견뎌라라는 소리입니다. 고난을 견디라고 권면하는 편지에 너의 친형제를 때려 죽인 사람도 구원받을거야. 그러면 그 고난은 과연 견딜만한 가치가 있는 고난일까요?
 
둘째로 선포의 대상이 단순히 옥에 있는 영들이라면 노아의 방주 때 죽은 영들만 선포의 대상이 되고, 나머지는 선포의 대상이 아닐텐데 어떻게 전체에 대한 선포로 확신 할 수 있느냐의 문제도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분명히 노아의 시대에 죽은 사람들의 영이라고 범위를 한정시켜 놓았는데 우리가 그 범위를 인위적으로 확장시키면 안되는 거죠.
 
셋째로 벧전4장 4~6만 봐도 살아서 비방한 자들의 심판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데(육체적 삶의 댓가로 인한 심판) 영적 상태에서의 제2의 기회라는 것은 따로 이야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넷째로 사후 제2의 기회가 있다면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교리이므로 성경 전체에 걸쳐서 여러번 나와야 됩니다.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도 공관복음서에서 반밖에(2권) 안 나왔다는 이유로 주요한 교리적 사항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견해를 취하는 입장이라면 벧전에서 잠깐 나온 것이라면 정말 주요한 교리가 아니라고 봐야겠죠. 하지만 사후 구원설은 너무 중요한 교리가 아닌가요?
 
다섯째로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 등 사후 기회를 제한하는 내용을 우리는 성경에서 쉽게 찾아 볼수 있는데 이런 내용들과 배치되는 단 하나의 구절이라면 해석이 제대로 된 것인가를 검토하는게 맞을 듯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