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기행(23)                  
베를린 운하

대구에 낙동강이 흐르고, 서울을 한강이 관통하듯이 유럽의 모든 대도시들도 아름다운 강을 끼고 있다. 노트르담 성당을 가운데 두고 물길이 양쪽으로 갈라졌다가 다시 합쳐져 흐르는 파리의 세느강은 대도시의 강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운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베를린에는 파리의 세느강처럼 그 도시를 대표할만한 강은 없지만 자연의 선물인 슈프레강(江)과 베를린 사람들이 만든 카날(운하)이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베를린 전 지역을 흡사 거미줄처럼 휘감고 도는 슈프레와 운하, 그리고 크고 작은 호수는 베를린을 물의 도시로서 손색이 없게 한다. 베를린에 호수와 운하가 그렇게 많은 첫째 이유는 그것이 낮은 평야 지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독일의 북동쪽에 자리잡은 베를린은 아무리 주위를 살펴봐도 산 하나 없는, 그야말로 밋밋한 평야뿐이다. 어떻게 보면 단조로울 것 같지만 베를린 사람들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자기들의 땅을 참으로 보기 좋게 만들었다. 도시 곳곳에 숲과 공원, 그리고 호수, 슈프레강과 운하, 그리고 고도(古都)의 멋을 맛볼 수 있는 역사적 건물들이 적재적소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 중에서도 운하는 베를린의 혈관처럼 4백만 명이 사는 대도시에 생명을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전해들은 바로는 베를린 운하의 길이가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의 그것보다 길다고 한다.

우리 가족이 일년 동안 살았던 알트모아빗 야곱가(街) 가까운 곳에도 운하가 좌우로 뚫려 있었다. 봄에서 여름까지 매일 출근하다시피 한 티어가르텐 공원에 갈 때나 가을철에 접어들어 국립 도서관에 갈 때 늘 운하를 지났고, 간혹 가족과 함께 운하를 따라 난 산책로를 걷기도 했다. 혼자 걸어서 티어가르텐을 다녀올 때 나는 종종 운하를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서 그 운하 위로 벌어지는 풍경을 잠시 바라보곤 했다. 작은 파도를 일으키며 그렇게 빠르지 않은 속도로 조용하게 물길이 흘러가고 있었는데, 운이 좋을 때는 황혼을 배경으로 운하와 높지 않은 빌딩과 연립형 주택, 그리고 운하 양쪽으로 늘어선 나무가 어울려 만드는 한 폭의 그림을 볼 수 있었다. 그런 순간이 나에게는 바로 시간이 멈추는 시간이었다.  

운하의 넓이는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대략 6,70m 정도로 보였는데, 사시사철 수량은 늘 넉넉했다.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마르는 법이 없는 운하 덕분으로 베를린 공원과 숲은 늘 넉넉하게 물을 공급받는다. 약간 날이 덥거나 어쩌다가 비가 적게 내리기라도 하면 운하에서 연결된 스프링클러가 시원스레 작동한다. 운하 양쪽으로는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고, 그 밑에 산책로가 있고, 그 뒤로 자동차 도로가 있다. 물새들의 비상은 자유의 절정을 보여주고, 작은 요트들이 바람을 받으며 미끄럼을 탄다. 주로 실직자들이나 은퇴자들로 보이는 사람들은 거기서 낚시도 한다. 고기를 낚는지 세월을 낚는지 모르겠지만. 물론 운하의 산책로를 따라 조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운하의 풍경을 감상하던 그 다리 밑에는 유람선 선착장이 있었다. 그런데 이 선착장은 관광객이 많이 모이는 한 여름만 잠시 개장하고 나머지는 거의 닫혀진 상태였다. 베를린에는 여기 말고도 여러 곳에 이런 유람선 선착장이 있는데, 관광객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상당히 긴 기간동안 유람선을 운행하는 모양인데 이곳은 사정이 그렇지 못했다. 그래도 오가는 길에 몇 번 손님을 가득 태운 유람선이 그곳에서 출발하는 장면을 보았다. 실내에도 손님들이 있기는 하겠지만 대부분의 손님들은 선실 옥상에 마련된 바깥 자리에 앉아서 시원한 맥주나 음료수를 마시면서 운하에서 바라보는 베를린의 풍경을 즐기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우리 가족은 베를린에서 유람선을 타지 못했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운행 기간을 놓치고 만 것이다.

운하를 감상하는 방법은 다리 위에서 전체적인 분위기를 내려다보는 것도 괜찮기는 하지만 아예 밑으로 내려가서 벤치에 앉거나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가까이 대하는 게 훨씬 낫다. 바로 발 밑으로 흐르는 운하의 섬세한 변화와 물소리를 생생하게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넉넉할 때는 책을 읽거나 커피를 마시면서 그 앞으로 미끄러지듯 흘러가는 요트를 무상의 심정으로 바라볼 수도 있고, 그러다가 잠이 오면 책을 베개삼아 잠시 눈을 붙여도 누가 뭐랄 사람은 없다. 다만 이런 조용한 곳을 좋아하는 알콜 중독자들 때문에 약간 성가신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거의 없으니까 그렇게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기왕에 말이 나온 김이 한 마디 보탠다면 이곳 사람들은 운하의 벤치나 공원의 잔디에 나가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카세트 라디오를 틀어놓고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춤을 추는 일도 없고, 기타를 두드리는 사람들도 없다. 알콜 중독자들도 시끄럽게 고성 방가하는 일은 절대 없다. 도시의 구석진 곳에서 아무에게도 방해가 되지 않게 자기들끼리 모여서 맥주나 홀짝거리는 수준이다. 전체적으로 도시가 조용하다고 보면 된다.

아제 서울에서도 청계천 복원 공사가 한창이라고 한다. 여러 문제가 불거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서울의 한복판에 맑은 물이 흐를 수 있도록, 그리고 시민들이 접근하기 쉽도록 바꾸겠다니 잘한 일이다. 대구의 신천도 많이 다듬어지고 있는 것 같다. 사람이 사는 곳을 자연 그대로 놓아두지 못할 바에야 가능한 최선으로 인간다운 도시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런 시도 중의 하나가 강과 하천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이 아닐까? <정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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