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기행(25)                



정확하게는 모르겠으니 대략 4백만 명 정도가 살고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베를린이라는 도시의 특징은 산이나 구릉조차 없는 완전 밋밋한 평야로 되어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지난 호에 소개한 운하, 공원, 숲, 호수가 많다는 것이다. 베를린 시내와 근교의 공원과 숲은 남부 독일의 쉬바르트발트(검은 숲) 못지 않은 풍광이어서 베를린이 독일에서 가장 큰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중심가를 제외하고는 한적한 시골 분위기를 풍긴다. 많은 공원 중에서도 베를린 브리쩌 공원은 꽃으로 유명하다. 우리 식구가 백림 교회 성기상 목사님과 함께 그곳을 방문하고 찍은 사진의 날짜를 확인해보니까 2000년 4월27일자로 새겨져 있는데, 내가 모르는 수많은 꽃들이 한창인 걸 보면 이미 4월 초순부터 꽃이 피기 시작한 것 같다. 주로 빨강, 노랑, 분홍, 보라, 흰색의 화려한 꽃들이 흐드러진 자태를 보이고 있었다. 푸른 잔디와 호수, 엷은 구름과 조화를 이룬 하늘, 여러 종류의 나무, 옛 모습이 보존된 몇몇 건물 등이 거의 완벽한 평화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격년(?)으로 꽃축제를 연다고 한다. 이미 수년 전에 꽃축제 도시로 선정되면 연방국가의 지원으로 그 도시의 한 공원이 이런 꽃축제를 빛낼 수 있도록 꾸며진다. 한번 꽃축제를 거치고 나면 그 공원은 계속해서 그런 특성을 이어가게 되어있기 때문에 모든 도시가 꽃축제 도시로 선정되기를 바란다. 베를린의 이 브리쩌 공원도 수년 전 그런 꽃축제를 거친 덕분에 지금까지 계속해서 베를린 시민들에게 멋진 휴식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꽃밭 중간 중간의 의자에 앉아 담소하거나 짬짬이 졸며 책을 보는 사람들, 꽃밭과 잔디 사이의 산책로를 따라 걷는 사람들, 잔디 위에서 베드민턴을 치는 젊은이들, 그렇게 꽃과 하나가 되어 평화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베를린 시민들이 부러웠다.
베를린 시민들의 꽃 사랑은 그런 공원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크든 작든 거의 모든 슈퍼마켓에는 꽃매장이 따로 마련되어 있을 정도로 그들은 꽃을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심지어 주유소에 딸린 간이 마켓에서도 꽃 꾸러미를 살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들은 꽃을 방안에만 꽃아 두는 게 아니라 집을 꽃으로 꾸민다는 사실이다. 모든 집의 창문에는 화분을 놓아둘 수 있는 받침대가 마련되어 있다. 웬만큼 게으른 사람이 아니라면 아주 추운 겨울철만 제외하고 일년 내도록 창문을 꽃으로 꾸민다. 이런 풍경은 베를린만이 아니라 독일의 거의 모든 지역에 있는 모습이다. 시골의 작은 개인 주택의 창문 밑에도 철따라 여러 모양, 여러 색깔의 꽃들이 빛나고 있다.
그들은 실내와 창문을 꽃으로 꾸밀 뿐만 아니라 앞마당도 역시 그렇게 열심히 꽃으로 꾸민다. 물론 우리도 앞마당에 꽃을 키우지만 우리는 기본적으로 앞마당이 별로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구나 개인 주택의 경우에 대개는 담으로 막혀 있어서 꽃밭을 만들어놓아도 그 집 식구들만의 즐거움일 뿐이다. 그들의 집은 담이란 게 아예 없기 때문에 마당의 꽃은 모든 사람의 즐거움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우리 식구가 살았던 야곱가 13번지도 역시 그랬다. 그 건물은 전형적인 도시의 연립 주택이었는데, 길 쪽으로는 상가 건물이 있고, 큰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5층 짜리 주택이 나온다. 길 쪽의 상가와 그 안쪽의 주택이 디귿 자 모양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디귿자 안 부분이 앞마당이다. 13번지 건물의 앞마당만 계산하면 겨우 4,50 평 정도에 불과하겠지만, 12번지와 13번지 건물의 앞마당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150평 정도는 되어 보인다. 5층의 건물이 디귿 자로 막아섰기 때문에 하루에 잠깐씩만 햇볕이 드는 앞마당이었지만 1층에 사는 어떤 남자가 만들어놓은 꽃밭에서는 4월부터 10월까지 온갖 종류의 꽃이 만발했다. 우리의 개념으로는 귀찮기도 해서 그런 낡은 연립 주택의 작은 마당에 그런 아름다운 꽃밭을 꾸밀 수가 없는데, 그런 일이 베를린의 야곱가 13번지에는 벌어졌다. 그저 세 들어 사는 가난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자기 돈을 들여 꽃밭을 꾸미고 있는 이 쾨니히라는 남자는 무슨 개인적인 사연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무진장 애를 쓰면 꽃밭을 가꾸고 있었다. 그 사람 덕분에 우리 가족은 흡사 반(半)지하처럼 어둠침침한 연립주택에 살면서도 아침저녁 실컷 꽃구경을 하며 지낼 수 있었다.
베를린이 꽃의 도시라는 사실을 위의 이야기로도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지만 훨씬 충격적으로 느낄 수 있는 대목은 다른 데 있다. 베를린의 가로수와 숲의 나무들이 꽃을 피우는 봄과 여름에 베를린 시 전체가 꽃가루, 또는 그 향기로 범벅이 된다는 것이다. 꽃가루와 꽃향기에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들은 이 기간에 병원 신세를 많이 지고, 더 나아가서 잠시 다른 지역으로 몸을 피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이니까 그 심각성을 알만 하다. 그렇지 않아도 시도 때도 없는 베를린 사람들의 코푸는 소리에 깜짝 놀라던 우리는 이 즈음 꽃향기가 그들의 콧구멍을 자극하는 바람에 더 시달렸다. 우리가 밥 먹으면서 내는 쩝쩝거리는 소리나 트림에 대해서는 못들을 소리를 들은 것 같은 태도를 보이는 친구들이 사람 면전에서 천둥소리를 내면 코를 풀어대는 몰상식이라니! 베를린 친구들의 재채기가 심해진 건 내가 알 바 아니고, 늦봄에서 초여름까지 몇 달 동안 베를린 구석구석에, 심지어 우리의 방까지 스며드는 진한 꽃향기로 인해 아찔한 존재의 황홀함을 느꼈다는 것은 이방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대단한 행운이었다. (2004.6.30)

사진설명
본문에도 나오는 브리쩌가르텐입니다. 백림교회 성기상 목사님 내외와 함께 산책에 나섰습니다.
베를린의 특징은 어디를 가나 사람들이 별로 붐비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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