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기행(26)               뮌스터
독일 중서부에 위치하고 있는 뮌스터(Münster)는 내 큰 누님의 장남이 철학 공부를 하고 있던 곳인 탓에 2000년도에 두 세 번 들린 것 같다. 베를린에서 프랑스 파리로 가는 중간 지점이기 때문에 오가는 길에 한번씩 들렸고, 언젠가는 테니스 모임 때문에 혼자서 가기도 했다. 나는 오늘 뮌스터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접어두고 그곳에서 서려있는 내 추억의 몇 장면만 들추어보겠다.  
1983년 9월 초 독일의 쾰른 대학교에서 1년 동안 어학 공부를 마치고 철학부에서 한 한기 강의를 들은 다음 신학부가 있는 뮌스터 대학교로 옮겼다. 쾰른에는 신학부가 없어서 대개 신학생들은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본 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 당시 마부르크 대학교와 뮌스터 대학교의 박사 과정에 어플라이 하고 기다리다가 뮌스터에서 먼저 연락이 오는 바람에 그곳으로 가게 되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박사 과정이라는 게 우리나 미국처럼 일정한 과정을 거치는 제도는 아니고 디서타찌온(학위논문)을 지도해줄 교수의 허락 여부를 말한다. 윤리학 교수인 다암(K.W. Dahm) 박사의 허락을 받고 본격적으로 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서 뮌스터에 왔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손도 대지 못한 채 귀국한 씁쓸한 추억이 그곳에 묻혀 있다.
서른 두 살의 젊은(?) 신학도로서 학위를 받겠다는 야심이 있기는 했지만 학문성이나 그 열정에서 전혀 준비가 없었던 그 시절 뮌스터에는 몇몇 신학생들이 있었다. 현재 대전신학대학교 총장으로 있는 문성모 목사님은 쾰른 대학교에서부터 같이 지냈기 때문에 인연이 깊은 편이다. 한번 연락을 취해야겠다는 생각은 여러 번 했는데 아직 못하고 있다. 그 이외에도 그곳에서 학위를 받고 지금 한국에서 교수로 활동하는 이들이 제법 된다. 그런데 2000년도에도 여전히 뮌스터에 남아 있는 신학생 한 사람이 있었다. 서울신학대학교 후배인 김동욱 전도사님이다. 내가 1996년도에 안식년 휴가 차 뮌스터에 들렸을 때 그는 이미 뇌출혈로 한번 쓰러진 적이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정상을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일상 생활에는 별로 큰 지장을 받지 않았는데, 4년이 지난 2000년에는 내가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건강을 잃은 상태였다. 나는 1996년과 2000년 뮌스터에 갈 때마다 그 식구들과 몇 번 식사를 했다. 그의 집에 초대를 받기도 했고 내가 그 가족을 식당으로 초대하기도 했다. 1985년 남편을 따라 처음 뮌스터에 왔던 그의 부인은 원래 소심하고 새침데기였는데, 남편이 생사를 건 수술을 하는 통에 아주 적극적인 여자로 변해 있었다. 그 집에는 딸만 셋이다. 큰딸이 그 당시에는 장래가 촉망받는 꼬마 소녀였다가 지금은 명실상부 세계적 연주자로 자리를 굳힌 바이올리니스트 ‘수연’이다. 좁은 부부 기숙사에 나를 초대한 김 전도사님은 식사 후에 수연이의 바이올린 연주를 듣고 싶다는 내 청을 받아들여 그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수연이에게 직접 연주를 시켰다. 한 곡은 클래식이고 다른 한 곡은 한국의 민요였다. 곡명은 잊었다. 몇 번에 걸친 그 가족과의 만남에 대해서는 할 말이 좀 있긴 하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자.
김동욱 전도사님은 원래 체격이 좋고 운동도 잘했다. 김 전도사님을 비롯해서 몇 명 유학생들과 함께 내가 살던 ‘파울루스콜렉’(?)이라는 기숙사 마당에서 몇 번 배구를 한 기억이 난다. 파울루스콜렉은 가톨릭 재단에서 운영하는 기숙사지만 학생들의 종교에 상관없이 신청에 따라서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나도 쾰른에 머무는 동안에 뮌스터 대학교에서 입학 허락을 받은 후 기숙사 리스트를 보고 편지로 신청했는데 다행히 방을 잡을 수 있었다. 늘푸른 잔디와 흰색의 건물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그 기숙사에 내가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젊은 시절의 노스텔지어가 듬뿍 묻어있는 곳이었다. 쾰른 음악대학을 졸업한 아내가 먼저 귀국하고 혼자 남은 내가 언제 끝날지 모를 학위 공부에 매달리며 외로움과 투쟁하던 기숙사를 잊을 수는 없다.
기숙사 구조는 ㄴ자를 180도 돌려놓은 형태였다. 그 위쪽으로 또 한 채의 건물에는 사감이 살고 있었다. 그러니까 전체 구조는 ㄷ자를 180도 돌려놓은 모습인데, 그 가운데 공간에는 잔디가 심겨져 있었고 건물 밖으로도 역시 나무와 잔디가 심겨져 있었다. 내가 살던 방은 대략 3평정도의 크기였다. 낮에는 소파로 쓰이지만 밤에는 침대로 쓰이는 겸용 침대가 있었고, 책상은 창문 밑에 좌우로 길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간단하게 손을 씻을 수 있는 세면대가 방안에 있기는 했지만 목욕이나 볼일은 공동 세면장을 사용해야만 했다.
창문을 통해서 내다보이는 밖의 풍경이 흡사 영화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사감의 어린 아들이 잔디 마당에서 노는 모습이며, 간혹 어둠이 짙은 시간에 사감 집의 거실에서 여러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는 모습, 또는 햇빛 찬란한 늦은 아침 잔디에 앉아 아침을 먹는 기숙사 학생들의 모습이 모두 그랬다. 어느 이른 봄날 사감 집 처마 밑의 거미줄에 걸려서 팔락거리는 나비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 고치에서 벗어난 후 첫 비상이었겠지. 저걸 어쩐다? 나는 급히 뛰어나가 거미에게는 미안했지만 나비를 거미줄에서 풀어내 날려보냈다. 그런 내 행동을 자기 방에서 내다본 어느 독일 학생이 창문을 살짝 열고 소리 없이 박수하던 기억이 난다. 이렇듯 30대 초반 잠시 살았던 뮌스터의 파울루스콜렉은 내 인생의 여정에서 외로움과 달콤함이 교차하던 시절이었다.   (2004년 7월30일)
사진설명
위: 파울루스콜렉 기숙가 앞마당(1985년 여름)
아래: 뮌스터 중심가에 있는 '프리덴스 잘'이 정면에 보인다.
30년 전쟁을 종식시키는 평화조약이 여기서 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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