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기행(27)                    

제네바

나의 경우에 유럽 여행에서 가장 인상 깊은 나라는 아무래도 이탈리아와 스위스였던 것 같다. 이탈리아는 고대 건축물이, 스위스는 자연 경관이 그 어떤 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빼어나다. 그런데 나는 2년 넘게 유럽기행을 연재하면서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를 소개했을 뿐 이 두 나라에 대해서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물론 프랑스, 오스트리아, 체코, 스페인 같은 나라에 대해서 별로 다루지 않고 거의 독일의 몇 도시와 그곳에서의 일상만 주로 다루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 두 나라를 가장 먼저 소개하고 싶었지만 그곳에서의 감동을 좀더 삭힌 다음에 꺼내 보일 생각으로 지금까지 미루어 두었다. 그런 곳에서 얻었던 느낌을 언어로 전달하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일이기도 하고, 어떤 점에서는 내 능력에 부치는 일일지 모른다는 걱정이 있긴 하지만 더 이상 미루어 둘 수 없는 단계까지 왔다. 이미 4년이 지난 지금보다 세월이 더 흐른다면 그나마 남아있는 모든 기억이 사라질 것 같다. 이제 몇 회에 걸쳐서 스위스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그 이야기가 뭐 대단한 것은 전혀 아니다. 나는 전문적인 여행가도 아니고 문화와 역사에 대한 조예가 깊은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그곳을 여행하면서 짬짬이 공부한 것도 아니다. 단지 약간의 기억과 컴퓨터에 내장되어 있는 기념사진, 그리고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남아 있는 여운에 의지해서 그 이야기를 조금 풀어가려고 한다.
2000년 8월 한 달 동안 독일의 중부에 위치한 작은 도시 마부르크에 내려와 있던 우리 가족은 주일 예배를 감안해서 8월14일(월)부터 19일(토)까지 6일간의 일정으로 스위스 여행에 나섰다. 원래는 스위스를 거쳐 이탈리아까지 한꺼번에 뛸 생각이었는데 마부르크에 있는 후배 목사 부부가 말리는 바람에 스위스만 돌기로 했다. 만약 유명한 장소에 가서 사진만 찍고 오는 여행이 아니라면 일주일로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그들은 우리를 한사코 말렸다. 더구나 8월의 이탈리아는 여행객들이 몰리기도 하고, 더위가 사람을 잡는다는 것이다. 만약 그때 우리가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무리하게 강행했다면 여행은 여행대로 못하고 고생만 바가지로 했을지 모른다.
우리는 우선 스위스의 남서쪽 끝에서부터 북동쪽으로 차근히 올라오는 코스를 잡았다. 도시 이름으로 말하자면 제네바, 그린델발트, 루쩨른, 쮜리히, 이상 네 곳이다. 물론 그 네 곳을 관통하는 중간에도 쉴만한 곳이나 구경할만한 곳이라고 생각되면 머물 계획이었다. 첫날 아침에 우리 가족은 여행에 필요한 물품을 승용차 트렁크에 가득 싣고 스위스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인 제네바를 향해서 출발했다. 그곳까지는 대략 700km 채 못 되는 거리이니까 한 나절 운전으로 그렇게 부담이 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초행길이고, 산악이 대부분인 스위스의 고속도로 사정이 독일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조심하면서 차를 몰았다.
아름다운 알프스의 풍경과 잘 뚫리는 교통사정 덕분에 별 고생하지 않고 하루 종일 달려간 끝에 저녁 5시쯤 제네바에 도착해서, 그 전날 밤 전화로 예약한 ‘유스호스텔’을 찾았다. 잘 알려진 바이지만 유럽에서 이런 장소를 찾는 일은 아주 상세하게 그려져 있는 지도덕분으로 아주 간단하다. 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제네바 사람들은 주로 불어를 사용하지만 유스호스텔에서는 영어나 독일어도 통하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런 불편 없이 4인용 방을 빌릴 수 있었다.
WCC 총회본부와 유엔 유럽 본부가 있으며, 미술관, 박물관이 가장 많은 도시 제네바에 온 첫날 저녁 식사를 함부로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중국 음식이 비교적 우리 식성에 맞기도 하지만 음식 값도 무난하다는 생각으로 우리는 몽블랑 공원 근처 어느 중국 식당에 들어갔다. 막상 식탁에 앉아서 지배인이 건네주는 메뉴판을 들여야 보니 원래 생각과는 영 딴 판이었다. 그날 우리는 유럽 생활 1년 중에서 가장 비싼 중국음식을 먹었다. 내 어렴풋한 기억으로 4명 가족의 음식 값이 15만 원 정도 나왔다. 그래도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호의적인 서비스를 받고 훈제로 된 오리 고기를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으니까 그 값은 한 셈이다. 비싼 요리를 먹은 탓에 그 뒤로 일주일 동안 알뜰살뜰하게 살아야만 했다.
우리가 묶고 있던 유스호스텔이 레만 호(湖)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틀 동안 머물면서 밤낮으로 호수 주위를 자주 돌아다녔다. 남서에서 북동쪽으로 총길이 72km인 레만 호는 스위스의 심장과 같다. 1886년에 건설되었다는 대분수는 140m 높이로 일 년 열두 달, 스물 네 시간 물을 쏘아올리고 있다고 하는데, 내 눈에는 별로 아름답게 보이진 않았다. 그냥 있는 그대로 놓아두든지 아니면 적당한 정도의 높이까지만 물을 올리면 되지 뭘 하겠다고 그렇게 안간힘을 쓰는지 모르겠다. 그건 그들의 취향이니까 접어두기로 하자.
제네바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을까? 관광 안내 책자를 잠간 들여다보면 대충 확인할 수 있는 그런 구경거리를 여기서 일일이 소개할 필요는 전혀 없다. 바스티옹 공원 왼쪽 벼랑에 부조로 새겨진 종교개혁기념비도 막상 보면 별 것 아니다. 영국공원의 꽃시계도 그렇고, 여러 교회당과 자연사 박물관도 유럽 곳곳에 있는 그런 것들이고, 유럽 본부 입구에 설치된 한쪽 다리가 부러진 ‘의자’ 상(象)도 그런 정도의 의미를 갖고 있을 뿐이다.
제네바 시의 부분적인 것들은 그렇고 그런 것쯤으로 보이지만 그런 것들이 전체의 조화 속에서 제네바만의 독특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게 무엇일까? 호수, 공원, 미술관, 꽃 가게와 빵 가게, 깨끗하고 조용한 거리, 여러 색깔의 피부를 가진 사람들 등등, 이런 부분적인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제네바를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 ‘평화’의 등불을 하나씩 달아주고 있었다.

그림설명
위: 제네바의 레만 호수 앞에서
아래: 영국공원의 꽃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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