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기행(28)              
스위스의 호수

2000년 8월14일(월) 저녁에 제네바에 도착해서 이틀 밤을 자고 16일 수요일 아침에 짐을 싸서 유스호스텔을 나섰다. 오늘 안으로 로잔, 베른을 잠시 들리고, 이어서 그린델발트까지 가서 그곳의 캠핑장에 잠자리를 마련할 계획이었다. 서남단 끝자락에 있는 제네바에서 스위스 중심부를 가로질러 북동쪽에 있는 쮜리히 까지 280km니까 그 중간에 있는 그린델발트 까지는 좀 돌아가더라도 기껏해야 200km 정도라고 보면 되는데, 그 정도의 이동은 아무리 쉬엄쉬엄 간다고 하더라도 큰 부담이 없어서 좋았다. 우리는 제네바에서 레만 호수를 오른 편으로 끼고 대략 한 시간 정도 달려간 끝에 로잔에 도착했다. 서울신학대학교 대학원에 다닐 때 당시 조종남 학장님을 통해서 로잔에서 열린 복음주의 세계대회에 대해서 들은 바 있고, 올림픽 위원회 본부가 그곳에 있다는 정도의 정보만 있었지만 제네바와 더불어 레만 호수를 접하고 있는 세계적인 도시를 한번 둘러봐야 한다는 생각으로 차를 몰고 들어갔다. 대충 시가지를 둘러본 다음에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올라갔다. 원래는 12,3세기에 만들어진 로마가톨릭의 성당이었지만 종교개혁 이후로 개신교회로 바뀌었다는 이 교회당은 스위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손꼽히고 있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건물을 질릴 정도로 많이 보았기 때문에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주변의 분위기만 감상하기로 했다. 오래 된 교회당이 모두 그렇듯이 높은 벽과 지붕을 안정하게 떠받치기 위해서 이 교회당의 벽기둥도 대단한 크기로 건설되었다. 이 교회당의 위치는 로잔 시에서 매우 높은 곳이어서 이 위에서 로잔을 내려다보는 광경도 일품이었다. 우리는 한 시간 가량 그곳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먹거나 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휴식을 취했다. 이 교회당을 짓느라고 꾀나 고생했을 7백 년 전 노동자들을 생각하면서.
로잔에서 15km 정도만 동쪽으로 달리면 이제 레만 호수와도 끝이다. 그 끝자락에 있는 호수 마을 베베이에서 북동쪽으로 대략 40km 정도 가면 스위스의 수도인 베른(Bern)이다. 원래의 계획에는 베른까지 들러야 했지만 중간에서 좀 게으름을 피운 탓에, 그리고 그린델발트에서 야영하려면 어둡기 전에 도착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베른은 건너뛰기는 것으로 계획을 바꾸었다.
베른에서 그린델발트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기 때문에 마음의 여유를 갖고 천천히 차를 몰았다. 드디어 우리는 알프스의 만년설이 사시사철 흘러내려 만들어진 투너 제(Thuner See, 툰 호수)에 당도했다. 레만 호수에 비해서는 4분의 1도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상당히 긴 형태였다. 인터라켄을 사이에 두고 오른 쪽에는 브린쩌 제(Brinzer See, 브린쯔 호수)가, 왼쪽에는 바로 이 툰 호수가 있는데, 각각 길이가 15km 쯤은 되는 것 같다. 두 호수 모두 폭은 훨씬 좁았다. 우리는 그린델발트로 올라가는 길목에서는 툰 호수를, 내려오는 길목에서는 브린쯔 호수를 만날 수 있었다. 투너 제를 지날 때는 좀더 호수를 가까이 느끼기 위해서 고속도로가 아니라 일반 국도를 택했다. 시속 40km 정도로 차를 몰면서 산과 호수가 함께 이우러져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맛보았다. 몇 군데는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차에서 내려 호수 위를 스쳐오는 잔잔한 바람의 세례를 받았다. 특히 자동차도로가 바로 호수와 거의 닿을 정도로 뚫려 있어서 어떻게 보면 배를 타고 호수 위를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린델발트에서 이틀 밤을 지내고 내려와서 인터라켄을 거쳐 브린쯔 호수를 지날 때는 마침 점심시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 바로 옆에 있는 툰 호수를 지나올 때는 시간이 좀 촉박해서 넉넉한 기분으로 구경을 하지 못했던 차에 이번에는 잘 됐다 싶어 여기서 점심도 해결할 겸 아예 돗자리를 깔아놓고 판을 벌였다. 앞서 그린델발트를 떠날 때 전기밥솥에 밥을 해두었고 밑반찬도 어느 정도 남아 있어서 모든 게 안성맞춤인 셈이었다. 폭은 3,4km 밖에 안 되지만 길이가 15km 되는 브린쯔 호수는 우리 감정과 의식의 가장 밑바닥에 모든 불순물을 깨끗이 정화해낼 것 같은 자연의 완벽한 아름다움을 확보하고 있었다. 양쪽으로 깎아지른 듯한 산, 그 밑으로 옹기종기 자리 잡은 전형적인 스위스 마을, 바람이 없어 거울같이 고요한 호수, 하늘에는 회색의 양떼구름, 대충 그런 분위기였다. 스위스 호수의 물은 왜 그리 푸른가? 빙하의 물이 계곡을 내려올 때는 분명히 석회가루가 섞인 탓인지 뿌옇게 탁한 색깔인데, 이렇게 호수를 이루게 되면 한국의 가장 맑은 가을하늘과 똑같다.    
스위스는 알프스 산으로 유명하지만 호수가 그것 못지않게 아름답다. 우선 스위스 전역에 호수가 흡사 보석처럼 촘촘히 박혀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레만 호처럼 큰 것들도 몇 군데 되지만 그 이외에도 작은 호수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모든 나라의 큰 도시가 강, 하천이나 호수를 끼고 있기 마련이지만 스위스의 도시에 딸린 호수는 다른 데서 느끼기 힘든 풍치를 자아내고 있었다. 앞서 보았던 제네바와 로잔의 레만 호도 그렇고, 앞으로 소개하게 될 루체른과 취리히도 역시 큰 호수를 끼고 있었다. 산, 호수, 숲, 목초로 덮인 구릉, 큰 방울을 목에 단 젖소, 주변 경관과 딱 맞아 떨어지는 전통 주택이 한데 어울려 어디서 어느 방향으로 사진기의 셔터를 눌러도 한 장의 그림엽서가 될 만했다.
그런데 내가 꼼꼼하게 관찰하지 못한 탓인지 모르지만 그렇게 경관이 좋은 툰 호수와 브린쯔 호수 곁에 ‘러브호텔’도 없었고, ‘숯불구이집’도 없었다. 뽕짝 노래에 맞춰 춤을 추며 노는 이들도 없었고, 둘러앉아 ‘고돌이’ 하는 이들도 없었다. 그냥 물, 나무, 산, 밭 등, 대충 그런 자연적인 것들, 그리고 자리를 깔고 누워 책을 읽는 어떤 시골 처녀의 모습만 간간이 보였다. 나는 정말 이상하게 생각했다. 왜 그 친구들은 그곳을 개발해서 돈 벌 생각을 하지 않는 걸까?

그림설명
위: 투너 제(작은 딸)
아래: 브린쩌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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