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델발트
수요일(2000년 8월16일) 저녁 우리 가족은 툰 호와 브린쩌 호 사이에 있는 인터라켄에서 4시 방향으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알프스의 정경을 맛볼 수 있는 산길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완만하다가 차츰 가팔라지는 그 좁은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말로만 듣던 알프스가 도대체 어떤 모습일지 자못 궁금했다.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있다는 해발 4천 미터 내외의 고봉은 어떤 자태로 우리를 맞을 것인가? 대략 5키로 미터 정도 올라가니까 깎아지른 산으로 인해서 하늘이 갑자기 좁아진 탓인지 우리가 기어 올라가는 계곡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굴곡이 심한 왕복 2차선의 언덕을 조심스레 올라가는데 계곡 사이 너머로 갑자기 밝은 빛이 우리에게 쏟아졌다. 해발 3970미터의 ‘아이거’ 봉(峯) 정상에 쌓인 만년설이 햇빛을 산 아래쪽으로 되돌려주는 중이었다. 한창 더운 철인 8월 중순에 눈 덮인 산을 보았다는 흥분을 안고 우리는 주변의 경관에 눈을 팔며 그린델발트로 들어섰다.
이 그린델발트는 알프스 계곡에서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사는 가장 높은 곳으로서 그 유명한 융프라우(4158m, 융프라우는 ‘젊은 여자’라는 뜻)로 올라가는 등산열차의 매우 중요한 정거장이었다. 까마득하게 올려다 보이는 아이거 봉 밑으로 높고 낮은 여러 봉들이 주위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으며 관광객들을 위한 여러 종류의 숙박시설과 스포츠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형적인 스위스 독립가옥들이 가파른 초원 위에 그림처럼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리는 그림엽서의 한 장면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짜릿한 기분을 잠시 늦추고 일단 야영장을 찾는 게 급했다. 지도를 통해서 이미 두 곳의 야영장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우리는 야영장 팻말이 먼저 나오는 곳을 무조건 선택하기로 했다. 우리에게 먼저 나타난 야영장은 아이거 봉의 만년설이 녹아 조금씩 수량을 늘려가는 시냇가 바로 곁에 위치해 있었다. 약간 시간에 쫓긴 우리는 선택의 여지없이 그곳으로 밀고 들어가 늘 하는 순서대로 접수를 마치고 관리인이 지정해준 안전한 곳에 우리 부부와 두 딸을 위한 텐트를 각각 세웠다.
그린델발트에서 보낸 첫날밤은 우리 가족 네 명 모두에게 매우 놀라운 체험으로 남아 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잠을 깊이 잘 수 없을 정도로 추웠다는 점이다.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었지만 한밤중의 추위는 우리의 예상을 훨씬 넘었다. 가능한대로 속옷을 따뜻하게 입고 오리털 침낭에 몸을 숨겼지만 그것으로 알프스 계곡의 한기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른 하나는 시냇물 소리였다. 텐트를 치고 밥을 먹는 중에도 시냇물 소리로 인해 고함을 치느라 물소리가 좀 야단스럽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완전한 어둠이 깔린 그 야밤에 텐트 안에 누워서 듣는 물소리는 큰 충격이며 경이였다. 그 물소리가 지축을 흔들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우리는 그날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이 오직 물소리와 그것을 원시(原始)의 소리로 느끼는 자기 자신만이 있는, 그래서 물소리와 자신이 일체가 된 느낌으로 자다 깨다 반복하면서 첫날밤을 보냈다.
다음날 적당한 시간에 일어나서 아침을 해결한 다음 우리는 그린델발트 산책에 나섰다. 고개를 위로 젖혀야 올려다 볼 수 있는 아이거 봉 아랫마을 그린델발트는 그리 크지 않은 터라, 그리고 박물관이나 미술관, 또는 고성들이 곳곳에 자리 잡은 큰 도시가 아닌 작은 산골이라 반나절이면 대충 훑어볼 수 있었다. 장기간의 투숙객을 받는 팡시온, 작은 교회당, 띄엄띄엄 흩어져 있는 독립농가, 텃밭, 기념품 가게 같은 것들이 우리에게 정신적인 평화를 주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강원도 산골마을처럼 거의 모든 길들이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천천히 구경하며 걷는데도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했다. 초등학교 4학년짜리 막내딸을 데리고 다니는 우리로서는 그런 식으로 하루 종일 강행군할 수는 없었다. 이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등산 열차를 타고 융프라우 관광에 나설 것인지, 아니면 케이블카를 타고 전망대에 올라가 스위스의 가장 아름다운 산골마을인 그린델발트를 내려다볼 것인지 말이다. 우리는 융프라우를 포기하기로 했다. 투자한 것만큼의 볼거리가 없을 거라는 매우 약삭빠른 계산을 한 다음에 우리는 융프라우를 포기했다. (지금 기억으로) 4명 가족이  최소한 25만원 정도가 필요한데 약간 무리를 해서라도 올라갔다가는 본전 생각이 날 것만 같았다. 의논 끝에 우리는 그린델발트를 가장 아름답게 전망할 수 있는 전망대를 케이블카로 올라갔다. 아이들이 좋아했다. 케이블카가 정상으로 접근하면서 우리의 시야는 점점 넓어졌다. 그린델발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가장 전형적인 스위스 산골마을을 눈이 시리도록 실컷 보았다.
둘째 날 밤은 추위와 폭포수 같은 시냇물 소리에 약간 적응이 된 탓도 있지만, 하루 종일 다리품을 팔아 피곤한 탓인지 비교적 잠을 푹 잤다. 아침 식사 후 짐을 정리해서 트렁크에 싣고 이틀 전 올라왔던 길을 되돌아 툰 호와 브린쯔 호 사이에 있는 인터라켄을 거쳐 세 번째 목적지인 루체른으로 방향을 잡아야만 했다. 인터라켄에서 그린델발트까지 오가는 길이 드라이브 코스로 썩 괜찮아 보였다. 겨우 15키로 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지만 평야에 세워진 도시 풍의 인터라켄과 알프스 계곡의 비탈에 자리 잡은 그린델발트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었다. 계곡을 거의 내려온 우리는 폭이 넓어져 수량이 많아진 냇가에 잠시 차를 멈추었다. 그러나 여전히 경사가 급해서 유속은 빨랐고 밑바닥에 돌들이 많아서 물소리도 엄청났다. 여기까지 왔는데, 아이거 봉의 만년설이 녹아 생긴 물에 세수를 하지 않은 채 떠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렇게 의미를 새기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세수는커녕 손도 제대로 씻지 못했다. 그건 물이 아니라 아예 얼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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