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의 루체른

세월이 많이 흐른 탓도 있지만 스위스의 풍경이, 특히 비교적 큰 도시의 풍경이라는 게 엇비슷하기 때문에 앞서 소개한 제네바와 오늘 소개할 루체른, 그리고 취리히는 내 깊은 느낌 속에 한 덩어리로 남아 있다. 호수, 다리, 옛 시가지, 신시가지, 광장, 박물관, 미술관, 교회당, 관광객들, 그 도시에서 벌어지는 몇몇 이벤트 등등, 이런 모습들이 서로 겹쳐 있다. 특히 루체른과 취리히에서는 우리가 오래 머무르지 않은 탓인지 사진이 없다면 거의 구분할 수 없을 것 같다.
사실 하루, 또는 이틀에 한 도시를 모두 관광한다는 것은 단지 사진 찍기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대개 한국에서 오는 단체 관광객들은 하루에 한 도시가 아니라 여러 도시를 돌아보는 강행군을 일삼기 때문에 어느 곳을 다녀왔다는 느낌만 남아있을 뿐이지 그런 여행이 삶의 내용으로 녹아드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 가능하다면 일정에 구애받지 않고 한 도시에서 며칠 동안 머물면서 그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는 게 최선이겠지만 이런 기회는 쉽게 주어지지 않으니까 정해진 일정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길밖에 없다. 우리의 경우에 5일 동안 제네바, 루체른, 취리히 세 도시와 그린델발트를 돌았는데, 그럴 게 아니라 대상 지역을 훨씬 좁히는 게 훨씬 나았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한 두 곳을 집중적으로 관광하는 방식을 택하려면 사전에 충분한 준비를 하든지, 아니면 평소에 사물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확보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한 곳에 오래 머물기 때문에 벌어지는 지루함을 극복할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인문학적 컨텐츠를 준비하는 작업이다. 루체른이나 취리히의 호수 앞에 있는 야외 레스토랑에 앉아서도, 또는 어느 교회당이나 성당에 들어가 앉아서도 한나절이나 반나절 동안 그런 이국적인 풍경을 풍부하게 느낄 수 있는 영적인 내공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런 내면적인 능력 없이 단순히 사진이나 찍고, 쇼핑하는 데 호기심을 느끼는 방식으로는 한 곳에 진득하게 머무를 수 없다. 결국 이런 여행은 피상적인 데 머물게 되기 때문에 훨씬 빨리 피곤하고 지루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내 생각에는 깊이로 들어가지 않는 한 굳이 돈과 시간을 들이면서까지 여행을 떠날 필요는 없다. 물론 그 깊이라는 게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좀더 다른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그린델발트에서 루체른까지는 내 어림짐작으로 100km 정도에 불과했기에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운전하면서 그 사이사이에 이어지는 알프스의 광경을 넉넉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특히 그 중간에 국도로 연결된 부분이 절경이었다. 루체른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아무래도 오래된 다리라 할 수 있다. 알프스 산맥의 빙하가 녹아 루체른으로 흘러들면서 만든, 그렇게 폭이 넓지 않은 로이스 강 위로 몇 개의 다리가 가로질러 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다리는 유럽에서 제일 오래되었다고 하는 카펠교(橋)인데, 1333년에 건설되었다고 한다. 카펠교의 특징은 오래되었다는 것만이 아니라 가장 짧은 거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직각으로 건설되는 일반 다리와 달리 거의 45도의 사선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남쪽 부분에서는 다시 각도가 꺾이는 바람에 보기에 따라서 손잡이가 달린 지팡이 모습이다. 카펠교가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실용성과는 거리가 멀게 건설된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 꺾인 부분 바로 옆에 빨간 지붕을 가진 물의 탑(Wassertur)이 세워져 있다. 이 물의 탑은 비상시에 시민들에게 종을 울리는 종각과 감옥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다리는 순전히 나무로 되어 있지만 물의 탑은 돌로 건축되었다. 카펠교는 빨간색 지붕을 머리에 이고 있고, 다리 양 옆으로는 유럽의 많은 개인주택과 연립주택의 테라스에서 볼 수 있듯이 붉은 색, 분홍색, 노란색 꽃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그 안에 들어가면 회랑을 걷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이 다리의 내부에는 17세기 화가 하인리히 베그만이 그린 111장의 판자 그림이 걸려 있다. 이 그림은 스위스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과 루체른 수호성인의 생애를 묘사하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에게는 좀 투박하게 보이고 낯설게 보일 뿐이다.
카펠교가 놓인 로이스 강은 바로 루체른 호로 흘러든다. 이 루체른 호는 앞서 외국인들이 많았던 제네바의 레만 호에 비해서는 좀 작은 편이지만 그 분위기로만 말하자면 훨씬 스위스의 토속적인 성격이 강해보였다. 특히 황혼이 깔리기 시작한 루체른 호는 외국인들에게 환상적인 느낌을 갖게 했다. 검은 빛 호수, 붉은 노을, 그 위로 검은 구름이 만들어내는 기기묘묘한 모습들, 호수 건너편에 있는 여객선과 건물에서 새어나오는 불빛, 그리고 시원한 여름 바람 등등, 이런 모든 것들이 루체른의 밤을 동화 속의 마을처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 덕분에 손님이었던 우리도 그런 행복을 조금 나누어 받았다.
어떤 점에서 카펠교와 물의 탑만 놓고 본다는 별로 대단한 볼거리는 아니겠지만 로이스 강과 루체른 호수, 강 북편에 자리 잡은 구 시가지의 건물들이 더불어서 이루어내는 그 풍광은 이 세계 그 어느 도시가 따라잡기 어려운 루체른만의 운치를 자아냈다. 우리 가족은 카펠교 남쪽에 차를 주차시키고 그 부근을 천천히 배회하면서 그 다리 주변에 뿜어내는 평화의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카페와 레스토랑, 화랑, 기념품 가게, 옥외 식탁에 앉아서 음료수를 마시는 사람들, 또한 그들이 만들어내는 적당한 소음 속에서 우리는 아무런 할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걸어 다녔다. 비록 루체른 시와 그 건물에 관한 상세한 정보가 없었지만 그런 분위기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든지 여행객으로서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돈을 좀 아끼느라 가족들이 함께 그럴듯한 카페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만 빼고는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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