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 보기



우리 식구가 베를린에 도착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 혼자 살던 독일인 노파가 세상을 뜨는 바람에 여차 여차한 통로를 통해서 그녀가 쓰던 물건을 받아올 수 있게 되었다. 그 중에 기억에 남는 물건은 옷장, 침대, 가정용 사다리, 냉장고, 티브이였다. 작은 세탁기도 마음에 들었는데 우리 집이 작아서 포기했다. 티브이는 대략 30인치 정도의 크기인데 구입한지 몇 년 되지 않은 신품이었다. 우리는 베를린에 체류하는 동안 이 티브이를 통해서 독일 프로그램을 많이 보았다. 시간의 여유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볼만한 것들이 제법 많기 때문이기도 했다. 우리가 가입한 유선 방송국에서는 대략 마흔 개 가량의 채널을 확보하고 있었다. 지금은 자세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ARD와 ZDF가 가장 권위 있는 채널이었던 것 같고 그 이외에도 여러 지역 채널과 특화된 채널이 있었다. 우리는 매주 발행되는 티브이 가이드 잡지를 사서 한 주간 동안 시청할 프로그램을 미리 결정해두었다. 이 가이드 잡지도 십 여 종류가 있기 때문에 자기 취향에 맞는 것을 구입하면 된다. 값은 비교적 저렴하다.  

독일 티브 프로그램의 가장 큰 특색은 일일 연속드라마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드라마 자체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대개는 한 두 번으로 끝나지 우리처럼 인기가 있다 싶으면 질질 끄는 일일 드라마는 하나도 없다. 대신 영화를 많이 내보낸다. 우리의 경우에는 주말에만 영화를 상영하지만 그곳에서는 거의 매일 밤 한 두편의 영화를 내보낸다. 비교적 미국의 할리우드 영화가 많지만 그래도 서유럽이나 동유럽의 영화도 제법 많다. 간혹 아시아 영화도 많이 등장하는데, 대개는 중국이나 일본 영화다. 한국 영화는 우리의 기대에 훨씬 못 미친다. 내가 있는 1년 동안 한 편의 한국 영화를 본 것 같은 기억이다.

이왕에 말이 나온 김에 우리의 일일 드라마에 대해서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아내는 티브이 일일 드라마를 좋아하는 편인데, 요즘은 두 딸까지 합쳐서 궁중 요리에 얽힌 드라마 '대장금'을 보느라 정신이 없다. 매일 일정한 시간을 그런 드라마에 빼앗기는 문제도 문제이지만 대개의 경우에 일일 드라마의 내용 전개가 참으로 황당하거나 감상적인 방향으로 흐름으로써 시청자들의 삶을 가볍게 만든다는 것이 훨씬 큰 문제이다. 주인공이 갑자기 불치병에 걸렸다거나 자동차 사고로 인해 장애인이 되는 경우가 많고, 또는 우연하게 어떤 사람과 만나는 상황으로 몰고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 삶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모순과 갈등, 불안과 기쁨 등에 대한 깊은 통찰이나 사색보다는 단지 말장난만 난무하게 된다. 이 모든 게 시청률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는 피디들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런 것을 선호하는 시청자들의 책임도 크다.  

독일 공영방송국에는 비교적 대담 프로그램이 많은 편이다. 워낙 독일 사람들이 대화를 즐기는 탓인지 모르지만 두 사람 또는 서너 사람이 패널로 등장해서 사회의 여러 이슈나 개인의 인생관에 대해서 깊숙한 대화를 나누는 방식이다. 이런 프로그램은 우리나라 티브이에도 정기적으로 방송되기는 하지만 너무 정치적이거나, 또는 너무 찬반의 양극화 현상이 일어난다. 앞으로 전문적인 분야를 대중적으로 풀어내는 프로그램들이 많이 개발되면 좋겠다.

그렇다고 해서 독일 티브이 방송이 늘 고상한 클래식이나 진지한 대담에만 기울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재미를 중심으로 한 프로그램도 적지 않다. 2000년 한 해 동안 가장 인기가 있었던 프로그램은 두 가지로 기억된다. 하나는 우리 식으로 퀴즈시합인 '누가 백만 장자가 될까요?'였다. 재미와 공부가 겸비된 프로그램으로서 그 퀴즈 방송을 이끌어 가는 사회자의 능력이 아주 뛰어났다. 다른 하나는 전국에서 선발된 십 여명의 젊은이들을 살림집으로 꾸며진 세트장 안에서 한달 정도 자유롭게 생활하게 하다가 가장 인기가 높은 사람은 뽑는 프로그램인데, 제목은 잊었다. 집안 내부 곳곳에 설치된 원격 조종 비디오에 이 사람들의 일상이 그대로 노출된다. 시청자들은 그들 중에서 호감이 가지 않는 사람을 지적하게 되고, 그 통계에 따라서 한 주에 몇 명씩 낙오자를 만든다. 결국 최종적으로 남는 사람이 일등이다. 원래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주로 젊은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긴 했지만 비판도 적지 않았다. 그 이외에도 두 세 달에 한번씩 한 마을을 선정해서 축제처럼 꾸며진 프로그램이 있다. 노래, 춤, 몰래 카메라, 지역 소개 등, 아주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안방용 프로그램이다.

그 이외에 몇 가지 특징들을 거론하자면 다음과 같다. 어린이 프로그램은 어린이 채널에서만 방송되지 일반 채널에서는 아예 찾아볼 수 없다. 성인용 프로그램은 국내외 여러 성 의식과 행태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건강한 성 문화를 일으켜본다는 계몽적 성격이 강하다. 제1 공영방송국인 ARD에서는 매주 토요일 저녁마다 목사의 5분 설교를 내보낸다. 신부의 강론도 방송되는지는 확실하게 모르겠다. 내가 본 바로는 거의 목사의 설교였으니까. 뉴스는 우리처럼 앵커를 중심으로 국내외 여러 사건, 사고를 보도하는데, 주로 외국인 테러나 광우병 같은 사회적 이슈를 크게 다룬다. 일년 동안 그곳 뉴스를 보면서 우리처럼 공직자들이나 국회의원들의 불법 정치자금이나 뇌물 문제가 한번도 보도되지 않은 걸 보고 참으로 이상한 나라라고 생각되었다. 뉴스에 등장하는 그런 정치인들 '씹는 재미'도 없이 무슨 재미로 산다는 말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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