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기행(22)                    라인강 강변로



앞에서 한번 이야기했는지 모르겠지만 2000년 8월 한 달 동안 우리 가족은 베를린을 떠나 프랑크푸르트 근처의 대학도시 마부르크에 자리를 잡았다. 어느 한국 학생 부부가 방학을 맞아 한국을 다니러 간 그 사이에 적당한 방세를 지불하고 우리가 잠시 빌려 쓰게 되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한 주간은 스위스를 돌고(스위스 여행은 한 두 마디로 끝낼 수 없기 때문에 자꾸 뒤로 미루고 있는데, 불원간 소개하려고 한다), 그리고 또 한 주간은 독일의 백조의 성에서 뷔르쯔부르크에 이르는 소위 '낭만가도'를 여행했다. 강행군 여행을 끝낸 뒤라 약간 피곤한 몸을 추스르고 있는 중에 8월29일(화요일) 뮌스터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있는 조카 부부의 방문을 받았다. 첫날은 우리가 마부르크를 안내했다. 그 다음날 조카의 제의로 우리는 뤼데스하임에서 코블렌쯔까지 라인강을 따라 드라이브를 하기로 했다. 그 조카는 이미 독일에 7,8년간 머물고 있던 터라 이 코스의 경치가 환상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조카도 진작에 한번 둘러보고 싶었지만 승용차가 없어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가 이번에 함께 돌기로 했다. 우리 네 식구, 조카 부부, 이렇게 여섯 명이 고물 벤츠를 타고 마부르크에서 아침 일찍 출발했다. 여섯 명이면 인원 초과였지만, 그때만 해도 우리 막내가 초등학교 4년인 데다가 덩치가 작은 아이였기 때문에 경찰의 눈만 피할 수 있다면 짧은 여행은 견딜 만 했다.

마부르크에서 라인강 강변로를 타려면 우선 독일의 중심부에 자리 한 프랑크푸르트를 관통해야만 하는데, 마부르크에서 정남향 80km정도 떨어져 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20km 정도 더 가다보면 마인쯔와 남북 방향으로 맞닿아 있는 비스바덴에 이른다. 스위스의 알프스 만년설에서 발원하는 물줄기가 독일 남서부와 프랑스 남동부 경계를 가르며 북으로 올라오다가 마인쯔와 비스바덴 사이를 가로지르면서 방향을 좌로 틀어 80km 쯤 흐르다가 뤼데스하임을 지나는 길목에서 다시 기수를 북북서로 잡고, 그 유명한 라인강의 기적을 일군 대표적인 도시 본, 쾰른 레버쿠젠, 뒤셀도르프, 에센을 뚫고 독일 국경을 지난 다음 네델란드의 로테르담에서 북해로 흘러든다. 우리가 드라이브 코스로 정한 이 라인강은 이처럼 나라 사이를 넘나들며 장장 1320km 물줄기를 자랑하고 있는데, 독일 지역만 698km라고 한다. 라인강 유람선이 남쪽의 마인쯔에서 북동으로 대략 200km 정도 떨어져 있는 쾰른까지 왕복 운행하고 있다는 점을 참고한다면 이 사이의 경치가 다른 쪽에 비해서 훨씬 볼만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시간적인 이유로 우리는 승용차로 마인쯔에서 코블렌쯔까지만 돌기로 했다. 지도를 보고 눈짐작으로 계산해보니 80km 정도가 나왔다. 그 거리는 순전히 라인강 강변로를 말할 뿐이지 마부르크에서 마인쯔과 면해 있는 비스바덴까지 가는 길과 코블렌쯔에서 돌아오는 길까지 합하면 줄잡아 300km는 되었다.

우리는 비스바덴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라인강 강변로를 따라 차를 몰기 시작했다. 평야와 구릉과 산 사이의 협곡을 지나면서 라인강은 때로는 장중한 흐름으로, 때로는 급한 물살을 내지르며 자유롭게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다. 독일 가곡으로도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로렐라이 언덕을 지나면서 시간이 충분하지 않아 언덕 꼭대기까지는 올라가지는 못했고, 대신 강가에 세워져 있는 로렐라이 여인상까지만 다녀왔다. 돌을 쌓아 만든 밭침대 위에 오른발과 왼발을 다른 각도로 놓고 누구를 기다리듯, 또는 슬픈 듯이 앉아 있는 여인상이 세워져 있고, 그 옆에 독일 국기가 세워져있는, 사실상 별 볼일 없는 상이었다.

라인강 주변의 풍경 중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강 좌우 산 위에 솟아있는 성이었다. 우리의 절은 산에 안겨 있는 형국인 반면에 유럽의 성은 산 위에 군림하는 형국이었다. 조카의 설명에 따르면 프랑스에는 수도원이 많고 독일에는 영주들의 성이 많다고 하는데, 이런 점에서도 중앙집권 정치제도를 유지한 프랑스와 지방 영주를 중심으로 한 봉건 정치제도를 발전시킨 독일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떤 성은 현재 개조해서 호텔이나 레스토랑으로 사용된다고 한다.

비스바덴에서 30km 쯤 지났을 때 뤼데스하임이라는 표지판을 발견한 조카는 점심 시간도 됐고 하니 이곳에 들리자고 제안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뤼데스하임은 라인강 가의 마을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었다. 여행 안내 책자에 의하면 인구가 9천6백명 밖에 되지 않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골목인 드로셀가세(굳이 번역하자면 티티새 골목)와 포도주 박물관과 독일 통일을 기념하여 세운 게르마니아 여신상으로 인해 관광객이 꽤 많이 모이는 곳으로 이름이 나 있다. 뤼데스하임에서 있었던 일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세 가지이다. 하나는 게르마니아 여신상이 있는 니더발트 언덕에 올라가서 그 밑으로 펼쳐진 포도밭과 라인강 줄기와 그 건너편 숲의 빙엘 마을과 클로프 성을 감상한 일이다. 두 번째는 작은 레스토랑의 야외 식탁에 앉아 간단한 점심을 시켜 먹은 일이다. 세 번째는 서너 명이 옆으로 나란히 서서 걸으면 꽉 찰만한 좁은 드로셀가세를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여행객들과 어깨를 부닥치며 구경한 일이다. 포도주 가게, 레스토랑, 기념품 가게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대충 100m 정도 되는 평범한 골목이 왜 그렇게 유명한지 지금도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한 작은 강변 마을에서도 그런 대로 평화롭게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만은 확인할 수 있었다. <정용섭>

사진설명
위: 라인강 동편에서 서편을 바라본 풍광. 바로 밑이 뤼데스하임이다.
아래: 뤼데스하임의 유명한 골몰 '드로셀가세'.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