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필하모니



2000년 3월6일 밤, 베를린 테겔 공항에 도착한 다음 날 즉시 우리 가족은 아내의 의견에 따라서 우선 베를린 필하모니에 가보기로 하고, 지하철을 타고 시내 중심으로 나갔다. 베를린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1989년 통일되기까지 45년 동안 동서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시내 중심이 어디를 가리키는지는 약간 애매하다. 서베를린 사람들은 당연히 동물원과 중앙역과 각종 백화점과 고급 상점이 모여있는 쿠담 거리를 생각하겠지만 동베를린에 있는 사람들은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동쪽으로 난 "운터 덴 린덴" 가(街)를 생각할 것이다. 원래 역사적인 건물들은 거의 동베를린 지역에 있다. 베를린 돔을 비롯해서 페르가몬 국립 박물관과 미술관, 국립 오페라 하우스가 그렇고, 또한 겐다르멘 마크트도 빼놓을 수 없다. 그곳에는 좌우로 프랑스 돔과 독일 돔을 끼고있는 샤우슈필하우스(극장)가 품위 있게 자리잡고 있다. 나는 여러 이유로 인해서 이 겐다르멘 마크트에 자주 간 편이다. 황혼이나 깊은 밤에 그 겐다르멘 마크트에서 느꼈던 편안함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앞으로 언젠가 대구성서 아카데미의 홈페이지가 업그레이드되면 사진을 몇 장 올려야겠다.

베를린 지리를 전혀 모르는 우리는 지도 한 장에 의지해서 포츠다머 플라츠 역에 내렸다. 그 당시 그 역사는 한창 개보수 중이었다. 바로 그 전 해에 수도를 베를린으로 옮겼기 때문에 건물과 도로 건설이 한창이었다. 통독 이후 10년 동안 준비를 하기는 했지만 분단 45년 동안 동독 지역이 워낙 낙후되었기 때문에 손볼 데가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 하양 촌사람들이 베를린의 한 중심에서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 베를린 필하모니를 찾아가는 모습을 상상해보시라.  그날 따라 왜 그렇게 추웠든지. 포츠다머 플라츠에서 베를린 필하모니까지 대략 500m의 거리를 을씨년스런 날씨 탓인지, 그리고 낯선 풍경 탓인지 너무 멀다는 느낌을 갖고 걸어갔다. 오른 편으로는 그 해 여름 개관을 목표로 그 유명한 쏘니 빌딩이 막바지 손질을 하고 있었고, 비교적 사람들의 왕래도 많았다.

베를린 필하모니는 거의 쌍둥이같이 보이는 또 하나의 건물을 옆에 거느리고 있다. 독일어로 "캄머무직잘"이라고 해서 "실내악 소강당"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외관이 거의 똑같은데 크기가 작아서 이곳에서는 말 그대로 실내악, 성악 등 작은 규모의 음악이 연주되고, 베를린 필하모니에서는 본격적인 오케스트라가 연주된다. 앞서 슈타빌(국립도서관)을 소개할 때 언급했지만 이 베를린 필하모니와 슈타빌은 포츠다머가(街)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그리고 베를린 필하모니 쪽에 국립 현대 미술관과 여러 전문 박물관들이 모여 있다. 그 중간에는 녹지가 조성되어 있어서 산보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이 베를린 필하모니는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위한 전용 연주장으로 1960-1963년에 한스 샤룬의 설계에 의해서 지어졌는데, 실제로는 다른 오케스트라도 자주 연주한다. 외양은 흡사 노란색의 텐트를 쳐놓은 것처럼 촌스럽다. 처음에는 도저히 그 유명한 베를린 필하모니로 믿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내부는 거의 완벽한 음향효과를 낼 수 있도록 건축되었다고 한다. 앞자리나 가장 끝자리나 음악을 감상하는 데 큰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음향 조건이 완벽하다는 말이다. 대개 한해의 연주 스케쥴이 9월부터 다음 해 6월까지를 한 단위로 잡혀 있다. 7,8월은 휴가철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연주회는 없고, 색다른 연주회가 자주 열린다. 예컨대 현대음악가들을 씨리즈로 묶어나가는 방식이다.

일년 내도록 음악회를 쫓아다닌 아내를 승용차로 데려다 주고 데리고 와야할 책임 때문에 나는 이 베를린 필하모니를 엄청나게 자주 드나들었다. 국립 오페라 극장과 겐다르멘마크트의 샤우슈필하우수를 포함해서 평균 일주일에 세 번 정도는 이곳 저곳을 따라다녀야 했다. 물론 재정적인 이유로 나는 공연장에 들어가지 않고 집으로 왔다가 가든지 또는 근처에서 기다리기도 했다. 그런데 입장료가 생각보다 훨씬 쌌다.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나 피아니스트의 연주라고 하더라도 2만원 정도면 들어갈 수 있으니까 말이다. 원님 덕분으로 나발을 분다고, 나도 그곳에 머무는 일년 동안 대충 10번 정도는 들어갔던 것 같다. 발레 한번, 오페라 두 번, 그리고 나머지는 연주회였다. 장한나의 첼로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특히 두 번의 연주회가 기억에 남는다. 한번은 조카 내외가 방문했을 때 함께 관람한 베르디의 <레퀴엠>이다. 필하모니에서 연주된 이 레크엠은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미묘한 화성과 요한계시록에 바탕을 둔 가사로 인해서 감상하는 동안 현실을 떠나 어떤 특별한 세계에 갔다 온 착각이 들 정도였다. 다른 한번은 거의 한국으로 돌아올 때가 다된 시기에 캄머무직잘에서 들은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였다. 리트의 대가인 피셔 디스카우와 피터 쉬리어 이후 한창 주가가 오르고 있다는 젊은 바리톤 가수의 목소리를 통해서 리트의 정수를 맛보았다.

독일 연주회장의 풍경 하나, 관중은 젊은이들보다 중년 이상이 많다. 둘, 이 사람들은 중간 휴식 시간에 주로 포도주를 마신다. 셋, 본 연주가 끝나면 현관 밖에서 여러 종류의 음악가들이 별개로 연주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넷, 연주회장 밖에는 다음날 나올 조간 신문과 빵을 파는 사람이 한 둘 꼭 기다린다. 다섯, 그 많은 사람들이 차를 어디에 주차시켜놓았는지 모르겠지만 별로 소란스럽지 않게 제 갈 길로 사라진다. 다섯, 관광객들, 특히 동양에서 온 관광객들은 연주 시간에 대개가 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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