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노이카우프



오늘은 슈퍼마켓에 대한 이야기나 해볼까 한다. 로마, 파리, 바르셀로나, 프라하 등 유명한 관광지나 유적에 대한 정보는 이런 저런 기회에 많은 사람들에게 상당히 알려져 있다는 이유만이 아니라 그런 것들보다는 그런 것을 문화로 만들어낸 사람들의 삶 자체가 소중하다는 이유 때문에 나는 주로 일상적인 것들을 중심으로 이 유럽기행을 엮으려고한다. 지난 1,2호를 읽으신 분은 아마 내가 살았던 동네를 대충이라도 머리 속으로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나무로 된 육중한 대문을 나서서 왼쪽으로 100m정도 가면 사거리가 나오는데, 건너편 코너에 독일에서 가장 흔한 "아랄" 주유소가 있고 그 오른편 건물이 "에노이카우프"(E-Neukauf) 슈퍼마켓으로서 별로 크지 않는 전형적인 동네 가게다.    

우리 식구가 단골로 드나들던 이 에노이카우프는 대충 200평정도 크기의 매장에 우리의 슈퍼마켓과 비슷한 방식으로 상품이 진열되어 있다. 물건 담는 손수레를 끌고 오른 쪽 입구로 들어서면 제일 처음으로 만나는 게 과일 및 야채 코너다. 우리는 이 코너에서 주로 사과를 많이 샀다. 가격은 비싸지도 않고 싸지도 않은, 그저 우리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대개의 과일이 이태리, 스페인, 또는 폴란드에서 수입되고 있는 것 같았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기간에는 "앵두"(키르쉬)가 제법 많이 나온다. 80년대 초 잠시 유학 와 있을 때 경제적인 이유로 잘 먹지 못했던 앵두를 이번에는 온 식구들이 실컷 먹어보자고 작심했지만, 그것도 한 두 번이지 매일 그것만 먹을 수도 없고, 경우에 따라서는 당도가 형편없을 때도 있었기 때문에 마음먹은 만큼 먹지는 못했다.

과일 코너를 돌아가면 매장의 한쪽 면을 다 차지하고 있는 유가공 식품 자리를 만난다. 우리 식구들은 매일 아침을 빵으로 먹었기 때문에 여기서 살 게 제일 많았다. 여러 종류의 요쿠르트나 치즈는 빵 맛을 훨씬 돋구어주었다. 지금도 아침마다 식빵을 먹고 있는데, 그때의 그 곰팡이 냄새나는 치즈가 아쉽게 느껴진다. 어쨌든지 어느 민족이건 자기들의 삶에 맞는 이런 종류의 저장식품이 발달하게 마련인데, 우리의 경우에는 식물성이, 유럽인들에게는 동물성이 발달했다. 우리의 간장, 된장, 고추장을 기본으로 해서 채소류의 절임 식품이 모두 저장식품인데, 그들에게는 앞서 말한 치즈, 요구르트, 특별히 소시지와 햄이 상당히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 있었다. 이왕에 먹거리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한 마디 붙인다면, 같은 유럽이라고 하더라도 프랑스, 이태리, 스페인에 비해서 독일은 이 먹거리 문화가 별로! 라고 할 수 있다. 독일 사람들은 식사를 크게 "칼테스 에쎈"(찬 음식)과 "바르메스 에쎈"(따뜻한 음식)으로 구분한다. 칼테스 에쎈은 말 그대로 조리하지 않고 먹을 수 있는 먹거리이며, 바르메스 에쎈은 부엌에서 조리해 나오는 먹거리인데, 그들은 주로 칼테스 에쎈을 먹는다. 통밀로 만든 빵과 큰 덩어리 치즈를 적당한 두께로 잘라 커피나 차를 곁들여 대충 먹고, 남는 시간에 열심히 일과 공부를 한다. 로마의 변방에서 눈치를 보며 허기를 채우던 게르만족의 식사 전통이 그것이다.  

에노이카우프 슈퍼마켓 매장에서 가장 넓은 코너는 아마 음료수와 알콜이 차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이 마시는 생수는 주로 가스가 섞인 물이며, 값은 우리와 비슷하다. 술은 대개 맥주와 포도주다. 그곳 유학생들에게 전해들은 이야기인데, 독일의 맥주 종류가 최소한 3천이 넘는다고 한다. 거의 각 동네마다 자기들 맥주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좀 특색이 있는 맥주는 뮌헨에서 생산되는 것인데 색상이 보통 맥주에 비해서 붉은 빛이 나며 탁하다. 그 반대되는 맥주는 "쾰쉬"라고 해서 쾰른에서 생산되는 것인데 보통 맥주에 비해서 희고 맑게 보인다. 그런데 유럽의 맥주 값은 한결같이 저렴하다. 500cc짜리 캔이 1마르크가 채 안 된다고 하니 우리에 비해서 3분의1에 불과한 셈이다. 포도주는 주로 5천원에서 1만5천원 사이다. 포도를 발효시킨 것이 포도주이고 증류시킨 게 꼬냑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독일 슈퍼마켓 계산대 앞에서는 인내심을 발휘해야 한다. 우리는 대개 큰돈을 내고 거스름돈을 돌려 받는 식이지만 그들은 우리 돈으로 6원 정도에 해당되는 끝자리까지 일일이 자기 지갑에서 헤아려 계산한다. 그래도 본인이나 카운터 직원이나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이나 아무도 서두르지 않는다. 끝으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하양읍에 있는 대형 슈퍼에 드나들며 느낀 감상 두 편. 첫째, 너무 시끄럽다. 스피커에서 울리는 음악 소리, 호객 소리가 뒤범벅이다. 옛날 장터처럼 오픈 되어 있으면 큰소리를 치거나 말거나 상관없는데, 밀폐된 공간에서는 정신이 하나도 없다. 둘째, 카운터 아가씨들이 하루 종일 서서 일하고 있었다. 병색이 있어 보이는 아가씨에게 말했다. "좀 앉아서 계산해요. 보기에 딱하네." 이런 답변을 들었다. "총무님이 안 된데요. 그러면 손님들이 불쾌하게 생각하니까요." 남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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