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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의 찬양 (시 148:1-14)

성탄절 조회 수 1207 추천 수 0 2023.12.31 21:22:54
설교보기 : https://youtu.be/-xsesfPblfk 
성경본문 : 시편 148:1-14 

만물의 찬양

148:1-14, 성탄 후 1, 20231231

 

 

시편 148편은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납니다. 시편 마지막 묶음인 146편부터 150편까지 다섯 편이 똑같은 형식입니다. 구약 원전인 히브리어 성경의 문장 구성도 똑같습니다. 할렐루야는 찬양하라.’라는 뜻의 히브리어 할렐루와 여호와를 가리키는 의 합성어입니다. ‘할렐은 찬양이라는 명사형 단어입니다. 어떤 복음 찬송가에 할렐루 할렐루 할렐루야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이는 찬양하라 찬양하라 여호와를 찬양하라.’라는 뜻입니다. ‘할렐루라는 단어가 어미 변형으로 1-14절에 반복됩니다. 이를 우리말 성경은 뜻풀이해서 찬양하라.’라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148편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뉩니다. 전반부인 1-6절는 우주론적 차원에서 찬양하라.’를 노래합니다. 하늘, 높은 곳, 천사, 군대, 해와 달, 밝은 별, 하늘의 하늘, 하늘 위의 물이 거론됩니다. 군대는 하늘의 군대를 가리킵니다. 하늘의 하늘은 눈에 보이는 하늘보다 더 높은 차원의 우주를 가리킵니다. ‘하늘 위의 물이라는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고대인들은 하늘 너머에도 물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창세기에도 궁창을 만들어서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로 나누었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을 향해서 여호와를 찬양하라.’(할렐루)라고 시편 기자는 외칩니다. 만물의 찬양입니다.

후반부인 7-14절에는 땅에 있는 것들이 열거됩니다. 용들과 바다, 불과 우박과 눈과 안개와 광풍, 산들과 작은 산과 과수와 백향목, 짐승과 가축과 기는 것과 새, 그리고 왕과 백성과 고관과 재판관, 총각과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이 모두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해야 합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148편은 먼 우주부터 가까이 지구에 있는 만물이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외침입니다. 장엄한 심포니 연주처럼 들립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시편을 낭만적으로만 읽으면 곤란합니다. 경치 좋은 곳에 가서 참 아름다워라.’라고 찬송하거나, 또는 한국교회에서 하나의 신앙적 트렌드로 자리한 경배와 찬양집회에 참석해서 감동하는 것쯤으로 말입니다. 이 시편만이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는 굴곡진 역사를 살았던 사람들의 신앙고백입니다. 실제로는 찬양할 수 없는 숙명에 떨어진 사람들의 고백이고 외침이며 절규입니다. 148편은 바벨론 포로 이후에 살았던 사람들의 불렀던 노래입니다. 바벨론 포로 상황이 우여곡절 끝에 끝나기는 했으나 다윗 왕조의 재건이나 예루살렘 성전 전통의 회복은 요원했습니다. 이런 현실적인 어려움 가운데서도 오늘 시편 148편을 쓴 사람은 패배주의나 냉소주의에 떨어지지 않고 만물의 찬양을 외쳤습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현실 도피인가요? 종교적 마약 중독 증상인가요? 비유적으로, 부부 사이가 심각해져서 이혼이냐 아니냐 하는 마당에, 또는 구조 조정으로 회사를 그만두어야 할 상황에서 할렐루야, 여호와를 찬양하라.’라고 외치는 형국과 비슷하니까요.

 

창조 영성

148편은 무턱대고 염불 외우듯이 찬양하라고 다그치는 게 아닙니다. 찬양하라고 말하는 근거는 5-6절에 나옵니다. 이 두 구절만 제가 여러분에게 잘 설명해도 오늘 설교자로서 할 일은 다 하는 것이겠지요.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함은 그가 명령하시므로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그가 그것들을 영원히 세우시고 폐하지 못할 명령을 정하셨도다.

 

여호와께서 명령하시므로 만물이 지음을 받았다.’라는 사실이 여호와를 찬양해야 할 근거입니다. 하늘과 해와 달과 별, 그리고 산과 바다가 그렇게 존재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랍고 신비로운지는 여러분도 다 알고 인정하실 겁니다. 멀리 경치 좋은 장소까지 가지 않고 가까이 있는 가로수만 봐도 그 창조 생명의 오묘함 앞에서 여호와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대인들은 여러 가지 일에 마음을 빼앗겨서 하늘이나 별이나 구름이나 안개나 서리나 고드름을 볼 겨를이 없습니다. 나르시시즘이라 할 정도로 자기에게 집착하니까 주변 세계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겁니다. 저는 지금 자연에 대한 감수성이 예민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시편 기자도 우주와 자연 자체를 찬양하라는 게 아닙니다. 말하자면 자연숭배가 전혀 아닙니다. 고대 유대인 신앙에서 자연숭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자연숭배는 근동의 자연주의 종교의 밑바탕이었습니다. 그들은 해를 섬기고 달을 섬기고 별을 섬겼습니다. 그것들을 두려워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오히려 해와 달과 별을 향해서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외칩니다. 실제로 해와 달과 별이 여호와를 찬양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표현은 해와 달과 별까지도 여호와의 창조 능력을 드러낸다는 사실에 대한 메타포입니다. 여호와의 창조 능력의 가장 큰 특징은 선하심입니다. 여호와의 그 선하심이 우주와 자연의 동력입니다. 우주와 자연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실제로 절감하는 사람은 당연히 여호와를 찬양하겠지요.

저는 지난봄에 음식물 쓰레기로 퇴비를 만들려고 텃밭 구석진 곳에 단단하 플라스틱 통을 땅에 묻었습니다. 물기 빠지라고 통 바닥은 그라인더로 잘라냈습니다. 뚜껑을 완벽하게 달아두었는데도 어찌 된 영문인지 통 안에서 구더기가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음식물 쓰레기를 잘 먹어서 그런지 살이 포동포동 쪘습니다. 아내에게 구더기를 보여주겠다고 하자 손사래를 칩니다. 징그럽게 보이지만 그것도 다 생명체입니다. 생명체라면 하나님의 창조와 연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다면 구더기를 혐오할 수는 없겠지요. 제가 구더기를 좋아한다거나 뱀과도 친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충분히 알지 못할 뿐이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여호와의 선하신 창조 능력을 드러냅니다. 이게 맞는 말인가요?

오늘 본문이 말하는 해와 달과 별만이 아니라 돌과 흙도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 사건입니다. 모든 사물은 창조의 빛을 발산합니다. 그 빛을 느끼는 사람이 있고 무감각한 사람이 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가 1886년에 그린 <한 켤레의 구두>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자기가 신던 낡은 구두를 그렸다는 말도 있고, 아내의 구두라는 말도 있습니다. 여하튼 그 그림에서는 아우라가 느껴집니다. 그 구두를 만든 사람, 그 구두의 재료인 동물의 가죽, 그 구두를 신은 사람과 발자취까지 은폐의 방식으로 그 그림이 담겨 있습니다. 창조의 빛이라 할 존재의 빛이 드러납니다. 이 그림을 철학적으로 분석했던 마틴 하이데거에 따르면 사물은 하늘과 땅과 신성과 사멸할 자의 회합입니다. 구두를 다시 보실까요? 구두에는 태양 에너지가 들어와 있고, 땅에서 나오는 식물을 먹은 동물의 가죽이 있고, 구두를 제작하도록 이끈 천사가 있고, 결국 그것들은 사멸할 것입니다. 커피 한잔에도, 과일 한 조각에서 이런 존재의 심연이 놓여 있습니다.

이게 말장난일까요? 지적 유희일까요? 순전히 관념에 불과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주 확실한 리얼리티입니다. 제가 몇 주일 전 설교하기 전에 예배하는 우리 모임이 동화의 한 장면 같다고 말씀드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물 하나에서도 거룩한 힘을, 또는 존재의 신비와 창조의 빛을 느낀다면 예배하는 우리 전체 모임은 오죽하겠습니까. 사물과 일상을 이런 창조의 깊이에서 보는 사람은 여호와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물과 일상에서 이런 존재의 깊이와 신비를 경험하는 것 자체가 바로 할렐루야’, 즉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말씀이 가리키는 내용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으신가요? 일상의 어려움에 휘둘리더라도 다시 정신 차리면서 창조의 영성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으신가요? 그런 마음을 담아서 시편 기자는 25백 년 전에 바벨론 유수를 겪은, 그리고 그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유대 백성들을 향해서 할렐루야를 외친 것입니다. 거기서만 참된 힐링이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겠지요.

 

홀로 높으신 분

시편 148편 기자의 눈에 또 하나의 중요한 관점이 들어왔습니다. 5-6절에서는 자연의 심연이 언급되었다면 여기서는 역사의 심연이 언급되었습니다. 13절을 들어보십시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

 

위 구절은 여호와에 관해서 두 가지를 사실을 말합니다. 하나는 여호와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다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살던 시대는 바벨론 포로 유수와 직후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당시에는 바벨론과 바벨론을 패망시킨 페르시아 황제의 이름만이 홀로높았습니다. 그들이 인간 역사를 이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유대라는 작은 나라는 나락으로 떨어졌기에 유대인들의 신인 여호와는 무능력한 신으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오히려 역사의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보았습니다. 아무리 강력한 제국이라 하더라도 여호와와 비교될 수 없습니다. 여호와의 이름만이 홀로높으십니다. 황제의 이름과 그의 일은 역사와 더불어 잊히게 마련이고 여호와의 이름만이 드러납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이게 말이 되려면 다음의 역사적 사실을 전제해야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휘날리고 신성시하는 모든 제국은 역사에서 무너졌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요즘 저는 대구성서아카데미 사이트에 일흔 살에 다시 읽는 요한계시록묵상 글을 일주일에 다섯 번 올립니다. 요한계시록은 로마 제국의 박해 가운데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는 문서입니다. 그것을 기록한 요한은 반복해서 바벨론이 망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바벨론은 로마를 상징하는 이름입니다. 요한은 기원전 6세기에 망한 바벨론처럼 기원후 100년 어간에 한창 기세를 올리는 로마 제국도 하나님의 심판으로 패망한다고 외쳤습니다. 그러니 로마 제국의 폭력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한 겁니다. 요한이 살아있을 때 로마는 멸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그런데도 직접 목격한 것처럼 말할 수 있었던 데에는 자기 신성화에 떨어진 제국은 반드시 망한다는 사실을 뚫어보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그런 영적 통찰력을 여호와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다.’라고 노래하는 시편 148편에서 배운 거 아닐까요?

13절이 말하는 다른 한 가지는 여호와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표현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온 세상이 충만하다는 게, 만물을 초월한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가장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은 여호와가 여호와로 인정되는 어떤 사태를 가리킵니다. 가장 분명한 특징은 생명 충만입니다. 제국은 생명을 죽입니다. 자기 영광을 위해서 전쟁도 불사합니다. 의도적으로도 생명을 죽이기도 하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런 흐름에 휩쓸려서 사람도 죽이고 동물도 죽이고 자연까지 죽입니다. 요즘 우리나라 정치계는 거의 내전을 방불합니다. 서로 모욕하고 혐오하고 제거하려고 합니다. 이게 인간 역사였습니다. 오죽했으면 창세기를 기록한 사람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문제로 에덴동산에 쫓겨난 다음에 시작된 현실 역사에서 가장 먼저 발생한 사건을 형이 아우를 죽인 존속살해로 기술했겠습니까.

이런 인류 역사로만 본다면 현실이 암담하나 시편 기자는 여전히 세상에 생명이 충만하다고 보았습니다. 여전히 아기가 태어나고, 여전히 쌀과 밀이 생산되고, 과일나무가 과일을 맺습니다. 공중에는 새가 날고, 강과 바다에는 고기가 삽니다. 참담한 상황 가운데서도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돕고 연대하며 희생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바벨론과 로마 제국은 자기 신성화를 위해서 전쟁을 벌이지만, 그리고 오늘날의 부자 나라는 자기들이 더 잘 살기 위해서 기후위기를 나 몰라라 하지만 여호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명을 충만하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는 이끼가 지구 생태계를 살릴지 누가 압니까? 그분의 영광은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납니다. 그러니 그분을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할렐루야 공동체

모두가 여호와를 찬양하면 좋겠으나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찬양하거나 자기가 만든 것을 찬양하는 데에 길들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찬양하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소수입니다.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주변 제국의 틈바구니에서 고유한 영적 시각으로 창조주 여호와를 인식하고 기뻐하면서 시련 가운데서도 찬양했습니다. 그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마지막 14절을 들어보십시오.

 

그가 그의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 그는 모든 성도 곧 그를 가까이 하는 백성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 받을 이시로다 할렐루야.

 

백성의 뿔을 높인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구원의 확신과 삶의 활력을 준다는 뜻입니다. 무소불위의 바벨론 제국이나 로마가 그런 힘을 주는 게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힘이 되어주시니까 그의 백성들은 여호와를 찬양할 수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사랑받은 사람이 존재의 기쁨과 용기를 얻듯이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소수의 영적 공동체입니다. 우리의 의지나 우리의 힘만으로는 그렇게 살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시편 기자가 살던 바벨론 제국이나 페르시아 제국과 같기 때문입니다. 돈과 정치 권력과 각종 소비와 여흥이 지배하는 세상이니까요. 웬만해서는 그런 세상과 어울려서 그럭저럭 살고 싶어집니다. 그런 삶이 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된 자유는 없습니다. 백성의 뿔(호른)을 높이신 그분께서 우리의 뿔을 높여주셔야만, 즉 구원의 확신과 생명 충만감과 영혼의 자유가 우리를 불길처럼 사로잡아야만 여호와를 찬양할 수 있습니다.

저는 설교를 시작하면서 시편 148편은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뜻의 히브리어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중간에도 할렐루가 반복해서 나옵니다. 매일 할렐루야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도 있기는 합니다. 전화를 받을 때도 첫 마디가 할렐루야입니다. 그것도 허스키 보이스로 그렇게 합니다. 거룩하게 보이려는 언어 습관에 빠져 있으면서 성 소수자를 배척하고, 일종의 교회 제국주의인 교회 성장론을 맹목적으로 추구합니다. 시편 기자의 저 말을 제대로 들었다면 일상의 삶이 할렐루야로 채워지도록 노력할 겁니다. 그래도 일상의 곤궁함 때문에 흔들리는 순간은 옵니다. 다시 중심을 잡고 가던 길을 가면 됩니다. 이럴 때 옆에 믿음의 도반들이 있으면 큰 힘이 됩니다. 그런 도반 공동체가 바로 교회 에클레시아입니다. 오늘 키워드로 바꾸면 교회는 할렐루야 공동체입니다.

2023년이 오늘로 끝납니다. 어떻게 한 해를 살아오셨나요? 2024년에는 어떤 마음으로 살고 싶으신가요? 무엇을 이루고 싶으신가요? 저는 할렐루야 신앙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 싶습니다. ‘만물의 찬양이라는 지 들어가고 싶습니다.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8:20)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기에 그 길을 넉넉히 갈 수 있으리라 희망합니다. 할렐루야! 라우다테 도미눔(laudate Domin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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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소유와존재

January 01, 2024
*.254.11.100

"이게 맞는 말인가요?" "이게 말이 되나요?" " 이 표현이 손에 잡히십니까?"...


오늘 설교에 이런 표현들이 유난히 눈에 띕니다.

곰곰히 생각해 봅니다.

예전에는 그래 말이 안되지, 손에 안잡혀,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어

이렇게 받아들여 졌다면

이제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현실로 인식할 수 있을까?

내가 세상의 생명 형식에 너무 깊이 빠져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실제로 하나님을 잘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

라는 질문으로 받아들여 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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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01, 2024
*.182.156.241

ㅎㅎ 소유존재 님이 설교문을 정말 꼼꼼하게 읽는군요.

겉으로 드러난 문장 형식만이 아니라 내용과 그 흐름까지요.

사실 설교는 성서의 세계가 이 세상이 말하는 세계와 얼마나 다른지를

사람들이 알아듣게 설명하는 작업이에요.

뭐가 다른지를 모르는 사람이 많고,

그걸 알아듣게 설명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나도 그런 설명의 어려움을 늘 경험합니다.

우리는 일상에 과몰입하는 방식의 삶에 길들어서

다른 걸 다르게 느끼지 못하는 거지요.

칼 바르느가 하나님을 '절대타자'라고 표현하거나

'하나님은 하나님이다.'라고 표현하는 게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거지요.

신학적으로 유식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근본을 새롭게 바라봐야 한다는 거에요.

어린아이라도 그런 눈이 열리면 신학자 못지 않게 새로운 세계를 느낄 겁니다.

프뉴마(바람, 기, 영, 숨)를 온 영혼으로 느끼는 사람이라면

세상이 말하는 행복의 조건에 휘둘리지 않겠지요.

주님 안에서 2024년이 더 새롭고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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