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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https://youtu.be/qNZZ3YFWDUM 
성경본문 : 마태복음 13:31-33, 44-50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

13:31~33, 44~50, 성령강림 후 9, 2023730

 

 

13:31~33절과 44~50절에 천국비유가 나옵니다. 우리말 성경이 천국이라고 번역한 헬라어는 βασιλεία τν ορανν입니다. 이 헬라어를 순수 우리말로 번역하면 하늘나라입니다. 헬라어의 의미를 살린다면 하늘의 능력, 기운, 또는 다스림입니다. 한자 번역인 천국은 공간적인 의미가 강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우주의 한 공간 이미지를 떠올리겠지요. 우주 공간에 그런 장소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하늘나라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그 하늘나라를 경험할 수 있을까요? 세상살이가 너무 재미있거나 너무 힘들어서 하늘나라에는 관심이 없으신가요?

하늘나라 비유

우선 하늘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 다섯 가지를 간단하게 확인해봅시다. 첫째 비유는 겨자씨입니다. 13:31~32절은 이렇습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이 구절에서 겨자씨의 폭발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농사를 직접 짓거나 텃밭이나 꽃밭을 가꾸는 분들은 겨자씨만이 아니라 모든 씨에 이런 폭발력이 있다는 사실을 직접 경험하셨을 겁니다. 올해 저는 텃밭 작물의 종류를 늘렸습니다. 옥수수도 심었는데, 모종이 아니라 씨를 뿌렸습니다. 옥수수 씨 하나가 자라면 옥수수 두세 자루를 맺습니다. 한 자루에서 수백 개의 낱알이 나옵니다. 옥수수 씨에 들어있는 생명력이 압도적이라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놀라운 현상은 지구에서만 벌어집니다.

33절에는 누룩 비유가 나옵니다. 일정한 조건만 맞으면 누룩은 발효 현상을 통해서 밀가루를 크게 부풀립니다. 이것도 지구에서만 벌어지는 특별한 현상입니다. 겨자씨와 마찬가지로 누룩도 세계를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겨자씨와 누룩이 일으키는 변화는 너무 엄청나고 압도적이라서 기적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태평양의 작은 섬에 사는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으로 변하는 나비효과라고 불러도 됩니다.

44절에는 밭에 감춰진 보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걸 발견한 사람은 기뻐서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다고 합니다. 보화가 어떤 사람의 삶을 완전히 바꾼 겁니다. 45~46절에 네 번째 비유인 진주 장사꾼 이야기가 나옵니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밭에 묻힌 보화 비유와 극히 값진 진주를 발견한 장사꾼 비유는 비슷합니다. 두 비유 모두 사람의 행동을 바꾸는 힘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소유는 돈만이 아니라 자기의 인생 전체를 가리킵니다. 자기 인생을 다 걸 수 있을 정도로 어떤 압도적인 힘에 사로잡혔다는 뜻입니다. 절대적인 세계를 경험한 사람에게는 그 이외의 것이 모두 상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4:17)라고 선포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회개(메타노이아)는 삶의 모양이 아니라 방향을 바꾸는 겁니다. 자기의 소유로부터 하늘나라로 말입니다. 이게 억지로 되지는 않습니다. 땅에 묻힌 보화와 값진 진주를 발견할 때만 가능합니다.

47~50절에 나오는 마지막 다섯 번째 비유는 각종 물고기를 잡는 그물 이야기입니다. 물고기에게 그물은 압도적인 힘입니다. 어떤 물고기도 그물 안에 들어오면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어부는 그물 안에 든 물고기 중에서 쓸만한 것은 그릇에 담고 쓸만하지 못한 것들은 내버립니다. 그 의미를 49~50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예수께서 말씀하신 다섯 가지 비유는 하늘나라에 관해서 아주 분명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하늘나라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강력하고 압도적이며 절대적인 능력이라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그것을 경험한 사람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을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봅니다. 자기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기가 세상에서 집착하던 것을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최신형 스마트폰을 손에 넣으면 구식 핸드폰을 버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성경이 일관되게 전하는 하나님 경험이 바로 그것입니다. 성경의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놀라워했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을 찬송했습니다. 출애굽 당시에 애굽에 임했던 열 가지 재앙도 바로 그 사실을 가리킵니다. 홍해를 건넌 뒤에 모세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은 다른 여자들과 함께 소고를 잡고 춤추면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15:21) 예수께서 병든 자와 장애인을 고쳤을 때 사람들은 놀라워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15:31)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만 가능한 놀라운 능력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언제 어떻게 하나님을 경험하셨나요? 여기서 하나님은 바로 하늘나라를 가리킵니다. 언제 하나님의 다스림을 느끼셨나요? 하나님 경험은 아브라함과 모세와 엘리야처럼, 그리고 베드로와 바울처럼 아주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가능하지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에게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 영웅은 없습니다. 종교적 영웅처럼 묘사되는 그런 이야기는 하나님이 그들을 크게 사용하셨다는 뜻이지 그들이 위대하다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을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똑같은 피조물이기에 근본에서 차이가 없으며, 차이가 있다 한들 그게 얼마나 크겠습니까. 사람이 잘났냐 못났냐, 사람이 똑똑하냐 아니냐, 하는 게 중요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험했냐가 중요합니다. 성경은 오직 그 한 가지 사실을 말합니다.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하늘나라를 경험한 사람은 누구나 영웅입니다. 세상에서 영웅이라고 불리는 사람도 하늘나라를 경험하지 못하면 미미한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그물 비유에 풀무 불에 던짐을 당하여 거기서 울며 이를 간다는 말이 나온 겁니다. 이런 말씀에 실감이 안 가시나요? 설마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아닌가요?

 

하늘나라와 일상

예수께서 말씀하신 다섯 가지 비유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중요한 또 하나의 사실은 하늘나라가 일상과 깊숙하게 관계된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겨자씨, 누룩, 보화, 진주, 그물은 모두 일상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대상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일상을 제대로 직면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자기는 일상을 열심히 사니까 일상을 직면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려고 어릴 때부터 선행학습에 열을 올리고, 연봉 높은 직장에 들어가고 원하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하고, 나름으로 인생을 즐긴다고 말입니다. 남부럽지 않게 최선을 다해서 일상을 산다고 해서 일상을 직면하는 게 아닙니다. 실제로 그들의 눈에 겨자씨와 누룩의 엄청난 힘이 보일까요? 자기 소유를 포기해도 괜찮다 할 정도로 의미 있는 절대적인 대상이 그들에게 있을까요? 세상이 제시하는 삶의 기준을 맞추려고 애쓰고, 자기를 성취하는 일에만 몰두하면서 자기를 압도하는 힘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어딘가에 굴복당하는 삶을 가장 수치스럽게 여기는 현대인들에게 하늘나라 경험은 다른 나라 이야기일 겁니다.

그물이야기를 조금 더 집중해보십시오. 우리는 모두 그물 안에 들어가 갇힌 물고기입니다. 자기는 자유인이기에 그물과 상관없다고 말할 사람들도 있긴 합니다. 자유인으로 사는 건 좋습니다. 국가와 이데올로기와 윤리 도덕과 종교에서 자유롭게 살아도 좋습니다. 자기는 죽음도 두렵지 않다고 말하겠지요. 그러나 인간의 실존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자기가 자유롭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어느 누가 물질에서 벗어날 수 있나요? 숨을 쉬지 않고 살지 못합니다.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도 없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와 죽음 문제가 우리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앎의 문제에서도, 즉 자기가 자유롭다고 확신하는 그 인식의 차원에서도 우리는 그물의 운명에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의 앎은 늘 제한적이고 부분적입니다. 바울은 고전 13:9~10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면서 산업발전에 매달리다 보니 지금 우리가 기후위기를 맞게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같은 그물에 갇힌 물고기처럼 살아갑니다. 그런데 마지막이 오면 천사들이 의인과 악인을 구별해낸다고 했습니다. 그물 안에 갇힌 물고기 같은 운명에 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종말론적인 다스림이 우리를 붙들고 이끌어가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 마지막에 일어날 일을 지금 여기서 살아내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 대목이 실감하기 좀 까다롭기는 합니다. 이런 겁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종말이 이미시작되었습니다. 아직은 그물 속에 들어있으나 실제로는 그물 밖을 사는 겁니다. 우리는 이미 의인으로서 하나님의 선택과 건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하늘나라의 그 압도적인 힘을 일상에서 실감하고 절감하면서 사는 겁니다. 겨자씨와 누룩과 땅에 묻힌 보화와 값진 진주와 그물에서 벌어지는 그 절묘하면서도 신비롭고 막강한 생명의 힘에 휩싸여서 사는 것입니다. 이게 실제로 가능한가요? 관념에 떨어질 뿐인가요?

저는 아침 6시 반에 알람 소리를 듣고 일어납니다. 침대에 걸터앉아서 오늘 보석 같은 하루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바칩니다. 대략 한 시간 동안 대구성서아카데미사이트에 동영상과 성경 묵상을 정리해서 올립니다. 7시 반에 부엌으로 나갑니다. 가장 먼저 커피를 내리고 밖에서 기다리는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줍니다. 과일을 깎고, 달걀을 찌거나 달걀부침을 만듭니다. 식빵을 굽고 치즈를 얹어서 먹습니다. 커피와 과일과 빵을 매일 손으로 만지고 입으로 먹고 향기를 맡습니다. 그것들이 제 식탁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놀라자빠질 정도의 엄청난 힘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커피만 해도 그렇습니다. 케냐나 브라질에서 커피나무가 자랐겠지요. 태양과 물과 흙이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지구 전체와 우주 전체의 힘이 거기서 작용한 겁니다. 하늘의 다스림(바실레이아)입니다. 그걸 얼마나 깊이 느끼느냐에 따라서 커피를 직면하느냐, 아니면 스쳐 지나가느냐가 결정됩니다. 만약 겨자씨와 누룩 현상에 실제로 마음을 준다면 그의 눈에 다른 일들은 사소하게 보일 겁니다. 땅에 묻힌 보화와 값진 진주와 그물을 통해서 일어나는 하늘나라가 이 그의 삶을 지배하기에 다른 일들은 웬만하면 양보할 수 있습니다. 태풍이 들이닥쳤는데도 부부싸움을 하거나 사업 걱정할 사람은 없겠지요.

지금까지의 설명이 오늘의 현실에서는 거리가 멀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첫째, 우리는 일상에서 처리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일상 자체의 메커니즘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정치인들은 정치 공방에 마음을 두겠지요. 교회를 개척한 젊은 목사는 교회 부흥에만 신경을 쓰겠지요. 수능을 앞둔 청년은 높은 점수에만 마음이 갈 겁니다. 우리는 보통 이런 일상적인 일에 몰두해서 삽니다. 일상의 바쁜 현상이 열심히 살도록 우리를 자극합니다. 물론 이런 일상은 아무리 강조해서 부족할 정도로 중요합니다. 그 일상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루터와 칼뱅의 신앙 전통으로 사는 개신교인들에게 모든 직업은 소명이니까 거룩한 일과 세속적인 일을 구분해서도 안 됩니다. 모든 일상을 열정적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문제는 일상의 과잉입니다. 일상 안으로의 매몰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 일상에서 하늘나라가 어떻게 나타나고 경험되는지를, 즉 일상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살펴서 헤아리지 못합니다. 일상에서 아무리 큰 업적을 남겨도, 거칠게 표현해서 돈은 많이 벌고 인기는 많이 끌었다 해도 영혼은 더 빈곤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일상의 삶이 너무 고통스러운 분들이 있습니다. 쪽방촌에 사는 분들, 정신 장애나 지체 장애를 안고 사는 분들, 가학적인 성격을 보이는 배우자와 함께 사는 분들의 일상은 아무리 생각해도 하늘나라를 가깝게 느끼기 힘듭니다. 만성 두통에 시달리거나 오랜 세월 투병하는 사람이 어떻게 일상에서 하늘나라의 압도적인 힘을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만 있으면 일상의 고통을 쉽게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고는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이미 일상에서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것이 숨어 있기에 실감하지 못할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의 다스림은 우리가 그 어떤 식으로도 예측하거나 계산해낼 수 없는 방식으로 모든 이들의 일상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겨자씨처럼, 누룩처럼, 땅에 감춰진 보화처럼!

 

하늘나라와 기쁨

우리의 마지막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을 하늘나라의 힘에 온전히 의존해서,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늘나라에 굴복해서 살아가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말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44절에 답이 나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하늘나라를 경험한 사람은 기뻐합니다. 겨자씨와 누룩과 값진 진주와 그물 이야기에도 당연히 기쁨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기쁨은 신비롭고 놀라운 일을 발견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영적인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외계인을 찾으러 우주선을 타고 떠났던 우주비행사가 지구와 비슷한 행성에 내려서 지적 생명체를 처음 만나는 경험과 비슷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은 모두가 그런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하나님을 즐겁게 노래하고 찬송했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믿어지시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들입니다.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인정받았습니다. 밭에 묻힌 보화를 발견했고 값진 진주를 발견했습니다. 자기 소유를 다 포기해도 좋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존재론적 기쁨을 안고 삽니다. 그리스도인이 기쁨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그게 어딘가 이상한 겁니다. 설교자로서 마지막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늘나라가 이미 여러분의 일상에서 시작했으니, 죽음까지 포함한 여러분의 미래를 걱정하지 말고 현재를 살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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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은혜

August 04, 2023
*.101.66.214

일상이 소명이라면
늘 그날이 그날인 일상을 주님 섬기듯(골3:23)
최선을 다 해야 한다는 당위와
그 일상에 함몰되어선 안된다는 긴장사이의
구분이, 구별이 참 지난한 일이군요
죽을때까지 그 균형과 경계에 대한 긴장을
유지해야 함이 우리의 무거운 과제이자
기쁨으로 감당해야 할 부르심의 소망이겠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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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04, 2023
*.137.91.233

예, 저도 늘 열정적으로 대해야 할 일상과 

일정한 거리를 둬야 할 일상 사이에서 긴장하고 고민합니다.

저의 개인적인 지혜로 해결할 수는 없고,

그리스도교 영성 안으로 들어가다보면,

더 정확하게 말해서 들어간 깊이만큼 저절로 '감'이 오겠지요.

그게 바로 성령의 도우심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런 긴장과 고민이 있다는 건

영혼이 살아있다는 의미이겠지요.

무더위에 평안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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