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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사순절 조회 수 15291 추천 수 0 2009.04.06 18: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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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가복음 11:1-11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막 11:1-11)


퍼포먼스?

오늘은 사순절 여섯째 주일이기도 하고 동시에 종려주일이기도 합니다. 사순절은 예수님 부활 이전의 40일 동안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하는 교회의 전통이고, 종려주일은 예수님이 공생애 마지막 단계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사람들이 종려가지를 흔들었다는 요한복음의 보도를 따른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한 공관복음의 보도에는 종려가지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나뭇가지로 되어 있고, 그것도 흔든 게 아니라 예수님이 가는 길에 깔았다고 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어린나귀를 탔다고만 했는데, 공관복음은 그 어린나귀를 어떻게 구했는지에 대해서도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이런 차이가 있지만 모든 복음서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매우 중요한 요소로 다룬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것이 왜 중요할까요? 

예수님의 공생애를 거칠게 도표로 그린다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의 북쪽 마을인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다가 사마리아를 거쳐 남쪽으로 내려와서 예루살렘에 들어가 활동하시다가 체포당해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갈릴리는 우리나라로 치면 함경북도처럼 변방에 속합니다. 별 볼일 없는 지역의 출신에다가 목수의 아들인 예수가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의 권위를 손상하는 일을 벌였으니 무사할 리가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당시 유대교 중심인 예루살렘에 들어오지 않고 갈릴리와 사마리아에만 머물렀다면 십자가 처형을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예수님의 운명이 달라졌을 것이며, 따라서 인류의 미래도 달라졌겠지요.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루비콘 강을 건넌 것과 비슷합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이 사건을 소홀하게 다룰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 근교인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은 제자 두 명에게 마을에 들어가서 나귀새끼를 하나 얻어오라고 일렀습니다. 큰 나귀가 아니라 어린나귀입니다. 예수님은 그 나귀새끼에 올라탔습니다. 사람들은 겉옷을 벗어 나귀 등에 얹기도 하고 길에 깔기도 했고, 나뭇가지를 길에 펼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고 외쳤습니다.(9,10절)

이 장면에는 두 가지가 중요한 상징적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탄 동물이 나귀새끼라는 사실입니다. 권위 있게 보이려면 나귀가 아니라 말을 타야만 했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른 나귀가 아니라 새끼 나귀를 탔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종교적 전통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스가랴 9:9,10절에 따르면 평화의 왕인 메시아는 새끼 나귀를 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는 전차와 말과 활을 없애고 민족들에게 참된 평화를 선물로 줄 분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나뭇가지와 겉옷을 길에 깔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행동은 제왕의식에 속합니다. 이 두 가지 상징적 사건의 핵심은 예수님이 왕이라는 사실입니다. 전자는 메시야로서 평화의 왕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만왕의 왕으로서 실질적으로 능력이 큰 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가 예수님을 세상의 정치적 왕이라고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평화의 왕이라는 사실을 그런 방식으로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을 자칫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서 예수님이 가는 길에 깔고, 요한복음에 따르면 종려가지를 흔들었다는 걸 근거로 예루살렘 전체가 발칵 뒤집혀진 것처럼 말입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사람들에게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한편의 코미디처럼 비쳤을지도 모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서른 살이 넘은 한 남자가 나귀새끼를 탔다는 겁니다. 요즘 같으면 동물학대죄로 걸릴지 모르겠군요.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깔았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잠시 구경을 했겠지요. 이게 실제 상황인지 아니면 일종의 퍼포먼스인지 구분이 안 되었을 겁니다. 대다수의 예루살렘 주민들은 “별 이상한 사람들도 다 있군.” 하면서 잠시 구경하다가 흩어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소란스러운 포즈를 취하고 예루살렘에 들어갔으면 예루살렘 시민들의 거국적인 환영 대회나 예수님의 일장 연설이 있음직 하지만 아무런 일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성전을 둘러보시고 조용히 예루살렘을 빠져나갔다는 마가복음 기자의 진술을 보더라도 이건 분명합니다.


나귀새끼를 올라탄 예수

당대의 예루살렘 주민들은 아무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사실 예루살렘 입성 사건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당시의 사람들에게 크게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몇몇 사람들에게만 중요했습니다. 부활 사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그것이 생명의 현실로 인식되고 경험되었을 뿐입니다. 역사적으로 정말 의미심장한 사건들은 늘 그렇게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그야말로 갈릴리 촌사람들이 일으킨 에피소드에 불과했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이 예수님에게 무관심 했다고 한다면,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적대시했습니다. 예수님을 블랙리스트에 올려놓은 채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이 조금이라도 손상되면 당장 요절낼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이 자기를 어떻게 대할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더 이상 갈릴리와 사마리아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종교권력이 얼마나 부패했는지, 그들의 종교행위가 하나님의 뜻과 얼마나 거리가 먼지를 증언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듯이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무관심한 예루살렘 민중들과 다른 한편으로 종교 기득권에 안주하는 제사장이 장악하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님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에게 희망을 걸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무언가 열심히 움직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이번 기회에 실제로 왕으로 옹립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몇몇 제자들은 그런 정치적 야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면 자신들도 출세할 거라고 생각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로 일컬어지는 베드로마저 사탄처럼 예수님의 길을 방해하고 있었으니, 긴말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 채 그들은 호산나 하고 외칠 뿐입니다. 자기들의 흥에 겨워할 뿐입니다. 그런 와중에 예수님은 죽음을 불사하고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는 혼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 입성의 순간만이 아니라 늘 혼자였습니다. 고립무원의 지경이라는 말이 그에게 해당됩니다.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고 여우도 굴이 있지만 자신은 머리를 둘 데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성격적으로 괴팍해서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다는 게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세리와 죄인, 술친구들과 잘 어울렸습니다. 그렇게 어울린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를 이해하는 게 아닙니다. 심지어 그는 십자가 처형의 순간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게 아닌가 하고 외쳤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지금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는 예수님의 상황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추종자들과 구경꾼들이 모였지만 그는 속으로 그렇게 외치고 있었을 겁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채 그렇게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우리는 그를 메시야로 믿고 찬양합니다. 그렇게 죽은 이에게 우리는 구원을 요구합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이 외친 찬송 “호산나, 찬송하리로다.”가 바로 그런 뜻입니다. 가장 희극적인 방식으로 가장 비극적인 운명을 향해서 도살장의 어린양처럼 끌려가고 있는 예수님을 향해서 가장 높은 곳으로부터의 구원을 바라고 있습니다. 엄청난 역설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을 향해 나가고 있는 예수님을 호산나 하고 찬송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예수님이 어떤 상태입니까? 며칠 안에 죽습니다. 죽을 사람에게 “구원하소서.” 하고 외치다니 말이 되나요? 예수님 스스로도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의 외침은 나중에 현실이 되었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오늘 성서본문이 가리키고 있는 이런 역설적 상황, 그런 신앙을 이해하려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처한 신앙의 자리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당한 십자가 처형 앞에서 혼비백산했습니다. 자신들이 집도 가족도 버리고 따라온 선생님이 죽었다는 사실을 그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 십자가의 죽음이 인류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실은 안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몰랐습니다. 가능하면 이 잔을 물리쳐 달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괜한 게 아닙니다. 십자가 죽음 이후에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행했던 지난 1,2년 동안의 생활을 되돌아보며 각자 고향으로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으로 모든 게 끝났다면 예수님과 그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다른 여러 메시아 운동 중의 하나에 머물렀겠지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경험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죽었던 예수님을 실제로 만나는 경험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경험하고, 집단적으로도 경험했습니다. 그 경험이 무엇인지 그들은 구체적으로 묘사할 능력이 없었습니다만, 그들에게 분명한 것은 죽었던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함께 모였습니다. 그들의 경험이 무엇인지 터놓고 생각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결국 그 경험이 구약에서 이미 예언으로 제시된 부활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모든 것이 확연해졌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에 행하신 모든 사역이 메시아의 일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만이 메시야이며, 그리스도이고, 주님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밖으로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식이 오늘 극동에 사는 우리에게까지 전파되었습니다.

마가복음 공동체도 이런 복음의 역사 안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로 믿게 되자 예루살렘 입성 장면이 새롭게 기억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곧 인류 구원을 위한 십자가의 길이었다고 말입니다. 그의 수난이 바로 인류 구원의 길이었다고 말입니다. 그들은 그 당시에 몰랐던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된 새로운 시각으로 예루살렘 입성을 부분적으로 재구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이 수난과 죽음의 길이었지만 그것만이 인류가 생명을 얻는 길이었기에 예수님은 ‘호산나’, 구원하소서 하고 찬송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나귀새끼를 탄 예수님의 모습이 희극적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예루살렘 주민에 의해서 무시당한다 해도 그들은 주님을 통해서만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그 장면은 마가공동체의 신앙적 실존 실존의 자리였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호산나’ 찬송을 부르지만 세상은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디가 문제입니까? 마가복음의 전체 주제인 메시야 은폐성이 여기에도 적용됩니다. 아무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식하지도 경험하지도 못했습니다. 그것은 훗날 제자 공동체에게 고유한 방식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것은 그것을 인식한 사람만이, 경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진리가 은폐되어 있다는 사실은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조상 대대로 동굴 안에서만 살고 있던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우연하게 동굴 밖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전혀 다른 세상을 경험했습니다. 햇살, 나비, 꽃향, 민들레 홀씨를 보았습니다. 그가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와서 동굴 밖의 세계를 아무리 자세하게 설명해줘도 동굴 안에만 있던 사람들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도, 동의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인격이나 지식의 유무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진리의 은폐성이 그 대답입니다.

오늘 기독교인의 실존은 마가복음 공동체의 그것과 늘 동일합니다. 우리는 바울과 마찬가지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직접 환상적인 경험을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그의 성만찬에 참여합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의 신앙에서 늘 새롭게 반복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곧 부활 경험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납득시킬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은폐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예배를 모른 척 할 겁니다. 우리의 예배가 그들에게 희극적으로 비칠지도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찌해야 할까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갈 뿐입니다. 우리의 길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는, 십자가 처형을 당하고 죽은, 표면적으로는 아주 평범해 보이는 그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것의 최선은 예배입니다. 종려주일을 맞아 우리 모두 영혼의 목소리로 이렇게 외칩시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20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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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시와그림

April 06, 2009
*.109.77.242

종려나무를 흔들며 환호하는 자들과  
어린나귀를 탄 예수의 모습은 예루살렘 입성의 아이콘인양
내게 정형화된 장면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예루살렘 주민들에겐 우스꽝스럽고 낯선 퍼포먼스처럼
보였을지모른다는 말씀에서,
그리고 기독교신앙은 세상에서 더 낯설어져야 한다는 말씀에서
정형의 껍질이 벗겨지고, 세상에 늘 상대성으로 자리하는
기독교신앙의 말갛고 투명한 모습이 보이는 듯 합니다
예수가 은폐된 메시아라면
그를 믿는 우리의 신앙은 세상에선 늘 어리석은 것이 되겠지요
부활절을 맞이하며
어리석지도 우스꽝스럽지도 않는 나는 어찌할바를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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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April 06, 2009
*.139.165.30

지혜롭게 어리석은 삶을 살아야 하는 게
바로 기독교인의 실존이 아닐는지요.
세상을 낯설게 보고
세상으로부터 낯설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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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April 06, 2009
*.206.88.145

목사님, 십자가의 죽음이 인류구원의 길 이라는 것을 예수도 몰랐다는 말씀이 잘 이해가 안되는군요..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같이  만찬을 하실때 포도주와,  빵이 자신의 피와, 살이요,
이것이 곧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는  자신의 운명임을 암시 하지 않았나요? 
또한 복음서의 여러  비유와 제자들과의 대화를 살펴봐도
 예수는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는가요?
또 한가지 더 오늘 설교 말씀에서  성만찬에 참여 하는 것이 곧 부활경험 이라고
하셨는데  저는 솔직히 성찬에  참여 하면서도   제가 참여 하고 있는 성찬이 부활경험이라는
인식이 잘 안되는군요 ..
어떻게 성찬이 부활경험이 될수 있는지 좀 제가 알아 들을수 있도록 설명좀 해 주시면  안되나요? 
또한 성만찬 말고 다른 방법으로 신자는 부활 경험을 할수는 없는 것인지도 좀가르쳐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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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April 06, 2009
*.139.165.30

이해가 잘 안 되지요?
솔직하게 말하면
별달 님이 어떤 고정관점에서 빠져 있기 때문이랍니다.
<오늘날 주석학자들에 의해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주장에 따르면
수난 예언들은 예수 자신의 권위 있는 말씀이 아니다.>
현재 개신교회 신학자 중에 가장 정통적인 입장에 있는 판넨베르크가 한 말이에요.
졸역 <사도신경해설> 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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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모래알

April 06, 2009
*.116.154.86

어제 저희 초등부 학생들과 성경공부 시간에 첫 질문이
나귀가 도대체 어떻게 생긴 거냐는 것이었습니다.
왜 주님께서 나귀를 타셔야 했던가는 질문이
그 아이들에게도 어느 날 불현듯 오기를 바라지만
아이들에게 더 현실적인 문제는
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지금도 예수를 구주로 믿지 않느냐 하는 거에요. 

뉴욕에는 유대인 인구가 많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늘 유대계 친구들이 한 두 명은 있게 마련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서 듣고 배워온 것들 때문에--예수를 십자가에 죽였고
여전히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들--이 친구 관계에서
아이들에겐 큰 걸림돌이 되는 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지요.

저희 집에서 가까운 곳에 로만 캐톨릭 계의 교회 하나가 있는데
종려주일이면 사제(?) 중 하나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를 크게 부르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교인들과
교회와 거기 가까운 쪽으로 동네를 한 바퀴 돌곤 합니다.
전 그 옛날 예루살렘의 구경꾼들처럼 그걸 사진에 찍었네요. ㅎㅎ

하지만 절대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일에는 구경꾼이 되면 안 되겠죠?
사순절 마지막 주간. 
고난과 죽음과 마침내 부활에 이르는 마지막 시간들에 대해
좀 더 깨달음이 있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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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April 06, 2009
*.139.165.30

멋쟁이 할머니 주일학교 선생님이시군요.
어린이들을 성서의 놀라운 세계로 난 문으로
잘 인도하는 선생이 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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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1]유니스

April 06, 2009
*.217.40.87

종려주일의 이 말씀을 본문으로 목사님의 인도를 따라
참으로 새롭게 묵상이 됩니다.

예루살렘 성민에게는 우스꽝스러운 코메디, 퍼포먼스 정도였다 라는말씀을 들으면서
저는 예수님께서 진실로 퍼포먼스를 꾸미고 행하셨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사역도 아니며,
시시하다고 생각되는 부분까지 장황하게 왜 설명이 되어야하는가?
그것은 사역의 실용적인 사건이 아니라 어떤 강렬한 메세지를 내포하는
상징적인 행위였기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어떤 예술작품을 보고나서 보지않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설명하기위해서는 그 화면을 아주 상세히 서술하기를 시도합니다.
이와 같은 선상에서 복음서 기자의 서술이 아닐까요? 

예수께서는 항상 하나님나라가 이러이러한 것이라는 설명과 행동을 하셨지만
오늘의 장면은 바로 자신이 그 하나님나라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들과 항상 'doing'으로 시간을 보내셨지만
이 때만은 'being'으로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늘과 땅이 동시에 표출되기에 역설적일 수 밖에 없는 이 현실..
아는 자는 알고 모르는 자는 웃을 수 밖에 없는 이 퍼포먼스..
기획자는 예수님 자신..

이 메세지와 연이어 오늘의 그리스도인의 퍼포먼스 예배.
모르는 자에게는 우스꽝스러우나
아는 자에게는 하늘과 땅이 이어지는 시간..
책 제목이 떠오릅니다.
'고귀한 시간낭비 - 예배'
참으로 역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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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April 06, 2009
*.139.165.30

위의 설교에서
기독교인의 신앙적 퍼포먼스와 예배,
그리고 마르바 던의 <고귀한 시간 낭비>를 연결하다니,
정말 총명한 학생이군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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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히로

April 06, 2009
*.11.176.90

플라톤의 동굴의비유 이야기를 들으며 이런저런 생각을해보게 됩니다.
저는 아직도 동굴밖을 나가지 못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저도 깊이있는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 보고 싶은데
이상하게 계속 무언가 답답한 느낌만 드는것 같습니다.
신학공부를 더 열심히 하면 될까요?
아니면 철학공부를 더 열심히 하면 가능해질까요?
날마다 기도생활과 성서를 읽는 훈련을 꾸준히 해야하는 건가요?
이 셋을 어느 정도 병행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만 이상하게도.. 저의 마음 한구석은 답답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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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April 06, 2009
*.139.165.30

히로 군은 가능성이 있는 청년이오.
답답한 걸 느낀다는 건
근본에 대해서 마음을 열고 있다는 뜻이고,
그럴 때만 거기로부터 대답을 들을 수 있을 테니 말이오.
한꺼번에 답답함이 사라지지는 않을 거요.
구도정진의 길을 가다보면
멀리서 불빛이 보이지 않겠소?
진리의 빛이겠지.
그것의 조명으로만 우리는 무언가 절대적인 것을
조금이라도 인식해나갈 수 있을 거요.
긴장감을 늦추지 않되 산보하듯이,
삶을 살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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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라크리매

April 07, 2009
*.138.56.21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공생애 이야기는
희극과 비극이 절묘하게 공존하는 스토리 같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광경과 골고다 언덕으로 가시는 광경은
그 어떤 문학작품보다 더 아이러니 하고 그로테스크하네요
부활절이 기다려 집니다
profile

[레벨:96]정용섭

April 07, 2009
*.181.161.179

부활절이 기다려진다니,
라크리매 님은 복음서 기자들의 마음을
정확하게 느끼면서 따라가고 있군요.
부활절에 만납시다.
희극과 비극이 어색하게 교차하고 있는 현실 너머에서
동터오는 참 생명을 간절히 희망하는 마음으로
환희의 찬송을 부릅시다.
좋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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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오명철

April 07, 2009
*.243.153.40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눈에는 눈물이 입가엔 미소가....

고난주간 더 깊이 들어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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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April 07, 2009
*.139.165.30

오명철 님,
우리는 모두 바로 그 한 가지 사실에
우리의 모든 영혼을 걸어둔 사람들입니다.
예수에게 일어난 고난, 죽음, 부활말입니다.
기쁨의 눈물이 가득한 고난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profile

[레벨:6]ldg

April 07, 2009
*.40.130.130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별로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는 것,
오히려 한편의 퍼포먼스나 코미디처럼 보였을 것이라는 것,
새롭게 알고 진정으로 깨닫고,
가슴으로 동의하게되는 사실이군요.
감사합니다.
<사도신경해설>은 어떻게 구입할수 있는지요?
profile

[레벨:96]정용섭

April 07, 2009
*.139.165.30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열렸다니,
좋은 일입니다.
이런 영성의 심화가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사도신경해설>은 절판이더군요.
출판사에서 다시 찍을 때까지 기다리셔야겠네요.
주의 은총이.
profile

[레벨:19]이선영

April 07, 2009
*.164.230.58

하루하루 일신상의 사소한 일들에 울고웃으며 살아가고 있는데
세상에서 코미디로 여기는  예수님의 십자가사건과 부활에 모든 것을 집중한다는 건 어떤걸까 싶어요.
이 매력적이지 않은, 별 볼일 없게 보이는 역설이
내게 생명의 현실이라는 것으로  인식되고 경험되어질 때가 오긴 하겠죠.
그때가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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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April 07, 2009
*.139.165.30

이선영 청년,
고난주간을 잘 지내지요?
"생명의 현실"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줄 아는다는 건
그만큼 그 세계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증거에요.
어린아이들이 말을 통해서 세계를 인식하듯이
우리도 그런 신앙적, 신학적, 영적 언어를 통해서
그런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답니다.
기다림의 영성으로 이번 한주간을 은혜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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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수우

April 08, 2009
*.7.141.212

왜, 머리를 그렇게 짱구처럼 자르셨나요.
그 미장원에 가지 말아요. 이젠,
십자가의 의미를 다시 다시 새롭게 또 다시 깨닫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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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April 08, 2009
*.139.165.30

내 머리가 그 귀염둥이 짱구는 못말려의 그 짱구와
비슷하단 말이죠.
고맙습니다.
좋은 부활절을 맞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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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홀로서기

April 08, 2009
*.204.173.29

밤톨같고, 귀여우시던데(어른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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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은빛그림자

April 08, 2009
*.141.3.64

밤톨같고, 귀여우시던데(어른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22222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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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April 08, 2009
*.139.165.30

홀로서기와 은빛그림자,
두 자매 님이
귀엽다 하시니
나도 그런 줄 알겠소이다. 음.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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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팝퀴즈

April 08, 2009
*.62.119.38


당시 예수님의 고독한 길, 희망에 닿아 있었던 절망의 상황이 이렇지 않았을까 떠올리게 하는
시를 만나 이곳에 놓아 봅니다.      * 아, 오랜만에 소리내어 인사드려요.





     한없이 기다리고
     만나지 못한다
     기다림조차 남의 것이 되고
     비로소 그대의 것이 된다

     시간도 잠도 그대까지도
     오직 뜨거운 병으로 흔들린 뒤
     기나긴 상처의 밝은 눈을 뜨고
     다시 길을 떠난다

     바람은 아주 약한 불의
     심장에 기름을 부어주지만
     어떤 살아 있는 불꽃이 그러나
     깊은 바람소리를 들을까

     그대 힘써 걸어가는 길이
     한 어둠을 쓰러뜨리는 어둠이고
     한 슬픔을 쓰러뜨리는 슬픔인들
     찬란해라 살이 보이는 시간의 옷은  



    :  상처 ,   정현종



     - - - - - - - -




     떠남도 허락하고
     돌아감도 허락한다
     떠나는 길과 끝나는 길이
     만나서
     모든 도중의 하늘에
     별을 빛나게 하고
     흘러가는 모든 것들을
     한 번의 폭포로 노래하게 한다.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은
     목동이여 찾아 헤매는 그대 마음인데
     부는 바람과 흐르는 시내가
     자비와 쓸쓸함으로 온다 한들
     어떤 편안한 잠이 
     그대의 소유와 상실을 덮어줄까
     어떤 길이 마침내
     죽음에게 길을 열어줄까.

     안정은 제 마음을 버리고
     강물에 비치는 고향
     때때로 무의식으로 우는 이마
     깨어서도 젖는다. 



    :   집 ,  정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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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April 08, 2009
*.139.165.30

정현종 선생님의 시는
언제가 우리의 영혼을 봄비처럼 차분하게 가라앉혀주는 것 같습니다.
팝퀴즈 님,
좋은 시 잘 읽었습니다.
감사드리구요.
행복한 부활절을 맞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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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토토

July 12, 2009
*.127.115.206

예배 참여하고 싶은데 너무 멉니다

가까운 다른 교회는 못 믿겠습니다

 

저의 희극적인 삶을 남이 비웃을 때

상관 말고, 너나 잘해!   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지만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렇게 쳐내기가 좀 애매합니다

말하지 못하고 쌓이니 스트레스가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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