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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된 믿음

부활절 조회 수 11105 추천 수 0 2009.04.20 19: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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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한복음 20:19-31 
 

복된 믿음

(요 20:19-31)


예수의 부활과 신앙의 위기

기독교 신앙이 일반 종교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신앙의 가장 중요한 토대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한 인물에게 놓여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과 그에게 일어난 사건이 없으면 기독교 신앙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불교는 이와 좀 다릅니다. 부처님이 없어도 불교 신앙은 성립됩니다. 선승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오히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합니다. 각자가 자기 안에 있는 부처를 발견하고 부처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기에 그런 깨달음의 길에서 역사적 부처가 방해가 되면 그것을 던져 버리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예수님을 없애면 신앙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우리 내부에 있는 어떤 궁극적인 진리를 찾는 것이 우리 기독교 신앙의 목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의존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토대입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가장 중요한 구원 사건이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우리가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일상적 경험에서 증명이 가능한 역사에서 공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분명히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리고 아리마데 요셉의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이것으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의 삶은 완전히 끝났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 십자가 처형 선고를 내린 빌라도와 그 측근들도 확인할 수 있고, 예수님을 신성모독자로 본 산헤드린 위원들도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은 달랐지만 그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만은 누구나 똑같이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현현은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를 추종하던 이들에게만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부활 경험자 리스트가 있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제일 처음 게바에게 나타나셨고, 다른 열두 제자, 그리고 오백여 형제, 야고보, 모든 사도, 마지막으로 바울에게 나타났습니다.(고전 15:4-8) 이런 질문이 생길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공개적으로 일어났던 것처럼 부활도 공개적으로 일어났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입니다. 일리가 있는 질문입니다. 만약 부활의 주님이 빌라도와 산헤드린 공회에 신문기자들이 사진을 찍고 뉴스를 쓸 수 있는 방식으로 나타났다면 복음 선포가 쉬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처한 영적인 딜레마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부활의 주님에 대한 저들의 경험이 아주 명백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객관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늘 위기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가장 중요한 예수님의 부활이 부정되는 순간이 온다면 우리의 신앙이 어떻게 될까요? 사이비 교주를 따르던 사람들이 교주의 실체가 드러날 때 모두 실망하고 흩어지는 것과 똑같은 일들이 벌어질 겁니다. 우리가 부활 신앙에 서 있다는 사실은 백척간두와 같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그런 절체절명의 순간을 느끼고 있을까요?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런 영적인 위기 상황을 직면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이 부활했든지 않든지 내 삶이나 신앙생활에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지금 돈 버는 일 급한데 부활은 무슨 부활인가요? 부활은 죽어봐야 아니까 그때 부활하면 좋고, 아니면 말고 하는 식의 신앙이 흔합니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 문제는 적당하게 넘어가고 대신 교회 공동체의 확장을 최대 목표로 하거나, 또는 도덕주의적 변화를 그 목표로 삼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하나의 종교생활이라고 생각한다면 예수님의 부활이 없어도 교회 운영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깊이 생각해야 할, 그렇게 해도 쉽게 답을 얻기 힘든 부활 생명을 신앙의 중심으로 삼기보다는 교회 성장을 내세우면 신자들의 더 뜨거운 반응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인 도덕성과 사회적인 역사개혁을 주장하는 것도 청중들이 매력을 느낄 만한 겁니다. 그런 것들은 세상에서도 인정해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차원에서 이런 일들은 나이브한 겁니다. 

매주일 사도신경으로 부활 신앙을 고백하는 우리가 다른 일에만 관심이 많을까요? 믿음이 없거나 지성이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과 부활에 놓인 경계선을 뚫고 나가지 못하기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마치 죽음이 명백한 현실인데도 우리가 평소에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것과 비슷합니다. 결국 여기에는 무엇이 ‘생명의 현실’(reality of life)이냐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 놓여 있습니다. 요한복음 공동체가 씨름했던 문제도 이런 것과 연결됩니다.


도마의 의심

요한복음 20:19절 이하에 따르면 안식 후 첫날, 그러니까 일요일 저녁에 유대인들을 두려워한 제자들이 한 방에 모여 있을 때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마침 그곳에 도마가 없었습니다. 주님을 보았다는 제자들의 말을 듣고 도마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 20:25) 도마의 반응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죽었던 예수님을 만났다는 말을 직접 확인해보지 않고 믿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여드레 후에 예수님이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때는 도마도 있었습니다. 주님은 도마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도마는 초기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신앙형식을 통해서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나이다.” 예수님은 다시 도마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번 나타나셨습니다. 한번은 도마가 없을 때, 다른 한 번은 있을 때입니다. 공통되는 사실은 문이 닫혀 있었다는 것과 예수님의 몸에 십자가 상처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사실은 상충되는 것입니다. 문이 닫혀 있는데 거기를 출입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한다면 우리와 똑같은 존재라 할 수는 없습니다. 몸에 십자가 상처를 그대로 갖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인간과 똑같이 이 세상의 생명 형식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쉽게 말해서 혼령이면서 사람일 수 있을까요? 기체이면서 동시에 고체인 물질이 가능할까요? 기온에 따라서 기체가 액체로 변하기도 하고, 액체가 고체가 될 수는 있지만,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그것이 동시에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이 전하는 보도에 따르면 부활의 주님은 이 두 가지 속성을 그대로 지닌 분이십니다. 밀폐된 공간을 마음대로 넘나들면서 동시에 인간과 똑같이 시공간 안에 존재하셨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현현에 대한 성서의 보도를 세상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며, 더구나 인정하기도 힘들 겁니다. 부활 경험은 제자들의 착각이라고 생각하겠지요.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그리움이 사무쳐서 생전의 주님이 그들에게 환상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복음서나 서신이나 막론하고 기독교 전통은 예수님의 부활 현현을 제자들의 심리적 현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경험된 명백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에게 나타난 예수님은 바로 십자가에 처형당한 바로 그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어느 한 순간에도 소홀하게 다루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들의 부활 경험이 명백하지 않았다면 부활 사건을 굳이 신앙의 중심으로 삼지 않았을 겁니다. 부활보다는 일반적인 사랑과 평화와 정의를, 내면의 자유를 전하는 게 교회를 확장하는데 더 유리했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런 주장은 아무에게도 부담 없이 받아들여졌을 테니까요. 부활 주장은 기독교 공동체를 오히려 위태롭게 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부활을 초지일관 하게 전했습니다. 바울 같은 이도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모든 것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고전 15:14)이라는 그의 진술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생명 현실과 믿음

요한복음은 대략 기원후 90-100 사이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복음서 중에서 가장 늦게 기록되었습니다. 그 시기는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과 초기 공동체의 교우들이 모두 죽었을 때입니다.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요한공동체 안에 도마와 같은 입장을 취하는 이들이 늘어났습니다. 직접 예수님을 확인하지 않으면 그의 부활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기자가 주는 대답은 이것입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보지 못하고 믿는다는 게 무슨 뜻이며, 그것이 가능할까요?

본다는 것은 실증적으로 확인한다는 뜻입니다. 보는 것이야말로 무엇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렇지는 않습니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우리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그 사실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물리학자들의 연구를 통해서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빛의 속도가 초속 30만 킬로미터라는 사실을 보고서가 아니라 들어서 믿을 뿐입니다. 모든 물질이 원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도 우리가 일상에서 볼 수는 없습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또는 부모나 자식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대충만 알뿐이지 완벽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일상에서도 우리는 보지 않고도 믿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위에서 예로 든 것과 예수님의 부활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물리적 사실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일부의 사람들만 진리로 받아들입니다. 전자는 실험을 통해서 반복적으로 확인이 가능하지만 후자는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서로 다른 게 아닙니다. 물리적 사실도 그것이 확실한 것으로 알려지기 전까지는 가설로만 남아 있었습니다. 더구나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에 의해서 주장된 지동설이 처음부터 진리로 받아들여진 게 아닙니다. 그들은 종교재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같은 물리학자들 사이에서도 설왕설래가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역시 그렇습니다. 지금은 기독교인만 그것을 진리로 믿고 있을 뿐이지 다른 이들은 거부합니다. 이는 마치 지동설이 처음 제시되었을 때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부활의 실체가 완전하게 드러나는 순간이 와야만 사람들은 그것을 믿을 수 있을 겁니다. 그 이전까지는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사람들의 선입관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불가능하다는 선입견 말입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경험하는 그런 생명 현상에만 묶여 있어서 사로잡히게 된 선입견입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남녀가 만나서 자손을 번식하고, 자신이 욕망을 성취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생명 현상 안에만 머물러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예수부활과 거기에 의존해서 우리가 미래에 참여하게 될 부활 생명을 인식할 수도 믿을 수도 없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칠 형제가 있었는데, 큰 형이 한 여자와 결혼해서 살다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은 뒤에 율법에 따라서 동생이 형수와 결혼했지만 또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칠 형제가 모두 죽었을 때 이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오해했다고 대답하셨습니다. 부활의 세상에서는 장가와 시집가는 방식으로 생명을 이어가는 게 아닙니다. 하늘의 천사처럼 하나님의 존재 안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부활 생명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막 12:18-27)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부활 생명의 현실을 오해하지 않고 바르게 인식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의 영성이 하나님의 통치에 가 닿을 수 있을까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소극적인 점이고, 다른 하나는 적극적인 점입니다. 소극적인 점은 우리의 선입견을 허무는 일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그 사람은 풍년이 들은 뒤 창고를 넓히고 먹고 그곳에 곡식과 재산을 보관하는 것으로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밤에 네 영혼을 거둬 가면 그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렇게 소유가 생명을 확보하는 길이라는 선입견을 허무는 작업이 쉽지 않겠지만 우리는 그런 작업을 쉬지 말아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적극적인 부분인데,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그의 통치, 그의 약속을 더 깊이 학습하고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학이고 성서읽기이고 공동체 활동입니다. 이는 물리학자가 되기 위해서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물리학과나 유수한 연구소에 들어가 공부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예수 부활에 근거한 공동체가 지난 2천년 동안 지속되어 왔습니다. 중간에 변질되기도 했지만 세례와 성만찬과 설교를 중심으로 하는 예배가 살아 있는 기독교 공동체는 하나님의 구원 통치에 몰두하는 이들의 모임으로 독보적이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그런 전통에 서 있습니다. 이런 전통 안으로 들어간 사람이라면 자기가 직접 부활의 주님을 보지 못했어도 그분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걸 믿는 사람은 그 이름에 힘입어 생명을 얻습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의 결론이기도 합니다.(요 20:31)

여러분, 우리는 복 받은 사람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보지 못하고도 믿을 수 있으니, 이에 더 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혹시 이 사실이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직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오지 않고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중입니다. 믿어지지도 않은 것을 억지도 믿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건 광신입니다. 부부가 서로에게 진실하게 한 평생을 살았다면 보지 않아도 상대방을 믿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그동안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서 있었다면 부활의 주님을 이해하고 믿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생명의 신비가 우리를 사로잡고 있다는 게 그 증거입니다. 샘터교회 교우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도한 제자들이 아니지만 그것을 믿을 수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 ‘복된 믿음’인가요? 주님을 찬양합시다. (2009.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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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태평양시대

April 20, 2009
*.14.7.89

설교가 아니라 신학생에게 강의를 하는 것 같군요.. 발음도 잘알아 듣기가 쉽지 않습니다. 참으로 지겹군요. 정목사께서 다른 목사들의 설교를 맹렬히 비판 한것을 보고  그 비판자는 과연 어떻게 설교하는가 싶어 들어 왔습니다. 이 설교를 듣고 성도들이 어떤 도전을 받을 것인지 심히 걱정됩니다.  성도들은 강의를 듣고 싶어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설교와 강의는 구분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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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닥터케이

April 21, 2009
*.90.149.152

설교가 아니라 선동을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지겹게 들릴수도 있겠습니다. 화끈한거 좋아하는 한국교회 성도들에게는

역시 감성에 호소하는 선동적 설교를 들어야 직성이 풀릴것이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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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3]우디

April 21, 2009
*.15.172.34

저는 신학생이 듣는 강의를 들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 강의는 알지 못합니다만

신학생들이 이런 강의를 듣는다면 참 부럽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또한 이런 강의를 듣고서 설교는 전혀 다르게하는 경우에 대해 아쉬움 또한 많습니다.

발음문제는 아마도 다른 교회들의 쓸만한 녹음 시설과는 달리

영세하고 저렴한 최소한의 녹음장치만을 이용한 것이라 만족스럽지 못하실 수도 있다고 봅니다.

태평양시대님께서도 듣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좋은 녹음이 되도록 노력해봐야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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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김재남

April 21, 2009
*.114.16.4

신학교(학부) 강의 수준을 너무 높게 보실 필요는 없으실 것 같습니다.

성서신학과 같은 경우, 대부분 개론서를 떼는 수준이고

조직신학 또한 사유의 유기적인 관계가 무시된채, 주입식으로 전달만 되고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관심이 있는 친구들은 강의시간보다도 서적을 찾아가며 스스로 공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한 가지 더, 신학교에서 듣게되는 설교, '성공신화'를 부추기는 이야기들 부지기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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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April 21, 2009
*.181.161.185

태평양시대 님,

안녕하세요.

저의 설교를 정확하게 보셨군요.

좋은 지적 감사드리구요,

태평양 님 같이 생각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설교를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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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김재남

April 21, 2009
*.114.16.4

'태평양시대'님, 처음뵙겠습니다.

전 신학생이란 신분으로, 직접 이 설교를 듣고있는 사람입니다.

 요지는, 신학교 강의의 수준과 진행이  이 정도의 수준이 되지 못한다는 점(일단 학부의 수준은 그렇습니다)과

오히려 이러한 말하기가 집중하는데 수월한 사람들도 있다는 점,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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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이삭과리브가

April 21, 2009
*.19.23.51

태평양 시대님

님의 말처럼 정목사님 웅변술이 너무 없습니다

이분께서 나의 군목님으로 계셨기 때문에 누구보다 곁에서 뵈엇습니다

본인 앞에서 이런 글 쓰기가 뭐 하지만 이분에게는 권모술수라는게 없습니다

차라리 권모술수가 좀 썪였으면 설교가 재미라도 있을것 같답니다

 

세월이 흘러 30여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똑 같습니다

앞으로도 천지 개벽은 일어나도 이 분 설교는 절데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중요한것이 있습니다

이분은 꼭 설교원고를 정확히 쓰신다는것입니다

천천히 마음을 열고 이분의 설교를 깊이 읽으면 영성이 깊어 진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실제 정목사님의 설교를 그자리에서 다 이해하고 알아듣기란 내용이 너무 깊고 많기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난 어떨땐 일주일을 계속 읽은적도 있습니다

어쩜 정목사님의 설교는 목회자에게 주어지는 설교여야 할것 같은 때도 있습니다

 

정목사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든 본인의 자유 이시겠지만

이시대에 목회자로서 간사함이 없는 순수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전하시고자

하시는 내용에 귀를 귀울여 보심은 어떨런지요

그 분의 깊은 영성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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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2]머리를비우고

April 22, 2009
*.117.199.100

저도 처음에 정목사님 책 읽고 어떤가 하고 설교 들었다가 왕(?) 실망했습니다.

저런 분이 군목 하셨으면 병사들 모두 잠재웠을 법한데...ㅎㅎ

태평양시대님~!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해 알아 간다는 건 자기를 부정함에서 출발하는 것 아닐까요?

태평양 시대님의 설교와 강의의 구분말고 이런 설교도 있나보다 하고 그저 현상을 한번 보시는 겁니다.

주보에 원고 타이핑해서 전 교인이 설교를 읽는 경향교회(석기현, 원로 석원태)도 있습니다.

그리고 음질이 혼탁해서 홀리 보이스 하신 윤석전 목사님 목소리도 처음에는 지겹다가

나중에 자주 들으니 정겹더라구요... 조금만 더 참고 원고를 꼼꼼히 보시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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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9]이선영

April 20, 2009
*.164.230.58

아직까지 기독교 신앙의 주변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지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복을 받고 있다는 사실 알고 

부활 생명의 현실?을  더 깊이 학습하고 알아가고 싶네요.

여기 다비아에 들어와 설교를 듣고 글들을 읽으면서 생각한 게 있어요.

학창시절엔 죽어라 공부하기가 싫었는데 다비아에 들어와 공부?하는게 재미있기도 하더라구요.

근데 문득 다비아에 들어와 여러가지 글들을 읽는 것도 이것마저 나에 대한 관심이 아닐까.. 하는

참 웃기지요?

그래도 어쩔 수 없는거겠죠.ㅎ

목사님 좋은 봄날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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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April 21, 2009
*.181.161.185

와, 이선영 양이

내 기를 살리는 대글을 올리셨군.

다비아에서 공부하는 게 재미가 있다니,

그게 다비아의 목표라오.

좋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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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1]유니스

April 21, 2009
*.104.195.51

부활절을 나름 화려하게 보내고 부활절 둘째 주일에 이 본문을 대하니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지나갔습니다.

교회력에 따른 본문으로 당연한 것이나 저에게는 의외였습니다. 

(교회력에 따름의 필요성에 처음으로 감동했습니다...사실..)

보통은 부활절이 정점이 되어 그 이후는 분산되어버리지요.

 

지난 주에 그리스도의 육체가 부활체로 쉬프트되는 것의 강력함이 있은 후

부활절 둘째 주일의 본문에서 그리스도께서 행동하심으로 연이어감에

저의 내면도 그것으로 이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의 사역을 반복으로 대하다가

'부활체의 사역'이라는 인식이 설교 중에 생겼습니다.

부활절 주일이 몇 째까지인지 모르겠지만 기대가 됩니다, 그 분의 부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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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April 21, 2009
*.181.161.185

유니스님,

지난 주일 오후에 약사회 모임에 잘 갔다 왔지요?

밥도 안 먹고 가는 바람에 교우들이 찾던데요.

교회력의 죽은 형식이 아니라

우리의 영성을 살리는 종교적 메타포로

확실하게 자리잡게 되는 날이

속이 오기를....

좋은 날이네요.

점심 드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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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April 21, 2009
*.216.132.150

목사님, 믿음이 우리의 의가 아니라 은혜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어제 설교 들으면서 더 확연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신학의 역사, 전통  안으로 깊숙히 들어 갈때,

그 '복된 믿음' 과 함께 하는 거라구요.

또한 '생명의 현실성'을 경험하는 거구요.

그래서 '우리'가 소중하며, 중보기도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주님,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소서! 

 

목사님, 아주 중요한 사실은, 부활은 그 자체로 기독교 신학과 영성의 독보적인 위치군요.

참으로,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고, 섞일 수 없는 '고유함, 유일함'이구요.

그래서 사도바울도 부활이 없으면 우리 믿음이 헛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거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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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April 21, 2009
*.181.161.185

라라 님,

부활이 생명의 현실성이 되는

그 영적 사유의 깊이로

우리가 들어가야만

기독교의 가르침이 성육신이 되겠지요.

우리 밖에서 일어난 그 종말론적 생명의 선취가

우리가 가는 구도의 길에 유일한 빛이랍니다.

생명의 현실과 함께 하는 하루 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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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Isacc

April 21, 2009
*.33.204.43

말씀 잘 봤습니다.^^

저는 평소 바울이나 베드로 수준의 믿음 보다 평범한 도마의 믿음을 갖겠다고 생각하곤 하는 청년입니다. 그 이유는 목사님 말씀대로 '강한 선입견'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또한 목사님 말씀대로 지극히 평범한 것이기도 합니다.

눈(눈 만을 이야기한다기 보다는 감각기관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을 통해 경험적으로 확인할 때 사람들은 보통 진실을 인정합니다.

또한 여러 자연과학의 예를 들어 주셨습니다만, 자연과학의 발달은 결국은 사람들이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도구들이 많이 개발되고 실질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관찰결과를 제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부활을 이해하기 위한 소극적, 적극적 노력을 말씀해 주셨는데요.

또 제가 들은 바로 믿음은 '결단'이라고 하더라구요.  결국 우리는 너무나 평범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도마의 경험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 그건 불가능하기 때문에(다시 오셔서 우리 눈 앞에 나타나신다면 모르겠습니다만) 선입견을 극복하기 위한 '결단'(어떻게 보면 억지로 믿는 믿음이라고 할 수도 있겠어요.. 전 아직 이 둘의 차이를 모르겠습니다.)이 불가피한 것 같습니다. 또한 믿음의 선조들을 통해 믿음을 가지는 적극적 노력 역시 보통 사람에겐 힘들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 경험이 아니니까요...

저는 이런 생각들 속에서 주님의 부활은 '역사적'으로 설명하기가 불가능하고, 논리적으로 이해하기도 '어렵기'때문에 불가지론으로 점차 빠져드는 느낌입니다. 확신을 가지고 주위에 기독교의 진리를 전파하는 것이 버겁다는 느낌입니다. 단지 제 개인적 회심 체험이나 기독교의 윤리, 도덕에 의존하고 있는 것 같아 고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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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April 21, 2009
*.181.161.185

이삭 님,

불가지론은 최소한 지성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한번 빠져드는 생각이랍니다.

그걸 억지로 부정할 필요는 없구요.

언젠가 그것 너머에서 빛나는

생명의 신비가 우리를 조명하게 될 겁니다.

진리의 빛이신 성령이여 우리를 비추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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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5]현수아빠

April 21, 2009
*.234.195.113

어린이집 마당에 일년전에 심어 놓은 나무가 점점 가지만 앙상하게 남아있어

시간나는 데로 버릴까 관심도 없다가 오늘 보니 아주 조그만 새순이 돋아나고 있었네요...

관심과 느끼지 않으면 볼 수 없다는 소리...생명의 신비...

부활을 입으로는 믿는다 하면서도 아직 부활하신 주님을 뵌적이 없지만

우리 아이들속에 더불어 계신 주님을 능히 알아뵐 수 있는 믿음을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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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April 21, 2009
*.181.161.185

일상에서 경험된 생명의 신비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경험되는 생명의 신비가

일치되는 날이 오겠지요.

그 단초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더불어 길을 가는 것입니다.

복된 하루 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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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병훈

April 22, 2009
*.223.90.153

학생들과 모임한다고 못들었던 설교를 방금 읽었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위기에 있다는 말씀이 와닿는군요.. 지금도 가끔 그럴때가 있지만 예수님이 부활한게 아니라면 어쩌지? 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믿음이 약해서요.. 다른 말로하면 참된 생명에 온전히 참여하지 못하기 때문이겠지요..


목사님의 물리학공부 비유에서 지금의 기독교 공동체와 물리학자 사이에 상당한 유사점이 있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현재 기독교 공동체(주로 교회)는 분명히 부활하신 예수님의 참된 생명에 참여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모였으나 현재는 현실적인 성공, 교회가 커지는 것들에 매몰되어 본래목적을 잊고 있을 때가 많고 올곧게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힘들고 외면 받는 것 같습니다. 물리학자들도 본래 물리라는 한자에서 알 수 있듯이 물질이 구성되고 세계가 운영되는 법칙을 알아내는 목적의 학문이었으나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이 직장의 문제들로 좀더 기업에서 쓸 수 있는것 또는 좋은 저널에 논문을 기고하는 것을 목적으로 연구 합니다.. 소수의 물리학자들만이 우주의 원리를 열심히 탐구하고 있고 이분들은 아주 똑똑한 사람들이 아니라면 오랜기간 비정규연구원으로 떠돌거나 해야합니다..

공동체가 커져가면서 그 원래 목적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힘든것 같습니다.. 그래도 참된 생명으로 향하는 여정을 뚜벅뚜벅 걸어가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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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April 22, 2009
*.139.165.36

병훈 군,

지난 주일에는 어린이들을 돌보고 가르치느라

수고가 많았소이다.

그런 경험이 전혀 없었던 걸로 아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소?

교회 공동체나 물리학회나

사람들이 모였으니 거기서 작동되는 메커니즘은

대동소이하지 않겠소?

그런 위험성을 생각하면서

교회도 늘 초심으로 돌아가야겠지.

좋은 하루 되시구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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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병훈

April 22, 2009
*.223.207.78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원래는 걱정이 참 많았습니다..

왜냐면 옛날 중고등부 할 때도 아이들이 제 성경공부를 많이 지겨워 했었거든요..

초등부까지 내려간다면..켁...

근데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항상 무언가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듯 했습니다..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특히 한국이란 사회에서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른이라고 자꾸만 뭔가를 가르치려고만 드는 저를 발견하고 가끔씩 놀라곤 합니다..

이래선 안되게싿 싶어서 기독교 교육 잡지에서 질문 몇개만 뽑아서 산으로 가든 어찌 되든 아이들이 어떻게 반응하나 들어보기로 했습니다..

유니스님이 애들이 이야기도 잘한다고 해서 그말만 믿었습니다.. 목사님도 아시겠지만 몇명모이는 성경공부 시간에 애들이 반응이 없으면 답이 없지요..^^

그랬더니 역시 잡지의 의도대로 되지 않고 산으로 가더군요.. 어떻게든 성경공부다운(?) 결론으로 마무리 지으려 마지막에 비약이 너무 컷지요..ㅎㅎ

암튼 아이들은 별로 재미있어하는 눈치가 아니었지만 전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아마 제 시간은 계속 산으로 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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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라크리매

April 22, 2009
*.177.96.131

목사님 안녕하세요

한주 못뵈었는데 많은 시간이 지난 것 처럼 느꺼지네요...^^

주일 말씀을 묵상 중에 굼금한 점 질문 드리고 싶어요

불교에서 부처를 죽이라는 말은  부처를 도그마하지 말라는 말은 아닐까요

기독교에서도 영성에 해가 되는 예수님을 도그마하는 것을 우려하는 것처럼요

그리고... 불자의 내면이 부처가 되라는 것과 복음서의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고 부활을 묵상하는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닮아가려는 의지와 본질적으로 다른것인가..? 란 의문이 생기네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그분의 일생과 죽음,부활을 묵상하는 기독교인의 취지중에는

예수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의지가 속해있는 것이 많은 부분 차지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저의 평소의 생각이 잘못된 건지 무엇을 모르고 있는 건지...알고 싶네요 목사님 

오늘 목사님 말씀을 읽고 예수님의 부활이 일부 기독교인이 된 유대인의 일부에게만 드러난

역사적 사건이라는 걸 처음 알았어요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건이라는 말의 역사란 단어가 

일상적으로 쓰는 그<역사>와 다른 맥락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된것 같습니다

저는 다시 초신자의 자리로 돌아가야 할것 같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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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April 22, 2009
*.139.165.36

라크리매 님,

부처를 죽이라는 말의 참된 의미는

지적한대로가 옳습니다.

나도 그런 뜻으로 사용했구요.

부처의 말씀을 화두로 붙들고 구도정진하는 불교도들과

예수님의 말씀을 화두로 붙들고 영성의 길을 가는 기독교인들에게

종교적 진리를 향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게 많습니다.

다만 내가 지적한 것은

불교는 내면의 궁극적 진리를 깨우치는 것에 무게가 있는 반면에

기독교는 자기 밖(extra nos)의 예수 사건에

모든 걸 건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 사건에 모든 거는 과정을 통해서

내면의 존재론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분명하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연관해서 <역사>라는 단어를

새롭게 생각하셨군요.

굉장히 중요한 생각이에요.

앞으로 더 나가보시죠.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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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새하늘

April 22, 2009
*.126.124.163

오후에 출근해서 잠시 시간이 나서 오래만에 정목사님 설교 듣기를 해보았습니다.

정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새롭게 부활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네요.

그러면서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기독 신앙 공동체의 고백이 왜 이리 중요한지 알게 됩니다.

이제는 소홀히 하지 않고, 더 열심히 듣도록 할까 합니다.

좋은 한 주간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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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April 23, 2009
*.139.165.36

새하늘 님, 제 설교를 듣고 부활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니

저에게도 위로가 되는 말씀이군요.

좋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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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히로

April 23, 2009
*.11.176.116

부활이라.. 사실 부활절 외에는 부활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이 그렇지 많이 않은 것 같네요.

부활에 대해 다시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력이 참 좋은거 같아요.

교회력을 따르면 정말 다양한 생각들을 할 수 있는거 같아요.

보다 풍성해지는 느낌? ㅎㅎ

저는 한주에 보통 3편정도의 설교를 듣는데, 3편의 설교 모두 절기에 따른 설교라서

같은 테마로 3가지 설교를 듣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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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April 23, 2009
*.139.165.36

히로 님,

부활절 설교를 한 주간에 세편이나 들었어요?

소화불량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부활의 기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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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바을

April 23, 2009
*.178.59.38

바을

처음 인사드립니다.

평소 관심있게 읽고잇습니다. 좋은 설교, 영감있는 유익한 설교 감사드립니다.

매우 유익하고 올바른 교리와 신앙, 영성까지 지니신 정목사님이 귀하심을 익히알고있습니다.

자주 교통함이 좋을듯합니다.

저는 미국 올랜도 지역 개척교회 목사입니다.

요한 복음 20장 19-31절의 본문은 설교역시 아주 좋습니다.

저는 또다른 측면에서 바라보았는데 도움이 되셨으면...

주제넘게 (정말?)

요20:19-31절은 아마 도마를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임을 알리고 싶어하셨을것같습니다.

그리고 부활신앙이란 죄사함의 구원 (칭의)를 넘어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해주는 제사장적인 삶을 가르치려는데 한듯합니다.

주제넘게 죄송합니다.

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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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April 23, 2009
*.139.165.36

예, 바을 님,

주신 말씀을 잘 기억하겠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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