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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왜 선한 목자인가?

부활절 조회 수 14608 추천 수 0 2009.05.04 16: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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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한복음 10:11-18 
 

예수는 왜 선한 목자인가?

(요 10:11-18)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우리의 태도는 질문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에 트집을 잡거나 시비를 걸라는 말이 아닙니다. 트집은 바리새인들의 주특기였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칠까요, 말까요 하는 질문은 트집입니다. 질문은 트집이 아닙니다. 질문은 진리로 들어가는 문과 같습니다. 실제로 궁금한 것이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합니다. 궁금한 게 많다는 것은 그의 영혼이 진리에 공명한다는 증거입니다. 아이들에게 질문이 많다고 하지요? 별이 왜 반짝이는지,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왜 남자와 여자가 있는지, 왜 바람이 부는지 등등, 모든 게 궁금합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이 세상에 길들여지면 질문을 잊어버립니다. 길들여진다는 것은 자신이 뭔가를 알고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신앙에 길들여지면서 질문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들어가려면 여러분은 이런 질문의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런 질문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중의 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를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고 믿습니다. 이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물론 틀린 생각이 아닙니다. 그러나 조금 다른 방향에서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왜 십자가 처형이라는 방식으로 인류를 구원하셨을까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었을 텐데요. 예수님이 공자님이나  부처님처럼 천수를 다 살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면 오히려 더 빨리, 더 확실하게 인류 구원이 이뤄지지 않았을까요? 이에 대한 최종적인 대답은 종말이 이르러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지금은 잠정적인 대답을 성서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기자가 어떻게 대답하는지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목숨을 버린다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님을 ‘선한 목자’로 표현합니다. 이런 표현은 공관복음에는 없는 요한복음의 독자 전승입니다. 시편 23편은 여호와를 ‘나의 목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요한복음을 읽는 독자들은 이 시편을 연상했을 겁니다. 여기서 선한 목자와 삯군이 비교됩니다. 삯군은 도둑이나 마찬가지입니다.(10절) 겉으로는 양을 지킨다고 하지만 그것은 단지 돈 때문입니다. 삯군은 이리가 오면 양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오늘 본문에 ‘버린다’는 단어가 11절, 15절, 17절, 18절에 반복해서 나옵니다. 그 목자가 선한 목자인지 삯군인지를 분간할 수 있는 길은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가 아니면 달아나는가에 있습니다. 여기서 이 목자가 선하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칼로스’(선한)는 ‘참 빛’(요 1:9)에서 사용된 ‘참’(알레티노스)이거나, 또는 ‘신적 인간’이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선한 목자가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는 이 사실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전쟁에 나갔다가 폭탄에 맞아서 어쩔 수 없이 죽는 것이 아닙니다. 죽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가 막다른 골목 안에 빠져들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서 스스로 자기 목숨을 내어줍니다. 요한복음이 선한 목자 표상을 통해서 말하려는 것은 예수님이 남에게 떠밀려서 십자가에 달린 게 아니라 스스로 내어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의 이런 대답은 초기 기독교가 풀어야 할 근본적인 질문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에 아무도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의 구원론적 차원을 이해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십자가는 모두에게 배척받았습니다. 바울에 따르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유대인들에게 거리낌의 대상이고,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고전 1:23) 그것은 종교적인 차원에서나, 정치적인 차원에서나, 철학적인 차원에서나 부끄러움의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런 죽음을 원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공관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도 십자가의 죽음을 피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사장들이 보낸 군인들에게 체포당하기 바로 직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정말 예수님은 십자가를 피하려고 했을까요? 마지못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걸까요? 이에 대해서 요한복음 그렇지 않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가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듯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설명이 서로 다른 것처럼 보입니다. 공관복음은 십자가를 피하려고 한 것으로, 요한복음은 스스로 택한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수동적으로 묘사되었고, 요한복음에서는 능동적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겉으로는 달라보여도 실제로는 다르지 않습니다. 십자가 사건 앞에서 취한 예수님의 태도에는 수동성과 능동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합니다. 양자가 긴장을 이루고 있습니다. 미래의 불확실성이라는 차원에서는 수동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십자가의 죽음은 모든 것이 끝장나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는 길이 아니라 생명을 포기하는 길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자신의 선포와 행위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을 피하고 싶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공관복음서에서도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라고 기도하고 그 운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자신으로서는 불확실하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확실하다는 사실을 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자하시다는 사실을, 하나님 안에서만 생명이 보장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자세로 십자가를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능동적인 사건입니다. 공관복음은 수동성에 포커스를, 요한복음은 능동성에 포커스를 두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수동적 능동성이며, 능동적 수동성입니다. 여기에 참된 신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이것을 독특한 방식으로 진술했습니다. 예수님에게 고유한 ‘권세’가 있다고 말입니다. 그는 목숨을 빼앗긴 분이 아니었습니다.(18절) 물론 형식적으로만 본다면 산헤드린 공의회와 로마 총독이, 그리고 그들에게 설득당한 유대인 민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시켰습니다. 복음서 기자는 역사를 그렇게 평면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목숨을 건드린 자도 없고, 건드릴 자도 없습니다. 그 목숨은 오히려 예수님의 몫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습니다. 그런 권세가 있는 분이 결국 자기 목숨을 버렸습니다. 이게 말이 안 되나요? 너무 현학적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앞에서 질문한 내용을 다시 기억하십시오. 말씀 한 마디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왜 말씀 한 마디로 세상과 인류를 구원하지 않으시고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다는 방식을 취하셨을까요? 그렇다면 그분의 전지전능이 손상되는 게 아닐는지요. 그런 식으로만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결코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능, 권능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분의 전능은 오히려 무능으로 나타납니다. 그분의 높으심은 오히려 낮추심으로 나타납니다. 거꾸로도 똑같습니다. 그분의 낮추심이야말로 그분의 높으심입니다. 그분의 무능이야말로 그분의 전능입니다. 초라한 말구유에 누운 분이 바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에서 전능의 하나님이 바로 십자가에 달렸다고 설명했습니다. 저주의 상징이었던 십자가에 하나님이 계시된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 하나님이 바로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십니다. 


풍성한 생명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 주셨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게 끝났다면 그것은 결정적인 사건이 되지는 못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요 10:17) 다시 목숨을 얻었다는 사실이 없다면 버리는 것은 일종의 휴머니즘의 실현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박애주의 정신에 따라서 산 사람은 많습니다. 때로는 부모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도 있고,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친구를 위해서, 또는 어떤 정치적 신념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기도 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거룩한 사람들을 순교자라고 합니다. 그들은 신앙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죽음은 그저 숭고한 죽음일 뿐이지 예수님의 죽음과는 비교될 수 없습니다.

무엇이 다를까요? 우리는 왜 순교자들을 따르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를까요? 예수님만이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그 부활로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분만이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그분을 통해서 우리는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허락하십니다. 그분만이 양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림으로써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풍성한 생명이라는 말은 자주 들었지만 그게 실질적으로 마음에 와 닿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너무 막연하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관해서 깊이 생각하는 건 골치 아프니까 모든 걸 접어두고 그저 열광적으로 믿음 생활을 하든지, 아니면 단지 교회생활에 매달려버리고 맙니다. 교회에서 좋은 사람 만나고, 재미있는 행사를 하고, 또 경우에 따라서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비중을 두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처럼 풍성한 생명을 모른 채 주님을 선한 목자로 따르는 시늉을 한다는 건 불행한 일입니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건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그 관계가 분명해야만 풍성한 생명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목자가 양을 알아야 하고, 양이 목자를 알아야 합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잘 압니다. 좋은 양은 목자를 잘 압니다. 양쪽이 서로 알아야만 풍성한 생명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아는 게 쉽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안다는 것은 마치 하나님이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14,15절) 요한복음이 말하는 안다는 차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그런 차원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안다고 해봐야 상대방의 신상명세에 관한 것뿐입니다. 부부도 그 이상을 알기 힘듭니다. 사람을 너무 자세하게 알려고 노력하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알았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모른다는 사실만 확인될 뿐입니다. 실망할 일만 일어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얼마 전에 검찰 소환 조사를 받았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박연차 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가깝게 지냈던 그들이 서로 몰랐다는 것, 그래서 실망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안다는 건 기본적으로 성령의 일입니다. 성령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만이 사람의 중심을 아십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그 중심에서 안다는 것은 성령을 안다는 의미입니다. 초기 기독교가 오순절 성령 강림 경험 뒤에 방언, 즉 새로운 언어를 말하고, 예수님을 세상에 변증하기 시작했다는 사도행전의 보도도 바로 이것을 말합니다. 성령이 바로 기독교의 인식론적 통로라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성령이여, 우리에게 오소서, 하는 기도를 드려야합니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는 선한 목자가 주시는 풍성한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풍성한 생명’이 무엇일까요? 물론 교리 문답 식의 대답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풍성한 생명은 곧 구원을 얻는 거라고 말입니다. 옳은 대답이지만 그것은 또 구원이 뭐냐 하는 질문으로 이어질 뿐입니다. 이 땅에서도 행복하게 살고 죽어서 천당 가는 게 바로 풍성한 생명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행복이 무엇인지, 천당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또 따라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기쁨과 자유, 평화가 바로 풍성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옳은 대답입니다. 여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기쁨, 자유, 평화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얻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주시겠다고 하신 풍성한 생명은 무엇일까요?

여러분, 그것은 약속입니다. 그 풍성한 생명은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진 종말론적 약속입니다. 그것이 아직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 현실로 완성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 풍성한 생명은 잔치와 같습니다. 잔치집의 처녀들은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 신랑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이 처녀들이 재촉한다고 해서 신랑이 빨리 오지 않습니다. 신랑이 오기 전까지는 잔치가 시작될 수 없습니다. 그때까지는 지루한 기다림이 있습니다. 그 지루한 기다림이 풍성한 생명을 약속으로 받은 우리 기독교인들의 인생입니다.

오늘 기독교인들이 착각하는 게 있습니다. 풍성한 삶을 현재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아무리 신앙이 좋아도 힘듭니다. 다른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실망할 때도 많습니다. 허무할 때도 많습니다. 우리가 교회 공동체에서 누리는 생명도 역시 제한적입니다. 공동체에 대한 기대가 크면 실망이 더 클 수도 있습니다. 풍성한 생명과 오늘 우리의 삶이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풍성한 삶을 기다리는 사람은 이 허무한 삶에서 영적 긴장감을 안고 삽니다.

오늘은 부활절 넷째 주일입니다. 부활의 주님만이 우리의 선한 목자이십니다. 왜 그럴까요? 그분만이 완전한 생명을 얻으셨으며, 그분만이 우리에게 부활의 풍성한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부활 생명이 우리에게 현실로 드러나는 그날까지 희망을 안고 이 삶을 견디고 헤쳐 나갑시다. (20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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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히로

May 04, 2009
*.12.117.114

설교를 통하여, 그 동안 당연하다고 받아들였던 사실을 다시금 질문해 보게 되는 군요.

처음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을때는, 수천 수만가지의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이제는 점점 질문이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제 신학공부를 한지 얼마 안되었지만요..)

처음에 물었던 질문들에 대해 지금은 알고있다고 착각하고 있다는거 맞는 것 같습니다.

다시한번 당연하다고 여긴 것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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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May 05, 2009
*.139.165.36

히로 님이 신학생인가보구료.

이왕 이 길에 들어섰으니

모든 걸 던져서 깊숙한 곳까지 가보시게나.

마치 금맥을 따라 들어가는 광부처럼...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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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모래알

May 04, 2009
*.116.154.86

"부활생명이 현실로 드러날 그날까지 희망을 안고" ..

어떤 희망? 

재림하실 주님에 대한 약속?

종말론적 약속?  풍성하신 생명에 대한 약속?

약속은 미래.  현재의 삶은 기다림?  

질문을 자꾸 해야 한다 하셔서..  ^^

 

일주일 내내 비가 예보돼 있어요. 

초록빛들이 마구마구 올라오는 월요일 아침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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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May 05, 2009
*.139.165.36

모래알 님은 참 좋은 학생이군요.

여기도 초록 빛이 나날이 짙어집니다. 

비가 좀 충분히 와야 하는데

며칠 전에 찔금거렸을 뿐이에요.

여전한 부활절기의 기쁨이

충문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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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May 07, 2009
*.229.154.97

목사님, 풍성한 생명이 종말에 가서야 완전히 드러날 수 있다는 말씀은 

풍성한 생명이 바로 구원이라고 보시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 생명을 이 땅에서 다 누리며 살아야 된다는 조바심을 갖고 있었네요.

아마 그래서 우리가 더 풍요롭고 반듯하게 살고자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거 아닐까 싶어요.

그런데, 이 '믿음의 강화'는 자기 집중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목사님 메세지의 핵심은 자기연민, 자기집중에서 빠져 나오라는 것인데,

바로 죄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거지요?  그래서 주님의 은총이 필요한 거구요.

목사님께서 우리가 구해야 할 기도는 "키리에 엘레이송"이라고 늘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주님을 온전히 알 때, 그 날 까지 이 기도는 멈출 수 없겠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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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May 08, 2009
*.139.165.36

라라 님은 이제 기독교 신앙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수준에 도달했군요.

풍성한 생명, 구원, 종말, 자기 집중, 죄로부터의 자유, 은총, 키리에 엘레이송..

이런 개념을 연결해서 생각할 줄 안다는 게 그 증거지요.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는 생명은 아무리 풍성하다고 해도

부분적인 게 불과하다는 건 분명합니다.

그래도 그게 참으로 소중한 거지요.

좋은 주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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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May 09, 2009
*.229.154.97

목사님, 격려의 말씀 감사합니다.

제가 기독교의 본질을 이렇게라도 근접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목사님의 가르침 덕입니다. 

그동안 제가 기독교에 대해서 얼마나 옹색하고 초라한 식견을 갖고 있었는지,

부끄럽지만, 사실이니까요. 

이제, 이 말씀들이 제 삶에서 아름답게 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박제된 지식이 아니라, 펄떡펄떡 살아서 늘 말을 걸어 오는,

'복된 말씀'이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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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신학도

May 07, 2009
*.39.0.167

성경여러곳에서 우리는 '양'으로 얘기한다.

그래서 그런지 아무렇지도 않게 목사를 목자에 비유하고 교인들은 양에 비유한다.

글쎄,,,

목사와 교인의 관계가 목사와양의 관계와 같다는 얘기를 할수있는 성경적인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시편중에서 가장 유명한 시편인 시편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사실 정도는 안다. 하지만 이때의 목자와 양은 목사와 교인의 관계가 아닌 하나님과 우리관계다. 누가복음 14장에 길잃은 어린양의 비유가 나온다. 이때 어린양을 찾아 헤매는 목자는 당연히 예수님을 말한다.

물론

작은 예수가 되어 예수님의 자취를 따라야 할 목사로서 친히 목자가되신 예수님을 본받아야한다는것은 백번 지당하다 하지만 목사만 예수를 믿는것이 아니다 목사만 작은예수여야하는것이 아니라 믿는사람이면 누구나 작은 예수여야한다. 결국 목사가되어서 양을 돌보아야 할 책임은 목사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진 책임이 아니라 교인이면 누구나 주어진 책임디.

 교인들만 양인것이 아니라 목사역시 한마리 어린양으로 주님께 친히 양육되어야 하며 목사만 목자인것이 아니라 교인들 역시 목자가되어 자기보다 신앙이 여린 사람들을 볼보아야한다.

그런데 교회에서 흔히 얘기하는것처럼 목사를 목자라고하고 교인들을 양이라고 하는말에는 교인들의 신앙분발을 자극하는 요소가 전혀없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습도 없고 하나님의 찬양하는 모습도 없고 인간이 얼마나 얼마만큼 어리석은지를 자책하는 모습도 없고 오직 하나님께만 복종하겠다는 결단도 없다.

 고작해야 '우리가 뭐 아나요'그저 목사님이 알아서 하셔야지요'하는 교묘한 게으름만 있다.

목사는 목자가 양을 푸른초장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는것처럼 늘 살찐 꼴을 먹여야하고 목자가 양을 추위와 더위에서 보호하고 이리떼의 공격에서 지키는것처럼 교인들을 돌보아야 한다는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지극히 정상적인 얘기 같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다 원색적으로 표현하면 자기는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신앙생활이 되게 알아서 해달라는 말이다.

 자기는 그냥 졸졸 따라만 갈테니까 자기한테 신자답게 살라거나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복잡한 얘기하지말고 자기편하게 해달라는 뜻이다. 아마 교인들이 목사에게 바라는것이 있다면 일단 얘배때마다 말씀을 들려주는 것과 애가 돌아라도 되면 찾아 와서 "머리가 될저언정 꼬리가 되지......."이사를 하면 "더큰 축복 해달라는 기도하는것

신앙 적인 갈등있으면 "그정도면 잘한다 위로 하여 신앙적인 자책감에서 벗어나게 해주는것

애가 고3되면 평소 실력보다 더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해서 신령한 방법으로 좋은 대학에 합격 하게

해주는것 사소한 불만이라도 있으면 그때마다 찾아와서 토닥거려 주는것 등등일 것이다.

알기 쉽게 얘기하면

예배시간이 지루 하지 않게 귀를 즐겁게 해줄것과 자기를 챙겨줄것과 자기에게는 좋은 일들만 있게 해달라는 기도해 줄것등을 바라다는 뜻이다

단언 하거니와 목사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귀를 즐겁게 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지 를 설명하는 사람이고 신앙적인 삶을 권면 하는

사람이다

큰집 이사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 본향집이 있음을 잊지않고 알려 주는 사람이고 혹시

자녀가 재수 삼수를 대학에 못가더라도 신앙에 침해받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얘기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자기들은 양이라서 죄다 응석만 부리고 자기응석을 받아 줄것을 뻔뻔스럽게 요구한다.

목사는 교인들의 신앙생활을 대신해주는 사람이 아니다 교인들로 하여금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착각을

즐길수 있게 해주는 사람도 아니다.

굳이 얘기하자면 교인들의 신앙성장과 신앙유익을 위한 소모품에 비유하는 것이 훨씬 더 도움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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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May 08, 2009
*.139.165.36

신학도 님은 생각이 분명하시군요.

목사를 선한 목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나 보군요.

그런데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성서와 기독교 신앙의 깊이를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니까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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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새하늘

May 08, 2009
*.126.124.163

풍성한 삶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통해 지금이 겪고 있는 어려움과 고난을 헤쳐 나가자는 말씀에 희망을 품어 봅니다.

시대가 탁 할수록 모두가 양분되어 가는 현실에 많은 이들이 절망과 고독의 노래를 부릅니다.

대한통운 노조 지부장의 죽음과 용산 참사 등에서 벌어지는 일들에서 절망만이 보입니다.

오늘 경향신문에서 서울 한강로 용산 참사 현장에서 문정현 신부님외 두분 신부님들이 5/5어린이 날에 전경차로 둘러 쌓인채 미사를 집전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외면과 들끊는 분노앞에 절망을 하지만, 신부님들을 통해 생명의 구주을 깨닫습니다.

참된 선한 목자인 예수님이 상처 입은 이들에게 평화와 안식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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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6]정용섭

May 08, 2009
*.139.165.36

새하늘 님,

속상한 일들이 많지요?

그런 역사 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만 해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살아가는 겁니다.

역사는 뒷걸음 치지 않을 거에요.

지금 그런 모습이 보여도 잠시 뿐이랍니다.

인내심을 잃지 말고 그날이 오기를 기다려봅시다.

좋은 주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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